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화.
다음날.
종삼이 나가고 한 식경쯤 지나서 상천도 백룡문을 나섰다.
어차피 나갈 거 종삼과 함께 나갔어도 상관없었지만 상천은 굳이 한 식경의 차이를 두고 밖으로 나갔다.
둘이 같이 나가봐야 할 얘기도 없고 어색하기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혼자 가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백룡문 밖으로 나와 터벅터벅 걸어 옆 마을에 도착한 상천은 저잣거리를 지나 병목 등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멍하니 길을 걷는 상천의 귀에 누군가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저거 종삼이 맞지?”
종삼의 이름을 들은 상천은 그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곳에는 중년 남성 두 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게. 오늘도 도박장 가는 모양이여.”
“대낮부터 도박장이나 다니고. 돈 많은가 보지?”
“도박하는 건 아닌 거 같은데?”
“그럼 도박장에 가서 뭘 혀. 도박하는 거지.”
대화를 듣던 상천의 고개가 두 사람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상천의 눈에 종삼이 도박장으로 들어가는 순간의 모습이 생생하게 들어왔다.
‘나한테는 형편 어렵다고 허투루 쓸 돈 없다고 하더니…….’
상천은 순간적으로 배신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성난 얼굴로 종삼이 들어간 도박장 쪽을 바라보고 서 있던 상천은 화난 발걸음으로 병목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병목을 비롯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상천은 머릿속에서 도박장으로 들어가던 종삼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들과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게 시간을 보내고 난 상천은 서둘러 백룡문으로 돌아왔다.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시간이었지만 종삼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옆 마을에서 종삼을 본 후로 어림잡아 두 시진은 지났다.
상천은 또다시 배신감이 차올랐다.
그렇게 반 시진의 시간이 더 흐르자 종삼이 돌아왔다.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 상천은 종삼이 들어오는 모습을 서늘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 왔다.”
“어.”
상천의 대답에 종삼이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평소에도 단답형으로 대답하던 상천이지만 오늘은 어딘지 모르게 더 싸늘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그래?”
“아냐.”
상천이 종삼을 외면했다. 하지만 종삼은 상천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확신하고 다시 물었다.
“왜 그러냐니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상천이 재차 묻는 종삼을 잠시 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종삼에 대한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말해봐. 얼른. 무슨 일인데?”
종삼의 물음에 결국 상천이 입을 열었다.
“오늘 어디 갔었어?”
“어?”
상천의 물음에 종삼이 살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침착하게 대답했다.
“왜 그러는데?”
종삼의 물음에 상천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종삼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대낮부터 도박장 가서 뭐했어? 물어보는 것도 이상하지. 도박장에서 할 게 도박밖에 더 있겠어?”
상천의 날이 시퍼렇게 선 말에 종삼은 일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본 게 그거밖에 없는 줄 알아? 대낮부터 기루에 들어가는 것도 봤어.”
그의 말에 종삼은 말문이 막혔다.
상천의 얼굴에는 화가 잔뜩 올라 있었다. 계속해서 종삼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상천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나한테 뭐라고 했어? 허투루 쓸 돈 없다고? 형편이 어렵다고? 내가 쓰면 얼마나 쓴다고? 그리고 난 아저씨처럼 기루에 가거나 도박장에 가는 일은 없어. 적어도.”
그렇게 말한 상천은 일어나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종삼은 가슴이 아팠다.
상천의 말대로 그는 기루에 가고 도박장에 갔다.
하지만 절대로 기녀와 일을 치르지도, 도박을 하지도 않았다.
종삼은 그곳에서 일을 했다.
기루도 그렇고 도박장도 그렇고 어딜 가든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이 꼭 있었다.
술에 취하든, 아니면 뭔가 세상에 불만이 많든.
그래도 할 줄 아는 것은 이류 정도밖에 안 되는 무공밖에 없는지라 종삼은 그런 곳에서 경비 일을 했다.
하지만 종삼은 그런 이야기를 상천에게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아무리 사실을 말한들 상천은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
종삼은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로 며칠 동안 상천은 종삼과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규화공 수련 시간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나갔고, 종삼이 나간 다음에야 연무장으로 돌아왔다.
종삼이 돌아오는 기척이 들리면 일부러 뒷간을 가거나 하여 자리를 피했고, 그가 잠이 든 다음에야 방에 들어와 잠을 잤다.
거의 마주치는 일 없이 며칠을 보낸 상천은 여전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종삼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 때문인지 수련을 하는 데에도 지장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상천도 밖으로 나도는 시간이 많아졌다.
자연스럽게 둘만 사는 백룡문에는 찬 기운만 맴돌았다.
종삼과의 갈등이 있고 닷새가 지났다.
둘 사이에는 여전히 어색함이 감돌았고, 찬바람이 불었다.
그날 상천은 일부러 늦게 일어났다.
아니, 깨어 있었음에도 종삼이 나갈 때까지 자는 척하고 누워 있었다.
종삼이 나가고 난 다음에야 눈을 뜬 상천은 잠시 동안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상천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은 종삼이 나가고 반 시진가량 지난 후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상천은 규화공 수련을 생략하고 곧장 연무장으로 향했다.
며칠 동안 수련을 제대로 안 한 탓도 있지만 이렇게 있느니 차라리 얼른 수련을 끝내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처음에 종삼을 따라온 것은 서로의 이해관계 때문이었고, 종삼에게 배울 것 다 배우면 그 관계는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상천의 수련이 시작되었다.
다시 마음을 다잡았기 때문일까.
그저 막막하게만 보였던 검법이 조금 더 유연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상천이 연무장에 주저앉아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하나였다.
하지만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검법 자체에 문제가 있어? 말도 안 되는 거지.”
상천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사십오대 장문인이 될 거라고 했다. 그렇다는 것은 못해도 몇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어 온 문파에서 이런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보완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뭐지?”
상천의 머릿속이 복잡해져 갔다.
며칠 밤낮을 생각했다.
자신의 가설이 맞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하지만 상천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자신은 아직 무공을 익히고 있는 수준에 불과했고, 어쩌면 백룡문 무공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그것 하나밖에 없었다.
‘검법에 문제가 있어. 중간에 뭔가가 빠졌든, 아니면 초식이 잘못되었든.’
상천의 생각이 정리되고 있었다.
이틀의 시간이 더 지났다.
이제는 서늘한 정도를 넘어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상천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옷은 조금 두꺼워졌지만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하겠다는 듯 상천은 차가운 연무장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것을 본 종삼이 무슨 말을 하려던 듯 입을 우물쭈물하다가 굳게 닫았다.
대신 한쪽에 있는 작은 의자 하나를 가져다가 상천의 옆에 놓았다.
그럼에도 상천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연무장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종삼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밖으로 나갔다.
종삼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상천의 눈앞에는 사람 형상을 한 환영이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환영이 펼치고 있는 검법은 언뜻 전혀 생소한 검법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단월검이었다.
상천이 지금까지 단월검을 수련하면서 느낀 것과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한 여러 가지 보완점을 바탕으로 눈앞에 그려낸 환영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하고 있었다.
상천이 직접 몸으로 해볼 수도 있겠지만 어떤 위험이 따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환영을 이용하여 먼저 시행착오를 겪게 하는 것은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환영이 휘두르는 검법을 보며 상천의 머릿속에서는 단월검이 재정립되고 있었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초겨울을 지나 한겨울이 되었지만 상천의 일과는 바뀐 것이 없었다.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바람이 불어도, 함박눈이 내려도 상천은 언제나 연무장에 있었다.
찬바람에 살이 터서 얼굴에 각질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상천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후우…….”
눈이 빠질 것처럼 아프도록 뚫어져라 연무장 한가운데를 바라보고 있던 상천이 한숨과 함께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방 안으로 들어가 목검을 들고 나왔다. 상천이 다시 목검을 잡은 것은 몇 달 만의 일이다.
목검을 가지고 나온 상천이 연무장 한가운데에 섰다.
조금 전까지 그가 만들어낸 환영이 열심히 검을 휘두르던 그 자리다.
잠시 동안 목검을 들고 서 있던 상천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르지 않았다.
천천히 동작 하나하나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며 검을 휘둘렀다.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인지 상천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고, 얼굴과 머리 쪽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기 시작했다.
상천이 펼치는 검법은 단월검이었다.
하지만 만약 외출한 종삼이 봤다면 무슨 검법이냐고 했을지 몰랐다.
그 정도로 상천이 펼쳐 내는 단월검은 종삼이 가르쳐 준 검법과는 다른 부분이 많았다.
종삼이 가르친 각각의 초식이 앙상한 가시만 남은 생선이었다면, 지금 상천은 그 가시에 다시 살을 붙이고 있었다.
완벽한 것은 아니었지만 상천은 나름대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단월검을 새롭게 변모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상천은 한 시진가량 꼬박 검을 휘둘렀다.
비록 전에 하던 수련 시간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한 시진 동안 검을 휘두른 상천은 녹초가 다 되어 있었다.
털썩.
상천은 땀범벅이 된 상태로 연무장 바닥에 드러누웠다.
차가운 바람이 그의 얼굴을 훑고 지나며 열기를 식혀주었다.
상천의 입가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며칠간 엄동설한이 계속되다가 날이 조금 풀려 내렸던 눈이 녹을 정도로 푹한 날이 되었다.
상천은 연무장 위에서 또다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다시 목검을 잡은 이후,
오늘 상천이 펼쳐 내는 검법은 좀 더 빨라져 있었다.
큰 차이를 느끼기는 어려웠지만 분명 상천의 검은 전에 비해 그 속도가 빨라져 있었다.
상천은 조급함을 버리기로 했다.
초식 하나를 펼치는 데에도 완벽을 기했고, 나름대로 장고를 거듭한 끝에 찾아낸 검법의 보완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오늘 상천의 검법이 조금 더 빨라진 것은 그만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검법을 펼쳐 내는 상천의 입가에는 오랜만에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동안 검법 수련을 하면서 이렇게 웃으며 한 것은 초창기에 검법을 배울 때 이후로 처음이다.
쒜엑!
상천의 검이 제법 그럴싸한 파공음을 내며 허공을 갈랐다.
진검이 아닌 목검으로 만들어낸 소리치고는 대단한 소리였다. 그만큼 힘의 분배와 초식의 완성도가 높아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바탕 땀을 흘린 상천은 눈이 녹아 축축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랜만에 따뜻한 햇살을 느끼며 상천은 규화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