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화.
상천이 검을 뽑고 자신을 겨누자 막천풍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두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고 기수식을 취했다.
그것을 본 상천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예전에 연무장에서 눈앞에 그렸던 호천강과 매거풍의 대결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 빠르게 떠올렸다.
이미 여권문의 풍절권은 익숙했다.
호천강과 매거풍의 대결을 한 번 그려보고 만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에는 호천강이 펼치는 단월검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풍절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빠르게 머릿속으로 매거풍이 펼쳤던 풍절권을 그린 상천이 눈을 떴다.
“준비됐나?”
상천이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막천풍이 물었다. 그러자 상천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도전하는 입장이니 먼저 가지.”
파앗!
막천풍이 땅을 박차고 상천에게 달려들었다.
생애 첫 비무.
전혀 다른 무공과 자신의 무공이 겨루는 일.
상천은 긴장했다.
눈으로 보고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그것을 넘어 직접 눈앞에 그려내어 봐왔던 비무가 아닌 실제로 몸으로 부딪치는 싸움.
다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말 그대로 살 떨리는 경험을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하게 된 것이다.
쒜에에엑!
막천풍의 풍절권이 살벌한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갈랐다.
상천은 단박에 그 초식을 알아보았다.
일대기에 쓰여 있는 비무를 눈앞에 그렸을 때 매거풍이 마지막으로 펼쳐 보였던 초식이다.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확실한 차이를 보여주고자 했음인지 막천풍은 처음부터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스슥.
상천의 발이 가벼운 소리와 함께 바닥을 쓸었다.
부드러운 하체 움직임과 더불어 상체 역시 자연스럽게 곡선을 그리며 막천풍의 주먹을 피해내었다.
상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자신이 익힌 무공을 실제 사람을 상대로 사용했고, 그것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도출해 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족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상천에게 이런 비무는 첫 경험이었지만 막천풍은 나름 여러 번의 경험을 쌓은 상태였다.
막아내는 것이라면 몰라도 피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막천풍이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다음 공격을 이어나갔다.
파팡!
막천풍의 양 주먹이 거의 같은 시간에 허공을 격했다.
상천은 재빨리 상체를 뒤로 젖혔다.
막천풍의 주먹이 허공을 격하며 터져 나온 권풍이 상천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상천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는 상체를 젖힌 상태에서 뒤로 물러서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 순간을 막천풍은 놓치지 않았다.
재빨리 간격을 좁히며 풍절권 초식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상천의 다리가 어지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여진과 여소정은 흥미진진하게 두 사람의 비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상천이 피하기만 하고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하자 이내 실망하는 기색을 보였다.
기껏 사준 검은 제대로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막천풍의 기세에 밀리기만 하면서 기대에 못 미친 것이다.
“별로네. 아니면 내가 너무 기대치를 높게 잡았나?”
장여진이 중얼거렸다. 그 뒤에서 여소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둘의 비무를 지켜보았다.
막천풍의 기세는 꺾일 줄을 몰랐다.
상천은 뒤로 물러서기 바빴고, 장여진의 말처럼 검 한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천의 얼굴에서 당황한 기색은 읽을 수 없었다.
오히려 더욱 집중력을 높이며 두 눈으로 막천풍의 공격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조금 더… 조금 더…….’
막천풍의 공격을 피하며 상천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상천은 막천풍의 공격을 점점 더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스치거나 상박을 스치기도 하고, 조금만 늦었어도 어디 한군데가 부러질 것 같이 아찔한 순간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자 장여진의 표정에는 노골적으로 실망의 기색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는 공격을 피해내는 상천의 움직임이 점점 간결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쓸데없이 움직임이 컸기 때문에 막천풍으로 하여금 다음 공격을 펼칠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
하지만 점차 가면 갈수록 움직임이 간결해지면서 막천풍이 다음 공격을 펼쳐 낼 시간을 줄이고 있었다. 실제로 그 때문에 막천풍은 무리를 하고 있었다.
장여진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 듯했지만 여소정은 달랐다.
상천의 움직임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놀라고 있었다.
‘가능한 움직임인가?’
아무리 높게 봐도 상천의 무공 수위는 일류 정도였다.
일류 수준의 무공으로 이런 움직임이 가능하기란 어려웠다.
지금 상천의 움직임은 단순히 보법이 뛰어나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흐름을 읽는 눈이 뛰어나고 상대의 무공과 자신의 무공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만 가능했다.
무공의 겉만 알고서는 이런 움직임을 보이기 어려웠다.
‘생각보다 더 뛰어나단 말인가?’
여소정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드디어 상천의 손에 들린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여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여소정 역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봤어?”
“예, 봤습니다.”
“어떤 것 같아?”
“생각보다 더 뛰어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장여진의 얼굴에 조금 전까지 드리워져 있던 실망한 기색이 싹 사라졌다.
상천이 보여준 한 수 때문이었다.
점점 더 아슬아슬하게 막천풍의 공격을 피하던 상천이 움직인 것은 그의 공격이 어설프게 펼쳐진 순간이었다.
상천이 그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것이 그런 결과를 낳았다.
워낙 다음 공격을 펼쳐 내기까지의 시간이 짧다 보니 제대로 된 초식을 펼쳐 낼 수가 없었다.
거리를 벌려 시간을 벌 수도 있었지만 막천풍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공격이 스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더 몰아치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호흡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제대로 된 초식을 준비하고 펼쳐 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무학의 수준이 더욱 높았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현재 막천풍의 수준에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어설프게 초식을 펼쳐 내었고, 상천은 그것을 그대로 통과해 버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간소한 움직임을 통해 그의 공격을 피해 버렸다.
그리고 그의 검이 움직였다.
다른 초식이 아니었다.
단월검 제일초식 삭풍.
막천풍은 풍절권의 모든 초식을 펼치며 상천을 압박했지만 상천은 그런 그를 단 한 수, 그리고 첫 번째 초식으로 무력화시킨 것이다.
상천이 아래로 늘어뜨렸던 검을 들어 올렸다.
검끝이 막천풍의 심장에 닿았다.
막천풍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
단 한 번도 자신이 기세에서 밀린 적이 없었다.
상천은 피하기 급급했고, 반격할 기회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자신이 이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상천이 이겼다.
밀어붙이던 자신의 기세가 한풀 꺾인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단 한 수에 당할 정도로 엄청난 실수를 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자신이 펼쳤던 마지막 초식은 그 위력이 반감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처럼 손쉽게 피하고 반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 스스로를 믿었고, 여권문의 무공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졌다.
명예 회복을 위해 절치부심했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다.
“하…….”
부지불식간에 허탈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결코 내뱉고 싶지 않았던 말을 하고 말았다.
“졌다.”
그 말에 상천이 검을 내렸다.
“와아〜!”
두 사람의 비무를 지켜보던 누군가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것이다.
“대단하다!”
“저런 사람이 왜 무투대회에 안 나왔지?”
“그러게. 두 사람 다 장난 아닌데?”
“백룡문? 귀주성에 있다고 했지? 그런데 왜 안 알려졌지?”
“여권문도 마찬가지지!”
사람들이 저마다 감탄을 입 밖으로 내었다.
지금 이 순간이 상천은 얼떨떨했다.
그저 처음으로 비무를 해본다는 사실에 즐거웠고, 그러다 보니 흠뻑 빠져들었고, 그러다 보니 이기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환호성을 들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이런 기분.
상천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런 상천을 지켜보던 장여진이 여소정에게 물었다.
“어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 대원으로.”
“예?”
여소정이 놀라 물었다. 청운대의 대원은 무투대회 참가자들로 구성하기로 한 것 아니었던가.
“하지만…….”
“어차피 무투대회에서만 인원을 충당하기에는 부족하잖아. 한 명이라도 인재가 있으면 데려오는 게 좋지 않겠어?”
“그렇긴 합니다만…….”
여소정이 말끝을 흐렸다.
“왜? 마음에 안 들어? 난 부대주가 저 사람 눈여겨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것 아닙니다.”
장난기 섞인 장여진의 말에 여소정이 딱딱한 어투로 대답했다.
“아닌 척하기는.”
“대주님!”
“알았어, 알았다고. 아무튼, 그렇게 알고 있어.”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여소정은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는 상천을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
주점 밖에서 벌어졌던 비무가 끝나고 흥분했던 사람들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계속 술을 마시거나 집으로 돌아가거나.
한동안은 흥분된 기분으로 상천과 막천풍이 펼친 비무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도 점차 잠잠해졌다.
“젠장!”
막천풍이 술잔을 기울이며 소리쳤다.
상천에게 진 것이 어지간히도 분한 모양이었다.
그 앞에 앉아 있던 상천은 그런 막천풍을 조금은 미안한 듯 바라보았다.
“그렇게 분하오?”
“당연하지!”
상천의 물음에 막천풍이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듯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거참, 남자답지 못하게. 졌으면 그냥 깔끔하게 인정하고 털어버리면 그만이지…….”
상천의 한마디에 막천풍의 두 눈에 불똥이 튀었다.
“뭐? 패배를 수치로 여기지 않으면 무인이 아니다!”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여기.”
상천이 술병을 들어 막천풍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쳇!”
상천이 따라준 술잔을 들고 잠시 바라보던 막천풍이 단박에 술을 들이켰다.
“대체 왜 진 거지? 다 쓰러져 가는 문파의 무공인데?”
막천풍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하기 어려웠는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음? 백룡문에 갔었소?”
“그럼, 여기까지 어떻게 알고 찾아왔겠나?”
“애들은… 잘 지내오?”
상천이 그리움을 담아 물었다. 그러자 막천풍이 살짝 풀린 눈으로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는구나. 다행이다.”
상천이 안도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을 왜 문도로 받아들였나?”
“뭐?”
상천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딱 봐도 개판이더군. 이건 문도인지 아니면 그냥 거기에 들어와 사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무공을 익히려는 열망보다는 그저 하루하루 사는 것에 만족하는 것 같았단 말이지. 그런 사람들을 문도로 받아들이다니, 이해할 수가 없어.”
막천풍의 말에 상천이 한숨을 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 함부로 하지 마시오.”
“기분 상했나? 원래 좋은 말은 듣기 싫은 법이지. 무너져 가는 문파를 조금이라도 일으켜 세우려면 제대로 된 문도들을 받아들여서 제대로 키워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사람들로는 아무것도 못해. 기껏해야 삼류를 조금 벗어나는 수준이겠지.”
막천풍의 말에 상천이 한 번 더 참으며 말했다.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어.”
더욱 화가 난 상천이 반말을 하자 막천풍이 그를 보며 피식 웃어 보였다.
“나도 한 문파를 이끄는 문주라네. 같은 문주로서 충고하는데, 얼른 그들 내쫓고 제대로 된 제자들을 받아. 안 그러면…….”
“그만하라고!”
화가 난 상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막천풍의 멱살을 잡았다.
“왜 이래? 이거 놔.”
그쯤 되자 막천풍도 울컥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문파 일은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그러니 말 함부로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상천의 몸에서 자신도 모르게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이군. 미안하네.”
상천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과민한 반응을 보이자 막천풍이 사과했다.
막천풍의 멱살을 거칠게 놓은 상천이 자신의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워 단박에 들이켰다.
“먼저 가겠소.”
상천이 자신이 머물고 있는 객잔으로 향했다. 그 후로 막천풍은 홀로 술잔을 더 기울이다가 주점에 혼자 남은 시간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