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화.
이제는 오롯한 여름이 되었다.
예년보다 더 심해진 더위에 사람들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틈만 나면 나무 그늘을 찾아 쉬기 바빴고, 냉차를 파는 집은 한 해 벌어들일 돈을 여름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무더운 날씨에 상천은 연무장에 앉아 있었다.
백룡권의 형을 외우고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초식들을 몸으로 펼쳐 낼 수 있을 정도가 되자 다시금 상상 훈련에 돌입한 것이다.
상천의 눈앞에 만들어진 환영은 예전에 비해 조금 더 또렷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좀 더 팔다리가 명확해진 것뿐이지 정확하게 이목구비를 확인할 수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상천의 상상 훈련이 거듭되고 익숙해질수록 눈앞에 보이는 환영이 더욱 또렷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만큼 발전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쨍쨍 내리쬐는 햇빛 때문에 살이 타서 얼굴과 팔 등이 시커멓게 변해가고 있었지만 상천은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여기서 힘이 들어가면 안 되지.’
‘처음에는 느리게. 대신 회수는 빠르게. 이어지는 식이 결정타.’
‘이 초식은 보법과 연결되면 엄청난 위력이 있겠어.’
상천은 환영이 펼치는 백룡권을 보면서 나름대로 분석을 하고 있었다.
‘좋아, 되겠다. 속도 좀 높여도 되겠어.’
상상 수련에 도가 튼 상천은 종삼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백룡권 수련 시간을 단축하고 있었다.
한 달이 더 걸렸다.
더위는 절정에 이르렀고, 사람들은 해가 가장 뜨거운 미시를 피해 일을 하고 돌아다녔다. 어떤 사람은 그 이후에도 너무 더워 조금 덜 더운 아침 이른 시간에 최대한의 일을 처리하고 나머지 시간은 쉬기도 했다.
오랜만에 상천이 연무장 바닥에 앉아 있지 않고 섰다.
검을 들지 않고 두 주먹을 쥔 상천은 백룡권을 펼치기 전에 눈을 감았다.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백룡권의 형을 그려본 상천은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심호흡과 함께 주먹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르지 않게 천천히.
하지만 동작 하나하나에 완벽을 기하며 백룡권을 펼쳤다.
상상 수련에 익숙해지고 무공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짧은 시간에 최대의 효율을 내는 방법을 자신도 모르게 터득한 상태였다.
처음 펼치는 것이지만 단월검 수련 때에 비해서 속도도 빨랐고, 백룡권을 펼치는 데 있어서 크게 어색한 것을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은 종삼이 보기에도 놀라운 속도였다.
상천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그 나이에 이 정도 수준에 오르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었다.
물론 거대 문파들을 찾아보면 상천 또래에 훨씬 뛰어난 실력을 가진 후기지수들이 즐비하겠지만, 문파의 무공 수준 자체에 차이가 크고 종삼 자신이 가르침이라는 것을 거의 주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놀라운 것이었다.
그 때문에 종삼은 굉장히 아쉽고 미안했다.
자신의 공부가 조금 더 깊었다면 상천이 지금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은 그저 껍데기만 가르쳐 주었을 뿐, 모든 것을 상천 혼자 독학으로 익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후우…….”
종삼이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 할 말이 있어.”
가을 초입에 들어설 무렵 상천이 외출하는 종삼을 붙들고 말했다.
“할 말?”
“어. 사실은…….”
상천은 예전에 병목으로부터 부탁받았던 것을 털어놓았다.
그때에는 딱히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종삼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스스로도 아이들에게 간단하게나마 무언가를 가르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음…….”
종삼이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차피 앞으로 백룡문을 이끌어가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다. 그러니 그건 너 알아서 해도 되겠구나.”
“진짜?”
“그럼.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냐?”
“가만 있어보자……. 내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그렇게 말하며 상천이 허공으로 시선을 돌린 채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험! 험! 아무튼 그건 너 알아서 해라. 알았지?”
“알았어. 고마워.”
어색한 말투로 종삼에게 고맙다고 전한 상천은 서둘러 백룡문 밖으로 나갔다. 그런 상천의 모습에서 기뻐하는 기색을 읽은 종삼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기쁜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종삼도 천천히 백룡문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모두 외출을 했지만 백룡문 안에는 방금 전에 감돌았던 훈훈한 기운이 남아 텅 빈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달음에 병목이 있는 곳으로 달려온 상천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일찍 답을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이제는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더욱 가벼웠다.
“형!”
저 멀리 그들이 사는 곳이 눈에 들어온 순간 상천이 병목을 불렀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상천이 도착하자 모두들 밖에 나와 있었다.
“다들 있었네?”
운이 좋았는지 병목뿐만 아니라 다른 식구들도 일하러 가지 않고 집에 있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헐레벌떡 뛰어와?”
도착하자마자 숨을 고르는 상천을 보며 병목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나마 전과 달리 표정이 밝았기 때문에 마음이 무겁거나 하지는 않았다.
“형이 전에 얘기했던 거!”
“전에 얘기한 거? 뭐?”
병목은 상천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없어 두 눈을 껌뻑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애들 호신용으로 뭐 하나 가르쳐 달라고 했잖아.”
“아! 그거?”
겨울에 꺼낸 얘기였고, 그동안에 대답이 없어 잊어버리고 있던 이야기를 상천이 꺼내자 병목은 손바닥을 쳤고, 다른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 두 사람만 번갈아 가면서 보고 있었다.
“다행이다. 걱정을 좀 덜 수 있겠어.”
씨익 웃으며 그렇게 말한 병목이 다른 사람들에게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대화를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그거… 나도 배우면 안 돼?”
상천과 같이 지내던 사람들 중 가장 어린 배동삼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상천에게 물었다.
“어? 나도!”
“나도! 나도 배울래!”
“나도 나도!”
자신도 배우면 안 되냐는 배동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사람들도 배우고 싶다며 어린아이들처럼 손을 번쩍번쩍 들었다.
그 모습에 멋쩍은 미소를 지은 상천이 병목을 바라보았고, 병목도 당황스런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가르쳐 줄 수 있지. 그런데 다들 배우면 일은 어떻게 할 거야?”
상천의 말에 순간 모두가 손을 든 채로 입을 다물었다.
그저 상천이 호신용 무공을 가르쳐 준다고 하니 배우고 싶다는 충동에 너도 나도 배우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네.”
“일은 누가 하지?”
“일 안 하면 굶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시무룩하게 변해갔다.
“그럼 이렇게 하자. 몇 명은 오전에 일하고 오후에 배우고, 몇 명은 오전에 배우고 오후에 일하고. 그러면 되잖아?”
시무룩하게 변해가는 얼굴들을 보고 있던 상천이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러자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맞추던 사람들이 동시에 상천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내일부터 할게. 조 나누는 건 형이 알아서 해줘. 나도 어떤 식으로 가르쳐야 할지 생각해 봐야 되니까.”
“가게?”
상천이 곧장 가려고 하자 병목이 아쉬움을 담아 물었다. 그러자 상천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가야지. 내일부터 시작하려면 준비해야 되니까. 갈게!”
그렇게 말한 상천이 몸을 돌렸다. 그런 그를 병목이 한 번 더 불러 세웠다.
“천아!”
“응?”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는 상천을 향해 병목이 물었다.
“괜찮은 거지?”
병목의 물음에 상천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
짧은 한마디.
하지만 든든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병목은 그제야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다음날.
오전에 규화공 수련을 마친 상천은 단월검과 백룡권을 한차례씩 펼쳐 보인 뒤 백룡문을 나섰다.
“후우!”
백룡문 밖으로 한 걸음 내디딘 상천은 짧게 숨을 한번 내쉬었다.
자주 백룡문 밖으로 나왔던 상천이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굉장히 긴장이 되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일.
종삼을 만나 백룡문에 오기 전까지는, 아니, 백룡문에 와서 무공을 배우면서도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백룡문의 장문인이 된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제자를 받아 가르친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가보자, 천아!”
스스로에게 그렇게 주문한 상천이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배동삼을 비롯한 청년 네 명과 여섯 명의 아이는 목이 빠져라 상천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숱하게 이야기를 들었던 무림 고수는 될 수 없을지 몰라도 무공의 맛이라도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그들은 밤잠까지 설친 상태였다.
골목 모퉁이를 돌아 상천의 모습이 보이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열 명은 즐거움과 흥분, 기대감을 얼굴에 표정으로 고스란히 드러내며 그를 맞이했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 앞에 선 상천은 그 역시도 상기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잘들 잤어?”
상천의 물음에 다들 도리질을 쳤다. 실제로 몇몇 아이들은 눈 밑이 검게 변해 있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상천의 말에 다들 침을 한번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천은 첫날부터 백룡권을 가르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영양 상태도 좋은 편이 아니었고, 근력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상천 스스로가 운동도 하고 근력을 키웠기 때문에 큰 무리는 없었지만 다른 아이들은 아니었다.
꼭 백룡권이 아니더라도 간단한 무공을 익히는 데 있어서 근력은 필수라는 것을 지난 시간 동안 수련을 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상천이었기 때문에 일단 간단한 근력 운동부터 시작했다.
“무리하지 말고 열 개만 해보자. 천천히. 너무 빨리는 말고. 알았지?”
상천의 말에 열 명 모두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어린아이들은 무릎을 굽히고 엎드려서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처음에 두세 개까지는 잘하더니 다섯 개를 넘어가면서부터는 한두 명씩 버거워하기 시작했다. 구부렸다 펴는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은 기본이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도 했다.
결국 몇 명은 열 개를 다 채우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퍼져 버렸다.
“하…….”
상천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 근력도 없어서야 단월검보다 더 힘의 분배나 집중이 필요한 백룡권을 익힐 수 없었다.
“갈 길이 멀겠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상천이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