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월검제-35화 (35/141)

#035화.

상천의 우려와 달리 수련은 잘되어 있었다.

특히나 배동삼은 대단한 실력을 보였다.

병목은 하지 못했던 초식의 순서를 뒤섞는 것은 기본이었다.

상천이 배동삼에게 가장 놀랐던 것은 발을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백룡권의 초식은 기본적으로 조금씩 발을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배동삼은 그 수준을 넘어선 상태였다.

상천이 가장 놀랐던 이유는 그가 보여준 발놀림에서 언뜻언뜻 천유보가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제대로 된 천유보는 아니었다.

배우지 않았으니 깨우치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하지만 워낙 무공에 대한 열망이 강하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제대로 펼칠 수 있을지, 강해질 수 있을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였다.

상천은 배동삼을 다시 보았다.

흔히 말하는 무골이 그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상천이 백룡문에 돌아온 지 삼 일째 되는 날 저녁.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장여진의 제안을 받아들이든 아니면 가지 않겠다고 서찰을 보내든 둘 중 하나는 해야 할 때가 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천은 사람들에게 쉽게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가장 큰형으로서 식구들을 챙기는 병목을 두고 어떻게 떠날 수 있겠는가.

자신이 돌아온 이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무공에 대해 묻는 배동삼을 두고 어떻게 떠나겠는가.

상천의 고민이 극에 달했을 때,

그런 분위기를 알아차린 병목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자기 전에 잠깐 다들 모여봐.”

잠자리에 들기 전, 병목이 모두를 한자리에 불러 앉혔다.

어린아이들은 옆방에서 이미 꿈나라로 떠난 지 오래였다.

“왜? 무슨 일 있어?”

늘 그렇듯 배동삼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그에 상천을 한번 힐끗 쳐다본 병목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천아.”

“응?”

“얘기해 봐.”

“뭘?”

병목의 말에 상천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병목이 모두를 한자리에 불러 모을 때부터 짐작을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기다렸다는 듯 말할 수가 없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빨리. 고민 있잖아. 뭔데? 얘기해 봐.”

“…….”

상천이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모르리라.

그런데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병목을 보며 상천은 머뭇거렸다.

“그래, 말해봐. 뭔데 그래?”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배동삼이 가볍게 상천을 재촉했다.

그런 배동삼에게 조용히 하라는 듯 한 번 눈치를 준 병목이 다시 입을 열었다.

“뭔데 그래? 무슨 고민인지 모르겠지만 우리한테까지 못 털어놓으면 누구한테 털어놓을 거야?”

병목의 말에 상천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족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고민을… 밖에 나가서 누구한테 털어놓을 수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은 상천은 크게 한번 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사실 말하지 않은 게 한 가지 있어.”

상천이 잠시 말을 끊었다.

말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해도 정작 입 밖으로 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병목을 비롯한 모든 사람은 상천의 말이 이어질 때까지 재촉 한번 하지 않은 채 잠자코 기다렸다.

“남녕에서 여권문주와 비무가 있었다고 했지? 그 이후에…….”

상천이 장여진과 만난 일부터 그 이후에 받은 제안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그래서 한 달 말미를 두고 돌아온 거야.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된 거고.”

상천의 말이 끝났다.

그럼에도 누구 한 명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상천과 오랜 시간 떨어져 지냈다.

그러다가 다시 함께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돈을 벌겠다며 훌쩍 떠나 버렸다.

그리고는 한 달이 지나 두 달 가까이 시간이 흘러 돌아오더니 다시 떠나갈 수도 있단다.

게다가 가볍게 일 하나 하고 금방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무려 일 년 이상 떨어져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

누가 거기에 대고 그 누가 쉽게 ‘그래!’라고 답할 수 있겠는가.

말하길 좋아하는 배동삼도 지금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모두 무슨 생각을 하기보다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거나 초점 없는 눈을 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린 것이다.

그런 침묵을 상천이 깼다.

“가지 말라고 하면 난 안 갈 거야. 백룡문과 우리 가족이 그 모든 것의 우선이지 다른 것은 우선이 될 수 없어.”

상천의 말에 유일한 여자인 공혜가 말했다.

“그럼 가지 마.”

상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공혜는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였다.

그런 그녀의 눈을 잠시 바라보던 상천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차마 그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난 천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심사숙고 끝에 병목이 말했다. 모두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자 그가 말을 이어갔다.

“천이는 우리와 달라. 좀 더 큰 세상을 활보할 사람이야. 그런 천이가 우리 때문에 발목 잡혀서야 되겠어? 당분간은 함께 지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천이가 하고 싶은 걸 하게 해주는 게 좋지 않을까? 지금까지도 우리는 우리끼리 잘 지내왔잖아. 일 년, 일 년만 떨어져 지내는 거야.”

병목의 말에도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배동삼이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도 형이 더 강해지고 더 유명해졌으면 좋겠어. 어디 가서 자랑도 할 수 있고, 나도 형한테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테니까.”

배동삼도 찬성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헤어지는 게 싫었는지 얼굴은 울상이었다.

“난 싫어!”

공혜가 소리쳤다. 눈에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던 눈물은 어느새 흘러내려 두 뺨을 적시고 있었다.

“혜야.”

병목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공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앉아서 훌쩍이던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혜야!”

병목이 그녀를 부르며 따라 나가려고 했다. 그런 그를 상천이 붙잡았다.

“내가 나가볼게.”

그렇게 말한 상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간 방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만 가득했다.

밖으로 나온 상천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두웠지만 한쪽 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공혜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혜야.”

“…….”

상천이 옆에 나란히 앉으며 그녀를 불렀지만 공혜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미안해.”

“미안하면 가지 마.”

공혜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상천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

“…….”

상천이 다시 한번 미안하단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혜야.”

“…됐는데…….”

“응?”

공혜의 목소리가 워낙 작아서 제대로 듣지 못한 상천이 다시 한번 그녀에게 물었다.

“이제 겨우 다시 함께 지낼 수 있게 됐는데 왜 또 떠나려는 거야? 응?”

공혜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며 상천을 바라보았다.

“미안… 미안해…….”

상천이 고개를 숙였다. 차마 두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와락!

갑자기 공혜가 상천에게 안겼다.

그리고는 금방이라도 다시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 가면 안 돼? 오빠 그냥 계속 나랑 같이 여기 있으면 안 돼? 응?”

“혜야…….”

상천이 말을 잇지 못하고 가볍게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어려서부터 ‘다음에 크면 오빠한테 시집갈 거야!’라며 유난히 상천을 잘 따랐던 공혜다.

그런 그녀에게 상천과의 이별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처음 종삼을 따라 상천이 백룡문으로 떠나올 때도 그랬고, 상천이 돈을 벌기 위해 떠날 때도 그랬다.

그래도 꾹 참았다.

함께 지낼 수 있으니까.

그런데 세 번은 견디기 어려웠다.

이번에 두 달 가까이 떨어져 있는 기간 동안에도 그녀는 상천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어서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 상천이 돌아왔다.

그래서 너무 기뻤다.

아침에 일을 하러 가면 일이 얼른 끝나길 바랐고, 일이 끝나면 그전보다 빠른 발걸음으로 돌아왔다.

상천을 보기 위해서.

지난 삼 일이 그녀에게는 가장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저잣거리 가건물에 살 때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잘 씻어서 꽤 예뻐졌다는 소리까지 듣는 그녀였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기분 좋았다.

예뻐졌다는 소리보다 상천에게 창피한 모습 보이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그런데 상천이 떠난단다.

그녀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병목의 말이 옳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배동삼의 말이 옳다는 것도 안다.

그렇지만 그녀는 억지를 부려서라도, 떼를 써서라도 붙잡고 싶었다.

“금방 갔다 올게, 금방. 약속할게.”

상천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안겨 있던 공혜가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는 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상천을 바라보며 물었다.

“진짜지? 거짓말 아니지?”

“그래.”

상천이 그녀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약속하는 거지?”

“그래. 약속할게.”

다시 한번 상천의 다짐을 받은 공혜가 손으로 흐른 눈물을 닦았다.

“들어가자. 쌀쌀하다.”

상천이 먼저 일어나서 공혜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시 그 손을 바라보던 그녀가 상천의 손을 힘주어 잡고 일어났다.

그렇게 상천은 결심을 굳혔다.

***

“오늘이지?”

장여진이 거울을 보며 뒤에 서 있는 여소정에게 물었다.

“예. 오늘입니다.”

“서찰이 올까, 사람이 올까?”

“대주님의 예상대로라면 사람이 오지 않겠습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예측일 뿐이잖아. 물론 이곳으로 올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그렇게 말하며 장여진이 미소를 지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상천이 올 것이라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대원들은 어디 있어?”

“집합해 있습니다.”

“그래? 말썽은 더 이상 없고?”

“예, 다행히도 없습니다.”

“그렇겠지. 호호.”

장여진이 살짝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자 서 있는 여소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열 명이네. 그 사람까지 오면.”

“그렇습니다.”

“좋네.”

장여진의 말에 여소정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홉이나 열이나 거기서 거기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거울을 보고 있던 장여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여소정을 돌아보았다.

“부대주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그럼…….”

“아홉보다는 열이 확실히 낫지! 아홉이면 뭔가 부족해 보이고, 열이면 뭔가 채워진 느낌이잖아? 호호!”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웃은 그녀가 문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건 아무리 대주라고 해도 예의가 아니겠지? 가자.”

그녀가 먼저 방문을 나섰다.

그 뒤를 따르는 여소정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벌써 약속 시각에서 반 시진 가까이 지났습니다, 대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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