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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월검제-2화 (2/141)

#002화.

상천의 상태는 생각보다 양호했다.

구걸을 하러 다니면서도 나름대로 잘 먹었는지 크게 문제가 될 부분은 없었다.

상천 스스로도 그런 것을 느꼈는지 종삼을 따라온 지 삼 일째 되는 날부터 계속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종삼은 계속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미루고 있었다. 상천이 조르기 시작한 지 이틀째 되는 날부터는 아예 오전에 나가서 오후에 돌아오기 시작했다.

혼자 남은 상천은 입을 삐쭉 내민 채 지루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상천이 본격적으로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조르기 시작한 지 닷새째 되는 날 밤.

계속 조르다가 지쳤는지 상천은 일찍부터 잠이 들었고, 그런 상천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종삼은 한쪽에 책 몇 권을 꺼내놓고 있었다.

그가 꺼내놓은 책은 총 네 권이었는데, ‘규화공(葵花功)’, ‘단월검(斷月劍)’, ‘천유보(天流步)’, ‘백룡권(白龍拳)’이라고 각각 적혀 있었다.

서책을 꺼내놓은 채 종삼은 흔들리는 호롱불 아래에서 열심히 먹을 갈고 있었다. 그 옆에는 적당한 크기로 잘라놓은 종이와 붓도 준비되어 있었다.

한참 동안 먹을 간 종삼이 종이 하나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와서는 붓에 먹을 묻혀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종이에 ‘규화신공(葵花神功)’이라고 적은 종삼은 그 종이를 옆으로 밀어놓고는 다른 종이를 가져와 또다시 글자를 적었다.

단월신검(斷月神劍).

천유신보(天流神步).

백룡신권(白龍神拳).

각각의 종이에 그렇게 적은 종삼이 먹이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먹이 마른 종이를 각각 규화공, 단월검, 천유보, 백룡권이라고 적힌 서책에 조심스럽게 붙이기 시작했다.

종이를 붙인 종삼은 자신의 앞에 서책들을 늘어놓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서책은 많이 낡았는데 그 위에 붙어 있는 종이는 너무나 깨끗했기 때문이다.

책만 낡고 제목을 적은 종이는 그대로일 수 없건만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종삼이 곤히 자고 있는 상천을 바라보았다.

“익히는 동안만이라도 기분 좋게 익히려무나.”

자고 있는 상천에게 독백하듯 나직이 이야기한 종삼의 얼굴에는 미안함과 슬픔이 묻어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역시나 해가 중천에 뜬 시간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 상천은 밖으로 나갔다.

상천은 기지개를 켜던 자세 그대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며칠 동안 그랬듯이 오늘도 밖에 나가고 없을 줄 알았던 종삼이 무서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연무장 한가운데에 뒷짐을 진 채 서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이제 일어나느냐! 그러면서 지금까지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단 말이냐!”

난데없는 호통에 당황한 상천이 슬그머니 팔을 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혼을 내기에 자신이 잘못한 것이라 생각하던 상천이 문득 고개를 들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진작 무공 가르쳐 준다고 했으면 일찍 일어났을 거 아니야! 말도 안 해줘놓고서는!”

상천의 말에 종삼은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가까스로 표정을 유지했다.

‘조그만 녀석이 성질머리하고는! 이렇게 지면 안 되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종삼이 다시 한 번 버럭 화를 내었다.

“어디 제자가 사부한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느냐! 예의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무공도 안 가르쳐 주면서 무슨 사부야!”

종삼의 호통에 상천도 지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맞섰다.

툭!

상천의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종삼이 서책 하나를 바닥에 툭 던졌다.

“뭐야, 이건?”

그렇게 중얼거린 상천이 서책을 집어 들었다. 상천이 집어 든 서책에는 ‘규화신공’이라고 적혀 있었다.

간밤에 종삼이 정성스럽게 적어 붙인 하얀 종이가 햇살을 받아 더욱 하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뭐라고 쓰여 있는 거야?”

상천이 인상을 찌푸린 채 종삼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종삼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뿔싸! 글을 읽을 줄 모르는구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자신이 던져준 서책을 받아 든 상천이 ‘규화신공’이라 적힌 것을 보고 놀라며 자신을 우러러보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어야 한다.

무려 ‘신공’을 가르쳐 주는데 사부를 존경하지 않을 제자가 어디 있겠는가?

‘물론 저 녀석은 그러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종삼이 작게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규화신공이라고 적혀 있다. 본 문의 내공심법이지. 글을 못 읽느냐?”

“어. 누가 가르쳐 준 적이 있어야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상천이 서책을 들춰보았다. 하지만 글을 읽지 못하는데 들춰본들 무엇하랴. 이내 싫증을 느낀 상천이 서책을 덮고 종삼을 바라보았다.

“이거 대단한 거야?”

“허!”

상천의 물음에 종삼이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뭐, 신공이라 일러줬을 때 아무런 반응 없는 거 보고 예상했다.’

다시 한 번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종삼이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무당파는 들어봤겠지?”

“들어봤지. 그런데 무당파가 왜 나와?”

“말 끊지 말고!”

“칫!”

종삼의 말에 상천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러자 종삼이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험험! 무당파의 대표적인 내공심법이 바로 태극‘신’공이다. 화산파의 내공심법 역시 자하‘신’공이지.”

무당파의 태극신공과 화산파의 자하신공을 이야기하며 일부러 ‘신’이라는 글자에 힘을 주는 종삼이었다.

“그런데?”

“이런 멍청한 녀석!”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상천의 반응에 종삼이 답답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천하를 호령하는 문파의 내공심법은 전부 다 ‘신공’이라 불린단 말이다! 네가 들고 있는 그것 역시 ‘신공’이다! 이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느냐?”

“아〜 그런 거였어?”

생각보다 미온적인 상천의 반응에 종삼은 기운이 쫙 빠지는 것을 느꼈다.

“하, 네 녀석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구나.”

“일단 글부터 가르쳐 줘. 글을 알아야 이걸 익히든 말든 할 거 아니야?”

종삼의 말에 상천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래, 글부터 배우자꾸나.”

힘없이 대답한 종삼이 상천에게로 걸어가 규화신공을 빼앗았다.

“글 다 배우면 그때 다시 주마.”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가는 종삼의 뒷모습은 축 처져 있었다.

다음날부터 상천의 글 배우기가 시작되었다.

종삼은 상천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것은 제쳐 두고 오로지 글을 가르치는 데에만 신경을 썼다.

그렇다고 조급해하지는 않았다.

천자문부터 차근차근 상천에게 가르쳤다.

다행인 것은 상천의 머리가 좋다는 점이었다. 다만 집중력이 조금 떨어지고 잔꾀를 부리기 일쑤였다.

쏴아아!

상천이 글을 배우기 시작하고 나흘째 되는 날,

하늘에 구멍이 뚫리기라도 한 듯 폭우가 쏟아졌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나마 다급한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은 애써 키우던 농작물이 혹시나 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논밭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워낙 허름하여 물이 새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던 건물은 다행히 폭우에도 끄떡없었다.

덕분에 상천은 시원한 빗소리를 벗 삼아 종삼으로부터 글을 배울 수 있었다.

쏴아아아!

“일(日), 월(月), 영(盈), 측(胙). 일월영측,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달도 차면 점차 이지러진다. 즉, 우주의 진리를 일컫는 말이다.”

밖에서 퍼붓는 빗소리와 종삼의 목소리가 뒤섞여 상천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상천의 두 눈은 이미 반쯤 감겨 있는 상태였다. 쏟아지는 졸음을 억지로 참아내며 지금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용했다.

딱!

“악!”

어느새 종삼의 손에 회초리 하나가 들려 있었고, 상천은 머리를 감싸고 비명을 질렀다.

“또 존다!”

“누가 졸았다고!”

머리가 제법 아팠는지 상천이 오만 가지 인상을 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 졸았다고? 그럼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읊어봐!”

종삼의 기습적인 질문에 상천이 순간 당황하며 연신 두 눈을 굴렸다. 딱 봐도 모르는 눈치. 그러자 종삼이 다시 한 번 회초리를 들었다.

“잠깐! 저 빗소리 때문에 제대로 못 들었다고!”

쏴아아아!

그런 상천의 말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순간적으로 빗줄기가 더 거세졌다.

“말이나 못하면! 넌 어떻게 잔머리만 그렇게 잘 굴러가는지 모르겠다.”

종삼이 회초리를 내려놓으며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해줄 테니 이번에는 똑똑히 들어라!”

“일월… 뭐였던 거 같은데……. 일월양착? 운등영착? 맞나? 아닌가?”

“일월영측!”

“아, 맞다! 일월영측! 그러니까 해는 저물고 달도 때 되면 찌그러진다, 뭐 그런 거잖아? 맞지?”

종삼의 말에 상천이 손뼉을 딱 치며 말했다.

“맞다.”

완벽한 것은 아니었지만 거의 비슷하게 맞힌 상천을 보며 종삼이 살짝 못마땅하다는 듯 대답했다.

“하하! 거봐. 안 졸았다니까. 아깝다〜! 저 비만 아니었어도 정확히 맞히는 건데!”

종삼의 대답에 상천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그 모습을 한심스럽게 쳐다본 종삼이 한마디 내뱉었다.

“넌 어디 가서 굶어 죽진 않겠구나. 그 잔머리면.”

“그러니까 지금까지 살아남았지.”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진 상천의 말에 괜히 머쓱해진 종삼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 시원하게 퍼붓던 빗줄기도 어느샌가 많이 가늘어져 있었다.

“비도 제법 그쳤구나. 오늘 가르쳐 준 부분까지 오십 번씩 써라.”

“으익! 오십 번?!”

종삼의 말에 상천이 두 눈을 크게 뜨고는 도리질을 치며 말했다.

“그래, 오십 번.”

하지만 종삼은 절대 못하겠다는 상천의 반응을 무시한 채 딱 잘라 말했다.

“안 돼! 절대 못해! 오십 번을 어떻게 써?”

상천이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발악을 했다. 그러자 종삼이 두 눈을 한 번 부릅뜨고는 말했다.

“쓰읍! 시키는 대로 안 할래? 무공 배우기 싫어?”

종삼의 말에 상천이 입을 빼쭉 내밀고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상에, 어른이 애한테 협박하네.”

하지만 종삼이 그것을 못 들었을 리 없다.

“애는 애지. 근데 애가 애 같지 않고 애늙은이 같아서 그렇지.”

그 말에 상천이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내가 어딜 봐서! 나처럼 완벽하게 애 같은 애가 어딨다고?”

그러자 이번에는 종삼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상천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에 백 번 쓰라는 말이 여기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종삼이 자신의 턱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상천이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얌전히 붓과 종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럼 난 좀 나갔다 오마.”

종삼이 자신의 앞에 있는 책상을 치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상천이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디 가?”

상천의 물음에 종삼이 그를 한번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어른은 어른 나름대로 밖에서 할 일이 있는 법이다. 그러니 신경 꺼.”

“설마… 이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상천이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러자 종삼이 한숨을 푹 쉬더니 상천의 앞에 쪼그려 앉으며 손으로 가까이 오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한 상천이 무릎걸음으로 빠르게 종삼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온 상천의 귓가에 손을 댄 종삼이 주변을 한 번 보고는 나직이 말했다.

“이건 비밀이야. 너만 알고 있어.”

그러자 상천이 알겠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뜸을 들인 종삼이 다시 한 번 주변을 훑고는 한마디 던졌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백 번씩 써.”

“뭐?!”

종삼의 말에 상천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당했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상천을 뒤로하고 종삼은 뒷짐을 진 채 느긋한 발걸음으로 출타를 했다.

“으아아아악!”

문파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종삼의 귓가에 상천의 처절한 절규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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