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화.
“밤공기 참 좋지 않아, 부대주? 난 이상하게 아침 공기보다 밤공기가 더 좋더라.”
“예, 상쾌한 것 같습니다.”
“그치?”
장여진이 환한 표정으로 번화가를 앞장서 걸었다.
대회가 끝날 때까지 이곳 남녕에 머물기로 한 그녀는 합산도문의 남녕지부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굉장하지 않아?”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여진의 물음에 뒤따르던 여소정이 물었다.
“비무대회 말이야.”
“그 정도 무사들은 합산도문에도 많습니다. 아니, 문도들 수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여소정의 대답에 장여진이 발걸음을 멈추고는 말했다.
“그 분위기 말이야. 생사를 가를지도 모르는 대결을 보며 환호하는 사람들.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명예를 걸고 싸움을 하는 사람들. 그런 분위기, 우리 문파에는 없잖아.”
장여진의 말에 여소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 말대로 지금의 합산도문 분위기는 치열함과는 거리가 조금 멀었다.
“부대주, 술 할 줄 알아?”
“조금 할 줄 압니다.”
“그래?”
여소정의 대답에 장여진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부대주가 무공과 임무만 알지 그런 건 못하는 줄 알았거든. 여가 생활 같은 거 없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줄 알았어.”
장여진의 대답에 여소정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사람입니다.”
“어머, 웃을 줄도 알아?”
장여진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여소정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어, 화났어? 미안. 장난이었어. 기분 상하게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장여진이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무표정으로 변한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런 여소정의 반응에서 장여진은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살기가 조금 느껴졌습니다.”
여소정의 대답에 장여진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진지하게 주변을 살피자 장여진도 약한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진짜네? 누구지? 우리를 노리는 건가?”
“합산도문의 영역에서 그러기는 어려울 겁니다. 살기가 짙지는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였다.
“저쪽에서 싸움 났다!”
“진짜? 누구랑 누구?”
“나도 모르겠는데, 아무튼! 분위기가 살벌해!”
사람들이 한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며 소리쳤다. 그러자 장여진이 조금 표정을 풀며 말했다.
“저 싸움 때문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길거리에서 싸움질하는 사람들의 살기가 이 정도라니…….”
여소정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 광서성이 합산도문의 영역이긴 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는 그녀였다.
“우리도 가보자!”
“예?”
“싸움 났다잖아. 우리도 가보자고.”
“하지만…….”
“괜찮아. 조금 늦어도. 누가 뭐라고 하겠어? 그리고 싸움 구경만큼 재밌는 것도 없다잖아? 또 알아? 비무대회 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싸움이 벌어질지.”
그렇게 말한 장여진이 여소정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사람들이 몰려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아…….”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쉰 여소정이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랐다.
***
주점 밖.
그렇게 넓지 않은 공터에 막천풍과 상천이 마주 보고 섰다.
“그러니까, 형씨는 예〜 전에 매거풍이라는 분이 우리 조사님께 진 것을 되갚기 위해 날 찾았단 말이오?”
상천의 말투가 바뀌어 있었다.
공손하게 대하던 말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고, 오로지 평대만 남아 있었다.
자신과 싸우기 위해 찾아왔다는 막천풍의 이야기를 들은 상천은 바로 말투를 바꾸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연장자이기는 하지만 싸우기 위해 왔고, 같은 문주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그와 동등한 위치로 본 것이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 해서 예를 차리지 않는 것은 손가락질 받을 일이었지만 상천도 막천풍도 그런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상천이 그렇게 자신을 대하니 조금 더 마음이 차분해지고 말 그대로 ‘싸울 맛 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검은 없나?”
“없소.”
상천의 대답에 막천풍이 인상을 찌푸렸다.
과거 조사님이 그랬듯, 백룡문의 단월검을 이기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마시오. 백룡문에는 단월검만 있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상천의 그 말이 막천풍은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에 주변을 둘러보며 사람들에게 물었다.
“누구 검 좀 빌려줄 수 있소?”
막천풍의 말에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검법을 익힌 무인이라는 뜻.
그런 사람이 자신의 무기를 선뜻 빌려줄 리가 만무했다.
“후우…….”
막천풍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잠시동안 서 있던 막천풍이 뭔가 결심한 듯 소리쳤다.
“그럼 값을 지불 하고 사겠소!”
자신이 사용할 것도 아님에도 막천풍은 돈을 지불 하고 검을 살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막천풍은 반드시 단월검을 꺾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우리 대장간에 좋은 놈 많소이다! 값을 지불 하겠다면 내 후딱 다녀오겠소!”
몰린 구경꾼 중에 대장장이가 있었는지 누군가가 번쩍 손을 들며 말했다.
“좋소! 그렇다면…….”
“잠깐만요.”
막천풍이 대장장이에게 값을 지불 하고 검을 사겠다고 말하려는 찰나,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걸 써요.”
그렇게 말한 여인이 상천을 향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검을 던졌다.
상천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검을 낚아채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검을 던진 여인은 다름 아닌 장여진이었다.
싸움이 벌어졌다는 소리를 듣고 구경하기 위해 온 그녀는 그 대상이 상천이라는 것을 알고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검이 없다는 상천을 보며 막천풍이 인상을 찌푸리자 여소정에게 시켜 근처 대장간에서 청강검 한 자루를 사 오게 한 그녀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냐며 여소정이 만류했지만 막천풍이 그토록 꺾고 싶어 하는 단월검이 어떤 검법인지 궁금해진 까닭에 장여진이 고집을 부린 것이다.
“고맙습니다. 값은 비무가 끝나면 지불 하겠습니다.”
막천풍이 포권을 지은 채 장여진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빌려준 건 그쪽이 아니라 저 사람이에요. 값은 저 사람이 치러야겠죠?”
장여진의 말에 상천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기,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거 필요 없으니 도로 가져가시오.”
그렇게 말한 상천이 장여진을 향해 다시 검을 던졌다.
가볍게 그것을 받아 든 장여진이 묘한 표정으로 상천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막천풍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 가고 있었다.
“지금 뭐하는 짓인가!”
막천풍의 말에 상천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러는 당신은 뭐 하는 짓이오? 말하지 않았소, 검 필요 없다고.”
“내가 상대하려는 건 단월검이다.”
“단월검이 아니면 뭐 어때서?”
상천의 말에 막천풍이 다시 한번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우리 여권문의 풍절권(風絶拳)은 백룡문의 단월검에 패했다! 그러니 난 단월검을 깨뜨릴 사명이 있다!”
“거참, 답답하네.”
막천풍의 말에 상천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단월검이든 백룡권이든, 어쨌든 백룡문의 무공에 진 거 아니오?”
상천의 말에 막천풍은 할 말을 잃었다.
따지고 보면 그의 말에는 억지가 조금 섞여 있었다.
단월검이든 백룡권이든 어쨌든 백룡문의 무공에 패했으니 그 어떤 것이라도 이기면 될 일이었다.
“저분이 그렇게나 꺾고 싶어 하는 단월검, 저도 보고 싶네요.”
장여진의 말에 상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보고 싶다고 하면 보여줘야 하오?”
상천이 물었다. 그러자 장여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적어도 이곳 광서성에서 제가 보고 싶다고 하면 보여주셔야 할 겁니다.”
그녀의 말에 주변의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자신감 넘치는 말에 그녀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녀를 수행하는 여소정의 옷에 새겨진 문양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광서성에서 이름난 문파에 계신 모양인데 그런 건 다 필요 없소. 어쨌든 난 그 검 필요 없으니 도로 가져가시오.”
상천이 단호하게 말했다.
“검 값 지불 할 돈이 없어서 그러는 건가요?”
그녀의 말에 상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싸늘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요?”
“청강검 한 자루가 얼마나 한다고. 상대가 저렇게 나온다고 하면 귀찮아서라도 받아줄 만한데 굳이 고집부려 가면서까지 검이 필요 없다고 하는 데에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지 않나요?”
그녀의 말에 상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돈이 없어서. 아닌가요?”
그녀의 말에 상천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검 값을 지불 할 돈이 없었기에 거절했다.
만약 장여진이 자신이 아닌 막천풍에게 검 값을 받겠다고 했다면 못 이기는 척 사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값을 받겠다는 말을 하는 순간 그럴 수가 없었다.
‘젠장. 돈!’
그렇게 생각하며 차마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장여진의 전음이 귀를 파고들었다.
[돈이 필요해서 무투대회에 나가려고 했다지요? 과연 실력이 어느 정도 되기에 무투대회 우승 상금을 노리고 대회에 참가하려는 거죠? 궁금하네요. 이 검으로 저자와 비무를 하세요. 만약 그 정도 실력이 된다면 검 값도 받지 않고 우승 상금에 준하는 돈도 드리겠어요.]
그녀의 제안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상천은 망설여졌다.
무투대회에 참가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돈을 벌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사라진 상황이다.
그런데 처음 보는 여인이 그런 제안을 해왔다.
당연히 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망설이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자존심.
그녀의 제안은 혹하는 마음이 생길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이 적선을 받는 거지가 된 기분이기도 했다.
무투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해 받는 상금은 자신이 일을 해서 벌어들이는 돈과 같았지만 지금 그녀의 제안은 돈 많은 갑부 앞에서 억지로 재롱을 떨고 받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상천의 망설임이 길어지자 장여진이 다시 한번 전음을 보냈다.
[어떻게 할 건가요?]
그녀의 재촉에 상천이 크게 한 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백룡문에 남아 있는 병목을 비롯한 다른 아이들을 생각했다.
자신의 자존심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생계도 중요했다.
“좋소.”
상천의 대답에 장여진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검을 던져주었다.
“잘 생각했어요.”
그녀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막천풍에게 시선을 돌린 상천이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스릉!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덤비시오.”
상천이 막천풍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