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패륜
비렁뱅이의 얘기는 다시 시작되었고 군중들은 귀를 세웠다.
그러던 한 순간 돌연 얘길 듣던 사람들이 경악했다.
“뭐…뭐요?”
“정말이오? 어떻게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그런 쳐죽일 패륜아.”
본처에서 낳은 자식에 의해 둘째 부인이 겁탈을 당했다는 대목에 이르자 사람들이 분노했다. 어떤 사람들은 호신용으로 품에 갖고 있던 비수를 뽑아 들고 치를 떨었다.
“아무리 금지마공 때문이라고 하지만 어찌 그럴수가 있단 말이오?”
“그런 자식은 토막을 내어 죽여야 하오.”
“옳소.”
일백여명이 넘는 군중들이 길길이 날뛰었다. 처음부터 모든 사람들이 얘기를 듣기 위해서 모인 것은 아니었다. 운집한 군중들을 보고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내밀었다가 비렁뱅이의 얘기에 빠져 자리를 잡은 것이다.
“보아하니 꾸며낸 얘기같지는 않고? 말해보시오? 어느 개같은 집 얘기오?”
“맞아. 이런 얘기를 당신이 만들었을리는 없잖아. 말해봐. 어느 가문이 이렇게 더러워?”
사람들이 큰소리로 외쳤다.
“궁금하오?”
“말 좀 해보시오.”
비렁뱅이가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
“알고 싶소?”
“그걸 말이라고 해?”
“물론이오. 궁금해 죽겠수다.”
사람들이 빨리 입을 열라고 다그쳤다.
그런데 돌연 비렁뱅이가 눈물을 흘렸다. 느닷없이 눈물을 흘리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때 맨 앞에 자리를 잡은 키 큰 사내가 외쳤다.
“호…혹시 당신 얘기 아니야? 그러니까? 눈물을 뿌리지. 맞구만, 당신 얘기지?”
“당신이 누군데? 설마 얘기속의 두 번 결혼한 장사꾼?”
비렁뱅이는 대답하지 않고 울기만 했다. 마치 자신의 가슴속에 담긴 응어리를 토해내듯 눈물을 뚝뚝 흘렸다.
보고 있던 사람들까지 일부는 눈물을 찍었다. 남자의 눈물이 이토록 사람의 가슴을 헤집는 건지 오늘 처음에서야 알았다. 여인의 눈물은 숱하게 보아왔지만 남자의 눈물은 처음 본다. 아뭇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는 비렁뱅이의 모습은 처절하기조차 했다.
“틀림없어. 자신 얘기야.”
“쯧쯧! 얼마나 응어리가 졌으면 저렇게 울까? 실컷 우시구려. 눈물은 참으면 화가 된다오.”
“결국 자기 화를 풀기 위해 얘기를 한 것이었군. 가슴 속에 담고 있으면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말이야.”
사실 비렁뱅이의 정신은 똑바르지 못했다. 울화가 골수에까지 파고들어 정신착란을 일으켰다. 물론 하루종일 그런것은 아니었고 잠시 잠깐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가 있었다. 보름 전 폭우 속을 뛰어다니며 미쳐 날뛰고 있을 때 길을 가던 늙은 무명의 의원이 고백토담이라는 말을 던지고 갔다.
‘고백토담(告白吐談)’
마음에 있는 말을 사람들 앞에 털어 버리면 정신이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이후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찾아 다니며 끌어모았지만 모두가 미친 사람의 얘길 들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매담자들처럼 돈을 내놓으라고 하면 골치가 아팠으므로 좀체 여건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흐흐흐! 누군가 했더니 당신이었구려?”
돌연 좌중을 얼어 붙게 만드는 차가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모든 시건을 받으며 동천비가 비렁뱅이 곁으로 다가섰다. 동천비를 발견한 동오룡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정신이 돌아왔고 동천비를 알아 본 것이다.
“너는?”
“흐흐! 그렇소. 당신이 실컷 나쁜놈으로 떠들었던 장사꾼의 장자이오.”
“뭣이? 네놈이 그놈이란 말이냐?”
“가만, 그러고보니 얘기속의 장남과 비슷하게 생겼네. 정말이냐? 네놈이 그 못된 맏이란 말이냐?”
사람들이 흥분해 소리쳤다.
동천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나다. 저 비렁뱅이 입에서 나온 그 집 장자가 바로 나다.”
“ 나아…쁜놈.”
“너 같은 놈은 일단 맞아야 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었다.
순간 동천몽의 눈이 검게 변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동오룡이 흠칫했다.
동천비가 금지마공을 익혔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었다. 얘기를 들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평범하다. 이 안에 무림인이 있지 말란 법은 없지만 모두가 일반인들이었다. 설혹 무림인들이라고 해도 동천비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안되오. 여러분, 당장 멈추시오.”
사람들이 당치 않다는 듯 소리쳤다.
“멈추긴 뭘 멈춰, 나 이 사람 어지간하면 남의 일에 관여 하지 않는 성질이지만 이번만큼은 못 참겠소.”
“저런 놈은 때려 죽여도 누구도 우릴 욕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당신은 가만 구경이나 하쇼.”
동천비를 향해 다가가던 사람들이 멈칫했다.
동천몽의 눈이 시커멓게 변했다. 그것은 인간의 눈이라 하기보다는 지옥의 아수라를 보는 기분이었다. 본능적으로 위험 하다는 것을 깨닫고 일부가 뒷걸음을 쳤다. 하지만 동천비는 이미 마성에 완전히 젖어 있었다.
“흐흐흐! 모조리 죽여주마.”
동천비가 사람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촤아악!
동천비의 우장이 뻗었고 강력한 검은 강기가 사람들을 향해 쏟아져갔다.
그중 무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외쳤다.
“피…피하시오? 저것은 금지마공 묵곤혈참기이오.”
“그게 뭔…으악!”
“컥! 끄아악!”
가장 앞선 세 명의 사람이 즉사했다.
죽음을 발견한 사람들은 혼비백산했고 하나같이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살려 살려!”
“오늘 내가 미쳤어.”
그러나 채 두세 걸음도 떼지 못했다.
퍼퍼퍽!
동천비의 가공할 장력이 폭풍처럼 사람들을 덮쳤다.
순식간에 저자거리는 피로 얼룩졌다. 무공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고 일부는 무인이어서 검을 뽑아들고 대항했지만 조족지혈이었다.
빠악!
퍽!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심지어 살고자 주루와 도박장으로 뛰어든 사람들을 뒤쫓아가 완전히 숨을 끊어 놓았다.
저자거리는 죽음의 지대로 바뀌었다. 백여 구가 넘는 시신이 나동그라져 있었고 길가 창문으로 내다보던 사람들까지 자취를 감추었다. 혹시라도 동천비와 시선이 마주칠 것이 두려운 것이었다.
“처…천인공노할.”
동오룡이 더듬거렸다.
동천비가 다가섰다.
“오랜만입니다. 아버지.”
“네…네놈이.”
“그 계집 일은 실로 유감입니다.”
“닥쳐라. 어디서 더러운 주둥이를 놀리느냐?”
동오룡이 핏대를 세웠다.
“난 이미 너와 인연을 끊기로 했다. 힘이 있었다면 내 손으로 널 죽였을 것이지만 그러지 못하는 현실이 애석하구나. 너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 아닌 줄 이제 알았소? 난 짐승이오. 이미 짐승이 된지 오래이오이다.”
“아 그 사람 말을 들을 걸.”
동오룡이 탄식했다.
동천비가 세살 때였던가.
어느 날 집으로 탁발승이 들어왔다. 뚜렷하게 절을 다닌다고 할 수는 없지만 찾아오는 걸인이나 탁발승들은 절대 내치지 못하도록 했다. 내 집을 찾아오는 걸인이나 어려운 사람을 내치면 언젠가 화를 입는 다는 것이 조상대로부터의 가르침이었다.
워낙 소문난 천상각이다보니 찾아오는 사람도 많고 문턱이 닳을만큼 자주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법명을 무정(無情)이라고 밝힌 그 승려는 처음이었다. 어느 사찰에서 왔느냐고 경비무사가 물었지만 가르쳐줘도 모를 것이라고 했다.
대부분 입구 경비무사들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주기 위해 식량과 은자를 갖고 있는데 무정은 안으로 들어왔다. 정문에 이르자마자 첫마디가 천상각이 망한다는 얘길 했기 때문이었다.
천상각이 망한다는 말에 경비무사들이 흥분했고 검을 뽑아 죽이려 들 때 마침 외부에 일을 보러 나갔다가 들어가던 동오룡의 눈에 광경이 목격 된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동오룡은 범상한 승려가 아님을 알고 무정을 집안으로 불러 차 대접을 했다. 그리고 아까 문밖에서 했던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무정은 거침없이 천상각이 망할 것이라고 했다.
혹시라도 말을 번복할지 모른다고 여겨 많은 은자를 내 밀었다. 거액을 받으면 말을 바꿀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정은 돈은 돈대로 챙기며 여전히 천상각은 망한다고 했다.
동오룡은 어떻게 망하느냐고 물었다. 물론 망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약간의 비아냥기를 섞은 질문이었다. 그런데 무정은 차물에 손가락을 적셔 방바닥에 썼다.
‘역천(逆天)’
하늘을 거슬린다는 뜻을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은 여지껏 하늘을 섬기지는 않았지만 거슬릴 일은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거슬릴 일을 하지 않을 셈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역천이라는 말이 맞았다. 역천이란 말은 곧 자식이 부모를 죽인다는 뜻이기도 했다. 능씨가 자식에게 겁탈을 당했고 자신 또한 동천비 손에 죽게 될 처지에 있었다. 이거야 말로 완전한 역천이었다.
“그동안의 정리를 생각해 단번에 죽여드리지.”
동천비의 오른손이 뻗었다.
동오룡은 피하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으로 피할 수도 없었다.
퍽!
동천비의 장력이 정통으로 머리를 때렸다.
휘청!
동오룡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머리를 맞았지만 아무런 외상도 없었고 동오룡 또한 죽어가는 징후를 보이지도 않았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눈빛이었다.
강렬한 증오의 빛을 뿜어내던 눈빛이 점점 빛을 잃어갔다.
“내…내 아들이지만 넌 천벌을 받을 것이다. 언젠가는 반드시…하늘의 응징을…”
넘어지지 않기 위해 양손을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주위에 짚거나 기댈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모든…것이….내…내가 부른 화…이거늘….네가 아니라….아비인 내가 바….받아…야.”
“뒈지려거든 빨리 뒈질 일이지.”
동천비가 더듬거리며 말을 하는 부친의 면상을 갈겼다.
빠악!
“크아악!”
동오룡이 비명을 지르며 엎어져 숨을 거두었다.
툭!
멀쩡하던 목탁이 갑자기 두개로 갈라졌다. 목탁은 소리의 울림이 생명이다. 그래서 안을 움푹하게 만들기 위해 나무를 깎아내고 반쯤 틈을 만들어 놓는다.
하지만 나무의 재질이 워낙 단단하여 어지간해서는 부숴지거나 둘로 갈라지지 않는다. 심시어 일부 승려들 중에는 목탁을 병기로 사용할 만큼 강한 물건이었다.
“능동스님 왜 그러십니까?”
등 뒤로부터 자신과 같이 계를 받은 용오스님이 물었다.
척!
신발을 벗고 대웅전 안으로 들어선 용오스님이 기겁할 듯 놀랐다. 능동스님의 목탁이 소리를 내기 위해 벌려 놓은 틈을 따라 두 개로 갈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어찌된 일입니까?”
용오스님의 안색이 굳어졌다.
있을 수 없는 기괴한 일이 생기면 세속이나 절간이나 당황하고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아직 절간 생활의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 두 사람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꾸중을 듣지 않겠지요?”
절에서도 텃세가 있었다. 자신들과 일 년 차이나는 바로 위 사형이 무척이나 두 사람을 괴롭혔다. 물론 핑계는 세속의 때를 완전히 벗기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새벽까지 붙들어 놓고 불경 공부를 시키는 것을 비롯해 모든 잡일을 두 사람에게 떠넘겼다. 그야말로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었다.
목탁이 갈라졌다고 또 무슨 골치 아픈 일을 시킬지 몰랐으므로 두 사람은 오늘 일을 비밀에 붙이기로 했다.
능동이 잽싸게 갈라진 목탁을 소매춤에 감추려 들 때 등 뒤로부터 조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뭘 그렇게 숨기느냐?”
“으헛!”
두 사람이 놀라 돌아보자 한 명의 노승이 서 있었다.
“큰 스님.”
“스님.”
두 사람은 잽싸게 밖으로 뛰어나와 엎드렸다.
노승은 황어사의 방장스님 범천이었다.
“아니 목탁이 갈라졌구나.”
대웅전 바닥에 갈라진 목탁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허허! 우리 능동이 얼마나 세게 두드렸으면 바위보다 강한 목탁이 두개로 갈라졌단 말이냐?”
범천이 대웅전 바닥에 놓인 목탁을 들어 살피며 신기하다는 듯 미소띈 얼굴로 보았다.
“불만 있는게로구나. 그렇다고 목탁을 이렇게 조각내면 어떡하느냐?”
능동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니옵니다. 살살 때렸는데 그냥.”
“에끼 이놈, 그걸 말이 된다고 생각 하느냐? 이렇게 강한 목탁이 그냥 갈라질 리가 있느냐?”
그러면서 문설주에 쪼개진 목탁 한 개를 들고 세차게 후려쳤다. 목탁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놈 불만 있으면 말로 해야지 부처님을 모시는 귀한 목탁을 이런 식으로 만들면 못쓴다.”
능동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에는 억울한 빛이 역력했다.
“받거라!”
범천이 소매에서 주머니를 꺼내 밀었다.
“이건?”
“목탁 없이 어찌 부처님께 예불을 올릴 셈이냐? 당장 구해야 할 것 아니냐?”
산을 내려가 목탁을 사오라는 얘기였다.
산 아래 저자거리에는 목탁을 파는 곳이 두 곳 있었다.
“뭣 하느냐? 어서 해지기 전에 다녀오거라.”
능동이 공손히 두 손으로 주머니를 받았다.
“허허! 출가 칠십년이 되었지만 목탁을 부러뜨리는 놈은 처음이로세.”
범천이 조각난 목탁을 이리살피고 저리살피며 걸어갔다.
주머니를 든 능동이 불안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범천을 보았다.
탁!
용오가 어깨를 쳤다.
“뭐해, 어서 갔다 오라구?”
능동이 털도 없는 머리를 긁적이며 주머니 안을 들여다 보았다.
주머니 안에는 은자 일곱 닢이 들어 있었는데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거무튀튀했다.
처러럭!
능동이 손바닥 위에 은자 일곱 닢을 쥐었다.
그것은 분명한 돈이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는 넘쳐 날 만큼 흔했었다. 하루에 수십 만 냥을 쥐었다 놨다 했다. 은자 일곱 닢은 자신에게 돈이 아니었다. 막말로 길바닥에 떨어져 있어도 시선도 주지 않을 만큼은 미미한 액수였다.
콱!
능동은 은자를 세게 쥐었다. 너무도 소중한 은자 일곱 닢이었다. 필시 범천 스님은 이 일곱 닢을 모으기 위해 평생 아끼고 절약했을 것이었다.
“왜? 돈을 보니 마음이 달라지는가? 마음대로 하라구. 내려가 돌아오지 않아도 누구도 자네 탓은 하지 않을 거야.”
용오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금방 다녀오겠네.”
능동이 돈을 품에 넣고 등을 돌렸다.
해가 서산마루에 걸렸다. 저자거리까지 이십 리 길이었으므로 서둘러야 했다.
다다다닥!
능동이 달음박질을 쳤다.
다 쓰러져 가는 산문을 벗어나 산길을 내달렸다. 산은 조용했고 산새들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달려가는 능동의 눈앞으로 문득 가장 가슴에 기억되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는 항상 해가 떨어지고 저녁 이내가 깔려야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와 형들 눈에 띄지 않으려는 나름대로 계산이었다. 몰리 슬며시 뒷문으로 들어와 저녁을 챙겨 먹고 자신의 방에 박혀 아침까지 꼼짝도 않는다. 아침이 되면 새벽같이 일어나 밥을 훔쳐먹고 집을 나가버린다.
동생을 만나려면 한 밤중에 찾아가야 한다. 조금만 때를 놓치면 허탕을 치기 일쑤였다. 그 동생이 이렇게 달렸다. 달려서 집을 들어오고 달려서 집을 나간다.
거리에서 자신을 만나면 달려왔고 용돈을 타고서 달려간다. 어찌나 달음박질이 빠른지 바람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오늘따라 그 동생이 보고 싶다. 하지만 이제 영영 만날 수가 없다. 그 앞에 절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저자거리에 도착 했을 땐 이미 길가 상점들에 불빛이 하나 둘 들어차기 시작했다.
능동은 몇 번 심부름을 다녀 안면이 있는 불전(佛典)으로 쑥 들어갔다.
“능동스님 아니시옵니까?”
늙은 주인이 곰방대를 물고 있다가 아는 체를 했다.
“목탁 하나 주세요.”
“목탁 사시려구요?”
“제가 사용하던 것이 그만.”
두개로 갈라졌다는 말에 노인의 눈이 커졌다.
“허어! 괴이하군요. 이 장사 삼 대째 해오지만 목탁이 갈라졌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스님.”
“그래요.”
“허허! 해괴하군요. 이것 어떻습니까? 무겁지도 않고 단단합니다.”
능동은 노인이 내민 목탁을 이러저리 살피고 두들겨 보았다.
탁탁탁!
청아한 소리가 상점 안을 한 바퀴 돌아 저자거리로 흘러나갔다.
노인이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목탁을 두드리고 있는 능동을 쳐다보았다.
‘필시 부잣집 도련님이었을게야. 그렇지 않다면 손이 저리도 고울수가 없어!’
노인의 눈은 목탁을 두들겨 보고 있는 능동의 흰 손에 머물렀다. 마치 여인의 손처럼 손가락이 길고 희다. 처음 능동스님을 만났을 때부터 점잖은 말투와 맑은 음색과 고운 손길에서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부자집 도련님이라면 무슨 사연이 있어 세속의 풍요를 외면하고 출가를 했을까에 생각이 이르렀다.
‘여자가 분명해.’
부자집 도련님이 세상 괴로워 출가할 일이라면 여자말고는 다른 문제는 없다고 확신했다. 틀림없이 돈 없는 가난한 집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혼인을 원했지만 이쪽 집안에서 가로막았을 것이다. 결국 이루지 못할 사람에 비관한 나머지 출가를 결심한 것이라고 나름대로 예리한 분석을 내렸다.
“이걸로 주세요.”
이것 저것 몇 개의 목탁을 꺼내 두드려 보더니 짙은 자색 목탁을 쥐었다.
목탁값을 계산하고 돌아서는 능동을 향해 주인은 허리를 구부렸다.
“또 오십시오. 능동스님.”
목탁을 보자기에 싸 들고 걸음을 재촉했다.
아직 밤이면 무섭다. 무예에 가까 울 만큼 뛰어난 호신술을 갖고 있지만 이상하게 밤이 무섭다. 특히 산길은 더욱 사지를 움츠리게 만든다.
세속시절 상단을 이끌고 산과 강을 무수히 건넜고 심지어 온갖 공포의 전설이 깃든 지역을 지나기도 했지만 당시는 주위에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괜찮았다. 하지만 절간 생활은 항상 혼자였기 때문에 오싹했다.
거의 뛰다시피 저자거리를 벗어나던 능동의 발걸음이 멈췄다. 중심부는 길가 상점들이 켜 놓은 불빛에 환하고 사람들도 많았지만 저자거리를 벗어나는 지역은 어둑했고 통행하는 행인도 뜸했다.
멈칫!
능동의 고개가 좌측으로 돌아갔다. 반장 높이로 벽돌을 쌓은 대 위에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시방대(屍放臺)였다. 시방대는 연고가 없거나 유족이 찾지 않은 시신을 인근 사람들이 발견하고 임시로 옮겨 놓는 곳이다. 사흘을 기다려도 유족이나 임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관가에서 처리하는데 누군가 주인 없는 시신을 발견하고 올려놓은 것 같았다.
능동의 발걸음이 멈춘 것은 이쪽을 향하고 있는 시신의 신발이었다. 어두웠지만 신발 바닥이 흰색이어서 눈에 띄였다. 천하에서 신발 바닥이 흰색으로 되어 있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기에 사천 제일혜가(第一鞋家) 만씨세가에서 만든 혈록혜였다. 혈록혜는 붉은 사슴으로 불리는 혈록의 등 가죽으로 만든 것인데 이상하게 가죽 안쪽은 흰색을 띄고 있었다. 혈록의 등가죽은 물이 스며들지 않고 열에 강하며 질겨 고가로 거래되었다. 혈록혜를 모방한 가짜 신발도 많이 나도는데 아무튼 능동이 시방대를 향해 다가갔다.
시방대를 다가가며 능동의 발걸음은 몇 번이나 가다서다를 반복했다.
혈록혜가 비싸다고는 해도 자신의 부친만 신으라는 법은 없었다. 또한 워낙 고가의 신발이다보니 가짜가 횡행했고 모조품은 은자 닷푼 정도면 구입할 수가 있어 살림이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도 즐겨 신는다.
하지만 본능은 자꾸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또다시 능동의 눈이 빛을 뿌렸다. 시신은 낡은 거적으로 덮여 두 발과 흑의가 삐죽 나와 있었는데 걸치고 있는 의복 또한 묵상금이었다. 묵상금은 고가의 비단이다. 묵상금은 모조품이 없으므로 시신이 신고 있는 혈록혜가 진품일 가능성이 높았다.
척!
가까이 다가간 능동이 시신의 얼굴이 있는 쪽으로 손을 뻗어갔다. 막상거적을 쥐려고 하니 오싹했다. 잠시 심호흡을 두어번 한 능동이 거적을 당겼다.
스르르!
시신이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 능동의 눈이 부릅떠졌다. 한참 시신의 얼굴을 쳐다보던 능동이 세차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눈을 대여섯 번 깜빡거린 후 다시 확인을 했다.
하지만 시신은 분명 부친이었다.
“아…아버지!”
다가가 무릎을 꿇고 확인을 했지만 틀림없었다.
반드시 눕혀 얼굴을 들이대듯 하고 봐도 영락없는 부친 동오룡이었다.
“아버지 이게 어찌된 일이옵니까? 아버지.”
능동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천하에서 가장 돈이 많은 부친이 이런 연고도 없는 외진 곳에서 죽은 시신으로 방치되어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무리 살피고 또 살펴도 부친이었다.
“아버지!”
급기야 능동이 절규를 터뜨렸다.
장례는 한 밤중에 이뤄졌다. 연락을 받고 범천을 비롯한 용오와 여러 사형제들이 거적에 시신을 말아 황어사로 옮겼다. 간단한 장례예불이 있었고 시신은 황어사의 전통에 따라 풍장으로 지내기로 했다. 황어사 승려들이 많이 묻힌 구의산 계곡 한 자락에 동오룡의 시신은 놓였다. 시체는 밤을 넘기지 못하고 짐승들에 의해 사라질 것이었다.
자시(子時)가 넘었는데도 잠이 오지 않는다.
이미 용오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능동은 용오가 깨지 않게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휘이이!
쌀쌀한 바람이 몸을 움츠리게 했다.
딸랑딸랑!
멀리 대웅전 처마끝에 달린 풍경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다. 요사채 마당으로 나온 능동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천하를 뒤흔들던 대상가의 주인이 객사를 하다니, 그것도 주인없는 시신으로 시방에다 올려지다니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아버지가 절강성에서 이곳 호남까지 왔는지, 그리고 누구의 손에 죽었는지 의문투성이었다.
‘아버지!’
동천비가 손을 잡은 목와북천이 천하를 거머쥐었기 때문에 최소한 가문의 몰락은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무림맹이 사라졌으므로 천상각은 다시 탄탄대로를 달릴 것이라는게 능동의 생각이었다. 목와북천이 천하를 쥐면 천하상권의 전부를 동천비가 쥐게 약속 되어 있다는 언젠가 부친으로부터의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안심했다. 그래서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출가를 결행한 것이었다. 그런데 부친이 비참하게 죽다니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보고 싶었다. 이건 아니었다. 자신이 예상한 것과는 너무 딴판이었다. 우선 급한대로 내일 아침 범천에게 양해를 구하고 절강으로 돌아가 집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결심을 굳히고 돌아서려는데 범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일아침까지 기다릴 것 뭐 있느냐?”
“큰 스님.”
범천이 우뚝 서 있었다.
범천이 조용히 말했다.
“가거라. 세속의 삶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으면 너 또한 이곳 생활이 불편 할 것이다. 돌아가서 모든 것을 완전히 정리하고 오거라. 혹여 그럴리는 없겠지만 운명이 널 다시 환속시켜야 한다면 돌아오지 않아도 되느니라.”
“크…큰 스님 그건 아니되옵니다.”
“인생사 한 치 앞을 모르느니라. 어찌됐든 어서 가보거라. 가서 궁금한 모든 것을 알아 보거라.”
능동은 곧바로 짐을 쌌다.
짐이라고 해봤자 이곳을 찾아 왔을 때 입고 왔던 흑의와 은자 몇 푼이 전부였다.
사흘 후 능동은 천상각이 있는 소주에 도착했다. 혹시라도 아는 사람들을 만날까봐 삿갓을 깊숙이 눌러썼는데 오후가 되면서부터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내리를 비를 맞으며 소주거리를 걷던 동천완은 주루로 들어섰다.
자신이 이곳에 있을 때 자주 드나들었던 맹상루였다. 삿갓을 깊숙이 눌러써서 점소이 가복규가 알아보지 못했다. 오며가며 은자 푼이나 집어 주어 자신만 보면 이마가 바닥에 땋을 만큼 허리가 숙여지는데 오늘은 뻣뻣하다.
새삼 돈의 위력을 느끼며 만두를 시켰다.
“화무십일홍이라지만 너무 허망하군.”
“그러게 말일세. 천하의 천상각이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가 되어 사라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동천완의 고개가 돌려졌다.
세 명의 장사꾼이 술과 음식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나저나 누가 그랬을까? 혹시 형님 흉수에 대해서 아는 것 있습니까?”
두 사내가 뚱뚱한 사내를 쳐다보았다.
뚱뚱한 사내는 일행 중 가장 연장자인 듯 머리고 희끗했다.
“흉수에게 직접 내가 했소하는 대답을 듣지 않아 알 수는 없지만 강호 소식통에 정확한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남궁천일 가능성이 가장 높네.”
“남궁천이라면 전 맹주 아닙니까?”
“그가 살아 있단 말입니까?”
“그가 언제 죽었나?”
뚱보 사내가 묻자 물었던 좌측 사내가 피식 웃었다.
“그건 아니지만 워낙 소식이 없어 소제는 죽은 줄 알았습니다.”
뚱보사내가 말했다.
“목와북천에서 남궁천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지만 실패했다네. 아무튼 남궁천의 천상각을 잿더미로 만든 흉수로 생각하는 이유는 한 가지 이유일세.”
두 사내의 눈이 빛을 뿌렸고 동천완 또한 뚱보 사내의 입을 주시했다.
“현재 남궁천이 이끌고 있는 세력이 동영의 막룡세가와 쌍벽을 겨루는 창송세가라네.”
“소제도 그 애긴 들었습니다.”
“남궁천이 창송세가와 손을 잡았다는 것은 이제 거의 알려졌지. 문제는 남궁천이 창송세가를 끌어 들이며 내건 조건일세.”
“그렇잖아도 그 조건이 가장 궁금합니다. 뭡니까?”
두 사내의 눈이 반짝 거렸다.
뚱보사내가 말했다.
“중원의 상권일세. 알겠지만 창송세가는 무가이기도 하지만 상문이기도 하네. 아마 천하 상권을 창송세가에 떠넘긴다는 약조를 하지 않았느냐는게 사람들의 짐작일세. 그 증거가 바로 천상각의 잿더미로 만든 거지.”
“자신의 악속을 보다 명확히 보여주기 위해 천하제일상가인 천상각을 불태웠을 것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렇네.”
“미친놈, 아무리 복수에 눈이 뒤집혀도 그렇지 섬놈들을 끌어들이다니.”
“그것이 권력의 속성이라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아군도 적군도 그들은 가리지 않네. 무지한 백성들만 이것 저것 따질 뿐.”
동천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돈을 지불하고 곧바로 천상각을 향했다.
세 사내의 말처럼 천상각은 사라지고 없었다.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흔적도 없었다. 수백 년을 천하제일상가로 군림해왔던 천상각은 검은 숯덩이가 되어 비속에 뒹굴고 있었다.
동천완은 넋을 잃었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겠다 싶어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를 결행했는데 자신의 짐작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린 것이었다.
와직!
불에 탄 잔해를 밟으며 장원을 둘러 보았다.
장원은 검게 변한 채 을씨년스럽게 웅크리고 있었다.
척!
걸음을 멈췄다.
녹풍원이 있던 곳이었다. 다른 곳보다 유난히 많이 불탄 탓에 잔해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불끈!
동천완의 주먹이 쥐어졌다. 가슴속에서 거친 분노와 뜨거운 열기가 솟아 올랐다.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증오하거나 미워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마음 속으로부터 한 사내에 대한 미움이 부글거렸다. 자신의 가문으로부터 엄청난 황금을 빼앗다시피 가져갔다. 부친의 삶 또한 돈을 벌려다보니 절대 깨끗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런 이유로 남궁천의 행위를 별반 탓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화가 치솟았다. 그가 눈 앞에 있다면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미타불!’
격렬히 타오르는 살심을 짓누르기 위해 서툴지만 불호를 외웠다. 불같은 감정을 다스려 보기 위함이었다. 겨우 마음을 어느 정도 진정시켰다.
‘천상각의 선조들이여 부디 이 후손을 용서하소서.’
혼잣말을 흘리며 동천완은 몸을 돌렸다.
오래 머물러봤자 증오심이 생길 뿐이었다. 천상각에 희생된 수많은 군소 상인들과 상가의 원혼들이 남궁천의 손을 빌어 아버지에 당한 설움을 갚았으려니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씻겨 지지 않은 한 가닥 분노를 짊어지고 동천완은 검은 잿더미에서 멀어져 갔다.
사흘 후 동천완은 다시 황어사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자 범천의 눈이 부릅떠졌다. 놀라는 것을 보아 동천완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 하는 듯 했다.
능동은 가사를 걸치고 곧바로 대웅전 마루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목탁을 두 드리는 능동의 두 눈이 지그시 감겼는데 복받치는 여러 감정을 삼키는지 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잡시 서서 능동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범천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삶은 참으로 고해로다!’
멈칫!
돌아선 범천의 눈이 빛을 뿌렸다.
문득 저 만치 한 명의 흑의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규모는 작지만 워낙 오래된 고찰이어서 향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황어사이다. 척 보면 향객인지 아닌지 구별이 가는데 아니었다. 예불을 들이고자 찾아온 사람이 아니었다.
파르르!
흑의사내는 빠르지 않은 걸음이었는데 범천의 흰 눈썹이 떨림을 보이고 있었다.
‘우웃!’
사람이라기보다는 한 줄기 바람이 걸어오는 듯 부드러웠다. 사람들에게는 고유의 기운이 있어 무인은 차가우며 상인에게는 끈적끈적한 돈의 냄새가 짙다. 관리에게는 오만한 기세가 꿈틀거리고 거지는 쉴 사이 없이 눈을 움직이며 상대를 살피는 버릇이 있다. 그런데 흑의사내에게서는 이런 기운과는 동떨어진 바람같은 느낌이 물씬했다.
바람이란 나뭇가지를 흔들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만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내는 다가오고 있었지만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리기도 했다가 단단한 바위 모습으로 바뀌기도 했고, 살랑거리는 물결처럼 흩어지기도 하는 놀라운 모습을 했다.
하나 범천이 각장 놀란 것은 미소였다.
흑의사내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있었는데 범천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대웅전의 석가세존을 보았다.
‘이럴수가!’
믿을 수 없게도 흑의사내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대웅전의 것과 닮아 있었다.
꿈틀!
범천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단순이 생김새 때문에 이 모든 현상이 일거에 생기는 건 아니었다. 평생을 불가에 몸을 담았다. 뭔가 커다란 깨우침을 얻기 전에는 나타나지않는 현상들이며 모습이었다.
흑의사내가 합장을 했으므로 범천 또 공손히 합장을 했다.
탁탁탁!
흑의사내가 범천의 어깨너머 대웅전에서 목탁을 두드리는 능동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능동을 바라보는 흑의사내의 두 눈에 짧은 파장이 생겼고 범천은 놓치지 않았다.
“어디서 오셨소이까?”
범천은 향객이 아니라고 확신하여 물었다.
“저기 저분은 좀 뵈러 왔습니다.”
흑의사내가 턱으로 대웅전에서 예불을 올리는 능동을 가리켰다.
범천이 대웅전을 일별하고 물었다.
“능동과는?”
“능동? 법명이옵니까?”
“그렇소이다만.”
흑의사내의 표정이 굳어졌다.
법명을 듣는 순간 한 가지를 유추해 내었다. 그것은 모친 능씨와 아버지 성씨를 붙여 지은 것이 능동이라는 법명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범천은 앞을 비키지 않았다.
그것은 이쪽의 정확힌 신분을 묻는 것이었다.
“소생에게, 형님이 한 분 있습니다.”
흑의사내가 말을 잠시 더듬거렸다. 범천은 흑의사내의 눈 깊숙한 곳에서 한 줄기 고통이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행방이 묘연하던 차에 누군가 이곳에 가보면 계실 것이라고 해서. 세속에서의 형님 이름은 동천완이라고 합니다. 소생은 동천몽이라고 하지요.”
목탁을 두드리는 동천완에게 들리도록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예상대로 일정한 흐름을 타며 울리던 목탁소리가 불규칙 해졌다. 원래대로 흐름이 금방 회복되었지만 짧은 순간 간격이 길어졌었다.
그제서야 범천이 돌아섰다.
탁탁탁!
한 참동안 목탁을 두드리는 동천완을 바라보던 범천이 말했다.
“만나 보시구려.”
그것은 능동이 동천완임을 인전하는 대답이었다.
동천몽이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동천완은 꼼짝도 않고 목탁을 두들기며 중얼거렸다.
‘선남자(善男子)약유무량백천만억중생(若有無量百千萬億衆生)수제고뇌(受諸苦惱) 문시관세음보살(問是觀世音菩薩)’
흑의사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형님 답구려. 어느새 법문을 그렇게 공부했소?”
멈칫!
동천완이 이번에는 동작을 멈췄다.
잠시 정면의 세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동천완이 큰 절을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섰다.
흠칫!
흑의사내가 깜짝 놀랐는데 동천완의 양 볼에 눈물이 범벅이 되어있었다.
“혀엉!”
동천완이 말했다.
“도…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울지 않으려고 해도 너무나 화가 나고 아버지가 불쌍하기도 하고.”
동천몽이 눈을 치켜떴다.
“아버지가 불쌍하다뇨? 그 돈 많은 분이.”
동천완이 말을 가로질렀다.
“말을 가려 하십시오. 한 번만 더 비아냥거릴 땐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돌변한 동천완의 태도에 동천몽이 눈을 크게 떴다.
동천완이 마른침을 크게 삼키며 말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이레쯤 되셨습니다. 구화산 골짜기에 내가 모셨지요.”
동천완의 목소리는 떨렸다.
“누가 죽였소?”
“모릅니다. 다만.”
동천완은 저자거리를 나갔다가 시방대 위에 올려진 부친의 시신을 보았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그럼 이곳에서 죽었다는 말 아니오. 일목.”
퍽!
일목이 마당으로 떨어져 내리자 범천이 소스라쳤다.
더구나 하나 뿐인 눈을 번득이며 자신을 힐끗 쳐다보자 더욱 소름이 끼쳤다.
일목이 동천몽을 향해 허리를 구부렸다.
“부르셨나이까 대법왕님이시여.”
범천이 소스라쳤다.
일목의 입에서 분명히 대법왕이라는 말이 흘러 나왔기 때문이었다.
동천완이 동생에게 존칭을 하는 것부터가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이보시오. 저분 시주께서.”
“닥치시오. 감히 대법왕님을 시주라니?”
일목이 금방이라도 일장을 날릴 듯한 살벌한 기세를 풍겼다.
“맞소. 저분께서는 만인지상이자 유아독존이신 포달랍궁의 대법왕님이시오.”
“마…맙소사. 정말이오.”
“이 노승이.”
이 늙은이가 하려다 얼른 말을 바꾸었다. 자신보다 연장자일 뿐 아니라 엄연히 황어사의 큰 스님이었다.
동천완이 조용히 마당으로 내려서며 말했다.
“그렇사옵니다. 큰 스님, 사사로이는 저의 아우되지만 분명히 대법왕이십니다.”
범천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부릅뜨고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