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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월검제-37화 (37/141)

#037화.

남녕지부에서 하루를 보내는 동안 불편할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식사도 제시간에 꼬박꼬박 나왔고, 산책을 하고 싶으면 할 수 있었다.

지부에 있는 누구 하나 상천의 행동에 간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낯선 곳에 와서 지내는 어색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마치 기계처럼 흘러가는 남녕지부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고작 하루 가지고 많은 것을 알기는 어렵겠지만 상천은 이곳 남녕지부의 무인들이 웃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모두가 항상 긴장한 표정으로 지냈다.

심한 사람은 진짜 감정이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 속에 있으니 아무리 자율을 보장받았다 하더라도 숨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방 안에만 있으려니 답답해서 밖에 나가 산책을 하는데도 답답함이 가시질 않았다.

자유롭게 웃고 떠들며 생활하는 백룡문이 벌써부터 그리워지고 있었다.

‘누구든 와서 빨리 나 좀 데려가시오!’

장여진과 여소정을 떠올리며 상천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여소정이 남녕지부에 도착한 것은 전날 상천이 그곳에 도착한 시간과 거의 비슷한 시각이었다.

탁일경이 약속 시간 어기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나름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도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큰일 날 뻔했군.’

비록 자신이 장여진의 직속 수하라고는 하지만, 배분 상 탁일경이 자신보다 한참 위이니 만약 늦었다면 그의 불호령을 받아야 했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늦지 않은 자신에게 마음속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여소정은 남녕지부로 들어갔다.

“딱 맞춰 왔군.”

탁일경이 상당히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약속된 시간보다 늦는 것도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일찍 오는 것도 싫어했다.

정해진 계획대로 일을 처리하는 데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조금 일찍 오기는 했지만 거의 정확한 시간에 맞춰 도착한 여소정을 보며 탁일경이 만족스러워하는 이유였다.

“안녕하십니까. 그는 어딨습니까?”

“곧 올 것이네. 문 열리겠군.”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탁일경의 집무실 문이 열리며 상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왔는가?”

“예.”

“오랜만이군요.”

여소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상천을 맞이했다. 그러자 상천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소정의 표정도 딱딱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곳 사람들에 비해 사람 냄새가 나는 편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왔다는 것은 드디어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합산도문으로 갈 준비는 다 됐나요?”

“준비라고 할 것도 없소.”

상천의 대답에 탁일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둘 사이의 첫 만남이 어땠고 관계가 어떤지는 전혀 상관없이 그의 눈에는 부대주의 물음에 존대가 아닌 평대로 대답하는 불충한 수하로만 보였다.

“자네…….”

“죄송합니다. 실수했습니다.”

탁일경의 표정 변화를 읽고 있던 상천이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

하지만 그는 상천이 자신의 말을 끊었다는 사실에서 또 한 번 기분이 상한 상태였다.

“서두르지요. 대주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감지한 여소정이 먼저 말을 꺼냈고, 상천도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대답했다.

“…조심해서 가게.”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탁일경에게 여소정이 포권을 하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상천 역시 그녀를 따라 인사했다.

“멀리 안 나가네.”

“예.”

그렇게 대답한 여소정이 서둘러 상천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떠나고도 한참 동안 탁일경의 불편한 심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불편한 심기는 모조리 남녕지부 무인들에게로 표출되었다.

남녕지부를 떠난 여소정과 상천은 말을 탄 채 나란히 합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면이 있기는 하지만 서로 한 번도 대화를 해본 적이 없는 두 사람은 말을 타고 가는 동안에도 말 한 마디 제대로 섞지 않았다.

그런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되고 있을 때 여소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남녕지부에서 제법 고생했겠군요.”

“죽을 뻔했소. 조금만 늦었다면 난 그곳을 뛰쳐나갔을 것이오.”

이제야 살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상천을 보며 여소정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탁일경의 성격은 문파 내에서도 유명했다.

그런데 외부인이고 처음 마주한 상천이 얼마나 당황하고 고생했을지 보지 않았어도 눈앞에 훤했다.

“대주님과 저까지 셋이 있을 때나 둘이 있을 때는 존대 안 해도 됩니다. 비록 청운대원으로 들어오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한 문파의 문주 신분이니 그럴 때는 평대를 해도 됩니다.”

여소정의 말에 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다른 대원들과 함께 있을 때는 무조건 수하와 상관의 관계에 입각해 대우하겠습니다.”

“알겠소.”

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장여진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을 때부터 특별대우 같은 것은 기대하지 않았다.

“조금 속도를 올리지요.”

그렇게 말한 여소정이 속도를 올려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러자 상천 역시 곧장 말을 달려 속도를 높였다.

본산에서 여소정과 상천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장여진의 얼굴은 싱글벙글했다.

비록 만족할 만한 인원은 아니었지만 열 명이면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출 수 있는 인원이고, 상천이 도착함으로써 계획해 놓았던 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

말 그대로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으니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동안은 상천의 합류 여부가 결정 나기 전이었기 때문에 대원들을 거의 방치해 둔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니었다.

제각각 다른 무공을 익힌 상태였기 때문에 심법은 어떻게 할 수 없다 해도 기본적인 도법과 합격은 가르쳐야 했다.

청운대를 맡게 된 이후로 생각해 놓은 여러 가지 일을 드디어 할 수 있게 된 까닭에 장여진은 점점 흥분하고 있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아버지에게 제대로 인정받겠어!’

장여진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난 장여진은 신경 써서 단장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청운대의 대주로 생활해야 하기에 그전까지 즐겨 입었던 화려한 복색은 갖추지 않았다.

일반 무사들이 입는 것보다는 조금 더 멋을 낼 수 있는 무복을 입었고, 평소보다 화장이나 치장을 덜했다.

그렇게 준비가 끝났을 무렵, 밖에 있던 시녀 한 명이 안으로 기별을 넣었다.

“아가씨, 부대주가 본문에 들어섰다는 전갈입니다.”

“벌써?”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눈을 뜬 탓에 준비를 하는 것도 평소보다 빨랐다.

준비를 다 하고도 어느 정도 기다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벌써 부대주가 본산에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알았다. 곧장 내게 오라고 해.”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대답한 시녀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더 거울을 들여다보던 장여진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두 사람, 조금은 친해졌으려나? 호호!”

웃으며 말한 장여진이 다시 한번 거울을 보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여진의 생각과 달리 상천과 여소정 사이에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이 도문까지 오는 동안 나눈 대화라고는 고작 두어 번에 그쳤기 때문이다.

한시라도 빨리 본산에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신나게 말을 달린 까닭이었다.

그나마도 장여진이 제법 좋은 말을 내주어 지치지 않고 오랜 시간 달릴 수 있었기에 자주 쉬지도 않았다.

앞만 보고 달리는데 무슨 대화를 나누랴.

그 때문에 두 사람은 장여진의 예상보다 일찍 합산도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여진이 청운대주의 집무실에서 상천을 맞이했다.

그럴듯한 집무실에 앉아 있으니 제법 대주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였다.

그러다 보니 상천도 그녀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전과는 달라지는 것 같았다.

“어서 와요. 고생 많았어요.”

“고생이랄 것도 없었소.”

상천의 대답에 장여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소속되어 생활하게 될 곳은 청운대예요.”

“남녕지부장에게 들었소.”

“그랬군요. 어떻던가요, 남녕지부장은?”

장여진의 물음에 상천이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몸을 한번 부르르 떨더니 말했다.

“혹여나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남녕지부에 갈 일이 생긴다면 난 빼주시오. 그곳에 한 번 더 갔다가는 질식사할 것 같소.”

“호호호호! 제대로 고생했군요.”

장여진이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그것을 본 상천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재밌소?”

“그럼요. 지금까지 봐온 반응 중에 제일 재밌네요.”

“남은 죽을 맛이었는데 재밌다니…….”

상천이 투덜거리자 장여진이 웃으며 말했다.

“누가 그러던데요?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라고.”

“하아…….”

“어머, 한숨까지? 그 정도로 싫었나요, 그곳이?”

장여진의 물음에 상천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악덕 대주를 모셔야 한다니 앞날이 걱정되어 그러오.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아닌가 걱정도 되고.”

“악덕 대주요? 호호호!”

상천의 말 한마디에 장여진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원래가 잘 웃는 성격이기는 했지만 이렇게나 즐거워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한 여소정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그나저나, 두 사람은 오면서 조금 친해졌나요?”

그렇게 말하며 장여진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녀의 말에 살짝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안 친해졌어요? 분위기가 왜 이러지?”

장여진이 궁금하다는 듯 묻자 상천이 입을 열었다.

“친해질 기회도 없었소. 대화도 몇 번 안 했고.”

“어머, 왜요? 부대주, 왜 그랬어?”

상천의 말에 장여진이 진심을 담아 물었다.

“서둘러 오다 보니 쉴 틈도 거의 없었습니다.”

“조금 천천히 와도 되는데……. 그래서 일찍 도착했구나? 난 벌써 도착했다기에 깜짝 놀랐어.”

“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것 같아서…….”

여소정의 말에 장여진이 굉장히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 여소정은 더 민망해졌는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안 올 사람도 아니고 올 사람인데, 뭐. 어쩌겠어. 앞으로는 자주 마주쳐야 하니까 좀 친해져 봐. 부대주와 대원 사이가 너무 어색해도 안 좋아. 알겠지?”

“알겠습니다.”

“알겠소.”

장여진의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에 만족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볼까요, 선배들 만나러? 다들 막내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어요.”

장여진이 미소를 지으며 상천에게 말했다.

앞으로 함께 지낼 대원들을 만나러 갈 시간.

상천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대원들이 어떤 이유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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