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화.
새로운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일까?
단월검을 익혀가는 상천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그 이후 나흘 만에 제 이 초식인 뇌우를 익히는가 싶더니 삼 초식인 겁화(劫火)는 거의 보름 만에 익혔다.
초식 하나의 형을 익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녹여내는 것까지 보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물론 단월검의 전체적인 초식들이 서너 개의 식이 모여 한 초식을 이룰 정도로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것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보름이라는 속도는 경이롭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종삼이 알지 못하는 하나의 비밀이 있었다.
삭풍, 뇌우, 겁화라는 초식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단월검의 모든 초식은 자연과 관련되어 있었다.
상천은 거기에서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어떻게 보면 그 방법을 떠올리게 된 동기를 종삼이 제공했다.
‘그 상상력을 수련하는 데 써봐라’라는 종삼의 말에 상천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물론 보법을 익히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가 없었다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을지도 몰랐다.
삼 초식을 익히기 시작하면서부터 상천은 불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머릿속에 떠오른 다양한 불에 상상력이 더해져 그림으로 그려졌다.
거기에 높아진 집중력은 상천의 눈앞에 타오를 듯한 겁화를 만들어내었다.
눈앞에 만들어낸 겁화를 보면서 특징을 잡아내고 그것을 통해 불의 느낌을 생생하게 느낀 상천은 그 느낌을 초식에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접목시켜 보았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알고 있는 겁화의 형(形)과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진 불길이 더해져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자연을 본뜬 초식을 실제에 버금가는 형상 속에서 수련했으니 어떻게 보면 보름이라는 시간은 경이로운 속도가 아닌 당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짧은 시간에 겁화를 익힌 상천은 얼떨떨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처음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 내고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과연 효과가 있을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엄청난 효과를 직접 경험하고 나자 삭풍과 뇌우를 익히며 고생했던 것이 아쉽게 다가왔다.
‘괜찮아. 이제 앞으로 이렇게 하면 된다.’
아쉬움을 뒤로한 상천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새롭게 익히게 될 다음 초식에 대한 자신감과 의욕을 높였다.
겁화를 익히고 자신감과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뜬 상천은 거칠 것이 없었다.
이 초식에서부터 오 초식까지 한 달하고도 보름 만에 익힌 상천은 보법을 익힐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
그것은 언제나 상천으로 하여금 더욱더 의욕을 일으키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드디어 보법을 배우게 되는 날 아침.
여느 때보다 일찍 눈을 뜬 상천은 누워서 조금 더 꼼지락거리다가 규화공 수련을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규화공 수련을 위해 가부좌를 틀고 앉은 상천은 들뜬 마음을 애써 가라앉힌 채 운기를 시작했다.
단전에서부터 흘러나온 진기가 소주천의 경로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들떠 있는 상천의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것 같았다.
진기의 흐름을 느끼며 점차 마음의 안정을 찾아간 상천은 소주천의 경로가 끝이 나고 대주천의 경로에 접어들면서 점차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상천이 눈을 뜬 것은 이미 해가 중천에 뜬 시간이었다.
평소에는 소주천의 경로로 진기를 한 바퀴 돌리고 대주천으로 한 바퀴 돌린 후에 운기를 끝냈지만, 이번에는 평소보다 더 마음이 차분해지고 집중도 잘되어 소주천을 한 번 더 하고 나서야 운기를 끝냈다.
정신이 맑아지고 몸이 좀 더 가벼워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난 상천은 서둘러 연무장으로 향했다.
보법을 배울 생각을 하니 운기 덕분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시 붕 뜨는 것 같았다.
들뜬 마음을 안고 연무장에 도착한 상천은 헤죽헤죽 웃으며 종삼을 기다렸다.
“왜 이렇게 안 와?”
하지만 일각이 넘게 기다려도 종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
상천이 큰 소리로 종삼을 불렀다.
하지만 종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아저씨!!”
상천이 더 큰 소리로 종삼을 찾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뭐야? 보법 가르쳐 준다더니 어디 갔지?”
그렇게 중얼거린 상천은 실망감에 아랫입술을 빼쭉 내밀었다.
한껏 기대하고 있었는데 정작 가르쳐 줄 사람은 보이지 않으니 금방 기분이 안 좋아졌다.
“에잇! 몰라!”
그렇게 중얼거린 상천은 백룡문 밖으로 나갔다.
이번에도 상천의 발걸음은 옆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과 다르게 상천은 목검을 손에 쥐고 있었다. 지난번처럼 고봉과 마주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난번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절대로 그냥 맞아주지 않겠다는 각오로 목검을 들고나온 것이다.
몸싸움으로는 상대적으로 왜소한 자신이 고봉이나 추명구, 하동 등을 이길 수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배운 검법으로 그들을 상대하려는 것이었다.
야무진 각오와 함께 상천은 옆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사람들로 북적댔다. 처음에 왔을 때는 오랜만에 와서 옛 생각 하며 마냥 즐겁게 돌아다녔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타나기만 해봐라.’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상천은 저잣거리에 들어서면서부터 목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여차하면 바로 휘두를 준비를 한 것이다.
하지만 저잣거리를 돌아다녀도 고봉 일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내심 실망을 하고 있던 찰나, 상천의 두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사람이 보였다.
“아저씨?”
상천의 눈에 보인 사람은 다름 아닌 종삼이었다.
잠깐 보였다가 사람들 사이에 묻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분명 종삼의 모습이었다.
사람들 사이를 뚫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확실하게 종삼의 모습이 보였다.
“아저씨!”
상천이 서둘러 그쪽으로 걸어가며 큰 소리로 종삼을 불렀다. 하지만 워낙 사람도 많고 시끄러워서 그런지 상천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종삼은 계속 걸어갈 뿐이었다.
“아저……!”
다시 한 번 종삼을 부르던 상천은 입을 다물고 멈춰 서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보법 가르쳐 준다고 하더니 여기 있단 말이지? 안 그래도 맨날 어디 가나 궁금했는데 따라가 봐야겠다.’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상천이 조심스럽게 종삼의 뒤를 따라갔다.
인파를 뚫고 종삼의 뒤를 밟으며 상천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체하지 않고 계속 걷는 것이 뭔가를 사러 온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긴, 뭔가를 사러 왔으면 우리 마을에서 사도 충분한데…….’
백룡문이 있는 마을에 비하면 지금 이 마을은 그 규모가 더 작았다.
오가는 사람이 많은 거점 같은 곳이기 때문에 그나마도 이 정도 상권이 형성된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십 호 정도가 모여 사는 적당한 크기의 마을에 불과했다.
그러니 당연히 상권도 지금 이 마을보다는 백룡문이 있는 마을이 더 컸다.
물건을 살 것이 있다면 굳이 이곳까지 와서 살 이유는 없었다.
‘어디 가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종삼의 뒤를 따르던 상천의 표정이 어느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종삼은 저잣거리를 지나 다른 쪽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곳은 저잣거리와 달리 굉장히 한산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홍등가!’
어둠이 깔리고 불을 밝혀야 할 시간이 되면 몸 파는 기녀들이 나와 호객 행위를 하는 기루들이 줄지어 있는 곳.
종삼이 발걸음을 옮긴 것은 바로 홍등가였다.
“대낮부터!”
자신도 모르게 소리친 상천은 서둘러 입을 틀어막고 한쪽으로 몸을 숨겼다.
저잣거리에 비해 인적이 드물기 때문에 혹여나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상천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종삼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홍등가로 들어섰다.
아직 영업이 시작되지 않은 기루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직 문도 안 열었는데 여긴 왜 온 거지?’
뒤따르는 상천이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이가 어려 잘은 모른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정오가 갓 지난 이 시간에 기루를 찾는 것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종삼이 어느 한 기루 앞에 멈춰 섰다.
그 기루 역시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불이 꺼져 있었고, 문과 창이 굳게 닫혀 있었다.
잠시 그 기루 문 앞에 서 있던 종삼이 주변을 한 번 두리번거리더니 손으로 가볍게 몇 번 문을 두드렸다.
‘진짜?’
종삼의 그런 행동들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몸을 숨긴 채 바라보고 있는 상천의 표정은 점차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기루의 문이 열렸다.
대낮임에도 하늘거리는, 그리고 속이 거의 비치는 얇은 옷을 입은 기녀 한 명이 나와 종삼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종삼은 기녀와 함께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헐! 대낮부터!”
종삼이 안으로 사라지자 상천은 놀란 듯 소리쳤다.
그리고는 잠시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서둘러 홍등가를 벗어났다.
“색골, 색마, 변태! 보법 가르쳐 준다더니 대낮부터 기루를!”
그렇게 중얼거리며 저잣거리를 빠르게 걸어가던 상천이 갑자기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설마 배우는 무공 다 배우면 나도 변태 색마 되는 거 아냐?”
심각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상천은 온몸을 타고 흐르는 두려움에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으〜! 모르겠다!”
그렇게 말하며 상천은 발걸음을 재촉하여 백룡문으로 돌아갔다.
백룡문으로 돌아온 이후 상천은 연무장에 앉아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오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종삼이 돌아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그를 보고 상천은 한차례 흠칫 놀랐다. 그것을 본 종삼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핀잔을 주었다.
“왜 이렇게 놀라? 못 볼 거 봤냐?”
“어? 아, 아니!”
종삼의 물음에 상천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너 뭐 찔리는 거 있어? 왜 말을 더듬고 그래?”
뭔가 수상하다는 듯 묻는 종삼에게 상천은 입은 다문 채 도리질을 쳤다.
“어이없기는. 비켜봐!”
“왜?”
종삼이 연무장으로 올라오며 상천에게 말했다. 그러자 상천이 앉은 자리에서 비켜서며 물었다.
“보법 가르치려고 그런다! 오늘 가르쳐 주기로 했잖아?”
“아, 보법…….”
종삼의 말에 상천이 뭔가 마뜩치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왜? 배우기 싫어? 가르쳐 주지 말까?”
“음? 아, 아냐! 배우고 싶어. 그런데…….”
“그런데?”
상천이 말을 끊자 종삼이 그 뒤를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상천은 종삼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혹시?”
“무공 다 배우면…….”
“아, 거참! 답답하게! 빨랑빨랑 말 안 할래? 얘가 오늘따라 왜 이래?”
자꾸 말하기를 꺼려하는 상천을 보며 종삼이 윽박질렀다.
“색마 같은 거 되는 건 아니지?”
“뭐?”
상천의 황당한 질문에 종삼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질문하는 상천은 제법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런 거 아니다. 또 어디서 쓸데없는 걸 듣고 와서 그러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럴 일 절대 없으니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저쪽으로 비켜 있어.”
“진짜지?”
상천이 다시 한 번 되묻자 짜증이 난 종삼이 상천을 한번 노려보았다. 그러자 살짝 움츠린 상천이 종종걸음으로 연무장을 내려갔다.
“저놈이 오늘 뭘 잘못 먹었나? 왜 저래?”
연무장을 내려가는 상천을 보며 중얼거린 종삼은 곧장 품에서 꺼낸 무언가를 바닥에 붙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