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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월검제-14화 (14/141)

#014화.

반 시진 후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난 상천은 젖은 옷을 벗어버리고 땀이 식어 찝찝해진 몸을 차가운 물로 씻었다.

날이 조금 따뜻해지기는 했지만 아직 겨울이라 추울 법도 하건만 상천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몸에 찬물을 끼얹었다.

물기가 묻고 햇살이 비치자 상천의 몸에 있는 탄탄한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동안 무공 수련을 하면서 근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 상천이 그만큼 운동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몸을 씻고 난 상천은 새 옷을 걸치고는 백룡문 밖으로 나갔다.

날이 따뜻해져서 그런지 저잣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의 표정에도 활기가 넘쳤다.

언제 또 추위가 몰아닥칠지 몰라 사람들은 필요한 것들을 서둘러 사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상천은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간단히 먹을 만한 것을 몇 가지 샀다.

백룡문에서 나오기 전에 종삼 모르게 가지고 나온 돈으로 산 것이다.

먹을 것을 잔뜩 산 상천은 예전에 살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이 보였다.

날이 추운데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콧물을 흘려가면서도 함박웃음을 짓고 깔깔대며 뛰어놀고 있었다.

“어! 그 형이다!”

뛰어놀던 아이들 중 한 명이 상천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소리쳤다.

몇 번 찾아온 탓에 아이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상천에게로 뛰어왔다.

“누가 왔다고?”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안쪽에서 유일하게 상천보다 형인 병목이 밖으로 나왔다.

“나 왔어, 형.”

“어! 왔어? 오랜만이네?”

지난번에 찾아오고 난 이후 첫 발걸음인지라 병목도 상천을 굉장히 반가워했다.

“이 녀석들! 형한테 그렇게 달라붙으면 안 된다고 했지? 옷에 지지 묻잖아!”

상천이 반가워서인지 상천이 들고 있는 먹을거리가 반가워서인지 아이들은 상천의 바지춤, 허리춤을 붙잡으며 배시시 웃고 있었다.

“괜찮다니까. 와서 이거 좀 받아. 먹을 것 좀 샀어.”

“뭘 이런 걸 가져와. 우리도 나름 열심히 일하면서 배 굶지는 않고 사는데.”

실제로 이곳에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나이가 된 아이들은 구걸이 아닌 객잔이나 포목점 등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열심히 살고 있었다.

“그래도. 좀 넉넉하게 샀으니 다들 먹을 수 있을 거야.”

“고맙다.”

상천이 건네는 먹을거리를 받아 들며 병목이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 말했다.

“자! 줄 서!”

병목이 상천에게 먹을거리를 받아 들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상천에게 달라붙어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병목의 앞으로 나란히 줄을 섰다.

“새치기하지 마!”

“내가 먼저 왔거든!”

“밀지 마!”

아이들은 저마다 먼저 받아먹으려고 자리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상천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다들 어디 갔어?”

“음? 당연히 일하러 갔지.”

“형은 안 갔고?”

“어. 난 오늘 좀 쉬려고. 애들 혼자 놔두기도 좀 그렇고.”

병목의 말에 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다 받았으니까 형한테 고맙습니다, 해야지?”

“고맙습니다!”

병목의 말에 아이들이 일제히 상천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상천은 아이들이 물러가자 병목과 나란히 앉았다.

“외풍 심할 텐데. 감기 걸린 애들은 없어?”

“어. 아직까지는. 그래도 여기저기서 나무 주워다가 보수를 해서 예전보다는 덜해. 애들이 일하니까 그런 건 도움이 되더라고. 기술 하나씩 배워오니까 생활하는 데 큰 힘이 돼.”

“잘됐네. 내가 뭐 도와줄 일은 없고?”

“딱히…….”

그렇게 대답하며 말끝을 흐렸던 병목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무리한 부탁일지도 모르겠는데 혹시 애들한테 호신용으로 간단한 무공 같은 거 가르쳐 줄 수 있어?”

“무공?”

“어. 이제 애들도 조금 더 크면 일을 해야 할 텐데 운동도 할 겸 제 한 몸 지킬 수 있는 무공 하나 정도는 익히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특히 여자애들이 좀 걱정이기도 하고. 거창한 정도는 아니고 그냥 간단한 거.”

병목의 말에 상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백룡문의 문주가 될 입장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것은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보법과 검법을 배우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권법은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가르쳐 줄 만한 것이 없었다.

막대기 하나만 들면 된다고 하지만 검법보다는 권법이 급할 때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종삼과 자신의 사이가 거의 대화를 하지 않을 정도로 어색했기 때문에 선뜻 대답을 해주기가 어려웠다.

“그건 지금 당장 대답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아, 형.”

“그렇겠지. 너무 부담 갖지는 마.”

그렇게 대답하며 병목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만 가봐야겠다.”

“조금 더 있다가 애들 얼굴이라도 좀 보고 가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상천을 따라 병목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아냐. 가서 또 수련해야지. 갈게.”

“그래. 조심해서 가라. 멀리 안 나갈게.”

그렇게 말하며 손을 흔드는 병목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준 상천은 올 때와 달리 기분 좋게 백룡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천이 백룡문에 도착한 것은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이후였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간 상천은 먼저 돌아와 연무장에 서 있는 종삼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어디 갔다 왔어?”

“그냥 바람 좀 쐬러.”

둘 사이의 대화는 찬 바람 불 듯 무미건조했다.

“돈은 왜 가져갔어?”

“…….”

종삼의 물음에 상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지금 이 상황이 짜증나는 듯 인상만 찌푸리고 있었다.

“대답 안 해?”

“왜? 내가 도박장 가서 날렸거나 기루 가서 썼을까 봐?”

상천이 종삼을 비꼬기라도 하듯 말했다. 그 모습에 화가 났는지 종삼이 호통을 터뜨렸다.

“이놈!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도둑질이다, 도둑질! 그런 짓을 해놓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느냐!”

종삼의 호통에도 상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해! 돈은 왜 가져갔어!”

“말했지? 도박이나 계집질은 안 했다고.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 신경 꺼. 지금까지도 그랬잖아.”

상천의 그 말 한마디가 종삼의 마음 한구석을 꼬챙이로 찔렀다.

“뭐?”

“왜? 아니야? 난 틀린 말 한 거 없는데.”

상천의 말에 종삼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게 무슨 말 버르장머리야! 그리고 말도 안 하고 돈 가지고 나갔다가 이제야 들어오는데, 신경을 쓰지 말라니!”

“그냥 놀다 왔어! 내가 무슨 죄인이야? 들어오자마자 이렇게 몰아붙이게?”

“그럼 네가 잘했단 말이냐!”

종삼의 말에 상천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너 정말… 이럴 거냐?”

“…보러 다녀왔어.”

종삼의 추궁에 상천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대로 듣지 못한 종삼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상천을 바라보았다.

“뭐?”

“그 녀석들 보러 갔다 왔다고.”

“그러니까 그 녀석들이 누구……. 아!”

종삼은 그제야 상천이 어렸을 때 같이 지내던 아이들을 보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알고 보니 상천의 옷이 좀 더러워진 것도 보이고, 은은하게 냄새가 나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럼 돈은?”

“먹을 것 좀 사다 주고 왔어.”

상천의 말에 종삼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들어가서 씻어라.”

“어.”

짧게 대답한 상천이 씻기 위해 종삼을 지나쳐 갔다.

“다음부터는 미리 얘기해라. 돈 줄 테니까.”

종삼의 말을 듣고 그냥 지나친 상천은 말없이 지저분해진 옷을 벗고 씻었다.

말없이 돈을 가지고 나갔다 온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던 상천은 그 일 이후로는 마음의 짐을 털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종삼과의 관계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상천은 종삼을 오해하고 있었고, 종삼은 그런 상천을 보며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렇게 반년의 시간이 흘렀다.

겨울이 끝나고 따뜻해지는가 싶더니 점점 더워지는 시기가 왔다.

열여덟 살이 된 상천은 이제 어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체격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많은 성장을 했다.

그렇게 외형이 성장한 만큼 정신적으로도 성장을 했고, 단월검 수련 또한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낸 상태였다.

물론 지금까지 계속해서 단월검 수련을 해오면서 상천이 느낀 것은 끝이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모든 무공이 다 그렇겠지만 단월검은 수련하면 할수록 새롭고 생각보다 깊이가 있는 무공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런 것을 느끼게 되면 더욱 단월검 수련에 매진하고 조급해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오히려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지난 세월 동안 무공 수련을 해오면서 상천이 느낀 것은 무공 수련은 조급해하면 할수록 더 성취가 늦어진다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부족한 부분, 지금은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은 꾸준한 노력과 경험이 해결해 줄 것이다’라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상천은 다른 것에 눈을 돌렸다.

“아저씨, 나 권법 가르쳐 줘.”

여름이 한 걸음 더 다가온 어느 날에 상천이 꺼낸 말이었다.

상천의 그 말에 종삼은 크게 기뻐했다.

규화공과 단월검, 천유보와 더불어 마지막으로 백룡권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기뻤지만, 상천이 그간 계속해 왔던 단월검에 대한 고민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래. 당장 시작하자꾸나.”

종삼이 의욕적으로 대답했다.

실로 오랜만에 종삼과 상천 사이에 활기가 돌았다.

각각의 초식이 복잡하지 않았던 단월검과 달리 백룡권은 제법 복잡한 초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네다섯 개의 식이 모여 하나의 초식을 이루었고, 일곱 개의 초식이 모여 백룡권을 이루었다.

그 때문에 상천이 백룡권의 형을 외우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물론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것은 지극히 상천의 개인적인 생각이었다.

종삼은 상천이 백룡권의 형을 외우기까지 보름이 걸릴 것이라 내다보았고, 상천은 그것을 칠 주야 만에 해냈다.

하지만 상천 자신은 절대 만족하지 못했다.

백룡권의 형을 익히는데 사흘이면 충분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칠 일이나 걸리자 스스로에게 합격점을 줄 수가 없었다.

“백룡신권의 형은 복잡하다. 그리고 단월신검보다 연환이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백룡신권을 가장 마지막에 가르치는 것이다.”

종삼이 처음 백룡권을 가르치기 전에 상천에게 했던 말이다.

백룡권의 형을 다 외운 상천은 천천히 몸으로 초식들을 펼쳐 보았다.

확실히 종삼의 말처럼 복잡하고 연환이 강해 천천히 펼쳐 내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그렇게 백룡권을 처음 배우고 한 달의 시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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