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69화 (69/71)

제6장 화무십일홍

그런데 마치 용틀임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천몽은 한 눈에 상당한 보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박빙의 싸움에서 병기가 차지하는 비율은 절대적이다. 그것은 아무리 무공이 강하고 높아도 변하지 않는다.

“이노옴!”

커다란 분노의 일성을 터뜨리며 남궁천이 찔러 왔다.

딱!

동천몽이 쳐냈다.

싹!

다행히 찔러 오는 검을 펴내긴 했지만 그 대신 들고 있던 나무막대기가 잘려 나갔다.

보검은 보검이다. 강력한 내력을 주입했는데로 매끈하게 잘렸다.

스으!

남궁천의 검 끝이 느릿하게 올려진다.

뚝!

검끝이 멈추고 겨눈 부위는 동천몽의 얼굴이었다.

일대종사.

지금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서 있는 남궁천의 몸에서는 유현한 기세가 풍겨나왔다. 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부드럽지는 더욱 않는, 강하면서도 넉넉해 보이는 기세는 그의 무공이 이미 입신에 이르렀다는 뜻이었다.

‘과연!’

동천몽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자신의 목검을 자르는 것은 보검의 힘으로만 돌릴 것은 아니었다. 힘도 강하지만 검법에 대해 정확히 깨우쳤다는 뜻이다. 검법을 안다는 것은 검의 성격과 검의 길을 훤히 안다는 것이다. 흔히 말하여 결이라 한다.

형태와 변화를 읽고 거기에 맞추는 것인데 검을 휘두르는데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그것은 검날에 맞추고 바람의 흐름에 맞춰 휘두르면 베지 못할 것이 없다는 얘긴데 어찌보면 가장 초보적인 뜻일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깨우침을 얻지 않고서는 그 안에 담긴 진정한 참뜻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고수의 검은 간단하면서 쉽지만 하수의 검은 패도적이며 거칠다.

푸왁!

표적을 찾아 움직일 때는 조용하고 가볍더니 찔러오는 공세는 화약이다. 금방 폭발하듯 가공하게 돌변하여 동천몽의 목을 찔러왔는데 그 빠름과 힘이란 지금껏 누구의 검보다 월등했다.

딱!

동천몽의 목검이 다시 찔러오는 검기를 막았다.

투툭!

역시 또다시 나무토막은 잘렸다.

퍽!

나무토막에 가로막혀 비켜나간 검기는 오른쪽 뒤 벽에 커다란 구멍을 냈다.

촤르르!

벽에 가두어진 물이 흐르고 물고기들이 바닥으로 쏟아져 나온 듯 여기저기서 퍼드득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촤촤촤!

일초와 이초의 간격을 확실히 끊어 펼쳤다.

그런데 삼초부터는 연속적인 동작으로 찔러온다.

순식간에 세 개의 검이 눈앞을 파고들었다.

‘우훗!’

동천몽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지었다.

삼초의 공격이 마치 일초처럼 한 동작으로 펼쳐졌다. 눈으로 보기에는 한 동작이지만 분명 삼초와 사초 오초사이에 시간 차이는 있다. 다만 너무 빠르다보니 그 간격이 없는 것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파파팍!

상대가 세 번을 찔렀으니 이쪽도 세 번을 휘둘러 막아야 한다.

딱!

딱---따닥!

들고 있던 몽둥이는 손잡이만 남았다.

오 초만에 완전히 검으로서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그러나 남궁천의 놀라움은 상상을 벗어나고 있었다. 자신의 검은 전설의 사대명검들은 간장이나 막사에 버금가는 설악(雪鰐)이라는 검이다. 설악이라는 바다에 사는 악어가 있고 그 악어의 송곳니로 만들어졌다. 설악은 일반 악어에 비해 덩치가 다섯 배에서 일곱 배까지 크고 송곳니 역시 그만큼 더 크다.

그런 검인 만큼 강력한 내기가 주입된 설악에 맞으면 예리함과 힘에 의해 부러질 뿐만 아니라 주입된 힘이 고스란히 상대에게 전달되어 내장이 터지고 폭발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동천몽은 들고 있던 나무토막이 잘리는 것 이하도 이상도 없었다.

“대단하구나.”

그건 진심이었다. 진정으로 대단했고 소문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지녔음을 인정했다.

스으으!

기수식 바뀌었다.

왼발이 오른발을 뒤로 밀어내고 앞으로 나왔는데 금방이라도 앞으로 달려 나갈 것 같은 자세였다.

콰아아!

수평으로 쭉 뻗어온다.

툭!

동천몽의 오른손에 들린 나무토막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붉게 달아오른 손이 뻗어갔다.

지옥금이다.

“감히 맨손으로!”

말을 이어지지 않았다.

맨손으로 검과 부딪혔는데 엄청난 타격이 밀려왔고 잘려졌으리라 여긴 동천몽의 오른손은 멀쩡했다.

촤촤촤촤!

충돌의 여파로 잠시 주춤 뒤로 밀려난 동천몽이 이번에는 좌우 양손을 번갈아 가며 후려쳤다.

파파팍!

남궁천도 물러나지 않았다. 설악이라는 야심만만한 보검을 갖고서 물러난다는 것을 말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천마검법 아니던가.

콰쾅!

두 사람의 공세가 부딪히면서 일어난 반탄지기에 집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쿠쿠르르!

대들보와 담벼락 기둥이 폭탄을 맞은 듯 무너졌지만 놀랍게도 두 사람 몸 주위 한 자 이상은 접근하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둘 모두 호신강이를 끌어내는 경지의 고수들이었다.

퍼퍼퍽!

두 사람의 격전은 일진일퇴였다.

단지 설악의 뛰어난 예리함에 동천몽의 이마가 왕왕 찌푸려지기를 반복했다. 살기가 짙은 지옥금이지만 설악의 예리함을 막아내기에는 약간은 무리인 듯 했다.

푸푹!

시간이 지날 수록 동천몽이 뒤로 밀렸다.

그렇다고 눈에 띄게 불리해 보인다거나 위기를 맞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것이 혼신을 다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퍽!

퍼퍼퍼퍽!

조금 전까지 웅장한 전각은 사라졌고 주위 기물들까지 산산조각이 되었다. 두 사람은 무너진 왕각의 잔해를 밟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사십초가 지났지만 누구도 우세를 보이지는 않았다. 단지 동천몽의 소매자락이 걸레조각 처럼 찢겨져 나풀거렸다. 강력한 지옥금과 내기에 감싸인 손은 그럭저럭 멀쩡했지만 소매자락까지는 설악의 예리함을 견디지 못하고 잘려진 것이다.

콰앙!

검과 손이 부딪히며 뒤로 두 걸음씩 물러났다.

쉬익!

몸의 중심을 먼저 잡은 동천몽의 좌장이 남궁천의 왼쪽 하복부를 쑤시듯 파고들었다.

슥!

재빨리 검을 들어 하복부를 파고드는 동천몽의 좌수를 내려쳤다. 그러나 동천몽의 좌수는 공중에서 떨어지는 종이가 바람의 영향에 옆으로 이동하듯 가볍게 피하며 곧장 쑤셔갔다.

“엇!”

남궁천의 입에서 헛바람이 나왔다.

사십초는 무인들의 싸움에서 결코 길지 않는 공방이었다. 그러나 싸움의 질이 문제였다. 두 사람은 혼신의 힘을 다 쏟았기 때문에 어지간한 고수들은 흘러나온 기파에 맞아도 즉사를 면치 못할 정도였다. 비록 처음보다 절반으로 뚝 떨어진 힘이었지만 동천몽이 너무 쉽게 피해 버린 것이다.

처음으로 어쩌면 동천몽의 내공은 자신처럼 절반 이하로 떨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떠올랐다. 하나 이내 고개를 흔들어 그럴리 없다고 무시를 하며 다시 왼손을 내려 베었다.

핑글!

그런데 또 이번에도 검은 허탕을 쳤다.

세 번째 방어식을 펼쳐 막기에는 동천몽의 좌장이 너무 복부 가까이에 붙어 있었다.

파아앙!

왼손으로 마주 쳤다.

손바닥과 손바닥이 부딪혔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밀려왔다. 특히 손목이 시큰거림을 넘어 통증이 느껴졌는데 조금만 동천몽이 세게 힘을 주었다면 부러졌을 것이다. 어쨌든 기혈까지 들끓었으므로 남궁천은 표정이 굳었다.

슬쩍 동천몽을 쳐다보았다. 자신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표정이 없었다. 그렇다고 상처가 큰 데 일부러 속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강호에서 쓴맛 단맛 다본 자신이기에 속임수와 정말로 괜찮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은 구분 된다.

‘놈! 예상보다 더욱 강했구나.’

촤차차!

동천몽이 이번에는 쌍장으로 양손을 뻗었다.

눈앞으로 붉은 손그림자가 가득했고 남궁천은 미친 듯이 이손 저손 가라지 않고 눈에 뵈이는 데로 후려쳤다.

땅--따다다당!

번 번히 검에 차단당했지만 동천몽은 쉬지 않고 소나기 공격을 퍼부었다.

허공에 동천몽의 손바닥이 가득 떠올랐다.

손바닥이 많이 떠오를수록 남궁천의 검도 많아졌고 손이 빨라질수록 빨라졌다.

남궁천은 악착같이 막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손바닥 하나라도 격중되면 치명상이다.

촤촤촷!

동천몽의 손이 느려졌다. 물론 보통 사람의 눈에는 전혀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남궁천의 눈은 속일수가 없었다. 처음 두개를 뻗어냈을 때 보다 이제는 하나씩 나오고 있었다. 동작이 느려졌다가는 것은 내력이 그만큼 떨어졌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땀 가득한 남궁천의 두 눈이 신광을 뿜었다.

자신의 힘도 바닥이다. 물론 동천몽의 힘도 바닥인지는 모르지만 분명이 떨어진 것은 확실했다.

‘지금이다!’

콰아아!

밋밋하게 움직이던 남궁천의 검이 강렬한 광채를 내뿜었다. 검은 사라지고 강렬한 묵광이 터져나왔다.

화악!

동천몽의 눈이 부릅 떠졌다.

그러더니 입술이 달싹 거렸고 한 순간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탁!

눈 앞으로 붉은 광채가 너풀거리더니 동천몽이 거머쥐었다.

촤아아아!

거머쥔 붉은 광채가 날아오는 남궁천의 묵광을 곧바로 베어갔다. 남궁천의 입술이 뒤틀렸다.

자신의 승산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입가에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붉은 광채가 자신의 천마검법을 베어왔다. 남궁천이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이미 겪어본 지옥금 정도로 자신의 천마검법을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더욱 어이 없다는 미소를 지으며 검을 후려쳤다.

꾸우욱!

묵광과 홍광이 맞부딪히자 강력한 파괴력이 전해져왔다. 그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강한 충격이었다. 어찌나 강하던지 도저히 검을 쥐고 있을 수가 없었지만 이를 악물었다. 그러는 바람에 몸으로 받아들이는 충격은 더 컸다.

잠시 붙었다 떨어진 두개의 광채는 다시 달려들었다.

싸아악!

홍광이 면상으로 떨어진다.

남궁천은 공격도 중요했지만 도무지 홍광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온 힘을 눈에 집중했고 강렬한 광채에 휩싸인 홍광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맙소사!’

그것은 놀랍게도 검이었다. 동천몽의 손에 있던 목검은 이미 자신의 손에 의해 잘려져 기능을 상실했다. 그런데 자신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는 것은 틀림 없는 검이었다.

‘설마!’

심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직접 손에 검을 들지 않았지만 검을 들고 싸우는 것처럼 상대를 압박하고 물체는 베는 것이고 또 하나의 방법은 몸속의 내기를 검처럼 만들어 꺼내어 쓰는 것이다. 용의 내단과 비슷하다.

남궁천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베어 오는 것은 심검의 경지에 올랐을 때 보여줄 수 있는 현상은 아니었다.

틀림없는 검이었다.

커컥!

묵광과 홍광이 또다시 엉켰다. 그러나 이번에는 떨어지지 않았는데 서로가 위기에 봉착하자 왼손을 뻗었고 충돌하지 않은 왼손들이 묘하게도 서로 멱살을 잡았다.

주위는 평평했다. 왕각이 무너지면 쌓인 기와장과 벽돌과 여러 실내장식들은 두 사람이 대결을 벌이며 뿜어나온 반탄기운에 흔적없이 사라졌다.

마치 비자루로 바닥을 쓸어 놓은 듯 깨끗한 왕각 터 위에 두 사람이 멱살을 잡고 서 있었다.

남궁천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동천몽의 오른손에 한 개의 검이 쥐어져 있었는데 놀랍게도 핏물이 검신을 타고 지면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신의 피는 아니었기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각이 있었을 때 출입구가 되는 곳에 외눈박이 인물이 서 있었다. 보지는 않았지만 동천몽을 시위하는 일목이란 자라는 것을 알아보았고 모든 것의 앞 뒤가 이해된다.

자신이 천마검법으로 동천몽을 공격했다.

그때 눈앞에 나타난 홍광은 바로 피묻은 검이 뿜어낸 광채였다. 즉 일목이 때맞춰 나타났고 동천몽의 전음을 받아 곧바로 검을 던져 준 것이다.

그리고 대법왕의 최고 기예인 만마생사혈을 펼친 것이다.

툭툭!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오른손에 들린 검이 떨어졌다. 멱살을 잡고 있는 상태에서 검은 더 이상 무용지물이기 때문이었다.

화악!

기다렸다는 듯 검을 놓은 오른 주먹이 서로의 왼쪽 관자놀이를 향해 뻗어갔다.

하나 주먹은 서로를 때리기 보다는 서로의 팔목을 잡았다.

콰콱!

왼손은 멱살을 잡고 오른손은 꼬이듯 서로 손목을 쥐고 있었다.

히죽!

동천몽이 웃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자신에게 무척 이롭게 만들어진 상황이었다.

씨익!

남궁천도 웃었다.

그 또한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아주 이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남궁천,

지금의 그는 화려했지만 한때의 그는 어두웠다. 그에게는 세 형제가 있었는데 막내였다. 위의 두 형제는 어려서부터 강한 승부사적 기질로 가문의 비기를 중심으로 연마하며 야망을 키웠다. 하지만 부친을 따라 서장을 다녀오던 중 불의의 사고로 죽고 말았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후계자가 된 남궁천은 말 그대로 지옥의 수업을 받았다. 너무 힘이 들어 부친을 피했고 행방을 감춰버렸다.

집을 나온 그는 뒷골목에서 자리를 잡았다.

하오문.

처음으로 세상에는 자신과 아주 다른 삶이 존재 한다는 것을 깨우쳤고 이상하게 그들과 잘 어울렸다. 그때 하오문 무사들과 어울리며 배운 것이 박투술이었다.

박투술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주먹과 발로 근접거리에서 싸우는 것과 아이들처럼 바닥을 뒹굴며 엉켜 물어 뜯고 치고 싸우는 것이다.

하오문도들은 후자를 박투로 불렀다.

왼손으로는 멱살을 잡고 오른손은 서로의 손목을 잡았는데 언뜻 무도의 기본동작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힘껏 잡아 당겼다.

와락!

예상대로 동천몽은 힘 없이 끌려온다. 경험에 의하면 이 상태에서 끌어당겨 끌려오지 않은 사람 없다.

자신에게 끌려오는 동천몽의 머리를 향해 사정없이 머리로 박았다. 동천몽 또한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여 머리를 들이댄다.

빠악!

번쩍!

남궁천의 눈에서 별빛이 솟았다.

예상 밖으로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누그러 뜨렸다. 박은 사람이 이 정도 아플 정도면 당하는 사람이 겪는 고통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휘익!

남궁천은 또다시 잡아 당겼다.

여전히 힘없이 끌려온다.

끌려오는 동천몽의 면상을 향해 다시 멀리를 들이 박았고 동천몽 또한 고개를 숙여 이미를 댔다.

빠아악!

“음!”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앞선 공격보다 훨씬 세게 박긴 했지만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그러나 맞는 사람은 때리는 사람보다 다섯 배 이상 고통스럽다는 것을 상기하자 참을만 하다.

“흐흐흐! 이놈 하늘 밖에 하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마.”

남궁천은 양손을 힘주어 당겼고 끌려오는 동천몽을 향해 저돌적으로 머리를 박았다.

쿠우웅!

눈앞이 순간적으로 흐릿해진다. 현기증이 일어났고 몇 개의 별이 둥둥 떠다녔다.

‘크으!’

터져나오는 신음을 억지로 삼키며 이마를 찡그렸다. 통증이 머리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라 목을 지나 가슴까지 줄달음 쳤다. 슬며시 동천몽의 얼굴을 보았는데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꿈틀!

남궁천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속임수가 틀림 없었다. 자신이 이정도 아플 정도인데 상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웃음을 짓고 있다는 것은 자신에게 나약함을 보이지 않기 위한 위장이다. 필시 지금쯤 머릿속은 허옇게 떴을 것이고 눈 앞이 빙빙 돌 것이다.

“흐흐! 또 간닷!”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멱살을 움켜쥐고 오른손목을 갈고리처럼 쥐었다.

퍼벅!

퍽!

뻐어억!

연거푸 세 번을 받았더니 심하게 어지럽다. 눈앞에 뜬 별들도 아까보다 세배는 많아졌고 구역질까지 솟는다. 현기증이 일어나면 구역질을 동반한다.

넘어오려는 것을 참고 다시 잡아당겼다.

“끝내주마!”

빠악!

온힘을 다해 박았다.

“끄윽!”

도저히 속으로 삼킬 수가 없었다.

으웩!

급기야 구역질까지 했고 당장 주저 앉고 싶을 만큼 심한 현기증이 전신을 지배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어 동천몽을 살폈다.

흠칫!

그런데 동천몽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자신의 기세를 누그러 뜨리기 위한 위장 웃음인줄 알았지만 지금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 정도 박았으면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머리가 깨지거나 숨을 거두었어야 했다. 그런데 동천몽의 머리를 그 흔한 부기 하나도 없었다.

“후훗!”

동천몽이 소리내어 웃었다.

그런데 동천몽의 시선이 자신의 머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지금 남궁천의 머리를 호박만큼 부풀어 있었는데 본인만 전혀 모르고 있었다.

흐흡!

남궁천은 숨을 가다듬고 다시 잡아 당기며 박았다.

당기고 박고 당기고 박고를 이십여 차례 했을 쯤 뜨거운 물기가 이마에 적셔졌다. 마침내 동천몽의 머리가 깨졌음을 느끼며 좋아 살폈는데 피는 커녕 매끈할 뿐이다.

“이런!”

뒤늦게서야 자신의 머리가 깨졌다는 것을 느낀 남궁천은 기겁했다. 어디가 깨졌는지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양 손 모두가 사용 중이어서 불가능했다.

단지 눈 앞의 어지러움이 이제는 잦아들지 않고 지속되고 있으며 별들도 계속 떠있다는 것이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지러움과 별이 사라지지 않는 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원인 분석에 접어 들었을 때 동천몽이 입을 열었다.

“어서 박으시오.”

“……”

“뭘 그렇게 쳐다보고만 있는거요? 어서 박아 달라는 말이오?”

남궁천의 이를 깨물었다.

이 또한 속임수였다. 박아 달라고 할수록 상대가 박지 않는 다는 것을 이용하려는 고도의 심리전이다.

“어린 놈!”

남궁천은 다시 박았다.

이번에는 좀 더 많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눈앞으로도 보인다.

“그렇게 가뭄에 콩 나듯 띄엄띄엄 박지말고 마구 정신없이 박아주시오. 파파팍 하고 말이오.”

입으로는 소리를 내고 머리로는 마구 박는 시늉을 해보인다.

이쯤 되면 거짓말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혹시 너?”

뭔가 물어 보려는데 동천몽이 이을 열었다.

“다 박았소? 그럼 이제 내가 박겠소.”

그러더니 사정없이 잡아 당겼다.

자신 역시 힘없이 끌려갔고 동천몽의 머리가 면상을 냅다 박았다. 본능적으로 머리를 숙였는데 이미 부어오른 머리인지라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밀려온다.

“끄어어!”

비명을 흘렸고 동천몽이 다시 잡아 당겼다.

확!

빡!

“크허허!”

동천몽은 자신과 방법을 달리 했다. 자신은 천천히 박았는데 동천몽은 멱살을 잡고 흔들 듯 미친듯이 당겼고 머리를 마구 찍듯이 박아댔다.

빡!

빠--아가가각!

머리가 너무 아파 잠시 고개를 들었는데 그 틈에 면상을 열한 번 박혔다.

정신이 몽롱했고 코를 비롯해 칠공이 박살났다.

동천몽이 자신보다 박투에 한 수 위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꽈아앙!

“으아악!”

쓰러지고 싶어도 쓰러질 수가 없었다.

오른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동천몽이 악착같이 쥐고 늘어졌다.

얼굴이 피 반죽이 된 남궁천을 보며 동천몽이 입을 열었다.

“한마디만 하겠소. 나소주의 개고기요?”

“개…개고기?”

동천몽이 일목을 바로 보았다.

네가 와서 설명 좀 해주라는 의미였다. 일목이 다가와 말을 했다.

“소주의 개고기의 특징은 막싸움에 달인이라는 뜻이오. 특히 일두사 하면 완전한 공포였다고 하오. 물론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당한 사람들은 절대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합니다. 맹주님.”

얼마나 거친 싸움꾼이었으면 개고기라는 그런 무시무시한 별명을 얻었을까를 생각하자 후회가 물밀듯 들어온다.

“다행이오.”

뭐가 다행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혀가 찢어졌다. 움직일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슬쩍 힘을 주어도 벼락을 맞은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와 입을 다물었다.

“한 가지 배운 무공이 있었는데 그동안 마땅히 써먹을데가 없었소. 그렇다고 대법왕을 위해 특별히 창안된 것인데 피라미를 상대로 펼쳐 보일 수는 더욱 없었고.”

그것은 자신을 상대로 제대로 한 번 써보겠다는 것이었다.

무엇일까 잔뜩 궁금했지만 혀바닥이 아파 물을 수가 없었다.

“기도살법이라는 건데.”

슈욱!

말이 끝나자 마자 동천몽이 잡아 당겼다. 본능적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갑자기 당기니 뾰족한 수는 없었다.

그런데 앞서 했던 동작과 달리 입을 맞출 듯 얼굴을 반드시 들어 내민다.

그대로 잡아 당기면 입을 맞출 가능성이 완벽했다.

순간적으로 변태라는 두 마디 단어가 떠오른다. 사도의 무공 중 구밀흡추라는 무공이 있다. 혀를 상대의 입안에 넣고 빨아 당기는 것인데 그 흡인력이 워낙 강해 혀가 통째로 뽑힌다고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림맹의 맹주가 강제로 입맞춤을 당해 죽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안간힘을 다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반항했다.

“아…앙돼(안돼) 시…저(싫어)”

찢어진 혀로 인해 발음이 엉망으로 나왔다. 그러나 살길은 그것 뿐이었으므로 악착같이 외쳤다.

“젱방(제발)…싱타니깡(싫다니까).”

하지만 상체를 끌려갔고 동천몽의 입이 휘파람을 불듯 가볍게 오므려졌다.

“꺽!”

벌레에 물린 듯 입술근처가 따가웠다.

동천몽이 웃었는데 어떠냐는 질문 같았다.

쉭!

다시 입술을 오므리더니 입을 앞으로 빠르게 내밀었다.

푹!

“커어억!”

이번에는 자신의 피부가 관통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분명 검이 살 속을 파고들 때 흘러나오는 소리와 똑 같았다.

‘입에서 검이!’

하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입안에 침 따위를 감췄다가 박투 중 사용하는 기예는 있다. 하지만 조그만 입에 검을 숨긴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사천당문의 구검첨술이라는 기예가 있는데 이 또한 말이 검이지 사실은 침을 숨겨 공격 하는 것이었다.

푸욱!

“끄악!”

갈수록 고통이 커지고 뼈까지 뚫는 듯 으드득 소리가 들린다. 검이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현상들이었다.

“거….겅이(검이)?”

동천몽이 웃었다.

“내기를 검으로 만들어 상대를 공격하는 포달랍궁의 절기이오. 어떻소?”

“그….그망(그만)”

동천몽의 입이 다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쿠욱!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지금까지는 입안 근처까지만 뚫고 들어왔는데 뒷덜미까지 아픈 것이 관통된 듯 했다.

동천몽이 손을 놓았다.

휘청!

남궁천은 쓰러질 듯 비틀 거렸다. 하지만 안간힘을 다해 몸을 세웠는데 발 아래로 핏물이 흥건했다.

주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단 한명의 부하도 찾아오지 않은 것이 일목이란 인물에게 완전히 도륙 당했음이 분명했다.

얼굴은 완전 피다.

그 아래 가슴에는 얼굴에서 흘러내린 피가 적셔져 붉은 옷을 입은 것 같았다.

“허…허허헝(헛헛헛), 이…이렁켕 강는강(이렇게 가는가).”

쓰러질 듯 뒤로 두 검을 비틀거리며 물러나더니 다시 중얼 거렸다.

“후…후행능 없당(후회는 없다). 낭앙의 상이라는겅이 이렁는겅 아닝가(남아의 삶이라는게 이러는 것 아닌가) 성공잉등 실팽등 후회하지 않응것잉당(성공이든 실패든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낭 최성을 다행당(난 최선을 다했다).”

쿵!

거목이 마침내 쓰러졌다.

욱일승천의 기세로 일어 났던 것에 비해 마지막은 너무도 초라했다.

동천몽은 한 참 을 주시했다.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남궁천의 죽음은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이상하게도 알수 없는 안타까움이 피어난다. 동천몽은 그 이유가 뭘까 잠시 생각하다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아마 악연이 너무 질긴 때문이 아닐까 나름대로 생각했다.

“제때에 잘 와주었다!”

동천몽이 땅바닥에 떨어진 일목의 검을 주워 건네며 말했다.

강한자에게는 행운도 따른다. 만약 그때 일목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상당히 고전 했을 것이었다.

사천의 북쪽으로 가면 하늘을 찌를 듯한 개의 산이 앞을 막고 있다. 주위 산세가 험해서 그렇지 평지에 가져다 놓으면 능히 태산을 압도하고도 남을 위엄을 갖추었다고 이백은 평했다. 이 산이 바로 사천과 청해의 경계를 짓는 검문산이다.

“저곳이 제하궁입니다.”

제하궁이 내려다보이는 봉우리에 동천비가 우뚝 서 있었는데 옆으로 한 사내가 달라붙듯 서 있었다.

음처식이었다.

천랑사신에게 거두어져 그들의 진전을 이어 받았다. 그러나 타고난 지혜와 야망이 하늘을 가둘 만큼 컸기에 사부들을 향한 동천비의 제의를 자신이 앞장서서 받아 들였다.

그리고 지난 몇 개월 동천비가 지켜본 음처식은 대단했다.

무공은 사부들을 능가했고 전략과 지모는 하늘을 덮고도 남았다. 백만대군을 얻었다고 스스로 자평 할 만큼 음처식의 두뇌는 뛰어나 있었다.

“지금 저 안에는 백쾌섬의 측근들이랄 수 있는 인물들은 모두 모였습니다.”

“그래봤자 무덤 들어갈 날만 기다리는 늙은이들 아니냐?”

“늙은 생강이 맵습니다. 특히 저들의 목숨은 젊은 목숨과는 다릅니다.”

“무슨 뜻이냐?”

“목와북천의 산 증인들이자 백쾌섬의 정신적 지주이지요. 그중 일부는 친 부모처럼 백쾌섬을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죽여보십시오. 백쾌섬의 표정이 어떻겠습니까?”

단순히 몇 명 죽이는 것 이상의 심리적인 타격이 크다는 얘기였다. 외형을 보지 않고 속을 꿰뚫어 보는 안목까지 지녔다.

“그런데 아까부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느니라. 왜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이냐? 일부에서는 공격명령을 내려달라고 난리구나.”

“전쟁이란 편히 해야 하옵니다.”

“……”

“몰살을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한 자리에 모였을 때 이지요. 지금은 흩어져 있지만 잠시 후 술시가 되면 저녁을 먹기 위해 각자 처소 근처에서 무예를 수련하던 무사들이 몰려 들것입니다. 그때 치면 힘들이지 않고 몰살 시킬 수 있죠.”

“그래서 저녁 먹을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이냐?”

“기다리는 김에 조금만 더 기다리시지요. 뭣들 하느냐? 맹주님께 차 한 잔 대접 하거라.”

뒤를 돌아보고 소리치자 기다렸다는 듯 두 명의 여자가 나타나 간단히 이동식 탁자를 놓고 다기를 차렸다.

“지금 날 더러 맹주라고 했느냐?”

“머잖아 무림을 지배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이 맹주님이지요.”

“아직은 아니다.”

“조금 일찍 끌어다 쓸 수도 있지요. 장사꾼에게 선금이라는게 있다더군요. 미리 돈을 주는 것 말이죠. 그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 해주십시오.”

볼수록 마음에 쏙 든다.

음처식이 곁에 있는 한 천하 패업은 어려울 것 없다고 생각했다.

“드소서 맹주님.”

어느새 김이 피어나는 용정을 끓여 놓고 두 명의 시녀가 부른다.

오늘따라 맹주라는 호칭이 너무 마음에 든다.

“왜 잔이 하나 뿐이냐? 당장 음 군사 것도 준비하거라.”

음처식이 손을 내저었다.

“아…아니옵니다. 속하는 괜찮사옵니다.”

“아니다. 당장 준비해라.”

동천비의 단호한 명령에 두 시녀가 황급히 끓는 물에 용정가루를 넣고 우린다.

의자 또한 근처 바위를 통째로 옮겨다 놓았다.

두 사람은 찻잔을 놓고 마주 앉았다. 때맞춰 해는 서편으로 붉은 그림자를 만들며 떨어지고 있었고 검문산의 아름다운 골짜기로부터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허허!”

동천비가 웃었다.

차맛이 좋아 웃었고 기분이 좋아 웃었다.

이제야 말로 걱정거리가 없다. 얼마 전까지 무림인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했던 삶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도 우러러 볼 필요가 없어졌고 두려워 할 필요는 더욱 없어졌다. 이제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이루고 펼칠 수가 있었다.

삶이란 이런 맛에 사는가. 이런 기쁨을 얻고자 그토록 목숨을 걸고 천하 평정을 노리는가.

해가 서서히 검문산 제일봉 검천봉 너머로 떨어진다.

음처식이 손을 쳐들자 독두포가 날아왔다.

“사부님 당장 공격 준비를 해 주십시오.”

“알겠네. 군사.”

제자이지만 군사의 직책을 감안해 말투를 고치기로 했다.

독두포가 사라지고 두 사람은 남은 차를 마저 마셨다. 석양을 바라본 두 사람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이윽고 석양은 순식간에 검천봉 너머로 자취를 감추었고 봉우리 아래 제하궁은 금세 땅거미가 몰려들고 있었다.

해가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검천봉 상공으로 한 개의 별이 떠올랐다.

은빛의 별을 보며 시간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주위는 빠르게 어두어졌고 잠시 후 음처식이 벌떡 일어나 전음을 날렸다.

“동쪽 사부님 공격 하십시오.”

“서쪽 사부님도 남쪽 사부님도 북쪽 사부님 모두 공격 하십시오.”

천랑사신이 네 패로 나뉘어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음처식의 명령이 떨어지자 잠시 후 제하궁을 향해 수백의 무사들이 몸을 날렸다. 지난 시간 천랑사신이 천하를 정복하며 거두어들인 무사들이다. 강호이든 황실이든 인심은 강한자로 기울어진다. 끌어 들일 필요도 없이 제 발로 찾아와 수하되기를 자청한 인물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목숨 아까워 할 필요가 없다고 음처식은 생각 했다.

“으악!”

“크아악! 적이다.”

산아래로부터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고 거대한 불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저건 뭐냐?”

동천비가 불기둥을 보며 말했다.

음처식이 씨익 웃었다.

“속하가 특별이 불에 조예가 깊은 아이들 백 명을 불러 장원 곳곳에 불을 질러라고 했사옵니다. 불은 단순히 태우는 효과도 있지만 사람을 두려움과 패배의식 속으로 몰아 넣는 효과가 있사옵니다. 단순히 죽이고 죽는 싸움보다는 불을 지르면 적은 훨씬 더 당황하게 되어 있지요.”

불을 지르자 더욱 제하궁 무사들은 당황했고 흩어졌다. 잘 훈련된 무사일수록 위기에 처하면 단결하고 냉철해진다. 그러나 불은 제하궁 무사들을 순식간에 혼란 속으로 빠뜨렸고 한번 흐트러지기 시작한 질서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놈, 천재다!’

음처식을 바라보는 동천비의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지진이 일어난 듯 땅이 흔들 거렸다. 풀을 뜯던 야생짐승들도 놀라 꽁지가 빠져라 도망쳤고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들도 날개짓을 했다.

쿠쿠쿠쿵!

산은 갈수록 심하게 흔들렸다.

나무들은 태풍을 맞은 듯 흔들거렸고 땅의 진동을 견디지 못한 일부에서는 산사태가 났다.

쩌어억!

거대한 절벽이 갈라지고 있었다.

정확히 표현하면 절벽이 열리고 있다고 해야 옮았다. 오십장 높이의 거대한 절벽이 좌우로 열리더니 거대한 동굴 입구가 들어났다.

저벅저벅!

암흑의 무저갱 같은 동굴 속으로부터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발자국 소리는 규칙적이었고 일정했다. 발자국 소리가 점차 가까워 지더니 한 사내가 동굴 입구에 나타났다.

“오오! 대종사이시여.”

지켜보던 삼천목이 오체복지를 했다.

“대종사시여.”

뒤따라 대장로 백치성을 비롯한 세 노인이 무릎을 꿇었다.

잠시 저 아래 땅바닥에 엎드린 네 사람을 내려다보던 백쾌섬이 천천히 몸을 날렸다.

스스스!

계단을 밟듯 느리게 내려갔다.

잠시 후 땅에 내려선 백쾌섬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엎드린 네 사람 모두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의복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고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아 아직도 피를 흘리는 모습에 다그치듯 물었다.

“말해보아라.”

삼천목이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소…송구하옵니다. 속하가 무능하여 적에게 궁을 빼앗겼사옵니다.”

“적?”

“동천비가 기습을 해와 그만.”

“동천비?”

슈욱!

백쾌섬의 눈에서 한줄기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파파팟!

삼천목이 엎드린 지면 바위에 주먹만한 구멍 두개가 만들어졌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일찍이 눈빛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말은 있었지만 이건 그 보다 한 술 더 떴다.

네 사람은 감격했다. 백쾌섬이 마침내 흑도사상 누구도 이루지 못했다는 만사강체를 이루었음이 분명했다. 만사강체는 만사강기라는 가공할 무공을 터득하면 얻어지는데 전신이 돌덩이며 어기간한 검으로는 훼손 되지 않는다. 만사강체가 되면 눈으로 사람을 죽인다고 흑도실록에 내려온다.

“대공을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리옵니다.”

네 사람은 다시 크게 절하며 외쳐 말했다.

“동천비가 제하궁을 유린했단 말인가?”

제하궁은 안방은 아니다. 멀리 북방에 있는 본거지가 너무 멀어 임시로 세운 곳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무너졌다고 해서 크게 놀라거나 아쉬워 할 것 까지는 없었지만 어쨌든 임시지만 안방을 짓밟히자 기분이 좋지 않다. 더구나 대공을 완성하고 나오자마자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들으니 더욱 심사가 뒤틀린다.

“음!”

백쾌섬이 이를 물었다.

흥분하면 안된다. 예전의 백쾌섬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일희일비 할수록 가벼워 보이는 것이고 무겁게 움직여야 한다.

“모두 일어서거라.”

“대종사의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네 사람은 일어섰다. 백쾌섬은 네 사람의 몸을 보았는데 상처들이 얕지 않았다. 한 눈에 얼마만큼 처참한 싸움을 벌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어차피 놈도 피라미들만 이끌고 있다.”

그것은 제하궁에 있던 수하들 역시 피라미들이라는 의미였다. 즉 아까워 할 것 없다는 뜻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수하를 거느리는 수장으로서 너무 차갑고 냉정한 말 갔지만 잃어버린 상태에서는 과거를 빨리 잊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말이기도 했다.

“잘 듣거라. 전쟁은 숫자로 하는게 아니다. 피라미들이 아무리 많아 봤자 고래 한 마리를 당할 수는 없느니라.”

“지…지당한 말씀이옵니다.”

“옳습니다.”

“그러나 동천비가 본좌의 수하들을 죽인 것은 잊어서는 안되겠지.”

백쾌섬의 눈이 싸늘해졌다.

“삼천목!”

“하면하소서 대종사시여?”

“보고 하도록.”

“여기서 말입니까?”

“장소가 중요한 건 아니다. 요는 내용이지.”

삼천목이 가볍게 목례를 하고 말했다.

“가장 큰 소식은 남궁천의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백쾌섬이 크게 놀랐다.

“남궁천이 죽었단 말이냐?”

“호남의 장사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물론 목격자까지 확보 했사옵니다.”

“흉수는 누군가? 동천몽이겠지? 동천비 따위에 죽을 위인이 아니지.”

“그러하옵니다. 그를 따르는 수하들도 모두 도륙당했사옵니다.”

“훗훗! 남궁천이 죽었단 말이지.”

백쾌섬의 얼굴에 아쉬운 표정이 떠올랐다. 어쩌면 자신과 더불어 가장 큰 대립각을 세운 인물이었다.

타도 남궁천이 한때 자신의 목표였었다.

억압받은 흑도무림의 대종사로서 정도 무림의 수장인 그는 원수 이상이었다. 그래서 그를 어떻게 죽이고 흑도를 부활시킬 것인가에 시달리기도 했다.

비록 중간에 동천비와 동천몽이라는 가공할 변수들이 생기긴 했지만 아무튼 대공을 완성한 후 가장 먼저 남궁천을 찾겠다고 다짐했는데 한 발 늦었다. 비록 남의 손이지만 그가 죽었다는 것이 언뜻 실감 나지 않는다.

“그에 앞서 남궁천은 고토 회복차원이라는 미명하에 동영의 창송세가를 끌어 들였사옵니다.”

“동영을?”

백쾌섬의 눈이 빛났다.

닌자술이라는 특이한 기예를 지녔고 심성들이 표독하며 싸움에 임하면 결코 후퇴를 모르는 전사들로 알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대륙진출 야망이었다. 실패가 반복되는데도 그들은 틈만 나면 중원을 노렸다.

“나쁜 놈, 아무리 야망이 중요하기로서니 외세를 끌어들여 내 백성과 내 땅을 유린하겠다는 것인가.”

백쾌섬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남궁천, 남궁천이라. 훗훗!”

백쾌섬이 돌연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속이 후련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계속하라.”

“다음은 세력 판도인데 현재 중원은 동천비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가 양분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

“다각도를 그들의 정체와 목적을 알아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파악이 불가능 하옵니다.”

“수뇌는 누구냐?”

“수뇌 역시 안개 속에 묻혀 있사옵니다.”

백쾌섬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삼천목이 계속 말을 이었다.

“모든 정보를 동원해 정체불명의 집단과 수뇌를 추적 중에 있사옵니다. 아마 몇 일 안으로 가시적인 결과를 얻을 것으로 생각 되옵니다.”

“표달랍궁은 어떠느냐?”

“요지부동입니다. 돌아간 이후 일체 문 밖 출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백쾌섬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러자 삼천목이 물었다.

“왜 그러시옵니까?”

“이상하구나. 내가 아는 동천몽음 가만히 있을 친구가 아니다.”

“무슨?”

“바보가 아니란 뜻이지. 중원은 지금 확고하게 장악하고 힘을 구사하는 주인이 없다. 동천비가 상당부분 거머쥐고 있다고 해도 조금만 건드리면 쉽게 흔들릴 정도로 나약하다. 내가 동천몽이라면 이 좋은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

“하지만 포달랍궁은 세속의 욕망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불가 이옵니다. 설마.”

“그렇기 하지. 하지만 이것 한 가지를 알거라. 동천몽은 천상각의 후예이다. 작금의 싸움 한 중심부에는 천상각이 있었다. 피바람과 직접 연결이 된 그가 어찌 이 기회를 뒷짐만 지고 있겠느냐?”

“하면 혹시 정체불면의 집단이 포달랍궁의 또다른 모습이란 말씀이온지요?”

“내가 격은 동천몽은 무척 사납다. 물론 남이 자신을 건드렸을 때 사납지. 우리는 물론이고 무림맹은 분명히 천상각을 삼키려 했고 어쨌든 오늘날 무너뜨리고야 말았다. 다시 말 해 무림은 그를 자극한 것이다. 절대 가만 있을 친구가 아니다. 잘 살펴보거라. 어떤식으로든 움직일 것이다.”

“존명!”

잠시 장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팟!

백쾌섬의 눈이 빛을 발했다.

“혹시 그 여인에 대한 소식 알고 있느냐? 자정경 낭자.”

삼천목이 흠칫 했고 한쪽에 서 있던 백치성이 눈을 빛냈다.

“자정경 낭자라고 하면 흑수당의 후예로 무림쌍미 중 한 사람 아니옵니까?”

“소식은 들었느냐?”

“자세한 건 알지 못하옵니다. 다만 흑수당에 칩거한 채 두문불출 한다는 얘길 얼핏.”

“가자.”

“어딜?”

“흑수당을 가보겠다.”

“네엣?”

일행이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삼천목의 세 눈이 광채를 뿜었다.

제하궁이 괴멸되었고 수많은 수하들이 죽었다는 비극을 제 일보로 전했다. 필시 소식들 전하면 대공을 완성한 백쾌섬의 성격상 절대 가만 있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곧바로 동천비를 찾아 그의 목을 베어 제하궁 형제들의 죽음을 어루만져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가장 먼저 할 줄 알았던 복수 얘기는 없고 자정경을 찾아가겠다는 말에 당황했다. 그리고 인생의 경험이 풍부한 노회한 인물들답게 네 사람은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대공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찾아간다는 것은 대공을 연마하는 도중에도 무척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마음에 두지 않으면 절대 몸은 반응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움직이는 백쾌섬을 불안한 얼굴로 따랐다.

특히 자정경은 자신들이 알기에 동천몽과 사제지간이었다. 백쾌섬의 성격상 동천몽을 잡기 위해 자정경을 찾아가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인질 따위로 승부를 띄우려는 하찮은 생각을 할 인물이 아니었다.

네 사람은 굳은 표정으로 백쾌섬의 뒤를 따랐다. 안된다고 앞을 가로 막고 나서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남녀 관계의 오묘한 감정을 잘 알기에 안된다고 차마 앞을 가로막지 못한 채 네 사람은 뒤를 졸졸 따랐다.

흑수당은 과거의 성세를 되찾았다. 중원의 천상각이 궤멸되면서 본의 아니게 천하제일 상가라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서장 일부 상인들까지도 중원의 천상각을 거래했는데 요즘은 거꾸로 운남 사천 귀주 호남 섬서일부까지 흑수당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상인이란 가장 단단한 자본력과 신용도를 갖고 있는 상가와 거래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아얍!”

검풍이 바위 한귀퉁이를 자르며 사라진다.

“차앗!”

뾰족한 기합이 연신 터져나왔고 푸른 청강검이 선과 원을 그릴 때마다 정원석들은 비명을 모양을 바꾸었다. 성한 정원석이라고는 한 개도 보이지 않은 것을 보아 오랫동안 여인은 검법을 연마했음을 알 수 있었다.

슈우욱!

돌연 여인의 검이 우측을 향해 뻗어갔다.

우측에는 조그만 소롯길이 전각 뒤로 뻗어져 있었는데 외부로 통하는 길이었다.

“으헙!”

전각 뒤에서 소롯길을 따라 모습을 나타내던 자추동이 기겁했다. 여인의 검이 목젖에 바짝 들이대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네 이놈 이게 무슨 짓이냐? 이제 애비 목까지 베어 버릴 셈이냐?”

“난 또 누구라고?”

자정경이 쌀쌀 맞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자추동이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쯧쯧! 아예 홰를 쳐놨구만. 얼마나 비싸게 구입해 설치 한 돌들인데.”

박살을 내놓은 화원 곳곳의 정원석을 보며 혀를 찼다.

자정경이 방안으로 들어서더니 검을 한쪽 탁자에 올려 놓으며 말했다.

“웬일이세요. 연락도 없이.”

자정경이 묶은 머리를 풀어 헤쳤다.

“물 데워 놨느냐?”

한쪽에 서 있던 시녀가 대답했다.

“네 아가씨.”

자정경이 목욕을 하려는 듯 거침 없이 옷을 벗었다. 삽시간에 하체와 가슴을 가린 천만 남기고 완전한 알몸이 되었다.

“으음!”

자추동이 가벼운 신음을 흘렸다.

자정경의 아랫배가 눈에 띄게 불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경아.”

시녀가 수건과 갈아 입을 새 옷을 들고 앞장을 섰고 뒤를 따르던 자정경이 돌아섰다.

자추동이 말했다.

“네가 한 번 찾아 가보는게 어떻겠느냐?”

“일 없어요.”

쾅!

방안이 울릴 정도로 욕실문을 세차게 닫고 사라졌다.

자추동이 길게 한숨을 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지금 자정경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동천몽과 헤어진지 반년 이 넘었는데도 단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찾아오기는 커녕 서신 한 통 없었다. 그래서 지금 자정경은 무척화가 나 있었고 화풀이로 집안에 있는 정원수와 정원석들을 닥치는 데로 베고 있었다.

눈을 뜨면서부터 부은 얼굴은 하루 해가 떨어지고 잠지라에 들때까지 부어 있었다. 결국 부어 있는 자정경의 얼굴을 보다못해 동천몽을 직접 찾아가보라는 권유를 하기 위해 찾아 온 것이다.

“아버님!”

자청단이 들어섰다.

한때 백쾌섬의 꼬임에 넘어가 부친의 자리를 넘봤다가 혼이 났다. 그 일로 멀리 원국으로 보내졌다. 안면이 있는 원국의 친구에게 보내졌는데 낯선 곳에서 적지 않은 고생을 한 탓인지 세상을 냉철하게 보았고 이쯤하면 됐다 싶어 데려온 것이었다.

“무슨 일로 그러느냐?”

“손님이 찾아왔는데 글쎄 골치가 아프게 됐습니다.”

자청단이 이마를 찡그렸다.

“백쾌섬이.”

“백쾌섬?”

“핫핫핫! 오랜만에 당주의 목소리를 듣는구려?”

백쾌섬이 불쑥 들어서자 자추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오랫만이구려?”

“들어오면서 보니 천하의 모든 상인들은 전부 흑수당에 몰려 있더군요. 이제야 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시대입니다.”

자추동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나가십시다.”

앞장서서 밖으로 나왔고 돌아서던 백쾌섬이 욕실문을 힐끔 쳐다보았다. 안으로부터 물방울 튕기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두 개의 찻잔을 놓고 마주앉았다. 자추동은 시종 긴장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백쾌섬이 자신을 찾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하지 못했다.

자신과 동천몽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백쾌섬은 적이다. 휘하에 적지 않은 무사들이 있다. 또한 동천몽이 보내준 포달랍궁의 무사 십여 명도 있다. 하지만 백쾌섬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들은 식은 죽 먹기로 해치워 버릴 것이다.

“차 맛이 좋습니다.”

백쾌섬이 진정으로 흡족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감사하오.”

평소 그토록 줄줄 나오던 말이 오늘따라 먹통이었다. 왠지 할 말이 없었다.

“어떻게 오셨소?”

급기야 정곡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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