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화.
시작은 어려웠지만 상천은 제법 글을 빠르게 익혀갔다. 처음에는 지루해하고 집중도 잘하지 못했지만 아는 글자가 생겨 조금씩 뭔가를 읽을 수 있게 되자 재미가 붙어 익히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천자문을 시작하여 처음 오십 번째까지는 한 달 가까이 걸렸는데 그 이후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익히기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천자문을 떼었으니 한 달 동안 구백오십 자를 익힌 것이다.
글을 가르치면서 종삼은 상천에게 혈도를 함께 가르쳤다. 규화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천자문을 모두 뗀 상천은 본격적으로 종삼을 조르기 시작했다.
이제야 간단한 내용의 책을 읽을 수 있는 정도이면서 어려운 무공서를 보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으니 종삼은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옜다! 먹고 떨어져라.”
그렇게 말하며 종삼이 규화신공을 툭 던져 주었다.
그러자 ‘오〜!’ 하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상천이 조심스레 서책을 펼쳐 보았다.
기대에 찬 눈빛으로 서책을 펼친 상천은 첫 장을 넘기기도 전에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집어 던져 버렸다.
“뭐가 이렇게 어려워?!”
그런 상천을 보며 종삼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럼 쉬울 줄 알았느냐? 잠시 외출할 테니 잘 읽어보고 있어.”
“또 나가? 맨날 어디 가는 거야?”
달랑 무공서만 던져 주고 가르쳐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종삼을 보며 상천이 또 한 번 투정을 부렸다.
“어른들 하는 일에 애가 끼어드는 거 아니라고 했지? 그러니까 얌전히 앉아서 그거나 읽고 있어. 외울 수 있으면 외워봐.”
그렇게 말한 종삼이 몸을 돌리려는데 상천이 또 한 번 소리를 질렀다.
“외우라고? 겨우 읽는 사람한테 외우라니! 말도 안 돼!”
“그럼 말고. 다녀오마.”
가볍게 한마디 툭 던진 종삼이 밖으로 나갔다. 상천은 그런 종삼에게 신경 쓰지 않고 이내 그가 던져 준 규화신공에 빠져들었다.
종삼이 나간 후 혼자 남은 상천은 어렵사리 무공서를 읽어가고 있었다.
비록 읽는 데 급급한 수준이었지만 상천은 나름 열심히 읽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간단한 그림도 섞여 있어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
종삼에게 글을 배울 때와 달리, 그리고 그가 외출하기 전과 달리 상천은 제법 집중하고 있었다.
아직 읽는 것에 익숙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말로만 듣던 무공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는 기대감과 설렘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상천의 의욕과 달리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무공이라는 것이 단순히 무공서를 읽는다고 해서 누구나 익힐 수 있는 것이라면 세상천지에 무공을 익히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상천은 한껏 들뜬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며 무공서에 빠져들었다.
종삼이 돌아온 것은 날이 어둑해졌을 무렵이었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사위가 제법 빨리 어두워지고 있었다.
많이 어두워졌는데도 상천이 있을 방 안에서 불빛이 보이지 않자 종삼은 자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걸음걸이를 조용히 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아저씨 왔어? 그럼 불 좀 켜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들려온 상천의 목소리에 종삼은 화들짝 놀라 호롱불을 켰다.
불이 켜지고 실내가 환해지자 쪼그려 앉아 책에 두 눈을 최대한 가까이 붙이고 있는 상천의 모습이 보였다.
“으〜 눈부셔!”
“안 자고 있었느냐?”
“잠이 와야 자지. 불 켜는 거 깜빡했는데 순식간에 어두워져서 책 읽는 데 힘들었어. 고마워, 아저씨.”
그렇게 말한 상천이 밝은 빛에 눈을 적응시키려는 듯 계속해서 껌뻑거렸다.
그런 상천에게서 시선을 뗀 종삼은 그 앞에 놓여 있는 무공서를 바라보았다. 제법 많은 분량을 읽었는지 넘긴 책장 두께가 꽤 두꺼웠다.
“많이 읽었구나.”
“어. 근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상천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이내 또다시 투덜거렸다.
“한 번 읽고 이해가 되면 그게 신공이겠느냐?”
그렇게 말하며 종삼이 상천의 앞에 있는 무공서를 덮었다.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하고 내일부터 제대로 규화신공을 가르쳐 주마.”
“오〜 진짜?”
“그래.”
“아싸!”
종삼의 말에 상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그 모습에 종삼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렇게 좋으냐?”
“당연하지! 이제 나도 빨리 뛰고 멀리 보고 높이 뛸 수 있는 거잖아?”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었느냐?”
종삼의 물음에 상천이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내가 이래 봬도 길바닥에서 제법 굴러먹었잖아.”
상천의 말에 종삼이 실소를 머금었다.
아무리 길바닥에서 생활을 했다 한들 가끔 보면 열 살 어린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은 말들을 쏟아내는 상천이었다.
“오늘은 날이 많이 어두워졌으니 이만 자자꾸나. 나도 피곤하다.”
“벌써?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나 그거 좀 더 읽다 자면 안 돼?”
상천이 규화신공 무공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해라. 난 잘 테니.”
그러면서 종삼이 자리를 깔고 누웠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코까지 골며 잠에 빠져들었다.
“아! 코도 곯아?”
코 고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종삼을 한번 바라본 상천이 다시 규화신공을 펼쳐 들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상천이 종삼을 따라 백룡문에 온 지도 일 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사이 두 사람 모두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종삼은 흰머리가 조금씩 늘어가고 있었고, 상천은 체격이 제법 커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종삼의 가슴팍 정도의 키였던 상천이 지금은 어깨를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열 살을 갓 넘은 아이의 키라고 보기에는 또래보다 한 뼘 정도는 더 큰 상천이다.
겉으로 보이는 변화도 있었지만 내부적인 변화도 있었다.
상천이 글을 읽고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자 종삼이 본격적으로 규화신공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상천이 그를 따라 백룡문에 온 지 두 달 조금 지난 날부터였다.
규화신공, 아니, 규화공은 절세의 내공심법이 아니었다.
그저 일반적인 토납법보다는 뛰어나고 상승의 내공심법에 비해 한참 부족한 수준의 심법이었다.
어린 상천이, 한창 기대하고 있는 상천이 상처 받지 않게 하기 위해 규화공 사이에 ‘신’이라는 글자를 써 넣었지만 가르치는 내내 종삼의 마음 한쪽에는 그것이 짐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천은 종삼이 가르치는 것을 제법 잘 따라오고 있었다.
그런 상천을 보며 종삼은 내심 흐뭇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고 있었다.
가벼운 상천의 성격상 그런 것을 전부 보이면 자만하고 마냥 들뜨기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 생활할 때와 달리 무공을 가르칠 때만큼은 종삼도 진지하고 엄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보통 무공을 가르치는 사부가 엄하게 나오면 제자가 숙일 법도 하건만 상천은 그러지 않았다.
하기 싫은 것, 자신이 생각하기에 왜 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으면 꼭 따져 물어야 직성이 풀렸다. 그때마다 종삼이 이유를 설명했다.
그렇다고 한 번에 수긍하는 법이 없었지만 결국에 가서는 종삼이 시키는 대로 수련에 임했다.
그 결과 백룡문에 온 지 일 년 만에, 규화공을 수련한 지 팔 개월 만에 이성에 올라 있었다.
‘이젠 단월검을 가르쳐도 되겠구나.’
가부좌를 틀고 운공을 하고 있는 상천을 보며 종삼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규화공을 익혀가는 상천의 속도는 자신이 처음 시작했을 때에 비하면 굉장히 빨랐다. 종삼은 규화공 수련을 시작하고 육 개월 만에 일성에 접어들었으니 상당히 빠른 속도였다.
‘어쩌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던 종삼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문파의 명맥을 이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아이다. 너무 욕심 부리지 말자.’
그렇게 생각한 종삼은 상천이 운공을 마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상천이 운공을 마치고 눈을 뜨며 말했다.
“할 때마다 신기하단 말이야? 하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는 거 같아. 너무 좋다.”
그렇게 말하며 상천이 씩 웃었다.
“뭐가 좋아서 그렇게 실실거리느냐? 그러니 신공인 거다.”
종삼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말하자 상천이 힐끗 눈을 흘기며 그를 바라보았다.
“따라와라. 오늘은 또 다른 걸 가르쳐 주마.”
“오! 진짜? 뭔데? 뭔데?”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해!”
눈을 흘겼던 상천이 어느새 표정을 풀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종삼을 따라 나섰다.
잡초가 무성했던 연무장으로 상천을 데려간 종삼은 미리 준비해 둔 낡은 목검 하나를 상천에게 건넸다.
“목검? 검법 가르쳐 주는 거야?”
“그래. 가르쳐 줄 검법은 단월신검이다.”
“오〜! 이름 멋있다!”
단월신검이라는 이름에 상천의 기대감은 최고조로 올라갔다. 그리고 부담스런 눈빛으로 어서 가르쳐 달라는 듯 종삼을 바라보았다.
“일단 첫 번째 초식부터 가르쳐 주마.”
“하나만?”
“그래. 하나만.”
종삼의 대답에 상천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규화공을 배우고 익히면서 신기하고 즐겁기는 했지만 몸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기에 좀이 쑤셨던 상천이다.
그랬기에 검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을 때 한껏 들떴는데 고작 한 초식만 가르쳐 준다고 하니 실망한 것이다.
“한 초식이라도 제대로 익힐 수 있을 것 같으냐? 단월신검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검법이 아니다.”
“쳇! 그래도!”
“안 가르쳐 준다?”
종삼의 말에 상천이 입을 꿰매기라도 한 듯 앙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단월신검 제일 초식의 이름은 ‘삭풍(削風)’이다.”
“오〜! 멋있다!”
초식 명을 들은 상천의 기대감은 또 한 번 올라갔다. 그런 상천의 반응에 종삼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에헴! 잘 봐라. 이게 삭풍이다.”
쉬익!
종삼이 대각선으로 검을 한 번 내리그었다. 그리고 상천은 그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검을 휘두른 종삼은 그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상천도 계속해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
그것을 먼저 깬 것은 상천이었다.
“끝?”
“끝.”
“진짜?”
“진짜.”
“에게! 이게 뭐야! 달랑 이거야?”
상천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과 행동을 보이자 종삼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직이 말했다.
“단순히 대각선으로 휘두르는 칼질 한 번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럼? 그럼 뭔데? 이건 나도 하겠다!”
그렇게 말하며 상천이 종삼이 했던 그대로 따라 했다.
쉬익!
똑같은 궤도와 똑같은 속도, 그리고 똑같은 자세까지.
누가 봐도 종삼이 펼쳐 보인 것과 상천이 펼친 것은 완벽하게 똑같았다.
“그게 아니야!”
하지만 종삼은 고개를 저었다.
“뭐가 아니야! 똑같구만!”
종삼의 말에 상천이 발끈하며 물었다.
“단순히 궤적, 속도, 동작만 똑같다고 해서 다 똑같은 게 아니다. 네가 휘두른 그 검으로 바람을 벨 수 있겠느냐?”
종삼의 말에 상천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보이지도 않는 바람을 어찌 벤단 말인가?
“그 초식의 이름이 왜 삭풍이겠느냐? 초식 명은 멋으로 붙이는 게 아니다. 다 이유가 있기 때문에 붙이는 거다.”
종삼의 말에 상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람을 벨 수 있어?”
“있다.”
단호하게 말하는 종삼을 보며 상천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초식으로 바람을 벨 수 있을 때, 삭풍을 다 익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한 종삼이 몸을 돌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바람이 한줄기 불어왔다.
상천은 서둘러 방금 종삼이 가르쳐 준 초식대로 검을 휘둘러보았다.
하지만 바람은 그 초식을 비웃기라도 하듯 목검을 사뿐히 피해 상천의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