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화.
천아.
네가 이 서찰을 보고 있을 때면 난 아마 눈을 감았을 게다. 먹물이나 말랐을지 모르겠구나.
너를 처음 만난 날을 난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단다.
당돌하게 제자가 되어주겠다고 하던 네 모습을 보고 난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지.
우연히 찾아온 인연이었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그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단다.
지금에 와서 고백하건대 난 네게 참 많은 거짓말을 하면서 십 년을 살아왔단다. 이렇게 가는 것도 아마 그 벌을 받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부디 읽고 너무 화내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 백룡문은 일인전승의 문파가 아니란다.
제법 많은 문도를 거느리던 중소 규모의 문파였지. 네가 읽은 일대기의 주인공인 호천강 조사님은 나름 강호 무림에서 이름을 날리던 분이셨고.
거기까지 읽던 상천이 코를 훌쩍이며 중얼거렸다.
“쳇! 내가 몰랐는지 알아? 다 알고 있었다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상천의 두 눈에 결국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우리 백룡문이 쇄락의 길을 걷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인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네가 알고 있는 무공들이 비록 내가 알려준 것처럼 신검, 신권, 신보, 신공은 아닐지라도 나름 역사 깊은 무공이고 실제 강호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이어받을 인재가 백룡문에는 없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지.
“이것도 다 알고 있었다고. 내가 이래 봬도 저잣거리에서 눈칫밥 먹으면서 살았어.”
너를 처음 만나서 이곳까지 데려올 때에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사람 보는 안목이 뛰어나질 않아서 인재를 고를 능력도 되지 않았고, 제자를 구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너를 만났지. 그때 너를 보는 내 심정은 희망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백룡문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게 이어질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전부였다.
그리고 너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데에도 소극적이었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소극적이었다기보다는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실력이 내게는 없었단다.
이류도 안 되는 실력 가지고 누굴 가르치겠느냐.
물론 내가 너에게 가르친 무공들은 껍데기였다.
그렇다고 해서 가르치기 싫어서 가르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단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너에게 다 가르쳤다.
혼자 어렵게 수련을 하고 막히는 부분에서 끙끙대고 있을 때 왜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지 아느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굉장히 가슴이 아팠단다.
계기야 어떻든지 간에 널 거두었는데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너에게 나를 사부라 부르게 하지도 못했단다. 물론 네 성격에 그렇게 했을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그런 널 보면서 방해나 되지 말자는 생각에 밖을 돌아다녔고, 먹고살기 위해 일도 했단다. 사실 네 앞에서 허세도 많이 부렸고.
그런 악조건 속에서 네가 벽을 뛰어넘고 내가 가르친 껍데기에 살을 채워 넣는 것을 보았단다.
그때 아주 조금 기대를 했지.
혹시나 네가 백룡문을 다시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하지만 그런 기대는 곧 접었단다.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네게 기대하는 것은 너무 큰 짐을 지우는 일이고 무책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란다.
여기까지 읽은 상천은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져 글자가 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눈물을 말린 상천은 다시금 서찰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부터는 더욱 글씨가 엉망이었다. 그만큼 힘이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상천은 더욱 가슴이 아팠다.
천아.
너는 어떻게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널 여기에 데려온 순간부터 널 내 아들처럼 대했단다.
겉으로는 너와 티격태격하곤 했지만 언제나 널 보는 마음은 사랑이었단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까지 너와 함께한 모든 순간이 나에게는 행복한 순간으로 남아 있단다.
그리고 그런 행복한 추억을 가지고 조사님들 곁으로 가게 되어 너무나도 기쁘단다.
천아,
너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저 나와 함께한 십 년의 세월을 잊지 않고 간직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난 행복하게 눈감을 수 있을 것 같다.
거기에 아주 작은 욕심을 덧붙이자면 우리 백룡문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인생 말년에 제자 한 명이라도 거둬달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는 네가 백룡문의 사십오대 문주다.
사랑한다, 천아.
종삼의 서찰은 그렇게 끝이 났다.
상당히 긴 장문의 서찰을 쓰는 동안 종삼이 얼마나 힘이 들었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내가 어떻게 지난 십 년의 세월을 잊을 수 있겠어. 이십 년 인생의 반을 함께했는데.”
그렇게 중얼거린 상천은 다시 서찰을 곱게 접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아 미소를 지은 채 눈을 감고 있는 종삼에게 절을 하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렇게 아홉 번 절을 한 상천이 종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저씨, 아니, 사부. 이렇게 사부라고 부르는 것도 처음이자 마지막이네.”
그렇게 말하는 상천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서둘러 옷자락으로 눈물을 훔친 상천이 환하게 웃었다.
“사부가 내게 베풀어준 은혜는 평생 갚아도 못 갚을 것 같아. 거지꼴로 사는 나를 데려와서 먹여주고 입혀주고, 거기에다가 무공까지 가르쳐 줬잖아. 이렇게 번듯하게, 사람처럼 살게 해준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 그런 사부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는 길은 조금이라도 문파의 이름을 알리고 문도들을 끌어들여서 키우는 것밖에는 없는 것 같아. 과거 전성기 때만큼은 어렵겠지만 그래도 그 밑거름은 만들어놓을게. 이건 사부와 나와의 약속이야. 훗날 나도 눈 감고 사부가 있는 곳으로 가면… 그렇게 되면…….”
거기까지 말한 상천이 입을 다물었다.
계속 말하면 가슴이 복받쳐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감정을 추스르던 상천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 가서 더 행복한 추억 만들자. 꼭. 알겠지? 사부를 평생 그리워하면서 살게. 그래도 난 울지 않을 거야. 그게 나잖아. 안 그래? 훗날 지금 사부와 한 약속을 지키게 되는 날, 그날 울게. 그러니까 안 운다고 너무 야속해하지 말고 그때까지 기다려 줘.”
그렇게 말한 상천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곧 그의 어깨가 들썩였다.
흐느끼는 듯했지만 상천은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고 있었다. 얼마나 세게 이를 악물었는지 입술을 깨물었는지 입에서는 피가 나고 있었다.
그렇게 상천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다.
상천은 연무장 한가운데에서 종삼의 시신을 화장했다.
그리고 유골 가루를 단지에 모시고 백룡문 깊숙한 곳에 있는 조사전에 안치했다. 그리고 부족한 실력으로 위패를 깎아 세워놓았다.
백룡문 사십사대 문주 종삼(白龍門四十四代門柱宗三).
그렇게 적힌 위패 앞에 절을 한 상천이 조사전을 나섰다. 그리고는 백룡문 곳곳을 돌아다니며 주위 전경을 눈에 담았다.
백룡문을 둘러본 상천은 곧장 백룡문을 나섰다.
상천이 발걸음을 옮긴 곳은 병목 등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간 상천은 병목을 비롯한 전부를 모아놓고 입을 열었다.
“사부님이 돌아가셨어.”
상천의 한마디에 아직 죽는 것에 대한 인식이 없는 아이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크게 놀랐다.
“진짜? 언제? 장사는 치른 거야?”
깜짝 놀란 병목이 상천에게 물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상천이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백룡문의 장문인이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잠시 동안 모두들 상천이 하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의 말이 다 끝나고 나서야 병목이 물었다.
“그러니까 우리도 백룡문의 무공을 배웠으니 문도라 할 수 있고, 앞으로는 여기가 아니라 백룡문에 가서 생활하라는 거야?”
“하라는 게 아니라 하는 게 어떻겠냐는 거지. 강요할 생각은 없어.”
상천의 말에 병목이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난 찬성!”
제일 먼저 배동삼이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자 조금은 민망했는지 슬쩍 손을 내린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한텐 나쁠 것 없잖아? 여기보다는 거기가 더 생활하기 편할 거고.”
“하지만 몇몇 애들은 이쪽 마을에서 일을 하고 있잖아.”
병목의 말에 배동삼은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좀 더 번듯한 곳에서 지내고 싶다는 마음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좀 더 그럴싸한 무공을 익히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 차 있는 배동삼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조, 조금만 더 부지런 떨면 되잖아?”
“부지런?”
“그, 그래! 반 시진만 일찍 일어나서 나가면 되지 않겠어?”
“으흠…….”
배동삼의 말에 병목이 턱을 매만졌다.
갑작스럽게 생각해 낸 것이었지만 나름 그럴듯한 이유를 댄 것 같아 배동삼은 스스로 뿌듯해하고 있었다.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러게. 백룡문이 옆 마을에 있다고 했으니 그렇게 멀지도 않고.”
“안 멀긴! 두 시진 가까이 걸릴걸?”
“그건 네가 굼떠서 그런 거지.”
여기저기서 찬반 의견이 쏟아졌다. 그리고 상천은 별다른 말 없이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자, 조용!”
결국 소란스러운 장내를 진정시킨 것은 병목이었다.
“내 생각에는 말이지…….”
아이들을 조용히 시킨 병목이 자신의 의사를 꺼냈다. 그러자 모두가 그의 입에 주목했다.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아. 아이들을 생각하면 좀 더 좋은 곳에서 지내는 것도 괜찮은 것 같으니까. 그리고 어쨌든 우리는 천이에게 무공을 배운 입장이야. 엄밀히 따지면 사부와 제자 사이라는 거지.”
“아니, 뭐… 꼭 그렇다고 할 건 아닌데…….”
병목의 말에 상천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상천을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병목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하라는 대로 하는 게 맞는 거 아니겠어?”
병목의 말에 다들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들 그렇게 하는 거다?”
“응!”
배동삼이 가장 신나서 큰 소리로 대답했다.
다음날 그들은 모두 백룡문으로 이사를 했다.
백룡문에 온 첫날.
상대적으로 멀쩡한 집에서 살게 된 병목 등은 한껏 들뜬 모습이었다.
외풍이 심한 가건물이 아닌 난방이 잘되는 곳에서 지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너무나 행복해했다.
그렇게 날이 저물고 모두가 잠든 시각.
병목은 상천과 대청마루에 나란히 앉았다.
“이런 곳이었구나?”
“어…….”
병목의 말에 상천은 왠지 자신만 이런 혜택을 누린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왜 그때 전부 다 함께 가면 안 되냐고 묻지 못했는지 이제야 후회가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상천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병목이 물었다.
“사부랑 마지막으로 약속한 게 있어.”
“뭔데?”
“우리 문파의 이름을 알리겠다고.”
“아…….”
상천의 말에 병목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을 이곳에 와서 살게 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 분명했다.
“문파 이름을 알리려면 어떤 게 필요할까?”
“돈이 필요하지 않을까?”
“돈?”
“어. 돈이 있어야 건물도 다시 번듯하게 세우고, 사람이 늘어나도 먹이고 재우고 할 수 있을 거 아냐.”
병목이 나름대로 생각을 해서 대답했다.
사실 문파를 키우고 이름을 알리는 데 필요한 것이 돈뿐이겠느냐마는 저잣거리에서 생활하던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돈이라…….”
상천이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잠시 밤하늘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공을 이용해서 돈을 벌 수 없을까?”
“무공?”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니까.”
“음…….”
상천의 말에 병목이 다시 머리를 굴렸다. 한참을 생각하더니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들은 얘긴데, 무투대회 같은 게 있다고 하더라.”
“무투대회?”
“어. 여러 사람이서 무공을 가지고 싸우는 대회인데, 거기서 우승하면 상금도 많이 준대.”
병목이 저잣거리를 오가며 들었던 이야기를 용케 생각해 내고는 말했다.
“무투대회라…….”
상천이 다시 중얼거렸다.
그렇게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