#039화.
“김 다 빠졌는데 뭘 계속합니까.”
먼저 피한 쪽은 낭호였다.
그전까지는 이성보다 감정이 앞선 상태였지만 여소정과 장여진의 등장으로 머리가 많이 차가워져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잘한 것도 없으니 이쯤에서 물러서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저도 그만하겠습니다.”
상천이 바닥에 던져 놓은 검집을 주워 검을 꽂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무기를 거두었고,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막상 멍석을 깔아주니까 못하는군요. 재미있는 구경할 줄 알았는데. 아쉽네요.”
장여진의 말에 낭호가 슬쩍 그녀를 쳐다보고는 말했다.
“원래 다 그런 법입니다.”
그렇게 말한 낭호가 상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실력, 쓸 만하군.”
“형씨도.”
상천의 말에 낭호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곧 그 웃음은 파안대소로 바뀌었다.
“하하하하하!”
낭호가 기분 좋게 웃었다. 한참을 웃은 그가 상천을 보며 말했다.
“앞으로 재밌겠어.”
그렇게 말한 그가 상천을 지나쳐 청운대 숙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상천 역시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장여진과 여소정을 바라보았다.
“여러분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오늘은 날이 아니군요. 내일 다시 오겠어요.”
그렇게 말한 장여진이 몸을 돌려 여소정을 데리고 돌아갔다.
그러자 상천과 낭호의 대결을 구경하던 대원들도 하나둘씩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숙소로 들어가던 녹엽이 서기종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슬쩍 물었다.
“계속했으면 누가 이겼을까? 진짜로 저 꼬마가 이겼으려나? 어떻게 생각해?”
하지만 서기종은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숙소로 돌아갔다.
“쳇! 반 수 앞서면서 센 척하기는.”
그렇게 투덜거린 녹엽 역시 숙소 안으로 자취를 감췄다.
모두가 숙소로 돌아가고 연무장에 혼자 남아 잠시 이것저것 생각하며 서 있던 상천도 발걸음을 돌려 숙소로 돌아갔다.
자신의 처소로 발걸음을 옮기던 장여진이 뒤따르는 여소정에게 물었다.
“그 사람, 제법이지?”
“예. 설마 그 낭호와 호각을 이룰 줄은 몰랐습니다. 낭인들 사이에서는 제법 이름을 날린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여소정이 감탄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장여진과 여소정은 두 사람의 대결이 시작될 때부터 기척을 숨긴 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흥미진진하게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장여진은 상천과 낭호가 지친 기색을 보이자 더 이상 놔두면 큰일 나겠다는 생각에 여소정을 먼저 보내 상황을 마무리시킨 것이다.
“낭호 말대로 앞으로 재밌어지겠어. 부대주는 어떻게 생각해?”
장여진의 물음에 여소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주님은 재밌겠지만 저는 죽을 맛입니다.’
여소정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여진은 연신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낭호와의 대결이 있고 난 후로 청운대원들의 상천에 대한 태도가 확 달라졌다.
녹엽은 대놓고 상천에게 친한 척을 했고, 서기종과 낭호를 제외한 나머지 대원들은 상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당연한 것이 녹엽과 서기종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낭호와 그 정도 호각을 이룰 실력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합산도문의 문도로서 청운대에 소속된 ‘전우’이지만 괜히 상천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강한 자가 최고인 무림의 이치.
그 이치에 가장 충실한 세계가 바로 낭인들의 세계였고, 그 이치에 따라 상천의 대접도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봐, 소형제! 소형제는 어디서 왔어? 광서성에서는 못 본 얼굴인데?”
녹엽이 상천의 옆에 붙어 앉아 환한 표정으로 물었다.
“귀주성에서 왔습니다.”
“귀주성? 그럼 그렇지. 그러니 내가 몰랐지. 내가 이쪽 사람들은 빠삭하게 알고 있거든.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광서성까지 온 거야?”
갑자기 상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녹엽은 귀찮을 정도로 상천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처음에는 녹엽의 그런 관심이나 살가운 태도가 반가웠던 상천이지만 점점 가면 갈수록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이 형씨도 말 참 많으시네.”
계속해서 녹엽이 이것저것 코치코치 캐묻자 상천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해서 낭호에게처럼 시비조로 말하지는 않고 그저 푸념을 늘어놓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녹엽이 낭호보다 강하다는 것은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굳이 그런 일을 또 벌여 분위기 흐려 봤자 좋을 것도 없었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고는 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그 말이 녹엽의 귀에 안 들렸을 리가 없다.
“아, 갑자기 귀찮게 했지? 미안해, 미안해. 하하! 소형제가 너무 신기해서 말이지. 그런데 왜 이번 무투대회에 안 나왔나? 그런 실력이면 우승에 도전해도 됐을 텐데 말이지. 아, 물론 내가 있으니 그것도 쉽지는 않았겠지만.”
또다시 이어진 녹엽의 물음에 상천이 인상을 찌푸리고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하……. 참가 신청을 못해서 못 나갔다.”
기분이 나빠진 상천이 녹엽에게 반말을 했다. 해놓고서는 상천도 속으로 아차 싶었다.
하지만 녹엽은 전혀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었다.
“하하하! 재밌는 친구일세. 하하하!”
녹엽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강하면 그만인 낭인 세계에서 나이의 많고 적음은 상관이 없었다.
문파에 속한 사람들이야 배분이니 하는 것을 따져가며 존대를 하지만 낭인들 사이에서는 그런 것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녹엽 역시 상천의 반말에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귀찮게 해서 미안하네, 소형제. 어쨌든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그렇게 말하며 녹엽이 손을 내밀었다.
잠시 그 손을 바라보던 상천이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녹엽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날 밤.
상천은 녹엽의 부름에 숙소 밖으로 나갔다. 숙소 밖에는 녹엽 외에도 서기종과 낭호가 있었다.
상천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왔어?”
녹엽이 넉살 좋은 미소로 상천을 반겼다.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상천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왜 불렀소?”
상천의 물음에 녹엽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나가서 술 한잔하자고.”
그의 말에 상천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갑자기 웬 술이오? 그리고 그냥 이렇게 막 나가도 되오? 내보내 주지도 않을 것 같은데.”
“대주님께 다 허락받은 일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렇게 말하며 녹엽이 청운대주를 상징하는 동패를 꺼내 흔들었다.
“봤지? 자, 이제 가자고.”
녹엽이 상천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정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서기종과 낭호 역시 그 뒤를 따랐다.
“캬〜! 이게 얼마 만에 맛보는 바깥 공기냐!”
합산 근처에 있는 마을에 도착한 녹엽이 연신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소리쳤다.
서기종과 낭호 역시 녹엽처럼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지만 그와 비슷한 마음이었다.
자유롭게 살던 그들에게 어딘가에 구속되어 생활하는 것은 처음부터 곤욕이었다.
다만 상천만이 녹엽에게 붙잡혀 거의 끌려가고 있는 상황인지라 표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네 사람은 어느새 주막 앞에 서 있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상큼한 주향을 음미하던 녹엽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 들어가자고!”
그렇게 말한 녹엽이 상천을 끌고 주막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막에 들어간 네 사람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모로 보이는 노파 한 명이 그들 자리에 퉁명스럽게 술 한 병과 사발 네 개를 놓고 갔다.
“여기는 주문도 안 했는데 그냥 막 술을 내오나?”
그렇게 말한 녹엽이 술병을 들어 주향을 맡아 보더니만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노파 성격은 좀 그래도 주향은 끝내주는구나. 그냥 마시자고.”
그렇게 말한 녹엽이 서기종부터 차례로 술을 따라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술이오?”
자신의 사발에 술을 받으며 상천이 녹엽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를 한번 힐끗 쳐다본 녹엽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술을 꼭 이유 있어야 마시나? 그냥 먹고 싶으면 마시는 거지. 못 마신 지도 꽤 됐고.”
“그런 이유로 대주님이 외출을 허락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의 대답에 서기종이 슬쩍 물었다.
그러자 사발을 입으로 가져가던 녹엽이 슬쩍 서기종을 한번 쳐다보고는 입속으로 술을 들이켰다.
“캬〜! 맛 죽인다! 그렇지! 이거야! 으하하하! 거 눈치 하나는 빨라 가지고. 내가 뭐라고 하고 허락받았는지 궁금해?”
그렇게 말한 녹엽이 상천과 낭호를 한 번씩 쳐다보고는 말했다.
“이 두 사람 핑계를 좀 댔지.”
“우리 핑계?”
낭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말이 좋아 핑계지 쉽게 말하면 자신과 상천을 팔아 밖으로 나올 구실을 만들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일 때문에 두 사람이 아직 서먹하니 밖에 나가 술 한잔하면서 좀 친해지는 계기가 필요할 것 같다고 했지.”
녹엽의 말에 서기종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랬더니 대주가 순순히 내보내 줬고?”
“그럼! 당연하지! 이런 거 보면 우리 대주도 철부지 막내딸은 아니란 말이야.”
녹엽이 ‘나 이런 사람이야!’ 하는 표정을 지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어찌 됐든 이렇게 나온 거, 얼른 술이나 마시고 들어가지.”
낭호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 술이 든 사발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서기종과 상천 역시 사발을 들어 올렸다.
“에헤이〜! 이 사람들, 재미없게!”
녹엽의 말에 다들 왜 그러냐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 내가 술이 먹고 싶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진짜로 두 사람 계속 이렇게 어색, 서먹, 뻘쭘하게 지낼 거야?”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거요?”
상천의 물음에 녹엽이 다시 자신의 사발에 술을 따르고는 잔을 들어 올렸다.
“말 그대로 오늘 마시고 서로 풀자는 거지. 응? 응? 좋든 싫든 계속 같이 지내야 하는데 이왕이면 풀고 잘 지내면 좋잖아?”
그렇게 말하며 녹엽이 상천과 낭호를 한 번씩 바라보았다.
그 때문에 서로 눈이 마주친 상천과 낭호는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이봐, 이봐. 눈만 마주쳐도 어색하면서. 뭐, 앙금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지난번에 찝찝하게 끝냈으니까 그냥 이런저런 얘기 하면서 풀어버리자고. 알겠지? 위하여!”
녹엽이 사발을 높이 들며 외쳤다. 그러자 나머지 세 사람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런 말은 또 어디서 주워들었나?”
서기종의 물음에 녹엽은 오히려 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뭐야, 이런 거 한 번도 안 해봤어? 진짜야? 나만 해봤나? 응? 이 사람들 인생 참 재미없게 살았네. 쯧쯧.”
그렇게 말하며 녹엽이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았지만 아무도 호응을 해주지 않았다.
결국 세 사람은 녹엽에게 호응하지 않고 조용히 사발을 입에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