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월검제-38화 (38/141)

#038화.

상천이 청운대에 합류한 첫날.

첫날은 큰 무리 없이 지나갔다. 이틀 전 있었던 장여진의 만행(?) 때문에 그 분노를 고스란히 상천에게 집중시키던 대원들은 어쩐 일인지 상천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다음날.

드디어 그들이 상천을 찾기 시작했다.

“신입! 물 좀 가져와!”

“신입! 여기 청소 좀 해!”

“신입! 이거 좀 버리고 와라!”

충분히 자신들이 해도 되는 것을 무조건 상천을 불러 시키고 있었다.

처음에는 상천 자신도 처음 왔으니 분위기도 익혀야 하고 눈치도 보여 시키는 대로 했지만 이건 도가 지나쳤다.

다른 사람들은 무공 수련을 하거나 침상에서 잠을 자거나 자신들끼리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런데 충분히 자신들이 해도 되는 일을 굳이 상천을 불러다가 시키고 있었다.

게다가 그럴 때가 아니면 아무도 상천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며칠 전 일 때문이기도 했고, 상천이 스무 살이라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애를 데리고 뭘 하겠다고.’

‘애랑 얘기해서 뭐해?’

하는 생각들이 그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꾹 참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던 상천도 점점 참기 힘들어졌고, 결국에는 폭발하고 말았다.

“신입! 여기 청소하랬잖아!”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꾸벅꾸벅 졸던 대원 한 명이 잠이 좀 달아났는지 눈을 뜨고는 습관처럼 상천을 찾았다.

“아! 진짜!”

다른 대원의 물 가져오라는 소리에 물 잔에 물을 따라 들고 가던 상천이 잔을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뭐야, 저거! 야, 너 미쳤냐? 돌았어?”

물 가져오라고 시켰던 대원이 상천을 향해 눈을 부릅뜨며 험악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상천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니들은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왜 자꾸 나한테만 시키고 지랄이야!”

상천이 세게 나갔지만 그런 것에 겁을 먹을 그들이 아니었다. 낭인 바닥에서 제법 잔뼈가 굵은 그들이 이제 스무 살이 된 상천의 욕지거리에 겁먹을 리가 없었다.

“어이, 신입! 네가 그런다고 여기서 겁먹을 사람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괜히 심기 어지럽혀서 줘 터지지 말고 시키는 거나 똑바로 해라. 응?”

뒤쪽에서 들려온 가느다란 목소리에 상천이 잔뜩 인상을 쓴 채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한바탕 무공 수련을 하고 들어오는, 목소리만큼이나 호리호리한 사내가 서 있었다.

‘낭호(狼虎).’

상천은 그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는 무투대회 준결승에서 녹엽에게 패한 낭호였다.

사실 처음 이곳에 온 날부터 상천은 그들 모두를 알아보았다. 모두가 무투대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이고 상천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청운대에 도착해서 그들을 보았을 때 상천은 잔뜩 들떠 있었다.

자신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그들과 일 년 동안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불과 하루 만에 가지고 있던 들뜬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줘 터지긴 누가 터져? 내가? 형씨, 좀 웃기는데?”

상천이 입가에 조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런 상천의 도발에 녹엽과 서기종은 흥미롭다는 듯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곳에서 낭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결승에 올랐던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너,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낭호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살기를 담아 말했다. 지금 이 상황이 치욕스러웠는지 낭호는 몸까지 부르르 떨고 있었다.

“내가 죽고 싶댔어?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형씨, 귀 먹었어?”

“킥킥!”

“크크크!”

녹엽과 서기종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런 그들의 웃음소리가 낭호를 더욱 자극하고 있었다.

‘저 새끼들이…….’

녹엽과 서기종은 반 수 차이로 서기종이 미세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거의 동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하지만 낭호는 녹엽에게 한 수 내지 두 수는 밀리는 상태였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이기지 못하는 상대.

그러다 보니 낭호는 그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런 그들이 지금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어린놈 하나 때문에.

낭호의 이성이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죽여주마. 나와라.”

그렇게 말한 낭호가 몸을 홱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쫄 거 같아?”

그렇게 말하는 상천에게 녹엽이 한마디 했다.

“꼬마야! 뒈지기 싫으면 나가서 무릎 꿇고 빌어라! 안 그러면 진짜 죽는다!”

녹엽의 충고를 뒤로하고 상천은 낭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청운대 앞에 있는 연무장.

낭호와 상천은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연무장 주변에는 다른 대원들이 저마다 편한 자세로 모여 앉아 흥미진진한 눈초리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상천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무투대회에서 보았던 낭호의 무공을 떠올렸다.

남녕에서 무투대회를 보면서,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인상 깊었던 사람들의 무공을 되짚어보았고, 자신의 무공과 비교해 보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가상의 비무도 해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상천은 낭호의 무공에 익숙한 상태였다.

낭호는 자신의 앞에서 눈을 감고 서 있는 상천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새파란 애송이가 자신을 도발하고 있다.

감히 낭인들 사이에서 이름난 낭호를.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에게는 제대로 된 범의 무서움을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낭호의 지론이었다.

낭호가 자신의 무기인 연검을 바닥에 늘어뜨렸다.

연무장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알고 있으리라.

낭호의 저 연검이 허공을 날아다니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그리고 곧바로 상천이 눈을 떴다.

낭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전혀 겁먹지 않은 눈빛.

그것이 낭호의 심기를 더욱 어지럽혔다.

“이봐, 낭호!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고 적당히 손봐주고 끝내!”

녹엽이 한마디 했다. 서기종은 그 옆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연무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

낭호가 심호흡을 했다.

녹엽의 말대로 괜히 큰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런 생각에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상천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잘못했습니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하고 사과하면 몇 대 때려주고 말겠다. 아직 어린놈이니.”

“말 많네. 죽여준다며? 나오라며?”

상천이 다시 도발했다.

낭호의 눈썹과 손에 쥔 연검이 꿈틀거렸다.

스릉!

상천이 검을 뽑았다.

익히 알고 있는 낭호의 검법.

연검의 특성상 굉장히 까다롭기는 하겠지만 상천은 자신 있었다.

머릿속에서, 그리고 눈앞에 환영을 만들어내면서까지 가장 많은 가상 비무를 해본 상대가 바로 낭호였다.

그만큼 그의 무공이 독특했고,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감이 있었다.

상천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고, 낭호의 검이 허공을 수놓았다.

“얼라리?”

녹엽은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 명, 서기종을 제외하고.

낭호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상천이 자신의 공격을 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종이처럼 휘어지며 허공을 수놓는 공격을 상천은 피해내고 있었다.

상천의 입가에 번져 있는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천유보를 밟으며 자신의 눈앞을 어지럽히고 있는 연검을 피할 때마다 희열이 치솟았다.

‘이 다음은… 좌로 반보 후 발검!’

낭호의 공격을 예측한 상천이 검을 휘둘렀다.

단월검이 천유보와 절묘한 조화를 이뤄냈고, 규화공은 거기에 힘을 보탰다.

그렇게 펼쳐지는 상천의 반격은 매서웠다.

채채채챙!

상천의 검이 어지럽게 허공을 수놓은 연검을 밀어내며 앞으로 빠르게 찔러 들어갔다.

낭호는 깜짝 놀랐다.

연검이 점하고 있는 공간을 뚫고 상천의 검끝이 다가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단순히 뚫은 것뿐만 아니라 자칫 당할 수도 있는 일격이었다.

낭호가 황급히 몸을 피했다.

그렇다고 해서 상천이 낭호를 상대로 승기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낭호와 마찬가지로 상천 역시 섬뜩했던 순간이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져도 본전인 상천과 달리 지면 치욕인 낭호가 받는 심리적 압박은 상당했다.

두 사람의 대결은 백중세로 흐르고 있었다.

“대단한데, 저 꼬마? 잘하면 이기겠어.”

녹엽이 상천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러자 옆에서 묵묵히 보고 있던 서기종이 짧게 한마디 했다.

“잘하면이 아니라 이긴다.”

“뭐? 하하하! 무공만큼이나 농담도 수준급인데?”

서기종의 말에 녹엽이 웃음을 터뜨렸다.

둥글둥글하고 장난기 많은 외모만큼이나 가벼운 웃음이었다.

지금의 대결을 백중세로 이끌고 있는 상천의 실력은 분명 박수를 쳐줄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낭호를 이길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낭호에게는 스무 살의 청년이 가지지 못하는 수많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기종은 자신의 말에 확신하는 듯한 눈빛으로 연무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듯한 이목구비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서기종은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 그대로 모든 것을 진지하고 깊숙이 보는 성격이었다.

그런 그가 상천이 이긴다고 말한 것이다.

그에 녹엽도 웃음기를 거두고 조금 더 진지하게 두 사람의 대결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촤라라라!

쒜에에엑!

낭호의 연검과 상천의 검이 저마다 허공에서 요란한 소리를 만들어내었다.

두 사람의 옷은 이미 여기저기 찢겨져 있었고, 점차 지쳐 가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낭호에게 있어서 상천에게 본때를 보여주는 일은 이제 안중에 없었다. 지면 끝장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상천 역시 막천풍과의 싸움 이후 오랜만에 맛보는 희열을 이대로 보내기 싫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자신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검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뭐하는 짓인가!”

여소정의 목소리였다.

화가 잔뜩 난 그녀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검을 멈추었다.

그러자 그녀가 재빨리 연무장 위로 올라와 두 사람 사이에 섰다.

그녀의 등장에 검을 멈춘 두 사람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여소정의 물음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대답은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사소한 시비가 좀 있었습니다.”

대답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녹엽이었다.

“사소한 시비? 사소한 시비 때문에 서로 피를 보나?”

여소정이 인상을 찌푸리며 화난 어조로 녹엽에게 물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옷이 찢어진 것뿐만 아니라 몸 곳곳에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우리 낭인들 사이에선 흔한 일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너희들이 낭인인가?”

녹엽의 대답에 여소정이 더욱 화가 난 듯 차가운 표정과 어투로 물었다.

그런 그녀의 물음에 녹엽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답해라. 그대들이 낭인인가?”

“…….”

이어진 질문에도 그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대들은 낭인이 아니다. 이곳에 온 이상 그들은 낭인이 아닌 합산도문의 문도다.”

그녀의 말에 이번에는 서기종이 나섰다.

“우리는 십 년 이상을 낭인으로 살아왔습니다. 하루아침에 그런 습성을 버릴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서기종의 말은 타당한 것이었다.

십 년 넘게 낭인 생활을 하면서 몸에 밴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었다.

여소정 역시 그런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이런 일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소정이 화를 내는 것은 그들이 아직도 자신들을 낭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때문이었다.

합산도문의 문도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에 맞게 생활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됐어, 부대주.”

그때, 장여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모여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해결은 됐나요?”

장여진이 상천과 낭호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시선은 여전히 서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보아하니 아직 해결이 안 된 모양이군요. 그럼 계속하세요.”

장여진의 말에 여소정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갈등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끝나면 좋을 것이 없어요. 앞으로 같은 대원으로써 뭉쳐야 하는데 결속력이 떨어지면 좋지 않아요. 그러니 계속하세요. 그리고 해결하세요.”

장여진의 어조는 단호했다.

그리고 여소정과 함께 연무장 아래로 내려갔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상천과 낭호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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