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61화 (61/71)

제7장 공포

긴장이 되는 듯 실내를 서성거리더니 창가에 놓인 탁자 위 물주전자를 들어 물을 마셨다.

커어!

트림을 하며 물주전자를 놓는 동천몽의 표정이 때마침 떠오르는 햇빛을 받으며 붉게 타올랐다.

“대법왕님 모셔왔습니다.”

문밖에서 일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빨리!’

백궁에서 천검은왕의 거처까지는 오리 길이었다. 그런데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되지 않아 데려온 것이다.

사실 일목이 보낸 전음의 내용은 이러했다.

아침 일찍 천검은왕을 찾아가는 것 자체가 그를 긴장시키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천천히 데려 오는 것보다는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면서 미친 듯이 끌고오면 천검은왕의 모든 감각과 감정은 긴장을 넘어 공포와 두려움으로 빠질 것이라는게 일목의 전음이었다.

그를 잔뜩 공포 속에 몰아 넣어 제정신이 아니도록 만든 후 은근슬쩍 사실을 밝히자는 것이었다. 완전히 혼을 빼놓으면 동천몽이 어긴 계울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할 겨를이 없을 것이라는게 일목의 말이었어도 쓸만한 전략이었기에 곧바로 대답했다. 그리고 일목은 미친 듯이 달려가 미친 듯이 데려 온 것이다.

“들어오너라.”

동천몽이 차갑게 목소리를 깔았다.

문이 열리고 일목이 천검은왕을 데리고 들어섰다. 얼마나 빨리 달려왔는지 천검은왕은 헐떡거렸고 예상대로 표정이 돌덩이처럼 굳어졌으며 휘둥그래진 시선으로 허리를 구부렸다.

“화…화급을 다투는 일이라고 들었나이다. 무슨 일이온지 말씀해주소서.”

동천몽이 천검은왕을 바라보았다.

쇠를 녹일 듯한 강렬한 눈빛이 쏘아오자 천검은왕이 흠칫했다.

이갑자 내공을 지닌 자신인데도 정면으로 받아 낼 수가 없을 만큼 동천몽의 눈빛은 맹렬했다.

불현 듯 가슴이 철렁했다. 눈빛은 대개가 상대의 감정을 대변한다. 그런데 저토록 가공할 눈빛을 보냈다는 것은 필경 자신에게 상당한 감정이 있다는 뜻이었다. 더욱 가능성이 농후한 것은 이 자리에 자신만 불렀다는 것이다. 공적일 일이라면 사대법왕을 모두 불렀을 것이었다. 더구나 어제 밤 개운하지 않은 마무리로 인해 밤새 한잠도 자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아침 일찍 또다시 부르자 천검은왕은 거의 녹초가 되었다.

퍼억!

천검은왕은 무릎을 꿇었다.

왠지 무릎을 꿇어야 할 것 같았다.

“소…소승이 무슨 잘못을 했나이까? 죄를 지었다면 자비를 베푸소서. 그냥 죽여주소서.”

동천몽이 무릎을 꿇고서 올려다보는 천검은왕을 금방이라도 녹여 버릴 듯 노려보았다

움찔!

그러자 천검은왕은 더욱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급기야 고개를 떨구어 버렸다.

“아미타불! 죽여주소서.”

천검은왕이 통곡하듯 외쳤다.

동천몽이 천검은왕을 향해 다가가더니 가만 내려다 보았다. 지척에서 내려다보자 천검은왕은 더욱 위축되며 고개를 떨구었다.

“손을 다오.”

천검은왕이 부들부들 떨며 두 손을 쳐들어 올렸다.

동천몽이 주름살 가득한 천검은왕의 두 손을 꼬옥 감싸며 말했다.

“늙었구나.”

꿈틀!

눈빛과는 정 반대되는 따뜻한 목소리에 천검은왕이 몸을 가볍게 떨었다.

“은왕.”

“며…명을 받사옵니다.”

천검은왕이 양팔을 잡힌 채 고개만 숙였다.

동천몽이 말했다.

“날 용서하거라.”

“아…아니옵니다. 소승을 꾸중하소서.”

“여자를 범했다. 물론 그 여자는 정경이니라.”

동천몽은 빠르게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어쩔 수 없었음을 강조하며 마무리했고 잠시 동안 천검은왕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일목도 천검은왕의 반응에 잔뜩 긴장하여 쳐다보았다.

천검은왕이 머뭇거리며 고개를 쳐들었다.

“무…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소승은 잘 모르겠나이다.”

“별것 아니니라. 정경이를 범했다는 얘기다.”

“그…그럼 소승을 두들겨 패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니옵고?”

“내가 왜 널 때린단 말이냐? 넌 착하다. 아주 착하다. 꾸중은 본왕이 들어야지.”

천검은왕이 눈을 깜박 거렸다.

한참 동안 깜박거리더니 천검은왕이 큰 소리로 외쳐 말했다.

“감사하옵니다.”

멈칫!

동천몽이 놀란 시선을 던졌다.

“감사하옵니다. 소승은 죽을 죄를 지은 줄 알고 너무 놀랐사옵니다.”

“미안하구나. 그래 날 용서 하겠느냐?”

“물론이옵니다. 무조건 용서 하지요. 대법왕님께서는 소승의 영원한 주인이며 스승이옵니다.”

와락!

동천몽이 손을 힘주어 쥐고 쭈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진짜냐? 날 용서 한단 말이지?”

“네, 아무 염려 마옵소서.”

“정경이를 범했는데도?”

“그까짓게 무슨 대수? 가만 지금 무슨 말씀을 하셨사옵니까?”

그제서야 정신이 든 듯 천검은왕이 눈에 힘을 주었다.

하나 동천몽은 이미 일어났고 어깨를 토닥였다.

“고맙구나. 역시 넌 본왕이 가장 총애하고 아끼는 제자이니라. 그만 일어나 가보거라.”

천검은왕은 주춤 거리며 일어섰다.

동천몽을 바라보는 천검은왕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반면 동천몽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뭐하느냐? 어서 가보거라.”

“아, 예!”

천검은왕이 합장을 하고 돌아섰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완전히 시커멓게 굳어 있었다.

힐끔!

분노한 얼굴로 일목을 쳐다보자 고개를 돌려버렸다.

철저히 두 사람의 계산에 말린 것이다. 잠자리에 일어나자마나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고 데려와 얼을 뺐고 동천몽은 살벌한 눈빛으로 자신을 위축 시켰다.

모든 것이 철저히 두 사람의 작전대로 끝나버렸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천검은왕이 돌아섰다.

“여…여인을 범했다고 했사옵니까?”

“무척 괴로웠는데 네가 용서해주니 정말 고맙고도 감사하구나. 배고플텐데 어서 가보거라. 난 서재에 볼일이 있구나.”

그러면서 곧바로 돌아서서 서재로 쏙 들어가버렸다.

‘아미타불!’

천검은왕이 내심 불호를 중얼거리며 문을 열고 나갔다.

간부들의 죄는 자기 독단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장로급 이상은 징계에 대한 최종 결정은 자신이 쥐지만 일단 사대법왕이 모여 토론을 벌인다. 대법왕이 계율을 위반했을 때는 사대법왕과 장로들이 모여 토론을 거친다. 그러나 마지막 결정은 자신이 내린다. 그러나 다른 간부들과 달리 반드시 장로회의에 상정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모든 것은 용서한다고 약속해버렸다. 장로회의에 상정하지 않고 독단으로 처리했다고 해서 대법왕에 대한 단죄가 추가로 생기거나 자신의 결정이 무효가 되는 따위의 일은 벌어지지 않지만 적지 않은 문제가 뒤따를 것이다. 가장 큰 골치거리는 정식절차를 밟지 않았기 때문에 장로회의에서 대법왕의 도덕성을 놓고 문제를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징계는 피했지만 대법왕의 도덕성과 권위가 흔들릴 수 있는 것이다.

휘이이!

길은 가던 천검은왕은 급기야 길가 바위에 털썩 주저 않았다.

생각할수록 사태가 심각했는데 자신이 너무 생각 없이 처리해버린 것이다. 이제와서 일목과 동천몽의 작전에 말려들었다고 변명해봤자 자신만 못난 사람 취급 받을 것이다.

어찌나 겁을 먹었던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땅을 치고 후회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며 이왕 이렇게 되었으므로 최선은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치는 것 뿐이었다.

“아니 자네 거기서 뭐하는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천장금왕이 내려오고 있었다.

“무슨 한숨인가? 얼굴이 좋지 않군?”

“사…사형.”

“이 사람 왜 그러나? 목소리도 떨리고 입술도 바짝 말랐잖는가?”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어딜 가시는 길이옵니까?”

“대법왕님을 좀 뵐까하네. 그런데 자네 정말 별일 없는가? 아픈 사람처럼 안색이 무척 창백하군.”

“괜찮사옵니다. 어서 가보십시오.”

합장을 하며 천장금왕을 쫓다시피 보냈다.

고개를 갸웃 거리며 사라지는 천장금왕을 보며 천검은왕은 입술을 깨물었다.

‘묻자!’

가슴에 묻기로 했다.

동천몽 또한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절대 입은 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 보다 더 입을 닫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아미타불!’

새삼 동천몽의 영리함에 혀를 내둘렀다.

사대법왕의 위(位)에 올라서자마자 가장 먼저 동천몽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받들어 모셔야 할 윗사람이었으므로 자세히 알아줄수록 좋다는 뜻에서였다. 동천몽에 대한 소문은 대충 들었지만 직접 조사결과 큰 차이는 없었다. 성질은 약간 거칠었지만 머리는 단순했으며 잔머리가 발달해 있었다. 그것 말고는 주의할 것도 없었고 아랫사람들을 못살게 한다거나 잔소리가 많지도 않았다. 그래서 모시기 편한 대법왕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했는데 오늘 뒤통수를 맞았다. 그것도 엄청 세차게.

왜 잔머리가 뛰어나다고 다들 입을 모았는지 오늘 그 이유를 똑똑히 보았다.

‘헛헛! 소승이 졌습니다.’

자신의 완전한 패배였다.

씁쓸한 미소를 짓고 걸어가는데 갑자기 뾰쪽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왕 사형.”

자정경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천검은왕의 표정이 굳어졌다.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자 원인제공자인 여인이다.

사실 이번일이 있기 전부터 사대법왕 사이에서는 상당한 말이 있었다. 속가제자이기 때문에 궁에 머문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것은 당사자가 여자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무림쌍미 중 한 명인데다 옷차림 또한 지나칠 만큼 노골적이었다. 더구나 동천몽 곁에 오래있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염려가 전대법왕들 사이에서도 있었다는 말을 듣고 기회를 보아 내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마침내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무슨 일인가 사제?”

퉁명스런 천검은왕의 목소리에 자정경의 눈이 빛을 뿌렸다. 천검은왕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를 챈 듯 했다.

하나 그녀는 이내 웃음을 지었다.

박 속 같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그녀에게서 그윽한 향기가 풍겼다.

천검은왕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자신처럼 수양이 얕지 않은 사람도 마음이 움직이는데 하물며 열혈청년이랄수 있는 대법왕이 넘어가지 않는 다는 것은 말이 안되었다.

“사부님을 만났다고 들었어요.”

“그…그렇네. 만났네.”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로 만나셨죠? 혹시?”

“사제와 관계에 대해 말하더군.”

자정경의 눈이 커졌다.

마침내 원하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정말인가요? 뭐라고 하던가요?”

“사제와 그 짓을 했다고 했네.”

그 짓이란 표현에서 천검은왕이 더듬거렸다.

“그리구요?”

“아이까지 생겼다더군.”

“그래서 어떤 처벌을 내렸나요? 대법왕이지만 여색을 탐한 죄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어요?”

“사제 말처럼 여색을 탐한 것은 큰 죄이지. 하나 대법왕님의 말씀을 들어보니까 추잡한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제의 꺼져가는 목숨을 살리기 위해 한 몸 내던진 살신성인이었더군.”

“사…살신성인?”

“모든 것을 용서하기로 했네. 물론 앞으로 적지 않은 잡음이 있겠지만 큰 문제는 아닐 것이라고 믿네. 잠시 후 사대법왕을 모두 모아 이 문제를 얘기 할 걸세.”

자정경의 안색이 흑빛으로 변했다.

동천몽이 파계 당하고 자신과 나란히 세속으로 떠나는 모습을 꿈꿨는데 전혀 엉뚱한 결과가 다가오고 있었다.

“진짜로 말씀하셨나요?”

“그렇다니까?”

“그런데 아무런 징계를 내리지 않았단 말인가요?”

“난 바쁘네. 이만 가봐야겠네.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으면 대법왕님께 직접 묻게.”

천검은왕이 총총 걸음으로 사라졌다.

자정경은 한동안 얼어 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원대한 꿈이 완벽히 물거품이 되고 있었다.

꿈속에서 태어난 아이를 데리고 자신과 동천몽이 여행가는 꿈을 꾸었다. 물론 꿈속의 동천몽은 파계를 당했고 머리를 길은 완벽한 절세미공자였다. 꿈은 반대라더니 진짜란 말인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잠시 동안이었지만 무척 행복했었다.

자정경이 넋을 잃고 있을 때 좌측으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 있느냐? 얼굴 표정이 왜 그러느냐?”

자정경이 고개를 돌리자 자추동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정경이 놀라며 다가갔다.

“아버님.”

자추동은 자신보다 훨씬 일찍 돌아와 흑수당을 재건했다. 이미 서장의 상권은 완전히 복원했고 중원진출을 위해 요즘 바쁘다.

“어떻게 여긴?”

“왜 아비가 오면 안되는 곳이냐?”

“그건 아니지만.”

“전쟁 중 아니냐? 아무리 싸움의 복판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포달랍궁의 형편이 썩 좋지 않다더구나. 그래서 대법왕님을 뵙고 성의를 표했다.”

“얼마나 드렸어요?”

“얼마라니? 얼마 주었는지는 알아서 뭐하려느냐?”

자추동이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누구에게 얼마를 주든지 한 번도 관심을 갖거나 액수를 묻지 않는 자정경이었다.

“이왕 주실 바엔 많이 좀 드리라구요. 옛날처럼 줘놓고 욕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구요?”

자추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생색이 아닌 마음에 우러난 시주가 되어야 주는 사람이나 받는 쪽 모두가 행복한 법이지. 염려 말거라. 몇 년 흉년이 들어도 굶을 일은 없도록 풍족하게 주었느니라.”

자추동이 길가에 있는 바위에 걸터 앉으며 말했다.

“날 따라 가자꾸나.”

“네?”

자정경이 놀라 돌아보았다.

자추동이 딴 곳을 보며 말했다.

“아뭇소리 말고 아비를 따라가자. 여긴 더 이상 네가 있을 곳이 못되느니라.”

자정경이 놀란 시선으로 말대꾸를 하지 못했고 자추동이 일어서서 말했다.

“너에게 실망했느니라. 대법왕님을 향한 너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는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식으로 몰아가려하다니 그것은 너무 속 좁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던가요?”

“그분께서 그런 말 하실 분이냐?”

“그럼 어떻게 아셨어요. 사부님께서 말해주지 않았으면?”

“사랑은 독점이 아니니라. 더구나 대법왕님 같은 위대한 분을 좋아하는 여인이라면 생각도 보통의 여인들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느냐? 이번 일은 무조건 너의 잘못이 크다. 대법왕님 어께에 포달랍궁과 서장 뿐만이 아니라 강호의 미래가 달려 있다. 그런데 넌 속 좁게 너 한 사람의 행복을 위해 대법왕님을 구속하려 하고 있다.”

자정경이 아무대꾸도 않는다.

사실 자추동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자신도 이미 후회를 시작하고 있었다. 너무 사랑을 하기 때문에 곁에 두려했지만 돌이켜보면 좁은 생각이다. 아녀자의 좁은 세상을 벗어나지 못한 단편적인 의식에 스스로도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돌아갈 생각을 했어요. 다만 시기를 언제로 잡아야 하는지가 문제였을 뿐.”

흠칫!

자추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정경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정경아.”

“아버지”

자정경이 자추동의 품에 안겨 흐느꼈다.

부친이기 때문에 가급적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말했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자신을 속 좁은 여자 따위의 고상한 표현을 써가며 흉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필시 자신의 행복밖에 모르는 꽉 막힌 계집이라고 얼마나 손가락질할까. 당장 주위 사형 사제들부터가 그러할 것이고 천검은왕은 벌써 그런 시선을 보내지 않았던가.

누군가를 이토록 목숨 걸어 사랑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도무지 고개가 돌려지지 않은 사내가 동천몽이었다. 대법왕이고, 그의 운명이 한 여자와 절대 만족하며 살아야 할 범부의 삶을 요구하지 않는 구도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혼자 독점하려고 했다. 안되는 줄 알면서도 잠시 못된 생각을 했었다. 아무리 되돌아봐도 평범한 여자라면 누구든 취할 수 있는 행동을 했는데도 왜 이렇게 서럽고 슬프단 말인가.

“흑흑흑!”

자정경은 자추동의 앞가슴이 흥건히 젖도록 울었다.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겉은 잔잔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안쪽으로 거센 회오리가 몰아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곧 눈의 주인공의 감정이 지금 무척 격앙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이미 자정경이 탄 마차는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데도 동천몽의 시선은 창밖에 꽂힌 채 움직일 줄 몰랐다.

마차가 사라지고 이각쯤 더 지나서야 시선을 거두고 자리에 앉았다.

“차를 드릴까요?”

입구에서 다각승이 말했다.

동천몽은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고 반각쯤 지나 차 심부름을 하는 다각승이 김이 피어나는 용정을 가져왔다.

동천몽은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아무소리 않고 차를 마셨고 다각승은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동천몽은 굳은 얼굴로 찻잔을 들어올렸다 놨다를 반복했다.

“다녀왔사옵니다.”

일목이 들어왔다.

마차를 산문 밖까지 직접 몰아 배웅하라는 명령을 받고 다녀오는 길이었다.

“잘 갔느냐?”

“예.”

동천몽의 기분을 감안 한 듯 일목의 대답이 조용했다.

“울더냐?”

“예!”

동천몽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내게 무슨 한 말 없더냐?”

“건강하시라고?”

스스로 떠나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내 보내려고 했다. 같이 놀아줄 한가할 때가 아니기도 했고 제자들 공부하는데 적지 않는 방해가 된다는 사대법왕의 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본인이 스스로 궁을 나가겠다고 말해 그나마 한 가지 염려를 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 또한 본인이 좋아 사가로 돌아간다는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기에 더욱 더 서럽게 울고 아쉬움을 남겼을 것이다.

중원 사람들은 자신 더러 무척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대법왕의 위에 있으면서 중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중 한 명을 제자로 두었다는 것이 행복할 것이라는 게 그들의 이유였다. 물론 그들의 생각이 크게 틀리지 않음을 인정한다. 대법왕이란 직위는 평범하지 않고 무림제일미라는 명예를 지닌 여자는 사내라면 누구든 탐을 낼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 두 가지는 막중한 부담과 책임감으로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최소한 일 년 전만 됐더라도 자정경의 뜻처럼 홀가분하게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평범한 사내로, 한 여인의 남편으로 인생을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그게 아니었다. 자신에게는 강호에 평화와 온전한 불법을 전할 큰 사명이 주어져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절대 거절할 수 없고 외면할 수 없는 천명이었다.

“덕배이옵니다.”

“들라.”

덕배선사가 들어섰는데 걸치고 있는 가사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한 눈에 무예 수련 중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동천몽이 찻잔을 내리며 물었다.

“용건 있느냐?”

“송구하옵니다만 묘한 사고가 생겼사옵니다. 두 명의 제자가 주화입마에 현상을 보이고 있사옵니다.”

“주화입마.”

덕배가 빠르게 설명을 했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밀종대수인을 수련하던 천룡구십구불 중 두 사람이 갑자기 기혈 역류현상에 빠지더니 헤어 나오지 못하고 주화입마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천룡구십구불 뿐만 아니라 포달랍궁의 모든 무승들은 지금 전력을 다해 무예수업 중이었다. 그것은 동천몽의 긴급 지시에 의한 것이었는데 향후 강호의 패권을 놓고 벌일 싸움은 무척 처절할 것이라는 것이 그런 명령을 내린 동천몽의 설명이었다. 적은 포달랍궁의 상대가 되지 않지만 어떤 적보다 더 강하고 악착같이 나올 것이 뻔했다. 비록 외형적으로는 목와북천이 천하제일패자이지만 누구든 언제든지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었다. 좀더 버티고 악착같으면 해볼만하다는 생각을 모두가 갖고 있어서 겉모습과는 달리 싸움이 잔인해질 것이기 때문에 방심하지 말란 얘기였다.

천룡구십구불은 오래전부터 밀종대수인을 수련하고 있었다. 덕배가 수장으로 취임하자마자 배우토록 했다. 워낙 어려운 무공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연마를 기피하였지만 배워 놓기만 하면 자신의 능력이 달라진다는 설득에 모두 수긍했고 얼마전부터 위력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요즘은 더욱 열심이었다.

더구나 큰 전쟁을 앞둔 상황이어서 더욱 매진했는데 그만 주화입마가 생기고 있다는 보고였다.

넓은 연무장에 천룡구십구불이 오와 열을 맞춰 서 있었는데 상의를 탈의 했다. 구렁이가 온 몸을 휘감고 있는 것 같은 구리빛 근육이 더욱 그들의 강인함을 역설하고 있었는데 두 명의 승려가 바닥에 누워 피를 흘리고 있었다.

동천몽이 두 사람의 몸을 살폈다.

둘 모두 무척 낙담한 얼굴이었는데 기혈 소통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기혈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내공이 소멸되기 직전 단계였다. 지금의 단계에서 조금만 더 악화되면 내공이 소멸되고 완전하게 무공을 잃는 주화입마에 빠진다.

동천몽은 두 승려에게 결가부좌토록 지시했다.

일어나 운기조식을 취하던 두 승려가 피를 토했다.

악!

커럭!

검붉은 피다. 다행히 아직까지 덩어리 지지 않는 것을 보면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몸을 살펴도 어디에 문제가 있어 사고가 발생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사대법왕과 내노라 하는 원로들이 나와 원인분석에 열을 올렸지만 모두가 굳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끝내 동천몽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유일한 희망으로 본 것이었다.

“덕배!”

“하명하소서.”

“내가 보는데서 밀종 대수인을 한 번 펼쳐보아라.”

덕배선사가 기수식을 취하더니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가 끌어 올려 벼락처럼 내쳤다.

화아악!

양손에서 강력한 장력이 뻗어나가더니 십여 장 밖에 있는 거대한 미루목을 쳤다.

콰앙!

나무가 흔들리며 푸른 잎들이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부러지지는 않았다. 나무를 부러뜨리지 않고 푸른 잎사귀만 떨어뜨리는 능력이야말로 펼친 무공을 완전하게 깨우치지 않고서는 시늉 낼 수 없었다.

“다시 해봐라.”

덕배가 다시 장력을 날렸다.

손바닥이 뒤집힌 것 같은데 또다시 나무를 흔들었다.

지켜보던 원로들 입에서 감탄과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자신들도 워낙 복잡하고 어려워 밀종대수인을 기피했다. 얻기만 하면 최고가 될 수 있는 기예인데 연거푸 두 번을 보았지만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놀란 것이다. 절정의 고수들인 만큼 어지간한 무공이라면 대략 장로(掌路)를 읽어 내지만 깜깜했다.

척!

동천몽이 양손을 모르더니 벼락같이 앞으로 내밀었다.

“엇!”

덕배선사만이 놀랐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이 취했던 동작을 그대로 재현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빡!

자신 만큼은 못해도 미류목이 흔들거렸다.

“맞느냐?”

“대…대법왕이시여?”

덕배가 놀라 눈을 부릅떴다.

“맞는지 안 맞는지 대답만 해라.”

“구…구할 이상이 맞사옵니다.”

덕배는 기절 직전이었다. 동천몽 앞만 아니라면 필시 기절했을 것이었다. 체신혜감이라고 들었지만 단 두 번보고 완벽에 가까울 만큼 흉내를 낼 줄이야.

“한번만 더 보이거라.”

덕배선사의 눈이 잠겼다.

한번만 더 보이라는 것은 부족한 나머지 부분을 이번에 확실히 고쳐 완벽히 보여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덕배선사는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할 요량으로 느리게 동작을 가져갔다.

그런데 동천몽이 다그쳤다.

“헛짓 때려 치우고 하던대로 해라. 제대로 말이다.”

“알겠나이다.”

덕배선사는 깜짝 놀라며 벼락같이 일장을 날렸다.

모든 시선이 동천몽에게 몰렸다.

동천몽이 알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휙 하며 빠르게 양손을 쳐갔다. 그런데 일장만 뻗는게 아니라 연거푸 오장을 쳐냈다.

따다다----닥!

미류목 아래서부터 위까지 두 자 간격을 두고 다섯 개의 손바닥이 찍혔다. 물론 나뭇잎 또한 우수수 떨어졌다.

“와…완벽하옵니다.”

덕배가 숨넘어가는 소릴 했다.

동천몽이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일어서라.”

두 사람이 고통스러운 듯 이마를 찡그리고 일어났다.

“밀종대수인의 기수식을 취하거라.”

두 승려는 엉거주춤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장력을 날리지 않았고 동천몽이 버럭 소릴 질렀다.

“시전해 보거라. 배운 그대로.”

두 승려가 이마를 찡그렸다. 기혈을 끌어 올리자 무척 고통스러운 것이 분명했지만 동천몽이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의 장력이 나무를 때렸지만 동천몽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고 비명을 질렀다. 간신히 일장을 때렸지만 무리하여 운기한 탓에 오장육부가 꼬인 것이다.

“덕배 네가 보기에는 어떠냐? 지금 두 사람의 자세 말이다?”

덕배선가가 멈칫 했다.

듣기에 따라 동천몽의 말은 두 사람의 초식 운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소승과 별 차이가 없사옵니다. 다만 내기를 끌어 올리는 상태가 원만하지 못해 위력이 떨어질 뿐입니다.”

“정녕 다른 곳에서는 문제가 없단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동천몽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덕배선사가 물었다.

“뭐가 잘못되었는지요?”

“내 눈에는 잘못되었다.”

“네엣?”

덕배의 눈이 부릅떠졌다.

다른 건 몰라도 밀종대수인에 관해서는 자신이 위다. 그런데 동천몽이 자신도 짚어 내지 못한 문제점을 발견했다는 뜻이었다.

동천몽이 두 승려를 향해 다시 말했다.

“다시 펼쳐 보거라.”

두 무사의 얼굴이 검게 변했다. 한 번씩 펼칠 때마다 온 몸이 토막 나는 고통을 느낀다. 도저히 펼치고 싶지 않았지만 상대는 대법왕이고 다. 더구나 자신들을 돕기 위해 수고하고 있지 않는가.

슉!

슈욱!

두 사람이 반쯤 손을 뻗쳤을 때 동천몽의 음성이 대기를 갈랐다.

“멈춰랏!”

두 승려의 팔이 반쯤 뻗다 멈췄다.

덕배선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멈춘 두 승려의 자세는 완벽했기 때문이다. 지금 상태에서 곧장 뻗어내면 완전한 밀종대수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동천몽은 손을 보고 말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호흡 상태는 지금 어떠느냐? 내가 보기에 완전히 다 뱉었을 것이니라.”

두 승려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뭣이? 지금 숨을 모두 뱉었단 말이냐?”

덕배선사가 놀라 묻자 두 승려가 다시고개를 움직여 맞다고 대답을 했다.

무예에서 호흡은 생명이다.

호흡 속에 위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흡의 차이는 곧 생사의 차이이기도 하다.

“내가 보기에 밀종대수인의 생명은 호흡을 어떻게 쓰냐에 달려 있다. 마지막 손을 뻗었을 때 호흡을 뱉어내야 한다. 그런데 너희들은 중간에 뱉었다. 마지막에 호흡이 없다보니 내기가 분산되고 분산된 내기는 곧 세맥을 통해 역류한 것이다.”

두 승려보다 덕배선사가 받은 충격은 컸다.

자세의 지적은 몰라도 보이지 않는 호흡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

내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보이지 않는 호흡에 문제가 있음을 꿰뚫어 본단 말인가.

동천몽의 지적을 받은 두 사람은 다시 밀종대수인을 펼쳤다.

쾅!

콰아앙!

조금전 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전개되었다.

미류목이 거칠게 흔들렸는데 앞선 장법과는 위력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밀종대수인을 거꾸로 시전하여 흩어진 내기를 모아라.”

이미 몸 곳곳 세맥으로 상당한 진기가 흩어져 있다. 그것을 긁어 모으기 위해서는 역 동작으로 가져가야 한다. 두 사람은 손을 뻗었다가 거둬 들이면서 심법을 운용했다.

처음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대여섯 번 연거푸 거꾸로 역동작을 시전하자 고통스럽던 몸이 차음 나아졌고 흩어진 내기가 모아지고 있었다.

동천몽이 말했다.

“서둘지 말라. 무예는 서두르면 탈이 생기느니라. 특히 위력에 치우지지 말고 호흡에 신경을 쓰거라. 숨만 잘 쉬고 들어 마셔도 두 배는 강해질 것이니라.”

어느 정도 자신감들이 생기자 속도를 높였고 거기에서 문제가 발생했음을 동천몽은 정확히 읽고 깨우쳤다.

사라지는 동천몽을 보며 덕배는 중얼거렸다.

‘아미타불! 대법왕님은 실로 무신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으시다.’

자신도 모르는 것을 알아차린 동천몽의 감각은 가히 무신이라 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거대한 범선 두 척이 육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범선이 아가오고 있는 곳은 절강의 송문이었다. 조그만 부두이지만 접안 시설이 잘 되어 있어 거대한 범선이 닻을 내리는데 위험하지 않았다.

촤르륵!

닻을 내리는 소리가 어둠을 울렸고 잠시 후 갑판위로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밤이 어두운데다 삿갓을 깊숙이 눌러쓰고 있어서 사내들의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었다. 다만 헐렁한 흑삼에 나막신을 신었고 옆구리에 두 자루의 검을 차고 있었는데 눈빛들이 푸르다.

사내들은 가볍게 몸을 날려 부두로 날아 내렸다. 두 척의 범선에서 내린 흑의사내들의 숫자는 이천을 헤아렸다.

“원로에 수고가 많았소.”

부둣가에 곱추와 한 명의 노인이 범선에서 내리는 사내들의 두목으로 보이는 사내와 굳게 손을 잡고 있었다.

두목의 사내는 구레나룻에 키가 족히 칠척은 되었음직한 거구였다. 흑의노인과 맞잡은 손등에는 검은 털이 수북하여 언뜻 성성이를 연상케 했는데 두 사람은 무척 반가운 듯한 동안 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자자!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우선 들어갑시다.”

흑의노인이 앞장을 섰고 구레나룻의 사내가 뒤를 따랐다. 바다를 끼고 일행은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천 여명이 넘는 대 병력이 움직이는데 발자국 소리 하나 없었다. 알고 보니 모두가 지면에서 두 자정도 뜬 상태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경이적인 초상비였다.

쏴아아아!

검은 바람이 불어가는 모습이었다.

송문을 떠나 일행은 관도를 달렸고 잠시 후 산속으로 접어들자 한 채의 커다란 장원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불빛을 볼 수가 없었다.

구구구궁!

이미 약속이 된 듯 일행이 정문에 도착하자 육중한 문이 열렸고 흑의사내들이 안으로 빨려들듯 사라졌다.

쿠쾅!

흑의사내들이 모습을 감추자 다시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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