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화.
며칠의 시간이 지났다.
새로운 곳에 와서 생활하는 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생활 습관부터가 예전과는 달라져야 했다.
집다운 집에서 살게 되었으니 몸가짐, 마음가짐 전부 다 그에 맞춰 변해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모두가 적응해 가기 시작했다.
특히나 옆 마을에서 일을 하고 있던 아이들은 처음에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는 것에 힘겨워했지만 이제는 제법 알아서 일어나는 경우가 늘었다.
그렇게 병목과 아이들이 백룡문에서의 생활에 적응이 되어갈 즈음, 상천이 다시 한 번 그들을 불러 모았다.
“나 돈 벌 거야.”
“돈?”
“어, 돈.”
상천의 말에 다들 서로를 한 번씩 쳐다보고는 다시 상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우리 객점에서 일해!”
“우리 목공소도 있어!”
저마다 자신들이 일하는 곳을 말하며 같이 일하자고 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상천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식으로 말고. 큰돈을 벌 거야.”
“큰돈? 큰돈은 왜 벌려고?”
배동삼이 물었다.
“우리 문파 키우려고.”
“키워? 어떻게?”
“건물도 다시 짓고 사람들도 불러 모으고, 그렇게 하려고.”
상천의 말에 배동삼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멀리 떠나는 거야?”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상천의 대답에 다른 아이들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오래 안 걸릴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없어도 지금처럼 생활하면 돼.”
상천이 아이들을 안심시키려 말했지만 그것이 쉽게 될 리 없었다.
“언제 떠날 거야?”
그런 아이들을 다독이며 병목이 물었다.
“내일.”
“내일?”
상천의 대답에 병목이 깜짝 놀랐다. 이렇게 빨리 떠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빨리 가야 빨리 돌아오지.”
상천의 말에 병목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상천은 마지막으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기다랗고 넓게 자른 종이에 정성스럽게 두 글자를 적었다.
봉문(封門).
봉문이라 적힌 종이를 들고 간단한 봇짐을 등에 진 상천은 백룡문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병목을 비롯한 모두가 정문 밖으로 배웅을 나왔다.
“나오지 말라니까.”
“그래도…….”
그나마 가장 의연한 모습을 보이던 병목이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씁쓸한 미소를 지은 상천은 정문 한쪽에 가지고 있던 종이를 단단히 붙였다.
“봉문이지만 기본적인 생활은 가능하니까……. 잘 부탁해.”
“걱정 말고 다녀와.”
“형, 잘 갔다 와.”
배동삼도 짙은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상천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래. 금방 올게. 다들 잘 지내고 있어. 아, 그리고 잡초 뽑는 거 잊지 말고.”
상천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들어가. 어서.”
“그래, 알았다.”
상천의 말에 병목이 다른 아이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몇몇 아이들은 상천이 멀어질 때까지 밖에 있으려 했지만 병목이 억지로 안으로 들여보냈다.
마지막으로 병목이 안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혔다.
비록 경첩이 떨어지기 직전의 허름한 정문이었지만 상천에게는 그 어떤 정문보다 더 단단하게 느껴졌다.
모두가 들어가고 난 후,
상천은 봉문이라 적힌 종이를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고는 조용히 읊조렸다.
“안녕, 사부.”
***
강호 무림은 현재 둘로 나뉘어 있는 상태다.
소림사를 중심으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로 대변되고 있는 무림맹과 사도련(四刀連)이 그것이다.
오랜 세월 정도무림의 주인을 자처해 온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와 다르게 사도련은 새롭게 중원에 등장하여 빠르게 세를 불린 네 개의 도문(刀門)이 연합한 연합체였다.
사람은 안정적인 것을 좋아하게 마련이다.
기존의 틀이 안정적이면 굳이 그 틀이 깨지는 것을 싫어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두려워한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더 좋아질 수도 있겠지만 그 반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현재의 안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도련이 등장했을 때에도 그랬다.
혹여나 말로만 들었던 강호무림이 피바다가 되는 날이 오는 것은 아닌지, 혹여 그 싸움에 무고한 자신들까지도 피해를 보지는 않을지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사도련이 세상에 나타나고 오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런 것을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딱히 무림맹과 친하게 지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심을 품지도 않는, 말 그대로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기만 할 뿐이었다.
사도련이 등장하고 무림맹과 큰 마찰 없이 지내왔기에 사람들은 두려움을 거두었다.
물론 사도련이 일정 규모 이상 세력을 불리는 것을 무림맹은 적절히 견제해 왔다. 때문에 사도련은 무림맹과 정면으로 충돌하면 전멸하는 것을 간신히 면할 정도까지만 세를 불릴 수 있었다.
또한 비록 사도련이 세력을 불리는 과정에서 무림맹에 속한 문파들이 피해를 보기는 했지만 무림의 평화를 위해서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이 무림맹의 생각이었다.
상천의 사문인 백룡문 역시 그러한 과정 속에서 점차 세력을 잃고 지금의 상황까지 몰리게 된 여러 문파 중 한곳이었다.
***
사도련은 도를 사용하는 네 곳의 문파가 모여 만든 연합체였다.
귀주성의 반월도문(半月刀門), 호남성의 은남도문(恩濫刀門), 광서성의 합산도문(合山刀門), 광동성의 천중도문(天中刀門)이 바로 그곳이다.
이 네 곳의 도문은 전부 도를 사용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거대 문파가 없는 각각의 성에서 세력을 키운 네 문파는 본디 무림맹에 속한 문파 중 한곳이었다.
하지만 거대 문파나 세가가 아니다 보니 무림맹의 요구 조건을 일방적으로 들어주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때로는 그들과 달리 불공평한 대우를 받기도 하여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에 호남성 은남도문의 문주인 가백현(價白現)의 제안으로 연합체를 만들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사도련은 무림맹을 탈퇴하고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귀주, 호남, 광동, 광서뿐만 아니라 강서성, 중경, 운남성 일부, 해남도까지 제법 넓은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비록 무림맹을 탈퇴하였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정도를 지향하는 문파들인 바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강호무림은 큰 탈 없이 평화를 지속할 수 있었다.
***
백룡문을 떠나온 상천은 허전한 마음을 쉽게 달래지 못했다.
지금 당장에라도 그냥 아이들과 함께 일을 하며 지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하지만 종삼과의 약속을 계속해서 되뇌며 마음을 다잡은 상천은 보름이 지난 지금 백룡문이 있던 귀주성 강구(江口)를 떠나 옹안(甕安)에 도착해 있었다.
객잔에 자리를 잡고 앉은 상천은 처음 와보는 이곳이 신기하기도 하면서 두렵기도 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한다?’
백룡문을 떠날 때부터, 아니, 그전에 병목과 대화를 나눴던 그날부터 상천은 무투대회에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익힌 무공이 어느 정도나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부딪쳐 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상천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는 엄청나게 무모한 생각이었다.
무투대회는 병목이 말했던 것처럼 비무를 하는 대회가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하는 싸움.
진짜로 죽을지도 모를 싸움을 하는 것이 바로 무투대회였다.
그런 곳을 일단 부딪쳐 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나가려 한다니 몰라도 너무 모르는 상천이었다.
객잔에서 간단히 음식을 시켜서 먹고 있는 상천은 사람들을 쓱 한번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고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상천의 귀는 어느 두 남자의 대화에 쏠려 있었다.
“이번 대회 우승자는 생각보다 약한 것 같지 않나?”
“약하긴, 상대자들 실력이 워낙 낮아서 그런 거지. 내가 보기엔 절정은 되어 보이던데?”
“절정?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그자가 절정이면 지난 대회 우승자는 초절정이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고작해야 일류급인 것 같던데.”
“일류는 더 되어 보이던데…….”
“아니라니까 그러네. 생각을 해봐. 절정 급 고수가 이런 지역 대회에는 뭐하러 나오겠어?”
“지역 대회라니? 이래 봬도 반월도문에서 후원하는 대회라고. 게다가 그 정도 상금이면 규모가 상당하잖아? 거기다가 귀주성에서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 다 모이는 대회인데.”
“에잇, 몰라. 아무튼 이번 우승자는 약해.”
‘끝난 건가?’
우승자 얘기를 하는 것을 보니 이미 대회가 끝난 것 같아 상천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듣자 하니 제법 규모가 있는 대회인 듯한데 그런 대회가 먹고 나서 뒷간 가듯이 자주 열리지는 않을 것이다.
‘흠…….’
식사를 끝마친 상천은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자 나이 어린 점소이 한 명이 차를 한 잔 내왔다.
“아, 저기…….”
“네? 뭐 물어보실 거라도 있으세요?”
어린 점소이가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상천에게 물었다. 그 모습이 마치 백룡문에서 지내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어 상천은 절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물어볼 게 좀 있어. 듣자 하니 무공을 겨루는 대회 같은 것이 열리는 것 같던데…….”
“아, 귀양에서 열리는 그 대회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래, 그거. 끝났니?”
“보러 가는 길이시면 늦었네요. 닷새 전에 끝났다고 들었어요.”
상천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다음 대회는 얼마나 더 있어야 열리는지 아느냐?”
“대회는 일 년에 한 번 열려요. 정확한 날짜는 반월도문에서 두 달 전에 공표를 하고요.”
“그렇구나.”
상천의 대답에 점소이가 허공을 바라보며 뭔가를 헤아리는 듯하더니 말했다.
“제가 얼핏 듣기로 두 달 후에 광서성 남녕(南寧)에서 합산도문이 주최하는 무투대회가 있어요. 부지런히 가면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점소이의 말에 상천이 눈을 빛냈다.
“남녕이라고 했지?”
“예. 사도련의 네 개 문파에서 후원하거나 주최하는 무투대회 중 마지막 남은 대회예요. 나머지 세 개 대회는 이번에 끝났고요.”
“그렇구나. 고맙다.”
상천이 품에서 동전 열 문을 꺼내 점소이의 작은 손에 쥐어주었다.
돈을 받아 든 점소이는 함박미소를 지으며 상천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부리나케 뛰어갔다.
“남녕이라…….”
그렇게 중얼거린 상천은 서둘러 음식 값을 치르고는 객잔 밖으로 나섰다.
객잔 밖으로 나선 상천은 곧장 광서성 남녕으로 방향을 잡았다. 부지런히 가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점소이의 말은 말을 탔을 경우를 말하는 것이었지만 상천은 그냥 걸었다.
말을 타본 적도 없었거니와 그렇게나 먼 거리를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럴 생각도 하지 못한 까닭이다.
어쨌든 상천은 방향을 남쪽으로 잡고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