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71화 (71/71)

제8장 천지창조

천장금왕이 더욱 어쩔 줄 몰라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사부님께서 이쪽으로 오셨다는 얘길 전해 듣고 왔어요.”

“어느 곳이라는 것도 모른 체 무작정 왔단 말이냐?”

“네, 호호호! 하지만 이렇게 만났잖아요.”

팟!

동천몽이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젖히며 웃는 자정경의 배에 시선이 멎었다. 비록 경장에 가려 크게 티가 나지는 않지만 예전과 달랐다.

동천몽의 시선이 자신의 배에 멎은 것을 본 자정경이 허리를 뒤로 젖혀 더 드러나게 했다. 천장금왕 또한 자정경의 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눈을 크게 떴다.

“사…사제 배가?”

“느껴지는게 없으세요. 사형.”

이미 사대법왕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므로 감추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설마.”

자정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맞아요. 아이가 이만큼 자랐어요.”

천장금왕이 동천몽을 돌아보았다.

“허험!”

동천몽이 헛기침을 했다.

천장금왕이 합장하며 말했다.

“축하드리옵니다. 대법왕이시여.”

“추…축하?”

“예전에 미처 경황이 없어 불손한 생각을 했음을 부인 않겠나이다. 그러나 사제의 목숨이 경각에 달해 어쩔 수 없었음을 우린 알고 있나이다. 또한 본궁의 역사를 철저히 훑어 본 결과 혼인을 율법으로 금지 하지는 않았더군요.”

자정경이 전광석화와 같이 다가가 물었다.

“정말이에요. 사형?”

천장금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선대의 법왕 중 두 분께서 아이를 갖으셨다는 사실을 알아냈느니라. 물론 그분들 또한 중생 구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한 행동이었느니라.”

와락!

또다시 천장금왕을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추었다.

쪽쪽!

이번에는 한 번으로 끝내지 않고 여기저기 마주 맞추자 천장금왕이 고개를 돌리며 피했다.

“이놈 당장 그만 두지 못하겠더냐? 이러면 못쓰느니라.”

“누가 못쓴대요? 사제 맘이에요.”

자정경이 좌우 볼에 두 번을 더 맞추고 내려왔고 천장금왕은 얼굴이 벌개 져 어쩔 줄 몰라했다.

동천몽이 희색이 만면해 물었다.

“그래 의원은 뭐라고 하더냐? 별일 없다더냐?”

“네 다행히 건강하다고 했어요.”

자정경이 배를 툭 내밀었다.

“뭐해요? 아이가 아버지 만져 달라고 하잖아요.”

“저…정말 말을 했단 말이냐?”

“뱃속에 있는 아이가 말을 어떻게 해요? 하지만 엄마는 그냥 알 수 있어요. 지금 아버지 손으로 쓰다듬어 달래요. 빨리 만져 주세요.”

동천몽이 헛기침을 하며 민망한 표정을 짓더니 자정경의 배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어엇!”

기겁하며 동천몽이 손을 떼며 비명을 질렀다.

자정경이 놀라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아이가 반응을 했구나. 움직였느니라.”

“호호! 뭘 그렇게 놀라세요.”

“넌 놀랍지 않느냐?”

“전 자주 겪는 일인데요. 그런데 핏줄은 어쩔수 없나보군요. 할아버지가 만질 때는 꼼짝도 않는데 어떻게 아버지의 손은 기억을 하고 반응을 하다니.”

“할아버지?”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한 순간 머릿속으로 자추동을 떠올렸다.

“아무튼 해도 너무해요. 어떻게 그동안 연락 한 번을 안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날 찾아나왔단 말이냐?”

갑자기 자정경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가 왔어요.”

“……”

“백쾌섬.”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자정경이 다시 말했다.

“다시 온다고 했어요.”

동천몽의 표정이 굳어졌다

다시 온다는 말의 의미가 뭔지 알 수 있었다. 백쾌섬이 연모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여자를 다른 남자가 사랑한다는 것은 그만큼 매력이 있다는 뜻이므로 즐거울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질투가 날 일이기도 했다.

바로그때였다.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개의 그림자가 날아 내렸다. 조금 전 댁계령에서 헤어졌던 천장금왕이 이끌고 있는 무사 중 한 명이었다.

“무슨 일이냐? 뭘 찾았느냐?”

천장금왕이 물었다.

“동천비 대공자의 흔적은 찾지 못했사옵니다. 하지만.”

“뭐냐?”

“백쾌섬을 발견했사옵니다.”

“백쾌섬.”

동천몽이 놀라며 돌아섰다.

승려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이십 리 정도 떨어진 흑갈평에서 백쾌섬을 발견했사옵니다.”

동천몽의 안색이 굳어졌다. 필시 동천비가 이곳 무창에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그를 쫓아 왔음이 분명했다.

“안내 하거라.”

“알겠사옵니다. 대법왕이시여.”

동천몽이 승려를 따라 등을 돌리려 할 때 갑자기 등 뒤에서 자정경이 끌어 안았다.

동천몽은 우두커니 섰다.

자정경이 뒤에서 끌어 안은 이유가 뭔지 말은 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전쟁터로 나가는 남편을 배웅하는 여인의 마음과 하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백쾌섬은 당대제일의 무사 중 한 명이다. 아무리 자신감이 있다고 해도 사람 일이란 장담을 할 수 없다. 거두가 두 사람의 싸움 결과에 따라 자칫 자신의 운명까지도 달려 있었다.

동천몽이 천천히 돌아섰다.

흠칫!

올려다보는 자정경의 눈에 눈물이 흐른다.

“울지 마라.”

“사부님.”

자정경이 다시 힘차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자정경이 적신 눈물이 옷 속을 스며든다. 한참 자정경의 머리를 쓰다듬던 동천몽이 슬며시 그녀를 떼어냈다.

“아이와 엄마는 한 몸이라고 했다. 네가 울면 아이도 슬플 것 아니냐?”

자정경이 베시시 웃는다.

“울지 않을께요. 사부님.”

“염려마라. 금방 돌아올 것이다.”

“믿어요. 사부님을.”

자정경이 동천몽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천장금왕이 또다시 고개를 돌려 외면했고 승려는 반쯤 넋을 놓았다.

“사부님 이겨야 해요.”

자정경이 이를 물었다. 자꾸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가슴이 달궈진다.

“천장은 여기 있거라.”

“예?”

“정경이와 같이 있으라는 말이다. 정경아 모처럼 얻은 기회인데 네 사형 무창 구경 좀 시켜 주는게 어떻겠느냐?”

“네 사부님, 제자는 환영이에요.”

“아…아니옵니다. 소승은 대법왕님을 모시고.”

동천몽이 말을 잘랐다.

“그런 그렇게 알고 가보겠다. 금방 올테니 사형에게 맛있는 것도 사주고 하거라.”

“사부님 늦으면 안돼요? 그리고 이거.”

자정경이 잽싸게 검을 풀어 주었다.

동천몽은 거절하지 않았다.

“고맙구나.”

동천몽이 검을 옆구리에 둘러차고 미소를 짓고 돌아섰다.

천장금왕이 따라 가려하자 자정경이 사정없이 손을 잡아 끌었다.

“어디 가는거에요?”

“사…사제. 난 가봐야 해.”

“난 사부님을 믿어요. 그러니 걱정 말고 사형은 소녀가 따라오세요. 세상이 얼마나 멎진 곳인지 오늘 실컷 보여드릴께요.”

천장금왕은 강제로 자정경에 의해 끌려갔고 동천몽은 승려의 안내를 받아 몸을 날렸다.

휘이이!

승려는 자신의 법명을 가룡이라고 했다.

동천몽이 묻는 말에 극도의 공손한 표정으로 대답을 했는데 신법에 상당한 조예가 깊었다.

십리쯤 날아가던 동천몽이 땅으로 내려서자 가룡이 의혹의 표정으로 따라 내렸다.

“별것 아니다. 그냥 천천히 걷고 싶구나.”

동천몽은 산길을 천천히 걸었고 뒤를 가룡이 따랐다.

해는 중천에서 조금 벗어나 쨍쨍하다.

산새들이 기척을 느끼고 날개짓을 했고 한 마리 사슴이 풀을 뜯다 말고 꽁치가 빠져라 도망을 친다.

동천몽은 마침내 희노애락의 종착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희노애락은 모두 강호에 있다. 어찌보면 무림인도 아니면서 강호사와 이토록 치열하게 얽혀 돌아가는 운명을 지닌 사람도 드물 것이란 생각을 해보았다.

자신 뿐만이 아니라 아버지를 비롯한 형제들 모두가 강호와 끝없는 충돌을 했다.

그건 돈 때문이었다.

돈은 삶의 운명을 거칠게 바꿔버리는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이번에 깨달았다. 조용히 침묵 속에 살고 싶어도 돈이라는 강력한 유혹 덩이가 수많은 화를 불러 들였다. 관부에서조차 돈 냄새를 맡고 천상각을 기웃거렸다. 드러내놓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돈이 황실로도 들어갔다.

돈을 지닌 이상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과 치열한 은원을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번에 깨달았다.

돈은 삶에 무서운 화근이었다.

“너는 소속이 어디냐?”

“포감원이옵니다.”

포감원은 감찰의 임무를 지닌 집단이다. 궁내에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부정과 부패를 감시하고 살피는 일이다. 엄격하리만치 개인의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 포달랍궁이기 때문에 부패란 있을 수 없지만 뜯어 놓고 보면 그렇지 않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적지 않은 독버섯이 자란다.

“가족은 있느냐?”

“어머니께서는 작년에 떠나셨고 아버지 혼자 계십니다.”

“형제는 없느냐?”

“예.”

동천몽이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운 불심이었다. 단 하나뿐인 자식을 입산시킬 정도면 결코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저 깁니다.”

가룡이 산등성이 두개를 넘어서자 맞은편을 가리켰다.

우웃!

동천몽이 가벼운 탄성을 흘렸다. 그것은 거대한 검은 바다였다. 산 아래로 시커먼 갈대가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는데 바람이 불자 파도가 일렁이듯 몸서리를 치며 쓰러졌다가 일어섰다.

쏴아아아!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자 일제히 갈대들이 허리를 구부렸다. 마치 거대한 해일이 밀려 오는 듯 갈대들이 숨을 죽이여 허리를 구부렸다가 바람이 지나자 일어났는데 이 또한 터진 봇물을 연상케 했다.

동천몽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일대 기경이자 실로 장관이라 할만 했다.

그런데 갈대 밭 사이로 조그만 소롯길이 나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 만들어낸 길인 듯 했는데 동천몽은 천천히 산을 내려갔다.

길은 갈대밭 한 가운데를 뚫고 있었다.

쏴아아!

위로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지만 밑으로는 들어오지 않아 고요하다.

동천몽은 천천히 걸어갔다. 백쾌섬이 이 곳에 있다면 동천비 또한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갈대가 서로의 몸을 부딪히며 서걱 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동천몽의 이목은 날카롭게 곧추세워져 있었다. 근처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뒤따라오는 가룡의 발자국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물론 당사자는 적의 이목을 속여보겠다는 생각으로 죽였지만 동천몽의 귀에는 커다랗게 들린다.

문득 갈대 숲 중간쯤 들어갔을 때 길이 나눠졌다.

동천몽은 망설였다. 워낙 흑갈평이 크기 때문에 잘못 길을 선택하면 백쾌섬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잠시 좌우를 쳐다보던 동천몽은 좌측을 택했다.

좌측길을 따라 이백여 장쯤 걸었을까 앞서가던 동천몽이 걸음을 세웠다.

‘있다!’

희미하지만 기척이 느껴졌다.

놀랍게도 상대는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다섯이로군!’

의외로 끌고 오는 숫자가 많았다.

동천몽은 천천히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오십여 장쯤 나아갔을 때 가룡의 눈이 커졌다.

홱!

긴장한 표정으로 동천몽을 돌아보았는데 기척이 있다는 것을 신호하고 있었다. 동천몽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휘이잉!

바람은 더욱 거칠어졌다.

일장 가까이 되는 갈대의 머리가 땅바닥에 닿을 만큼 숙여졌다가 일제히 일어나는 광경은 절경이었다.

슈와아아!

저벅!저벅!

마침내 맞은 편 발자국 소리가 이쪽 귀에 들렸다. 발자국 소리가 커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바람에 실려 오기 때문이었다. 이쪽은 바람을 맞으며 가는 것이었다.

꿈틀!

동천몽의 눈썹이 파장을 일으켰다.

길은 걸으면서도 그의 감각은 맞은편에 집둥 되어 있었는데 지금 다섯 사람의 걸음에 변화를 보였다. 그것은 멈칫 놀랄 때 사람의 발걸음이 잠시 더뎌지는 것과 같았다. 그쪽에서도 이쪽의 존재를 느꼈다는 것이다.

동천몽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오랜 친구였기 때문인가. 사람을 만난 다는 생각을 떠올리자 가벼운 흥분이 일어났다.

동천몽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그걸 본 가룡의 눈이 커졌다. 어쩌면 천하제일고수인지도 모르는 인물을 만나러 가는데 마치 소풍 가는 사람마냥 동천몽의 발걸음이 가벼워 졌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의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흠칫!

가룡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계속 한 마리 뱀이 모래밭을 기어가듯 구불구불하게 나 있던 길이 처음으로 반득 해졌고 맞은편에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서로를 향해 걸어갔다.

흠칫!

가룡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상대 발자국 소리가 이쪽과 한 치의 오차 없이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이쪽이 한 걸음을 떼면 그들도 맞춰 한 걸음을 떼었다. 더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는 완벽한 보조를 맞춘 걸음걸이에 당황해 할 때 귓가로 동천몽의 전음이 들렸다.

“보중감응(步中感應)이라는 것이니라. 우리의 걸음과 보조를 맞춤으로 기습을 막으려는 것이지. 우리 속에 자신들의 호흡과 기세를 맞추면 이쪽이 조금만 이상한 낌새를 보여도 금방 알아차릴 것 아니겠느냐?”

가룡의 표정이 굳어졌다.

말 몇 마디 속에 무공의 심오한 이치가 들어있었다.

자신은 감히 넘볼 수도 없었고 알지 못하고 있던 고도의 무리(武理)였다.

척!

먼저 걸음을 세운 쪽은 동천몽이었다.

그러자 상대들 또한 기다렸다는 듯 섰는데 거리는 오장 쯤 되었다.

백쾌섬이 맨 앞에 섰고 그 뒤로 삼천목과 백치성 일행이 따르고 있었다.

빙긋!

동천몽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미소지었다. 반가움이 묻어나는 따뜻한 미소이다.

놀라는 건 오히려 상대였다. 특히 삼천목과 백치성들이었는데 죽고 죽여야 하는 적수를 만나 반가움 가득한 웃음을 짓자 소스라치게 놀란 것이다. 자신들로서는 도무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들을 더욱 놀라게 하기는 백쾌섬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이게 얼마만입니까? 대법왕님.”

“몇 일 굶은 사람처럼 얼굴이 헬쓱하구려.”

백쾌섬이 뺨을 만지며 말했다.

“그럴 것입니다. 무예 몇 가지 배우느라 고생을 좀 했더니 살이 빠졌지요.”

“예전에도 무섭던데 몇 가지를 더 배웠으면 이제 내 목은 곧 잘리겠군.”

“핫핫핫! 여전히 농담을 좋아 하십니다. 자 낭자와 작은 가정을 이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주 행복해 보이시고요?”

작은 가정이란 정식 혼례가 아닌 혼인 전 아이를 먼저 가졌을 때를 말하는 서장식의 표현이었다.

“축하로 받아 들이겠소.”

“진심입니다.”

“가룡.”

갑자기 동천몽이 뒤를 향해 말했고 가룡이 서둘러 앞으로 나왔다.

“부르셨사옵니까?”

“오랜만에 반가운 벗을 만났다. 자리가 마땅치 않지만 어찌 그냥 넘어 갈 수 있겠느냐? 다행히 벗도 술보다는 차를 좋아 하니 가서 차를 좀 준비해오거라.”

가룡이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주위에 인가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러나 곧바로 가룡은 힘차게 대답을 하고 곧바로 몸을 날렸다.

“자자! 이렇게 서 있을 것이 아니라 앉읍시다.”

그러면서 땅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러자 잠시 주저하던 백쾌섬도 맨 땅에 주저 앉았다.

일각이 지났다. 차를 준비하기 위해 떠난 가룡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며 두 사람은 지루함을 잊으려는 듯 처음에는 옛날 자신들이 처음 만났을 때의 추억을 시작으로 강호정세와 남궁천의 죽음까지 들먹거리며 애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여전히 차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급기야 질퍽한 음담패설까지도 마다하지 않으며 시간을 보냈다.

“핫핫핫!”

“허허허!”

삼천목의 안색은 펴질 줄 몰랐다.

둘은 공존이 불가한 적이다. 잠시 후면 둘 중 한 사람은 저승길을 가야 한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가 필사적으로 상대를 죽여야 한다.

이긴자는 천하의 주인이 될 확률이 높았다.

제왕의 자리를 놓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는 데 무엇이 저렇게 둘을 즐겁게 만드는 것일까. 이따금 적이지만 서로를 아끼고 죽이면서고 눈물을 흘리는 거목들의 모습을 보아왔다. 하지만 그들의 싸움에는 천하가 걸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지금 천하를 걸어 놓고 싸울 것이었다. 목매에도 원하고 꿈을 꾸었던 천하패주가 되는 것이다.

“대법왕님!”

이각이 조금 더 지났을 때 가룡이 나타났다.

놀랍게도 그는 물을 담은 주전자와 두개의 잔을 가져왔고 왼쪽 소매춤에서 차가 든 목함을 꺼내놓았다.

딸칵!

목함을 열어보던 동천몽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건 용정아니냐?”

“어느 농부께서 사정 얘기를 했더니 서슴치 않고 내 주더군요.”

“뭐하고 말을 했기에 이 귀한 용정을, 그것도 가난한 농부가 호쾌히 내주더란 말이냐?”

가룡이 더듬거렸다.

“대법왕님을 잠시.”

“내 이름을 팔았단 말이냐?”

가룡이 당황해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수 없었사옵니다. 대법왕님께서 차를 마시고 싶어한다고 하자 그 자리에서 꺼내주더군요.”

동천몽이 목함을 보며 말했다.

“손떼가 묻은 것이 귀한 손님이 오면 내주려고 모아 놓은 듯한데 이 귀한 걸 내게 주다니 무척 고마운 시주로구나.”

가룡이 주전자를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찌이이!

강한 열기가 주전자를 감싸기 시작했다.

삼매진화를 쏘아 보내는 것이다.

멈칫!

백쾌섬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사람을 보며 그 사람이 집단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를 대략 짐작 할 수 있었다. 처음 동천몽이 대동하였을 때는 무척 신경을 썼다. 자신과 대결을 앞둔 만큼 엄청난 고수를 대동했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삼천목을 비롯한 수하들도 가룡부터 살폈다. 그러나 냉정하게 살펴본 가룡의 무예는 일류이긴 하지만 두려움을 느낄 정도는 안되었다.

일목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대동했다면 깊이 생각 하지 않아도 무예를 짐작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가룡은 길 안내자로 데려 온 것일 뿐 오늘 싸움에 어떤 득을 보기 위해서는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서야 조금은 안심했다. 그런데 놀라는 것은 너무도 가볍게 삼매진화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일류라고 모두 삼매진화를 펼치는 것은 아니었다.

쉬이이!

주전자 입구에서 김이 쏟아지자 목함에서 용정을 꺼내 집어 넣었다.

“드시지요.”

동천몽 앞으로 주전자를 내밀고 뒤로 물러났다.

탁!

동천몽이 주전자를 들더니 두 사람 앞에 놓인 잔에 따랐다.

또르르!

두 사람 앞에 놓인 잔에 연분홍 용정이 가득 찼다.

“겨울 용정은 깊이 우러나면 맛이 떫소.”

그래서 일찍 따랐다는 뜻이었다.

“듭시다.”

동천몽이 먼저 찻잔을 쳐들었고 뒤 따라 백쾌섬이 잔을 입에 대었다.

동천몽이 먼저 입을 떼었다가 뒤따라 잔을 내리는 백쾌섬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

“맛이 어떻소?”

백쾌섬이 대답했다.

“다행이군.”

동천몽이 잔을 비우고 다시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또다시 얘기를 주고 받기 시작했다.

여전히 표정은 밝았고 목소리에는 서로를 생각하는 정겨움이 들어찼다.

팟!

문득 삼천목의 세 눈이 이채를 뿌렸다.

이제 서 야 자신의 머리속을 채우고 있는 의문이 풀렸다. 사실 동천몽이 차를 심부름 시킬 때부터 삼천목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의문 한 가지가 있었다.

왜 차인가. 잠시의 회포를 풀려고 했다면 술도 있고 여러 음식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배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동천몽은 어쩌면 가장 어렵고도 준비하기가 까다로운 차를 준비했다.

‘그것이로군. 차의 씀씀이란 본맛이 시원한 것으로 행실이 깨끗하고 검소한 덕을 지닌 사람들이 마시기에 가장 알맞은 것이다.(茶之爲用味至寒爲飮最宣精行儉德之人)’

삼천몽의 눈이 더욱 밝아졌다.

동천몽은 지금 백쾌섬을 행실이 깨끗하고 검속한 덕을 지닌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다. 어찌 자신을 죽이려고 했고 지금 또다시 죽이기 위해 나타난 적에게 그런 뜨거운 마음을 담을 수가 있단 말인가.

‘끄음!’

동천몽을 쳐다보는데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나온다.

완전히 틀렸다. 삶의 가치관과 생각하는 폭이 자신과는 비교조차 할 수가 없다. 동천몽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절대초인이었다. 하늘과 땀을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인물이라고 인정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과연.’

그때 백쾌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왜 일어나시오?”

동천몽이 앉아 올려다보며 물었다.

백쾌섬이 두 마디 않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렸다.

“무슨 짓이오?”

백쾌섬이 큰 절을 한 후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지난 잘못을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뒤에서 습격 따위가 아닌 정식으로 대법왕님께 도전을 청하옵니다. 받아 주십시오.”

동천몽의 표정이 환해졌다.

“난 이미 백형을 용서 했소.”

“정말입니까?”

“사내자식이 째째하게 꽁 해 있으면 되겠소. 명색이 대법왕인데.”

동천몽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백쾌섬도 일어났다.

“치우거라.”

가룡이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목함과 찻잔 주전자를 신속히 치웠다.

두 사람은 말 없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즐거웠습니다. 아마 평생 대법왕님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나도 마찬 가지오.”

가볍게 서로가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뒤로 걸음을 떼었다.

삼장!

두 사람이 물러났고 거리는 삼장이었다.

두 사람이 거리를 결정하자 주위에 있던 가룡과 삼천목 일행은 뒤로 물러났다.

쏴아아!

바람은 더욱 세찼고 갈대는 미친 듯이 요동했다.

스으으!

백쾌섬의 주위로 무형의 회오리가 일어났다. 실타래가 얽히듯 소용돌이가 마구 주위를 휘젓더니 조금씩 하나의 덩어리로 변해 백쾌섬의 몸은 호신강기처럼 완벽히 감쌌다.

‘마…만사강체!’

지켜보던 삼천목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만사강체는 만사강기를 익히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징조인데 흔히 호신강기라고도 부른다. 일반적으로 호신강기라 하면 무공이 노화순청을 넘어 오기조원 육식귀원에 이를 때 스스로 나타나 몸을 지키는 보호막이다.

그에 반해 만사강체는 만사강기라는 흑도 최고의 신공을 터득하면 생기는 보호막인 것이다.

어지간한 고수가 희대의 보검으로 찔러도 뚫리지 않은 것이 호신강기이니 만사강체 또한 능히 그러리라고 동천몽은 짐작했다.

“엇!”

“저건!”

삼천목 일행이 경악의 표정을 짓고 놀람의 외침을 터뜨렸다.

동천몽의 몸이 붉게 변해가고 있었다. 시뻘겋게 달궈져 가는 쇳덩이처럼 동천몽의 몸은 완전히 붉게 변했다.

놀란 표정으로 백쾌섬이 물었다.

“그…그건?”

“적에게 비기를 가르쳐 달라는 소리 아닌가? 좋소. 가르쳐 주지 못할 것도 없지. 지옥금이오.”

“지옥금?”

백쾌섬이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은 누구보다도 동천몽의 무공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지옥금은 대법왕이 익히는 무예중 하나로 그 위력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는 지옥금은 손바닥만 붉게 변했는데 이번에는 온 몸이 불에 달궈진 듯 시뻘겋다.

동천몽의 가벼운 미소를 짓는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거요? 우리 아버지를 아시오? 알다시피 천하제일 상인이지요. 그분께서는 항상 거래를 할 때 마음의 전부를 드러내지 않소. 감추고 있는 삼할의 계산이 항상 이익을 가져다 준다고 했소.”

그런 부친 밑에서 자랐다는 의미였다. 그런 것을 보고 컸으니 함부로 남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거나 드러내 보이는 행동을 할리 만무하다는 뜻이었다.

“지옥금을 완벽하게 터득하면 손만 빨개지오. 그러나 대법왕이 익혀 야 할 지옥금과 만마생사혈 기도살법을 완숙히 얻으면 그 이상의 위력이 나타난다고 했소.”

백쾌섬의 안색이 변했다.

동천몽의 말은 세 개의 무공이 각자 하나씩 분류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연결 되어있고 극성으로 터득 하면 본래 갖고 있는 위력 그 이상의 무서움과 파괴력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백쾌섬은 입을 꼭 물었다.

애매한 대답이었다. 분명히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높다는 얘기지만 높다는 의미를 한 번도 눈으로 확인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약간 높은지 아주 높은지 적당한 수준이지 알 수 없다. 또한 세 가지 모두를 극성으로 연마하면 상승작용을 하여 각기 하나씩 갖고 있는 위력을 넘어서는 무서움이 있다고 했다. 그건 곧 세 개를 모두 극성으로 연마하면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얘기 아닌가.

불끈!

백쾌섬이 주먹을 쥐었다.

적을 높이 평가하면 승패는 복잡해진다. 과소 평가 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확대해석 하는 것도 위험하다. 더구나 이젠 죽든 살든 끝장을 봐야 하는 막다른 골목에 와 있었다.

슈아아!

백쾌섬이 날아오더니 오른손을 쭉 뻗었다. 파리를 쫒듯 아주 가벼운 손 놀림이었고 쏘아오는 장력 또한 봄바람을 방불케 했다.

꿈틀!

동천몽의 좁은 이마가 모아졌다.

유경지파.

부드러움 속에 무서운 파괴력을 숨기는 상승의 경지를 넘어선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스으!

동천몽의 오른손이 뻗어갔다.

흠칫!

백쾌섬의 눈이 빛났다. 지옥금의 특징은 손바닥이 붉게 물든다. 그런데 지금 태어나 이토록 붉은 빛은 처음 보았다. 그것은 붉었지만 선명했고 으스스 할 만큼 오싹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소름이 끼칠 만큼 아름답다.

같은 붉은 색이라고 해도 약간식의 농도에 따라 느끼는 감정이 다르다. 너무 붉어도 오싹하고 너무 옅어도 가벼운 것이 붉은 색이다. 그러나 눈앞에 다가오는 붉은 색은 아름다우면서도 도도했다.

콰앙!

두 사람이 어깨를 휘청 거렸다.

외형적으로는 누구도 득이나 손해를 보았다고 할 수 없는 팽팽한 모습이었다.

백쾌섬이 길게 숨을 들이 쉬었다. 이어 벼락처럼 날아가 동천몽을 향해 연신 손을 뻗어냈다.

파파파파!

만사강기를 극성으로 끌어 올린 살인적인 장법이었다. 동천몽은 피하지 않았다. 원래 상대의 공격을 피하거나 하는 따위를 싫어하는 성격 탓도 있지만 만사강기는 흑도최강의 무공이다. 아무래도 충돌하는 것보다는 피하는 것이 좀더 이롭지만 동천몽은 정면으로 맞서갔다.

기교를 부려 이길 싸움이 있고 정면으로 맞서 이길 싸움이 있다. 개인적인 원한도 있지만 천하를 얻기 위해 벌이는 일전이다. 소림이 있으므로 인해 꿈 많은 사내들은 한결같이 소림의 제자가 되길 원했고 영광으로 생각했다. 천하제일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소림은 곳곳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보이고 끼친다. 포달랍궁 또한 소림처럼 되고 싶다.

서장이라는 중원 서북쪽 끝에 있어 그 위세와 영향력이란 미미했다. 불교전파라는 차원에서 볼 때 중원은 황금어장이었다. 중원에 제대로 터전을 잡고 세존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겨야 할 싸움이다. 평화는 자비속에 이뤄진다.

쿠콰콰쾅!

번쩌억!

두 사람의 공세가 부딪히는 순간 거대한 불길이 일어났다. 마치 하늘을 가르는 섬광과 같았는데 극양의 두 힘이 부딪히자 엄청난 열이 생기면서 불꽃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불꽃이 그만 인근 갈대밭으로 튀었고 삽시간에 갈대에 불이 붙었다.

화르르르!

마른 갈대인데다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와 갈대밭은 가공할 화염의 바다로 빠져들었다.

“튀어.”

“구이 된다.”

가공할 화기에 지켜보던 삼천목과 가룡 모두가 멀리 몸을 피해 도주하듯 날아갔고 장내에는 동천몽과 백쾌섬만 남아 있었다. 두 사람 또한 강렬한 화기에 호신강기를 끌어 올려 대처했는데 싸움은 갈수록 격렬해지고 있었다.

콰앙!

파파악!

두 사람은 일각이 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인데도 오십초란 엄청난 공격을 퍼부었다. 두 사람의 공수가 어찌나 빠른지 육안으로는 도저히 구분이 되지 않았다.

슉!

백쾌섬이 검을 뽑아들었다.

콰아!

발검에서 곧바로 공격이 한동작으로 이어진다. 이미 검에 관해서는 나름대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특히 천하제일추적자 백쾌섬 하면 사람들은 빠른 검을 기억했고 두려워했다.

흰 섬광이 보이는 순간 검은 어느새 목젖을 쑤시고 온다.

동천몽이 뒤로 물러나며 촥 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동천몽의 손에도 검이 뽑아든 것이다. 뽑아든 검이 그대로 반원을 그리며 백쾌섬의 검을 내려쳤다.

캉!

불꽃이 우스스 떨어졌고 잠시 반탄강기에 상체를 뒤로 젖혔던 두 사람의 몸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며 바람같이 달려든다.

쉭!

팍!

백쾌섬의 절기는 목천마라독쌍류였다. 목천마라독쌍류는 흑도대종사들의 고유 절기인데다 이번에 만사강기를 익혀 그 위력이 한층 강해졌다.

만사강기는 내가무공으로 철저히 목천마라독쌍류를 겨누고 만들어진 무공이다. 기존의 목천마라독쌍류에 만사강기가 주입되자 그 위력은 수배 강해져 폭발했다.

콰콰콰!

백쾌섬의 검이 환전한 포위망을 구축했다.

빠른데다 만사강기까지 더해져 표독하기까지 했는데 갈대밭은 완전히 불바다가 되었고 그 한 가운데서 검은 대호 두 마리가 치열한 난타전을 벌이고 있었다.

콰우우!

빠른데다 위력까지 폭발적이어서 동천몽은 계속 뒷걸음을 했다. 만마생사혈 또한 속도면에서는 독보적이었지만 목천마라독쌍유에게는 조금 밀리는 기분이 든다.

파팟!

동천몽의 흑의가 찢겨졌다. 이미 십여군데 조각이 나 있었지만 지금 맞은 것은 다르다. 대번에 옆구리와 어께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 물론 중상은 아니지만 팽팽한 접전에서 피는 사기에 큰 영향을 끼친다. 자신은 괜찮지만 상대는 더욱 날뛰는 것이다.

촤촤촤촤!

카카캉!

검신이 톱니로 변했는데 백쾌섬의 검은 말짱한 것을 보면 상당한 보검임이 분명했다.

화악!

동천몽이 검을 옆으로 그었다.

쩌억!

그러자 엄청나게 쏟아낸 백쾌섬의 검기들이 대번에 잘려나갔고 벌어진 틈을 비집고 검기로 만들어진 포위망을 벗어났다.

슈욱!

동천몽이 쾌속하게 찔렀다.

검 끝이 파르르 떨릴 만큼 빠르고 세찬 일검에 백쾌섬이 옆으로 친다.

탁!

화악!

백쾌섬의 눈이 커졌다. 옆으로 치면 검이 퉁겨나가는게 정상인데 동천몽의 검은 그 자리다.

‘기…기흡력차(氣吸力借)!’

기흡력차란 상대로부터 전해져 오는 강한 힘을 이쪽에서 부드럽게 받아 들이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되면 서로의 병기나 장력에 충돌할 때 튕겨나가지 않는데 여기에 일장일단이 잠복하고 있다.

부딪히고 튕겨나오면 연이은 공격이 불가능하다. 흔히 밀어내는 반탄강기의 힘이 소멸되고 나서야 다름 동작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기흡력차를 사용하면 곧바로 공격이 가능하다. 그 대신 엄청난 기의 소모가 발생한다. 상대의 공격을 이쪽의 왕성한 힘으로 약화 시켜야 하니 어느 정도의 힘이 소모되는지는 충분히 짐작 하고도 남는다.

검이 뽑힌 이후 백쾌섬은 자신의 장기인 쾌검을 이용해 계속 몰아 부쳤고 동천몽은 연신 수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반전의 기회를 잡기위해 과감히 기흡력차의 수법을 쓴 것이다.

촤앙!

동천몽의 검이 검신을 타고 미끄러져 간다.

“엇!”

백쾌섬이 놀람성을 터뜨렸다. 뱀처럼 미끄러져 다가오는데 내버려 두면 손목이 잘릴 것이다. 검신에 붙어 다가오는 검을 떨어내기 위해서는 동천몽이 주입한 힘보다 더 센 힘이 필요하다.

하합!

거센 기합을 지르며 검을 흔들었다.

화라라!

마치 호랑이가 몸에 묻은 물기를 털기 위해 몸을 터는 것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흔들었다.

띠잉!

두 치 정도 떨어졌다가 딱 소리를 내며 다시 붙는다.

하하합!

다시 기합을 지르며 검을 털어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백쾌섬의 몸이 앞으로 넘어질 듯 휘청거리며 중심을 놓쳤다.

‘아차!’

엄청난 힘으로 누르고 있어 온 힘을 다해 털었는데 동천몽이 검을 떼어내버리자 중심을 놓친 것이다.

촥!

이럴 땐 물러나는 것이 대수다. 그러나 한 발 늦었고 어께가 뻐근하다. 동천몽의 일검이 어깨를 스친 것이다.

같은 능력을 갖고서도 일류고수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류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얼마만큼 싸움에 임해 냉철한 지혜를 펼치느냐에 따라 그렇게 구분지어지는데 동천몽의 지금 행동은 백전노장이 아니면 감히 시도할 엄두를 낼 수 없는 고차원적인 수법이었다. 언뜻 속임수로 보이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을 적재 적소에 잘 활용하여 최대한의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진정한 고수이다.

찔러오는 동천몽의 검을 맞서가며 백쾌섬은 중얼거렸다. 누가 이런 사람을 머리가 나쁘다고 손가락질 했던가라고.

두 사람의 싸움은 백초를 넘어섰다. 둘 모두 강호에 출동하여 이토록 오랜 싸움, 그것도 한 사람을 상대로 오래동안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둘러 보기는 처음이다.

싸움은 어느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팽팽했다. 두 사람의 옷은 걸레조각처럼 찢어져 있었고 곳곳에 혈흔이 묻어 났다.

“호옷!”

정확히 백 팔초되던 때에 백쾌섬의 입에서 장소성이 울려나왔다. 그것은 거대했고 웅장했으며 상대를 주눅들게 할 만큼 강력했을 뿐 아니라 어떤 필사의 승부수를 암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예상대로 백쾌섬의 검이 변했다.

지금까지 백쾌섬의 검세가 태풍이었다면 분명코 지금 날아오는 것은 폭풍와류였다.

소용돌이는 짧지만 강력하다.

“사--수--망--월--국”

목천마라독쌍수 최고 절초가 펼쳐 진 것이다.

절초는 펼치는 무공이 갖고 있는 최후의 기예이다. 그래서 가장 늦게 펼치는, 물론 초반에 펼쳐 예상밖의 승부를 결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늦게 사용한다. 또한 절초는 분위기 반전을 꾀할 때 사용하고 제일 중요한 것은 상대의 숨통을 끊을 때 즐겨 쓴다는 것이었다.

백초가 지났으므로 첫 번째 조건은 아니고 분위기 또한 팽팽했으므로 반전을 위한 두 번째 용도는 아니라고 봐야했다.

‘세 번째로군!’

자신의 숨통을 끊기 위해 썼다.

이 한 수에 백쾌섬은 모든 것을 건 것이다.

물론 최후 절초를 쓰기 위해서는 상대를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과연 최후 절초를 사용하면 먹힐 만큼의 지친 상태인지 아닌지 정확히 판단을 해야 한다.

쿠우우우!

그것은 검이라기 보다는 천년거암이었다.

엄청난 힘을 실은 검이 전광석화와 같이 떨어졌다.

‘빠르다!’

백구초 째 공격인데 검의 빠름은 초반과 다를바 없고 힘은 태산을 엎을 듯 실려 있다. 처음으로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여러 가지 면에서 완벽한 최후절초의 가치를 갖고 있었다.

하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백쾌섬이 자신의 능력이 다 나왔다고 판단하여 최후 절초를 썼다는 것이다. 하긴 백초가 지나도록 수를 감춰놓는다는 것은 말이 안되었다. 이미 수번 죽을 고비를 넘겼고 그렇지 않더라도 백초가 넘도록 비장의 수를 쓰지 않는 다는 건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봐야 했다.

히죽!

몰아쳐 오는 사수망월국 사이로 백쾌섬이 미소를 짓는다. 승자의 여유이다.

콰아아!

백쾌섬의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돌연 동천몽이 모습이 눈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사라졌다기 보다는 빛이 폭발하면서 눈을 똑바로 뜰 수가 없었다. 태양보다 수십 배 강렬한 빛이었다.

쩌어억

강렬한 광채를 쏟아내던 빛 속에서 한 개의 검 모양을 한 빛(光劍)이 뻗어나와 백쾌섬의 사수망월국을 베어갔다. 아무리 안간힘을 다해도 사무망월국은 잘라졌다.

끄그극!

섬뜻한 마찰음이 들려왔는데 강력하게 저항하는 어떤 물체를 베어 갈 때 나는 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푹!

사수망월국을 자른 검은 연이어 백쾌섬의 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스르르!

이어 빛이 소멸되고 동천몽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진홍빛 피를 한 모금 토했다.

만옥기(卍獄氣)였다.

만마생사혈을 비롯해 지옥금과 기도살법은 철저히 불사심법을 토대로 하는 무공이다. 세 가지의 무공은 내력을 운용하는 방법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극성에 이르는 점은 똑같았다. 즉 세 가지를 모두 극성에 이르도록 터득하면 합일점을 이루면서 한 가지 새로운 무공이 탄생한다.

이름하며 만옥기.

만목기는 앞서 보았듯 빛의 무공이다. 세 개의 초식과 그것들을 밑받침 하는 내공이 하나로 합일되면서 엄청난 빛이 생긴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 빛에 눈이 멀었을 것이며 일류고수라해도 빛에 의해 시각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백쾌섬은 나름대로 판단을 하여 승부수를 던졌다. 앞서 말했듯 백초가 지나도록 자신의 필살기를 사용하지 않은 사람은 단언건대 없을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백초가 지나도록 아껴둔 수를 쓰지 않을 수가 있느냔 말인가?”

동천몽이 웃었다.

“말 그대로 마지막 수이오. 난 싸움에 임할 때 마지막 수 만큼은 절대 꺼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오. 마지막 수를 꺼내지 않았다는 것은 이겼다는 의미 일 것이고 꺼냈다는 것은 싸움이 내게 유리하지 않다는 뜻 아니겠소? 유리하지 않은 싸움에서 마지막 수는 꺼내봤자 별다른 이익을 주지 못하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동패구상으로 마무리했다기 후일을 도모하는 방법을 택하겠소.”

“질 싸움에서 꺼냈기 때문에 동패구상으로 끝맺음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우린 동패구상의 싸움을 하려고 지금까지 그 험난한 고생을 한 것이 아니지 않소?”

백쾌섬이 멈칫 했다.

동천몽이 피를 한 모금 뱉으며 말을 이었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싸움인데 동패구상의 결과는 의미가 없지요. 그럴 바에는 다음 기회를 위해 끝까지 감춰두는 게 낫지 않겠소?”

“그…그래서 백초가 넘도록 마지막 수를 꺼내지 않았다는 것이군. 난 그것도 모르고 더 이상 꺼낼 수가 없다고 단언하고 마지막 수를 꺼냈는데.”

갈대밭은 이미 잿더미가 되어 있었고 외곽으로만 불이 조금타고 있을 뿐이었다.

으훽!

동천몽이 세 번째 피를 토했다.

만옥기는 세 개가 뭉쳐 하나가 되는 최후의 무공이다. 그래서 한 번 펼쳐지면 상대를 반드시 죽이는 위력을 갖고 있는 대신 후유증이 크다.

한번 사용하고 나면 석 달 이상을 요양해야 정상으로 돌아온다.

삼천목과 나머지 사람들이 불이 멀어지며 다시 들어왔는데 피를 토하는 동천몽을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었다.

“누구도 경거망동 하…지마라.”

백쾌섬이 삼천목 일행을 향해 엄중히 경고했다.

“대…대법왕…이시여.”

백쾌섬의 안색이 창백했다.

“당신이기에 졌음이 부끄럽거나 원…통하지 않….습니다. 부디 흑도무림에 자….자비를.”

“난 공존을 즐겨하오. 평화란 서로의 힘이 팽팽할 때만이 가능하오. 한쪽이 강하고 한쪽이 약하면 횡포가 나오지요. 목와북천은 영원이 포달랍궁과 같이 살아 갈 것이오. 서로 견제하고 아옹다옹하면서.”

백쾌섬이 웃었다.

“우…웃고 죽는 걸 용…서 하…시…길”

백쾌섬의 말이 잦아들었다.

쩌어어어!

멀쩡하던 그의 몸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일은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러내리지 않았다. 만옥기에 피가 완전히 말라 버린 것이다.

“대종사.”

“주군.”

삼천목 일행이 달려가 갈라진 몸을 신속히 나란히 붙여 눕혔다.

“주….주군 눈을 떠보소서.”

“대종사! 대종사!”

사내들이 울기 시작했다. 백쾌섬의 시신을 가운데 놓고 무릎을 꿇은 채 흐느낀다.

돌연 가룡이 소리쳤다.

“대법왕님 저기?”

흐느껴 울던 사람들이 고개를 쳐들었다. 잿더미로 변한 흑갈평 북쪽 끝머리에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울렁거리는 속을 다스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던 동천몽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거리가 너무 멀어 정체 확인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잿더미속의 흑갈평을 찾아 올 사람은 당금 강호에 없다. 또한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자신에게 볼 일이 있다는 사람일 것이다.

‘누구지?’

수하라면 저런 식으로 오지 않는다.

화아악!

한 순간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이내 얼음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저…저놈은?”

“맙소사! 동천비닷.”

삼천목이 경악의 외침을 터뜨렸다.

그들이 놀란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 동천몽의 몸은 거의 공진 상태이다. 몸속에 내력이라고는 거의 없기 때문에 동천비 같은 가공할 고수를 상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약속이나 한 듯 가룡을 위시한 삼천목 일행이 앞을 막아섰다. 백쾌섬의 부탁과 동천몽의 호응으로 서로간의 벽은 허물어졌고 한 몸 한 마음이 되었다.

“너희 떨거지들은 뭐지? 날 막는 것이냐?”

“비겁하다!”

확!

백치성이 일권을 뻗었다.

비록 흑도무림이지만 항상 정정당당했다. 특히 싸움에서 만큼은 상대의 약세를 이용한 승부는 철저히 피했다. 무사는 오로지 정당하게 싸워 이길 때 그 가치가 빛난다는 것이 삶이었고 소신이었다. 그래서 흥분한 주먹은 산악과 같았다.

탁!

동천비가 가소롭다는 듯 왼 손바닥으로 막았고 팍 하며 번개처럼 백치성의 팔목을 낚아 잡았다. 아무리 빼내려고 해도 요지부동이었고 뿌드득 하는 소리가 들리며 팔목이 부러졌다. 동천비는 그것으로도 부족해 오른손으로 백치성의 심장을 찔렀다. 왼손이 붙잡혀 있어 피할 수 없다.

팍!

다급한 대로 왼손을 뻗었지만 그대로 손목이 부러뜨리고 밀고 들어와 심장을 쑤셨다.

푹!

“크윽!”

안색이 노랗게 변하더니 그만 숨을 거두었다.

“어린놈의 새끼가.”

보고 있던 두 장로가 달려들었다.

“흐흐!”

동천비가 괴소를 흘리며 쌍장을 퍼부었다.

퍽---퍼억!

“커억!”

“끅!”

목와북천의 장로 중 두 사람이 일초지적이 되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가룡과 삼천목이 자신들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는데 얼굴에 공포의 표정을 지었다. 싸움이란 가능성을 두고 붙는다. 그런데 지금 동천비의 솜씨는 자신들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고 온 몸에서 쏟아지는 마기는 숨이 막혔다.

“너희 둘도 죽어라.”

쿠와아아!

검은 장력이 휘몰아쳤다. 두 사람이 벼락같이 쌍장을 뻗었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쳤다. 두 사람의 장력은 산산조각이 났고 갈고리처럼 곤두선 동천몽의 좌우 손이 가슴에 도장을 새기듯 박혔다.

빡---빠악!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가슴이 함몰된 즉사였다.

다섯 사람이 불과 숨 두어 번 돌릴 사이에 시체로 변했다.

동천비의 손에서 동천몽은 단 일푼의 인간적 감정도 발견하지 못했다.

“마기가 골수까지 스며들었구려?”

“흐흐! 어떻게 죽고 싶냐?”

“부탁이 있소?”

“말해라.”

“그냥 죽으시오.”

멈칫!

동천비의 눈을 치켜떴다.

“그냥 죽어 달라니? 날 더러 자결을 하라는 것이냐?”

동천몽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천비가 비릿한 괴소를 흘렸다.

“크흐흐! 미친놈아 너야 말로 그냥 알아서 죽거라. 세상 사람들에게 동생을 죽였다는 말 듣고 싶지 않다.”

“다시 부탁 드리겠소. 나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 당신을 죽였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소. 이 자리에서 그냥 죽으시오.”

“흐흐흐! 난 네놈이 지금 거의 백치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다. 토끼 한 마리 죽일 힘도 없겠지. 그런데 날 더러 죽어라고? 천하가 코 앞에 있는데?”

“틀린 말이오. 난 지금 토끼 한 마리 정도는 잡을 힘이 있소? 그래서 부탁 하는 것이오? 제발 그냥 죽으시오. 그러면 내 마음도 조금은 편해 질 것이고 아버지 어머니 모두 당신을 용서 할지 모르겠소.”

“크흐흐흐!”

동천비가 고개를 쳐들어 웃었다.

“개새끼 곱게 죽여 주려고 했더니.”

파아아!

발작적으로 오른손을 뻗었다.

시커먼 손이 뻗어오는데 피할 수가 없을 만큼 빠르다.

뻑!

“커억!”

동천몽이 십여 장 뒤로 날아가 떨어졌다.

주르륵!

물이 흘러나오듯 피가 쏟아졌다. 동천몽은 비틀거리며 가까이 다가섰다.

“그냥 죽으시오. 그것이 좋은 일이오.”

“이 새끼가 진짜.”

빡!

이번에는 주먹이다.

동천몽의 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제발 죽어주지 않겠소? 용서가 되는 건 아니지만 나 같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소.”

“흐흐! 네놈이 지금 뭔가 착각 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살려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날 약올리다니.”

빡!

뻐어억!

연타를 먹였고 눈탱이가 벌겋게 부풀어 올랐으며 왼주먹이 스친 어금니가 혀에 감기는 것이 깨진 것이 분명했다.

퉤!

침을 뱉자 부러진 이빨이 땅에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사정하겠소? 당장 죽으시오.”

“싫다면?”

“내 손에 죽는 것이 그렇게도 소원이오?”

“상놈의 자식이 지금 누가 누구 손에 죽는 다는 거야. 넌 지금 내 밥이야 새끼야.”

빠아악!

강력한 장력이 가슴을 정면으로 쳤다.

불사심법을 극성으로 끌어 올려 보호 했는데도 눈앞이 캄캄해졌다.

으왁!

피를 토했는데 토막난 내장조각이 딸려나왔다.

주저 앉은 동천몽을 밟기 시작했다.

퍽---퍼퍼퍼퍽!

한번씩 발길질이 가해 질 때마다 피가 튀었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크하하하!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몰랐겠지. 이제 천하의 주인은 나다. 알겠느냐? 이 동천비가 천하를 거머쥐었단 말이다. 흐흐! 네가 천하를 거머쥐는데 그 년이 가장 공이 크다. 그래서 널 곱게 죽여주려고 했는데 기어코 날 화나게 만드는구나.”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그년이란 모친을 가리킨다.

동천몽이 일어났다.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눈은 살아 있었다. 그 어떤 고통의 빛도 없었고 차분하고 조용할 뿐이었다.

“이건 진짜 마지막이오. 이 자리에서 지난날의 죄를 뉘우치고 목숨을 끊으시오. 그길 만이 죄를 뉘우치는 인간다운 모습이오.”

화아악!

동천비의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부르르!

극도로 흥분한 듯 몸을 떨더니 악을 섰다.

“널 그냥 죽이지 않겠다. 주둥이부터 쫙쫙 찢고 살은 한 점씩 도려 내어 새 먹이를 주겠다. 씨발 놈.”

쿠와와!

동천몽을 향해 우장을 뻗었다. 지금까지 맞아본 어떤 공격보다 위력이 담겨 있음을 알아차렸지만 피하지 않고 맞받았다.

콰아앙!

예상대로 거대한 바위덩이에 맞은 것 같다. 바닥에 쓰러진 동천몽이 벌떡 일어났다.

“널 죽이겠다.”

“그래그래, 바로 그것이다. 그 모습이 바로 내가 아는 소주의 개고기이 동천몽의 모습이다.”

동천비가 이죽거리며 쌍장을 날렸다.

빠악!

동천몽의 몸이 다시 날아갔다.

“살려 달라고 해라. 물론 살려주지도 않겠지만 고통을 조금 줄여 죽여줄 수는 있다.”

빡!

“흐흐! 새삼 그 년이 고맙구나. 계집이 아니었으면 난 백쾌섬의 수하들에 의해 죽었을 것이다. 마침 그 계집이 그곳에 있어 난 살아났고 이렇게 천하를 거머쥐게 되었다. 저승에 가거든 그 계집에게 안부를 전해라.”

동천몽이 피범벅이 되어 일어났다.

똑바로 서지도 못하고 비틀 거렸다.

“나…날 기어코 형을 죽이는 쓰레기로 만들 셈이구려?”

“흐흐흐! 개고기답게 죽음이 코 앞에 있는데도 위풍당당하구나. 하긴 네놈은 악착같이 뽀대에 살고 뽀대에 죽었지. 개 자식 그 기세를 완전히 뭉개주마.”

와락!

동천비가 멱살을 잡았다.

그 순간 동천몽의 입에서 한 줄기 은빛 광채가 뻗어나와 동천비 입속으로 틀어 박혔다.

푹!

“꺼억!”

이번에는 동천몽이 동천비의 멱살을 잡았다.

푸푸푸푹!

동천몽의 벌려진 입에서 보이지 않은 칼이 나와 동천비의 얼굴과 심장을 마구 쑤셨다.

“어거거걱!”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동천몽은 멈추지 않고 얼굴 주위로 미친 듯이 기도(氣刀)를 박아 넣었다.

동천비가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이…이런 귀신이 고…곡 하알?”

“네놈이 멱살 잡기 만을 기다렸다. 네놈은 옛날부터 약을 바짝 올리면 꼭 멱살을 잡고 때리는 버릇이 있었지.”

“그래서 그렇게 날 약을 올렸단 말이냐?”

“넌 개다.”

푸우욱!

“살아 있어서는 안 될 악마다.”

“그…그만.”

“네놈 스스로 죽어줬으면 그나마 마음 한 구석이 조금은 가벼웠을 텐데 너 란 놈은 어떻게 된 것이 죽으면서까지도 날 못된 동생으로 만드는구나.”

동천비의 목이 옆으로 꺾였다.

그러나 동천비의 칼질은 멈추지 않았다.

“왜 그렇게 살아? 누구보다도 한 세상 화려하게 살 수 있었잖아. 그 만큼 가졌으면서도 왜 그렇게 몹쓸 짓을 하면서 살았느냐고?”

동천몽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절대 울지 않으리라 작심했건만 눈물은 의지와 달리 소낙비처럼 흘러내린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털썩!

손을 놓자 동천비의 몸이 쓰러졌다.

그동안 동천비의 처리를 놓고 얼마나 괴로워했던가. 부모를 죽였으니 당연히 그 죄를 물어야 했다. 그러나 과연 어머니라면 어찌했을까. 동천비를 죽였을지 살렸을지 괴로워하다 뜬 눈으로 밤을 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문이었고 가혹한 운명의 장난 이었다.

누님을 뇌옥에 가두었고 동천혁을 죽였는데 이제 동천비까지 자기 손으로 죽이다니.

탁탁탁!

그때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지 않아도 주인이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목탁소리는 등 뒤에서 멈췄고 조용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웠다.

“대법왕이시여.”

짙은 잿빛 가사를 걸친 동천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잘 하셨사옵니다. 누구도 대법왕님을 손가락질 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악은 제거 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너무 괴로워 마십시오.”

동천몽이 돌아섰는데 눈물이 범벅이 되었다.

“형.”

“……”

“씨발!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주르륵!

도대체 이 많은 눈물은 어디서 흘러나오는 걸까.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해? 형을 죽이는 인간이 어딨어? 니기미.”

“천몽아.”

동천완이 동천몽을 끌어 안았다.

동천몽은 동천완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소리내어 흐느꼈다.

“불쌍한 녀석, 그래 실컷 울거라.”

“으아아앙!”

급기야 동천몽이 대성통곡을 했다.

그때 천장금왕과 자정경이 나타났다. 두 사람 모두 동천완의 품에 안겨 흐느끼는 동천몽을 보았는데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특히 자정경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주먹막한 눈물이 쏟아 질듯 위태로웠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아냈다. 왠지 같이 따라 울면 안될 것 같았다.

‘불쌍한 사부님!’

오늘따라 동천몽이 너무 불쌍해 보였다. 항상 당당하고 명랑한 얼굴이었지만 가슴속에 누구도 걷어 낼 수 없는 검은 그림자를 숙명처럼 드리우고 살아온 동천몽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동천비를 죽여보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쓴 것을 자신은 알고 있다.

밤늦은 시간에 홀로 영탑전에서 나오는 모습을 본 것이 한 두 번이던가.

영탑전에 모셔진 역대 포달랍궁 대법왕들에게 동천비를 살려 달라고 기도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 할 수 있었다. 죄인이라고 해서 죽이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할 수만 있다면 반성하도록 가르치고 빌어 바르게 한 세상 살 수 있도록 하는것이 대법왕의 길 아니던가.

주륵!

끝내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리고야 말았다.

와락!

달려가 동천몽을 힘차게 끌어안았다.

“울지 마요. 사부님, 이제 그만 울어요.”

동천몽이 아무말 없이 자신을 끌어 안는다.

그리고 또다시 운다.

죄인을 죽였지만 형을 죽였으니 하늘을 향해 떳떳하지 못하다.

맑은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더니 비가 쏟아졌다. 빗속에서도 동천몽은 하염없이 통곡했다.

삼 개월 후 흑수당 위로 비명이 들렸다.

“아악!”

자색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방문 앞에 가사를 걸친 동천몽이 안절부절 못하며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사부님 나 좀 살려 주세요. 정경이 죽는 단 말에요.”

문 안으로부터 자정경의 비명이 터져 나왔고 그때마다 동천몽이 어쩔 줄 몰라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뛰어 들어가 자신이 아이를 낳고 싶다.

“아 미치겠구나! 정경아 힘 내거라.”

동천몽이 문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악! 나죽네. 살려줘.”

“장인어른, 어떻게 손 좀 써보십시오. 정경이 죽겠습니다.”

동천몽이 자추동을 붙잡고 애원했다.

자추동이 비장한 시선으로 말했다.

“마음을 굳게 먹으십시오. 대법왕님이 흔들리면 안됩니다.”

“머리가 나왔어요. 조금만 더 힘을 줘요. 아가씨.”

“아으으! 아으으으!”

“으아앙!”

안으로부터 아기 울음소리가 흘러나왔고 동천몽과 자추동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딸칵!

그때 문이 열리고 땀에 젖은 산파얼굴이 나타났다.

“아들입니다.”

동천몽의 눈이 쭈욱 찢어졌다.

“아들.”

“아들이래.”

자추동과 동천몽이 힘차게 서로를 끌어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서로를 끌어안고 뛰는 두 사람을 사대법왕이 인자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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