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60화 (60/71)

제6장 집중구타

일목은 이를 악물었다. 이름도 없는 무명소졸에게 죽을 수는 없었으므로 더욱 힘을 뽑아 공격을 받았다.

콰아앙!

벌러덩!

충격에 일목은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그 순간 백의복면인이 자신의 앞가슴 위로 날아내리더니 자근자근 밟았다. 순식간에 얼굴이 흙투성이가 되면서 코피가 흘렀고 갈아 입은 흑의가 걸레조각처럼 찢겼다.

팟!

그 순간 일목의 눈이 빛났다. 사내가 자신을 밟고 있는 틈을 이용해 검을 뽑기로 한 것이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죽을 거면 검이라도 뽑아 보고 싶었다.

촥!

검을 뽑았는데 백의 복면인은 미쳐 밟는데 치중한 나머지 제지하지 못했다.

있는 힘껏 배 위를 밟고 있는 백의복면인을 후려쳤다.

싹!

하지만 검 끝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고 일목은 화들짝 놀라며 검을 회수했다. 그대로 놔뒀다간 자신의 하반신을 자신의 손으로 자르는 우를 범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벌떡!

검을 쥐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나 백의복면인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어딨어. 나왓.”

일목이 쌍코피를 흘리며 소리쳤지만 숲은 조용했다. 내력을 끌어 올려 근처 어딘가 숨어 있는지 살폈지만 전혀 감각에 잡히지 않은 것이 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쉽게 경계를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한참을 살핀 후 사라졌다는 확신이 들어서야 검을 회수했다.

“니기미!”

일목이 자기 화를 견디지 못하고 옆에 놓인 바위를 검으로 후려쳤다.

쩍!

바위가 두개로 갈라져 강물로 빠져들었고 거친 물살이 일어났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일목이 검을 검 집에 꽂아 넣고 강가로 다가갔다.

흠칫!

씻기 위해 고개를 숙이던 일목이 기겁했다. 물속에 한 명의 괴인이 있었다. 분명 자신의 모습인데 어찌나 얻어 맞았는지 얼굴이 난장판이었다.

이마가 부풀어 올라 가운데 박힌 눈은 더욱 흉물스러웠고 입술을 찢어졌으며 쌍코피는 마구 쏟아져 내렸다. 의복 또한 완전히 거지꼴이었다.

뿌지직!

또다시 악에 바친 이를 갈고 대충 상처를 씻고 코피를 막기 위해 응급조치를 취했지만 의외로 부상이 깊은 듯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쌍코피를 막기 위해 풀을 뜯어 콧구멍을 틀어 막았다.

“개새끼 만나기만 해봐라!”

다시 한 번 물속에 비친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이를 갈며 몸을 날렸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것이 천만 다행이라면서 위로했다.

반각쯤 강을 따라 계속 날아가자 저 만치 한척의 범선이 물살을 헤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투툭!

자세히 보지 않아도 오강 포구를 떠난 사천행 범선이었다.

일목은 나뭇잎을 한 줌 뜯어 한 개를 물 위에 던졌다. 물위에 떠 있는 나뭇잎을 밝으며 몸을 솟구쳤고 두 번째 나뭇잎을 던져 또다시 날아내렸다.

그런 식으로 대여섯 번 몸을 날리자 눈 앞으로 범선이 나타났고 단 번에 솟구쳐 올랐다.

“아이고!”

“허거거걱!”

갑판 위에 앉아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이 느닷없는 일목의 등장에 기겁할 듯 놀랐다.

일목이 매섭게 쳐다보자 모두가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일목은 주위를 살펴 동천몽을 찾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으므로 선실로 들어갔다.

일목이 들어서자 선실은 완전히 난장판으로 변했다. 일부는 유령이라고까지 하며 고개를 바닥에 쳐박았다. 원래 생긴 것도 험상궂었는데 부어 터진 얼굴과 코피를 막기 위해 두개의 콧구멍에 풀을 쑤셔박은 몰골은 참혹했다.

일목이 노려보자 사람들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시치미를 떼며 숨기에 바빴다. 선실을 나온 일목은 선수로 향했고 그곳에 동천몽과 자정경이 있었다.

두 사람은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맨 선두에 서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다정하게 얘길 나누고 있었다.

“험험!”

가까이 다가가도 몰랐으므로 헛기침을 했다.

처음에는 두 사람 모두 일목을 알아보지 못했다. 자정경 만이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라는 듯 몇 번 힐끔 거리다가 말았고 동천몽은 처음부터 모르는 사람이라는 듯 시선을 돌렸다.

“저…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자정경이 쏘아 부쳤다.

“댁은 누군데요?”

일목의 안색이 변했다.

‘댁!’

완전히 낯선 사람 취급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동천몽은 한 술 더 떴다.

“이 사람이 낮술을 했나? 재수없게 어디서 수작이야. 저리 썩 꺼져라.”

그것도 부족하다는 듯 자정경에게 자리를 옮기자고 제안을 했고 두 사람은 곧바로 이동했다.

일목이 신속이 두 사람 앞을 가로막고 말했다.

“소…소승 일목이옵니다. 대법왕님. 자세히 봐주십시오.”

일목이란 말에 두 사람이 다시 걸음을 세웠다.

자정경이 일목을 살피더니 갑자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도 한심한 년이지. 저런 더럽고도 흉칙한 자를 내 사형이라고 살피다니.”

그것은 절대 일목이 아니라는 선언이었고 동천몽을 향해 묻는다.

“사부님 보기에 어때요. 이자가 정말 현명하고 자상한 내 사형 일목 스님 맞아요?”

동천몽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거지 같은 놈이 어떻게 일목이란 말이냐? 일목은 생김새부터가 다르다. 본 왕의 시위인 일목선사는 일단 생긴 것부터가 준수하다. 한마디로 훤훤장부라 할 수 있고 학문이 얕지 않기 때문에 눈에서 지혜가 풍겨 나온다. 그런데 이자는 눈에서 탁기가 흐르고 일단 못생겼지 않느냐? 네 이놈 감히 어디서 나의 사랑스런 제자 일목선사를 사칭하느냐? 당장 패죽이기 전에 꺼지거랏.”

금방이라도 살수를 펼칠 듯 노기를 띄며 오른손을 쳐들었다.

일목은 움찔했지만 물러나면 안되었다.

“사제, 대법왕님 소승 일목입니다. 제가 원래와 다르게 보인 것은 사실 어느놈에게 두들겨 맞은 때문입니다. 지금 제 본 모습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시오? 우리 일목선사가 어떻게 남에게 두들겨 맞을 수가 있단 말이오? 그의 무공은 강호제일이라 할 만큼 뛰어나오. 당신 가짜 행세를 하려거든 제대로 알고나 하시오.”

이제는 진짜로 확신 하는 듯 말투까지 바뀌었다.

일목은 다급했다.

“믿어 주십시오. 진짜 일목입니다. 맞아서 그렇다니까요?”

“가만, 사부님.”

“왜 그러느냐?”

“그러고보니 나의 존경하는 사형같기도 해요. 전체적인 얼굴 틀이 비슷해요.”

“그게 정말이냐?”

“소녀의 눈썰미를 믿잖아요. 사형을 닮긴 했어요.”

자정경의 말에 동천몽이 다시 살폈다.

“그러고보니…”

“비슷하죠?”

“으응!”

일목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창피한 얘기지만 정체모를 백의 복면인과 격투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그만 뒤지게 맞았습니다. 그렇게 무공이 높은 자는 처음 봤습니다. 너무 억울합니다. 소승은 그 개자식의 적수가 되지 않았습니다.”

동천몽이 눈을 크게 떴다.

“어떤 개자식이기에 너의 실력으로도 이렇게 얼굴이 마구 주물러졌단 말이냐?”

너라고 표현했다는 것은 자신의 말을 믿는 다는 뜻이었으므로 일목은 가슴이 찡해왔다.

“대법왕님, 포달랍궁의 무사의 명예를 훼손한 소승을 용서하소서. 하지만 그놈은 진짜 강했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마구 맞았으면 코피까지 흘렀단 말이에요. 그것도 쌍코피를.”

자정경이 보드라운 손길로 코를 어루만지자 눈물이 핑 돌았다. 일목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다.

너무 기쁘고 좋았다. 오늘따라 이렇게 동천몽이 반갑고 자정경이 아름답게 보인 적이 없었다. 두 사람 앞에 엎드려 절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장로들을 비롯하여 많은 원로들이 무사 귀환을 환영하는 뜻에서 일주문 밖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노구를 이끌고 아직 공기가 차가운데도 환한 얼굴로 환영하는 그들을 보며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는다. 그들의 몸과 마음은 이제 완전하게 자신을 대법왕으로 숭배하고 있었다.

백궁에 이르자 수많은 순례객들이 몰려 있었다. 제자들이 다가서려는 그들을 제지하고 있었는데 뜨거운 감동과 열정의 눈빛으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강녕을 외치고 있었다.

“대법왕님이시여 세존의 자비를 받으소서.”

“무사 귀궁을 마음을 다해 환영하옵니다.”

동천몽이 제지하는 제자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내버려 두라는 신호였고 동천몽은 순식간에 순례객들에게 둘러 싸였다.

동천몽이 순례객들을 쳐다보았다. 하나 같이 삶에 시달려온 힘들고 고생이 가득한 행색들이었지만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 만큼은 감동과 기쁨으로 넘쳐 있었다.

“아미타불!”

동천몽은 불호를 중얼거렸다.

평탄한 삶이 결코 아닌데도 그들은 기뻐하며 행복해했다. 불현 듯 눈 앞으로 형제들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은 눈앞의 이들에 비하면 하나같이 선택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 어디에도 행복해 하는 표정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더욱 탐욕에 찌들어 자신을 죽이려 했고 끝내는 온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야 말았다. 배가 불러도 부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 형제들이 있는 반면 평생을 모은 모든 재산을 부처님 앞에 모두 바치고 빈손으로 돌아가는데도 이들은 얼굴에는 구김이 없었다.

“그대들 가정에 세존의 자비와 평화가 넘치기를 바라노라.”

동천몽은 마음을 담아 축원했고 그들은 감동했다.

동천몽이 백궁 안으로 들어서자 사불각주 무미선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동천몽이 자리에 앉자 마자 곧바로 입을 열어보고 했다.

“백쾌섬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옵니다.”

“남궁천은 밝혀졌느냐?”

“그 역시 감감무소식이옵니다.”

“동천비는?”

묻는 동천몽의 표정이 냉혹하게 변했다. 무미선사는 동천몽의 가슴속에 동천비라는 존재는 죽여야 하는 적 뿐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오강 근처에서 사라진 이후 행방이 묘연합니다. 아마 상처를 다스리기 위해 깊이 몸을 숨긴 듯 하옵니다.”

동천몽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백쾌섬을 비롯해 남궁천과 동천비 모두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은 형편이 그다지 양호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백쾌섬 역시 기존의 자기 무공으로는 자신을 상대하기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충전을 위해 사라졌을 것이다. 남궁천 또한 힘을 모으기 위해 지금쯤 어딘가 숨어 뭔가를 꾸밀 것이고 동천비 또한 비슷한 상황이다.

“가만!”

동천몽의 잠긴 눈이 불현 듯 곤두섰다.

뭔가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눈빛이었다.

벌떡!

자리까지 박차고 일어나자 무미선사가 긴장했다.

“왜 그러시옵니까?”

“중원에 남은 본궁의 제자들은 몇인가.”

“일반적인 정보 수집차원의 사불각 제자들을 제외하고는 전원 귀궁 했사옵니다.”

“장로회의를 소집해라. 지금 당장.”

“네 대법왕님.”

무미선사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장로회의를 열고 중원에 남아 있는 제자들의 숫자를 묻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장로회의는 곧바로 열렸다. 백발의 장로들이 느닷없는 회의소집이 궁금한 듯 서로에게 이유와 사정을 묻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궁금해 할 뿐 속 시원한 대답은 해주지 않았고 할 수 없이 동천몽이 들어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동천몽은 예정 시간보다 반각 가까이 늦어서 들어섰다. 새로 임명된 사대법왕과 동천몽이 자리에 앉자마자 장로들이 질문공세를 쏟아냈다.

“갑자기 어인 회의시옵니까?”

“궁에 무슨 중대한 변고라도?”

모두가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보았다.

동천몽이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을 쳐다보는 장로들을 한 바퀴 휭 하니 훑어보았다.

“오자마자 귀찮게 해서 미안하구나.”

“아…아니옵니다. 소승들은 이렇게 대법왕님께서 자주 불러주심이 그저 기쁘고 감사할 뿐이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자주 불러 주소서.”

여기저기서 황공해 하자 동천몽이 웃었다.

“정말인가? 마음에도 없는 말 들은 아니겠지?”

장로들이 펄쩍 뛰었다.

“대…대법왕이시여 소승들이 감히 거짓을 아뢰겠나이까? 진실이옵니다.”

“소승들은 대법왕님의 존안을 뵈옵기만 해도 한 없이 감격스럽사옵나이다.”

이곳 저곳에서 고개들을 끄덕이며 동조했다.

동천몽이 표정을 고치더니 불쑥 말했다.

“내가 왜 회의를 소집한줄 아시오? 천장.”

새로 임명된 천장금왕이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부르시옵니까? 대법왕님.”

“짐작되는 것 있소? 내가 급작스럽게 이렇게 불어 모은 이유를 말이오?”

“아둔한 소승으로서는 감히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렵나이다. 직접 말씀하시어 깨우쳐 주소서.”

동천몽이 헛기침을 두어 번하며 입을 열었다.

“작금의 강호를 그대들은 어찌보느냐? 참고로 지금의 천하는 묵와북천에 의해 통일 되었다.”

모두들 표정이 급변했다.

포달랍궁 내의 일로 회의를 소집한 것으로 짐작했는데 갑자기 천하정세를 꺼내자 당황한 것이었다. 더구나 묵와북천에 의해 강호가 흑도천하가 되었음을 모르지 않는데 새삼 가르치듯 말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묵와북천이 무림맹을 밀어 내고 새로운 주인이 되었지만 그들은 허깨비와 다름없다. 천하를 통일하느라 가진 힘을 모두 쏟아 버렸다는 것이지. 즉 천하의 주인으로 등극은 했지만 현재 그들에게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얘기니라. 더구나 그들의 우두머리인 백쾌섬까지 모습을 감추었다. 이를 어떻게 생각 하느냐? 그대들이 보기에 말이니라?”

천장금왕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동천몽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가 된 것이었다.

“설마 천하를.”

“흔히 세속에서 즐겨 말하는 기회라는 것 아니겠느냐? 지금은 누구도 우리 상대가 되지 않는다.”

천장금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패업을?”

“굳이 거창하게 패업이란 말을 붙일 것은 없다. 물론 붙여도 문제될 것은 없지만 이 기회에 천하를 우리가 다스려봄이 어떻겠느냐?”

천장금왕을 비롯한 장로들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지금까지 백과 흑이라는 양 집단에 의해 다스려진 적은 있었지만 한 집단의, 그것도 불가의 집단에 의해 천하가 경영된 적은 없었다. 소림사가 천하제일문으로 군림은 했지만 지배는 하지 않았다. 마교 또한 피를 흘렸지만 천하에 군림은 하지 못했다.

“왜 아무런 말들이 없느냐?”

동천몽이 야릇한 표정으로 물었다.

“언제까지 대설산 골짜기에 파묻혀 염불만 외우다 죽을 것이냐? 한 가지 그대들에게 물어볼 것이 있느니라. 도대체 크게 써먹지도 않을 것이면서 왜 그렇게 미친 듯 무공수련에 매달리는 것이냐?”

그러자 천장금왕이 대답했다.

“그야 강해지기 위함이 아니겠사옵니까?”

“강해져 뭘 하려는 것이냐?”

“강해지려함은 적으로부터 나를 우습게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지요. 대저 인간 세상이란 짐승과 다르지 않아 약하면 강한 자에게 먹히지요.”

“단순히 먹히지 않기 위해 강해지려는 것이냐? 아니면 뭔가 더 큰 꿈을 꾸기 위해 강해지려는 것이냐?”

“꾸…꿈이라 하오면?”

“그대들은 꿈을 어떻게 생각 하느냐? 강호인들이 천하를 장악하려는 꿈을 나쁘다고 말하겠느냐?”

“그렇지는 않지만.”

“부처님을 법을 설파하는데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이 뭐라고 생각 하느냐?”

“말보다는 행이지요. 우리가 몸으로 선함을 증명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훌륭한 부처님의 설법을 전하는 길은 없사옵니다.”

“만약 본궁이 천하의 주인이 된다면 부처님의 설법을 전하는데 도움이 되겠느냐? 그렇지 않겠느냐?”

“보…본궁이 천하 패권을?”

“어…어떻게 그런.”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동천몽이 일어났는데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소림은 강하다는 이유 하나로 수많은 제자들이 찾아든다. 강하다는 건 그 무엇보다 더 확실한 부처님의 능력이 된 것이니라. 본궁 또한 천하를 거머쥐면 그 세력이 더욱 커질 것이고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왕성해질 것 아니냐? 강호평화에 소림이 역할은 절대적임을 천하는 인정하고 있느니라.”

천장금왕이 입을 쩌억 벌리며 물었다.

“그…그래서 대법왕님의 뜻은 본궁이 이 기회에 천하를 접수하자는 것이옵니까?”

“상황이 너무 좋아 싸우고 말 것도 없느니라. 가서 그냥 포달랍궁의 깃발만 꽂으면 될 상황이 작금이니라. 그대들을 불러 모은 것은 천하를 본궁의 발 아래 두자는 내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어서이니라. 좋은 생각들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거라.”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너무나 엄청난 뜻이었고 계획이었으며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선언이었다.

“만약 소승들이 반대를 하오시면?”

천장금왕이 말했다.

동천몽이 굳은 얼굴로 돌아보더니 씨익 웃었다.

“아주 즐겁고 강호 평화를 위해 무척 좋은 일이거늘 반대를 하는 바보멍청이가 있겠느냐?”

흠칫!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반대를 하는 자는 아주 멍청이라는 것이었고,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반대한 사람은 가만 두지 않겠다는 협박에 가깝기도 했다.

“왜 말들이 없느냐?”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서로가 눈치만 살피고 혹시라도 잘못하여 입이 열릴까 두려워 입술을 꽉 물었다. 우연의 일치인가. 모든 사람들 머릿속으로 처음 동천몽이 포달랍궁에 잡혀 왔을 때 부린 행패가 떠올랐고 더욱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불심이 깊어져도 본성 한 가닥은 남아 있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유등불이 치지직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초저녁에 송진을 묻혔는데 벌써 닳은 것이다. 천장금왕이 여분의 송진 덩어리를 올려놓자 꺼질 듯 하던 불이 다시 커졌고 방안이 환해졌다.

네 사람 모두 무거운 얼굴이었다. 저녁을 먹고 무려 세 시진 동안 얼굴을 마주 하고 의논을 벌이고 있지만 뾰족한 의견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아미타불! 그만들 돌아가게. 내일 다시 의견을 나눠보기로 하세.”

천장금왕이 그만 각자의 처소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지만 누구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휘이이!

문틈으로 비집고 들어온 바람에 유등불이 작아졌다.

“아무튼 난 반대합니다. 비록 무예를 갖고 있긴 하지만 본궁은 신성한 불가이옵니다. 세존의 말씀을 자비로 전달해야 할 우리가 패업천하를 꿈꾼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천검은왕이 단호히 말했다.

사대법왕이 되기 전까지의 법호는 미개선사였다. 대설산과 홍산이 겹친 미왕곡의 조그만 암자에서 불도를 닦다 동천몽의 부름을 받고 출사 한 것이다.

“우리의 무공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방어 위주인 소극적으로 사용되어야 하옵니다. 세속의 욕망을 위해 사용되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그럼 아까 낮에 그렇게 말씀을 하시지 왜 그곳에서는 침묵을 지키셨습니까?”

천권동왕이 따지 듯 말했다.

미개선사의 사제이자 세수 여든 아홉으로 성격이 불같다.

천검은왕이 쏘아보며 말했다.

“말이 지나치군 사제.”

“그 자리에서 반대를 하셨으면 더욱 보기도 좋았을 것이라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당시 그 상황에서는 제지 할 수가 없었네. 알지 않는가? 대법왕님의 면전에서 반대를 한다는 건 볼썽 사납기도 하고.”

“대법왕님의 권위를 존중하려는 사형의 속마음을 모르는건 아니지만 중요한 일은 어쩔수 없이 의견개진을 해야 합니다. 아무튼 여기서 백 마디 떠들어봤자 소용없습니다. 정 그렇게 가로막고 싶으시면 날이 밝는 대로 대법왕님을 찾아가 안 된다고 하십시오. 소승은 대법왕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천하를 지배하겠다는 대법왕님의 뜻은 여타 속문들과 같은 독선이 기초가 되는 상하관계가 아닌 포달랍궁의 이름을 좀더 크고 강하게 전파해보자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필시 본궁은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룰 것입니다. 우리가 세속으로 뛰어들어 백년을 설파할 것을 단 한 순간에 이룰 수 있다는 얘깁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

워낙 냉랭했고 금방이라도 어떤 충돌이 벌어질 것 같았다.

천장금왕이 서둘러 말했다.

“됐네. 못다 한 얘긴 내일 하기로 하고 그만들 돌아가 쉬게. 밤이 늦었네.”

세 사람이 방을 나갔다.

밖을 나온 세 사람은 각자의 처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고 한참을 걸어가던 천검은왕의 발걸음이 멈췄다.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는 길 한 가운데 누군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아니 사제 아닌가?”

가까이 다가간 천검은왕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로막고 선 사람은 다름 아닌 자정경이었다.

“말씀들이 길었나봐요?”

자정경이 환하게 웃었는데 천검은왕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칠십 년을 수행 했는데도 자정경의 미소에 마음이 흔들린 것이었다.

실로 무림쌍미 중 한 명 다운 미소가 아닐 수 없었다.

“어인일로?”

“사부님께서 잠시 뵙자고 하세요.”

천검은왕의 눈이 커졌다.

사부님이라면 동천몽이었다.

“대…대법왕님께서 이 시간에 날?”

“안내 하겠어요.”

뒤를 따르는 천검은왕의 고개가 좌우로 기웃 거렸다. 갑자기 동천몽의 호출에 강한 의문이 생기며 일말의 불안감까지 들었다. 아무리 자신의 지난 행적을 돌아봐도 나쁜 짓을 한 기억은 없다. 그러나 이 한 밤중에 조용히 부르는 것을 보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임에는 분명했다.

‘설마 조금전 우리끼리 나눈 대화 내용을 엿들었단 말인가?’

만약 대화를 엿들었다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자신은 동천몽의 뜻에 노골적인 반기를 들지는 않았지만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사…사제. 도대체 이 밤중에 대법왕님께서 왜 나를 부르신단 말인가?”

자정경이 앞서가며 대답했다.

“전 몰라요.”

“그래도 조금은 알 것 아닌가?”

“정말 몰라요. 난 그냥 불러 오라고 해서 심부름만 할 뿐이에요.”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자 더욱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이미 동천몽의 세속 행적에 대해 자세한 파악을 끝냈고 환생자로 끌려와서도 온 궁 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특히 엄히 문초할 일이 있으면 꼭 깊은 밤에 은밀이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가는 발걸음이 떨린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분노하면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는 말이 대못처럼 박힌다. 그래서 무척 조심히 행동했고 동천몽의 비위를 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놈의 주둥이가’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전 대화 내용을 엿들은 것이 틀림없었다. 워낙 무공이 높기 때문에 슬며시 엿들으면 절대 알 수 없다.

사실 동천몽의 뜻이 나쁘지는 않지만 불가집단에서 강호를 평정한다는 것은 자칫 볼썽 사나 울 수도 있었다. 아무리 포교를 위한 길이라지만 말이다. 패업은 불가 집단으로서 온당한 행위가 아니고 세존의 가르침에도 맞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이렇게 혼자만 불려가는 걸 보면 길 보다는 흉이 많을 것 같았다. 필시 자신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고 반대하는 자신을 불러 아무도 모르게 죽도록 두들겨 패려는 것이 분명했다.

백궁 건물이 어둠속에서 드러났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아미타불! 어서 오너라.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방안으로 들어선 천검은왕의 눈이 커졌다.

동천몽이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웃음을 지었다. 예상과 전혀 다른 행동에 일단 안심이 되면서도 엉거주춤 섰다. 앉으라고 해서 덜컥 앉았다가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라 앉지 않았다.

“앉아, 천장 안 무너지느니라.”

다시 권하자 그제서야 슬며시 앉았고 동천몽이 준비해 놓은 차를 따랐다.

“들자꾸나.”

찻잔을 들었지만 입으로 가져가지는 않았다. 무슨 일인지 알기 전에는 너무 불편하여 아무것도 입에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은왕.”

“하명하소서.”

잽싸게 잔을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할 만 하느냐? 사대법왕자리가 워낙 힘들고 골치 아픈 자리 아니더냐?”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할 뿐이옵니다.”

“아주 좋은 말이구나. 그래야지.”

“감사하옵니다.”

다시 고개가 숙여졌고 그런 천검은왕을 바라보는 동천몽이 마른침을 삼켰다.

“너에게 한 가지 물을 것이 있어 왔느니라.”

“무엇이옵니까? 무엇이든 물어 주소서.”

“사대법왕 중 천검은왕에게 주어진 권한이 무엇이더냐?”

천검은왕의 눈이 빛을 뿌렸다.

동천몽의 질문이 정확히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 헷갈린 것이었다. 사실 사대법왕에게는 여러 가지 권한이 있다. 네 명 모두에게는 대법왕이 공석일 때를 대비한 여러 가지 권한이 주어져 있는데 그중 천검은왕에게 주어진 대표적인 권한은 뭐니 뭐니 해도 포달랍궁의 모든 계율에 따른 형벌을 집행하는 권한이 있었다.

“여러 가지가 있사옵니다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본궁의 계율을 수호하는 권한이옵니다.”

“그럼 당연히 본궁의 계율에 대해서는 훤히 꿰뚫고 있겠구나?”

“그…그러하옵니다.”

“좋다. 그럼 본격적으로 묻겠노라. 대법왕이 지은 죄중에서 가장 큰 것이 무엇이더냐?”

“으헉!”

천검은왕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죽도록 두들겨 팰 경우 어떤 죄에 해당하느냐고 묻는 것이 틀림 없었다.

동천몽이 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느냐?”

“대…대법왕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옵니다. 감히 대법왕님의 죄를 소승이 어찌 논할 수가 있단 말이옵니까? 거두어 주소서.”

“아니다. 대법왕도 사람이고 죄를 지었으면 법규에 따라 처벌을 받아 마땅한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어서 말해보아라. 대법왕이 행해서는 안될 행동 중 가장 큰 것이 뭐더냐?”

천검은왕이 더듬거렸다.

“글쎄요. 대법왕님께서 하는 일이란 모두 훌륭하고 마땅한 일이기 때문에 굳이 죄랄 것도 없습니다. 사람 한두 명 두들겨 패도 당연한 것이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람을 두들겨 패면 안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물론 제자들을 두들겨 팼다고 대법왕의 권한을 제한시킨다거나 하는 처벌법은 없다.

“어서 말해보거라. 아무것이라도 좋다. 때리는 것 말고 또 말이다.”

“이… 입에 담기 송구하오나 역시 그것 아니겠사옵니까?”

“그것?”

“그것 말이옵니다. 여인과 몰래 통하는 것.”

자신도 왜 그런 대답이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긴장이 지나치다 보니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 했다.

그런데 동천몽이 침을 삼켰다.

자정경 또한 눈을 빛내며 지켜보고 있었다.

“여인과 통하는 것이라면 혹시 그것을 말하느냐?”

“그…그러하옵니다.”

“만약 그 짓을 하면 어떤 처벌이 내려지느냐?”

“당연히.”

말을 하다말고 고개를 쳐들었다.

대화의 원래 취지가 이것 아니잖습니까 하는 시선이었다.

동천몽이 물었다.

“왜 말을 하다 마느냐? 계속 해보거라.”

“그 행위는 사사로이는 파계이옵고 크게는 아주 나쁜일이옵니다. 당연히 자격을 박탈해야 하는 줄로! 그런데 어이 갑자기 그런 부덕한 질문을 하시옵니까?”

“역대 본궁의 대법왕 중 그 짓을 한 사람이 있었느냐?”

천검은왕이 눈을 깜빡 거렸다.

동천몽의 질문이 너무 진지했다.

“소…소승은 잘 모르옵니다. 다만.”

“그래 다만 뭐냐?”

동천몽이 눈을 빛냈다.

자정경 또한 혹시나 하는 눈빛으로 숨을 죽였다.

“자세한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전해 오는 얘기를 들어보면 아직까지 한 분도 그런 분이 없는 것으로 아옵니다. 대법왕님 정도 되시면 이미 인간의 천한 욕망 따위는 떨쳤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그래서 대법왕님은 더욱 신성하시고 함부로 올려다 볼 수 없는 위대 한 분이지요.”

동천몽의 표정이 굳어졌다.

벌컥!

차를 신경질적으로 비우더니 말했다.

“그럼 지금까지 내 질문을 요약하겠다. 대법왕이 그런 짓을 하면 쫓겨난다는 것이구나.”

“그건 어디까지나 계율상! 하지만 절대 그런 추악한 일은 행하지 않을 것이기에.”

“가보거라.”

동천몽이 차갑게 입을 열자 천검은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잔뜩 두들겨 맞을 줄 알고 검게 질렸는데 돌아가라고 하자 살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빠져나오려고 하니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동천몽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동천몽이 인상을 썼다.

“가보라는데 뭘 그렇게 보느냐?”

“아, 예!”

천검은왕이 사라졌다.

천검은왕이 사라지자마자 자리를 동천몽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냉수를 들이켰다.

벌컥벌컥!

쾅!

물주전자를 세차게 놓고 입구를 깊은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그냥 보내면 어떡해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고백은 하고 봐야 할 것 아니에요.”

“그놈 눈빛을 봤느냐? 내가 고백을 하고 아무리 봐달라고 사정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을 눈빛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말하란 말이냐?”

“그럼 어떡해요. 큰일이잖아요.”

그러면서 자정경이 배를 어루만졌다.

사실 자정경의 배속에는 새로운 생명이 싹트고 있었다. 조금 전 초저녁 갑자기 배가 아프다는 말에 만동승의를 불러와 살피게 했는데 그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선언이 떨어졌다.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었다.

자정경이 속가제자이기 때문에 만동승의는 그다지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자정경의 배속 생명이 당연히 궁 밖의 인물이라고 믿는 눈치였다.

동천몽은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는 듯한 충격에서 한동안 헤어나오지를 못했다.

여자를 범해도 큰 대죄인데 아이를 잉태케 했으니 심각했다.

동천몽은 종일 고민을 했고 내린 결론중 하나가 일단 천검은왕을 불러 대법왕이 여자를 범했을 경우 어떤 처벌을 받는지 알아 본 것이다.

나중 자정경이 출산을 하면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고 할까 생각을 했지만 자정경이 발끈했다. 절대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고 만약 동천몽이 끝까지 숨기면 자신이 입을 열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매를 맞겠다는 것이었다.

“몇 일 기다려 보자꾸나.”

“차라리 모든 것을 고백하고 처벌을 기다리는 방향이 어때요? 그럼 혹시 봐줄지 모르잖아요. 더구나 사부님께서는 소녀를 살리기 위해 희생한 것이니까 사실대로 말하면요.”

“네 이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그건 절대 안될 일이었다.

당시 상황에서는 그 방법 뿐이었지만 자신이 지켜본 포달랍궁의 고승들은 고리타분 했다. 아무리 전후사정을 말해주고 피치 못할 사정이었다고 설명해도 절대 인정하려들지 않을 것이 뻔했다.

“아무튼 제자는 절대 아버지 없는 아이로 만들지 않을 거에요. 날 때부터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 아이였으면 해요.”

“내 말은 아버지 없는 아이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당분간 숨기자는 얘기니라. 아주가 아니라 잠깐이니라.”

“잠깐도 싫어요. 다른 아이들은 엄마 배에서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데”

자정경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동천몽이 굳은 얼굴로 쳐다보았다.

“사랑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 위치와 사정을 감안하여 잠시 숨기자는 것 뿐인데도 안된단 말이냐? 제발 궁 밖으로 나가 사가에서 묵거라. 잠시만 있으면 내가 해결 하겠느니라.”

“싫어요.”

자정경은 단호했다. 이제야 말로 뱃속의 아이를 볼모로 자신과 더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오지도 않은 배를 어루만졌다.

“빨리 법을 바꾸어요. 대법왕님은 혼인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말에요.”

동천몽이 눈을 부릅떴다.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포달랍궁은 대법왕 한 사람을 위한 곳이 아니니라. 이곳은 세존의 자비와 그분의 뜻이 숨 쉬는 대가람이니라.”

“그래서 어떻할 건데요? 끝까지 숨기자는 건가요?”

“좋은 묘책이 나올때까지만 숨겨야지 할 수 있느냐?”

“전 못 기다려요. 이삼일내로 해법을 주세요.”

금방이라도 자신이 달려가 고백 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누가봐도 은근한 압력이자 협박이었다.

누구보다도 자정경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동천몽이다. 시원한 해결책을 내놓지 않으면 그러고도 남을 여인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을 파계시기키위해 연구를 거듭하던 자정경이었는데 이유야 어쨌든 관계를 맺었고 생명까지 얻었느니 이 좋은 기회를 그녀가 그냥 보낼 리 없었다.

“만약 말에요.”

“그래 만약?”

“모든 것을 고백하고 처벌을 받는 다면 당연히 대법왕의 위(位)를 박탈하고 쫓아내겠죠?”

자정경의 눈이 강렬해졌다.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자정경은 자신의 속셈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이 대법왕 자리에서 쫓겨나기를 속 시원하게 바라고 있었다. 대법왕을 그만두고 파계하여 자신과 오순도순 사는 것을 꿈꾸고 있는 것이었다.

먼동이 떠오고 있었다. 백궁의 아침은 새소리가 연다. 접동새 한 쌍이 백단나뭇가지로 날아와 부지런히 떠들고 있었다. 밤새 잘 잤느냐는 인사 같은 접동새의 떠듦을 보며 동천몽은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밤새 한숨도 붙이지 못했다.

자정경을 탓할 수만은 없었다. 그녀의 속뜻은 여인이라면 누구든지 소원할 일이었고 평범한 꿈이었다. 부친이 서장제일의 부호이니 더욱 더 자신을 세속으로 끌어내고 싶어 할 것이다. 세속으로 끌어내기만 하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자신이 있다는 것이 자정경의 생각이고 확신이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행복은 지극히 평범했다. 하지만 동천몽이 생각 하는 행복은 달랐다.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이제는 스스로가 더욱 운명을 받아들이고 순응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법왕으로서의 삶을 추구하고 싶었다. 동천몽의 행복은 대법왕으로서 빛나는 업적을 이루는 것이다. 작게는 서장의 평화에서부터 크게는 강호의 평화였다. 윤택한 삶과 태평스런 세상 말고는 더 바랄 것이 없다.

“소승이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일목이 들어왔다.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밤새 지켜보았고 그 또한 나름대로 고민이 적지 않았을 것이었다.

“소승은 긴말을 싫어하기 때문에 간략히 말하겠사옵니다. 한마디로 대법모님은 나쁩니다.”

“대…대법모님, 그는 또 누구냐?”

동천몽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일목이 그것도 모르느냐는 듯 핀잔을 주듯 말했다.

“대법모님도 모르십니까? 대법왕님의 여인이 되었으니까 대법모님 이라고 불러야 하잖습니까?”

동천몽이 어이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순전히 일목 스스로가 지어 낸 호칭이었는데 제법 그럴싸했다.

“으응! 계속 말해보거라.”

“대법왕님은 모든 이의 어버이십니다. 그런 분을 혼자 붙들고 살겠다는 것은 이기적입니다.”

“이…이기적? 계속 말해보거라.”

“소승 같으면 대법왕님께서 큰 자비를 베풀도록 멀찌기 물러나주겠사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보거라.”

“조용히 은인자중하며 살다가 이따금 찾아오시면 그때 실컷 회포를 풀고.”

“회…회포?”

“그런 것 있잖사옵니까? 오랜만에 남편이 돌아오면.”

동천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목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아이가 생겼으니 누가 뭐래도 아버지는 대법왕님입니다. 그 사실은 죽어도 변하지 않지요. 이왕 내 남편 되었으니 맘 편히 먹고 한걸음 물러나 열심히 뒷바라지를 해주겠습니다.”

척!

동천몽이 일목의 손을 잡았다.

“고맙구나. 너라도 그렇게 말을 해주고 날 이해해주니 가슴이 뜨겁다. 일목이 너야말로 제대로 득도 했다.”

“드…득도라뇨? 그냥 마음을 넓게 쓰려고 노력할 뿐이옵니다.”

“어쨌든 좋은 말이구나. 정경이 그녀석이 그래줬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번 밀리면 계속 밀린다.”

“……”

“어려운 말 아닙니다. 말 그대로 한번 밀리기 시작하면 계속 밀린다는 뜻이지요.”

“좀 자세히 말해주겠느냐?”

“간단합니다. 절대 대법모님 말씀을 듣지 마십시오. 한번 들어주고 두 번 들어주다보면 자꾸 들어주게 됩니다.”

동천몽의 눈이 예광을 뿌렸다.

“그러니까 단호히 내 의사표시를 하라는 얘기구나.”

“바로 그것입니다. 냉정하고도 무섭게 대법왕님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천검은왕님을 불러 사실대로 말씀하십시오.”

“그…그러다 잘못되면 어찌하느냐? 안봐주면.”

“하는 수 없죠.”

뭔가 좋은 묘안을 기대했는데 너무 간단히 대답하자 동천몽의 이마가 찡그려졌다.

“무슨 말이냐? 네 말인즉 아무리 어쩔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천권동왕이 참작해주지 않으면 내려지는 처벌을 달게 받으라는 얘기냐?”

씨익!

갑자기 일목이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주위를 살피고서 목소리를 낮췄다.

“대법왕님께서 누구십니까? 말 그대로 포달랍궁의 수장이며 서장 무림의 총수 아니십니까?”

“초…총수.”

“저희 배교에서는 우두머리의 또 다른 이름으로 그렇게 부릅니다. 더구나 대법왕님께서는 포달랍궁 역사상 그 어떤 대법왕님보다 뛰어나고 훌륭하시고 강하시며 자비로우십니다. 그런 분을 내치기야 하겠습니까?”

동천몽이 일견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일목이 약간 목소리를 높였다.

“더구나 작금의 강호는 아주 위태롭습니다. 다시 말해 대법왕님이 계시지 않으면 본궁은 겁난에 휩싸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겁난?”

“본궁은 강호의 은원에 깊숙히 발을 담궈버렸습니다. 물론 대법왕님의 사가와 형제들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피의 은원을 맺었기 때문에 만약 대법왕님이 물러나시면 적이 우릴 가만 두겠습니까?”

“그러니까 절대 천검은왕이 날 징계하지는 못할것이란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대법왕님이 물러나는 순간 본궁의 피바람에 휩쓸린텐데 돌머리가 아닌 이상 바보같은 짓을 하겠습니까? 더구나 그날의 일은 대법모님께서 목숨이 경각에 달했고, 그 방법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구할 수 없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배속의 아이 또한 그렇게 생긴것인데 어떡하란 말입니까? 천검은왕이 어떤 징계를 내려 뱃속의 아이에게가 아비가 없는 불행을 당한다면 그 또한 엄청난 죄 아니겠습니까?”

“상당한 부담감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징계는 없을 것이라는 말이구나.”

일목의 고개를 혼쾌히 끄덕였다.

동천몽은 상당히 자신감을 되찾은 듯 헛기침을 두어 번 해댔다.

일목이 다시 말했다.

“천검은왕을 불러 모든 것을 털어 버리십시오. 필시 천검은왕 또한 대법왕님께서 뭔가 고민을 안고 있다는 것을 지금쯤 눈치 채셨을 것입니다.”

“그렇긴 하겠지.”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했는데 지금 당장 불러 자초지종을 말씀하십시오.”

“지금 당장?”

“네, 그런 일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렇지만.”

동천몽이 더듬거렸다.

선뜻 천검은왕을 불러 모든 전모를 밝히 용기가 나지 않는 표정이었다.

“대법왕님께서 소승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지만 이것 한 가지 만큼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장부의 생명은 베짱이라는 말씀입니다. 장부는 배짱 빼면 별로 남는 게 없다고 하셨잖습니까? 대법왕님으로서의 품위와 인격을 살리느라 예전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왕왕 소주의 개고기다운 기세가 뿜어 나오는 모습을 보면 존경스럽습니다. 지금이 그 기세를 다시 한 번 보여 줄때라고 생각 합니다. 대신 그냥 부르는 것보다는.”

그러면서 입술을 움직였다.

만약을 대비해 전음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동천몽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좋다. 가서 천검은왕을 불러 오거라.”

“잘하셨습니다. 당장 모셔 오지요.”

일목이 밖으로 나갔고 동천몽이 더욱 주먹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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