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화.
“하암!”
막천풍이 하품을 했다.
그 정도로 두 사람의 대결은 재미가 없었다.
한 식경 가까이 흘렀지만 탄식을 자아낼 만한 장면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보는 사람들이 지루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금방 끝날 것 같은 기미도 보이지 않으니 더욱 그랬다.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한 번 켠 막천풍은 슬쩍 옆을 보았다.
그의 옆에는 상천이 뚫어져라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엄청나게 흥미로운 것을 보고 있는 듯 얼굴 표정도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재밌소?”
막천풍이 슬쩍 물었다.
하지만 상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여전히 두 사람의 대결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막천풍은 살짝 기분이 상했다.
옆에서 사람이 말을 걸었는데 들은 척도 하지 않으니 무시당한 기분이었던 것이다.
기분이 상하니 시선도 고울 리 없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상천을 바라보던 막천풍의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뚫어져라 두 사람의 대결을 바라보고 있는 상천의 시선에서 고도의 집중력이 느껴진 것이다.
자신을 무시해서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닌, 집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듣지 못한 것이다.
‘이런 대결에서 뭘 얻을 게 있다고…….’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막천풍은 졸린 눈으로 비무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총 열여섯 번의 대결 중 첫 번째 대결을 제외한 나머지 대결은 모두 금방 끝났다.
어느 한쪽의 실력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서로가 앞뒤 보지 않고 막무가내 식의 대결을 펼쳤기 때문이다.
초식을 사용하는 듯했지만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저 막싸움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준 낮은 경기도 있었다.
첫날의 대회가 끝나고, 막천풍은 한숨만 푹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진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결들에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막천풍은 관중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상천일 것이라 생각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저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던 자신의 옆에 앉은 약관의 청년만이 기억에 남을 뿐이었다.
‘언뜻 무공을 익힌 것 같기도 하고……. 그 정도 집중력이면 무엇을 하든 제 몫 이상을 할 사람이 될 테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대회장을 빠져나온 막천풍의 시선에 여전히 상기된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는 상천이 보였다.
막천풍의 눈에 비친 상천의 표정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본 것 같은 희열과 흥분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런 상천을 보며 막천풍은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오늘 펼쳐진 대결의 무엇을 보고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오히려 상천이 신기하게만 보였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저런 대결을 보고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로 실력이 형편없는 건가?’
오늘 펼쳐진 대결은 일류급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고 그렇다고 이류급 싸움이라 치부하기에는 약간 수준이 있는 정도였다.
일류급에 못 미치는 대결을 보고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삼류 정도 되는 수준의 무공을 익힌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후후. 내일 이후의 대결을 보면 어떤 표정일지 궁금하군.’
그렇게 생각하며 막천풍은 상천과 반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연치 않게 자신이 그렇게 찾고 있는 상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그였다.
객잔에 돌아온 상천은 여전히 상기된 표정이었다.
멍한 표정으로 침상에 걸터앉은 상천은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했다.
처음으로 보는, 자신이 익힌 무공과는 전혀 다른 무공.
그것은 십 년 동안 백룡문의 무공만 보고 익혀온 상천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수준이 높고 낮은 것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상천은 그들이 사용하는 무공이 자신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고 있었다.
비록 그들이 사용한 무공이 지금 현재 상천의 수준에 못 미친다 하더라도 분명 그 안에는 단월검, 백룡권에는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게다가 수준은 떨어진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비무, 아니, 대련 경험도 없이 홀로 수련을 해온 상천에게 두 사람의 실전을 눈앞에서 직접 본다는 것은 또 하나의 색다른 경험이었다.
침상에 가만히 앉아 있던 상천은 인상 깊었던 몇몇 대결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상천은 침상에 앉은 채 앞쪽을 바라보았고, 눈앞에는 두 명의 환영이 그려지며 아까 보았던 대결들을 재현하고 있었다.
상천의 표정이 다시 상기되기 시작했다.
다음날.
막천풍은 일찌감치 대회장을 찾았다.
알짜배기 대결들이 몰려 있는 날인만큼 막천풍처럼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일찍 대회장을 찾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막천풍은 줄을 선 사람들을 쭉 훑어보았다.
어제 자신의 옆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없는 대결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던 상천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상천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은 막천풍은 자신의 순서가 되어 대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음? 후후.’
대회장으로 들어선 막천풍은 자리를 찾다가 미소를 지었다.
자신도 나름 일찍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먼저 상천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어제와 비슷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막천풍은 그런 상천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가 앉아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상천의 옆에 앉았다.
상천은 자신의 옆에 누가 와서 앉았음에도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기대감 가득 찬 표정으로 텅 빈 비무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험험. 어제 시합은 재미있었소?”
막천풍이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러자 상천이 막천풍을 바라보았다.
“어?”
상천은 깜짝 놀랐다.
어제 옆에 앉아서 함께 대회를 본 사람이 오늘도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 얼굴이 그렇게 놀랄 정도요? 나름 괜찮은 얼굴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막천풍이 장난기 섞인 말투로 물었다.
“아닙니다. 그냥 잠깐 놀랐을 뿐입니다. 미안합니다.”
상천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하하하! 괜찮소. 어제는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집중해서 보던데.”
“재밌더군요.”
상천의 대답에 막천풍이 어제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나 수준 낮은 대결이 재밌었다니…….”
막천풍의 중얼거림에 상천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다른 사람의 무공, 그리고 제가 익힌 것과 다른 무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하하!”
상천의 말에 막천풍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이냐는 뜻이다.
“지금까지 혼자 무공을 익히고 다른 지역으로 오는 것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상천의 대답에 막천풍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문파의 문도가 아닌 낭인무사라 하여도 가르쳐 주는 사부 없이 혼자 무공을 익히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타고난 무골이 아니고서는 비급만 보고 무공을 익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상천의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진짜 혼자 익혔소?”
“거의 혼자 익혔습니다.”
못 믿겠다는 듯 묻는 막천풍을 보며 상천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러는 사이, 대회 두 번째 날의 첫 번째 시합을 펼칠 두 명이 비무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둘 다 검을 들고 있는 검사였다.
두 사람이 비무대 위로 올라오자 그들의 얼굴을 확인한 관중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알아보는 이가 있는, 진짜 흥미진진한 대결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던 상천과 막천풍도 말을 멈추고 비무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상천의 표정은 어제보다 더 큰 흥분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
막천풍과 상천이 대회에 집중하고 있는 같은 시각.
장여진은 여소정을 대동하고 귀빈석에서 대회를 관람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첫날 대회보다는 두 번째 날 대회에 올라오는 사람들이 진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전날에는 보러 오지 않았다.
한참 동안 대결을 지켜보던 장여진이 여소정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생각보다 실력들이 좋은데? 물론 숫자가 적다는 게 문제지만.”
“네?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문하셨는지…….”
장여진의 물음에 여소정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
“아닙니다.”
여소정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어쨌든, 이번에 생각보다 실력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고.”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얼핏 듣기로는 이번 대회 참가자의 수준이 작년보다 낫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래?”
여소정의 대답에 장여진이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다시 비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녀의 뒤에 서서 여소정이 힐끗 어느 쪽을 바라보다가 비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시선이 머물렀던 곳에는 상천이 막천풍과 함께 유심히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둘째 날까지의 시합으로 참가자 중 반절이 떨어져 나갔다.
반절이 떨어져 나가기는 했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수준의 무인들이 몇 명 남아 있었다.
하지만 확실히 수준 높은 대결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둘째 날의 대결이 끝나고, 다음 대결까지 사흘의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사람들은 벌써부터 다음 대진을 확인하며 승부에 대해 갑론을박을 펼치고 있었다.
사흘 후의 시합 때부터는 내기도 좀 더 활발해질 것이고, 그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 분명했다.
단순히 대결을 보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
그리고 그와 관련된 것을 여기저기에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
이유야 어떻든 많은 사람들은 기대를 감추지 못하고 점차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홀로 객방에 있는 상천처럼.
이틀간 무투대회를 지켜본 상천은 확실히 자신이 알던 것보다 세상이 훨씬 더 넓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껏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여러 가지 무공.
그리고 전신을 부르르 떨게 만드는 살기.
아직까지 대회가 진행되면서 사망자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목숨을 내건 사투를 보면서 상천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나도 싸우고 싶다. 저들과 부딪쳐 보고 싶다.’
처음에는 그저 돈을 벌 생각으로 막연하게 나가고 싶어 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무공을 익힌 한 명의 무인으로서.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 보고 시험해 보고 뛰어넘고 싶은 마음에 무투대회에 대한 갈망이 커졌다.
그런 상천의 감정은 겉으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고 고스란히 드러난 감정은 상천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막천풍의 눈에 온전히 들어왔다.
막천풍에게 상천은 흥미로운 존재였다.
무공을 홀로 익혔다는 것도 그렇고, 무투대회를 보며 어린아이처럼 흥분하는 모습도 그렇고.
상천의 반응은 무투대회를 보며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일반인과는 그 궤를 달리했다.
일반 사람들이 무투대회에 열광하는 것은 자신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본다는 희열, 그리고 답답함을 풀어줄 수 있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었다.
일상생활 속에서 느끼는 답답함, 짜증, 걱정, 고민 등 여러 가지 감정을 무투대회에 참가한 누군가를 응원함으로써 풀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상천은 달랐다.
마치 미지의 세계를 개척한 사람이나 보일 법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상천에게 무투대회는 다른 사람들처럼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는 통로가 아닌,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종이에 처음으로 그린 그림과 같았다.
그런 상천의 모습을 보는 것이 막천풍에게는 또 하나의 재미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곳까지 온 목적을 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 상천을 지켜보면서도 도검을 든 사람을 날카로운 눈으로 훑고 있었다.
자신이 찾는 상천이 스스로가 흥미를 느끼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전혀 상상하지 못한 채.
사실 따지고 보면 상천이라고 해서 굳이 검을 들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매거풍이 호천강의 단월검에 당했다는 사실이 너무 강하게 뇌리에 박혀 있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하게 상천 역시 검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사흘의 시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