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68화 (68/71)

제5장 절대중원

장인 또한 크게 한숨을 내쉬며 한쪽을 쳐다보았다.

창송이 사라진 반대쪽 저자거리 위로부터 동천몽이 걸어왔다. 두 사람은 동천몽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장인은 이곳에서 이십 년째 검을 파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조금전 동천몽이 불쑥 나타나 해무삼의 검을 내 밀고 창송이 밥을 먹었던 객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창송이 잠시 후 이곳을 지나가면 큰 소리로 이 검을 팔고 옆에서 가짜 고뿔 약을 팔던 상인에게는 행인처럼 복장을 하고 검을 구입하라는 것이었다. 그 댓가로 은 자 한 냥씩을 주겠다고 했다. 식은 밥먹기 였기에 혼쾌히 응했는데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 무슨 일 없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동천몽이 말은 했지만 조금 전 겁이 더럭 났던 것은 사실이었다.

“고생했소.”

이미 약속한 은자는 받았다.

동천몽이 어깨를 토닥여 주었고 창송이 사라진 곳을 웃음띤 얼굴로 쳐다보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한 것 까지는 성공했다.

남은 건 어떤 형태로 창송이 삼백 명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만드느냐는 것이었다.

해무삼의 검을 그냥 전해주어도 놀라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법 보다는 창송이 좀더 두려움과 공포를 느낄 수 있는 방법을 동천몽은 찾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길거리에서 해무삼의 검을 파는 것이었다. 자신의 왼팔이라고 할 만한 부하의 검이 싸구려 장사꾼들 속에 나뒹굴고 있는 모습은 단순한 죽음 이상의 소스라칠 충격이 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하는 찾을 길 없는데 그가 생전에 목숨처럼 여겼던 검이 저자거리에서 매매되는 광경을 목격한다면 창송의 마음을 강하게 압박하리라 생각 한 것이었다.

창송이 사라졌다는 보고에 남궁천은 이마를 찡그렸다. 얼마전까지 해무삼을 비롯한 신룡단을 찾아 나선 창송이었다. 자신도 하루 그와 같이 신룡단을 찾아 나선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모조리 죽었으리라고는 추호도 생각 하지 않았다. 자신의 강호 경험에 비춰 삼백 명이란 절정의 고수가 먼지 한올의 증거도 남기지 않고 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창송이 사라졌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가 거느린 일천 오백 명이 넘는 수하들까지도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단 숨에 창송의 본거지인 단계산장으로 넘어갔지만 새로 끌어 들인 총관 종규봉말고는 단 한명도 없었다.

남궁천의 거처는 장사에 있었다.

서로 본거지를 나눈 이유는 물론 적의 공격을 피하려는 계산이었다. 또한 자신이 거느린 중원의 무사들과 창송세가의 무사들과 잦은 다툼이 일어났다.

남궁천에게는 적지 않은 수하들이 몰려들었다. 절강과 귀주 호남을 장악하면서 일대에서 활동하던 토착무사들과 무림맹과 목와북천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군소 집단들이었는데 이들이 걸핏 하면 창송세가의 무사들과 언쟁을 했고 싸움을 벌였다.

섬놈들이라고 약을 올리고 무시했으며 창송세가들이 참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겸사겸사 본거지를 따로 두기로 한 것이었다.

단계산장에서 돌아온 남궁천에게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창송과 수하들 모습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한데 남궁천을 놀라게 한 건 그들이 동영으로 돌아가기 위해 항주 인근의 포구에 있는 자신들 배에 있다는 것이었다.

남궁천은 곧바로 그들이 타고왔던 배를 향해 날아갔다.

보고대로 두 척의 거대한 배는 돛을 올리기 직전이었다.

파파팡!

불어 오는 바람에 돛이 팽팽하게 부풀어져 있었고 배꾼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창가주 이게 도무지 무슨 날벼락이오? 동영으로 돌아가다뇨?”

선실로 찾아 들어간 남궁천이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창송은 차를 마시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답답한 남궁천이 물었다.

“무슨 일이오? 내가 섭섭하게 한 것 있소이까? 섭섭한 것 있으면 말씀을 하시오. 당장 사과하고 고치겠소이다.”

창송이 찻잔을 내리고 남궁천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의 눈이 크게 미세한 떨림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두려움을 느꼈을 때 보이는 시선이었다.

“가주.”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소. 난 어서 빨리 중원을 떠나고 싶을 뿐이오.”

“왜 그러느냔 말이오? 왜 떠나려 하는 것이오? 말좀 해보시오?”

남궁천의 목소리가 커졌다.

창송이 말했다.

“중원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오?”

“무슨 일인지 속 시원하게 말 해보란 말이오?”

창송이 차를 한 모금 떨리는 손으로 마시더니 말했다.

모든 얘기를 들은 남궁천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정말이오. 신룡단의 삼백이 모조리 죽었다는게?”

“그렇소. 죽었소.”

그리고 뒤쪽 구석에 세워 놓은 해무삼의 검을 꺼내 들었다.

“이것이 그 증거이오?”

“흉수는 누구요?”

“모르오.”

“흉수를 모르다니?”

“맹주께서는 천하에 심룡단 삼백을 흔적도 없이 죽일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보시오?”

남궁천이 입을 닫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팟!

하지만 잠시 후 눈을 빛냈다.

“왜 그러시오? 생각 해 냈소?”

“가능성 있는 사람이 있긴 하오만 흔적도 없이 죽인 다는 것은 불가능 하오.”

“어째든 그가 누구요?”

“대법왕이오.”

“대법왕이라면 혹시 동천몽이라는 천상각의 후예를 말하는 것이오?”

“그렇소. 하지만 그는 아닐 것이오. 힘은 있으나.”

“어떻게 생겼소?”

“흐음! 뭐랄까? 이런 표현하기 뭐하지만 잘생겼소. 적이지만 잘생긴 건 잘생겼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니겠소?”

“또?”

“키가 크오. 내 말은 당당하다는 얘기오. 멀대처럼 하늘로 쑥 솟아 오른 그런 키가 아니란 얘기오.”

“눈빛은 어떻소? 사람은 눈빛이 그 사람의 전부를 말하오.”

“가까이서는 딱 한 번 밖에 보지 못했소. 물론 십여 세쯤 되었을 텐데 투명하리 만치 깨끗했소. 하지만 이상하게 그의 눈을 오래 볼 수 없었소. 괜히 주눅이 든다고나 할까?”

“십여 세 소년에게서 주눅이 들었단 말이오?”

창송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주가 되고 나서 딱 한번 천상각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물론 동오룡의 정식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었는데 그 화려한 초대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당대제일부호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줄줄이 나오는 음식이라는 것이 고금의 통털어 최고라 할만한 것들이었다. 특히 전설로만 전해 듣던 음식이 눈앞에 나타나 있을 때는 자신의 허벅지까지 꼬집어 꿈이 아닌지 확인했었다.

황제도 먹어보지 못했음직한 초호화 음식과 최고의 미녀들로 선발된 무희들 아래서 보낸 두 시진여의 만찬은 꿈결이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릿해져 오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만찬이 끝나고 돌아오는 날 한 대의 마차가 자신을 따랐다. 자신은 시위 무사 십여 명과 마차를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마차냐고 물었다.

동오룡은 신임맹주에게 드리는 조그만 선물이라고 했고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마차의 휘장을 연 남궁천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마차에는 금화가 들어 있었다. 은화와 금화는 전표나 여타 보물들과 달리 아무리 많이 갖고 있어도 뒤를 좇길 위험이 없다. 그래서 황실의 관료들이 가장 즐겨 받는 뇌물 수단이다. 두 마리의 말이 헉헉 거리며 끌 만큼의 금화는 대략 백만 냥쯤 되었고 그때 처음으로 동오룡을 다시 보았다. 장사꾼이지만 무척 대담하고 그릇이 크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 그가 천상각에서 가장 놀랐던 것은 화려한 음식도 마차 가득 실린 금화도 아니었다.

금화를 가득 실은 마차를 끌고 천상각 후문을 빠져나오는데 한 소년을 만났다. 정문을 피한 것은 주위 이목을 피하기 위한 동오룡의 배려였는데 소년은 물끄러미 마부석에 앉아 시위이자 마부로 변한 수하와 나란히 앉아 코노래를 부르는 자신을 쳐다보았다.

어둠이 짙었는데도 눈빛은 별빛 마냥 반짝 거렸고 자신도 모르게 혼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 놀라운 현상에 이름이 무어냐고 물어봤지만 소년은 가벼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미소(微笑)!

그것은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십여세 소년의 자신을 쳐다보며 웃는 웃음은 취기를 단번에 몰아 낼 만큼 오싹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고 훗날 그 아이가 말썽쟁이 천상각의 막내 아들이고 오늘날 자신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동천몽이라는 것을 알았다. 운명은 교묘히 얽혀 돌아갔다.

“그 말고는 가주를 두려움에 빠뜨릴 만한 인물은 강호에 없소. 그러나 그는 아닐 것이오. 그가 나와 가주의 사이를 알리 없기 때문에.”

“아무튼 미안하게 되었소. 우린 이만 돌아가겠소.”

“가주 정말 가시려오?”

“미안하오. 한 가지 이번 기회에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대륙은 대륙 사람에 의해 다스려져야 한다는 것이오. 난 그저 섬에 갇혀 고기나 잡으며 한 세상 보내겠소.”

세상은 넓었다. 동영에서는 자신이 최고였고 원하는 것은 뭐든지 이룰수가 있었다. 그런 절대적인 위엄은 중원에서도 변치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처음 몇 달은 예외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천외천, 하늘 밖에 하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삼백 명을 하루 아침에 감쪽같이 없애 버리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산다는 것은 악몽이었다. 그런 사람은 피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남궁천의 안색이 흑빛으로 변했다.

지난 여섯 달 동안 창송세가의 힘으로 얻은 중원은 약 삼할이다. 삼할을 장악하며 밑으로 많은 인물들이 몰려 들었다. 물론 자신의 명성때문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창송세가의 막강한 힘이 작용했음을 부인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창송세가가 중원에서 떠난다면 자신의 힘은 보잘것이 없어진다.

팟!

남궁천의 눈이 광채를 발했다.

여태 그 생각을 못한 것이었다. 창송세가를 건드린 것은 자신을 고립시키기 위한 전략이 분명했다. 상대가 동천몽이든 백쾌섬이든, 물론 동천몽일 가능성이 높지만 어쨌든 적은 자신을 노리고 창송세가를 건드린 것이다. 그리고 그 계책은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다.

“가주!”

한 번 더 매달려 보았다. 자신에게 창송세가의 힘이 없다는 것은 몰락이었다.

“마음을 돌려주시오.”

“없었던 일로 합시다. 난 중원에 온 적도 없고 맹주께서는 동영에 온 적도 없소. 그럼.”

창송이 돌아앉았다.

나가달라는 노골적인 명령이었다.

남궁천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해졌다. 옛날 성질 같았으면 당장 쳐 죽였을 것이다. 자신의 무공이 더 높지만 범선에 있는 수많은 수하들을 물리친자신까지는 없었다.

“개자식!”

남궁천의 입에서 욕이 터져나왔다.

홱!

창송이 돌아 앉더니 놀란 눈으로 쏘아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소이까? 날 더러 개자식이라고 했소.”

“겁쟁이 섬놈. 그래 잘 가라.”

“말 다했소?”

“오냐. 싸구려 인간.

남궁천이 욕을 바가지로 뱉고 방을 나왔다.

창송이 등뒤에서 말했다.

“매…맹주의 그릇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단 말이오. 허어! 실망…실망이오! 이런 젠장할.”

창송 또한 화가 치솟은 듯 벌떡 일어나더니 한쪽에 있는 주전자의 냉수를 들이켰다.

“막겠습니다.”

아오가 다가왔다.

“명령을 주십시오. 주군을 모욕한 죄를 묻겠사옵니다.”

창송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씩씩 거렸다.

하지만 붙잡으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남궁천을 사로잡으려면 자신 또한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한다. 더구나 여긴 중원이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자신과 남궁천의 싸움이 붙으면 이곳 사람들 모두 그의 편을 들것이었다.

“됐다!”

분하지만 참는 것이 이롭다.

창송인 터져나오려는 화를 꾹 눌러 참고 밖으로 나갔다.

배는 막 부두를 떠나고 있었는데 갑판 위에서 찬바람을 쏘이자 기분이 조금 가라 앉았다.

‘그럴만도 하지!’

창송은 나직한 실소를 터뜨렸다.

자신의 꿈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게 되었으니 누군들 흥분하지 않겠는가.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갑판 위에 있던 수하 몇이 자신이 나타나자 모두 자리를 피했다. 아오인 줄 알고 돌아보았는데 낯선 흑의사내 한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더구나 복장이 동영 무사가 걸치는 욕의가 아니다.

창송의 안색이 굳어졌다.

다가오는 흑의사내는 외부인이다. 그런데 소란이 없었고 보고가 없었다는 것은 흑의사내의 잠입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무공이 수하들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을 만큼 고절하다고 봐야 했다.

사내는 다가오더니 자신의 일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나란히 섰다. 창송은 사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파파팡!

거센 바람에 돛이 찢어질 듯 커지며 배는 속도를 높였다.

“혹시!”

창송의 눈이 빛을 뿌렸다.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내 수하 삼백 명을 흔적 없이 삼켜버린 분이시오?”

동천몽이 바다를 보며 말했다.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알아차리다니 제법이군.”

“으헉! 다…당신이 그럼 대법왕?”

동천몽이 돌아보며 웃었다.

“남궁 맹주가 말해 주었나 보군?”

창송이 뻣뻣한 신색으로 동천몽을 살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절정의 고수라는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육식귀원을 지나 반로환동의 경지란 말인가’

반로환동이란 늙은이가 아이로 변하는 것을 말하지만 그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그중 하나가 강함을 넘어 유를 지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 또한 반로환동, 또는 육식귀원이라 할 수 있다.

“맞소. 내가 당신 수하 삼백을 소리 없이 삼킨 장본인이오.”

내가 흉수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분노나 복수심 따위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과 감동이 섞인 묘한 기분이 온 몸을 싸고 돌 뿐이었다.

과감히 적진 속으로 들어와 자신의 실체를 밝혔다는 것은 오직 한가지만의 해석이 가능했다.

자신있다는 것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배를 벗어 날 수도 있고 자신들을 모조리 죽일 수도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세속의 존함이 동천몽이고 천상각을 사가로 두었다고 들었소이다.”

“많이 아는구려.”

“외람된 질문이지만 한 가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말을 해 놓고 창송이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모르게 존칭이 흘러나왔다. 적이자 나이 어린 사람에게 완전히 제압당하지 않고서는 나타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것은 의지와는 상관없는 본능이 이미 무릎을 꿇었다고 봐야했다.

“내 수하 삼백을 삼킨 이유가 무엇입니까?”

“뻔하지 않겠소?”

“남궁천 맹주를 고립 시키려고?”

동천몽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만약 동영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았다면 어쩌려고 했소이까?”

동천몽이 웃음을 지었다.

“하는 수 없지요.”

“죽이겠다는 말씀이오?”

“사람들은 내가 중놈이 되었다고 마음까지 중놈이 된 줄 알고 있소. 거듭 말하지만 소주의 개고기는 영원이 내 가슴속에 담겨져 있소. 울컥 하고 화가 폭발하면 나오지요. 아마 가주께서 가지 않았다면 소주의 개고기 성질에 비춰 동영의 본가까지 짓밟았을 것이오.”

흠칫!

창송의 눈이 커졌다.

“가주는 아주 현명한 결단을 내린 것이오. 그런 지혜라면 향후 일백년은 더 동영에서 큰 소리치는 가문으로 살아가겠소.”

칭찬인듯 들리면서도 비아냥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인가.

“주…주군 놈은 누굽니까?”

아오가 동천몽을 발견하고 놀라 다가왔다.

동천몽이 아오를 돌아보며 웃었다.

“충직하게 생겼군.”

“네놈은 누구냐? 누군데 감히 본가의 배에 올라 있느냐? 썩 정체를 밝혀라.”

동천몽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 번만 더 나에게 이놈 저놈 하면 혀를 뽑아주겠다. 아오.”

“내…내 이름을 어떻게?”

“너에게 홀어머니와 여동생이 한 명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느니라.”

아오의 입은 더 이상 말할 수 없을 만큼 쩍 벌려져 있었다.

동천몽이 창송을 향해 말했다.

“당신의 현명한 판단이 창송세가의 팔백년 역사를 잇게 했소.”

“본가의 역사까지 어느새?”

휘익!

동천몽이 바다로 뛰어 들었다.

“엇!”

“무슨 짓!”

창송과 아오가 화들짝 놀라며 뱃전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동천몽이 물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이…일위도강.”

“초상비?”

두 사람 모두 서로 다른 말을 했다.

“아니다!”

이번에는 같이 외쳤다.

일위도강과 초상비와 비슷하지만 두 개의 신법이 아니었다. 동천몽은 평지를 걷듯 천천히 멀어져갔다. 입을 벌린 채 한 참을 바라보던 창송이 조용히 숨을 죽이며 뱉었다.

“시…신이다. 난 오늘 신을 보았다.”

동천몽이 펼쳐 보인 신법은 자신으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가공할 경지였고 모습만 사람이지 분명 신이었다.

물 위를 걸어가자 부둣가에서 잡은 고기를 말리고 그물을 손보던 어부들이 모두 벌떼처럼 일어나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들도 무림인들이 펼치는 신법을 적지 않게 보았지만 물 위를 평지 걷듯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부둣가에 올라서자 사람들이 경악의 시선을 던졌다.

동천몽은 빙그레 웃음을 짓고 부두를 벗어나 주위를 살폈다. 마치 뭔가 숨겨 놓은 물건을 찾는 것 같았다.

멈칫!

동천몽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관도가 시작되는 입구 소나무 한 그루가 부러져 있었다. 가까이 사보니 허연 속살이 드러나 있었고 송진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 부러진 지 얼마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동천몽이 부러진 소나무를 따라 산속으로 접어 들었고 한 참을 가자 이번에는 거대한 고목 세구루가 서 있었는데 가장 아래 두툼한 가지가 일제히 부러져 있었다.

‘임단호(林斷號)’

나뭇 가지는 일목이 부러뜨려 놓은 것이었다. 그것은 배교 고유의 신호술이었다.

임단호를 불리는데에는 나무와 바위 숲으로 흔적을 남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천몽은 남궁천이 창송의 배를 가로막으리라는 것을 읽었다. 그래서 그가 돌아갈 때 뒤를 밟으라고 일목에게 명령을 내려 놓았다. 물론 부두에서나 배에서 그를 잡을 수 있었지만 그의 본거지를 없애야 했기 때문이었다.

동천몽은 신호를 따라 가며 신법을 펼쳤다.

중간 중간 구분하기 쉽게 나뭇가지나 낫으로 벤 듯 방원 일장 정도 넓이의 풀들이 쓰러져 있었다.

장사는 소상강과 동정호를 끼고 있어 각지에서 몰려든 유람객들이 들끓는다. 임상(臨湘)이라고도 부르는 호남제일의 도시인데 부두를 떠난지 이틀만에 동천몽은 장사에 도착했다.

무미선사는 중간에서 천룡구십구불에게 동천몽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떠났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도심에 들어와서도 배교의 신호술 임단호를 곳곳에 남겨져 있었다. 담벼락에 낙서하듯 사람이름을 써놓기도 했고 길바닥을 움푹 파 놓아 신호하기도 했다.

동천몽이 한 참 신호를 따라 움직일 때 일목이 나타났다.

“대법왕님.”

일목이 나타났다는 것은 남궁천의 도착지가 이 근처라는 의미였다. 예상대로 일목은 동천몽을 데리고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외곽으로 빠졌다.

그리고 한 채의 장원이 세워져 있는 야트막한 언덕배기를 가리켰다.

“저곳으로 들어갔사옵니다. 소승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저 장원은 대화장원이라는 곳으로 장사 제일의 상인 막천풍의 집이더군요.”

막천풍은 동천몽도 알고 있었다.

면화와 비단으로 입지를 굳힌 거상이다. 이따금 천상각을 방문하면 부친과 술잔을 나누는 것을 두어 번 목격했다. 물론 개인적인 친분이나 안면은 전혀 없었다.

“남궁천의 휘하에는 오백여명의 무사들이 있사옵니다. 하지만 절정급은 몇 되지 않사옵니다.”

이미 남궁천이 데리고 있는 무사들의 숫자와 무공의 면면까지 파악해 놓았다.

잠시 설명을 듣던 동천몽이 한쪽에 있는 바위에 주저 앉았다.

일목이 눈썹을 보았다. 당장 쳐들어가야 정상인데 동천몽이 느긋하게 자리를 잡고 앉자 궁금했다.

하지만 나름대로 속뜻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다렸다. 반각이 지날 쯤 갑자기 덕배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덕배선사가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멀지 않은 곳에 천룡구십구불이 있다고 봐야했다.

“대법왕님을 뵈옵니다.”

“저곳을 둘러 쌓거라.”

“존명!”

덕배가 신속히 사라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동천몽이 물끄러미 장원을 쳐다보며 중얼 거리듯 말했다.

“한 놈도 빠져나가서는 안된다.”

신룡단과 싸움으로 손실된 천룡구십구불은 다시 보충 되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대화장 앞으로 다가갔다. 예상대로 경계는 삼엄했다. 입구를 지키는 무사가 두 사람을 날카롭게 살피더니 물었다.

“신분과 방문 목적을 밝히시오.”

동천몽이 말을 하려들 때 일목이 나섰다.

“닭이 묻는데 어찌 소가 대답할 수 있겠사옵니까?”

멈칫!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소잡는 칼로 어찌 닭을 잡으려느냐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닭이 묻는데 소가 대답할 수 있느냐는 말은 처음이었다.

일목이 이해를 시키려는 듯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놈들은 닭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닭은 남궁천이고 이놈들은 병아리죠. 그리고 대법왕님은 황소입니다. 황소의 체면이 있지 않겠습니까?”

피식!

동천몽이 웃음을 지었다.

갈수록 일목의 구담(口談)이 발전하고 있었다. 동천몽은 모른체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조…조금전 뭐라고 했느냐? 다시 말해보거라.”

일목이 남궁천을 닭에 비유하고 자신들을 병아리에 비유한 말을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들었던 듯 싶었다. 확실하지 않기에 화를 내지는 못하고 확인하려 들고 있었다.

일목이 당당하게 말했다.

“다시 말할테니 잘 듣거나. 너희는 병아리고 남궁천은 닭이라고 했느니라. 왜 내 말이 불쾌 하더냐?”

“이 새끼.”

생긴것 만큼이나 두 무사의 성격도 급했다.

불같이 화를 내더니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고 달려들었다.

사실 이곳에 남궁천이 묵고 있다는 사실은 극비였다. 적이 많고 힘이 아직은 약한 남궁천으로서는 자신의 본거지를 밝힐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목의 입에서 남궁천이란 말이 흘러 나왔을 때 두 경비무사가 조금만 냉철했다면 정체를 의심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지나치게 빨리 흥분했고 그것이 남궁천의 몰락을 더욱 빠르게 재촉했다.

콰아앙!

일목의 검과 두 사람의 검이 충돌하고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컥!”

“흑!”

먼지 속에서 두 경비무사가 비틀 거렸는데 안색이 창백했다. 내상을 입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두 무사가 경악의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일목의 검이 허공에 섬광을 뿌렸다.

촤악!

툭!

톡--데구르르!

두 사람의 목이 몸에서 분리 되었다.

두 사람은 문을 향해 다가들었다. 육중한 문을 닫혀 있었는데 일목이 일검을 내려치자 그대로 갈라졌다.

쿠쿵!

문이 쪼개지는 소리에 안쪽 초소의 문이 열리더니 다섯명의 무사들이 뛰쳐나왔다. 그들이 적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검을 뽑으려 들었을 때 이미 일목의 검은 살기를 뿌리고 검집에 들어갔다.

철컥!

잠시 살아 있는 사람처럼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일제히 목이 잘려졌다.

“난 일보러 가야겠다.”

싸우는 소리에 남궁천이 도주를 할 수도 있었다. 그의 도주를 막기 위해 천룡구십구불을 밖에 세웠지만 조심할수록 좋았다. 이번에도 놓친다면 아마 두 번 다시 잡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소승은 걱정마시고 볼일 보십시오.”

일목이 신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동천몽이 지켜보고 있으면 마음대로 죽일 수가 없었다. 간단히 목을 베는 것도 죽이는 것이지만 여러 형태로 죽여보고 싶었다.

“그럼 소승이 먼저.”

일목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더니 가장 가까운 전각으로 뛰어들었다. 잠시 후 전각쪽에서 비명과 굉음이 들려나왔다.

“적이다!”

뎅뎅뎅!

순식간에 비상종이 울렸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전각으로 몰려가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좀 더 편히 가도록 해주기 위한 일목 나름대로의 방법이었다. 즉 자신이 적의 시선을 받는 틈을 이용해 편히 남궁천을 찾아가라는 뜻인 것이다. 구담에 이어 일목의 잔머리는 갈수록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동천몽은 대로를 포기하고 화원 사이에 난 소로를 택했다.

“도대체 적이라니 무슨 소리지?”

“적이니까 적이라고 소리치는 것 아니겠나?”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적이 누구냐는 얘기야? 적도 정체가 있을 것 아닌가?”

“가면 밝혀 질것을 자넨 뭐가 그리도 궁금한가.”

맞은편에서 다투듯 큰소리로 말하며 달려오던 두 사내가 동천몽을 발견했다.

멈칫!

얼른 알아보지 못했는데 물쑥 물었다.

“자…자넨 어디 소속인가? 적이 침입했다는데 어딜 가는가?”

동천몽의 눈이 빛을 뿌렸다.

어중이 떠중이 긁어 모을 때 생기는 폐단이 지금 발견되고 있었다. 독립적인 한 문파를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긁어 모으다보니 이들 또한 서로의 얼굴을 모르고 있었다.

“적 하나 침입했다는데 뭘 그렇게 소란들인가? 난 내 볼일이 있네.”

동천몽이 그냥 지나쳤다.

두 사내가 잠시 서서 생각 하는 눈치를 보이더니 자신들끼리 주고 받았다.

“한 놈 침입했는데 비상종까지 치며 이 난리란 말인가? 에이 우리도 돌아가세.”

“하긴!”

두 사내는 진짜로 걸음을 돌려 자신들 갈 곳으로 가고 있었다.

동천몽은 조그만 호수를 지나쳐 송림이 우거진 곳을 관통했다. 대략 백마장 이상 움직였고 십여 명의 사람을 만났는데 누구도 경계하거나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훗훗!’

동천몽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남궁천의 처한 처지를 잘 말해주고 있었다.

뚝!

송림을 벗어난 동천몽의 걸음이 세워졌다.

동천몽의 시선이 한 채의 전각을 주시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올라오며 아홉 채의 전각을 지나쳤다. 물론 그 안에 거주하는 인물들의 면면은 밖에서도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었고 남궁천으로 느껴지는 기세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왕각(王閣)이라는 현판이 걸린 전각은 달랐다. 안으로부터 강렬한 열기가 피어났다. 그것은 고수가 안에 있다는 뜻이었다.

동천몽이 천천히 다가갔다.

예상대로 화원 속에서 두 명의 경비무사가 뛰어나왔다. 아홉 채의 전각을 지나쳤지만 어디에서도 경계무사들의 모습은 있지 않았다.

“누구시오? 신분을 밝히시오?”

“같은 식구들끼리 뭐하는 것인가?”

동천몽이 워낙 근엄하게 나가자 멈칫 거렸다.

그러자 처음과는 달리 조심스럽게 물었다.

“알다시피 이곳에는 맹주님이 계시오. 우리식구라도 절차상 확인을 해야 하오.”

동천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난 동천몽이라고 하네. 대법왕이라고 더 잘 알려져 있지.”

“도…동천몽.”

“이런, 적 아냐.”

두 사람이 깜짝 놀라며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동천몽이란 말에 두 사람은 얼어 붙었다.

“이…이놈.”

“죽엇!”

공격을 했지만 자신이 없다.

동천몽은 힐끔 전각을 쳐다보았다. 이미 자신의 존재를 느낀 듯 전각 안에서 뿜어나온 기세가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퍽!

동천몽이 일장을 뻗자 두 무사는 비명을 지르며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소란에 전각 주위에 숨어 있던 무사 일곱명이 모두 달려와 앞을 막았다.

화아악!

동천몽이 손을 뻗자 강한 장력이 일곱 사내를 향해 뻗어갔다. 각자 기합을 지르며 검을 뻗어 대항했지만 역부족이다. 비명이 소낙비처럼 쏟아지며 모두가 화원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동천몽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왕각이라는 이름답게 화려했다. 바닥은 발목까지 빠지는 고급 양탄자였고 복도 좌우 벽으로는 야광주중 최고라는 취와석으로 만든 십이지신상이 빛을 뿌리고 있었다. 열두 가지의 동물이 붉은 광채를 뿜어내는 복도는 마치 선경에 들어서는 느낌을 주었다.

뎅뎅뎅!

잠시 끊겼던 종소리가 다시 들렸는데 처음보다 훨씬 급박했다. 사태가 훨씬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나무에서 오동특유의 향기가 뻗어나왔다. 나무의 무늬 또한 파도가 치는 듯 사방으로 퍼졌는데 상당히 돈을 들인 문임을 알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남궁천이 거처이지만 그 전까지는 막천풍이 묵었으리라.

삐걱!

문은 의외로 간단히 열렸다.

흠칫!

방안으로 들어선 동천몽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방안은 눈을 뜰 수조차 없을 만큼 화려했다. 천장에는 산지인 운남에서도 귀하게 대접받는 제옥액을 칠했다. 제옥액은 제옥목이라는 희귀한 나무에서 뽑은 진액으로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는데 오래동안 마시면 불로장생한다고 전해온다. 사면 벽은 옥골지(玉骨紙)를 발랐다.

옥골지는 투명한데다 방수효과가 커 고관대작들이 그 안에 물고기를 많이 집어넣어 감상단다. 이곳 또한 분홍빛 연자어를 넣어 사면 벽속을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바닥은 복도에 깔린 것과는 비교가 안되는 제왕금이고 남궁천이 앉아 있는 의자는 백호피가 깔려 있었다.

“……”

“……”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고 실내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헛헛! 어서오게나.”

남궁천이 일어나며 웃음을 지었다.

겉은 멀쩡하고 여유롭다. 하나 눈 좌우 깊숙한 곳의 흰자위는 파장을 일으킨다.

자신의 모습이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강한 느낌이 든다는 반응이다.

“반갑소. 맹주.”

“맹주라. 핫핫핫! 본좌가 맹주였던가?”

자부심 담긴 웃음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천몽은 자조라고 생각했다. 덜렁 혼자 앉아 있는데 무슨 얼어 죽을 맹주냐는 자신에 대한 비아냥이 섞여 있다.

“컸군, 세월이 유수와 같다더니 그때 그 소년이 자네란 말인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대법왕이라고 하면 말을 가렸고 예의를 차렸다.

그러나 남궁천은 서슴없이 자네라고 부른다.

동천몽은 빙긋 웃었다. 천하의 효웅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을 쩌올렸다.

“참으로 인생사란 알 수 없는거야. 따지고 보면 자네와 내가 이럴 처지까지는 아닌데 말일세?”

동천몽이 눈을 크게 떴다.

남궁천의 말을 헤아리지 못했다. 이럴 처지가 아니라면 사돈지간이라도 된단 말인가. 동천몽이 열심히 말뜻 을 헤아리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남궁천이 말했다.

“서로 칼을 맞대어야 할 만큼 피의 원한은 없다는 얘길세. 내 말이 틀렸는가?”

동천몽이 웃었다. 말뜻을 헤아린 것이다.

“맞소.”

“고맙네. 자네도 순순히 인정해주어서 말일세. 사실 무림에서 피의 원한도 없는데 싸운다는 것은 낭비야. 그렇게 생각 하지 않는가?”

남궁천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싸울 필요가 있느냐는 얘기였다.

“일단 좀 앉게.”

남궁천이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동천몽은 앉지 않았다.

본격적인 명분과 논리 싸움을 전개 해보겠다는 의도였다. 실로 교활한 능구렁이다.

“맹주! 한 마디 하겠소?”

“말하게.”

“조금 전 피의 원한이라고 했는데 원한이란 꼭 피로만이 맺어지는 건 아니지요.”

멈칫!

남궁천의 눈이 빛났다.

“무사의 원한은 한마디 말로도 차갑게 맺어지는 것 아니겠소?”

남궁천의 안색이 굳어졌다.

동천몽의 신분은 대법왕이다. 그리고 그는 천상각의 후예이니 상인이다. 그런데 동천몽은 분명히 무사의 원한이라는 표현을 썼다. 자신을 무사 말고는 일체 다른 신분으로 생각하지 말아달라는 것인데 그건 곧 무사로서 남궁천에게 빚을 받으러 왔다는 의미였다. 빠져나갈 남궁천의 길을 완벽하게 차단해 버린 것이었다.

“왜 말이 없소? 소생의 말이 틀렸소?”

본왕이란 표현이 아닌 소생이라고 했다. 무사라면 당연히 아랫사람이므로 소생이라고 하는 것이 옳았다.

남궁천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동천몽은 무식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대법왕이 되면서 많은 공부를 한 탓일까 자신의 의도를 완전히 읽어 내고 정면으로 치고 나온다.

“맞네. 그렇지. 하지만 나와 피가 아닌 무슨 원한이 맺어졌는지 궁금하군.”

동천몽이 빙긋 웃었다.

“좋은 질문이오. 난 그런 질문이 나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했소? 그 이유는 힘있는 사람들은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그게 얼마만큼 큰 잘못인지 잘 모르는 경향이 있더이다.”

“힘이 있는 사람 중에는 자네 부친도 들어가겠지?”

“물론이오. 우리 아버지야 말로 전형적인 힘있는 사람 아니겠소. 하지만 우리 아버지 힘도 무력 앞에서는 조족지혈이더구려. 특히 당신 앞에서는 말이오?”

“나 말인가? 좀 구체적으로 말해보겠는가?”

“조금전 내가 힘있는 사람은 자신이 부린 횡포를 잘 모른다고 했는데 당신이 지금 그러는구려. 무림맹주라는 이유로, 천하제일고수에 가깝다는 이유로, 그리고 강호평화를 지킨다는 이유로, 우리 아버지의 생업을 돕는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돈을 뜯어갔소. 기억 할 것이오. 명절 때 만 되면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돈을 당신을 비롯해 무림맹 관계자들에게 배달했는지.”

남궁천의 표정이 흑빛으로 물들었다.

“당신들은 혹시 달라는 소리 하지도 않았는데 우리 아버지가 알아서 주었으므로 잘못이 없다고 할지 모르겠소. 하지만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지요. 당신들은 돈을 받을 때나 와서 가져갈 때마다 한 분야의 시장독점권을 선물 주듯 아버지에게 주었소. 이게 무슨 뜻이오? 아버지가 알아서 주는게 아니라 당신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천상각의 숨통을 쥘 수 있으니 돈을 잘 바치라는 의미 아니겠소?”

남궁천이 두 손을 만지작 거렸다.

얼굴이 달아 오른 것이 무척 분노한 표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당신들은 부친이 돈을 끊자 아예 이번에는 찾아와 가져 가지 않았소?”

“그래서 나와 원한이 깊다는 건가?”

동천몽이 또다시 빙긋 웃었다.

“아니오. 사내가 돈 몇 푼에 원한까지 산다는 것은 말이 안되지요. 아까 말했듯 난 무공을 배운 무사로서 원한을 말할 것이오?”

“말해보게.”

무사의 원한은 절대 없다는 것을 자신하듯 말했다.

동천몽이 눈을 치켜떴다.

“당신은 패업을 꿈꾸었소.”

“그게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아니오? 난 그렇게 말하지 않았소. 중요한 것은 나 또한 패업을 꿈꾸고 있다는 얘기오.”

“뭐…뭣이?”

“어떻소. 서로가 패업을 꿈꾼다면 충분히 내가 당신을 죽일 명분이 생기는 것이지요? 서로가 죽여야 천하가 자기 차지가 될 테니까 말이오?”

남궁천이 눈을 크게 떴다.

동천몽의 설명에 할 말이 없었다. 서로가 패업을 꿈꾸고 있다면 주인은 한 명 뿐이니 당연히 싸워야 하고 어느 쪽이 든 죽어야 한다.

명분에 살고 죽는 강호이다. 그래서 서로 죽이고 죽어야 할 명분이 없다는 이유를 강하게 내 세워 위기를 빠져 나가려고 했는데 완벽한 덫에 걸렸다.

동천몽은 천하 패업을 꿈꾸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치고 나왔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자신이 얼마만큼 천상각을 괴롭혔는지, 특히 이번 목와북천과의 싸움에서 천상각을 놓고 얼마만큼 치열한 다툼을 벌였는지 그가 모를리 없다. 비록 자신의 검에 천상각 핏줄의 피 한 방울 묻지 않았지만 그동안 천상각에서 뜯어낸 돈과 심리적으로 동오룡을 괴롭힌 것이라면 피를 묻힌 것보다 더 원한이 깊을 것이었다.

하지만 명분을 목숨처럼 중요시 하는 강호이다.

말로 잘 몰아붙이면 충분히 싸움은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 안 되면 팔 하나쯤 내 주는 것으로 마무리 하고 위기를 벗어난 후 내일을 기약하려 했다. 그런데 동천몽이 패업의 꿈을 갖고 있다는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치고 나온 것이었다.

‘어떤 개자식이 저런 놈을 멍청하다고 소문냈지!’

엉뚱한 소문에 화풀이를 했다.

무공은 강할지 몰라도 머리에 들어 있는게 없어서 간단하게 말싸움 몇 번이면 물리칠 줄 알았다. 앞서 언급 했듯 말싸움으로 종결이 되지 않으면 사지 중 한 두개쯤 버릴 각오까지 세웠다.

그런데 직접 부딪혀 설전을 벌인 결과 오히려 자신이 말려 들고 있었다.

동천몽이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느닷없는 행동에 남궁천이 날카롭게 살폈다. 한참을 두리번 거리던 동천몽이 구석진 곳으로 다가가 화분을 놓는 길다란 탁자의 다리를 발로 툭 찼다.

와직!

화분이 떨어져 박살이 났고 탁자 다리가 부러졌는데 그것은 앞뒤로 깨끗하게 수도로 깎아 거머쥐었다.

“이쯤되면 검으로 손색이 없겠군. 당신이 검에 일가를 이루었다고 들었으니 나 또한 나무토막일 지언정 검 하나쯤 준비를 해야 예의 아니겠소?”

대결하자는 듯 검을 움켜쥐고 바라보았다.

“쳐죽일 놈들, 저런 교활한 놈을 멍청하다고 소근대다니!”

아무리 봐도 동천몽은 똑똑했다. 아니 교활하다고 해야 옳을 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넘겨 짚어 버렸다.

“흐흐흐! 그렇게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죽여 주겠다.”

이쯤되면 원래대로 나가야 한다.

남궁천의 두 눈에서 살기가 뿜어지기 시작했고 그런 모습을 보며 동천몽이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진작 그렇게 나올 일이지 되지도 않을 잔머리를 굴리셨소?”

그까짓 명분도 명분이라고 떠벌렸느냐는 핀잔이었다.

“닥쳐라!”

이제는 조롱까지 노골적으로 당하자 남궁천은 더욱 흥분하고 말았다.

“네놈을 가급적이면 살려주려고 했는데 죽음을 원했으니 나 거절하지 않고 죽여주마.”

“조심하시오. 검의 꼬락서니가 이러긴 해도 만만치 않을 것이오.”

“네놈이나 조심하거라. 감히 그 따위 썩은 나무작대기로 날 죽이려 하다니 네가 미쳤구나.”

스르릉!

남궁천이 벽에 걸린 검을 뽑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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