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70화 (70/71)

제7장 방문객

질문 속에는 자신의 방문이 하나도 반갑지 않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묻어 있음을 알아차린 백쾌섬이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무슨 용건으로 당주를 찾아왔다고 보시오?”

“그야 돈 아니겠소?”

어차피 뻔한 목적이기 때문에 굳이 모른 체 하고 싶지 않았다.

“훗훗!”

“왜요?”

“돈이라는게 쓸 곳이 있어야 필요한 것 아니겠소?”

돈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을 되새기는 순간 자추동의 눈이 커졌다.

팍!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자추동이 막 뭐라고 말을 열려고 할 때 밖으로부터 자정경이 들어섰다.

“백 공자님께서 오셨다구요?”

목욕을 끝낸 자정경이 환한 백의에 물기 젖은 머리를 늘어뜨리며 웃음을 지었다.

“자낭자.”

“반가워요? 백 공자님께서 본가를 찾아 주실 줄은 몰랐어요.”

자정경은 아주 자연스럽게 부친 옆으로 앉았다.

“나두 차 한 잔 다오.”

문 입구에 선 시녀를 향해 말했다.

“네 아가씨.”

시녀가 돌아나가고 자정경이 백쾌섬을 바라보다 흠칫했다.

여자에게는 직감이라는게 있다. 지금 백쾌섬은 자신을 깊숙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는데 평범하지 않았다.

“억!”

갑자기 자정경이 아랫배를 감싸쥐며 이마를 찡그렸다.

좌측으로 앉은 자추동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경아야. 왜 그러느냐?”

“배…배가.”

그러면서 백의를 쓰다듬듯 만지자 볼록한 아랫배가 드러났다. 자정경의 시선이 빠르게 백쾌섬을 쫓았다. 그런데 백쾌섬의 눈빛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많이 아프냐? 의원을 불러야겠느냐?”

“아…아니에요. 아버지.”

정말로 아파서 아프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백쾌섬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이미 자신은 아이를 가진 몸이라는 걸 보여줌으로 그의 마음을 떨쳐 내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백쾌섬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아이를 가졌건 가지지 않았건 상관하지 않는다는 단호한 태도이기도 했기 때문에 자정경이 표정이 굳어졌다.

“정말로 괜찮겠느냐?”

자추동은 속도 모르고 자꾸 염려스런 눈길을 던졌다.

오래전 자추동을 포달랍궁에서 처음 만났을 때 이미 그의 눈길속에 담긴 감정을 읽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은 이미 그때부터 동천몽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당당하게 찾아왔다는 것은, 더구나 작금의 목와북천 형편을 볼 때 이렇게 여심을 찾아 올 만큼 넉넉하지 않는데 급한 일을 젖혀두고 왔다는 것은 섬칫하기까지 했다.

시녀가 차를 꺼내 왔고 뜨거운 차를 자정경은 벌컥 벌컥 마셨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어느새 자정경의 표정은 밝아져 있었다.

“잘 지냈소. 낭자 덕분에.”

백쾌섬의 시선은 떠나지 않는다.

한 잔을 모두 비웠다.

“한 잔 더 줘요.”

차를 즐겨 하지 않았고 마셔봤자 한 잔이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두 잔을 마시려 한다.

“내가 갈테니 좋아하지도 않는 차는 그만 마시구려.”

흠칫!

자정경이 깜짝 놀랐다.

자신의 마음을 들켰기 때문에 더욱 얼굴까지 빨개졌다.

백쾌섬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다음에 또 오겠소. 그때는 지금처럼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오.”

알듯 모를 듯 한 말이었다.

“무슨 말씀이죠?”

“그 아이의 아버지가 대법왕이오?”

자정경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부인하지 않고 대답했다.

“맞아요.”

“그렇구려.”

백쾌섬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짐작은 한 듯 했지만 정작 본인의 입을 통해 듣자 약간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오.”

곧 다시 오겠다는 말이다.

그것은 자신이 자정경을 차지하기 위해 동천몽을 죽이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동천몽을 죽이고 자정경을 데려가기 위해 다시 오겠다는 말이었다.

“안되겠어요. 내가 가봐야겠어요.”

백쾌섬이 떠나고 반각도 되지 않아 자정경이 말했다.

자추동이 물었다.

“어딜 간다는 말이냐?”

“그이, 사부님에게요.”

“어딨는 줄 알아서 간단 말이냐? 위험하지 않겠느냐?”

조금 전까지는 동천몽을 만나러 가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미 백쾌섬을 한 번 겪었다. 비록 지금은 모양새 좋게 돌아갔지만 나중 어떤 흉악한 모습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만사를 젖혀두고 찾아 올 정도면 이미 마음을 굳혔을 것이다. 차라리 자정경의 말처럼 이쪽에서 찾아 나서는 것이 좋을 지도 몰랐다.

“그게 좋겠다. 그렇게 하거라.”

자청단까지 합세 하여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정경이 타고갈 마차를 준비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자정경이 가로막았다. 마차를 이용하면 오히려 주위 이목을 끌뿐이다. 차라리 홀가분하게 조용히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자추동이 따라 나섰다. 한사코 가로막았지만 자청단에게 가내의 일을 맡기고 자정경과 나란히 흑수당을 출발했다.

한편 흑수당을 떠나는 두 부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눈이 있었다. 흑수당이 내려다보이는 조그만 근처 산봉우리에 있던 백쾌섬이 나직히 침음성을 흘렸다.

자정경이 부랴부랴 집을 떠난다는 것은 자신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결코 그녀를 얻는 길이 쉽지 않으리라 여겼지만 직접 자신을 피해 떠나는 모습을 바로보자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차라리 지금 데리고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삼천목이 말했다.

여자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힘으로 일단 데려다 놓고보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여자는 아니다.”

누구보다도 자정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자정경처럼 자신감이 넘치고 자존심이 강한 여인은 결코 힘으로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강하게 이쪽에서 접근하면 오히려 멀어지고 도망가버린다.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어느정도 자신의 의지를 확인할 시간을 주는 것이 필요했다. 이쪽에서도 할 만큼 했다는 것을 보여줄 시간이 필요 한 것이다.

자정경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참동안 서 있던 백쾌섬이 등을 돌렸다. 그런데 백쾌섬이 가는 길은 올 때의 길이 아니었다. 처음 오십여 리 정도는 왔던 길로 가더니 갑자기 다른 길로 접어 들었다.

“대종사!”

백치성이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지금 백쾌섬이 가는 길은 포달랍궁이 있는 홍산이었다.

“설마?”

“난 지금 전쟁을 하려는 것이다.”

단 한마디로 모든 것을 설명한다.

전쟁은 무조건 적을 죽이는 것이고 조금이라도 적에게 많은 피해를 입힐수록 좋다. 그러므로 동천몽의 근거지이자 중심부인 포달랍궁을 없애 버리겠다는 뜻이었고 그렇게 천천히 숨통을 끊어가면 자정경의 마음이 더 빠르게 돌아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인의 아낙은 강한 남자를 좋아한다.

“위험하옵니다.”

포달랍궁은 크다.

누천년 도도한 역사를 갖고 흘러오면서 단 한 번도 무너지거나 궤멸된 적이 없었다.

소림은 현재 무너졌지만 포달랍궁은 건재했다. 더구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고수들이 구름처럼 몰려있다. 스스로도 얼마나 강한 고수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말은 그 강함을 여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백쾌섬은 아무말 하지 않았다.

포달랍궁은 예상대로 침입자를 가로 막기 위해 강한 진법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백치성을 비롯해 꾀주머니라는 삼천목도 진법의 종류를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백쾌섬은 무려 하루라는 시간을 걸리며 포달랍궁 주위를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진법의 종류와 뚫을 방법을 알았다는 의미였다.

“내 발자국만 따르거라.”

삼천목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막으려다 그만 두었다. 백쾌섬의 얼굴에 자신감이 넘쳤기 때문이다. 자신감과 오만은 다르다. 백쾌섬은 결코 오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진으로 뛰어들자 갑자기 앞의 광경이 바뀌었다.

돌변한 변화에 모두들 당황했고 진법이라는 것을 스스로 외치며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네 사람은 온 몸에 극한의 내공을 끌어 올려 흩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백쾌섬의 뒤를 따랐다.

진법을 통과하는데 무려 한시진이 소요되었다.

백쾌섬을 제외한 네 사람의 땀에 범벅이 되었고 장삼을 벗어 쥐어짜자 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환영이라고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진법의 사기가 워낙 강해 자꾸 마음이 흔들렸다. 그런 강한 유혹을 버티고 한 시진을 지나다보니 완전히 녹초가 된 것이었다.

“과연!”

“우웃!”

포달랍궁의 정문에 도착한 일행은 웅장한 모습에 숨을 들이켰다. 숭산의 소림사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소림사가 근엄하다면 포달랍궁은 고풍스러웠다.

“어디서 오셨소이까?”

두 사람이 산문을 향해 다가서자 지키고 있던 두 승려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왜냐하면 진법을 뚫고 들어왔다는 것은 이미 자신들로서는 적수가 아니라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삼천목이 앞으로 나섰다.

“우린 목와북천에서 왔소.”

목와북천이란 말에 두 승려가 기겁했다.

이미 동천몽과 목와북천의 대종사 사이에 벌어진 일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둘은 공존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백쾌섬 일행의 방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물을 필요조차도 없었다.

“아미타불! 어서오시오. 포달랍궁은 백 시주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하오이다.”

당황했지만 가급적 표정을 차분하게 만들어 만했다.

그걸 바라본 백쾌섬의 눈이 깜빡거렸다.

명문은 이래서 다른 것이다. 범문들 같았다면 난리를 쳤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되지 도 않은 검부터 뽑아 공격을 하고 보았을 것이었다.

“자넨 자리를 지키게 내가 이분들을 법왕님께 안내 하겠네.”

동천몽이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는 생각 하지 않았다.

그런데 법명을 하월이라고 밝힌 승려를 따라 걸어가던 백쾌섬의 안색이 어두워 졌다.

소문에 듣기로는, 아니 몇 년 전 자신이 왔을 때에는 길거리에 채이는 것이 승려들이었다. 당시 말로는 정확하지 않지만 일만 이천 명의 헤아린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포달랍궁의 승려들이 별반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한두 명씩 지나가긴 했지만 대부분이 선승들이었다.

이윽고 일행은 한 채의 전각으로 안내 되었다.

“목와북천에서 손님이 왔다는 보고에 대법왕 대리인으로 있던 천지철왕이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진법을 뚫고 들어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모시거라.”

잠시 후 백쾌섬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아미타불! 어서 오십시오. 백시주.”

백쾌섬이 마주 합장했다.

사대법왕 중 세 사람은 중원에 나가 있고 현재 포달랍궁의 최고 책임자는 천지철왕이었다.

“안면 있는 분들이 도통 안보이는구려?”

사람이 별로 없는데 어디 갔느냐는 질문이었다.

천지철왕은 숨기지 않았다.

“중원에 나가 있지요. 현재 본궁에 남아 있는 제자들은 일천을 채 넘지 않사옵니다.”

“중원을 점령하고 있다는 정체불명의 집단이 그럼?”

“아마 모르긴 해도 본궁의 제자들일 것입니다.”

모든 사정이 밝혀졌다.

삼천목이 말했던 동천비와 쌍벽을 이루며 중원을 점령하고 있다는 정체불명의 집단은 포달랍궁이었다.

“머잖아 본궁의 이름으로 천하는 하나가 될 것입니다. 대법왕님께서는 부처의 나라를 꿈꾸고 계시옵니다.”

“부처의 나라.”

백쾌섬이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패업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똑같을 수는 없었다. 어떤 이름은 패천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하나같이 패업을 꿈꾸는 사람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를 설파한다.

그런데 동천몽이 추구하는 부처의 나라.

얼마나 아름답고 고요하며 평화로운 이름인가. 과연 이 이름 앞에 어느 누가 반대를 하고 싫어 할 것인가. 동천몽은 이미 민심을 어떻게 해야 잡는 것인지 알고서 시작하고 있었다.

이름 하여 불국정토(佛國淨土).

그것은 어떤 명분보다도 완벽하고 민심을 얻을 수 있는 이상적인 방법이었다.

백쾌섬은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천지철왕의 가슴속은 급박하게 뛰고 있었다. 자칫 하면 오늘 자신을 비롯해 이곳에 있는 일천의 생명은 도륙될 수도 있었다. 아니 선승들까지도 모조리 죽일지도 모른다.

물론 죽음 따위가 두렵거나 공포스러운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그들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할까봐 두려운 것이다. 임시지만 제대로 된 책임자라면 아래 제자들에게 닥쳐오는 위험과 불길함을 막아 주어야 한다.

“천지철왕이라고 했소?”

“아미타불!”

백쾌섬이 빤히 바라보았다.

가슴으로 찬바람이 인다. 단지 쳐다보기만 할 뿐인데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었다. 천지철왕은 완전히 죽어 버린 투쟁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부지런히 아미타불을 외웠다.

그리고 먼저 일어섰다.

천지철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잠시 앉아 있던 백쾌섬이 중얼거렸다.

“현명하군.”

백쾌섬이 일어나 뒤를 따랐다.

전각 밖으로 나오자 앞서간 천지철왕이 앞 마당에 우뚝 서 있었다. 한쪽에는 백치성을 비롯한 삼천목등 일행이 있다.

백쾌섬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섰다.

“부탁이 있소이다.”

“말해보시오?”

“노납 한 사람으로 끝내면 안되겠소이까?”

자기 한사람만 죽이고 나머지 제자들은 살려달라는 얘기였다.

“모든 것을 짊어지고 지옥에 들어가겠다는 건가? 좋소이다. 원하니 받아들이겠소.”

“감사하오이다. 과연 대법왕님께서 가슴에 항상 담겨 있는 분 다우시오.”

멈칫!

백쾌섬의 눈이 빛났다.

“동천몽이 나에 대해 말했소?”

과연 제자들에게 어떤 평가를 내렸는지 궁금했다.

천지철왕이 조용히 말했다.

“보기 힘든 분이라고 하셨소. 악연이기에 공존이 불가능하겠지만 친구임은 분명하다고 했소.”

“날 보고 친구라고 했단 말인가?”

“그렇소이다. 대법왕님께서는 대종사를 항상 그리워했소이다. 대종사 말씀을 할 때며 빙긋 웃고 계셨지요. 아마 기분이 무척 좋은 듯 했소이다.”

“그 사건 이전까지 그랬겠지?”

그 사건이란 동천몽을 죽이기 위해 존불사에서 펼쳤던 사건을 말했다. 혈부림을 승려들로 위장해 동천몽을 불러 들여 암습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아직까지도 백쾌섬은 자신의 계획에 문제가 있어 실패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실패의 이유는 동천몽이 너무 뛰어 났기 때문이었다.

“아니옵니다. 대법왕님께서는 이후로도 대종사의 얘기가 나올 때마다 대단한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백쾌섬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출가한 노승이 살고자 자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하지도 않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설혹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자신은 얼마든지 알 수 있었다. 지금 천지철왕은 있는 그대로를 애기 하고 있었다.

“으음!”

백쾌섬은 조용히 어금니를 물었다.

자신은 해치려고 했다. 아니 동천몽이 뛰어난 능력으로 살아 났을 뿐이지 자신은 분명히 그를 죽였다. 그것도 확인사살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쯤 되면 천하의 누구라도 앙심을 품고 이를 갈며 증오를 태울 것이다.

그런데 동천몽은 자신을 높이 평가했다.

촥!

천지철왕을 향해 거센 일장을 날렸다. 천지철왕이 부탁도 한데다 동천몽의 자신에 대한 배려를 생각하자 서둘러 일을 끝내고 돌아가고 싶었다. 물론 천지철왕 한 사람만이 표적이다.

이번에 새로 터득한 만사강기다. 무형의 기류가 천지 철왕을 향해 뿜어갔다.

“훕!”

천지철왕이 다급성을 터뜨리며 쌍장을 내 밀었다.

꽈앙!

강력한 굉음과 더불어 천지철왕이 뒤로 물러났다.

주르르!

일 장 가까이 밀려난 현실을 보며 천지철왕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예상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었다. 자신은 전력을 다했는데 백쾌섬은 절반의 힘도 사용하지 않은 눈치였다.

“아--미--타--불!”

불리할 땐 선공이 낫다.

천지철왕의 신형이 빠르게 날아가며 쌍장이 뻗어나왔는데 장력에서 은은한 서기가 뻗어나온다.

대법천불공이었다. 바다를 가른 다는 위맹한 장법을 보며 백쾌섬이 다시 오른손을 뻗었다.

추울렁!

그것은 장력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봇물이었다. 보에 갇혀 있던 물이 터지며 쏟아져 나올 때의 웅장함과 파괴적인 기세가 실려 있었다.

꽈가가강!

“으학!”

천지철왕의 신형이 줄 끊어진 연처럼 날아갔고 팍 하며 땅을 박차고 날아 오는 백쾌섬이 연이어 오른손을 또 뻗었다.

슈우욱!

날아가는 천지철왕을 향해 길 꼬리를 물며 가는 한 줄기 무채색의 장강이 있었다.

퍼어억!

으웩!

천지철왕이 핏물을 토하며 건너편 노송에 세차게 부딪히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듯 반쯤 상체를 일으켰고 법왕님 하며 달려온 두 명의 노승을 향해 말했다.

“저…절대 맞서서는 아니되느니라. 모든 은원은 노납이 끌어 안고 가겠느니라…알겠느냐.”

호법승인 범악이승 중 한득선사가 말했다.

“그…그럴수는 없사옵니다. 소승들은 당장 저 자에게.”

“이…노오옴…으웩!”

흥분한 탓에 다시 피를 흘렸다.

“며…명심해라. 나 한 사람이면 족하다. 대종사를 자극하지 말고 산 아래까지 정중히 배웅해 드리…거…라.”

마지막 말을 힘겹게 끝내고 고개를 떨궜다.

“버…법왕님.”

범악이승이 소리쳐 불렀지만 천지철왕은 반응이 없었다. 죽었지만 표정은 어둡지 않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 한 사람이 죽음으로 사문에 불어 닥치는 피의 바람을 막았다는 것에서 큰 위안을 얻을 때문인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어느새 몰려들어 있는 제자들을 향해 말했다.

“법왕님을 일단 거처로 옮겨라.”

두 명의 제자가 달려와 천지철왕의 시신을 모셔 갔다.

한득선사가 백쾌섬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분노와 살기가 범벅이 되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살수를 펼칠 듯 오른손을 미세하게 떨었지만 직접 행동으로는 나서지 않았다.

“소승들을 따르시오.”

백쾌섬이 말했다.

“나올 것 없소. 올 때도 마중한 사람 없이 왔으니 갈 때도 조용히 떠나겠소.”

“아무튼 법왕님의 유지를 우린 따를 뿐이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앞장을 서서 걸어갔다.

잠시 앞서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백쾌섬이 조용히 숨을 마시며 걸음을 옮겼다.

범악이승의 뒤를 따르는 백쾌섬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계속 한 가지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에 대한 동천몽의 호의였다. 그는 자신을 친구로 여긴다고 했다.

원래는 하나의 산이었다. 하지만 황하의 신이 손으로 밀고 발로차서 두 산으로 쪼개어 물이 통하게 하였다. 지금도 그때의 손자국과 발길질이 두 산에 남아 있다고 했는데 좌측 산을 화산으로 부르고 오른 쪽 산을 수양산이라 했다.

수양산 가장 깊숙한 곳에 응독문이라는 한 집단이 있었다. 비록 좌측산인 화산에 있는 화산파의 위세에 밀려 그 이름을 크게 떨치지 못하고 있지만 나름대로는 수 백 년의 역사를 지닌 문파였다.

섬서의 당문이라고 할 만큼 독에 일가견을 갖고 있다. 어쩌면 독 하나로 오늘날까지 화산이란 거대문파 틈 사이에서도 섬서성에서 나름대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지금 거대한 대청에 응독문의 문주 고산소를 비롯한 오대호법이 빙 둘러 앉아 심각한 회의를 하고 있었다.

고산소는 회의를 싫어했다. 워낙 성격이 불같아서 한곳에 오래 앉아 뭔가 토론을 벌인다는 것이 너무 귀찮고 따분할 뿐이었다. 아무리 중대한 일이 벌어져도 즉석에서 결정을 해버린다. 그런 관계로 왕왕 손해를 보고나 곤란한 처지에 빠지기도 했다.

보다못해 수하들이 중요한 정책 같은 것은 간부들을 불러 모아 생각들을 듣고 의견을 나눌 것을 종용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대청에서는 회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의자에 일각 이상을 앉아 있지 못하는 고산소가 무거운 얼굴로 앉아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입만 다물고 있을 것이오? 그냥 뭐라도 좋으니 한 마디쯤 해보시오?”

칠십이 넘은 오대호법에게 인상을 썼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왜들 그러시오. 어서 말들 좀 해보라니까요?”

답답해 죽겠다는 듯 탁자까지 주먹으로 내려쳤다. 그러나 여전히 오대호법은 침묵했다.

“허허 나참, 대호법.”

“귀를 여옵니다.”

맞은편에 앉은 대호법 소차룡이 고개를 조아렸다.

“말해보시오. 어떡하면 좋겠는지 내 눈치 볼 것 없이 허심탄회하게 말이오.”

“아…알겠사옵니다.”

소차룡이 마른침을 삼켰다.

“소…속하의 생각은.”

“그래 생각은?”

“소…송구하옵니다. 속하는 그저 문주님의 뜻을 따를 뿐이옵니다.”

“무슨 말인지 알았으니까 일단 생각을 말해 보란 말이오? 나와 같다면 무엇이 같은지 말해보라니까?”

“그냥 문주님과 같습니다.”

“그냥.”

금방이라도 한대 갈길 듯 노려보더니 좌측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럼 이호법이 말해보시오. 이호법은 놈들의 제의를 어찌 생각 하시오?”

이 호법 동각호가 입을 덜썩 거렸다.

“소…속하 역시 대호법님과 뜻을 같이 하옵니다.”

“대호법과? 그럼 뭔가? 내 뜻에 따르겠다는 것 아닌가? 그것 말고 당신 생각을 말해보라니까?”

고산소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러니까 내 생각이라는게 무엇이냔 말이오? 어서 말해봐요?”

“문주님께서 하는대로 무조건 따르겠나이다.”

고산소사 매섭게 노려보자 얼른 시선을 피했다.

“끄음! 삼호법?”

“속하 또한 문주님과 같습니다.”

“이…이런.”

밖으로 튀어 나오려는 욕을 가까스로 눌러 참았다.

나이들이 많다보니 는 것은 그저 눈치 뿐이었다. 젊음은 왕왕 패기라는 것을 주어 틀리더라도 소신껏 의견 개진을 하게 만드는데 오로지 자리 보전에 연연하여 주장을 펼치지 않는다.

그때 대청 밖으로부터 음성이 흘러들어왔다.

“문주님 신시가 얼마남지 않았사옵니다.”

신시라는 말에 고개를 떨구고 있던 다섯명의 호법이 일제히 입구를 쳐다보았다.

상대는 신시까지 말미를 주겠다고 했다. 만약 그때까지 가타부타 말이 없으면 일제히 공격을 가하겠다고 했다.

“사 호법 오호법도 같소?”

앞 사람들 처럼 자신의 뜻을 따르겠냐는 말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하옵니다. 문주님.”

마음같아서는 모조리 패대기를 치고 싶지만 지금 화를 낼 시기는 아니었다.

“좋소 그러하다면 내 생각은 이렇소.”

일제히 긴장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고산소가 말했다.

“나 고산소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오. 정면으로 그들에게 맞서봤자 계란으로 바위치기이오. 싸움이란 대저 이길 승산이 일할이라도 있을 때 감행하는거지 지금처럼 패배가 눈에 훤히 보일 때는 싸우는 것이 아니오.”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여러분들은 죽을 때 죽더라도 투항은 안된다고 할지도 모르겠소? 그러나 아무리 기를 써봤자 적을 이길 확률은 없소. 무모한 싸움이라는 얘기오.”

단호히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런데 오대호법의 얼굴표정이 밝아졌다. 무척 자신의 방식이 마음에 드는 얼굴이다.

“왜 들 그러시오? 내 뜻이 아주 마음에 드시오.”

“으…으음!”

“으음!”

“으음!”

“으음!”

“으음!”

숨기고 있지만 언뜻 즐거운 표정들이다.

“정말 내 뜻에 따르겠다는 것이오?”

대장로 소차룡이 말했다.

“그게 문주님의 뜻이라면?”

“설혹 문주님께서 투항하느니 우리 모두 자결로 의지를 보이자고 하시면 우린 그 길을 따를 것입니다.”

나머지 사람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죽어도 자결하지는 않는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것이 자신의 철학이라는 것을 늙은 너구리들은 알고 있다.

사실 적의 요구대로 투항을 하려고 일찍이 마음 먹었다. 단지 이런 회의라는 모양새를 갖춘 것은 과연 적앞에 얼마나 굳건하고 강력히 맞서는 충성심을 갖고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누군가 빈말일지라도 분연히 맞서 싸우자고 할 줄 알았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내걸었다고 해도 투항을 하면 패배인 것이다. 그런데 단 한명도 싸우자는 의견을 내놓지 않자 무척 섭섭했다.

살만큼 살았으면서 그렇게 목숨이 아깝느냐고 면박을 주려다 겨우 눌러 참았다.

“신시이옵니다.”

또다시 밖으로부터 시간을 알리는 외침이 들려왔다.

바로 그 순간 아미타불 하는 불호가 들리더니 대청으로 일단의 무사들이 들어왔다.

놀랍게도 맨 선두에 선 사람은 천장금왕이었다.

“아미타불! 고 시주 대답을 들으려 왔소.”

지금 포달랍궁은 천하를 차근 차근 점령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최대한 피를 자제했다. 포달랍궁과 뜻을 같이하는 문파는 그대로 내 버려 두었고 응독문 또한 시간을 주어 선택을 하도록 한 것이다. 자신들 뜻에 따르기만 하면 일체 문을 운영하는데 관여 하거나 간섭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다르지 않겠다고 하여 모조리 죽이는 건 아니었다. 삶이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양보하고 타협하며 사는 것이라는 동천몽의 말에 따라 충분히 설득하고 정 안되면 시간을 주었다. 단 악인 집단 만큼은 절대 가만 두지 않았고 마땅한 응징과 처벌을 가했다.

특히 포달랍궁이 움직이면서 그동안 궤멸이 되다시피 했던 구대문파가 재기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생존해 있는 제자들이 각 파로 몰려 들어 체제를 정비하고 목와북천에 의해 불타 사라진 건물들을 축조하며 강호는 크게 복원되고 있었다.

고산소가 일어났다.

“금왕님의 제의를 받아 들입니다.”

“아미타불! 그럼 이로써 응독문은 우리 편이 되었음을 선언하오이다. 향후 어떤 위험이나 곤란한 난관에 부딪히면 서슴지 말고 본궁에 도움을 요청해주시오.”

“금왕의 자비에 감사드리옵니다.”

“내가 아닌 대법왕님에게 감사를 드리시오. 이 모든 것은 그분의 뜻이오니. 또한 지역 주민들과 좋은 화합을 이루어 지내길 바라오이다.”

“물론입니다. 바쁘지 않다면 차 한 잔 대접하고 싶습니다.”

점령군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것까지 거절하면 오히려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우려가 있다.

곧바로 고산소의 안내를 받아 그의 거처로 들어갔다.

닥지를 발라 옻칠은 한 방바닥이 무척 고상하다. 두 사람이 마주 앉고 잠시 후 시녀가 뜨거운 물주전자와 다기를 들고 들어와 차를 우려냈다. 시녀가 나가고 두 사람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씩 마셨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애기를 주고 받았다. 주로 포달랍궁의 천하일통에 관한 고자산의 질문이 이어졌고 천장금왕은 동천몽이 말했던 그대로를 옮기는 형식으로 대답했다. 두 사람은 즐겁게 차를 마시며 이따금 대소를 터뜨리기로 했다.

응독문 문제를 해결함으로 섬서성에서의 모든 것은 끝났다. 잠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던 천장금왕은 수하들을 이끌고 호북을 향해 출발했다.

호북의 무창으로 들어가는 댁계령에 도착했을 때 다음 날 오시였다.

어제 저녁 이후 한 끼도 해결하지 못했다. 일행은 곧바로 탁발에 나섰고 반 시진 후 댁계령에 연기가 피어 올랐다. 절대 힘을 이용한 무전취식은 용납 안된다는 동천몽의 강한 명령에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일부 제자들은 슬쩍 무전취식의 의도를 밝히기도 했지만 천장금왕이 말렸다.

수행하는 승려들 답게 손수 직접 조달하여 해결한다는 것이었고 철저히 그렇게 했다. 그 덕분에 민심은 포달랍궁을 향해 전폭적으로 호의를 보였다.

일행이 반찬도 없는 밥을 씹어 삼키고 있을 때 천장금왕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댁계령 정상에 동천몽과 일목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대법왕이시여.”

밥을 먹던 제자들이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어떻게 이곳을?”

천장금왕이 물었다.

동천몽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이 근처 어딘가에 백쾌섬 아니면 동천비가 있거나 그들의 주축이 있다고 봐야 했기 때문에 긴장의 표정을 지었다.

“맞소? 이 근처에 동천비가 나타났다는 정보를 들었소.”

자기 친 형님이다.

그런데 동천비라고 이제 거침없이 하대를 했다.

천장금왕은 속으로 한숨을 내 쉬었다. 아무리 그를 죽이기로 했다고 하지만 어찌 사람인데 마음이 편할까. 비록 어머니를 죽게 만들고 부친을 살해한 짐승 같은 인간이지만 핏줄이라는 건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나도 함께 합시다.”

“대법왕님께서도 아직 식사를 하지 않으셨단 말이옵니까?”

“질문이 이상하구려? 난 마치 주머니에 돈을 푸짐하게 넣고 다니며 좋은 밥에 좋은 반찬 사먹는 줄 아는 모양인데 나 또한 가급적이면 길거리에서 해결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오?”

천장금왕이 펄쩍 뛰었다.

“아…아니옵니다. 소승의 말뜻은.”

“훗훗!”

동천몽이 가벼운 미소를 지어보이고 품에 휴대하고 다니는 목기로 된 밥 그릇을 꺼내 밥을 퍼 담고 한쪽 양지에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식사가 끝나자 천장금왕은 기다렸다는 듯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고했다. 이미 무미선사를 통해 삼대법왕이 주축이 되어 천하를 정벌해가는 상황을 보고 받았지만 동천몽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냐?”

식사를 끝내고 잠시 휴식 중이던 제자들이 노성을 질렀다.

두 명의 인물이 날아오다 제지를 받고 땅에 떨어졌는데 정체를 확인한 세자들이 놀랐다.

“사형…”

“아니 자네들은.”

천장금왕이 범악이승을 보며 놀랐다.

범악이승은 궁에 남아 천지철왕을 보위하는데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뭔가 불길한 징조를 암시했다.

천장금왕이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무슨 일 있는가?”

범악 이승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까지 유유자적 주위 경관을 구경하듯 바라보던 동천몽이 고개를 돌렸다.

한득선사가 말했다.

“그가 왔사옵니다.”

“그라니?”

“백쾌섬.”

휙!

동천몽이 다가왔다.

“말하라. 자세히.”

한득선사가 상세히 말했다.

한득선사의 말을 듣고 있던 동천몽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철왕이 겁난을 막았구나.”

백쾌섬은 지나칠 만큼 자신을 의식한다. 치열한 경쟁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천지철왕은 바로 그 부분을 교묘히 자극하여 자기 한 목숨으로 모든 것을 정리한 것이었다.

잠시 후 천장금왕은 동천몽이 이곳에 나타난 이유를 제자들에게 설명했다.

“절대 뒤를 밟는다거나 공격을 해서는 안된다. 흔적을 발견하면 곧바로 돌아오도록 하여라.”

동천비는 최강의 고수라 할 수 있었다. 누구도 그의 상대가 되지 않은 만큼 섣부른 동작은 죽음 뿐이었다.

제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동천몽은 천장금왕을 데리고 무창으로 들어섰다.

“차 한 잔 하겠느냐?”

평생을 무공과 싸웠다.

이따금 세상물정을 알기 위해 몇 일씩 출문을 했을 뿐 대부분 궁내에 묻혀 살았다. 차 또한 자신이 손수 봄에 따 마시는 잎차가 전부일 뿐 밖에서 돈을 주고 마신 기억이 없다.

다원으로 들어선 천장금왕이 눈을 크게 떴다. 다원에는 남자들 뿐 아니라 아름다운 여인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인들이 버젓이 차를 마시는 모습이 산속생활에 젖은 그의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했고 연신 그들을 살피느라 눈이 바쁘다.

“들거라.”

동천몽이 시킨 것은 용정이다.

용정은 고가의 차로 일반인들은 꿈에서나 마실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출가한 대법왕이지만 천상각이란 사가는 그의 손을 크게 만들고 말았다.

과거를 잊고 가급적 청빈한 삶을 알아가고자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아직 습관까지 사라지지는 않아 서슴없이 용정을 시켰다.

“아미타불!”

한 모금 마신 천장금왕의 눈이 커졌다.

쓰디 쓴 잎차만 마시다 잘 덖어진 용정을 마시자 소위 혀바닥에 착착 감겼다.

다시 한 모금 마시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혀로는 달짝지근한 맛이 돌고 콧구멍으로 희미한 숭늉 내음이 폐부 깊숙이 파고든다.

“어떻느냐?”

동천몽이 물었다.

어린아이처럼 눈을 감고 향을 맡고 맛을 음미하던 천장금왕 눈을 뜨고 더듬거렸다.

“가…가히 천하일품이라 할 만 하옵니다.”

“차 좋아하느냐?”

“중놈이 차 싫어하옵니까?”

“차란 확실히 좋더구나. 이상하게 차를 마시면 마음이 안정되고 괴로움이 씻겨지며 마음이 즐거워진다. 이건 내 경험인데 진짜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차를 마시면 육정을 초월한다고 하지 않았겠사옵니까?”

바로 그때였다. 뾰쪽한 음성이 실내를 울렸다.

“이런 미친놈이 지금 날 희롱하는거냐?”

깜짝 놀라며 두 사람이 소리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악!

두 사람의 눈동자가 기다렸다는 듯 커졌다.

창가에 자정경이 눈을 부릅 뜨며 한 흑의사내와 드잡이질을 벌이고 있었다.

“아니오. 소생은 진심으로 낭자와 합석을 하고 싶소이다.”

“됐어. 난 생각 없으니 저리 꺼져.”

“낭자, 첫눈에 반했소이다. 잠시 합석할 기회를 주시지 않겠소이까?”

대략의 상황이 눈에 그려진다.

혼자 차를 마시는 자정경의 단아하고 빼어난 용모에 흑의사내가 반해 지금 수작을 걸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점잖게 나가던 흑의사내가 점점 거칠고 노골적으로 나왔다. 등에 한 자루 검을 맨 것이 무림인인 듯 보였는데 동천몽은 미소를 지으며 재미있는 구경거리 보듯 했다. 반면 천장금왕은 당장이라도 흑의사내를 쳐 죽일 듯 노려보았다.

동천몽이 절대 끼어 들지 말라는 눈치를 주었다.

“흐흐! 충분히 알아듣게 얘기를 했는데도 낭자께서 자꾸 소생의 성의를 짓밟으니 무례할 수 밖에 없겠소이다.”

“그래서 어쩔건데 내 허락없이 그냥 앉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못할 것도 없지요.”

흑의사내는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순간 자정경의 눈이 커졌다.

“이런 재수 없는 자식을 봤나. 여기가 어디라고 엉덩이 디밀고 앉는 거야. 당장 안 꺼져.”

“이해하시오. 오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낭자와 차 한 잔을 꼭 해야겠소.”

흑의사내의 눈이 자정경을 살폈다.

가히 꿈에서조차도 볼 수 없는 절색이었다. 이런 아름다운 여인이 어디 갔다 이제 나타났는지 운명이 미울 지경이었다.

“통성명이나 합시다. 소생은 종박기라 하오.”

문득 한참 인상을 쓰고 있던 자정경이 갑자기 상냥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혼자 차를 마시는 동안 약간은 심심하기도 했고.

자정경이 웃자 종박기의 눈이 튀어 나올 듯 커졌다. 선녀가 눈 앞에서 자신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낭자. 진정 아름답소이다. 오오 정녕 선녀이오.”

“종대협님이라고 했나요?”

“종대협이라니 당치 않소이다. 그냥 이름을 부르시오.”

“보아하니 무림인 같은데 꽤 명성이 자자한 분 같군요?”

“명성까지는 몰라도 이 근처에서는 제법 통한다오. 종박기라고 하면 무당 또한 한 걸음 물러서지요.”

이곳은 무창이고 멀지 않은 곳에 구대문파 중 한 곳인 무당이 있다.

무당까지 자신의 이름 석 자 앞에서 한 걸음 물러선다는 말에 자정경의 눈이 커졌다.

“정말인가요? 무당의 고수들까지도 한걸음 물러서 예의를 갖춘다니 대단하군요.”

“대단할 것 까진?”

“반가워요. 소녀는 자정경이라고 해요.”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는 것은 마음을 열었다고 봐야 한다. 종박기의 얼굴에 음흉한 기색이 떠올랐다.

“용모 만큼이나 이름도 아름답군요. 집이 이 근처 이오? 이 근처라면 소생이 모를 리가 없는데?”

“여긴 아니에요. 아는 분을 이 근처에 있다고 해서 왔어요.”

“누구요?”

“별 사람 아니에요. 오라버니 되세요.”

“이름이 뭐요?”

“동천몽이라고.”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사부에서 졸지에 자정경의 오라버니가 되고 있었다.

“동천몽?”

“아시나요? 아주 잘생겼어요.”

“오라버니라는 분은 뭐하는 분이시오?”

“무림인이에요.”

“나처럼 무림인이란 말이오?”

무림인이란 말에 종박기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이 근처에서 활동하는 무림인이라면 소생이 알텐데 전혀 처음 듣는 이름이로군요.”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이 지역에 볼일이 있어 와 계실 뿐 이곳 사람이 아니라고.”

“어쩐지?”

종박기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나타났다.

그때 점소이가 주둥이가 길 다란 차 주전자를 들고 나타났다.

“뭐죠?”

자신은 시키지 않았기에 묻는 것이다.

종박기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소생이 낭자에게 용정 한잔 권해 드리는 것이오. 보아하니 철관음을 마시는 것 같은데 용정이 훨씬 나을 것이오.”

용정은 고급이다. 철관음에 비해 세배 정도 비싸다. 자신도 용정을 마셨지만 배속에 아이가 들어있다. 용정은 덖고 비비는 복잡한 여러 단계를 거칠 뿐 아니라 다른 조미료가 들어간다. 그래서 맛과 향이 좋긴 하지만 첨가물로 인해 태아에 이상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연 그대로 익혀 마시는 철관음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종박기는 자신이 돈이 없어 철관음을 마시는 줄로 착각 하고 고급 용정을 접대하려는 것이다.

아무리 성의라지만 아이의 건강이 더욱 중요하다.

정중하게 사양하자 자정경이 차에 대해 모르고 그러는 줄 알고 용정이 철관음에 비해 훨씬 비쌀 뿐 아니라 강호에서 행세께나 하는 사람은 모두가 용정을 마신다고 떠든다.

종박기의 그릇과 됨됨이가 속속 드러나고 있었다.

전형적인 파락호의 모습이다. 그의 접대 방식이 다른 여자들에게는 통했는지 몰라도 어려서부터 돈 궁함 없이 성장한 자정경에게는 짜증스런 일이다.

더구나 자정경이 그가 권하는 용정을 더욱 기피한 것은 차 속에 뭔가 담겨 있을지 모른 다는 것 때문이었다. 종박기 같은 인간들의 전형이 음식에 미약 따위를 넣어 여인을 쓰러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고급으로 포장을 하여 접대 한다고 해서 덜컥 받아 먹었다가는 신세 망친다.

“괜찮아요. 전 이것이 좋아요. 마시고 싶은 마음 없어요.”

예상대로 거듭된 거절에 종박기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것은 성의를 묵살 당한 것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자신의 계략이 빗나간 것에 대한 짜증이었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요. 그만 차를 가져가게.”

점소이가 물러났다.

종박기는 이것저것 자꾸 관심을 보며 물었고 자정경은 건성으로 대답해 주었다.

그녀가 차를 모두 마시고 일어섰다. 흑수당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동천몽이 무창으로 들어섰다고 했다. 그래서 무창에 나타난 것인데 종박기가 쪼르르 달려가더니 차 값을 계산했다.

“이러면 안되는데.”

“아니오. 낭자처럼 아름다운 분과 차를 마셨다는 것은 내 생애 최고의 영광이오. 차 값 정도는 당연이 지불해야 예의 아니겠소.”

그러면서 졸졸졸 밖으로 따라나왔다.

“낭자 어딜 가시오. 바쁘지 않다면 소생이 저녁을 대접하고 싶소만.”

자정경이 웃으며 말했다.

“죄송해서 어떡하죠? 난 오라버니와 약속이 있어서 바삐 가봐야 해요. 그럼 인연이 닿으면 다음에 또 봐요.”

자정경이 돌아서다 말고 흠칫 했다.

뒤에 있던 종박기가 어느새 앞길을 막고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죠?”

종박기가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그냥 가면 안되지.”

“그게 무슨 말씀이죠?”

“나와 무조건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좋게 말할 때 따라오겠느냐 아니면 한대 맞고 엎혀 갈래?”

노골적으로 나온다.

자정경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종박기 또한 따라 웃는다.

“따라 오너라.”

손을 낚아 챘다.

휭!

하지만 허당이다.

“이년이!”

눈을 부라리며 다시 낚아 챘지만 역시도 허당이다. 종박기가 눈쌀을 찌푸렸고 자정경의 얼굴에 살기가 떠올랐다.

“개새끼 귀찮아서 그냥 내버려 뒀더니 당장 안 꺼져.”

욕설을 뱉자 종박기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금세 표정을 고치더니 소리내어 웃었다.

“개새끼라고 했느냐? 이런 개잡년을 봤나. 내가 오늘 네년을 가만 놔두면 종박기가 아니라 개박기다. 따라와 이년.”

이번에는 앞 선 두번과 달리 아주 거칠고도 표독하게 자정경의 완맥을 낚아 채려했다.

탁!

그런데 반대로 종박기의 손이 자정경의 손에 잡혔다.

“엇!”

종박기가 그제 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개자식, 오늘 혼 좀 나봐라.”

화악!

자정경이 사정없이 팔을 비틀었다.

“크억!”

종박기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틀었다. 하지만 자정경은 더욱 비틀었고 몸을 틀어 고통을 줄일 수 없게 되자 왼손으로 장력을 뻗었다.

“흥!”

자정경이 가소롭다는 듯 콧웃음을 치고 같은 수법으로 장력을 마주 뻗었다.

따악!

“크악!”

종박기가 왼손을 늘어뜨는데 손목이 부러진 듯 했다.

자정경은 그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쥐고 있는 오른손을 더욱 비틀었고 우드득 소리가 났는데 어깨에서 탈골이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크어어어!”

졸지에 양손을 모두 부상입은 종박기의 악색이 파랗게 변했다.

“너 같은 놈은 아예 이걸 없애 버려야 돼.”

오른발로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종박기가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뻐억!

발이 무릎을 찍었다.

“개자식 피했단 말이지. 어디 또 피해봐라.”

이번에는 다리에 공력을 주입해 걷어찼다. 조금 전과는 비교가 안되는 위력이고 빠름이었다.

“정경아 아무리 사내가 미워도 그곳만큼은 부수는게 아니니라.”

뚝!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속으로 설마 하는 생각을 갖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확!

자정경의 눈이 커졌다.

등 뒤 다방의 계단 입구에 동천몽이 천장금왕과 나란히 서 있었다.

침을 삼키고 눈에 힘을 주며 보았지만 틀림없는 동천몽이다.

“사…사부님!”

그 자리에서 붕 떠오르더니 동천몽의 목을 끌어 안는다.

와락!

자정경이 목을 끌어 안고 동천몽의 입과 볼에 미친 듯이 입을 맞췄다.

“아미타불!”

천장금왕이 민망한 듯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중얼거렸다.

“사제 이 사형은 안 뵈느냐?”

그제서야 자정경이 동천몽에게서 떨어지더니 천장금왕을 보며 발그레 웃는다.

휙!

하지만 곧바로 천장금왕에게 달려들어 그의 볼에도 입을 맞춘다.

“이제 되셨어요? 사형.”

천장금왕의 눈이 찢어 질듯 커졌고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불호를 중얼거렸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천장금왕의 놀란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자정경이 고개를 돌리고 킥킥거린다.

“사형 어디 아프세요?”

자신이 입을 맞춘 볼을 닦으며 안절부절 못하는 천장금왕을 보며 자정경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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