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화.
방으로 돌아온 상천은 새 옷을 입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주저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뭔 놈의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지. 한동안 잠잠하다 싶었더니만 엄청나게 쏟아지는구나!”
그렇게 말하며 옷에 묻은 물기를 털어낸 종삼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의 눈에 웃통을 벗고 앉아 책을 읽는 상천이 보였다.
“옷 벗고 뭐하냐?”
“아, 아저씨 왔어? 아저씨, 이거 뭔지 알겠어? 조금 아까 주방에서 찾은 건데.”
그러면서 상천이 종삼에게 자신이 찾은 호천강의 일대기를 보여주었다.
“뭔데?”
책을 받아 든 종삼은 첫 장을 펼쳐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덮어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상천에게 건네주었다.
“왜 그래?”
“대단한 거 아니다. 이런 거 몇 개 더 있어.”
그렇게 말한 종삼이 한쪽에 놓여 있는 서랍 안에서 책 몇 권을 꺼냈다.
“자, 봐라. 내용도 똑같을걸.”
상천은 종삼이 던져준 책 중 한 권을 들어 자신이 찾은 책과 비교를 해보았다.
역시나 종삼의 말처럼 글자 하나 안 틀리고 똑같았다.
“에이, 뭐야? 난 또 보물 찾은 줄 알았네.”
상천의 말에 종삼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보물? 그게 보물이면 세상에 보물 아닌 게 없겠다. 하하하!”
종삼의 말에 인상을 찌푸린 상천은 책을 내려놓고 상의를 꺼내 입었다.
“그런데 웃통은 왜 벗고 있었냐?”
“자다가 빗물이 들이치는 바람에 젖었어.”
“그럼 주방은 왜 갔고?”
“옷 말리러.”
“그럼 옷은 어딨는데?”
“당연히 주방에…….”
그렇게 중얼거린 상천이 생각났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설마 타진 않았겠지?”
“방이 이렇게 후끈후끈한데, 불을 얼마나 지핀 거야?”
상천은 종삼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고 서둘러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상천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으아악! 구멍 났다!”
종삼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아궁이 불을 너무 많이 지핀 상태에서 젖은 옷을 가까이 두는 바람에 상천의 옷에는 살짝 구멍이 나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구멍이 더 커지는 것은 둘째치고 불이 날 수도 있었다.
어쨌든 구멍 난 옷을 버린 상천은 방으로 돌아와 호천강의 일대기를 읽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그거 읽어서 뭐하려고? 시간낭비다.”
백룡문 선조의 일대기를 읽고 있는 제자에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종삼은 상천에게 그것을 권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읽는 것을 뜯어말리지는 않았지만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도 처음에 호천강의 일대기를 찾았을 때 희대의 보물을 찾은 것처럼 큰 기대를 했고, 그것을 다 읽고 난 이후에 크게 실망했기 때문이다.
그의 일대기는 말 그대로 일대기였다.
지금까지 그가 살아오면서 겪은 일들을 적당한 과장을 섞어 적어놓은 것에 불과했다.
그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 한 줄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읽고 종삼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이 느꼈던 그런 것을 똑같이 느끼게 될까 봐 종삼은 상천이 그것을 읽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종삼의 바람과 달리 상천은 일대기를 너무 재밌게 읽고 있었다. 마치 서점에 가면 널려 있는 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간혹 감탄사를 내뱉기도 하고 안타까운 탄성을 내뱉으며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재밌냐?”
“어! 재밌어!”
상천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시선을 책에 고정시킨 채 입으로만 대답했다.
“너무 빠지지 마라. 수련 빼먹지 말고.”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뭐야? 여기서 왜? 아 놔!”
어떤 부분을 읽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상천이 흥분하며 소리쳤다.
그런 상천을 보며 고개를 저은 종삼이 밖으로 나갔다.
다음날.
호천강의 일대기를 읽느라 늦게 잔 상천은 겨우 눈을 뜨고 규화공 수련을 위해 밖으로 나갔다.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고 그마저도 빨갛게 충혈되어 흐느적거리며 걷는 모습이 마치 시체가 일어나 걷는 것 같았다.
어렵사리 수련하는 곳으로 가 규화공 수련을 한 상천은 한층 개운해진 상태로 단월검 수련을 위해 목검을 들고 연무장에 섰다.
“하아…….”
하지만 단월검 수련을 위해 연무장에 서 있으니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한숨이었다.
상천이 잠시 동안 검을 들고 머뭇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있던 종삼이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소리를 꽥 질렀다.
“수련 안 하고 뭐하고 있냐! 어제 밤늦게까지 그거 읽더니 멍 때리고 있냐!”
종삼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슬쩍 그를 한번 본 상천은 아예 연무장 바닥에 주저앉았다.
“얼씨구?”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이기는 했지만 종삼은 그 이후로 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상천이 수련을 위해 연무장 위에 있을 때에 하는 행동은 전부 무공 수련과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연무장에 주저앉은 상천은 눈앞에 또 다른 환상을 그려내고 있었다.
상천의 눈앞에 희미하게 두 사람의 형상이 그려졌다.
또렷하지는 않았지만 한 명은 검을 든 채 서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두 주먹을 말아 쥐고 있었다.
검을 든 사람은 다름 아닌 호천강이었고, 주먹을 쥔 사람은 과거 귀주성에서 이름을 날리던 여권문의 문주 매거풍이었다.
지금 상천이 눈앞에 그려내고 있는 상황은 호천강의 일대기에서 읽은 상황이었다.
호천강의 일대기에는 몇몇 비무가 제법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바탕으로 눈앞에 두 사람의 비무 상황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동안 대치하던 두 환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천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상천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반 시진 후였다.
두 환영의 비무는 한 식경이 조금 넘은 시각에 끝이 났고, 나머지 시간 동안 비무를 보면서 느낀 것을 정리하고 일어난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상천은 한번 고개를 갸웃하더니 목검을 들어 올렸다.
“거기서 어떻게 그런 움직임이 나오지?”
상천은 호천강이 펼쳤던 단월검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자신이 익힌 초식들로는 호천강과 같은 검로를 그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는 건가?”
상천이 천천히 검을 휘둘렀다. 마치 처음 검법 수련을 시작했을 때처럼 신중하게 검을 움직였다.
“이게 아닌데? 여기서 이 초식이 어떻게 이렇게 되는 거야?”
상천이 도저히 알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가 빠진 건가? 아니면 잘못 익힌 건가? 뭐지?”
그렇게 중얼거린 상천은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아까처럼 호천강과 매거풍의 비무를 다시 눈앞에 그려내었다.
그렇게 다섯 번을 더 본 상천이 다시 목검을 들고 일어섰다.
“여기서 검을 이렇게 휘두르고… 천유신보를 이렇게 밟아서 돌고… 검을 이렇게 꺾… 여기서! 이게 어떻게 되냐고!”
호천강이 펼친 검법을 떠올리며 그대로 따라 해보던 상천이 어느 순간 버럭 화를 내며 자세를 바로 했다.
“도저히 안 되는데?”
호천강이 펼친 검로대로 검을 휘두르면 어느 순간 몸에 심한 무리가 왔다. 스스로 나름 유연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상천이 고개를 저을 정도였다.
“무슨 연체동물이야? 여기서 이게 어떻게 돼?”
상천이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분명 뭔가가 있어…….”
상천이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종삼이 한마디 툭 던졌다.
“있긴 개뿔…….”
다음날부터 상천의 일과가 조금 바뀌었다.
규화공 수련을 마치고 나면 정오가 될 때까지 눈앞에 호천강의 비무들을 그려보았다.
종삼의 말에 따르면 호천강이 백룡문의 문주들 중 실력이 있는 축에 속했다고 하니 분명 그의 비무에서 얻을 것이 많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오까지 호천강의 비무를 눈앞에 그리고 나면 상천은 식사 준비가 될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조금 전에 본 비무를 상기하며 정리했다.
그 이후 식사를 한 뒤 오후에는 연무장에서 직접 검을 휘둘렀다.
검을 휘두르는 상천의 모습은 굉장히 진지했다.
단월검을 완벽하게 익혀내고자 하는 열정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 보였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지만 종삼은 상천이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자신은 호천강의 일대기에서 얻은 것이 없었지만 상천은 무언가를 얻어가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종삼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연무장에 서서 고심하고 있는 상천을 뒤로하고 종삼은 조용히 백룡문 밖으로 자리를 피했다.
상천의 수련은 해가 저물어도 계속되었다.
종삼이 무리하지 말고 쉬라며 말렸지만 상천은 괜찮다며 계속해서 수련에 매진했다.
해가 저물어 어두컴컴해졌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달빛을 조명 삼고, 별빛과 시원한 바람을 벗 삼아 상천은 나름대로 기분 좋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상천은 호천강의 비무를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느릿느릿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교정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과장이 있을 수 있다는 종삼의 이야기를 들은 터라 냉정하게 호천강의 움직임을 되새기며 필요한 것을 뽑아내고 있었다.
‘불필요한 움직임은 버려야 돼.’
그런 생각과 동시에 상천의 눈앞에 그려지고 있는 호천강의 동작이 간소화되기 시작했다.
상천이 익힌 단월검이 바탕이 되고 쓸데없이 크고 굳이 필요하지 않은 동작들이 줄어들자 상천이 알고 있는 초식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역시…….’
과장된 것이 확실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움직임이 나올 수 있는지 의아했던 부분들도 많이 해소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상천이 알고 있는 초식들로는 펼쳐 내기 어려운 동작들이 제법 남아 있었다.
‘겁화다.’
눈앞의 호천강이 겁화의 초식을 펼쳐 내고 있었다.
상천은 재빨리 자세를 잡으며 호천강의 동작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파석으로 연결되는 건가?’
눈앞의 호천강은 단월검 삼초식인 겁화에서 팔초식인 파석으로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천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중간에 뭔가가 빠져 있어.’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호천강이 펼친 겁화와 파석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똑같았다. 물론 약간의 변초가 섞이기는 했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뭐가 빠졌지?’
상천은 검을 멈추고 다시 한 번 호천강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종전보다 느린 움직임으로 초식을 펼치는 호천강의 움직임을 상천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보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군더더기를 빼버리고 나니 좀 더 확실한 검로가 보이기 시작했고, 그 상태에서 호천강의 움직임을 관찰하니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초식을 똑같이만 펼쳐서는 안 되는 거였어. 힘을 어떻게 조절하고 진기를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연환은 무궁무진하게 늘어날 수 있겠군.’
새로운 것을 하나 알게 된 상천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지금 알아낸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자그마한 부분을 해결해 내었다는 사실이 상천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좋았어! 이제부터 시작이다!”
상천의 진정한 단월검 수련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