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화.
청운대라고 적힌, 볼품없는 현판이 걸려 있는 건물 앞.
아홉 명의 무인이 도열한 채 서 있었다.
모두가 이번 무투대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이었다.
무투대회가 끝나고 여흥을 즐기던 그들은 장여진의 제안을 받고 이곳 합산도문의 청운대가 되었다.
어떤 이는 진지하게 고민해서 결정했고, 어떤 이는 술김에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결정한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대부분이 문파의 문도가 아닌 낭인 생활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첫날부터 갈등이 있었다.
몇몇 대원들이 대주와 부대주 둘 다 여자라는 것을 알고는 반항을 한 것이다.
어떻게 여자들이, 그것도 문파 안에서 화초처럼 자란 그녀들이 무림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남은 자신들을 통제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반항은 일각 만에 싹 사라졌다.
여소정이 도를 뽑아 들고 그들에게 무력행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합산도문에서 제대로 수련한 여소정의 도는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실전형 무공으로 발전한 그들을 손쉽게 제압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게다가 뒤늦게 장여진의 성이 ‘장’이고 합산도문 문주의 성도 ‘장’인 것을 깨달은 그들이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건물 앞에 도열해 있는 그들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들이 명령을 받고 건물 앞에 도열한 것이 반 시진 전이다.
무려 반 시진 동안 꼼짝 않고 가만히 서 있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일.
그것은 진짜 엄청난 곤욕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인내심은 점점 한계에 가까워져 갔고, 폭발 직전에 장여진이 여소정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미안해요. 조금 늦었죠?”
장여진이 대원들에게 웃으며 사과했다. 하지만 장여진의 ‘조금’이라는 말은 그들로 하여금 더욱 인상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여소정은 그런 그들의 태도가 못마땅했지만, 딱히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오늘 여러분을 모이라고 한 것은 새로운 대원이 합류할 것이기 때문이에요.”
새로운 대원이라는 장여진의 말에 도열해 있던 대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조용!”
그것을 보다 못한 여소정이 크게 소리쳤고, 장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이르면 내일, 늦어도 모레에는 합류할 거예요. 올해 스무 살의 젊은 청년이니 잘 대해주세요. 이상입니다.”
장여진의 말이 끝났다.
정말 짧게 끝났다.
보통 이런 경우에 앞에서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짧으면 짧을수록 좋아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그렇지만 지금 청운대원들의 얼굴은 전혀 좋아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더 짜증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반 시진을 기다렸는데 고작 반 각 얘기하고 끝이야? 이거 실화냐?’
‘아오! 문주 딸내미만 아니면 확 줘 패는 건데!’
‘확! 마, 궁디를 쭈〜 차삐까!’
그랬다.
반 각을 위해 무려 반 시진을 기다린 것이다.
그러니 억울하고 분하고 짜증나는 감정들이 한 번에 확 올라온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여소정의 무공이 강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고, 문주의 여식인 장여진의 무공 역시 못해도 그 정도는 될 것이다.
그들이 나서서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리고 당해낼 수 있다고 해도 문주의 여식이니 그 순간 모가지가 날아갈지도 몰랐다.
‘신입이라고? 이놈! 오기만 해봐라!’
‘지옥이 뭔지 보여주마!’
‘각오 단디 해야 될 기다!’
그들의 분노는 아직 합류하지 않은 신입에게 고스란히 집중되기 시작했다.
***
“남녕이구나.”
남녕에 들어선 상천이 중얼거렸다.
깔끔한 무복에 방갓을 쓰고 말을 타고 있는 상천은 제법 그럴싸한 무인의 모습이었다.
“합산도문 남녕지부라고 했나?”
그렇게 중얼거린 상천은 천천히 말을 몰았다.
말을 몰던 상천이 갑자기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갑자기 웬 오한?”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한 번 몸을 부르르 떤 상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몰았다.
그가 합류할 청운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채.
***
합산도문 남녕지부의 지부장인 탁일경은 합산도문 내에서 문주인 장우량을 제외하고 도기를 사용할 수 있는 스무 명 중 한 명이었다.
문파 내에서도 손꼽히는 고수 중 한 명임에도 그가 본산에 있지 않고 지부장으로 나와 있는 이유는 올곧기만 한 성품 때문이었다.
그는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무조건 정해진 규율에 입각해서만 처리했다.
시간을 어기는 것은 물론이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작은 실수 하나도 봐주는 법이 없었으며 자신보다 상관이라고 해서 아부를 하거나 하는 일도 절대로 없었다.
무공도 뛰어나고 일 처리도 잘하는 그였지만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본산 내에서는 적이 많았다.
탁일경 역시 그런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가 지부장을 자원했고, 본산을 나와 남녕으로 오게 되었다.
물론 그가 옴으로써 남녕지부에 속한 합산도문 문도들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무공 수련은 물론이고 그 외의 업무 처리에 있어서 약간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청운대원이 오는 게 오늘이라고 했지?”
탁일경이 집무실에 앉아 서류들을 살피며 물었다.
그러자 곁에 앉아서 그의 업무를 돕고 있던 수하 한 명이 재빨리 대답했다.
“예, 오늘입니다.”
“그렇군.”
짧게 대답한 탁일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두루뭉술하게 오늘이라는 것만 알고 정확한 시간은 정해지지 않은 이런 일이 그는 가장 싫었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계속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었다.
업무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완벽을 기하는 그가 가장 싫어하는 상황이었다.
“도착하는 대로 곧장 내게 데려오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수하가 막 대답을 한 그때였다.
“지부장님, 사람이 왔습니다!”
지부 정문에서 보초 근무를 서던 무사 한 명이 집무실에 들어오며 말했다.
“왔나? 이리로 데려오게.”
“알겠습니다!”
명을 받은 무사가 서둘러 밖으로 나갔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가 방갓을 쓴 상천과 함께 돌아왔다.
“이 사람입니다.”
“나가보게. 자네도.”
“예.”
탁일경이 상천을 데려온 무사와 자신의 집무실에서 함께 업무를 보던 무사까지도 모두 내보냈다.
“앉지.”
탁일경이 집무를 보는 책상에 앉은 채로 그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문 앞에 서 있는 상천에게 자리를 권했다.
상천은 그가 권하는 자리에 앉으며 쓰고 있던 방갓을 벗었다.
방갓 뒤로 드러난 상천의 얼굴을 본 탁일경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고 하고 있던 업무를 보며 말했다.
“어리군.”
“예. 올해 스물입니다.”
“그렇군. 자네가 상천인가? 귀주성 백룡문에서 왔다는?”
“그렇습니다.”
탁일경의 물음에 상천이 살짝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날카로운 인상에서 풍기는 차가운 분위기, 그리고 고수가 풍겨내는 기도에 조금 압도당한 것이다.
“그렇군. 청운대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들었네.”
“제가 들어가게 될 곳이 청운대인지는 모르겠지만 장 소저의 제안에 따라 합산도문에 가기로 한 것은 맞습니다.”
상천의 말에 탁일경이 한 번 더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입에서 나온 ‘장 소저’라는 말이 거슬렸던 것이다.
업무를 보던 탁일경이 살짝 고개를 들고 상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 가지 경고하겠는데, 소공녀님을 부를 때 그런 식으로 부르는 건 용납 못하네. 앞으로는 대주님이라고 부르도록.”
“아, 알겠습니다.”
장여진을 만난 이후로 장 소저라 불러왔기 때문에 전혀 그런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은 상천인지라 탁일경의 이런 지적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어쨌든 먼 길 왔으니 쉬게. 정확히 내일 이 시간에 본산에서 자네를 데리러 사람이 올 것이네.”
“알겠습니다.”
“나가보게. 밖에 있는 사람이 쉴 곳을 안내해 줄 것이네.”
“네.”
상천이 자리에서 일어났음에도 탁일경은 책상에 시선을 둘 뿐 나가는 것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탁일경의 집무실을 나서자 그의 말대로 지부 무인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오십시오.”
탁일경만큼이나 딱딱한 어조로 말한 무인이 앞서 걸었다. 냉랭한 분위기가 적응되지 않는 상천은 머쓱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남녕지부를 찾는 손님들이 쉬는 접객실로 상천을 안내한 무인이 역시나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정확히 두 시진 후에 식사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상천이 대답하자 살짝 고개를 숙인 무인이 도도하게 돌아서서는 원래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를 보내고 접객실 안에 털썩 주저앉은 상천이 툴툴거리듯 중얼거렸다.
“여기 사람들은 왜 하나같이 저 모양이야?”
푸드드득!
전서구 한 마리가 힘찬 날갯짓을 하며 합산도문으로 날아들었다.
합산도문의 허공을 몇 차례 활주하던 전서구는 곧장 장여진의 처소 쪽으로 날아갔다.
툭! 툭! 툭!
장여진의 처소 창틀에 앉은 전서구는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부리로 창틀을 몇 번 쪼았다.
그것을 보며 장여진은 미소를 지었고, 여소정은 딱딱한 표정으로 전서구에게 다가갔다.
여소정이 다리에 묶인 서찰을 풀어 장여진에게 가져다주었다.
“호호! 내 예감이 맞았네?”
서찰을 읽은 장여진이 그렇게 말하며 여소정에게 서찰을 건넸다.
“그렇군요.”
빠르게 서찰을 읽은 여소정이 다시 그녀에게 건네주며 대답했다.
“사람을 보내달라는데 누굴 보내지?”
“대원 중 한 명을 골라 보내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부대주가 다녀와.”
“알겠습니다.”
여소정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어머?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네? 그냥 처음부터 부대주가 가겠다고 하지 그랬어.”
장여진이 이번에도 장난기를 섞어 말했다.
제법 그녀와 지낸 시간이 오래됐기에 적응을 할 법도 했지만 여소정은 여전히 그녀의 장난에 당황했다.
“아, 아닙니다! 전 그저 명령을 받았으니…….”
“호호호! 알았어. 부대주는 어떻게 매번 반응이 똑같아? 재밌어.”
“대주님, 둘이 있을 때는 상관없지만 대원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자제해 주십시오. 자칫 기강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알았어.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해. 남녕지부장은 시간 약속 안 지키면 질색하는 거 알지?”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인사한 여소정이 처소를 나가려 할 때 장여진이 한마디 덧붙였다.
“아! 갑자기 생각난 말인데, 옛말에 그런 말이 있더라고.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대주님!”
나가려던 여소정이 그 말에 발끈하자 장여진이 재밌다는 듯 웃으며 어서 다녀오라고 손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