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화.
오전반과 오후반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린아이들의 수준이야 고만고만하다고 할 수 있지만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청년들의 근력 수준은 심각했다.
어떻게 일을 하고 다니는지 걱정이 앞설 정도였다.
그나마 병목이 이들 중에서는 가장 나은 편에 속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열 개도 하기 힘들어할 때 병목은 너끈히 스무 개 정도 소화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오후반에 있는 사람들 중에 병목을 포함해 세 명 정도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근력이 좋은 편이라는 것이었다.
“흠…….”
상천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상천은 칠 일 동안 계속해서 근력 운동만 시켰다.
처음에는 한 번 하고 나서 다음날 몸이 아파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제는 조금 적응되었는지 다들 그럭저럭 버텨내고 있었다.
상천은 생각보다 훨씬 더 떨어지는 근력 때문에 애초에 세워놓았던 계획을 수정했다.
병목을 포함한 근력이 상대적으로 나은 세 명에게는 조금씩 백룡권 초식을 가르쳤다.
자신 혼자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조금이나마 먼저 익힌 사람이 있으면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높은 수준의 백룡권이 아니라 적당한 수준이라면 병목 등을 가르쳐서 훈련 교두로 활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상천은 성심성의껏 그들을 가르쳤다.
한 달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동안 상천이 세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킨 것은 오로지 근력 운동뿐이었다.
그러자 어린아이들은 불만을 터뜨리고 꾀를 부리기 시작했다.
한창 뛰어놀 나이에 힘든 운동만 하고 있으니 무공이라는 것에 대해 아직 개념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아이들에게 동기 부여가 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상천과 함께 지냈던 청년들은 군말없이 상천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만큼 상천에 대한 믿음도 있겠지만, 병목을 비롯한 세 명이 백룡권의 초식을 배우는 것을 보고 자신들도 그렇게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어느 정도 근력이 생겼다는 판단이 서자 상천은 근력 운동을 하는 시간을 줄였다. 그리고 모두를 불러 모아 앞에 세워놓고 말했다.
“이제부터는 진짜 무공을 가르쳐 줄 거야. 병목 형이 하는 거 다들 봤지?”
끄덕끄덕.
아이들까지 전부 다 상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상천이 시키는 것이 하기 싫고 힘들기는 했지만 병목이 주먹을 휘두르며 백룡권을 익히는 것을 보자 호기심이 동했던 아이들이다.
“오늘은 여기서 끝내고 내일부터 가르쳐 줄게.”
“오늘부터 안 하고?”
어서 백룡권을 배우고 싶어 안달이 난 배동삼이 손을 번쩍 들고 상천에게 물었다.
그의 표정에서 열정과 조급함을 느낀 상천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아니야.”
“왜? 오늘은 힘이 남아도는데?”
“몸도 쉬어야 하는 거야. 그래야 긴장되고 부풀어 올랐던 근육이 이완도 되고 권법을 배울 수 있는 몸 상태가 되는 거지.”
상천의 말에 배동삼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무공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그가 상천이 하는 말에 무슨 대꾸를 할 수 있겠는가. 더 이상 가르쳐 달라고 하면 떼쓰는 것밖에 되질 않았다.
“그러니까 오늘은 다들 쉬어. 세 사람은 따로 잠깐 보고.”
상천이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권법을 익힌 세 사람을 따로 불렀다. 그러자 왜 그러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은 그들이 상천의 주위로 모였다.
“왜? 무슨 할 얘기 있어?”
병목의 물음에 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세 사람의 얼굴을 한 번씩 돌아본 그가 입을 열었다.
“나 좀 도와줬으면 해서.”
“뭔데?”
“세 사람한테 먼저 무공을 가르쳐 준 것은 나름대로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어.”
“다른 이유? 속 시원하게 좀 얘기해 봐.”
병목의 재촉에 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나 혼자 저 많은 사람들을 다 가르치기에는 버거워. 나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건 처음이니까. 그래서 내가 백룡신권을 가르칠 때 옆에서 도와주었으면 해서.”
“우리보고 저 애들을 가르치라는 거야?”
병목이 깜짝 놀라 물었다. 다른 두 명 역시 병목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가르친다고 하면 거창한 거고,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따라 할 수 있게 시범을 보이는 거지. 그럼 난 돌아다니면서 자세를 바로잡아 주면 되고. 어때?”
상천의 말에 병목과 나머지 두 명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과연 자신들이 잘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너무 부담 갖지 마. 그냥 지금까지 배웠던 것들을 앞에서 똑같이 하면 되니까.”
상천의 말에 세 사람은 얼떨떨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내일부터 잘해보자고.”
그렇게 말한 상천이 씨익 웃어 보였다.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백룡권의 수련이 시작되었다.
상천이 말한 대로 병목을 비롯한 백룡권을 먼저 익힌 세 사람이 앞에서 시범을 보이고 나머지 사람들이 따라 하는 식으로 수련이 진행되었다.
상천은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자세를 잡아주고 일일이 조언을 해주었다.
그동안 자신이 수련을 하면서 느꼈던 것들을 아낌없이 얘기해 주었고, 그것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실력은 생각보다 빨리 늘어갔다.
그런 것을 보며 상천은 자신이 수련하던 때를 회상했다.
처음 규화공 수련부터 최근의 백룡권 수련까지.
종삼의 조언이나 가르침 없이 홀로 해온 수련 기간을 생각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이렇게 잘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더 빨리, 더 쉽게 익힐 수 있었을 텐데…….’
딱히 오전반, 오후반을 나누지 않고 시작한 수련은 한 시진가량 진행되었다.
그러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당분간은 오늘 배운 것들을 반복해서 수련해 봐. 기억 안 나는 부분은 앞에 있는 세 사람에게 가르쳐 달라고 하면 알려줄 거야.”
수련 종료를 알리는 상천의 말에 화들짝 놀란 사람은 앞에서 시범을 보이던 세 사람이었다.
사실 앞에서 시범을 보이는 것도 부담이 되는데 가르쳐 주기까지 하라는 상천의 말에 놀란 것이다.
그러자 수련을 하던 몇몇 아이들이 슬금슬금 세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 때문에 더 당황한 세 사람은 상천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지만 그런 그들에게 찡긋 웃어준 상천은 여유롭게 백룡문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에게 백룡권을 가르치는 시간은 상천에게 굉장히 유익한 시간이었다.
배우는 자의 입장에서만 바라보고 생각했을 때에는 몰랐던 백룡권의 새로운 모습을 가르치면서 바라보게 된 것이다.
백룡권의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상천에게는 또 다른 변화가 생겼다. 그 변화는 여느 때처럼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아와 저녁 시간이 되어 연무장에 앉았을 때 나타났다.
항상 그래 왔듯 상천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느낀 것들을 눈앞에 만들어놓은 환영을 통해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역시……. 이렇게 되는 거였어. 음?’
환영이 펼쳐 내는 백룡권을 보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상천은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당황해했다.
‘뭐지?’
상천은 언제나처럼 자신의 눈앞에 하나의 환영만을 만들어낸 상태였다. 하나의 환영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은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환영을 둘 이상 만들어내게 되면 생각이 꼬여 자신이 환영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부터 두 개 이상의 환영은 만들어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상천의 눈앞에서 백룡권을 펼치고 있는 환영 외에 또 다른 환영이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난 아닌데?’
분명 상천 자신은 의식적으로 또 다른 환영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그럴 생각도 없었고, 그것이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순식간에 버젓이 또 다른 환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 검처럼 보이는 기다란 것을 든 채.
그때, 검을 든 환영이 상천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잘 봐.’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어떻게 하나 보자.’
상천은 자신의 눈앞에 그려진 두 개의 환영을 유심히 관찰했다.
백룡권을 펼치던 환영이 하던 것을 멈추고 새롭게 나타난 환영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마치 비무를 하려는 두 사람이 마주 보는 것과 같았다.
잠시 동안 서로를 바라보던 두 환영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무인가?’
검을 든 환영은 지금까지 상천이 수련해 왔던 단월검을, 원래 상천이 만들어냈던 환영은 백룡권을 펼치기 시작했다.
상천의 예상대로 두 환영은 비무를 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비무가 아닌 대련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미리 합을 짜놓고 무공을 펼쳐 내는 것처럼 피하고 막고 반격하는 것이 딱딱 맞았다.
‘이게 뭐야?’
상천은 도대체 지금 눈앞에 이런 상황이 왜 펼쳐지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환영이 펼쳐 내는 초식들을 보면서 얻을 것들이 적게나마 있었지만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서는 조금도 얻을 것이 없어 보였다.
‘어떻게 하지?’
문제는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대련을 멈출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단월검을 펼치고 있는 환영이야 애초에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었지만 백룡권을 펼치던 환영은 대련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자신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난 상태였다.
그렇다 보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대련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후우…….’
상천이 손으로 턱을 괸 채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이런 기이한 현상은 그날이 끝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매일 저녁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인지 의아해하기만 하던 상천도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는 생각을 바꾸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한 상천은 두 환영의 비무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무는 지금까지 봤을 때 느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순서도 똑같았고 속도도 똑같았다.
하지만 상천은 지금까지와 달리 비무에 분명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동작 하나하나를 눈여겨보았다.
‘뭐가 있을까? 도대체 뭐지?’
아무리 봐도 상천은 자신이 익힌 검법, 권법 이상의 것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뭔가가 있어, 뭔가가…….’
오랜만에 상천의 고민이 깊어졌다.
아이들에게 백룡권을 가르치는 동안에도 상천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어차피 앞쪽 초식의 형은 거의 다 가르친 상태였고, 정확한 자세는 앞에서 시범을 보이는 세 사람이 잘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보다는 여유가 많이 생긴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상천은 매일 저녁때 보이는 환영들 간의 비무를 떠올리며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뭐하고 있어?”
수련하던 아이들에게 휴식을 준 병목이 한쪽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상천의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음? 아니야. 할 만해?”
“말도 마라. 천이 네가 가르치기로 해놓고서는 너무하는 거 아니냐? 아주 죽을 맛이다.”
상천의 물음에 병목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그때였다.
상천과 병목에게로 배동삼이 다가왔다.
“형, 잠깐만.”
배동삼이 그렇게 말하며 병목을 일으켜 세웠다.
“만약에 상대가 이렇게 나오면…….”
배동삼이 병목의 우측으로 허리를 숙여 피하며 갈비뼈 쪽으로 주먹을 가볍게 휘둘렀다.
“이렇게 나왔을 때 우리가 배운 권법으로 어떻게 막아야 돼? 아직 안 배운 거에 뭐가 있나? 지금까지 배운 걸로는 도저히 막거나 피하기가 어려운데?”
배동삼의 물음에 말문이 막힌 병목이 상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배동삼의 시선도 그쪽으로 옮겨갔다.
두 사람의 시선을 받은 상천은 잠시 동안 그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지금까지 배운 걸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어. 상대가 이렇게 들어오면… 방금 전처럼 나한테 한번 해봐.”
상천의 말에 배동삼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전 병목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주먹을 뻗었다.
“이렇게 들어오면 여기서 발을 이렇게 움직이고……. 어라?”
배동삼이 뻗은 주먹을 피하고 막는 방법을 설명하던 상천이 돌연 하던 것을 멈췄다.
그러자 병목과 배동삼은 의아한 표정으로 상천을 바라보았다.
불현듯 상천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지금까지 며칠간 계속 보였던 두 환영의 비무였다.
‘얼핏 비슷한 장면을 본 거 같은데?’
검과 권의 비무는 권과 권의 비무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럼에도 상천은 며칠간 계속 보았던 검과 권의 비무에서 지금의 상황과 비슷한 것을 보았다고 느꼈다.
“형?”
배동삼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는 상천을 조용히 불렀다. 그러자 병목이 입으로 검지를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듯 그를 잡아끌었다.
“뭔가 생각하는 중인가 봐. 그러니까 궁금한 건 내일 물어보고 오늘은 방해하지 말자.”
병목의 말에 배동삼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갔다.
배동삼이 물러가고 잠시 동안 상천을 바라보던 병목 역시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