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화.
결승전 당일.
막천풍과 상천은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결승전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결승전이군!”
막천풍은 들뜬 모습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이기고 올라온, 쉽게 승부를 점치기 어려운 두 사람의 마지막 대결.
결과도 궁금하지만 얼마나 흥미진진한 대결을 펼칠지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아우 생각에는 누가 이길 것 같은가?”
막천풍이 넌지시 물었다.
지금까지 무투대회가 진행되어 오면서 상천의 예측은 거의 대부분 맞아떨어졌다.
그 덕분에 막천풍은 제법 많은 돈을 딸 수 있었고, 이번에도 역시 그것을 기대하고 상천에게 물은 것이다.
하지만 상천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본 막천풍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물었다.
“계속 표정이 어둡던데, 무슨 일 있나?”
“아니오.”
“아니긴, 이 형님한테 다 털어놔 봐.”
막천풍이 상천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물었다.
그러자 상천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장여진과 있었던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음…….”
이야기를 전부 다 들은 막천풍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고민이 될 법한 상황이기는 했다. 하지만 막천풍은 기본적으로 반대의 입장이었다.
“난 반대.”
막천풍의 말에 상천이 그를 바라보았다. ‘왜?’라는 물음을 담아서.
“문파가 크고 작고를 떠나 자네는 일문의 문주가 아닌가? 일문의 문주가 다른 사람 밑에 들어간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각 문파의 연합이라는 무림맹도 소속된 문파의 문주들은 맹주를 제외하고 동등한 입장에서 발언권을 가지는데……. 아우는 지금 무림맹도 아니고 사도련도 아닌 합산도문의 일개 무사로 들어가는 것 아닌가? 그건 안 될 말이지.”
막천풍의 어투는 단호했다.
상천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것을 생각했을 때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하아…….”
상천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했다.
결승전이 딱 그랬다.
결승에 오른 녹엽과 서기종의 대결은 한 식경 만에 끝이 났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 두 사람은 기 싸움도 없이 곧장 맞붙었고, 녹엽의 실수로 서기종이 비교적 쉬운 승리를 가져갔다.
긴박감 넘치는 대결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대회장을 빠져나왔다.
막천풍 역시 투덜거리며 대회장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상천은 고민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런 상천의 어깨를 막천풍이 톡톡 쳤다. 그에 상천이 자신을 쳐다보자 막천풍이 턱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상천의 눈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장여진의 모습이 보였다.
“결정은 내렸나요?”
장여진이 웃으며 물었다. 하지만 상천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내 조언을 잊지 말게. 먼저 가지. 신중하게 결정하길 바라네.”
그렇게 말한 막천풍이 상천의 어깨를 다독여 주고는 자리를 피해주었다.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 건가요?”
장여진이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러자 상천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말미를 좀 줄 수 있소?”
“시간을 더 달라는 건가요? 생각보다 전 참을성이 많지 않아요.”
장여진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문에 다녀오려 하오.”
“…….”
작게 한숨을 쉰 장여진이 상천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상천도 그 눈길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보았다.
그렇게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길 잠시.
장여진이 먼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좋아요. 하지만 오래는 못 기다려요. 한 달. 한 달의 시간을 드리죠.”
“고맙소.”
“우리의 제안을 거절하겠다면 굳이 오지 않아도 돼요. 대신 서찰은 보낼 수 있겠죠?”
“그렇게 하겠소.”
상천이 똑똑히 대답했다.
“만약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면 이곳 남녕에 와서 합산도문 남녕지부를 찾아가요. 미리 말해둘 테니.”
“그렇게 하겠소.”
“믿음을 저버리는 일이 없길 바라요.”
그렇게 말한 장여진이 곧장 몸을 돌려 돌아갔다. 그녀가 먼저 몸을 돌리고 잠시 멈춰 서 있던 여소정이 상천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서둘러 장여진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문제를 일단락 지은 상천은 무거운 마음을 안은 채 짐을 싸기 위해 머물던 객잔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객잔에서는 막천풍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잘 보이는 곳에 앉아 있던 그는 상천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불렀다.
“이보게!”
고개를 숙이고 객잔으로 들어서던 상천은 막천풍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를 한 번 보고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됐나?”
상천이 자리에 앉자마자 막천풍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물었다.
“말미를 달라고 했소.”
“음…….”
상천의 대답에 막천풍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건 고민은 좀 되겠지만 결국에는 승낙해서는 안 될 제안이었다.
그럼에도 상천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리군.’
막천풍의 눈에 비친 상천은 아직까지 문주라는 자리의 무게감을 확실히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문주라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어떤 역할을 해야 하고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인지.
그것을 명확하게 알지 못하니 단박에 거절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거기다가 개인적인 욕구도 있겠지.’
무인이라면 당연히 느낄 수 있는 실력과 명성에 대한 욕구.
스무 살의 상천이 그런 것을 이겨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가 이제 막 백룡문 밖의 무림을 미약하게나마 느끼기 시작한 상태라면.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건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여기서 더 머물 생각인가?”
“아니. 일단 백룡문으로 돌아갈 생각이오.”
“그렇군. 언제 갈 거지? 내일?”
“지금 당장.”
“지금 당장?”
막천풍의 물음에 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하루 술도 마시고 좀 여유롭게 있다가 돌아가는 것이 더 좋지 않나?”
“사실…….”
막천풍의 물음에 상천이 작게 한숨을 쉬고는 대답했다.
“사실?”
“돈이 거의 바닥이라서. 하하!”
상천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 모습에 막천풍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자네 때문에 딴 돈도 제법 있으니 오늘은 이 형님이 거하게 사지. 뭐, 매번 내가 사긴 했지만. 하하!”
그렇게 두 사람은 술잔을 기울이며 남녕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
막천풍과 상천이 남녕에서의 마지막 밤에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시각.
장여진 역시 여소정과 자신의 처소에 있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화두는 역시 상천이었다.
“부대주가 보기엔 어떤 결정을 내릴 거 같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래도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 느낌. 여자의 육감이라는 거.”
장여진의 물음에 여소정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거 없어?”
“…잘 모르겠습니다.”
“음…….”
여소정의 대답에 장여진도 작게 한숨을 쉬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 느낌에 그 사람의 마음은 많이 기울었어. 우리 쪽으로.”
“그렇습니까?”
여소정이 큰 관심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사실 아직도 그녀는 장여진이 이렇게나 매달릴 정도로 상천이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민을 하는 건 문파의 상황이 좋지 않으니 문도들에게 미안한 마음 때문이겠지. 게다가 문주가 우리 합산도문의 일반 무사로 들어오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런 족쇄만 아니라면 두말 않고 우리 제안을 받아들였을 거야.”
“하지만 그 족쇄는 풀 수 없습니다.”
“아니, 풀 수 있어.”
그렇게 말한 장여진이 여소정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음이 기운 상태에서 사문에 다녀오겠다는 건 왜겠어?”
“문도들과 얘기를 해보겠지요.”
“그렇겠지? 만약 문도들이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한다면? 마음이 홀가분해지지 않겠어?”
“그렇겠지요.”
여소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룡문의 상황이나 문도들과 그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느 정도로 가까운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정도 유추는 할 수 있었잖아?”
장여진의 말에 여소정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하기 어려운 매력적인 조건임에도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단순히 문주이기 때문에 고민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우리는 맞이할 준비만 하고 기다리면 돼.”
장여진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백룡문의 하루 일과는 언제나 똑같았다.
오전에 일을 나가야 하는 사람들은 일찌감치 일어나 간단히 요기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일하러 나가는 사람들을 내보내고 나면 아이들을 돌보고, 무공 수련을 하며 보냈다.
물론 상천이 떠나면서 얘기했던 잡초 제거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하고 있었다.
오전이 아닌 오후에 일을 나가는 병목은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처음 무공을 배우고 얼마 동안에는 싫어하고 안 하려고 하는 아이들도 많았지만 지금은 그런 아이들이 거의 없었다.
다들 수련하는 시간을 조금씩 즐겁게 생각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상천이 돌아왔을 때 그래도 뭔가 제대로 하고 있는 모습, 잘 지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된다며 걱정하던 병목은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은 잘 지내고 있는 건가?”
상천이 백룡문을 떠난 지 한 달이 넘었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지금은 그저 상천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근데 이놈은 왜 이렇게 안 와? 나도 나가야 되는데.”
병목이 미시 초까지는 돌아오기로 한 배동삼을 기다리며 투덜거렸다.
옆 마을에서 일하던 배동삼은 운 좋게 백룡문이 있는 이곳 마을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워낙 딱 부러지게 일을 잘하는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형! 형!”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병목이 투덜거리기가 무섭게 배동삼이 헐레벌떡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왔냐? 애들 잘 봐! 괜히 또 이것저것 가르쳐 준답시고 괴롭히지 말고.”
“그게 아니고! 형! 밖에… 밖에!”
배동삼이 거친 숨을 고르며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킨 채 말했다.
“왜? 밖에 뭐가 있는데?”
배동삼의 그런 모습에 병목이 인상을 찌푸리고는 백룡문 밖으로 나갔다.
“어? 어!”
밖으로 나간 병목의 두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잘 있었어? 나 왔어.”
낯익은 목소리, 그리고 낯익은 얼굴.
병목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은 아닌가 싶어 손으로 눈을 비볐다.
“뭐해?”
오랜만에 돌아온 상천이 웃으면서 물었다. 하지만 병목은 여전히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 일 안 나가?”
뒤늦게 쫓아 나온 배동삼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병목을 보고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어? 어! 가야지, 가야지.”
그렇게 말한 병목이 얼빠진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뭘 찾아? 그냥 가면 되잖아. 얼른 가, 얼른!”
그런 병목의 행동이 재밌었는지 배동삼이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고는 병목의 등을 떠밀었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천아! 금방 갔다 올 테니까 저녁때 보자! 응?”
“알았어. 얼른 다녀와.”
배동삼에게 등 떠밀려 가면서도 뒤를 돌아보며 말하는 병목을 보며 상천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형! 잘 갔다 와!”
병목의 등을 떠밀던 배동삼도 병목이 자꾸 뒤를 돌아보자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들어가자, 형.”
그러고는 바로 돌아서더니 상천을 안으로 잡아끌었다.
상천도 웃으며 그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