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66화 (66/71)

제3장 출가

동천몽이 조용히 백상불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제서야 범천이 무릎을 바닥에 꿇으려 했다. 그러나 강한 무형의 경기가 무릎을 곧추 세우고 있어서 구부릴 수가 없었다.

놀라 쳐다보는 범천을 향해 동천몽이 말했다.

“됐소. 그냥 예를 받은 걸로 할테니 그만 두시오. 뭐하느냐? 가서 흉수가 누군지 알아보거라. 반드시 잡아라.”

동천몽의 눈에서 살기가 충천했다.

“명을 받사옵니다.”

일목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범천은 여전히 동천몽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고 동천완이 말했다.

“어떻게 알고 왔습니까? 하긴 대법왕님 정도 되시면 소승 하나쯤 찾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겠지요.”

“시위 하는 것입니까? 이게 무슨 짓입니까?”

“출가를 결심한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였습니다. 다만 시기가 적절하지 않아 그동안 미뤄왔습니다. 혹시라도 오해하실까봐 미리 말씀 드리지만 소승의 출가는 현실도피도 아니고 가문의 업보를 외면하고자 하는 것은 더욱 아니옵니다.”

“듣기 싫습니다. 당장 환속 하십시오.”

“헛헛! 그 말씀 하려고 왔거든 돌아가십시오. 소승을 어려서부터 보아왔으면서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동천완은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인물이었다.

어떤 결단을 내릴 때는 무척 신중하지만 한 번 결심하면 절대 번복하지 않았다. 어쩌면 번복하지 않기 위해서 그는 결단을 내리기까지 신중하고 진지했는지도 몰랐다.

“가벼운 애기 하나 할까요? 형님까지 이러시면 본가의 대가 끊깁니다.”

동천완이 눈을 크게 떴다.

잠시 우두커니 서서 눈알을 굴렸다. 동천몽의 말이 사실인지 계산해보려는 듯 했다.

“대가 끊기면 얼마나 자식으로서 불효인지 형님께서 잘 아시잖아요.”

“대가 끊기다뇨? 큰 형님이 있잖습니까?”

“큰 형님이라뇨? 내게 형님은 황어사에 출가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동천완 말고는 없습니다.”

동천몽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동천완의 표정이 납덩어리처럼 무거워졌다.

이따금 엉뚱한 짓을 하긴 하지만 함부로 경솔하게 말을 뱉는 동천몽이 아니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동천비를 형님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이 나왔다.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것은 폭탄선언이라고 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형을 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자신도 결단을 내리면 번복하지 않듯 동천몽 역시도 경솔하게 어떤 일을 감행하거나 공약(空約)을 하지 않는다. 그가 동천비를 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단순히 형이라고 부르지만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죽여 없애겠다는 뜻이기 때문에 동천완이 기겁한 것이었다.

“모…몽아.”

너무 놀라 자신도 모르게 세속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난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구나.”

동천몽이 칼로 두부를 자르듯 말했다.

“그건 이미 끝난 일이니 더 이상 입에 담지 않는 것이 좋겠소.”

“처…천혁 형님도 죽고 천화 또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더냐?”

그러니 용서 해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놈은 살려주자는 얘기오?”

“노…놈?”

동천완이 소스라쳤다.

동천비를 놈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것은 절대 돌이킬 수 없다는 강한 의지였다.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어야 하는 것이오. 다 죽으면 대가 끊기므로 누군가는 선별하여 살려 둬야 한다는 생각은 내게 통하지 않습니다. 설혹 형님이라도 죽을 죄를 졌으면 난 살려두지 않을 것이오.”

동천완이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어떤 얘기도 동천몽의 얼어붙은 마음을 돌리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그가 자신을 찾아와 환속을 요구하는 것은 동천비까지 죽여야 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자신이라도 혼인을 하여 천상각의 대를 잇게 하려는 계산이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는 되는 것 같았다.

“혀…형이 못된 짓을 했다는 것을 안다. 대법왕님과 개인적으로도 깊은 응어리가 맺혀 있다는 것 까지도. 그러나.”

“훗훗! 그까짓 개인적은 것은 이미 오래전에 잊었습니다.”

“그러는데도 살려두지 않으려는 이유가?”

동천몽이 범천을 바라보았다.

속으로 늙으면 눈치도 없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한데 범천이 몸을 돌렸다. 동천몽의 의중을 헤아린 듯 조용히 걸어 사라졌다.

“놈은 짐승이오. 아니 짐승도 그런 짓은 못하지. 아무리 금지마공으로 인해 이성이 상실되었다고는 해도 패악을 저질렀소. 입에 담을 수 조차 없는.”

“……”

“어머니를, 하늘을 바라볼 수 조차 없는,”

“뭐….뭣이?”

“이제 왜 내가 놈을 죽이려하는지 아시겠소?”

동천완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했다.

동천몽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참을 쳐다보더니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아미타불! 어찌 그런 극악한 패륜을.”

“하루라도 빨리 내 손으로 죽여야 하오. 살려두면 더 많은 악행을 남길 것이오.”

동천완은 계속 아미타불을 중얼거렸다.

상상할 수조차 없는 끔찍한 일이었다. 동천비가 차갑고 야망이 크긴 했지만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런 면에서는 아주 냉혹하리만치 엄격했고 수많은 가내에 시녀들이 즐비했어도 절대 건드리거나 하지 않았다.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아랫사람을 건드리거나 횡포를 부리는 것처럼 비열한 짓은 없다고 했다. 더구나 중원에서 가장 큰 부잣집이다 보니 금전을 노리는 여인들의 접근이 많을 것이라면서 동생들에게 몸가짐을 똑바로 할 것을 가르치기도 했던 동천비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동천몽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고 동천완이 또다시 아미타불을 중얼거렸다.

그때 산을 내려갔던 일목이 돌아왔는데 육십 가량의 뚱뚱한 노인을 어께에서 내려 놓았다.

노인은 안색이 파랗게 변해 있었다.

“이 늙은이는 이 아래 저자거리에서 대왕루라는 큰 주루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늙은이가 이레 전 있었던 살인 사건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네 이놈 자세히 말해라. 만약 숨긴 것이 있거나 거짓을 말하면 약조한대로 모가지를 돌려 버리겠다.”

퍼억!

노인이 다시 무릎을 꿇었다.

“저…절대 거짓 따위는 고하지 않을테니 제발 모가지를 돌리지 말아주십시오.”

“알았으니까 빨리 말해라.”

일목이 무섭게 눈을 뜨고 노려보자 노인이 미치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그러니까 그날 우리 가게 앞 저자거리에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한 가문의 비사를 얘기했습니다.”

노인은 당시 있었던 얘기를 그대로 옮겼다.

듣고 있던 동천몽과 동천완의 눈이 커졌다. 보지 않아도 자기 가문의 얘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얘기가 한참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놀랍게도 거렁뱅이를 향해 아버지라고 부르더군요.”

“동천비.”

동천몽이 이를 부드득 갈았고 동천완이 손을 저었다.

“기다려 보거라.”

설마 동천비일리는 없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노인의 애기는 동천비였음을 확실하게 증명했는데 바로 묵곤혈참기와 동오룡이 죽어가면서 모든 것이 내가 부른 화이거늘 네가 아닌 아비인 내가 하늘의 화를 받아야 한다라는 말을 했다는 부분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털썩!

동천완이 힘없이 주저 앉았다.

너무 충격을 받은 듯 안색이 창백해졌는데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목탁이 땅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아아! 아아!”

동천완이 하늘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신음을 뱉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 집에서 일어난단 말인가. 아아아! 커헉!”

급기야 동천완이 피를 토하더니 안색이 파랗게 물들었다.

“형님.”

동천몽이 신속히 동천완을 부축했지만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굳어지고 있었다.

‘울혈이다!’

화기가 급속히 치솟으면서 심맥이 막힌 것이다.

동천몽은 땅바닥에 동천완을 눕히고 몸을 묶고 있는 옷과 끈을 풀었다.

바바바바!

이윽고 빠르게 추궁과혈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내력을 너무 많이 주입해 격해도 상처가 악화되고 너무 작아도 효과가 없는 것이 추궁과혈이다. 받아 드리는 상대의 몸 상태가 어느정도인지를 확인하지 않고 무턱 대고 하면 더욱 위험에 빠진다.

바바바바!

동천몽이 추궁과혈을 시전 할 때 범천을 비롯한 황어사 승려들이 모두 뛰어나와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동천완은 중요부위만 가린 채 완전히 벌거벗겨져 있었는데 온 몸이 파랗게 멍이 든 것 같았다.

동천몽은 그런 동천완의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바르게 손바닥으로 쳐갔다. 양손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빨랐고 소리 또한 경쾌했고 일률적이었다.

‘저…저것이 말로만 듣던 추궁과혈이로구나!’

범천의 눈이 빛을 뿌렸다.

불가에는 대대로 여러 가지 치료법이 내려온다. 그중 가장 배우기가 어렵고 복잡한 것이 추궁과혈이었다. 물론 배우기가 어려운 만큼 효과는 확실했다. 그러나 추궁과혈은 좀체 터득되지 않았고 특히 시전하는 사람의 체력이 승부를 갈랐다.

자신도 추궁과혈을 조금 배웠지만 동천몽의 솜씨에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었다.

버버버벅!

파랗던 동천완의 몸이 조금씩 핏기를 띄어가고 있었다.

지켜보던 승려들 눈이 휘둥그레 졌고 동작 하나라도 놓칠까봐 숨을 죽였다. 사실 그들이 몰려 온 것은 범천으로부터 능동의 세속의 동생이 대법왕이란 얘길 들었다. 대법왕은 활불로 칭송되고 그의 법문을 듣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 직접 대면하는 것은 꿈조차 꾸지 못할 일이었는데 이름도 없는 이런 황어사에 대법왕이 왔다는 얘기를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다.

동천몽의 얼굴에 땀이 가득했다. 겉으로는 별로 힘이 들어보이지 않지만 보통 사람이 추궁과혈을 시작하면 진이 빠지고 무림인은 상당한 공력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뚝!

동천몽이 동작을 멈추더니 동천완의 고개를 좌측으로 돌렸다.

으왁!

기다렸다는 듯 동천완이 검붉은 피를 토했고 그의 얼굴은 붉은 대추빛을 띄었다.

“으으!”

깨어나는 듯 신음을 흘리더니 눈을 떴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땀 젖은 동천몽의 얼굴을 발견한 동천완이 벌떡 일어났다.

“대…대법왕님 소승의 결례를 용서하소서.”

동천몽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동천몽은 일목이 데려온 노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만 데려다 주거라.”

일목이 대답을 하고 데려가기 위해 다시 제압하려 들자 노인이 물러났다.

“데려다 주지 않아도 괜찮소. 내 발로 갈 터이니 제발.”

몸서리가 쳐진다는 듯 노인은 뒷걸음을 치더니 줄행랑을 쳤다.

동천몽이 동천완을 보며 말했다.

“형님!”

동천완이 정색하여 말했다.

“모든 것은 부처님의 뜻이옵니다. 소승걱정 마시고 그만 돌아 가셨으면 합니다.”

동천몽은 움직이지 않았다.

한 참을 쳐다보았는데 뭔가 할 말이 많은 듯 했다. 하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고 동천몽은 몸을 돌렸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걸어가는 동천몽을 바라보는 동천완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쩌면 동천몽이야 말로 세속을 완전히 떠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오히려 자신들이 변변치 못해 세속의 모든 은원을 떠맡기고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혹한 운명의 파고에 휩싸였다. 자신을 제외한 형제들은 끊임없이 동천몽을 죽였고 모친 능씨를 괴롭혔다. 아마 동천몽이 아닌 자신의 성격 같았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동천몽은 꿋꿋하게 살아 남았고 대법왕이란 화려한 지위에 올랐다.

자신 또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형제들을 죽이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그럴때마다 포달랍궁의 역대 대법왕들의 신위가 모셔진 영탑전을 찾아가 절하고 또 절했다고 했다. 그렇게 솟구치는 복수심을 누르고 또 눌러 어떻게 해서라도 동천비를 비롯한 형제들과의 관계 복원을 모색했지만 피의 파도는 비켜 가주지 않았다. 동천비는 소뢰음사를 동원해 오히려 더욱 자신을 죽이려 했다. 그런데 그것도 부족해 동천비는 부친과 모친을 모두 죽였다. 비록 금지마공이란 본의 아닌 이유때문이라고 하지만 절대 용서될 수는 없었다.

동천완은 허리를 구부려 땅에 떨어진 목탁을 주워 들었다. 천천히 몸을 돌려 다시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동천몽이 조금이라도 편해지도록 빌어 주는 일이었다. 동천몽이야 말로 엄청난 운명의 회오리에 떠밀려 번뇌하고 있었다.

타타타탁!

모두가 떠난 텅 빈 대웅전 위로 동천완의 목탁소리가 격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산을 내려온 동천몽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일목은 모습을 감추지 않고 뒤를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가급적 동천몽에게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 멀찍이 떨어져 뒤를 따랐다.

가벼운 미풍이 옷깃을 펄럭거렸다.

동천몽의 얼굴은 우울한 그림자로 뒤덮여 있었다. 동천완으로 보이는 남자가 호남의 황어사에 있다는 무미선사의 보고를 받고 한 달음에 달려왔다.

오는 도중 천상각이 잿더미로 변해 사라졌다는 보고를 추가로 받았고 물론 남궁천의 짓이라고 무미선사는 말했다.

동천몽이 걸음을 멈추더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각 구름 하나가 떠가고 있다.

동천비가 보낸 자객의 기습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동천몽은 쏟아져 나오려는 내장을 한 손으로 막으며 소주의 뒷골목을 달렸다. 가까스로 의원을 찾았지만 들어서지 못하고 문턱을 벤채 의식을 잃었다. 곧바로 의원의 눈에 띄어 안으로 옮겨졌고 상처가 의외로 오래갔다.

외상은 이틀만에 아물었지만 내상이 그대로였다. 내상이 아물지 않자 깨어나지를 못했다.

나중 의원은 동천몽이 깨어나지 못한 이유가 본능을 지배하고 있는 분노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동천비에 대한 원한이 너무 깊다보니 전신 경락이 막혀 버렸고 그래서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방법은 딱 한 가지 뿐이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이승의 모든 은원을 훌훌 털어버리고 저승으로 빨리 갈 수 있도록 빌어주는 천도재처럼 의원은 자신아 자주다니는 사찰의 승려를 데려와 동천몽의 곁에서 독경을 하도록 했다. 무려 이틀을 꼬박 독경을 하고서야 동천몽은 깨어났다. 부처님의 말씀이 동천몽의 의식을 짓누르고 있는 복수심을 달랜 것이다. 동천비와 맺어진 응어리는 그것 말고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런데 대법왕이 되면서부터 미움 말고 또 다른 감정 하나가 슬며시 자신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은 불가에서 가장 큰 공덕으로 여기는 자비라는 것이었다.

자비(慈悲).

자비라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단지 언젠가부터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원한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흩어지고 있다는 사실만 이상하게 생각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누구나 시간이 흐르면 누군가를 미워하던 마음이 점차 엷어진다. 하지만 동천비에 대한 미움은 나이를 먹어갈 수록 더욱 단단하고 깊어졌다. 그런 무서운 원한이 흔들리고 있었다.

세속의 시절에는 그를 떠올릴수록 원한이 깊어졌는데 대법왕 이후로는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그 원인을 찾았는데 바로 불사심법이었다.

불사심법은 단순히 무공 심법만은 아니었다.

화후가 깊어질수록 사람의 심성을 바꾸고 있었다. 대자 대비한 부처님의 깊은 사랑이 함축된 심법이었다. 그래서 역대 포달랍궁의 대법왕들이 하나 같이 큰 족적을 남겼는데 절대적인 이유가 불사심법 때문이었다.

불사심법에는 무서운 불력이 들어 있었다.

동천완의 눈물을 보고 내려왔는데 또다시 마음이 착잡했다. 아버지 까지 죽였다는 말을 들었다면 예전 같았으면 지금쯤 제정신이 아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도 모르게 차분해지고 있었다.

“대법왕님!”

동천몽이 깊은 고뇌에 빠져 있을 때 무미선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미선사가 삼장쯤 떨어져 날아 내렸다.

“남궁천의 일부 본거지를 알아냈사옵니다.”

파앗!

동천몽의 눈에서 섬광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단호히 중원제일이라고 말한다. 특히 황학루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황산삼해 태산 일출과 더불어 단연 천하삼경 중 하나로 꼽기를 주저 하지 않는다.

오늘따라 동정호로 떨어지는 일몰이 붉다.

구경하던 구경꾼 중 누군가 붉은 일몰을 보고 마치 핏덩이 하나가 동정호로 떨어지는 것 같다는 표현을 서슴치 않았다. 동정호 일몰이라고 해서 아무에게나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사철 안개가 끼지 않은 날이 거의 없고 지리적은 여건으로 자주 구름이 낀다. 그래서 동정호의 일몰을 볼 수 있는 날이라고는 일 년에 보름이 채 안되었다.

“과연!”

“쥑이는구나!”

황학루에 올라선 많은 유람객들이 떨어지는 석양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집채 만한 태양이 조금씩 넓은 동정호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풍덩 소리를 내며 떨어질 것 같은 석양을 사람들은 넋을 놓고 구경하고 있었는데 단 한 사람만 시선을 다른데 두고 있었다.

그는 석양을 바라보는게 아니라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환희와 감탄에 빠진 유람객들을 바라보는 동천몽의 눈빛은 예리했다.

“으음!”

꽉 다문 입술을 비집고 나직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이 유람객들 대부분이 동영의 창송가문에서 건너온 무사들이라니.’

유람객들은 수백을 헤아렸다. 옷차림도 제각각이었고 생김새는 물론 감탄의 표정들을 틀렸다. 다만 한 가지에서 공통점을 보이고 있었는데 그것은 눈이었다.

표정은 웃고 있는데 눈은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 눈은 고요했고 아무런 감정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물론 일반사람들이 봐서는 그런 차이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그들의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동천몽 같은 절세고수의 눈은 피하지 못했다.

그때 허공으로부터 일목의 전음이 들려왔다.

“대략 삼백여명 가까이 됩니다.”

일목이 말하는 삼백 명은 이곳 황학루에 유람객으로 위장하여 있는 창송세가의 무사들 숫자였다.

창송세가에서 중원에 건너온 숙자는 이천이 넘었다. 창송세가의 가솔은 모두 일만, 그중 이천이면 이할이 왔는데 문제는 이들이 최고의 무사들이라는 것이었다. 이할이지만 나머지 팔할을 충분히 압도했다.

‘아무튼 놀라운 전략이다!’

동천몽이 혼잣말로 중얼 거렸다.

어제 무미선사가 가져온 보고는 의미심장했다. 놀랍게도 남궁천은 고정된 본거지를 두지 않았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아무리 창송세가의 최강 무사 이천이라고 하지만 백쾌섬이나 동천비에 비하면 조족지혈의 숫자이다. 남궁천은 과거 무림맹 무사들과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을 접촉하여 이해를 구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상당부분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예전성세만 못한 구파알빙의 도움이란 미미했다. 그래서 고정된 지역에 진을 치고 있다가 만약 적으로부터 기습을 받는다면 한 번에 함몰된다. 그래서 생각 해낸 방법이 소규모로 집단을 만들었고 그것도 부족해 고정된 장소에 거주가 아닌 떠돌이 생활을 하도록 했다.

황학루에서 유람객으로 위장을 하고 하루 종일 구경을 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창송세가의 무사들이었다. 밤이 되면 십 명씩 한 개조를 이뤄 숙식을 해결하고 아침이 되면 다시 변장을 하여 유람객으로 나타난다는 것까지 무미선사에 의해 조사되었다.

어제 유람객이 오늘도 나타나지만 변장을 하기 때문에 일반인은 모를 뿐 아니라 흩어져 있기 때문에 적으로서도 더욱 공격하기가 곤란하다.

철저히 점조직 형태로 연락을 주고 받고 삼백에서 사백 명씩 다섯 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다섯 개 지역을 정확히 알아낸 후 일거에 급습하기 전에는 일망타진은 불가능했다. 어느 한 곳을 공격하면 금세 다른 지역으로 연락이 갈 것이고 피할 테니까.

뿐만 아니라 다섯 개 지역을 모두 알아 낸 다음 일거에 공격 한다고 해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공격 하는 쪽에서도 숫자가 나눠지기 때문에 상당한 위험부담을 안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조직을 적당하게 뭉쳐 흐트러뜨려 놓은 것은 적의 이목을 피하려는 꿍꿍이도 있었지만 적의 침입을 막으려는 계산도 포함 되어 있었다. 고정된 거주지역을 정해 생활하는 것보다 곳곳에 흩어놓으므로 적의 침입이나 여러 정보 등을 획득하는데 큰 도움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덕배는 어디쯤 오고 있느냐?’

‘이미 운남성에 접어 들었다고 하옵니다.’

운남도 중원이지만 이곳에서 삼천리가 넘는다.

아무리 빨라도 열흘은 걸릴 것이다. 더구나 한두 명도 아닌 아흔 아홉 명이 이동하려면 장애가 한 둘이 아니다. 적의 눈을 피하기 위해 보나마나 십 명 이하로 묶어 이동하고 있을 것이므로 날짜 계산을 더 늦춰줘야 했다.

사대법왕을 비롯해 포달랍궁의 정예 삼천 명이 은밀히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동천몽의 사전 명령을 받고 지금 중원 곳곳으로 침투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물론 포달랍궁의 이름이 아닌, 그때 그때 필요한 이름들로 움직이고 있다.

어느 지역에 일단 들어가면 그 지역의 경쟁 문파 중 한 곳과 손을 잡고 악의 무리들을 궤멸시킨다. 그리고 같이 그 지역을 공유하고 정비하는 식으로 천하 접수를 명령했다.

단 천룡구십구불만 동천몽의 직접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냥 소승과 대법왕님 둘이서 없애 버리죠?’

일목이 은근히 매달린다.

벌써 몇 개월째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으니 잔뜩 독이 올라 있었다.

‘소승이 이백은 책임지겠사옵니다.’

자신이 알아서 할테니 손만 맞춰 달라는 뜻이다.

동천몽이 히죽 웃었다.

죽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어떻게 죽이는 것이 남궁천과 창송을 충격으로 빠뜨리느냐는 것이었다. 같은 숫자가 죽어도 상대에게 타격을 주는 죽음이 있고 그러지 못하는 죽음이 있다. 삼백이지만 이천 명 모두가 죽는 것과 같은 두려움을 전해 주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계산이 필요했다.

‘일목, 어떤 식으로 죽이는 것이 남궁천에게 가장 큰 타격이 되겠느냐?’

동천몽이 무거운 표정으로 물었다.

나름대로 계획은 세웠지만 일목에게 좀 더 나은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일목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죽음이라고 다 같지는 않지요. 눈을 부릅뜨고 죽은 시신이 보는 사람에게 더욱 공포를 주듯 삼백 명을 죽여도 어떻게 죽이느냐에 따라 남궁천이 받은 충격은 다를 것입니다. 각설하고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효과가 큰 것은 역시 패 죽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말이냐?’

‘말 그대로 패 죽이는 것입니다. 가시나무 몽둥이 같은 것으로 마구 패서 죽이면 상처부위가 완전히 걸레조각이 되죠. 그걸 본다면 천하없는 남궁천도 공포에 빠질 것입니다’

일목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다른 것 없느냐?’

‘왜 없겠습니까. 방법은 무궁무진합니다. 혹시 본교의 절두법을 써보시는게?’

‘절두법?’

‘아주 간 단 합니다. 외상은 일체 남기지 않고 그 대신 모가지만 싹뚝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자른 모가지는 모아서 마차로 실어 남궁천에게 보내주는 것이죠? 아마 삼백 개의 모가지가 마차에 가득 실려 나타나면 보나마나 기절 할 것입니다.흐흐흐!’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 일목이 웃음을 지었다.

동천몽은 석양을 보았다.

붉은 덩어리가 반쯤 동정호에 잠겨 있었다. 잠시 후 석양은 잠겼고 주위는 조금씩 어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열흘!’

어둠으로 짙어가는 동정호를 보며 동천몽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다음날부터 동천몽과 일목은 황학루 인근에서 숙영하고 있는 창송세가의 무사들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바쁘게 돌아다녔다. 사흘만에 황학루를 중심으로 퍼져 있는 창송세가의 무사들 숫자는 무미선사의 보고대로 모두 삼백 명이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모두 서른 개 조로 이루어졌다. 자세한 편제를 보면 이곳에 있는 삼백명은 신룡단(神龍團)으로 불리우며 백 명씩 삼개의 대(隊)로 이루어졌다.

파랑대(破狼隊)

혈성대(血星隊)

폭우대(暴雨隊)

각대는 열 명씩 열개조로 아침과 저녁에 반드시 대주에게 인원 보고를 했다.

저녁은 인근 주루를 돌아다니며 해결했고 잠은 과거 개방이 분타로 썼던 후미진 골목이나 개천의 다리, 관제묘 등지에서 해결했다. 절대 같은 모습으로의 변장은 금했다. 재수가 없으면 누군가에 띌 수가 있고 그것이 꼬투리가 되어 정체가 드러날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열흘만에 덕배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먼 길을 왔을 텐데도 그의 두 눈은 얼음처럼 빛나고 있었다.

동천몽으로부터 얘길 전해 들은 덕배가 히죽 웃었다.

사실 지금 천룡구십구불은 피에 굶주려 있었다. 지난 여섯 달 동안 그들은 오로지 오늘을 위해 미친듯 무예를 수련했다. 특히 그들이 가장 많이 매달린 것은 밀종대수인이었다.

밀종대수인 같은 가공할 절예가 포달랍궁 무사들에게 보편화 되지 않은 것을 동천몽은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워낙 살벌하고 파괴적이기 때문에, 또한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에 제자들이 수련을 기피한다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무사란 강하고 뛰어난 무예가 있으면 대부분 매달리려는게 습성이었다.

그런데 석달 전 덕배가 마침내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밀종대수인은 불가무예지만 사실은 밖에서 들어왔다고 했다. 상차(尙車)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무의 신으로 불렸다. 그가 유명한 것은 강했기 때문이었지만 또 하나는 어떤 무예도 한 번만 보면 그대로 시늉을 내러버리는 무의 신이었다. 그는 열 다섯에 출도하며 서장무림을 일통했고 백 열 일곱에 죽었다. 그는 죽기직전 자신이 터득한 모든 무예를 하나로 집대성하여 개천의 절기를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밀종대수인이었다.

무공이란 빠르고 간단히 죽일수록 뛰어난 무공이라는 그의 지론에 따라 밀종대수인은 무척 강하고 파괴적이었다. 하나 더욱 무서운 것은 밀종대수인의 수위가 깊어질수록 심성이 차갑게 변한 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포달랍궁에서는 밀종대수인을 기피한 것이다. 물론 일반 무학과는 비교도 할 수 조차 없을 만큼 복잡하고 난해한 것이 기피의 가장 큰 이유였지만.

덕배의 말을 빌리면 지난 반 년간 피땀을 흘려 밀종대수인을 연성했기 때문에 하나같이 피의 기세가 높다는 뜻이었다. 이미 절정의 반열에 오른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밀종대수인을 소화하는 능력도 빨랐고 뛰어났다. 밀종대수인을 수련하여 더욱 차가워진 심성들인데다 그들을 상대로 수련 효과를 검증해볼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덕배가 더욱 웃음을 크게 지었다.

“어떤 죽음이냐에 따라 적에게 주는 타격의 강도는 다르지요.”

동천몽의 의견에 덕배 또한 동조했다.

동천몽이 물었다.

“좋은 의견 있느냐?”

“삼백 명이라고 했사옵니까?”

잠시 몇 번을 중얼 거리더니 덕배의 눈이 빛을 뿌렸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나이까? 삼백명중 단 한 명도 살려두지 않는 것이옵니다.”

단 한명도 살려 보내지 않은 것은 숫자의 많고 적음을 떠나 적에게 주는 두려움의 강도는 크다.

동천몽도 그 방법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싸움도 생존자는 있기 마련이다. 하다못해 죽은 척 있다가 도망치는 부상자라도 있는 것이었다.

“가능 하겠느냐?”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선결되어야 할 것이 있사옵니다.”

“말해 보거라.”

“장소입니다.”

“장소?”

“어떤 장소를 택하느냐가 성패를 좌우하지요.”

“좁은 곳이 좋지 않겠습니까? 좁은 곳 일수록 쥐새끼처럼 몰아 넣어놓고 마구 쳐 죽이기 좋으니까요?”

듣고 있던 일목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덕배가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 않네. 좁은 곳이 좋긴 하지만 그런 곳으로 유인하기는 불가능하지. 금방 알아 차릴테니까. 오히려 넓고 툭 터진 곳이 좋사옵니다.”

일목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넓은 곳은 포위망을 구축하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도망치기가 유리하잖습니까?”

“좁은 곳은 자칫 이판사판으로 달려들 뿐 아니라 장소가 협소한 관계로 강한자의 능력이 제대로 펼쳐지기 어렵네.”

강한자란 천룡구십구불을 말한다.

장소가 좁다보면 가진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천룡구십구불이 불리하다는 뜻이었고 차라리 툭 터진 곳으로 끌어내어 확실히 실력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목의 말처럼 도망자에게 유리한 곳이지만 대법왕님께서 나서 주신다면 크게 염려 할 것은 없을 것 같사옵니다.”

동천몽에 싸움에 끼어들지 말고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도망자가 발생하면 쫓아가 제거하라는 뜻이었는데 사실 그런 임무는 무공이 강하다고 적임자가 될 수는 없었다. 덕배선사의 말뜻은 여기저기 도망자가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할 경우 신법이 빠르지 않으면 임무를 소화하기 어려운데 동천몽의 신법이 가장 빠르므로 안성맞춤이라는 뜻이었다.

동천몽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가 맡겠다.”

세 사람의 시선이 차갑게 엉켰다.

순조로울 것 같던 계획이 난관에 봉착했다. 황학루에서 북쪽으로 이십 리가량 떨어진 곳에 옥사평이라는 분지가 있었다. 평소에는 검은 모래이지만 이상하게 햇빛을 받으면 옥처럼 푸르게 빛난다하여 붙여진 곳인데 이곳으로 신룡단을 불러낼 계획을 삼았다.

문제는 어떻게 불러내느냐는 것이었다. 덕배선사를 비롯해 천룡구십구불의 간부들까지 모여 의논을 했지만 신룡단을 그곳으로 불러낼 좋은 묘책은 찾아지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의견이 개진되었고 묘책이란 묘책은 모조리 끄집어냈지만 선뜻 이것이다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워낙 뛰어난 고수들이기 때문에 불러낼 수가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심지어 신룡단주를 납치하여 옥사평으로 이백스물아홉 명을 불러내자는 의견을 일목이 냈다가 냉혹하게 짓밟혔다. 함정이라는 것을 떠벌릴 일 있느냐는 덕배의 핀잔에 일목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방법이라면 한가지 뿐입니다.”

덕배가 입을 열었다.

모든 시선이 덕배에게 고정 되었다.

“소승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동영에서는 중원과 다르게 아래로의 명령을 문서로 전달하는 방식을 즐겨 쓰더군요.”

동천몽이 물었다.

“창송의 이름으로 된 문서를 이용하자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무슨수로, 우리가 어떻게 말입니까?”

천룡구십구불의 부 불주가 물었다.

덕배가 대꾸를 못했다. 자신도 의견은 내놨지만 어떻게 하겠다는 방법까지는 아직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문서라.”

동천몽이 눈을 지그시 감고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탁자를 쳤다.

“알겠다. 내가 이 일은 한다.”

동천몽이 자리를 곧바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어떤 방법이냐고 물어 볼 수도자 없었다.

소주와 더불어 중원의 이대 미도 중 한 곳으로 불리는 항주에 저녁 이내가 깔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길거리 상점에도 하나 둘 불이 켜지기 시작했고 낮 상인들이 물러간 저자거리에 밤 상인들이 신속이 자리를 잡았다.

“저것들이 또 나와 있는 걸 보니 오늘도 오나보군.”

“개자식,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기에 사흘 걸러 행차야.”

길가에 좌판을 깐 상인들이 홍청루를 보며 투덜거렸다.

홍청루는 항주에서 가장 큰 기루였다. 규모만 큰 것이 아니라 술값 또한 보통 사람들로서는 감당할 수조차 없을 만큼 고가였다. 아무리 싸게 마셔도 둘이서 은자 백 냥은 있어야 하고 비싼 술집답게 기녀들의 미색 또한 천하절색이라 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는데 석 달 전부터 항주 사람들 눈에 이상한 광경이 목격되었다.

사 나흘에 한번 꼴로 홍청루 주인을 비롯한 홍청오녀가 한 대의 마차를 영접한다는 것이었다. 홍청오녀는 홍청루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섯 명의 기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도대체 마차의 주인이 누구기에 이 지역의 도독이 찾아와도 코빼기도 내보이지 않은 홍청오녀가 친히 문 앞까지 나와 영접을 하는지 사람들은 더욱 눈을 빛냈다.

금설공자(金雪公子).

사람들이 알아낸 것은 홍청루 주인과 홍청오녀의 융슝한 영접을 받으며 술을 마시러 찾아드는 마차의 주인이 금설공자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가 몇 살인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 또 홍청루의 주인과 홍청오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면 금설공자가 행차함이 틀림없었다.

“씨발놈.”

“어떤 새끼는 복도 많아 꽃같은 계집들의 영접을 받고 어떤 새끼는 가짜 공청석유 한 병 팔아 보려고 개지랄을 떨고 더러워서.”

두 명의 장사꾼이 서로 투덜거렸다.

“온다!”

대머리 장사꾼이 저자거리 아래를 보며 말했다.

두 마리의 백마가 한대의 마차를 끌고 올라오고 있었다. 잡털 하나 섞이지 않은 말부터가 범상치 않았고 마차 또한 사각 기둥을 상아로 박에 만들어 무척 호화스러웠다. 마차 주위로 열 명의 호위무사가 따르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험악했다.

마차는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마차를 몰아갔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부러움과 시샘의 시선으로 쳐다보는 가운데 마차가 홍청루 앞에 이르렀다.

홍청루의 주인인 홍청선자가 마차 뒤로 다가가 휘장을 열었다.

그러자 한 명의 백의 청년이 부채로 얼굴을 가린채 모습을 나타냈고 기다렸다는 듯 홍청선자의 허리가 숙여졌다.

“어서오세요. 금설 공자님.”

부채로 얼굴을 가린 금설공자가 다소곳하게 허리를 숙인 홍청선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몇 일 못본 사이에 더욱 예뻐졌구려. 선자?”

“그래요. 감사하옵니다.”

홍청선자가 허리를 비틀며 웃었다.

“공자님을 뵈옵니다.”

“환영하옵니다.”

홍청오녀가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홍청오녀를 바라보는 금설공자가 환한 목소리로 말했다.

“헛헛!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는데 어찌 홍청루의 여인들은 갈수록 이렇게 본 공자의 마음을 흔든단 말인가.”

“뭣들하느냐? 공자님을 모시고 들어가자.”

홍청오녀가 앞장을 섰고 뒤를 홍청선자와 금설공자가 나란히 따랐다.

“아무도 안받았겠지?”

“그러니까 이렇게 조용하죠?”

넓은 홍청루가 조용했다.

평소 같았으면 손님들로 이곳 저곳 별채와 방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금설공자는 한 번씩 올 때마다 홍청루를 통째로 세 낸 다. 혼자 조용히 술 마시는데 다른 곳에서 시끄럽게 떠들면 술맛이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황금 수천 냥을 주고서 자신이 있을 때는 아무 손님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본각을 지나 소롯길을 가로질러 금설공자가 안내된 곳은 이화반월(梨花半月)이란 현판이 걸린 정자였다. 푸른 소나무가 병풍을 치고 좌측 언덕배기에는 배나무가 가득 심어져 있었다. 봄이 아니어서 흰 배꽃이 없고 향내는 맡을 수 없었지만 때마침 떠오른 둥근달과 겹쳐져 정자는 한 없이 아늑했다.

멈칫!

그런데 금설공자를 안내 해가던 홍청오녀가 깜짝 놀라며 섰다.

“왜 서느냐?”

“선자님 저기?”

홍청오녀가 이화반월을 쳐다보았다.

한 사내가 뒷짐을 지고서 동쪽 하늘에 떠오르고 있는 둥근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감히 날 속이려 들다니.”

금설공자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단 한명도 받지 말라고 했는데 나 몰래 손님을 받았더란 말이냐? 이것들이 사람을 뭘로 보고 이런 사기를.”

홍청선자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옵니다. 우린 그런 적 없사옵니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자를 쫓아내거라.”

홍화오녀가 득달같이 정자로 달려갔다.

“네 이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왔단 말이냐? 썩 물러가지 못하겠느냐?”

“그냥 모가지를 잡아 끌어내거라.”

홍청선자의 명령에 다섯 여자가 정자에 올라섰을 때 뒷짐을 지고 달을 바라보던 흑의사내가 돌아섰다.

“아아!”

“어쩜!”

홍청오녀가 감탄의 신음을 흘렸다.

흑의사내의 용모는 여인의 넋을 흔들고도 남을 만큼 준수했다. 더구나 홍청오녀를 바라보며 짓는 미소는 여인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고…공자님은 뉘시죠?”

“어떻게 여길 오셨나요?”

아무리 험악한 인상을 쓰려해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홍청선자만 없다면 앞 다퉈 품에 안기고 싶을 정도였다.

한편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 있던 금설공자가 흑의사내를 발견하더니 안색이 검게 변했다. 검게 변하다 못해 가볍게 어깨를 떨기까지 했는데 홍천선자가 물었다.

“왜 갑자기 그렇게 놀라십니까?”

“아…아니오. 난 괜찮소.”

금설공자의 두 눈이 형형해졌다. 아무리 살피고 또 살펴도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 사내보다 더 무서운 인물은 없었다. 그 사내의 무서운 점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죄를 짓고 불귀도까지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서슬퍼런 불귀도주와 휘하의 수하들을 굴복시켰을 뿐 아니라 황실의 모반까지 제압해버렸다.

그의 덕에 지옥의 섬 불귀도를 나오긴 했지만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토록 철저히 신분을 숨기고 사는데 어떻게 다시 나타났단 말인가.

그렇다고 그 사내가 자신에게 악한 감정을 갖고 있다거나 다시 만날 때는 목숨을 회수하겠다는 거창한 협박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자 두 말도 않고 풀어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를 피하고 싶었고 두 번 다시 만나서는 안될 사람이라고 생각 했다.

그를 만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아마 그의 능력이 너무 탁월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자신도 천재 소리를 듣고 성장했지만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밖에 호위무사가 있다. 상당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인물들이지만 눈 앞의 사내의 힘에 비하면 비교가 안된다.

퍽!

금설공자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어떤 반항이나 잔머리도 통하지 않는다. 그냥 무릎을 꿇고 처분만을 바라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어이 오셨사옵니까?”

금설공자가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자 홍청선자가 놀란 눈으로 보았다.

“고…공자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뭐하는 놈이기에.”

“닥쳐라. 말을 가려서 하거라. 네년 주둥이를 찢어 버리겠다.”

금설공자가 잡아 먹을 듯 소리치자 홍청선자가 기겁했다.

“어…어떻게 그토록 품위 넘치던 공자님 잎에서 그런 흉악을 표현의 말씀이.”

“이년이 조용히 안 해.”

계속되는 욕설에 홍청선사가 입을 다물었다.

흑의사내가 천천히 다가왔다.

금설공자의 행동에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홍청선자는 슬쩍 옆으로 두어 걸음 비켜섰다.

“오랜만이구나.”

“대…대법왕님을 뵈오나이다.”

‘대…대법왕!’

듣고 있던 홍청선자가 눈을 부릅떴다.

빠악!

그녀 또한 무너지듯 무릎을 구부렸다.

“이년들아 뭣들 하느냐? 내가 가장 존경하는 대법왕님이시다. 어서 엎드리지 못하겠느냐?

홍청선자가 소리치자 홍청오녀가 허겁지겁 무릎을 꿇었다.

“어…언니 진짜 이 분이 대법왕님이야?”

“대법왕이라면 포달랍궁의 그 분?”

엎드려 고개를 돌리고 물렀다.

“조용히!”

버럭 소릴 질렀고 모두가 엎드려 숨을 죽였다.

동천몽이 엎드린 홍청선자를 보며 말했다.

“존경한다고 했는데 날 잘 아느냐?”

홍청선자가 엎드려 말했다.

“모릅니다. 하지만 존경하는데는 알고 모르고가 필요 없다고 생각 하옵니다.”

“……”

“대법왕님께서는 마음이 넓고 죄를 지은 사람들도 많이 용서해주신다고 했습니다.”

“말속에 너도 죄인이라는 의미가 담긴 듯 하구나?”

“그러하옵니다. 천 첩은 죄인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겠느냐?”

“뻔한 죄 아니겠습니까? 술집 주인이 지을 죄가 손님들에게 씌운 바가지 말고 또 있겠나이까? 사용 기한이 지난 음식으로 안주를 조리해 팔았고 한 병에 은자 한 냥밖에 하지 않은 잠원홍을 금화 한 냥씩 받았사옵니다. 너무 바가지를 많이 씌워 낱낱이 나열하기도 어렵사옵니다. 부디 천첩을 용서해주소서.”

동천몽이 웃으며 말했다.

“알겠느니라. 앞으로는 그러지 말거라. 너의 죄를 용서하겠다.”

“감사하옵니다. 대법왕님 장수 하세요.”

홍청선자가 이마를 땅에 대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홍청오녀가 소리쳤다.

“천첩들 죄도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도 죄 엄청 지었어요. 대법왕님 우리 죄도 털어 주세요?”

“말해보거라.”

“사…사실 손님께 화대 바가지를 씌웠거든요. 이 바닥 공식가격이 은자 닷냥인데 얼굴 잘생겼다는 것을 내 세워 금화 두 냥을 받았어요.”

“소녀는 화대를 많이 받기 위해 처녀라고 속였어요. 팔뚝의 수궁사도 사실은 가짜거든요.”

그러면서 팔뚝을 걷어 수궁사를 보이더니 손으로 지우자 깨끗이 사라졌다.

동천몽이 가볍게 웃더니 말했다.

“앞으로 착하게 살거라. 남을 속이는 것은 나쁘다. 그만들 가보거라.”

여자들이 일어나 일제히 물러났고 장내에는 금설공자 혼자 남았다.

“일어나거라. 너도 나이가 있는데 무릎 시릴 것이다.”

금설공자가 일어났고 휙 하며 물건 하나를 던졌다.

“무엇이옵니까?”

금설공자가 조그만 종이를 보며 물었다.

“그 필적을 위조해야겠구나. 할 수 있겠느냐?”

금설공자가 한동안 글씨를 쳐다보았다.

“동영의 말 아닙니까?”

“그렇다. 지금부터 내가 불러주는 말을 그 필적과 똑같이 써다오. 내일 밤 자시까지 옥사평으로 신룡단을 이끌고 모이거라.”

금설공자가 쳐다보았다.

그게 전부냐는 질문이었다.

“아주 간단하다. 지금 곧바로 위조를 할 수 있겠지?”

“당장 시행하겠나이다. 우선 소인의 마차로 가시지요. 그곳에 문방사우가 준비 되어 있사옵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기루 밖을 향해 걸어갔다.

동천몽이 화려한 차림새를 보며 웃었다.

“큰 건 하나 터뜨렸나보구나?”

“사실은?”

금설공자가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동천몽과 헤어진 사복서생은 곧바로 먹고 살길을 찾았다. 그가 찾는 먹고 살길이란 돈 많은 부자를 만나 그의 재산을 강탈하는 것이었다.

한참 먹고 살길을 찾아 헤매고 있는 그 앞에 항주 제일 부호 중 한 명인 용강수가 나타났다.

용강수는 고리채 업자였다. 이 지역 영세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폭리를 취했다. 제 때에 갚지 못하는 사람은 고용한 무사들에게 죽도록 얻어 맞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부정하게 모은 자만을 등친다는 자신의 삶의 좌우명에 용강수는 딱 들어맞았다. 용강수의 재산은 대부분이 은자이지만 항주에서 해남도를 오가는 범선 열 척과 조그만 금광 두 곳, 그리고 북경에 상당한 땅을 갖고 있었다.

가장 먼저 용강수의 재산에 관계된 서류를 훔쳐 위조를 했다. 관부에 보관된 서류도 위조했다. 만약을 대비해 이 지역 도독에게 엄청난 뇌물을 먹였다.

“빼앗았으면 좋은데 좀 쓰지 이렇게 주색잡기에 모두 날리느냐?”

“티는 나지 않지만 뒤로 좋은 일 좀 하고 있사옵니다.”

동천몽이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이 마차를 향해 다가가자 호위무사들이 동천몽 앞을 가로막았다. 사복서생이 손을 저어 경거망동 하지 말 것을 지시 했고 두 사람은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