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화.
합산도문(合山刀門).
광서성에 자리 잡은 사도련의 일익이다.
하지만 광서성 사람들은 합산도문이 얼마나 큰 문파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저 사도련의 일원이고 도검을 들고 다니는 이들의 입에 합산도문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니 그저 큰 문파구나 하는 정도였다.
광서성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사도련에 속한 다른 세 곳 역시 합산도문의 정확한 무력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회의에서도 합산도문의 문주인 장우량은 과묵한 편이었다. 의결을 할 때 가부(可否)와 관련된 의사만 짤막하게 피력할 뿐이었다.
그 외에 외부 활동이 거의 없다 보니 다른 도문의 문주들은 합산도문에 대한 모든 판단을 유보해 놓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렇게 합산도문은 사도련 내에서도, 중원 내에서도 많은 것이 감춰져 있는 신비로움을 간직한 문파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합산도문은 광서성의 성도인 남녕 옆에 있는 합산에 위치하고 있었다.
높지 않은 산언저리에 위치한 합산도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봤을 때의 이야기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산 전체가 합산도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산 곳곳에 세워진 건물은 물론이고 수십 개의 동굴, 그리고 인위적으로 동굴을 뚫어 안쪽에 만든 공간까지,
합산도문은 말 그대로 천연 요새화되어 있었다.
장우량의 처소는 아담하고 검소했다.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지 않았고, 딱 필요한 것들만 최소한의 동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침상 위에는 작은 눈에 선이 굵은 얼굴을 한, 그리고 옷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충분히 얼마나 근육질인지 짐작할 수 있는 체형의 장우량이 앉아 있었다.
오수를 취하고 일어난 장우량은 간단히 세안을 마친 뒤 집무실로 가기 위해 방문을 나섰다.
“아버지!”
방 밖에서는 장우량의 딸인 장여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색 긴 머리를 늘어뜨린 그녀는 갸름한 얼굴에 큰 눈, 그리고 살짝 미소를 지을 때면 쏙 들어가는 보조개를 가진 미인이었다.
“아버지이〜 오수는 편히 취하셨어요?”
그녀가 장우량에게 달라붙으며 애교를 부렸다.
보통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식이 달라붙어 애교를 부리면 아버지 입장에서는 좋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장우량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또 뭐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러느냐?”
장우량의 한마디에 뜨끔한 장여진이 다시금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원하는 거라뇨? 딸이 아버지한테 이러는 게 꼭 뭘 원할 때만은 아니잖아요?”
“넌 그러지 않느냐?”
이어진 장우량의 말에 장여진이 입을 빼쭉 내밀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말해봐. 또 뭐냐?”
장우량이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거…….”
결국 장여진이 아버지를 찾아온 목적을 실토하고 말았다.
“또 그 얘기냐?”
장우량은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정면을 주시하며 말했다. 그러자 장여진이 총총걸음으로 그를 지나쳐 앞을 막아서고는 말했다.
“오늘 답해주시기로 했잖아요?”
“아직 오늘 지나려면 멀었다.”
그렇게 말하며 장우량이 그녀를 지나쳤다.
“아버지!”
멀어지는 장우량을 잠시 동안 서서 빤히 바라보던 장여진이 포기할 수 없다는 듯 따라가며 말했다.
“오라버니들한테는 원하는 대로 다 해주셨으면서 저한테는 왜 그러세요? 네? 네? 네?”
장여진의 물음에 장우량이 다시금 발걸음을 멈추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지금까지 네가 저지른 일들을 생각해 봐라. 혼자서도 그 정도인데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수하들이 생기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구나.”
장우량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다신 그런 일 없을 거라고 했잖아요.”
“그 말만 골백번은 더 들은 것 같다.”
“못 믿으시겠어요? 왜요? 어째서요? 딸이 하는 말인데요?”
“지금까지 네 말 믿어서 피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 않느냐?”
그렇게 부녀지간의 대화가 오가는 사이 두 사람은 장우량의 처소가 있는 전각 밖으로 나왔다.
“이젠 진짜로! 정말로! 그런 일 없을 거예요! 네? 그러니까 허락해 주세요!”
장여진이 거의 애원하듯 말했다. 그런 그녀를 힐끗 쳐다본 장우량이 집무실로 발걸음을 서두르며 말했다.
“저녁때 얘기해 주마. 좀 더 생각해 보고.”
그 말에 장여진이 활짝 펴진 얼굴로 멀어지는 장우량에게 소리쳤다.
“꼭이에요! 꼭! 오늘 저녁때! 아버지, 사랑해요!”
그녀의 말에 집무실로 향하는 장우량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집무실로 들어선 장우량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노인을 한번 보고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총관?”
장우량으로부터 군사라 불린 노인, 갈위가 읍하며 대답했다.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갈위가 길게 늘어진 흰 수염을 매만지며 허리를 폈다. 깊게 파인 주름 사이로 드러나는 눈은 일흔은 되어 보이는 노인의 것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총기가 빛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투대회에 참가한 사람들 중에서 추린다는 건 마음에 안 들어.”
장우량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문주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본 문의 무사 중 잉여 전력은 없습니다. 그리고 청운대의 임무가 아가씨의 호위 겸 문파 인근의 순찰이라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갈위의 말에 장우량이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그래서 문제란 말일세. 엄밀히 따지면 그들은 본 문의 사람이 아니라 낭인들이야. 그런 사람들을 딸아이에게 붙이는 것도 탐탁지 않고, 딸아이가 그들을 이리 휘두르고 저리 휘둘러서 안 좋은 일만 생길까 걱정이란 말일세.”
그렇게 말한 장우량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부대주로 총명한 사람을 한 명 붙일 생각입니다.”
“누군가?”
“남화대(藍華隊) 갑조 조장 여소정이라는 여인입니다.”
갈위의 대답에 장우량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기억났다는 듯 말했다.
“남화대에서 충분히 대주가 될 수 있을 재목이라 평가받던 아이가 아닌가?”
“맞습니다.”
“그런 아이를 남화대주가 순순히 보내주겠는가?”
“별수 있겠습니까? 이미 본 문 내에 아가씨의 성정은 파다하게 퍼져 있습니다. 혹여나 거절했다가 아가씨의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갈위가 뒷말을 아꼈다.
하지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는 듯 장우량은 손사래를 쳤다.
“아무튼. 그 아이도 괜히 여진이의 말에 휘둘리지는 않을까 걱정이군.”
“걱정 마십시오. 여자아이이기는 하나 고집도 있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 싶으면 직언도 할 수 있는 성정을 지닌 아이입니다.”
“그런가?”
“예. 아가씨와 대원들의 중간에서 교량 역할을 잘해낼 겁니다. 처음에는 조금 버겁겠지만 금방 능력을 발휘하겠지요.”
갈위의 말에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이는지 고개를 끄덕인 장우량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여진이가 오라비들 성격 반만 닮았어도 좋으련만.”
그 중얼거림에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갈위도 내심 동감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
장우량으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낸 장여진은 합산도문 전체를 휘젓고 다녔다.
***
다리가 아픔에도 상천은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정말 너무 힘들어 더 이상 못 걷겠다 싶을 때에는 나무 그늘에 앉아 일각 정도 쉬었다. 앉아서 쉬는 동안 열심히 발도 주무르고 다리 안마도 해가면서 걸었다.
운기를 하면 빠르게 회복할 수 있겠지만 마땅한 장소도 없고 그럴 시간도 아깝다는 생각에 그냥 앉아서 주무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렇게 걷고 쉬기를 반복한 상천은 한 달 만에 광서성 남단(南丹)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고생에 고생을 해서 그런지 마을에 도착한 상천은 가진 돈 생각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객잔부터 찾아 들어갔다.
겉모습이 번지르르한 것이 비싸 보였지만 그런 것을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안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고 방값을 지불하고 난 상천은 곧바로 후회를 했다.
가진 돈의 반절이 하룻밤에 사라져 버린 까닭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상천은 그대로 쓰러지듯 침상에 누워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고 정오가 다 될 무렵이 되어서야 상천은 잠에서 깼다.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고 그냥 쓰러져 잔 탓에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미친 듯이 잤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비벼 뜨며 상천이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대충 눈곱을 떼어내고 옷매무새를 다듬은 다음 일층에 마련된 식당으로 내려갔다.
“허! 이렇게 고급스런 곳이었나?”
식당으로 내려온 상천은 깜짝 놀랐다.
사람이 많은 것은 둘째치고라도 식당 내부가 엄청 화려했다.
고관대작이나 갑부들만 들락날락거릴 것 같은 화려한 분위기의 식당을 생전 처음 본 상천의 눈은 휘둥그레 했다.
“식사하실 겁니까?”
여느 객잔의 점소이들과 달리 깔끔한 옷을 입은 점소이가 다가와 점잖은 어조로 상천에게 물었다.
“네? 아, 네.”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점소이의 안내에 따라 한쪽에 있는 식탁에 가서 앉은 상천은 간단한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식당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있던 상천은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생각보다 검을 차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상천의 생각대로 식당 곳곳에는 도검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식사 나왔습니다.”
간단한 음식을 주문했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식탁에 음식을 놓고 가려는 점소이를 상천이 붙잡았다.
“저기요!”
“네? 물어보실 것이 있으십니까?”
굉장히 딱딱한 어투로, 어떻게 보면 굉장히 귀찮다는 내색을 하며 점소이가 물었다.
“아, 그게… 도검을 찬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데…….”
상천의 물음에 작게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곧 남녕에서 무투대회가 열리는데.”
‘역시!’
점소이의 대답에 상천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사람들 전부 다 무투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인가?”
그러자 점소이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냥 구경 가는 사람들이 태반일 겁니다. 참가자들은 거의 다 남녕에 도착해 있을 테고.”
“벌써…….”
“무투대회 참가 신청이 대회 시작 한 달 전부터입니다. 그러니 이미 남녕에 도착해 있겠지요.”
점소이의 말에 상천이 화들짝 놀랐다.
“한 달 전?”
“네. 더 이상 물으실 것이 없으시면 전 바빠서 이만.”
서둘러 상천에게 목을 한 번 까딱하여 인사한 점소이가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벌써… 끝난 건가?”
상천은 고개를 푹 숙였다.
목돈을 벌 수 있는 기회라 무투대회에 참가하려고 했는데 그것이 무산될 위기에 처해 버렸다.
‘이대로 다시 돌아가야 하나?’
상천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백룡문에 있는 병목 등을 떠올렸다. 다시금 같이 지내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타지에 나와 있기 때문인지 많이 보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들자 진짜로 그냥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아올랐다.
하지만 상천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종삼의 마지막 모습과 그와 했던 약속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 일단 가보는 거야!’
그렇게 다짐하며 상천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식사를 마친 상천은 서둘러 방에 돌아가 짐을 챙겨 가지고 객잔을 나섰다.
밥도 먹었으니 조금 쉬었다가 갈 법도 하건만 상천은 그런 여유도 부리지 않고 서둘렀다.
늦기 전에 남녕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지정된 시간을 넘기면 방값을 추가로 지불해야 한다는 말 때문이었다.
그렇게 쫓기듯 객잔을 나선 상천은 부지런히 남녕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