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64화 (64/71)

제1장 십팔만 리

세 사람은 사주(沙州)에서 가장 큰 장항루를 찾아 들어갔다. 극심한불황에 허덕이던 장황루 점소이 용천삼은 입이 함지박만 해졌다.

고작 손님 여섯에 함지박 만해진 것이 아니라 술이 몇 잔 돌고 들락거리다가 손님 중 한 명이 중원제일부호 천상각의 차기 가주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감숙성이지만 천상각의 이름은 이곳에서도 유명했다.

한 병에 금화 두냥을 호가하는 최고급술 백건아가 벌써 서른 병째 들어오고 있었다.

“핫핫핫!”

“허허헛!”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동천비는 천랑사신이 돌아가며 따라주는 술을 기분 좋게 받아 마셔 취기가 완연해졌다. 하지만 그의 주량은 끝이 없었고 천랑사신 또한 미친 듯이 마셔댔다. 특히 백건아는 꿈에서조차 마셔보길 원했던 귀한 술이었기에 더욱 네 사람은 즐겨 마셨다.

마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주까지 국물로 이우러진 것이어서 뒷간을 가고 싶어졌다.

점소이의 안내를 받아 뒷간을 들어서던 마비가 멈칫 했다. 자신보다 앞서 음처식이 볼일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처식 왼쪽으로 나란히 서서 아랫도리를 내린 마비가 입을 열었다.

“처식아. 난 네가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또한 네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안다고 해도 막거나 방해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항상 사부들이 말했듯 넌 천랑사신의 공동 제자이니 그에 걸맞게 살면 된다.”

음처식이 아랫도리를 툭툭 털며 돌아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세상은 그렇게 녹록한 곳이 아니니라.”

음처식이 벌게진 얼굴로 말했다.

“이 제자도 압니다.”

“강호에는 숨은 기인이사들이 바다가 모래알처럼 많다고들 한다. 나 또한 그 말에 공감한다. 드러난 사람보다 숨겨진 사람이 더 많고 세상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세상사에 관심을 끊고 사는 건 더욱 아니다. 그들이 나오지 않은 것은 나올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을 끌어내지 마란 말씀이군요?”

“그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면 그땐 위험해진다. 즉 이건 아닌데 하고 그들이 분노하면 골치 아파진다는 얘기니라.”

음처식이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그들이 나올 일은 없을 것입니다. 설혹 나온다고 해도 전혀 두려울 것도 없구요. 동천비 형님은 충분히 그들을 막아낼 수 있는 그릇입니다. 단지 이 제자가 염려 하는 것은 사부님들입니다.”

“우리가?”

“필시 네 분께 많은 일이 주어질 것입니다.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살만큼 살았다. 죽는 건 이제 우리에게 관심사가 아니다. 오로지 우리의 관심사는 너이니라. 사실 네가 그렇게 쉽게 동천비를 끌어안을 줄 몰랐다.”

음처식이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조금 전 살 만큼 사셨다고 했지요. 그래서 목숨 따위는 그다지 장애물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의 말씀을 하셨는데 제자 또한 그러하옵니다. 어차피 사부님들을 만나 덤으로 얻은 인생입니다. 죽어도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음처식이 뒷간을 걸어나갔다.

걸어나가는 음처식을 바라보는 마비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음처식의 말속에서 세상을 향한 가혹한 증오를 읽은 것이었다. 그것은 불특정 다수를 향한 미움이 분명했다. 불우한 성장환경을 운명으로 받아들여 삭히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많은 사람들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었다.

‘저놈이!’

자신의 불행을 남의 탓으로 여기면 안된다. 물론 타인에 의해 자신의 삶이 굴절 될 수는 있지만 얼마든지 노력하면 벗어나고 가혹한 굴레를 뿌리칠 수가 있다. 혹시라도 세상을 곡해할까봐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만 것 같았다.

“뭘 그렇게 생각하는가?”

독두포가 아래춤을 꼬나쥐고 다가왔다.

“별것 아닐세.”

“자네 얼굴에는 별것이라고 쓰였는데 아니란 말인가?”

독두포가 아랫도리를 내려 시원하게 분출하고 있었다.

“처식이 때문이겠지? 내버려 두게. 사람은 가르쳐서 될 것이 있고 본인이 얻어 터지고 맞아 깨져 터득할 것이 있네. 녀석은 얻어 터지고 깨져야 세상 무서움을 알 아이네.”

마비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자네는 이미 녀석의 속셈을 읽었단 말인가?”

“십사 년을 키웠네. 모르면 말도 안 돼지. 몰려오는 소나기는 맞는 법일세. 소나기의 무서움을 알려면 맞아 봐야 하네.”

“만약 맞아도 너무 호되게 맞아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찌할 건가?”

“하는 수 없는 노릇 아니겠나? 그게 인생일진데.”

독두포가 붉은 웃음을 지으며 휘적휘적 걸어갔다.

“헛헛헛!”

마비는 한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굳은 표정으로 넘어가는 석양을 보았다. 자욱한 구름속에 갇힌 석양이 오늘 따라 희멀겋다.

그들을 저지할 개인이나 집단은 없었다. 그들의 힘이 세기도 했지만 강호는 이미 지쳐 있었다. 무림맹과 목와북천의 싸움으로 호된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그들을 가로막을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천랑사신의 등장은 폭풍이었다. 그들은 흑과 백을 막론하고 투항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무조건 품으로 끌어안았다. 그러나 저항하거나 거절하면 피로 댓가를 지불했다.

특히 천하를 장악했으면서도 완전한 재편을 이루지 못한 목와북천의 세력들이 그들의 집중 표적이 되었다. 무림맹과는 달리 목와북천의 세력들은 그럭저럭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집중적으로 그들을 끌어 들였다.

처음에는 저항을 하면서 목와북천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지만 완전한 정비가 이뤄지지 않은 탓에 함부로 병력을 움직이기란 쉽지 않았다.

아래로부터의 긴급 도움을 받은 목와북천 상층부 또한 고민이 컸다. 유일한 세력이라고는 흑도십문 중 마지막 세력인 귀견(鬼犬)뿐이었는데 그들은 말 그대로 최후의 보루였다. 아무때나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마지막 패감이었다. 만약 이들을 보냈다가 목와북천의 본진이 누군가로부터 역습이라도 당하는 날이면 끝장이었다. 그 만큼 천하를 장악했지만 현재 목와북천의 힘은 여유가 없었다. 그런 약점을 알아차린 듯 천랑사신의 피바람은 걷잡을 수 없이 몰아쳤다.

천하는 다시 피 바람에 휩쓸렸다. 패업천하를 이룬지 반년 만에 강호는 목와북천과 천랑사신이 이끄는 두 세력으로 조각나고 만 것이었다.

잘려나간 왼쪽 어깨의 상처도 아물었다. 왼쪽 팔이 사라지면서 처음에는 상당히 당황했다. 왼쪽 팔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가 이토록 큰지 몰랐다.

그중 가장 큰 것은 몸의 무게중심이었다. 무인에게 있어 팔은 병기를 쥐고 적을 쓰러뜨리는 공격의 최일선 도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심을 잡아 주는 역할을 했다. 사람이 쓰러질 때면 팔을 휘젓는 이유가 바로 중심을 잡기 위함이다. 그런데 왼쪽 팔이 사라지면서 몸의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고수들의 싸움에서 중심을 빨리 잡을수록 얻어지는 득이란 상상을 초월하고 생사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아오는 날 마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왼팔을 의식하지 않고 움직이는 수업에 매진했다. 처음에는 무척 힘들었는데 타고난 무사답게 금방 왼팔이 잘렸다는 것을 몸이 인지했다. 그러면서 어색함이 점차 사라지며 몸은 조금씩 예전의 상태로 돌아왔다.

그런데도 아오의 표정이 풀어지지 않자 창송이 물었다.

“왜 그러느냐? 아직도 중원에 들어온 것이 불만이어서 그런 얼굴을 하느냐?”

창송이 술잔을 내 밀었다.

중원에 들어와 는 것은 술 뿐이었다.

아오는 미련없이 잔을 받아 마셨다.

“언제까지 이렇게 술만 마시면서 하루하루 지내야 합니까?”

“군자의 복수는 십년이 지나도 늦지 않다는 중원의 말이 있다더구나.”

아오가 창송을 쳐다보았다.

“주군께서는 소인이 팔 따위 하나 잃었다는 것에 목매고 있는 줄 아시옵니까?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피를 섭취하고자 하는 줄 아십니까?”

말없는 아오가 정색을 하자 창송이 반쯤 들어올렸던 잔을 내렸다.

“아니란 말이냐?”

“물론이지요. 인간의 몸이 무엇이옵니까? 크게는 만물을 다스리는 제왕적인 위치에 있는 동물이지만 사사로이는 도구입니다.”

“도구?”

“도구란 무엇입니까? 사용하지 않으면 녹이 스는 것 아니옵니까? 중원에 들어온 지 벌써 두 달이 넘어가고 있사옵니다. 한데 우린 처음 왔던 날 마셨던 피 말고는 아직까지 피 구경을 못했습니다. 몸이 나태해지면 정신도 삭습니다.”

창송의 눈이 강렬하게 빛을 뿌렸다.

아오는 단호히 말했다.

“요즘 새로운 세력이 나타나 목와북천이 접수한 땅과 세력을 가로채고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우리도 서둘러 세력을 확장하고 빼앗아야 할 것 아닌지요? 벌써부터 술과 계집질에 빠진 수하들이 한 둘이 아니옵니다. 이 모든 것은 몸이 놀고 있기 때문이옵니다. 녹이 슬고 있사옵니다. 주군.”

창송의 술잔을 비우더니 자신이 직접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쫘르르!

술을 따르며 말했다.

“아주 좋은 말이다. 몸이 놀면 정신 또한 나태해진다. 하지만 이것 한 가지를 알거라. 난 그동안 중원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는데 가장 눈에 들어온 말이 있었다. 전쟁은 삶이라는 중원의 말이 있더구나.”

아오의 눈이 빛을 뿌렸다.

“전쟁이 삶이라면, 하나의 전쟁이 자칫하면 평생을 갈 수도도 있다는 말이오?”

“여긴 중원이다. 동영은 한 달이면 끝에서 끝까지 달려갈 수가 있겠지만 중원은 일 년 아니라 십년이 걸려도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더구나. 중원의 수많은 전쟁이 그걸을 증명하고 있다. 동영은 한번 지나가면 정리가 되지만 중원은 지나간 뒤에 제대로 뿌리는 내리지 못하면 다시 싹을 틔운다는 말이니라. 목와북천을 보거라… 뿌리를 내리지 못하니 그다지 세찬 바람도 아닌데 흔들리고 쓰러지지 않느냐? 이십 패기에 패업전쟁에 뛰어들어 늙어 죽어도 태평성대를 못보고 죽는 일이 허다한 곳이 중원이더구나. 서둘러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곳이 중원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여긴 동영이 아니다.”

서둘지 말라는 뜻이자 넓고 무한한 중원이라는 말이다.

동영은 좁다. 그래서 아무리 큰 전쟁도 한 달을 넘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중원이기 때문에 동영과는 전쟁의 규모나 시간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몇 일 싸워 끝날 것 같았으면 내가 어찌 모든 가솔을 데리고 왔겠느냐. 몇 명만 데려오지. 동영에서 싸우듯 했다가는 금방 지쳐 죽을 것이다.”

“중원이 그렇게 넓습니까?”

“오추마를 아느냐?”

“천하제일마 아닙니까?”

동영에는 오추마가 귀하다. 물론 귀하기로는 중원도 마찬가지지만 동영은 더욱 희귀해 부르는게 값이었다. 하지만 대부호들이나 지방의 영주들은 한 두필 갖고 있는데 오추마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난다 긴다 하는 말들도 그들과는 겨룰 수 조차가 없었다.

“그런 오추마로 반 년을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구나.”

“으헉, 반 년?”

아오의 눈이 커졌다.

창송이 술잔을 비우고 일어섰다.

“서둘지 마라. 느긋하게 마음을 먹어라. 이루기만 하면 천하의 상권을 얻는다. 동영보다 수백 배 수천 배 큰 상권이다. 말 그대로 상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니라.”

아오가 일어나 허리를 구부렸다.

“속하의 생각이 너무 좁았사옵니다. 송구하옵니다.”

“아니다. 난 너의 충정과 투쟁력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되어 흡족하다. 검을 뽑지 않았지만 전쟁은 이미 시작 되었다. 적의 움직임을 살피는 것 또한 전쟁 아니겠느냐?”

그 말은 지금 천랑사신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오의 눈이 커졌다. 왜 창송이 자신의 주군이 되어야 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헛헛! 자네가 왜 요즘 내 방 출입을 않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이유가 있었군.”

문이 열리고 남궁천이 들어섰다.

아오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남궁천이 창송을 보며 말했다.

“가주의 말을 엿들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오. 아오의 얼굴을 보기 위해 잠시 왔다가 어쩔수 없게 듣게 되었소. 이해하시오?”

“괜찮소이다. 비밀 얘기도 아닌데요 뭘.”

“가주께서 이해하시니 고맙구려. 그나저나 무척 지루한가 보구려?”

아오를 향해 말했다.

아오가 고개를 숙였다.

“소인의 생각이 좁았사옵니다.”

“가주 말씀처럼 중원은 곧 천하이오. 동영이 아니오. 동영에서처럼 전쟁 했다가는 모가지 잘리기 십상이오. 헛헛헛.”

아오의 얼굴이 벌게졌다.

자신의 생각이 너무 모자랐고 부끄러웠다.

그리고 남궁천에 대한 일말의 불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사실 패장이라고 하여 마음 한구석에 그에 대한 불신임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패장도 동영식의 해석은 곤란하다는 것을 지금 느꼈다. 비록 목와북천에게 패하고 자신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지만 그에게서는 여유가 느껴졌다. 최소한 겉모습을 봐서는 패장이라기보다는 전쟁을 즐길 줄 아는 장수의 모습이었다.

“아오에게 한 가지 선물을 줄까하오.”

“선물?”

“예전에 받은 것도 있는데 이제 나 또한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 할 것 아니오?”

창송과 아오 모두 어떤 선물인지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장수에게 선물이라는게 뭐 다른게 있겠소? 전쟁 말고는?”

“전쟁을 시작하겠다는 말이오?”

“감사하옵니다.”

아오가 큰 절을 했다.

남궁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쟁이랄 것도 없소. 그냥 이삭 줍기인데 뭘.”

“이삭 줍기?”

“조금전 밖에서 들었는데 창가주께서 중원은 동영과 달라 지나간다고 해서 획득 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다시 빼앗긴다는 말을 들었소.”

“지난 두 달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공부한 결과인데 맞은 말인지 모르겠구려?”

“겸손이시오. 맞는 말일 뿐만 아니라 완전한 사실이오. 그래서 지금 채 뿌리를 내리지 못한 곳을 차지해볼까 하오.”

“그곳이 어디오?”

“천랑사신이 지나간 자리요.”

창송의 눈이 이글거렸다.

아오 역시도 마른 침을 삼키며 전의를 불태웠다.

“서로 부딪히는 것만이 전쟁은 아니오. 언뜻 비겁해 보일지 모르지만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이 기본 바탕인 전쟁에서 방법은 중요하지 않는 것 아니겠소?”

“후…훌륭한 말씀이오. 맹주.”

“대신 우린 천랑사신처럼 많은 땅을 뺏지는 않을 것이오. 우리가 운영하고 지켜낼 수 있는 세력과 땅만 찾을 것이오. 창 가주의 말처럼 중원의 전쟁은 일 년이 걸릴지 십년이 걸릴지 알 수 없소. 다만 능력 밖의 것은 탐내지 않아야 한 다는 것이오.”

아오의 눈이 작아졌다.

감동이 일어나면 눈이 작아지는 버릇이 있었다. 그가 보는 남궁천은 주군 창송과는 또 달랐다. 창송은 선이 굵은 싸움을 즐겨한다. 그런데 남궁천은 이기는 목적 말고는 어떤 전략이나 목표도 존재하지 않는다.

실로 잔인한 사람이다.

검문산은 그다지 높지 않지만 길게 뻗어 있다. 그래서 좌로는 사천성 북단 끝에 이르고 우로는 장안을 덮고 있었다.

또한 검문산은 예로부터 기인이사들이 터로 알려졌다. 산세가 수려하고 기화이초가 만발하여 세상과 등을 지고 살아가기에는 무척 아늑하고 향기로웠기 때문이었다.

검문산 동쪽 제일봉 망하봉에 한 채의 장원이 있었다.

이곳이 바로 목와북천의 임시 중원 총단 제하궁이었다. 목와북천의 총단은 멀리 감숙성 끝에 있어 패업을 이루는데 여러 가지로 걸림돌이 작용했고 그래서 흑도의 세력 중 한 곳인 이곳 제하궁을 임시 본부로 사용하고 있었다.

장원 주위로 광채가 번쩍거렸다.

경비무사들이 쥐고 있는 창과 칼에 햇빛이 반사되며 뿜어지는 것이었는데 숨이 막힐 지경으로 삼엄했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천랑사신의 등장으로 자신들이 빼앗아 놓은 땅과 세력이 연일 넘어가고 있었다.

더구나 지금 흑도대종사 백쾌섬은 모처에서 폐관 수련중이었다. 수뇌가 공석이었고 무림맹과의 싸움 뒤끝이어서 힘도 넉넉하지 못한 묵와북천으로서는 작금의 사태는 심각했다.

대청에 모두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하나같이 얼굴이 굳어 있었다.

“망령이 들어도 유분수지 시체나 마찬가지인 늙은이들이 도대체 뭐하자는 수작들이야.”

목와북천의 장로중 한 사람인 우곤(雨棍) 백치성이 이를 갈았다. 올해 여든 다섯으로 연륜으로는 으뜸이다. 그래서 지금 회의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 늙은이들 나이가 올해로 몇이지? 백오십쯤 되지?”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차가운 표정의 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는 못되었습니다. 제가 알기에 백 이십쯤 된 것 같습니다.”

냉심도로 불리는 장로 중 한 사람이다.

백치성의 눈썹이 모아졌다.

“백이십, 그래도 많이 쳐먹었잖아. 곧 죽을 늙은이들이 도대체 왜 갑자기 나타나 우릴 괴롭히는 거야. 엉?”

“보나마나 허술한 틈을 이용해 한번 세상을 거머쥐어 보겠다는 수작들이겠지요.”

까마귀 탈을 쓰고 있는 사내가 째진 소리를 했다.

오왕(烏王)보도숙(普道宿), 역시 장로 중 한 명이었다.

“난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모든 시선이 소리난 곳으로 돌아갔다.

먹물 같은 흑의를 걸쳤고 놀랍게도 세 개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목와북천의 군사인 삼천목이다.

“그럼 어떻게 보는가?”

백치성이 물었다.

삼천목이 침을 삼키더니 말했다.

“천랑사신은 강합니다. 비록 한 물 같다고는 해도 강호육군과 비교될 만한 거목들이죠. 한 때 패업의 야망을 꿈꾸기도 했지만 스스로 불가능함을 깨닫고 접었지요. 그런 그들이 다시 일어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문제가 있사옵니다.”

“문제라면?”

“배후에 누가 있기라도 한 단말인가?”

“있습니다.”

“뭣이?”

“천랑사신 같은 거물이 누구의 명령을 듣는단 말인가?”

“독자적으로 움직일 만한 그릇들은 절대 못됩니다. 지난 한 달동안 그들이 은거했던 감숙성 일대를 이 잡듯이 뒤진 결과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한 명의 제자만 거둬들였을 뿐 패업을 위한 어떤 사전 작업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지금 저렇게 펄펄 날면서 우리 뒤통수를 치고 다니는데 아무런 준비가 없다는게 말이 되는가?”

“인근 화전민들을 통해 자세한 동정을 알아냈사옵니다. 음처식이란 제자 한 명을 거두어 가르칠 뿐 다른 행동은 전혀 없었사옵니다.”

“그럴 리가?”

백치성의 이마에 주름을 만들었다.

지금 천랑사신의 움직임을 보면 미리 상당한 준비를 거친 모습이었다.

“저의 생각으로는?”

삼천목이 말을 끊자 모두가 침을 삼키며 궁금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넨 다 좋은데 자꾸 결정적일 때 말을 끊는 버릇이 있어. 빨리 입 열어 봐.”

“답답하군.”

여기저기서 투덜거리자 삼천목이 입을 열었다.

“동천비가 움직이지 않나 생각 합니다.”

“동천비?”

“천상각의 그 장사꾼 놈 말인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동천비가 완전히 재기했다고 하옵니다.”

“포달랑궁 사대법왕과 싸워 양패구상 했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것은 잘못된 정보였사옵니다. 소신의 실수 이옵니다. 동천비는 재기 한 듯싶사옵니다.”

“정말인가?”

냉심도의 눈이 빛을 뿌렸다.

“거의.”

“이런 젠장.”

냉심도가 투덜거렸다.

“동천비는 보통 인물이 아니오. 장사꾼이지만 무인의 피를 더 많이 갖고 있소. 머리 또한 비상하기 그지 없고.”

“자네 지금 동천비를 칭찬하는 건가?”

백치성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냉심도가 말했다.

“그가 정녕 천랑사신의 배후라면 심각합니다. 한번 혼이 난 대호는 경거망동하지 않사옵니다. 무척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기회가 닿으면 반드시 목줄을 끊습니다. 대종사께서도 동천비를 경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놈이 배후라면?”

백치성이 삼천목을 바라보았다.

묘책이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

삼천목이 말했다.

“정면 충돌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음!”

“하긴 대호끼리는 잔 머리가 통하지 않지.”

모인 사람들 얼굴이 딱딱해졌다.

백치성이 입을 열었다.

“동천비를 배후로 확신하고 대책을 세웁시다. 군사의 말대로 결국 정면충돌로 승부를 결해야 하는데.”

백치성이 말끝을 얼버무렸다.

백쾌섬을 이어 자신이 임시 목와북천을 이끌고 있지만 흥망성쇠가 달린 싸움을 결정 내릴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폐관중인 백쾌섬이 언제 나올지 알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자신이 내려야 했다.

모든 시선이 백치성에게 몰렸다.

백치선이 양손을 만지작 거리더니 삼천목을 보며 말했다.

“틀림 없는가?”

“이번은 확신합니다.”

“군사가 가져온 보고를 토대로 작전을 세우고 명령을 내리는 게 장수의 일 아니던가. 좋네. 적당한 날과 지역을 잘 골라 정면으로 부딪힐 방법을 연구해보게.”

“알겠사옵니다. 대장로.”

세 개의 눈이 무겁게 깜박 거렸다.

실내는 무거워 졌다. 싸움에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백쾌섬이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자신들에게 백쾌섬은 한 사람 이상의 절대적인 존재였다.

벌컹!

그때 문이 열리며 한 명의 무사가 뛰어 들어왔다.

모든 시선을 받으며 무사는 삼천목을 찾았다.

“군사님은 어디 계시 옵니까?”

백치성이 물었다.

“왜 그러느냐? 말해보거라.”

퍽!

무사가 무릎을 꿇더니 백치성을 향해 말했다.

“큰 일 났사옵니다. 천랑사신이 지나간 길을 정체불명의 집단이 밟고 있사옵니다.”

삼천목이 버럭 소릴 질렀다.

“자세히 말해 보거라. 정체불명의 집단이라니?”

무사는 숨을 길게 들이마신 후 입을 열었다.

천랑사신이 접수한 세력과 지역을 또 다른 정체불명의 집단이 덮쳐 빼앗고 있다는 얘기였다.

“누구냐?”

“설마 포달랍궁?”

백치성이 삼천목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설왕설래 할 뿐 정확한 대답을 못했고 궁금한 시선으로 삼천목을 쳐다보았다.

세 개의 눈에서 강렬한 신광이 줄기줄기 폭사했다.

“……”

“……”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장내는 엄숙해졌고 모두가 삼천목을 주시했다.

그의 두 눈은 무서우리만치 번득 거렸는데 부지런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포달랍궁이겠지? 현 강호에서 패업에 관심을 둘 만한 세력이 어디있겠어?”

한 명의 인물이 말했다.

“조용히 해봐.”

“이 사람이 지금.”

모두가 눈을 흘겼다.

“내가 왜?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패업에 뛰어들 곳이 거기 말고 또 있느냐고?”

삼천목이 고개를 저었다.

“포달랍궁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방식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사옵니다. 모두 검을 사용했다고 했느냐?”

보고를 한 무사를 향해 물었다.

무사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사옵니다. 하나같이 검을 썼다 하옵니다.”

“검이라고 하면 남궁세가 아니겠나?”

백치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삼천목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 하옵니다만 대규모의 검객 집단으로서의 기능은 상실된 지 오래지요.”

남궁세가는 이미 무너졌다.

일천 명이 넘는 많은 검객들을 동원할 무가는 현재 중원에 없다.

홱!

갑자기 삼천목의 눈이 기광을 분출했다.

“왜 그러는가?”

“이보거라. 검흔의 크기가 가늘고 작지 않더냐?”

무사가 놀란 눈으로 말했다.

“어…어떻게 그것을, 그러하옵니다. 중원의 검흔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사옵니다.”

“설마?”

백치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삼천목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동안 남궁천의 행방을 쫓고 있었사옵니다. 그가 배를 타고 갔다는 목격자는 있었지만 행방은 오리무중이었지요.”

“그럼 저자의 보고속의 일이 남궁천과 연관을 갖고 있다는 말인가?”

“남궁천이 동영을 끌어들인 것 같사옵니다.”

“동영!”

“닌자!”

중원인들에게 동영에 대한 인상은 잔인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닌자술이라고 하여 중원의 배교와 비슷한 기예를 갖고 있고 특히 검의 빠르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워낙 빨라 상처가 아주 작아 언뜻 보면 검에 당한 상처가 아닌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중원과 동영은 자주 얽혔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광동과 절강 인근 해상에 자주 출몰하여 살인을 저지를 뿐 아니라 육지에 까지 상륙하여 적지 않은 피바람을 일으켰다.

그들의 목적은 대부분 상권 때문이었다. 중원이란 시장이 워낙 크다보니 탐을 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주 나타나 행패를 부린 것이었다.

일어선지 정확히 이십일 만에 절강과 호남과 귀주를 점령했다. 이따금 약간의 저항이 있었지만 천랑사신이 닦은 길을 무혈점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흘린 피는 미미했다.

너무 쉽고 간단하게 두개의 성을 점령하자 창송세가의 무사들은 날뛰었다. 좀 더 빨리 진군을 하자고 앞 다투어 소리치고 날뛰었지만 남궁천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목와북천이 그랬고 천랑사신이 그래했기 때문에 자신은 그런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남궁천은 두개의 성을 점령한 이후 가장 먼저 각 지역의 패주들을, 비록 소규모 집단의 수뇌들이지만 그들을 불러 모든 재량을 넘겨주었다.

죽음을 각오 하고 있다가 충성을 하기만 하면 가세 확장을 오히려 돕겠다고 하자 그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더구나 상대가 한 때 무림맹주였던 남궁천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완전한 충성까지 약속했다.

남궁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귀주와 절강과 호남의 무문들은 빠르게 번창했고 가세를 확장했다. 구파일방과 목와북천이 떠난 자리를 자신들이 매우겠다는 의지였다.

남궁천은 세 개의 성에서 과거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개인이나 집단을 깡그리 몰살했다. 두 번 다시 자신에게 반기를 들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지였다.

홍강(洪江)과 원강(沅江) 무수(巫水) 세 개의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금양이 있었다. 그 다지 크지 않지만 세 개의 강을 끼고 있는 탓에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해질 무렵 금양의 저자거리에 동천비가 나타났다.

천랑사신은 지금 파죽지세로 목와북천이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자리를 채워가고 있는데 자신들 과 똑같은 방법으로 뒤를 쫓는 정체불명의 세력, 물론 동천비는 이미 남궁천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피지기.

남궁천에 대해 다년간 연구하고 살폈기 때문에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천랑사신을 돌려 남궁천을 칠까 했지만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들은 하던 일 그대로 계속 진행하도록 했다. 빼앗아 가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지나가는 것도 천하에 끼치는 영향은 크다.

자신은 지금 한 곳을 가고 있었다. 그곳은 사천의 검문산이었다. 그곳에는 한 집단의 핵심들이 모여 있었다.

한 때는 백쾌섬을 가장 무서워했었다. 무림맹에 반기를 들다 보니 어쩔수 없이 그와 손을 잡았지만 곁에서 보는 백쾌섬은 강했고 냉철했다.

겉으로는 상부상조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은근히 그에게 주눅이 들어 그의 뜻을 대부분 수용해야 했다. 그러는 자신이 무척 못마땅했지만 힘이 약하니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스스로 자신을 평가 할 수는 없지만 천하무적이라고 자부해도 흠결이 없었다.

이제 그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두려울 것은 없고 오히려 자신이 넘쳤다. 설마 자신이 직접 찾아 올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못할 것이었다.

해가 저물어가므로 일단 배를 채우기로 하고 주루를 찾아 두리번 거리던 동천비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비렁뱅이였다.

그러나 일반 거렁뱅이처럼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구걸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행인들을 찾아다니며 뭔가 사정 얘기를 하고 있었다.

“이보시오. 내 얘기 좀 들어보시오.”

“저리 꺼져.”

비렁뱅이가 옷소매를 잡아당기자 행인이 사정없이 뿌리쳤다.

“이보시오. 대협님, 내가 재미있는 얘길 하나 해드릴테니 들어보겠소?”

“비켜.”

“까불고 있어. 내가 네놈 속 모를줄 알고. 너 매담자지?”

“아…아닙니다. 돈 달라는…으악!”

비렁뱅이는 채 말을 있지 못하고 나자빠졌다.

두 거한이 그대로 걷어찬 것이었다.

“아이쿠!”

비렁뱅이는 땅바닥을 나뒹굴며 죽는다고 비명을 질렀고 지나가는 사람들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거렁뱅이는 끈질겼다. 지나가는 사람들 앞길을 막으며 자신의 애길 들어달라고 떼를 쓰다시피 했다.

“손님, 소인의 얘기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아주 재밌는 얘깁니다.”

“돈 없어, 저리 비켜.”

짐 보따리를 짊어지고 가는 두 사내들의 앞을 가로 막았고 비키라고 뿌리치자 비렁뱅이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돈 달라는 얘기 아니올시다. 그냥 잠시 쉬면서 소인의 애기만 들어주면 되오이다.”

“정말이야? 나중 돈 내놓으라고 하면 안 돼”

“분명히 공짜라고 했소?”

“예, 예”

두 사내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잠시 쉴 겸 이 늙은이 얘기나 한 토막 듣고가자고.”

“그러지 뭐. 진짜 공짜야?”

우측 사내가 확인하듯 물었다.

퍽!

퍼퍽!

두 사내가 짊어진 보따리를 바닥에 던지듯 내려 놓고앉았다.

“진자 공짜지?”

땀을 훔치며 재차 확인했고 비렁뱅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담자라고 하여 돈을 받고 강호의 애기나 황실의 속사정을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 워낙 타고난 재담꾼들이어서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기 때문에 명문에서는 따로 개인 매담자를 둘 정도이다.

“두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키가 작은 사내가 이마를 찡그렸다.

“아이씨. 이름은 알아서 뭐해? 양 말남이야.”

“대협께서는?”

키가 큰 사내가 말했다.

“아까부터 자꾸 대협 대협 하는데 우린 장사꾼이야. 무명 장사꾼이라고, 그리고 내 이름은, 젠장 얘기를 듣기 위해 이름까지 말해주기는 첨이다. 오냐 유순임.”

“양말남, 유순임 두 분은 아주 행복한 분들이십니다. 왜냐하면 이 얘기는 천하에서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데 마침내 두 분께서 알게 됐으니 말입니다.”

“무슨 애긴데?”

“이거 은근히 궁금해지는데 속히 털어나 봐.”

“한 명의 상인이 있었소.”

“장사꾼 얘기야? 그럼 더욱 귀담아 들어야겠네.”

“그렇습니다. 귀담아 들어 놓으면 득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장사꾼은 무척 돈이 많았죠. 물론 본인이 열심히 노력해서 번 돈도 있지만 상당한 액수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었습니다.”

키 작은 사내가 입맛을 다셨다.

“부럽군. 자고로 부모는 잘 만나고 봐야해. 나봐. 니기미 개털 부모를 만나 죽어라 고생하고 살잖아.”

“나도 그런데.”

비렁뱅이가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계속 했다.

“그 상인에게는 자식이 넷 있었습니다. 아들 셋에 딸 한명이었는데 장사꾼의 자식들답게 어려서부터 이재에 밝았습죠. 장사꾼 나이 사십 중반에 부인이 병으로 죽고 이년 후 그는 재혼을 했습니다.”

“돈이 많으니까 당연히 처녀 장가를 들었겠지?”

“그걸 말이라고 이빨 멧돌질 하나 이 사람아.”

키 큰 사내가 키 작은 사내를 흘겨봤다.

비렁뱅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많아 그런건 아니지만 어쨌든 처녀 장가를 들은 것은 분명합니다.”

“부럽다.”

“마흔이 다되도록 아직 여자 냄새도 못 맡아 봤는데 재혼이 처녀장가라니 그래서 돈은 있고 봐야해. 그렇지 친구야?”

키 작은 사내가 버럭 소릴 질렀다.

“좀 조용히 해. 이 분 얘기 좀 듣게.”

“미안해.”

비렁뱅이가 가벼운 미소를 짓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재혼을 하여 한 명의 아들을 낳았죠.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오.”

키 큰 사내가 손을 들어 말을 제지했다.

“이봐 잠깐, 혹시 본처 새끼들이 후처 새끼를 괴롭힌거 아냐?”

비렁뱅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신같이 맞추는구려. 그렇소이다. 본처 자식들은 새어머니에게서 낳은 아들을 죽이려고 갖은 모함과 함정을 만들고 심지어 자객에 청부까지 했다오. 하지만 끝내 실패 했다오.”

목소리가 커지고 어느새 주위 행인들이 몰려 들었다.

반시진도 지나지 않았는데 비렁뱅이 주위로는 수십 명의 행인들이 운집했다.

“그것도 부족해 본처에게서 낳은 자식들은 새어머니를 죽일 생각을 했소.”

그러자 키 큰 사내가 말했다.

“후처는 아주 착하지?”

비렁뱅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키 큰 사내가 거 봐라는 듯 깔깔 거리며 웃었다.

“그럼 뒷부분은 내가 말하지. 결국 후처는 자신이 낳은 자식을 데리고 집을 나가잖아. 맞지?”

“아니오. 틀렸소?”

순간 군중들이 욕을 퍼부었다.

“그만 좀 나서.”

“한 번만 더 나서면 그땐 죽여버릴거야.”

키 큰 사내가 벌떡 일어나 죽여버리겠다는 말이 들려온 쪽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누구야? 어떤 니기미가 날 죽인다고 했어. 조용히 하라고 하면 될 일을 씨발.”

“알았으니까 앉아 안보여.”

뒷 사람들이 삿대질을 하며 앉으라고 아우성을 쳤다.

키 큰 사내가 헛기침을 하며 앉았다.

비렁뱅이의 얘기는 이어졌다. 처음에는 시끄럽게 떠들기도 하고 중간 중간 끼어들기도 하던 사람들이 침묵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좌중은 침묵으로 빠져들었고 비렁뱅이의 목소리만이 좌중을 압도했다.

사람들의 눈이 빛을 뿌렸다. 이야기 속으로 완전히 몰입 한 것이었다.

“후처에게서 난 자식은 마침내 형들의 횡포와 부친의 냉대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가고 말았소. 그가 집을 나간 것은 스스로의 생존 전략이었고 하늘은 그를 놀라운 무인으로 만들어 주었소.”

“모두 죽는 일만 남았군.”

“그 성질에 가만 있지 않겠군. 뭐하슈? 빨리 다음 애길 해보시오?”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후처에게서 낳은 아들이 무인이 되었다고 하자 하나같이 피를 부르는 복수를 생각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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