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천랑사신
포달랍궁이 시끄럽다. 고요한 정적 속에 이따금 목탁소리만이 전부였는데 근래에 들어 종일토록 기합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 그 기합소리 한 중간에 천룡구십구불이 있었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침 공양을 마치고 곧바로 수련에 들어가 점심때 잠깐 쉬었다가 해가 떨어질 때까지 무예수련이 이어진다.
무예수련은 천룡구십구불 만이 아니었다. 포달랍궁의 무승들이라면 너 나 가리지 않고 각자의 처소에서 수련에 몰입했다.
‘지금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해라’
한 달 전 동천몽으로부터 떨어진 명령이었다.
무예를 한 단계 발전시킨 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앞 뒤 가리지 않고 죽도록 노력을 한다고 해서 발전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머리로 깨우쳤다고 해서 발전되는 건 더욱 아니었다.
머리로 깨우치고 몸이 그대로 움직여 줄때만이 제대로 된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동천몽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항변하지 않았다.
처음 동천몽은 모두가 열심히 수련을 하자 자신의 명령이 그만큼 위력이 있는 것으로 믿었다. 자신의 절대적인 권위 앞에 노소를 불문하고 승복하고 굴복했다고 확신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부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해지지 못하면 진짜 바보다’
제자들 사이에 떠도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속뜻을 알고 난 동천몽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한 마디로 동천몽 같이 멍청한 석두로도 그 만큼 강해졌는데 하물며 그 보다 훨씬 똑똑한 머릴 지닌 우리가 강해지지 못한다면 말이 되느냐는 얘기였다.
스스로에 대한 강한 경쟁력을 얻기 위해 만들어지고 떠도는 말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냥 넘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은밀히 소문의 진원지를 조사했지만 도저히 누구 입에서 시작된 말인지 알아 낼 수가 없었다.
으후후훕!
동천몽이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풍선처럼 팽팽하게 부풀었고 어느 한 순간 호흡을 멈췄다. 두 호흡 정도 정지된 상태에서 갑자기 입이 열리고 강한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훅!
파파팍!
입에서 나온 강한 바람은 십여 장 전면에 있는 집채만 한 바위에 깊숙한 흔적을 남겼다. 이미 오랫동안 기도살법을 수련한 듯 바위 곳곳에 칼 자국이 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패인 홈을 바라보는 동천몽의 이마가 찡그려져 있었다.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모습이었다.
기도살법은 이미 절정에 이르렀고 그의 이마가 찌푸려진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신을 조롱하는 말 때문이었다.
“대법왕님”
고개를 돌리자 일목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어찌됐느냐? 소문을 퍼뜨린 자를 잡았느냐?”
닷새 전부터 일목으로 하여금 소문을 흘린 자를 추적케 했다.
일목이 눈을 빛냈다.
“소문을 흘린 자는 찾지 못했지만 대신 아주 결정적인 단서를 잡았습니다.”
“그래.”
“강해지지 못하면 진짜 바보다라는 말이 가장 먼저 흘러 나온곳은 장로원이었습니다.”
동천몽의 눈에서 불벼락이 쏟아져 나왔다.
“틀림 없느냐?”
“다각도에 걸쳐 조사한 결과입니다. 대법왕님을 나주 멍청이로 폄훼한 소문의 진원지는 장로원이었습니다.”
뿌드득!
동천몽이 이를 갈아 붙였다.
그런 철딱서니 없는 소문은 대체적으로 젊은 사람들이 잘 만든다. 그런데 살만큼 살아온 늙은 장로들이 그런 소문을 만들었다는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앞장서거라.”
“네엣? 어딜?”
“어딘 어디겠느냐? 당장 늙은 놈들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겠다. 뭣 하느냐? 어서 앞장서라고 하지 않느냐?”
일목이 눈을 크게 떴다.
“저…정말로 장로원을 들쑤시겠다는 것입니까?”
“네이놈.”
동천몽이 버럭 소릴 지르자 일목의 눈이 더욱 커졌다. 단언컨데 지금까지 수 년 동안 동천몽을 모셨지만 지금처럼 큰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만큼 동천몽의 감정상태가 좋지 않다는 뜻이었으므로 얼른 대답했다.
“예 예!”
“역지사지라고 했느니라.”
번쩍!
한번 들었던 말이었다.
“이…입장 바꿔 생각해보라는 것입니까?”
“오냐, 네놈 같으면 누가 네놈의 평생 단점인 하나 뿐인 눈을 갖고 조롱하듯 말하면 좋겠느냐?”
“아니오. 우리 성질에 죽여버리지요.”
“나도 너와 다르지 않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지만 머리 나쁘다고 하는 소리는 죽어도 싫다. 장로원으로 가자.”
“알겠사옵니다.”
일목을 앞장세우고 걸어가는 동천몽의 눈에서 살기가 쏟아졌다.
불끈!
양 주먹도 쥐어졌고 걸어가는 다리도 지축을 흔들었다. 일목은 누군지는 몰라도 제대로 걸렸다고 생각했다.
장로쯤 되면 최소한 칠십 이상이다. 평소에도 화가 났다하면 앞 뒤 안 가리는데 자신의 인격을 짓밟혔다고 크게 흥분한 동천몽이다. 누군가는 모르지만 나이와는 상관없이 오늘 크게 다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나가는 제자들이 동천몽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며 합장을 하며 예를 취했지만 눈길 한 번 던지지 않았다. 동천몽이 찬바람을 흘리며 지나가자 제자들 또한 고개를 갸웃 거렸다.
멀리 장로원 전각이 눈에 들어왔다.
“서랏!”
앞서가는 일목의 걸음을 불러세웠다.
동천몽이 길게 숨을 쉬었다. 지금 상태로 들어갔다가는 몇 명 죽일 것 같았다. 그래서 끓어 오른 감정을 자제시키기 위해 일목의 발길을 세운 것이다.
“가자!”
잠시 서너 번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린 동천몽이 장로원으로 들어섰다.
지키고 있던 한 명의 승려가 소스라쳤다.
“대…대법왕님께서 본원에 어인 일로, 당장 기별을 넣겠습니다.”
“잠깐!”
동천몽은 돌아서는 승려를 세웠다.
동천몽이 조용히 말했다.
“기별 넣을 것 없느니라. 넌 여기서 계속 근무를 서거라.”
“대…대법왕님.”
“염려말고 근무를 서거라.”
“대법왕님께서 시키는대로 하거라.”
일목이 눈을 부라리자 승려가 움찔하며 합장을 하며 물러났다.
동천몽이 앞장을 섰다.
기별을 넣지 못하게 한 것은 간단했다. 흉수를 잡기 위해서는 흉수 모르게 들어와야 했다. 자신이 나타난 것을 알면 모두가 입조심을 할 것이 뻔했다.
“아얍!”
“우자자잣!”
다른 곳과 다를바 없이 장로원 안에서도 기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단 자신의 명령이 잘 먹히고 있다는 것에 동천몽은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동천몽은 기합소리가 들려온 곳부터 찾아 보기로 했다.
장로원의 동쪽 전각인 동장각을 지나자 조그만 연무장이 나타났다.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라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그 속에서 기합소리가 연신 울려퍼졌다.
동천몽과 일목은 거대한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체 장내를 지켜보았다.
먼지가 걷히고 한 젊은 승려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략 스물 후반쯤으로 보였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 한 명의 노승이 팔장을 끼고 서 있었다.
“대장로 무륵선사입니다. 앞에 있는 청년은 그의 적발전인이랄 수 있는 망동이지요.”
일목이 설명했다.
대장로 무륵선사는 올해 세수 아흔 다섯이었다.
포달랍궁 제일 장법 천룡칩정장에 달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제보다는 많이 나아졌구나. 하지만 몇 곳에서 아직도 흠결이 발견된다.”
“지적 해주소서.”
“아니다. 너무 한 번에 많은 것을 배우려 들면 오히려 헛갈릴 뿐이니라. 하나씩 천천히 배워야 제대로 얻을 것이니라.”
“……”
“망동아.”
“예 사부님.”
“너는 무공을 무엇이라고 생각 하느냐?”
망동의 고개가 들렸다.
몹시 어려운 질문이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무륵선사의 두 눈이 광채를 뿜고 있었다.
“무공이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나 스스로를 지키는 학문이라고 생각 합니다.”
판에 박은 대답이어서인지 무륵 선사의 낯빛이 그다지 밝지 않았다.
“대법왕님을 보거라.”
순간 나무 뒤에 있던 동천몽이 눈을 크게 떴다.
“망동이 넌 대법왕님을 어떻게 보느냐?”
“대법왕님께서는 훌륭하시고 포달랍궁 사상 가장 강한 분이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 그분은 강하시다. 특히 무공에 관한 어느 대법왕님보다 뛰어나지. 하나 대법왕님에게는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느니라.”
망동이 물었다.
“그게 무엇이온지요?”
“이거다.”
그러면서 무륵선사가 오른손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때렸다.
“무슨?”
“머리가 나쁘다는 것이다. 그분의 머리는 인간이랄 수 없을 만큼 좋지 않다. 나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열 글자도 되지 않는 초식 하나를 외우지 못해 안달을 할 만큼 나쁘단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서 그럴수가.”
“저런 니기미.”
일목이 뛰쳐나가려 하자 동천몽이 잽싸게 잡다 당겼다.
일목이 눈을 부릅뜨고 돌아보았다.
“아니 저 늙은이를 가만 두시렵니까? 소승이 가서 당장 멱살을.”
“기다려라. 아직 때가 아니니라.”
동천몽이 일목을 진정시켰고 무륵선사가 계속 말했다.
“그를 가르친 법왕님들 말을 빌리면 불가사의 하다더구나. 어깨위의 물건을 멋으로 달고 다닌다는 표현까지 서슴치 않았다.”
‘어깨위의 물건!’
동천몽이 내심 중얼거리다 눈을 빛내며 자신의 머리를 만졌다.
‘내 머리가 멋?’
“죽어도 못참아. 저 개자.”
동천몽이 또다시 일목을 잡았다.
“이것 놓으십시오. 저 늙은이 죽이고 나도 오늘 죽을 겁니다.”
“기다려라.”
일목이 다시 진정시켰다.
“거두절미하고 그런 대법왕님도 강한 무예를 얻으셨다. 하물며 너 처럼 영민한 아이가 약해서야 되겠느냐? 넌 충분히 할 수가 있다. 반드시 해낼 것이다.”
“명심 하겠나이다.”
“하면 된다. 이건 불가나 속세나 마찬가지니라. 뜻이 있으면 길은 만들어지느니라. 머잖아 본궁이 본격적으로 강호패업에 나설 것이다. 물론 일반 무가들과 다른 목적의 패업이지만 어쨌든 천하일통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때 가장 앞장서서 큰 공을 세우기 위해서는 더욱 정진하거라.”
“사부님 말씀 가슴 깊이 담겠사옵니다.”
“허헉!”
뒤로 돌아서려던 무륵선사가 소스라쳤다.
등 뒤에 동천몽과 일목이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대법왕님.”
“대법왕님을 뵈오나이다.”
두 사람 모두 허리를 숙였다.
동천몽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자 고개를 쳐들어 보던 무륵선사가 소스라치며 잽싸게 다시 떨구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동천몽의 눈빛이 야수에 가까웠다.
무륵선사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뭔지 모르지만 불길한 그림자가 떠올랐다.
‘아차!’
그리고 한 순간 조금 전 자신이 뱉은 말을 동천몽이 모두 들었다는 생각이 들자 다리가 떨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두들겨 맞았다. 장로들 중 몇 몇은 정강이를 맞았고 죽은 대법왕들 중 안맞은 사람이 없었다. 일단 화가 났다하면 나이 따위는 철저히 깔아뭉개는 대법왕이니 자신도 마침내 두들겨 맞는다고 생각 했다.
‘이마타불!’
간단히 몇 대 맞는 것으로 끝나게 해 달라고 빌었다.
“대장로.”
“하…하명하소서.”
“맞다. 너 말처럼 나 굉장히 무식하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내 이름 석 자도 거의 세상물정 알아서 썼다. 세상에서 가장 싫은 것이 책 읽는 것이었다.”
“…….”
“나는 책이 싫다. 그래서 멀리 하다보니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아무튼 내가 그토록 무식하게 되는데 네가 보태준 것 있느냐?”
“아…아니옵니다. 소승이 잘못 했사옵니다.”
“대법왕으로서 궁을 잘 이끌어가면 되지 똑똑해야 하는 법은 없지 않느냐? 너도 알겠지만 전대법왕은 나보다 더 무식했다고 들었다.”
“사…사실이옵니다.”
“내가 무식하다는게 창피하느냐?”
무륵선사가 펄쩍 뛰었다.
“아…아니옵니다. 자랑스러운 건 아니지.”
자랑스러운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끄럽지는 않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해서 될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잽싸게 끊었지만 눈치 빠른 동천몽이 그걸 모를리 없었다.
“대장로.”
보다못한 일목이 소리쳤다.
“너무 하잖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대법왕님의 나쁜 머리가 자랑스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소승은 아주 자랑스러워요.”
홱!
동천몽이 노려보았다.
일목 또한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잽싸게 입을 닫았다.
일목이 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정도는 떨어져야 주먹질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천몽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길게 말하고 싶지 않소.”
“무슨?”
“강해지지 못하면 진짜 바보다는 말.”
퍽!
갑자기 무륵선사가 무릎을 꿇었다.
“소…소승이 무심결에 뱉은 말이었는데 그것이 소문으로 회자될 줄은 몰랐사옵니다. 불지옥에 들어가 마땅하옵니다.”
동천몽이 눈을 크게 떴다.
소문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데 아는것 있느냐고 물으려고 했는데 무륵선사가 고백해 버렸다. 아마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 일반이라는 생각에 모든 것을 털어 놓은 듯 했다.
퍽!
그때 망동까지 무릎을 꿇었다.
“이 제자도 죽여 주십시오. 이 제자가 하도 우둔하자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사부님께서 하셨던 말씀인데 그만 그것이 대법왕님을 모욕하는 소문으로 굳어지고 말았사옵니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이 제자 때문이오니 저를 벌하시는게 맞사옵니다.”
팟!
동천몽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그때 무륵선사가 말했다.
“망동 무슨 짓이냐? 넌 저리 빠지거라.”
“아니옵니다. 사부님, 사부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사옵니다.”
무륵선사가 더욱 자세를 낮췄다.
“공부는 가르치는 자의 입이 중요하옵니다. 제자의 우둔함을 깨우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는 해도 위대하신 대법왕님의 명예를 짓밟은 것은 온당한 방법이 아니었사옵니다. 소승을 벌하소서.”
동천몽이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둘 모두 일어나거라.”
두 사람이 주춤 거리다 일어섰다.
동천몽이 망동을 쳐다보았다.
“망동이라고 했더냐?”
“그러하옵니다. 대법왕님.”
“어디서 왔느냐?”
“염지(?地)에서 왔사옵니다.”
“염지라면 소금의 땅을 말하느냐?”
소금의 땅은 대설산 어느 곳엔가 있다. 사방이 소금으로 이뤄진 땅으로 예로부터 선한 자들만이 살수 있다는 말이 내려 올 만큼 부지런하고 올곧은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사는 땅이었다.
특히 그들의 불심은 깊기로 소문나 있었다. 그래서 태어나 승려가 되는 것을 가장 큰 자부심이자 영광으로 생각 한다.
“형제는 있느냐?”
“없사옵니다.”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외동 아들을 보냈더란 말이냐?”
“예!”
부모의 불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를 이어야 할 자식을 미련없이 불가로 귀의 시킨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즐거워하느냐? 부모님께서?”
“좋아 하십니다. 보름 전에 한번 오셨는데 너무 기쁘시다면서 우시더군요.”
동천몽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훌륭한 어머니를 두셨구나. 하루 중 언제 시간이 있느냐?”
망동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오전 오후 모두 무예수련을 하옵니다. 시간이라면 잠자는 시간말고는.”
시간이 없지만 굳이 만든다면 잠자는 시간을 내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내일부터 저녁을 먹고 백궁으로 건너오거라.”
백궁으로 오라는 말에 망동은 물론 무륵선사까지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무엇을?”
무륵선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느니라. 조금 전 수련 모습을 잠시 보았는데 근골이 좋아 보였다. 내놓을 것 없는 졸기지만 몇 수 가르쳐 줄까 하느니라.”
“조…졸기라뇨. 뭣 하느냐? 어서 엎드려 감사드리지 않고.”
두 사람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감사하옵니다.”
“대법왕님의 은혜가 땅 끝까지 닿사옵니다.”
“늙어 무릎도 시원찮을 텐데 걸핏하면 그렇게 무릎을 구부리느냐? 그만 일어나거라.”
두 사람이 일어났고 동천몽이 망동을 깊은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 순간 한 사내의 얼굴이 겹쳐진다.
동천완.
자신의 가슴에 가장 큰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형이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정이 많았고 괴롭히는 형들 속에서 자신을 감싸주고 보호하려 애썼던 동천완이었다.
방황하며 밖으로 돌 때마다 슬쩍 찾아와 적지 않은 돈을 쥐어주고 가곤 했다.
‘그러고 보니!’
동천몽의 두 눈이 빛을 뿌렸다. 워낙 바쁘다보니 동천완의 행방에 대해 깜빡한 것이었다.
“그럼 수고들 하거라.”
두 사람에게 가벼운 미소를 띄고 돌아섰다. 장로원을 벗어난 동천몽이 일목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서 무미선사를 불러 오너라.”
“명을 받드옵니다.”
일목이 사라졌고 동천몽은 백궁으로 돌아왔다.
목이 컬컬하여 냉수를 한잔 들이킬 때 일목이 무미선사를 데리고 들어섰다.
“내 형님 소식을 알고 있느냐?”
무미선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형님이라는 말에 동천비가 떠올랐던 것이다. 동천몽이 무미선사의 착각을 읽은 듯 말했다.
“천완 형님이니라.”
“아!”
무미선사가 멋쩍은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당장 알아 보겠나이다.”
“당장 알아보거라.”
무미선사가 나가고 동천몽은 의자에 앉았다.
동천비의 용서를 청하기 위해 포달랍궁을 찾아온 이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천상각을 찾아 갔을 때도 얼굴을 보지 못했고 중원에 있는 동안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다.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밀려 들기 시작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동천몽이 창가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자 끓어 오른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천상각은 강호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이번 혈난은 천상각에 의해 시발되었다. 다시 말해 천상각의 고위 인물이라고 하면 누구든 죽음의 표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별일 없어야할 텐데’
동천몽이 주먹이 가만 쥐어졌다.
십만대산 제일봉 풍도봉(風刀峯)에 바람이 불고 있었다. 불어 오는 바람이 워낙 세차고 강해 봉우리의 바위가 칼에 베인 듯 잘려 나간다.
해서 분은 이름이 풍도봉이었다.
보통 사람은 바람에 사지가 잘려나가 결코 서 있을 수 조차 없다는 풍도봉에 네 명의 인물이 서 있었다. 서 있는 것 조차 경악할 일인데 더욱 놀라운 일은 네 사람의 옷자락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휘이이이!
바람은 매우 사납게 불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들이 딛고 있는 풍도봉 바위 표면이 조금씩 바람에 깎여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옷자락은 무풍지대에 있는 것처럼 전혀 움직이거나 꿈틀거리지도 않았다.
“카악! 씨발, 난 그만 갈래.”
맨 우측에 선 노인이 가래침을 뱉었다. 검은 수염이 가슴앞까지 길게 내려왔고 얼굴에 거미줄 같은 주름이 빼곡하여 나이를 짐작할 수 없게 했다. 허리에 짧은 창 한 자루를 꿰차고 있었는데 붉그스름한 낯빛과 이글거리는 눈빛에서 절정의 고수임을 짐작케 했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놈의 서찰을 받고 괜한 지랄을 떨었군.”
“창신, 조금만.”
옆에 서 있는 백의 노인이 팔목을 잡았다. 비슷한 연배로 보였는데 허리에 은빛 요대를 찼고 한 자루 핏빛 비수를 턱 하니 꽂고 있었다.
“마비, 늙은이의 한 시진은 젊은 것들의 한 달이오. 생판 낯짝도 모르는 놈 서찰을 받고 금쪽 같은 한 시진을 버렸단 말이오. 에이 씨발놈. 나 갈거야.”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무릎을 굽혀 땅을 박차고 날아 오르려 했다.
“흐흐흐! 천랑사신 중 가장 성질이 급하다더니 어김없구나.”
한 소리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왔다.
네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헉!”
“맙소사!”
“이런!”
네 노인의 입에서 다급성이 터졌다. 분명이 소리가 들려왔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어딜 보시오? 난 여기 있거늘.”
다시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또다시 창공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호로상놈의 새끼가 지금 어른들 불러다 놓고 장난치냐? 빨리 안 나와.”
“왔잖소.”
다시 소리가 들려온 좌측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또다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전성회음이오.”
백의 노인, 마비가 놀라 외쳐 말했다.
그러자 창신이란 흑의노인이 버럭 소리쳤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오. 전성회음이라니 턱도 없소이다.”
“나도 그 말에 공감하오. 이 판국에 어떻게 전성회음을 시전한단 말이오?”
가장 키가 작은 세 번째 노인이 말했다.
노인인 대머리였다. 그런데 일반 대머리와 다르게 수많은 흉터자국이 빼곡했다.
“독두포(禿頭砲)그렇지 않소. 전성회음이오.”
마비가 강조했다.
독두포가 눈살을 찌푸렸다.
전성회음은 불가의 혜광심어와 더불어 전음의 최고 경지이다. 말을 한 사람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도록 사방에서 울리게 하는 것인데 진기를 사방으로 퍼뜨려야 하기 때문에 어지간한 고수는 시늉조차도 불가하다.
독두포가 놀라는 것은 바람이었다.
풍도봉의 바람은 단단한 화강암을 깎아 낼 만큼 세차다. 그런 바람 속에 전성회음을 펼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했다. 직선으로 쏘는 일반 전음일지라도 거친 바람에 도중에 그만 소멸될텐데 사방이 울리는 전성회음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여기 있는 넷 모두 일반전음이라면 풍도봉의 바람이라고 해도 펼칠 수 있지만 전성회음은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마비의 말을 더욱 믿으려 들지 않았다.
천랑사신(天狼四神)은 정사가 불분명한 인물들이다. 현 강호에서 배분이 가장 높은 강호육군보다 한 세대 빠른 거물들로 각자 독창적인 기예로 시대를 풍미했다.
창신(槍神)
마비(魔匕)
독두포(禿頭砲)
육섬홍지(六閃紅指)
일반 검보다 더 짧은 단창 한 자루로 귀신(鬼神)이란 칭호를 얻었고 마비, 또는 비마탈명(匕魔奪命)이란 무시무시한 별호를 얻은 비도술의 귀재이며 머리통으로 천하의 강적을 함몰시켜 독두포란 이름을 얻었다. 원래 독두포의 머리는 정상인과 같았지만 수많은 적들과 대결을 벌이느라 머리털이 빠지고 급기야 대머리로 변했다.
육섬홍지, 타고난 육지를 갈고 닦아 다섯 개의 손가락을 가진 사람을 수도 없이 죽인 거목.
너무 강했기에 어느 집단에도 소속되는 것을 싫어했던 그들에게 사흘 전 한 통의 괴서찰이 날아들었다.
보낸 사람의 이름도 없고 십만대산의 풍도봉에서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워낙 건방진 내용이었기에 무시하려고 했지만 궁금했다. 천하의 천랑사신을 이런 식으로 불러내는 인물이 누군지 보고 싶어 나왔던 것이다.
“음!”
“….”
“맞군!”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전성회음이라는 사실이 분명했다.
정말로 가만 서 있으면 몸이 잘려지는 풍도봉의 바람이다. 그래서 네 사람 모두 내공을 끌어 올려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그보다 훨씬 어려운 전성회음을 날려왔다.
“저기오.”
네 사람의 고개가 천공을 향했다.
하늘 가운데서 한 개의 흑영이 풍선처럼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네 사람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자신들은 그나마 땅을 딛고 서 있다. 하지만 상대는 허공에 떴는데도 흔들리지도 않고 옷자락 또한 펄럭거리지 않았다.
눈 앞으로 떠오르는 건 딱 한 가지 였다. 자신들 보다 낮지 않은 초인이라는 것이었다.
흑영의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다가와 바위에 섰다.
“엇!”
“아니!”
네 사람이 다시 놀람성을 터뜨렸다.
펼친 기예를 보아서는 족히 백 살 이상은 먹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상대는 새파란 젊은이였다.
“후후후후!”
흑의 사내는 네 사람을 보더니 웃음을 참지 못했다.
꿈틀!
역시 가장 성질이 급한 창신의 눈썹이 출렁거렸다.
“네놈은 누구냐? 감히 새파랗게 젊은 놈이 어른들을 오라 가라 하더니 그것도 부족해 보자마자 웃어?”
금방이라도 옆구리에 달린 창을 뽑을 것 같은 기세였다.
“네놈이 창신이구나?”
“네…네놈.”
창신이 입을 쩌억 벌렸다.
정확한 나이가 올해로 백이십 둘이다. 나이로 고수를 뽑는다해도 천하제일이 될 만큼 많은 나이였다.
“다…다시 말해봐라. 날 더러 네놈이라고 했느냐?”
아마 자신이 늙은 탓에 잘못 들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물었던 것인데 흑의사내는 웃으며 다시 대답했다.
“오냐, 늙더니 귀가 이상하게 된 모양이구나. 사람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하다니.”
“이 씨발놈.”
창신이 그대로 창을 뽑아 들려고 했다.
“안되오. 창신.”
마비가 잽싸게 손목을 잡았다.
“창신 일단 진정하고.”
“이것 놓으시오. 아무리 내 손주뻘도 안되는 놈이지만 나 오늘 저 새끼 시체 칠거요. 놔라니까?”
소매를 확 뿌리쳤지만 마비는 힘껏 거머쥐었다.
어쩌면 흑의사내의 작전인지 모른다. 자신들을 흥분케 하여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려는 고도의 전략인지도.
“창신, 천천히 죽여도 늦지 않소. 그러니 우선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주시오.”
마비의 두 눈이 애원한다.
가장 이성적이며 영리하고 침착한 마비이다.
뿌드득!
창신이 이를 갈며 말했다.
“좋소, 마비의 말을 들어 참지. 네 이놈 잠시 후에 죽여줄테니 기다리거라.”
흑의사내가 조롱거렸다.
“늙으면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라더니 무척 한 심한 늙은이구나. 잠시 후까지 미룰 것 뭐 있느냐? 당장 자신 있으면 날 죽여 보거라.”
부르르!
창신이 몸을 떨었다.
“너…너 이 상놈의 새끼.”
촥!
급기야 창을 뽑아 들었다.
“내가 오늘 네놈 목을 자르지 못하면 네놈 하인이다.”
슈와악!
누가 말릴 겨를도 없이 달려들었다.
창신의 창세는 도도했다. 홧김에 뽑아 들었지만 뻗어나가는 한기는 절제되어 있었다.
거센 창기가 몰려오자 흑의사내가 흠칫 했다. 하지만 이내 입술을 뒤틀며 말했다.
“정말이냐? 내게 패하면 내 하인이 되겠다는 말?”
“어린 새끼가 속고만 살았나. 진짜다. 개자식아”
쾅!
흑의사내가 창신의 뻗어온 창기를 세찬 장력으로 가로막았다.
경천동지할 소리가 나며 두 사람이 뒤로 주춤 밀려갔다.
“저…저 패죽일놈이.”
자신의 일창에도 끄덕 않는 흑의사내의 모습을 보고 창신은 더욱 대노했다.
“이놈 간다.”
추릿!
창이 거칠게 요동했다.
창끝이 허공을 후비듯 크게 꺾였는데 그 순간 강한 경기가 휘몰아쳐 왔다.
멈칫!
흑의사내 눈이 빛났다.
창끝에서 뿜어 나온 강한 기세가 해일을 연상케 했다.
흑의사내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범상치 않은 기세에 긴장한 얼굴이 역력했다.
흑의사내 입술이 물렸다.
강자는 제압하는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먼저 자신이 지나온 발자취로 상대가 알아서 무릎을 꿇게 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 경우에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자신의 발자취는 이전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약간 남기긴 했지만 이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정도이다. 자신의 진정한 발자취는 지금부터 남게 될 터 인데 어쨌든 해당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실력이다. 그냥 힘으로 꺾어 버리면 간단한데 지금야 말로 자신의 신위를 보여야 할 때이다.
쿠와아아!
흑의사내 오른손이 뻗어갔고 손 끝에서 검은 기류가 뭉텅 쏟아졌다.
“저…저건.”
“무…묵곤혈참기!”
지켜보던 나머지 사람들이 경악했고 창과 장이 정면으로 부딪혔다.
꽈가가강!
지축을 흔드는 굉음이 울렸다. 바위를 깎을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던 바람도 창과 장의 충돌로 일어난 강한 반탄강기에 잠시 숨을 멎었다.
“크웍!”
“음!”
각기 다른 신음을 터뜨리며 두 사람은 세 걸음씩 물러났다. 외형적인 변화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지켜보던 세 사람의 미세한 차이라도 알아내기 위해 눈을 더욱 활활 태웠다.
“푹!”
그때 갑자기 창신이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일부러 꿇은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자신의 의지로는 서 있을 수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꿇은 것이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무릎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증거는 바로 눈빛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창신의 두 눈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내…내가 너 따위 아이에게.”
웩!
끝내 붉은 피까지 토했다. 물론 피는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바람에 날려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흑의사내 입술이 열렸다.
“약속을 기억하느냐?”
꿈틀!
창신의 눈썹이 다시 요동쳤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향해 하대를 하는 흑의사내의 건방진 말투가 마음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패자이므로 그로부터 공손한 대우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틀렸다.
“하인이 된다고 했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기분 나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을 것이냐?”
창신이 다시 한 번 몸을 떨었다.
무인의 약속은 생명보다 귀하다. 그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고 뱉은 대로 행동해야 한다.
창신의 고개가 숙여졌다.
그리고 후들거리듯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미…미천한 늙은이가 주인님을 뵈오이다.”
“헉!”
“차…창신.”
나머지 사람들이 소스라쳤다.
설마 창신이 약속을 이행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워낙 화가 치솟아 그냥 뱉은 말인데 그것을 진지한 약속이라고 믿지 않았고 그래서 결과를 따르리라고 더욱 생각하지 않았다.
“흐흐! 일어나거라.”
흑의사내는 진짜 주인처럼 당당하게 명령했다.
그런데 창신은 일어나고 있었다.
누구도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절대 일어나지 말기를 마음속으로 바랬는데 창신은 고분고분했다.
“넌 잠시 저쪽으로 비켜나 있거라.”
“예 주인님.”
창신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봉우리 한쪽으로 물러났다.
세 사람은 입을 쩌억 벌렸다. 모두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흑의사내가 세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난 너희 넷을 불러낸 괴서찰의 장본인이니라. 내 목적은 이미 짐작했겠지만 천랑사신을 패업의 선봉에 세우려한다.”
“패….패업.”
“네…네 놈이 누구기에?”
자신들을 수하로 거두어 들이려는 목적도 말이 안될 만큼 무모했지만 패업이라는 말을 너무 가볍게 내 뱉는다.
패업(?業).
자신들도 한 때 패업이란 두 글자를 가슴에 담아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장부라면 한 번쯤 원대한 꿈을 꾸어볼 가치가 있었고 무공 또한 천하를 종횡할 만큼 가공했으니 무리한 계획은 아니라고 생가 했다.
하지만 네 사람의 야망은 오래지 않아 물거품이 되었다. 힘은 부족하지 않았다. 자신들과 맞설만한 고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고 상당수를 격패시켜 자신들을 충성으로 따르겠다는 동의까지 얻어냈다. 흑과 백의 수십 개의 문파까지 수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실패는 엉뚱한 곳에서 있었다. 거둬들인 부하들끼리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아직 천하 패업도 이루지 못했는데 시작하자마자 논공행상을 벌였고 끝내 피 튀기는 다툼을 벌인 것이다.
그때 네 사람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얻었다.
천하패업은 무공의 능력도 아니고 뛰어난 머리로도 얻어 지는 것이 아니었다. 제왕은 철저히 다스림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었다. 아랫사람의 능력을 읽고 적재적소에 배치를 하고 이용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못하면 아래로부터 내란이 일어나 자멸한다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인간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조금만 처우가 불만족스러워도 노골적인 불만을 내 뿜고 반역의 칼을 뽑아들 기회를 노리는 부류가 인간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억압적으로 나가면 이는 더욱 바보짓이었고 끝내 반란에 쓰러진다.
“크핫핫핫!!”
마비가 커다란 웃음을 지었다.
“왜 웃느냐? 내 말이 말 같지 않다는 것이냐?”
마비가 웃음을 그쳤다.
“천만에, 절대 그렇지 않다. 패업, 말만 들어도 얼마가 가슴 뛰는가? 장부라면 최소한 그 정도의 꿈은 가져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다 설혹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말이다. 패업의 야망을 갖는 장부야 말로 진정한 멋이고 사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웃느냐?”
“사람에게는 그릇이라는 게 있다. 천하를 주어도 경영하지 못할 그릇이 있고 주어지면 태평성대의 천하를 만들 그릇이 있지.”
“흐흐흐! 너희 넷은 끝내 꿈을 이루지 못했지.”
흠칫!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의 과거사를 안다는 것은 이미 치밀하게 모든 것을 조사했다는 의미였다.
“난 너희 네 명과 다르다. 어떡하겠느냐? 날 따르겠느냐? 아니면 풍도봉에서 생을 마감하겠느냐?”
“이놈이 듣자듣자 하니 정말 버르장머리가 없구나. 천하의 주인이 되고 싶거든 존장에 대한 예우부터 배우거라.”
독두포가 날아갔다.
머리를 내밀고 날아가는 모습이 마치 거대한 바위가 날아가는 듯 했다.
“흐흐! 독두포의 주특기인 독두살포로군.”
흑의사내의 좌장이 독두포의 머리와 부딪혔다.
뻐꺼!
“흐흐! 세긴 세구나. 어디 이것도.”
독두포가 잠시 멈칫 하더니 다시 대가리로 동천비의 면상을 찍어갔다.
화악!
딱!
동천비의 좌장이 다시 부딪혔다.
파파팍!
목을 뒤로 뽑아 낸 독두포가 연거푸 삼두를 폭발시켰다.
딱---따다닥!
동천비 또한 방심하지 못하고 삼장을 맞받았는데 표정이 흔들리고 있었다.
대저 손보다는 발이 강하고 발 보다는 머리가 강하다는게 정설이었는데 독두포 또한 그랬다. 이미 창신과의 격전으로 기혈이 흔들린데다 독두포까지 전력을 다해 맞서다보니 기혈이 끓었다.
넷 모두와 정면충돌해 이길 가능성은 오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누가되었든 가장 먼저 달려드는 사람을 상대로 전력을 다해 격패시킨 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강호 경험에 비춰 초반에 완전하게 승기를 거머쥐면 나머지는 의기소침해 진다는 것이었다.
즉 기선제압이었다. 구상한 작전은 맞아 떨어졌지만 워낙 거물들인 탓이어서인지 쉽게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뻑!
뻐어어억!
두 사람이 밀려났는데 독두포의 대머리가 붉게 달아올랐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듯 흐물거렸다.
그래도 독두포는 포기하지 않았다. 독두포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는데 무명의 청년 한 명을 물리치지 못한 것이 무척 부끄러운 듯 더욱 씩씩 거렸다.
“멈추게!”
달려들려는 독두포를 보며 마비가 소리쳤다.
“막지 말게.”
독두포가 손을 내저었다. 무척 흥분한 얼굴이었지만 마비는 체면상 그런 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독두포는 지금 말려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싸운다고 해결 될 문제가 아닐세. 우린 서로 죽이자고 만난 건 아니잖는가?”
“저 놈을 가만 안두겠네.”
“나이 값 좀 하게. 지금이 흥분할 때인가?”
동천비 또한 가만있지 않았다.
워낙 노회한 사람들인 만큼 가만있으면 자신의 몸 상태를 읽을수도 있었다.
“흐흐! 물러나려는가? 늙어서 예전만 못한 모양이군. 기력이 말이야.”
듣기에 따라서는 심한 비아냥이었다.
하지만 강하게 밀어 붙쳐야 자신이 완벽하게 덮어진다. 조금이라도 흔들림을 보이면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지 말고 셋 모두 덤비거라.”
“저…저저.”
독두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는데 그것으로 끝이었다. 확실히 그 또한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마비와 육섬홍지다.
하지만 강호에 회자되는 말에 의하면 육섬홍지는 머리가 나쁘다고 했다. 넷 중 가장 나쁘다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문제는 마비였다.
처음 나타날 때부터 지금까지 그가 모든 상황을 조정해 가고 있었다. 겉으로는 흥분을 자제하고 대화로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지만 오랜 장사꾼의 경험으로서 그런 자들이 제일 다루기가 힘들다. 무인이든 상인이든 쉽게 흥분한 사람은 쉽다. 하지만 웃음을 자주 짓고 흥분을 잘 하지 않은 사람은 계산이 빠르고 거래에 아주 익숙했다.
“공자의 존함을 물어도 되겠는가?”
확실히 달랐다.
사람을 만나면 가장 먼저 이름을 묻는다. 그것은 강호이든 상인이든 똑 같았다. 이미 백년가까이 생사고락을 같이한 두 명의 동료가 생면부지의 자신에게 능욕을 당하고 있는데도 마비는 냉철하게 물어왔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날 뛰며 대판 싸움을 벌인다.
“동천비라고 하오.”
“동천비?”
그러면서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듯 눈을 멀뚱거렸다.
“천상각의 후예입니다.”
장내에 갑자기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천비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네 사람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지만 낯선 목소리가 근접해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상대가 기습을 가했다면 상당한 위기를 불렀을 것이었다.
“처식아.”
“식아야.”
네 사람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장내에 흑의를 걸친 청년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데 오척도 채 되지 않을 만큼 작았고 놀랍게도 머리통은 보통 사람보다 세배는 커보였다.
흔들흔들!
바람에 흔들거리는 건지 아니면 머리가 너무 무거운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청년의 머리통은 심하게 움직였다.
음처식(陰悽食).
올해 스무 살인 음처식은 천랑사신의 공동제자이다. 지금으로부터 십사 년 전 네 사람은 항주의 뒷골목을 걸어가고 있었다. 당시 항주 인근 가흥에 독두포가 살고 있었고 그의 생일을 맞이해 모처럼 천랑사신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네 사람은 항주에서 가장 큰 기루인 오월루를 들어가다 말고 일제히 발걸음을 멈췄다.
오월루 입구 좌측 담벼락 아래 한 어린 아이가 웅크리며 흐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까이 다가본 어린 아이는 여섯 살 먹은 뗏국물이 좔좔 흐르는 거지였다. 여섯 살 아이는 손에 삶은 무 한 개를 먹고 있었는데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연인 즉 오월루에게 구걸하러 들어갔다가 점소이에게 실컷 두들겨 맞고 무를 한개 얻었는데 삶은 것인지도 모르고 덥썩 물었다가 입을 덴 것이다. 하지만 워낙 배가 고팠으므로 아이는 데인 입의 고통에 눈물을 흘리며 삶은 무를 먹고 있었다.
아이는 부모도 없이 버려졌고 자신을 데려다 키운 거지 부모마저 굶어 죽자 홀로 구걸에 나섰던 것이다.
네 사람은 곧바로 오월루를 들어가 점소이를 두들겨 팼다. 또한 점소이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죄를 물어 주인까지 늘씬 두들겼다. 네 사람은 생일 술을 접고 아이를 데려와 키웠는데 그 아이가 지금의 음처식이었다.
“네가 여긴 웬 일이냐?”
음처식이 물었다.
“네분 사부님께서 갑자기 한 날 한 시에 사라지셔서 제자는 뭔가 커다란 비밀이 있음을 감지하고 조사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저분께서 괴서찰을 보낸 당사자라는 것을 알았지요.”
비록 학문은 배우지 못했지만 타고난 머리 하나만큼은 영리했다.
어찌나 영민하고 똑똑한지 하나를 가르치면 음처식은 네 개 다섯 개를 깨우쳤다.
“저 분은 천상각의 맏이로 동천비라는 분입니다. 무림맹과 원한을 맺어 강호에 뛰어들었죠. 묵곤혈참기라는 금지마공으로 대성하여 지금 패업의 야심을 키우고 있습니다.”
자신의 속속들이 밝히자 동천비의 눈이 커졌다.
이제 갓 스무 살이지만 범상치 않은 재기가 번득이고 있었다.
“음처식이라고 했느냐?”
“네 형님!”
“혀…형님!”
동천비는 물론 천랑사신까지 눈을 크게 떴다.
자신들이 겪은 음처식은 보통 아이가 아니었다. 그런 음처식이 동천비의 부름에 친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했다. 그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자신들이 처신을 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씀 있으면 하십시오. 미리 말씀 드리지만 저는 형님과 친해지고 싶습니다. 물론 시간을 주신다면 사부님들의 마음 또한 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 부하가 되겠다는 얘기냐?”
“삼류뮤사도 아니고 천하제일고수의 부하가 되는 것이니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천하제일고…수?”
동천비의 눈이 커졌다.
스스로 강하다고 자부했지만 한 번도 천하제일고수라는 말을 떠올려 보지는 않았다.
천하제일고수.
무림인들에게는 꿈의 경지이고 위치이다.
“처식아.”
동천비의 목소리도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천랑사신을 향해서는 살기 가득한 목소리였는데 지금은 완전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네가 보기에 이 우형이 정말로 천하제일고수라고 여겨지느냐?”
“묵곤혈참기는 마공입니다. 강한 무공이지요. 형님은 그 마공을 십이성 대성했으니 천하제일고수입니다. 형님이 죽이지 못할 인물이 있을지 모르지만 형님을 죽일 인물은 없습니다.”
동천비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자신을 죽일 인물은 천하에 없다는 광오한 얘기였다.
자신은 적수를 지금까지 남궁천과 백쾌섬, 그리고 꿈에서도 찢어죽이고 싶은 동천몽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제 그들도 자신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은 어떤 칭찬보다 뜨겁고 격렬하게 와 닿았다.
“진실입니다. 형님을 죽일 자 천하에 없음을 이 아우는 자신합니다.”
바로 그때였다. 나머지 천랑사신 세 명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주인을 뵈오이다.”
음처식이 동생될 것을 자처했으니 자신들 또한 머리를 굴리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음처식의 결정은 곧 자신들의 결정이고 그의 뜻은 한 번도 가볍게 세워지지 않는다. 즉 믿어도 된다는 뜻이었다.
동천비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천랑사신을 끌어들이지 않고는 패업의 꿈은 요원 하다는 것이 그가 내린 결정이었다. 또한 넷을 굴복시키는데 어쩌면 자신이 패할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진 각오를 갖고 나섰고 실패 하더라도 어쩔수 없다고 여겼다.
사실 음처식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결코 상황은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마비와 육섬홍지의 합공이면 자신의 몸 상태를 봤을 때 패배쪽으로 기운다. 천랑사신에게 패하면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그런데 음처식이 나타나 상황을 완전히 반전시킨 것이었다.
“아우!”
“형님!”
와락!
음처식이 동천비의 품속에 안겼다.
두 사람이 서로를 힘차게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천랑사신의 표정은 밝았지만, 한 사람 마비만 소리 없이 한숨을 내 쉬었다.
음처식이 나타나 복잡한 상황을 단번에 정리하여 다행이긴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동천비가 천상각의 후예라면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자신들도 천상각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천하제일대상가이자 고금을 통 털어 가장 돈이 많은 가문이었다. 무림맹과 대립각을 세웠다고 하지만 무림맹 또한 그들의 주머니에 붙어 기생했으니 어쩌면 천상각이야 말로 천하를 주무른 패업의 가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섯 사람은 곧바로 자리를 옮겼다.
음처식이 이렇게 기쁜 날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동천비를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7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