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화.
종삼이 상천을 다시 부른 것은 그로부터 한 식경이 더 지난 후였다. 그의 부름에 연무장으로 올라간 상천은 바닥에 붙어 있는 종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저씨, 이게 뭐야?”
“네가 익힐 천유신보의 순서다.”
“이게?”
“그래. 이쪽에서 시작해서 저쪽으로 가는 거다.”
종삼이 가리키는 방향을 타고 시선을 쭉 따라간 상천은 도저히 순서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는데?”
“모르긴, 이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해봐.”
종삼의 말에 상천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안 보여줘?”
“순서를 가르쳐 줬는데 보여줄 것이 뭐 있다고. 말로 설명하고 보여주는 것 보다 직접 해보는 게 제일 빠른 방법이다. 해봐.”
종삼의 말에 상천이 입을 빼쭉 내밀고는 시작하는 방향에 섰다.
“왼발부터.”
오른발을 먼저 내디디려던 상천은 때마침 들려온 종삼의 말에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중심을 잃을 뻔했다.
다행히도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상천은 종삼을 향해 눈을 흘겼다.
“보법의 기본은 언제나 왼발이 우선이다. 왼발부터 나가는 보법에 익숙해지면 그다음은 오른발부터 나가는 수련. 그러고 나서는 왼발부터 역순으로. 마지막이 오른발부터 역순이다.”
“뭐 이리 복잡해?”
“복잡할 것도 없다. 오히려 검법이나 권법에 비하면 쉬운 편이지. 보법은 반복 숙달이 최고다.”
“쳇! 알았어. 한번 해볼게.”
그렇게 말한 상천이 왼발부터 내디디며 표식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어! 어〜!”
하지만 얼마 못 가 발이 꼬인 상천이 균형을 잃으며 그대로 옆으로 고꾸라졌다.
“으아〜! 아프다! 아오!”
왼쪽으로 넘어지며 팔꿈치를 연무장 바닥에 쓸린 상천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연신 쓰라린 팔꿈치를 문질러댔다.
“아! 피!”
쓸린 부분에서 살짝 피가 흘러나오자 상천이 더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 정도 가지고 엄살은. 어떻게 한 번을 제대로 못 가냐?”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어?”
“난 처음부터 잘했다.”
“거짓말! 저거 제대로 된 거 맞아? 중간에 발이 꼬이는데?”
“그건 네가 못나서 그런 거다.”
“말도 안 돼!”
종삼의 말에 발끈한 상천이 도리어 종삼에게 성을 냈다. 하지만 종삼은 덤덤하게 그 말을 받았다.
“그럼 내가 엉뚱한 걸 가르친단 말이냐?”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종삼의 말에 상천이 말꼬리를 흐렸다.
“언제까지 주저앉아 있을 셈이냐? 얼른 일어나!”
종삼의 말에 상천이 피 나는 팔꿈치를 한번 보고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해봐. 이번엔 좀 더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신경 써서.”
종삼의 말에 상천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왼발을 먼저 내디뎠다.
방금 전보다 느린 속도였지만 여전히 쉽지 않았다.
“어〜!”
결국 중간에 가서 상천은 또 한 번 중심을 잃었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왼쪽으로 넘어졌다.
아까 넘어졌을 때 팔꿈치가 쓸린 것을 의식했는지 이번에는 넘어지면서 몸을 살짝 틀어 등 쪽으로 넘어졌다. 심하게 넘어진 것은 아니었기에 순간적으로 통증은 있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상천은 날이 저물어 바닥에 그려놓은 표식이 보이지 않게 되었음에도 단 한 번도 끝까지 가보지 못하고 그날 수련을 끝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규화공 수련을 끝낸 상천은 연무장에 와서 털썩 주저앉아 무언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침 식사 후 설거지를 끝낸 종삼은 주방에서 나오다가 연무장에 주저앉아 있는 상천을 보고는 그리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등 뒤에 서서 허리를 굽히고는 귀에 대고 물었다.
“뭐하냐?”
하지만 상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바닥에 그려진 표식만 바라보고 있었다.
“직접 해보는 게 최고라니까. 그렇게 보고 있어봤자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이어진 종삼의 말에도 상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상하게 생각한 종삼이 상천의 옆으로 옮겨가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뭐하는 거야?”
그렇게 중얼거린 종삼은 상천의 눈을 바라보았다.
상천의 눈은 천유보의 족적을 따라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 하고 있네. 직접 해보는 게 최고라니까.”
그렇게 중얼거린 종삼이 다시 일어나 백룡문 밖으로 나갔다.
전날 직접 몸으로 펼쳐 본 천유보는 너무나 어려웠다.
순서를 안다고 해서 쉽게 할 수도 없었고, 발이 한번 꼬여 넘어지기라도 하면 여기저기가 까지고 멍이 들었다.
상천은 그것이 너무나 싫었다.
아픈 것도 싫었고, 자신이 직접 몸으로 익히는데 자꾸 안 되는 것도 싫었다.
빨리 익히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래서 밤에 잠을 설쳐가면서 고민을 했다. 어떻게 하면 쉽고 빠르게 익힐 수 있을까에 대해서.
그러다가 생각이 미친 것이 바로 단월검 수련이었다.
각 초식 수련을 하면서 그 초식에 맞는 자연 현상을 상상해서 눈앞에 그려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수련을 해왔던 것을 응용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물이 지금 연무장에 앉아 있는 상천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상천은 족적 위에 사람 형상의 환영을 만들어냈다.
완벽한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다리만큼은 또렷하게 보였다.
상천이 눈앞에 그려낸 환영은 천유보의 족적을 보더니 천천히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된다!’
될지 안 될지 확신이 없던 상황에서 만들어낸 환영이 족적대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상천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상천은 이내 환영의 다리를 유심히 보며 관찰하기 시작했다.
종삼이 말했던 것처럼 왼발부터 움직이기 시작한 환영은 처음 상천이 그랬던 것처럼 얼마 가지 못해 다리가 꼬이면서 그대로 고꾸라졌다.
‘거봐. 쉬운 게 아니라니까.’
고꾸라지는 환영을 보며 상천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치 ‘내가 이상한 게 아니다’라고 항변하는 것 같았다.
쓰러진 환영이 얼른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시작 부분에 가서 섰다. 그리고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천은 뚫어져라 환영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관찰을 시작했다. 그리고 곧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루가 한 시진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환영이 펼쳐 내는 천유보를 수백 번 이상 보면서 상천은 점차 천유보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고,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상천의 머릿속에서 정리되었고, 고스란히 천유보를 펼치고 있는 환영에 투영되었다.
그러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환영은 완벽한 천유보를 펼쳐 낼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상천이 그랬던 것처럼 중간에 넘어지기 일쑤였던 환영이 이제는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자유자재로 펼쳐 내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몸으로 겪었어야 할 수많은 시행착오를 환영으로 하여금 대신 겪게 한 상천은 눈앞에서 환영을 지웠다.
그리고는 천천히 왼발부터 시작하여 천유보의 족적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종삼이 천유보의 족적을 가르쳐 준 지 꼭 엿새 만의 일이었다.
상천의 훈련법은 성공적이었다.
비록 속도도 느리고 엉성한 부분이 많았지만 상천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천유보를 밟을 수 있었다.
처음을 무사히 끝내고 난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천유보를 밟아가는 상천의 속도는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단순히 속도만 빨라지는 것이 아니라 천유보에 대한 숙련도 역시 가파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종삼이 얘기했던 것처럼 왼발부터 정주행, 오른발부터 정주행은 물론이고 역주행도 점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상상력을 처음 발현하던 날 떠올렸던 것.
상천은 눈앞에 그린 환영으로 하여금 천유보를 밟게 하고 진기의 운용을 상상했다.
천유보를 밟는 환영의 위로 진기의 흐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처음 단월검의 초식에 맞춰 진기를 운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수차례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야 상천은 천유보를 펼치며 진기의 운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속도가 빨라지고 생각하지 않아도 다리가 먼저 움직이는 정도가 되자 벅찬 희열이 차올랐다.
단월검 첫 초식인 삭풍을 익혔을 때 못지않은 희열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그의 얼굴과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천유보를 밟는 상천의 입가로 기분 좋은 미소가 번졌다.
***
천유보를 익히고 나흘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규화공 수련 후에 단월검 수련을 한 상천은 천유보 수련까지 한 후에 몸을 씻은 후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지만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뭔가 결심한 듯한, 굳은 의지가 서려 있는 표정이었다.
옷을 다 입은 상천은 한쪽에 세워둔 목검을 들고 백룡문 밖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
“딱 기다려라.”
백룡문을 나선 상천이 발걸음을 옮긴 곳은 옆 마을이었다.
저잣거리에 들어선 상천은 두 눈을 부릅뜨고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각 정도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던 상천이 발걸음을 멈추고는 눈을 빛냈다.
‘찾았다!’
상천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고봉 패거리가 있었다.
오늘도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또래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은 미소를 띤 채.
잠시 동안 그들을 보고 서 있던 상천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야!”
상천이 큰 소리로 고봉 패거리가 있는 쪽을 향해 소리쳤다.
자신보다 덩치가 작은 아이를 괴롭히며 낄낄거리던 고봉이 상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라? 이게 누구야? 지난번에 개기다가 얻어터지고 질질 짜던 놈 아니야?”
상천을 알아본 고봉이 조소를 띤 채 말했다.
“너, 그런 짓 하면 재밌냐?”
상천이 고봉에게 물었다. 그러자 고봉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 재밌다. 왜? 또 줘 터지고 싶어서 나타났냐?”
“크크크!”
“낄낄낄!”
옆에서 듣고 있던 추명구와 하동이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세 명의 신경이 상천에게 쏠려 있는 사이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지랄 똥 싸고 있네.”
“뭐?”
상천의 한마디에 고봉 패거리는 미소를 거두고는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쉭!
그런 그들에게 상천이 목검을 겨누었다.
이제는 그들에게 맞지 않을 자신도, 그리고 지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뭐 잘못 먹었냐? 돌았어? 이 새끼가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만?”
그렇게 으름장을 놓으며 고봉이 상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야! 잡아!”
고봉의 말에 추명구와 하동이 달려들었다.
비록 상천이 목검을 들고는 있었지만 아직 자신들보다 덩치도 작았고 수적인 우세도 있었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후우…….’
상천은 심호흡과 함께 지금까지 수련했던 모든 것을 떠올렸다.
단월검, 천유보, 그리고 진기의 운용까지.
순식간에 그것들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몸이 주저하지 않고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