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월검제-32화 (32/141)

#032화.

장여진과 여소정이 돌아가고 식사를 마친 상천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침상에 앉아 전날 있었던 막천풍과의 대결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생각했던 것 이상이야.’

익히고 나서 처음으로 제대로 펼쳐 본 자신의 무공도 그러했고, 막천풍의 풍절권 또한 그러했다.

비록 스친 것에 불과했지만 막천풍의 주먹이 지나간 곳에 조금씩 통증이 느껴지고 있었다.

상천은 그동안 무투대회를 통해 봐온 대결들과 어제의 대결까지를 천천히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자신이 익힌 무공과는 전혀 다른 무공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무공이 얼마나 허점이 많은지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 많은 무공의 장점을 백룡문의 무공과 합칠 수만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며 상천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운기를 마친 상천은 식사를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음?’

계단을 내려가던 상천은 또다시 찾아온 장여진의 모습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도 할 얘기가 남았나? 귀찮게. 그냥 올라가 버려?’

꼬르륵!

하지만 상천의 배는 주인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요란한 소리를 밖으로 뿜어내었다.

그 소리가 그냥 작게 나왔으면 상관 않고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제법 크게 들렸다는 것이다.

그것도 장여진이 들을 정도로.

어디선가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을 들은 장여진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소리의 주인공이 상천이라는 것을 알고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어서 와요.”

“또 왔소?”

상천이 귀찮다는, 짜증난다는 티를 팍팍 내며 말했다.

“반응이 별로네요? 저 한 번 보려고 줄 서는 사람들도 은근히 많은데.”

장여진이 웃으며 말했지만 살짝 찌푸려진 상천의 얼굴은 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재미없는 사람이군요?”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찾아왔소?”

장여진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상천이 용건을 물었다.

“어제 했던 얘기 때문이에요.”

“그 얘긴 끝난 것 아니오?”

“어머, 끝난 줄 알았나요?”

“아니었소?”

상천이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로 물었다.

“그래요. 당신이 이곳 남녕을 떠날 때까지 계속될 거예요. 그게 귀찮고 짜증나면 제 제안을 수락하면 돼요.”

“그것도 아니면 일찍 남녕을 떠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지.”

상천의 말에 장여진이 놀란 듯 말했다.

“아! 그건 생각 못했네요. 그럼 서둘러 승낙을 받아야겠는데요?”

그렇게 말하는 장여진의 말투와 표정에서 조급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끈질긴 여자군. 귀찮겠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상천이 다시 용건을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요?”

“돈이 필요하다고 했죠? 왜 필요하죠?”

“…….”

그녀의 물음에 상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딱 붙은 입술은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건가요, 아니면 대답하기 싫은 건가요?”

“둘 다요.”

상천이 짧게 대답했다.

“문파 상황이 상당히 어려운 모양이죠?”

장여진의 말에 상천이 더욱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는 것이 옳았다.

“무례한 눈빛이군요. 인상 펴세요.”

보다 못한 여소정이 상천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하지만 상천은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무시하는 건가요?”

기분이 상한 여소정의 어투가 싸늘해졌다. 그런 그녀를 말린 것은 장여진이었다.

“그만해. 부대주.”

“하지만…….”

“괜찮아.”

“…알겠습니다.”

장여진이 만류하자 여소정은 내키지 않았지만 일단 입을 다물었다.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지만 뒷조사를 하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그저 문주라는 사람이 직접 나서서 큰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하다 보니 나온 추측이죠. 맞나요?”

장여진의 말에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상천이 내키지 않는 듯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렇소.”

“그럼 돈을 벌지 못했는데 어떻게 할 셈이죠?”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되오.”

“그 방법을 어제 제시하지 않았던가요?”

“내가 할 수 없는 방법이지 않소?”

상천의 말에 장여진이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러기 어렵죠. 그래서 차선책을 제시하러 왔어요.”

“…….”

상천은 묻지 않았다.

차선책이 무엇이든 결국 장여진이 원하는 것은 자신을 합산도문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그럴 수는 없지.’

“궁금하지 않나요?”

“궁금해야 하오?”

“네. 당연하지요.”

“왜 당연하다고 생각하시오?”

“그럼 왜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죠?”

장여진의 물음에 상천이 답답하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어차피 소저의 목적은 나를 합산도문으로 데려가는 것 아니오? 방법이 어떤 것이든 그것은 안 될 일이니 들을 필요가 없지 않겠소?”

상천의 말에 장여진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요. 우리의 목적은 그거예요. 하지만 그 방법을 들으면 마음이 바뀔 거예요.”

“듣지 않겠소.”

상천은 단호했다. 하지만 장여진도 물러설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럼 듣지 마세요. 전 말할 테니.”

“허!”

장여진의 말에 상천이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상천의 그런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큰돈이 필요할 정도라면 문파의 상황이 많이 안 좋은 거겠죠. 게다가 문주가 직접 나설 정도라면. 그 뜻은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문도들의 능력도 뛰어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말은 결국 큰돈이 필요한 이유는 무너져 가는 문파를 다시 되살리겠다는 뜻이겠죠?”

그녀의 말에 상천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장여진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문파를 되살리는 데 필요한 것은 돈이 전부가 아니에요. 알고 있죠? 돈뿐만 아니라 사람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실력과 명성이 필요하죠. 우리는 그 세 가지를 전부 충족시켜 줄 수 있어요.”

이번에도 상천은 대답은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오래 있으라는 말은 하지 않겠어요. 딱 일 년, 일 년 후 이곳에서 펼쳐질 무투대회가 끝날 때까지만 있어주세요. 그 후에는 사문으로 보내 드리지요.”

“가능할 것이라 보오?”

상천의 말에 장여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불가능할 건 또 뭐죠? 어차피 이대로 돌아가도 돈을 벌지 못했으니 또다시 사문을 비워야 할 것 아닌가요?”

“그럴지도 모르오.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사문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광서성에서 일 년 동안이나 있어야 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 이유는…….”

“뭐죠? 두 번째 이유가?”

상천이 말끝을 흐리자 장여진이 재촉하듯 물었다.

“지금 당장 큰돈이 없어도 다음 대회가 열릴 때까지 먹고살 수는 있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요. 귀주성에서 내년에 열릴 대회가 이곳 광서성에서 열릴 대회보다 더 빨리 열리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않소?”

상천의 말에 장여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상천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실력과 명성. 실력은 쌓으면 되오. 지금까지도 홀로 수련해 왔고 앞으로도 그러면 되니까. 명성? 무투대회에 나가서 우승은 아니더라도 상위권 성적을 얻으면 명성은 따라오지 않겠소?”

상천의 말을 듣고 있던 장여진이 살짝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은 그 정도 실력과 명성에 만족할 건가요?”

장여진의 말에 상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뜻이오?”

“말 그대로예요. 그 정도에 만족해요?”

“…….”

장여진의 말에 상천은 순간적으로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

“합산도문은 당신에게 더 큰 실력과 명성을 안겨줄 수 있어요.”

장여진의 목소리에는 자신감과 자부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상천은 왜 그런 것이 필요한지 아직까지 절실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가 원한 것은 한창 백룡문이 성할 때까지도 아니고 어느 정도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상천의 생각과 목표는 그 정도로 작은 틀 안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장여진은 그 바깥의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생각의 차이가 클 수밖에 없었다.

상천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자 장여진이 살짝 실망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당신은 좁은 세상에서 살고 있군요. 더 큰 꿈을 꾸고 있을 줄 알았어요.”

“소저가 말하는 더 큰 꿈이 무엇이오?”

상천의 물음에 장여진이 곧바로 대답했다.

“무림.”

“무림?”

“그래요, 무림. 당신은 백룡문이라는 좁은 무림만 꿈꾸며 살아가고 있어요. 광활한 무림, 당신은 그곳이 궁금하지 않나요?”

장여진의 말에 상천은 입을 다물었다.

‘내가 생각하는 좁은 무림, 그리고 그녀가 말하는 더 큰 무림.’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상천이 입을 열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그러자 장여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이에요.”

***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얼마 전에 시작한 것 같았던 무투대회는 벌써 결승전을 앞두고 있었다.

상천과의 비무 이후 그날 밤 울분을 토해냈던 막천풍은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상천에게 살갑게 다가왔다.

그런 막천풍의 태도에 상천은 처음에는 ‘이 사람이 뭘 잘못 먹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와 제법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함께 무투대회를 보았고, 여러 무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상천은 자신의 무공에 대한 것을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었고, 다른 무공들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본 것을 바탕으로 무공에 대해 논하다 보니 무학에 대한 상천의 생각 역시 종전보다 더 깊어졌다.

지금까지는 백룡문의 무공만을 가지고 홀로 생각하고 익히고 깨달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

자신보다 더 경험이 있고 여러 무공에 대해 더 많이 아는 막천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막천풍과 함께 무학을 논하면서 그제야 상천은 더 높은 실력과 명성을 쌓게 도와줄 수 있다는 장여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막천풍과 상천의 수준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다만 경험적인 측면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 차이가 엄청난 것이어서 상천이 느끼기에는 막천풍이 엄청 대단하게 느껴졌다.

막천풍이 그러한데 합산도문에 있는 무인들은 어떠할 것인가.

더 고강한 무공을 직접 익히고 봐온 그들.

그리고 더욱더 넓은 무림을 활보하면서 얻은 경험들.

그런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더욱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솔직히 장여진의 제안에 마음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자신을 설득하는 장여진의 말을 듣고 있으면 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상천이 결승전을 앞둔 지금까지도 고민하는 것은 백룡문에 있는 문도들 때문이었다.

보고 싶었고, 걱정이 되었다.

다들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단순히 어렸을 때 동고동락했던 형제들이라는 관계를 넘어 문주와 문도의 관계가 되다 보니 더욱 그랬다.

책임감도 더 커졌고, 그런 그들을 보살피지 못하고 떨어져 있는 지금도 심적 부담이 되었다.

처음 백룡문을 떠나기로 마음먹을 때까지만 해도 그런 부담은 전혀 없었다.

그들이 백룡문에 오기 전에도 떨어져 살고 있었고, 자신이 없어도 잘살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막상 백룡문을 떠나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점차 부담이 커지고 있었다.

그런데 일 년이나 더 떨어져 있어야 하다니.

그런 생각들이 상천으로 하여금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결국 결승전이 다가올수록, 어느 쪽이든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가 다가올수록 상천의 표정은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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