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화.
다음날.
전날 처음으로 술을 마셔서 그런지 상천은 엄청난 두통에 시달렸다.
인상을 찌푸린 채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앉은 상천은 아픈 머리를 어루만지다가 그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를 시작했다.
소주천 한 번을 하고 눈을 뜬 상천은 어느 정도 술기운이 가시고 괜찮아지자 일어서서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풀었다.
몸을 푼 상천은 다시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가만히 어제 장여진이 보냈던 전음을 떠올렸다.
[고마워요. 내일 찾아가지요.]
막천풍과의 비무가 끝나고 그녀가 자리를 떠나면서 보낸 전음이다.
‘진짜 줄 생각인가?’
그렇게 생각한 상천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무투대회에 참가한 것도 아니고 어쩌다가 비무 한번 한 것 가지고 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도 한두 푼이 아닌 우승 상금에 버금가는 큰돈을.
‘아니겠지. 어차피 손해 본 거 없으니까 됐지, 뭐.’
그렇게 생각한 상천은 늦은 아침을 먹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어라?’
계단을 걸어 내려가던 상천이 중간에 멈춰 섰다.
낯익은 사람이 식탁 하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설마… 진짜야?’
상천은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식탁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 여인은 다름 아닌 장여진이었던 것이다.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상천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아침이 늦네요? 아니, 점심인가요?”
정오가 다 되어서야 내려오는 상천을 보며 장여진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앉아요.”
상천은 말없이 그녀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어제 얘기했죠? 오늘 찾아오겠다고.”
“그 돈, 진짜로 줄 셈이오?”
상천이 조심스레 물었다.
“네. 왜요?”
장여진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상천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실 돈을 받을 이유가 아무것도 없지 않소?”
“약속을 했으니 주려는 거예요.”
상천의 말에 장여진이 어려운 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괜찮으니 그 돈은 받을 수 없소.”
“왜죠?”
“받을 이유도 없고, 받고 싶지도 않소.”
“음……. 왜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비무를 한 건 그의 사문과 내 사문의 관계 때문이오. 굳이 당신이 아니라도 했을 것이오.”
“하지만 단월검을 사용하지는 않았겠죠.”
그녀의 말에 상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당신과 전 어제 거래를 했고, 그 거래의 대가를 지불하려는 거예요.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장여진의 말에 상천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보며 장여진은 미소를 지었다.
“받기 싫어요?”
“싫다기보다는…….”
“싫다기보다는?”
“내키지 않소.”
“내키지가 않다고요?”
“그렇소.”
장여진은 그 이유를 설명하라는 듯 상천을 바라보았다.
“꼭 내가 광대 노릇 하고 돈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드오.”
“호호호! 그런 이유였어요?”
상천의 대답에 장여진이 밝게 웃었다. 그 모습에 상천은 물론이고 뒤에 서 있던 여소정도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 미안해요. 경망스런 모습을 보였네요.”
그렇게 말한 장여진이 웃음을 멈추고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상천을 바라보았다.
“그럼 제가 다른 제안을 하나 하죠. 들어보고 괜찮은 제안이라 생각되면 돈을 받아요.”
“일단 얘기해 보시오.”
상천의 말에 장여진은 속으로 ‘됐어!’라고 외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합산도문에 청운대가 신설될 거예요. 제가 청운대의 대주고 뒤에 서 있는 이 여인이 부대주죠.”
“그렇소?”
상천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청운대에 들어와요. 합산도문에서 청운대원으로 일하는 대가로 돈을 주겠어요.”
“싫소.”
장여진의 말에 상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오히려 당황스러운 쪽은 장여진이었다.
“왜죠?”
“난 돈을 벌어 돌아가야 할 몸이오. 일문의 문주가 오래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니오? 문도들이 기다리는데.”
상천의 말에 장여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하니 상천이 백룡문의 문주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문주의 자리에 앉기에는 상천의 나이가 너무 어린 까닭이었다.
“문주라고요?”
“그렇소.”
“진짜요? 나이가 어떻게 되죠?”
“올해 스물이오.”
“세상에! 나보다 어린데…….”
장여진은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고작 스무 살의 나이에 문주의 자리에 올랐단 말인가?
놀랍기는 여소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군요. 몰랐어요.”
장여진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럼 진짜 이 돈은 안 받겠다는 건가요?”
여소정이 은자 열 냥이 든 목함을 내밀었다. 하지만 상천은 그것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안 받겠소.”
“대단하네요. 이 정도 금액이면 다들 못 가져서 안달인데.”
장여진은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상천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인 장우량에게 심한 잔소리까지 들어가며 돈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알겠어요.”
그렇게 말한 장여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상천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있을 거죠? 대회 끝날 때까지 있을 건가요?”
“그렇소.”
“알겠어요. 그럼.”
상천의 대답을 들은 장여진이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가고 잠시 동안 식탁에 앉아 있던 상천이 점소이를 불러 식사를 주문했다.
합산도문 남녕지부로 돌아온 장여진은 의자에 앉아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서 여소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렇게 서 있기만 하면 힘들지 않아? 좀 앉아. 남화대에서 조장 맡고 있을 때에는 이렇게 서 있는 적이 없었을 거 아냐.”
“괜찮습니다. 적응됐습니다.”
장여진의 말에 여소정은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정말 괜찮아?”
“괜찮습니다.”
“정 그렇다면야…….”
여소정의 성격을 잘 아는 장여진은 더 이상 자리를 권하지 않았다.
“아쉬워.”
“예?”
“그 백룡문주.”
장여진의 말에 여소정은 전날 밤에 있었던 막천풍과의 대결을 떠올렸다.
‘확실히 생각보다 뛰어나긴 했지만…….’
전날 본 상천의 무위는 파악했던 것처럼 일류급의 무위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초식의 위력 등은 일류 정도에 불과했지만 움직임은 본신의 능력을 상회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와 비슷한 정도.’
여소정 자신도 일류급 무인이었다.
하지만 같은 일류라도 이류를 갓 벗어난 일류와 절정에 가까운 일류와는 천지차이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일단은 무투대회 참가자 중 선별하여 추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긴 하지. 그런데 말이지.”
장여진이 미소를 지으며 뒤쪽에 서 있는 여소정을 돌아보았다.
“포기하긴 이르지 않아?”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장여진의 말에 여소정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기에 더욱 그랬다.
“설득하는 거지, 뭐. 다른 방법 있어? 문주 자리 다른 사람한테 물려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쉽게 설득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어렵겠지.”
장여진이 너무나 쉽게 대답했다. 언뜻 설득하겠다는 생각만 있고 구체적인 방법은 아무것도 없는 듯 보였다.
“한 가지 여쭐 것이 있습니다.”
“뭐? 얘기해 봐.”
장여진의 말에 여소정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꼭 그 사람을 청운대에 들이시려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진지한 여소정의 말을 장여진은 가볍게 웃으며 장난으로 받았다.
“어? 그 사람 데려오길 간절히 바라는 건 부대주 아니었어?”
“예?”
여소정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장여진이 웃으며 말했다.
“아, 농담이야, 농담. 호호! 부대주도 어제 봤잖아. 실력, 그 정도면 탐낼 만하지 않아?”
“실력은 제법 있어 보입니다만 제 개인적인 사견으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 같습니다.”
여소정의 말에 장여진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장여진의 말에 여소정이 궁금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봐. 백룡문이라는 문파, 들어본 적 있어? 들어봤을 수도 있겠지. 워낙 흔한 이름이니까. 그런 문파의 무공을 익힌 스무 살의 청년이 그 정도 무위를 보였어. 그럼 앞으로는 어떨까?”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일문의 문주입니다. 대원으로 들인다 해도 오래 붙잡아둘 수 없는 일입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굳이 그런 사람을 들일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예?”
“어차피 그자는 문파로 돌아가야만 해. 그렇지?”
“그렇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어쩌면 우리는 인재 한 명 실력 키워주고 보내 버리는 꼴이 되겠지. 말 그대로 손해야.”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가 문파로 돌아가고 나서도 우리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면?”
장여진의 말에 여소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도련이 세를 불리면서 피해를 본 문파들이 상당해. 어쩌면 백룡문도 그런 곳 중 하나일 수도 있고. 이제 어느 정도 세력이 안정되었다면 그런 곳을 보듬고 끌어안을 필요도 있어. 더 큰일을 도모할 때 그들이 우리에게 힘을 실어준다면 훨씬 수월하지 않겠어?”
“하지만 백룡문은 귀주성에 있습니다. 귀주성에는 반월도문이 있지요. 그런데 굳이 이곳 광서에 있는 합산도문에 힘을 보태겠습니까? 설사 그런다 한들 반월도문에서 어떻게 나올지도 모릅니다.”
“합산도문에 힘을 보태는 게 아니라 사도련에 힘을 보태는 거지. 그런 명목으로 다가선다면 반월도문에서도 뭐라 하지는 못할 거야.”
“그렇군요.”
여소정이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큰돈이 필요하다는 건, 그리고 그 돈을 구하기 위해 문주가 직접 나섰다는 건 그만큼 문파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그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지 않을까?”
장여진의 말을 들은 여소정은 속으로 감탄했다. 합산도문에 있으면서 장여진에 대해서 들은 바로는 그저 철부지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부대주로 온 것도 그런 그녀를 뒷받침하기 위함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생각이 깊고 계획적이다.
장여진의 새로운 모습을 본 것이다.
“어쨌든 한두 번 찾아가서 설득해서는 될 일이 아닐 거야. 그 돈을 앞에 두고도 단호하게 거절하는 걸 보면. 그래도 될 때까지 해봐야지.”
장여진의 말에 여소정은 그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