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59화 (59/71)

제5장 광란의 밤

독이나 마기의 치료법은 여러 가지다. 그중 가장 확실하고 간단한 것은 극양의 내기를 이용해 독기나 마기를 몸 밖으로 배출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독이나 마기 모두 음의 기운이라는 것이었다. 음의기운은 오로지 남녀가의 교합 말고는 달리 몸 밖으로 몰아낼 방법이 없다는 것에 동천몽의 얼굴이 심각해 진 것이다.

“어…어서 쫓아가요. 얼마 못갔을 거…예요.”

자정경은 엄청난 한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입술은 메말랐고 얼굴은 곤충처럼 푸르게 물들었는데 점차 괴물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사…사부님!”

그녀가 쳐다보았는데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덮이고 있었다.

“뭐…뭐하세요. 빨리 가세요. 설마 그를 살려두려는 건 아니죠?”

자정경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녀의 두 눈은 진정으로 어서 동천비를 쫓기를 원하고 있었다.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이 겪은 슬픔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분노하고 있었다.

“빠…빨리요.”

동천몽은 두말도 않고 쭈그리고 앉아 웅크리고 있는 자정경을 아이 안듯 훌쩍 들어 올려안았다.

“뭐…뭐하는 거예요.”

“널 살려야겠다.”

“거짓말 마세요. 마신지체를 이룬 사람이 쏘아낸 마기에 중독되면 살아 날수 없다는 것 쯤은 나도 알고 있어요.”

“나는 살려낼 수 있다.”

자정경이 웃었다.

자신을 안정시키기 위해 거짓으로 뱉어낸 말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동천몽은 자정경을 안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 사내들이 모여 앉아 회의를 하고 있던 곳이었는데 방안에 있는 시신을 모조리 밖으로 내다 버렸다.

화악!

곧바로 자신의 옷을 벗기자 자정경이 기겁했다.

“사부님 뭐하기는 거예요.”

“이럴때는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가볍게 몸짓으로 거부의사를 표현했지만 소용없었다. 동천몽은 이미 결심을 한 듯 거침 없었다. 어느새 자정경은 속옷만 걸치고 있었는데 우유빛 피부는 사라지고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나복의 잎사귀를 파먹는 애벌레는 보는 것 같았다.

뚝!

하의를 벗기기 위해 손을 뻗어가던 동천몽이 잠시 멈칫 거렸다. 차마 그곳은 손이 쉽게 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숨을 길게 한 번 내쉬고 곧바로 벗겼다. 자정경의 자리를 들어 완전히 속옷을 벗긴 동천몽은 곧바로 자신의 옷을 벗었다.

방바닥에 토끼눈을 하고 누워있던 자정경이 갑자기 무엇을 봤는지 얼른 눈을 감아 버렸다. 동천몽은 어느새 알몸으로 서 있었는데 사내의 상징이 거칠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누워 있는 파란색의 자정경을 내려다보던 동천몽이 무릎을 구부리기 시작했다.

스으으!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자정경은 양다리를 벌렸고 그 사이로 동천몽이 무릎을 꿇었다. 자꾸 시선을 다른 곳에 두려고 했지만 자꾸 그곳으로 돌려지는 것은 사내의 본능이리라.

조금씩 뜨거운 열기가 전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냉철해지기 위해 불사심법을 운용하던 동천몽이 중도에 멈추었다. 이런 일에 굳이 냉철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지만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한때는 어떻게 해서라도 자정경을 눕혀 보기 위해 얼마나 머리를 굴렸던가.

마침내 꿈에도 소원하던 일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의 차이라면 그때는 단순한 본능이었고 지금은 자비와 사랑이 본능을 압도하고 있었다.

자정경이 가슴을 짓누른 무게에 눈을 떴다.

면전에 동천몽의 얼굴이 있었고 두 사람은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자정경이 빤히 올려다보자 동천몽은 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고 헛기침을 해댔다.

그러자 자정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헛기침만 하는 거죠? 이거 진짜 치료 하는 것 맞아요?”

“무…물론이지.”

“거짓말 아니죠? 잔머릴 굴리는 것 아닌거 맞죠?”

“그…그렇다니까.”

동천몽은 식은땀이 흘렀다. 여자 앞에서 만큼은 뻔뻔할 만큼 당당하던 자신이 당황하고 있는 것에 더욱 몸둘바를 몰랐다.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거예요. 나 죽겠어요. 이러다.”

그제서야 퍼득 정신을 차린 동천몽은 자정경의 안색이 더욱 파래지고 있음을 발견하고 정신을 차렸다.

자정경의 얼굴에 부끄러움은 없었다. 이미 자신의 몸이 위급한 상황이라는 것을 간파한 그녀는 서둘러 엉덩이를 움직여 동천몽이 쉽게 진입하도록 했다.

“음!”

뜨거운 불기둥이 하반신을 밀고 들어왔다. 그것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통이었는데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정경은 입술을 깨물고 하체로부터 뜨겁데 달아올라오는 통증을 참아냈다.

“아아!”

동천몽이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그때마다 엄청난 아픔이 밀려왔다. 아플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동천몽이 서서히 움직여 주었지만 통증은 상상을 초월했다.

“으으!”

자정경은 이를 깨물었고 목에 힘줄이 튀어나올 듯 굵어졌다.

동천몽은 몸 놀림은 조금씩 빨라졌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통은 소멸되었고 반대로 은은한 쾌감이 밀려 오기 시작했다.

꾸욱!

그러자 자정경은 양팔로 동천몽의 목을 끌어안았다.

물결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듯 쾌감은 하반신에서 시작하여 발과 과 머리끝으로 퍼져나가며 온 몸을 지배했다.

“아아!”

끝내 꽉 물렸던 자정경의 입술이 열리고 신음이 흘러나왔다.

동천몽 또한 달아 오르는 쾌감에 더욱 빠르게 움직였는데 한 순간 그의 눈이 커졌다.

지금까지 가만 누워 있기만 하던 자정경이 마주 하체를 움직여 보조를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가만히 있을 때보다 그녀가 함께 조율하자 쾌감은 더욱 배가 되었다.

“사…사부니임.”

자정경의 입에서 뜨거운 신음이 터져나왔다.

한 가닥 남아 있던 이성은 흩어졌다. 오로지 동물적인 본능만이 두 사람을 감쌌고 동천몽이 자정경의 입술을 덮었다.

자정경의 혀가 입안을 휘저었다. 그녀의 혀를 부드러우면서도 끈적하여 동천몽을 더욱 자극했다.

“하아악!”

갑자기 자정경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두 다리가 부르르 떨렸고 열개의 발가락이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뒤틀렸다. 뜨겁고 거센 폭포가 몸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한번 불붙은 사랑은 좀체 식어들 줄 몰랐다. 특히 동천몽은 오랫동안 굶주림 사람처럼 끝없이 탐닉했고 밤이 늦었는데도 자정경을 놔주지 않았다.

자정경 또한 자제력을 완전히 잃었다.

더 이상 미래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지금의 현실에만 충실하기로 마음을 먹고 동천몽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동안 시달렸던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컸기에 그녀의 움직임은 폭발적이었다.

마기는 이미 몸 밖으로 배출 되었고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은 동천몽에게 더욱 거센 욕구를 당겼다. 한번 터진 봇물은 그동안의 자제에 대한 복수라도 하 듯 새벽녘이 되어도 멈출지를 몰랐다.

멀리서 인시를 알리는 북소리를 듣고서야 두 남녀는 떨어졌고 곧바로 골아 떨어졌다.

아침에 먼저 눈을 뜬 사람은 자정경이었다.

누운 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동천몽이 큰 대자로 뻗어 자고 있었는데 그토록 자신을 괴롭힌 남성도 다소곳하게 잠들어 있었다. 처음 볼 때는 그토록 무섭게 느껴지던 것이 이미 몇 차례에 걸쳐 느낀 탓인지 친숙해 보인다.

상체를 일으킨 자정경이 한참동안 쳐다보더니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악!”

일어나 걸음을 떼려던 자정경이 자지러지며 벽을 손으로 짚었다. 하반신으로부터 엄청난 통증이 전해 왔기 때문인데 비명소리에 곯아떨어진 동천몽이 벌떡 일어났다.

적의 침입정도로 생각 한 듯 주위를 휘둘러 보았지만 아무런 위험도 발견되지 않았다.

“왜 그러느냐?”

“아…아파요.”

그러면서 왼손으로 하체를 가렸다.

그제 서 야 이유를 알았다는 듯 동천몽이 빙긋 웃더니 벌떡 일어났다.

한손으로 벽을 짚고 이마를 가볍게 찡그리고 서 있는 알몸의 자정경을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았다.

“뭘 봐…헉!”

그녀가 말을 하다 말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 다소곳 있던 동천몽의 상징이 폭발할 듯 일어나 꿈틀거리고 있었다.

와락!

동천몽이 그녀를 잡아 당겼다. 자정경은 힘없이 품 안으로 쓰러졌는데 갑자기 찢어지는 비명을 흘렸다. 동천몽의 몸이 어느새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와상루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동천몽의 습격으로 모두가 도망친 것이었다. 사람만 도망쳤을 뿐 모든 건 그대로 있었고 동천몽과 자정경은 탁자를 놓고 마주 앉아 음식을 먹고 있었다. 자정경이 몇 가지 재료를 찾아내 요리를 한 것이다.

어느 때 보다 그녀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사부님 이것 좀 드세요. 이것 적령초라는 것인데 많이 먹으면 불로장생 하는 나물이에요.”

자정경이 나무를 젓가락으로 집어 동천몽의 밥 위에 올려 놓았다.

“쓰긴 해도 몸에 좋다니까 많이 드세요.”

동천몽은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사실 이미 포달랍궁에서 신물 나도록 먹었던 나물이었다. 자정경의 말처럼 불로장생에 효과가 있지만 너무 쓴 나머지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정경아.”

어쩔 수 없이 쓰지만 거절할 수 없어 씹으며 입을 열었다.

“너에게도 말했지만 이 사부의 속세 시절의 별호가 무엇이었더냐?”

자정경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소주의 개고기요.”

동천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 어린 나이였지만 이미 수십 년 산 사람처럼 놀았다. 다시 말해 여자 경험도 풍부했다는 뜻이다.”

“알고 있어요. 이미.”

자정경이 샐쭉해서 대답했다.

동천몽이 꿀꺽 나물을 삼키며 말했다.

“어제 밤 너와 사랑을 나누면서 너무 놀란 것이 있느니라.”

“그게 뭔데요?”

“너의 재주가 기가 막히게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홱!

자정경의 번쩍 고개가 쳐들었다.

“그래서요. 설마 이 제자를 의심한다는 건가요? 소녀가 사내들 치마폭에 감추고 흔들기라도 했단 말인가요?”

“아…아니다. 너무 실력이 뛰어나 내가 몇 번을 기절할 뻔 했기에 즐거워하는 말이니라. 절대 오해는 하지 말거라.”

“이씨. 난 사부님 즐겁게 해드리려고 밤새 온갖 고생 다했는데 이제와서 한다는 말씀이 고작 그거예요. 흐흐흑!”

자정경이 숟가락을 떨어뜨리며 눈물을 지었다.

그러자 동천몽이 깜짝 놀라며 오른팔로 어깨를 감쌌다.

“울음을 그치거라. 네가 너무 예뻐 농담 한 것이니라.

“정말요? 진짜죠?”

“어제 밤 너는 정말 예뻤다.”

동천몽이 웃으며 대답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쳐다보는 눈빛은 예전과 확실히 다르다. 그것은 사랑하는 남녀만이 던질 수 있는 뜨거운 눈빛이었고 이제 두 사람의 관계는 떨어질 수 없음을 말하고 있었다.

‘맙소사!’

주루를 들어서던 일목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일목의 옷차림은 처참하리 만큼 초라했다. 허리 아래로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젖었고 곳곳이 찢어져 있었는데 친룡구십구불과 더불어 동천비를 찾아 오강 인근의 산속을 밤새 뒤지고 지금 돌아오는 길이었다. 옷이 젖은 것은 이슬 때문이었다.

식사를 하는 두 사람의 표정은 누가 보더라도 범상이 않다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밝았다. 특히 쳐다보는 눈빛이 예전과는 너무 큰 차이가 있었다.

예전에는 이따금 경계의 시선도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허물어져 있었고 주위 눈만 없다면 금방이라도 무슨 사고를 친 뜨거운 분위기였다.

‘사고!’

사고라는 말을 떠올리자 더욱 의심스러워졌다.

자정경이 끈적한 시선을 던지면 동천몽은 뒤로 물러나는 눈빛이 지금까지 자신이 보아온 두 사람의 시선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정경이 뜨겁게 던지자 동천몽이 낼름 받아 들이고 있지 않는가.

남녀 간의 경험은 전무 하지만 본능적으로 어제 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다녀왔사옵니다.”

두 사람이 깜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특히 동천몽이 놀라는 것에 일목은 더욱 확신을 가졌다. 자정경의 이목쯤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지만 아무리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고 해도 동천몽의 감각은 속이지 못한다. 그런데 자신이 다가와 인사를 해서야 존재를 알아차렸다는 것은 완전히 빠지지 않고서는 보일 수 없는 행동이었다.

“사…사형.”

“일목 아니냐?”

일목은 포달랍궁의 제자이다. 대법왕의 적발전인이랄 수 있는 자정경에게는 당연히 사형이 된다. 그런데 평소에는 죽어도 사형이라는 말을 담지 않던 그녀가 능청맞게 입에 담자 일목은 완전하게 확신했다.

‘사고 쳤다!’

“배고플텐데 식사부터 하거라.”

동천몽이 따뜻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일목이 길게 숨을 삼켰다. 차갑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보자마자 끼니를 챙겨줄 만큼 지금까지 따뜻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마치 자식을 대하듯 목소리를 부드럽게 깔아 식사를 챙긴다는 것은 엄청난 심경의 변화가 있다고 봐야했다. 물론 엄청난 심경의 변화란 밤새 뜨거움이 가져온 변화일 것이다.

“뭘 먹고 싶으냐? 오랜만에 네가 좋아 하는 음식을 사주고 싶으니 말하거라.”

콱!

일목의 주먹이 쥐어졌다.

기분이 엄청 좋다는 것이 목소리에서 절절히 풍겨나온다. 아무리 봐도 그 짓 말고는 동천몽이 자신의 식사를 자상하게 챙겨줄 만큼 감정 변화를 가져올 일은 없었다.

동천몽은 여자와 그 짓을 했다.

출가한 승려가 여자와 그 짓을 했다는 것은 무조건 파계를 당할 대형 사고이다. 어떤 이유와 합당한 사정일지라도 그 짓만큼은 용서되지 않는다. 술 몇잔 고기 몇점 정도는 충분히 용서의 사유가 되지만 여자와 그 짓은 죽어도 안되는 것이 포달랍궁 일반 제자들의 율법이었다.

물론 대법왕에 관한 율법은 있지만 자신은 그 속 내용은 잘 모른다. 그러나 일반 제자들에 관한 율법과 큰 차이가 없으리라는 것이 일목의 생각이었다.

와당탕!

일목이 요란하게 맞은편 탁자에 주저 앉았다.

자정경과 동천몽이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일목은 한술 더 떴다.

턱!

두 다리를 탁자 위로 올리며 상체를 뒤로 비스듬이 눕혔다. 신발은 밤새 고생의 크기를 보여주듯 벌건 진흙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놈의 집구석은 장사를 않나. 어찌 사람이 들어왔는데도 코빼기도 안보여. 이봐. 점소이 없나?”

안쪽을 향해 버럭 소릴 질렀다.

와상루가 목와북천의 비밀 분타라는 사실을 일목이 알 리 없었다. 어제밤 사고로 모두가 떠났고 묵와분타와 관련이 없는 점소이 몇 명이 있었지만 그들 또한 어떤 화를 당할까봐 모두 도망치고 현재 와상루를 텅 비어 있었다.

일목이 동천몽을 찾아온 것은 어떤 약속을 한 것이 아니라 배교의 이령화감 때문이다. 이령화감은 상대가 지닌 고유의 기운을 기억하는 기예로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지 찾아 나설 수가 있다.

“이런 개자식들이. 야 아무도 없어.”

갑자기 나타나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일목을 보며 동천몽과 자정경은 이마를 찡그렸다. 하지만 일목의 행패에도 두 사람은 선뜻 끼어들거나 말리지 못했다.

“오냐, 네놈들이 나 같이 눈구멍이 하나 뿐인 인간은 손님으로도 보이지 않는단 얘기지.”

일목의 살기를 띄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자 동천몽이 조용히 말했다.

“흥분하지 말거라. 지금 이곳에는 아무도 없느니라.”

홱!

일목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금방이라도 잡아 먹을 듯 노려보자 동천몽이 흠칫했다.

일목이 으스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없다는게 무슨 말씀입니까?”

금방이라도 한 대 때릴 듯한 기세였다.

“사실은.”

동천몽이 자초지종을 말해 주었다.

일목이 여전히 인상을 펴지 않은 체 말 했다.

“그럼 오랜만에 소승이 좋아하는 음식을 사주고 싶다는 대법왕님의 말씀은 뭡니까? 소승을 희롱한 것입니까?”

“……”

“……”

동천몽과 자정경의 눈이 커졌다.

아무 생각없이 뱉은 인사치레의 말이다. 그런데 일목의 말을 듣고보니 자신이 실없는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일목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듣기에 따라서는 기분이 나쁠 수 있는 말이었고 심하게 오해한다면 조롱한 것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왜 아무 말씀도 없으십니까? 밤새 적을 쫓아 온 산을 헤매도 돌아온 소승을 희롱한 것입니까?”

우려했던 말이 나왔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지만 동천몽은 더듬거렸다.

“그…그건 아니고, 아무튼 미안하구나. 정식으로 사과하겠다. 하나 원한다면 옆 객점에서라도 네가 먹고 싶은 것을 사주고 싶구나. 너만 좋다면 말이다.”

“사부님.”

그때 계속 사태추이를 관망하고 있던 자정경이 목소리를 깔았다. 더 이상 일목의 오만방자한 행동을 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지금 뭐하는거죠? 왜 사부님께서 한낱 시위승에게 쩔쩔매며 사과를 해야 하죠. 사부님께서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신 대법왕이십니다. 사형은 사부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새까만 제자이구요.”

자정경은 일부로 새까맣다는 말에 힘을 실었다.

그러자 예상대로 일목의 두 눈이 벌컥 일어섰다. 뭐라고 말을 하려는 것을 보며 자정경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비록 높은 위치에 있더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아래 사람에게 사과를 하는 건 바람직한 일이지만 사부님께서는 지금 전혀 잘못이 없습니다. 오히려 아침을 드시는 사부님의 마음을 불편케 하는 사형의 태도에 심각한 문제가 있사옵니다. 왜 그러시옵니까? 제자는 조금만 버릇이 없어도 혼을 내면서 사형은 봐주는 것입니까? 제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말은 돌려 했지만 당장 혼을 내라는 요구였다.

그것을 모르지 않는 인목이 자정경을 잡아 먹을 듯 노려보았다. 자정경은 고개를 돌리고 음식 먹는데 열심이었다.

“아무튼 옆 객점으로 가거라. 가서 실컷 먹고 있으면 내가 가겠느니라.”

일목이 마지못한 듯 자리에 일어나더니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다. 그런 일목을 바라보는 동천몽의 인상이 우그러졌다. 이미 일목의 계산을 읽었다.

“저 인간 왜 저래요? 설마 사부님과 제자의 어제밤 일을.”

자정경의 얼굴이 빨개졌다.

동천몽이 숟가락을 놓으며 말했다.

“눈치 챈 것 같구나.”

“어떡해요?”

자정경 역시 눈치를 챈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지만 동천몽의 입을 통해 확인이 되자 심각해졌다.

“입을 막아야 하잖아요.”

언젠가 알게 되겠지만 아직은 안된다. 모든 건 때가 되어야 하고 나름대로 변명할 준비기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아무런 준비도 없는 지금 일목의 성격을 보아 수틀리면 바로 불어 버릴 가능성이 컸다. 일목은 자신의 존재를 누구보다도 싫어한다. 어쩔수 없이 같이 얼굴을 마주했지만 걸핏하면 두 사람은 언쟁을 했다.

“어떻게 좀 해보세요?”

자정경이 채근댔다. 막강한 권한을 가진 사대법왕 또한 자신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이런 중요한 문제가 불거지면 곧바로 자신의 신상에 관한 엄한 처벌을 결정한 것이다. 물론 엄한 처벌이란 파문일 것이다.

“흐흠!”

동천몽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힘으로 입을 막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응급처지 밖에 되지 않는다. 오히려 나중 더욱 사건을 크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일목이라면 반드시 크게 심통을 부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동천몽이 이마를 찌푸렸다. 그토록 번득이던 재지도 오늘 따라 작동하지 않는다.

“일단 가자.”

“어딜요.”

“일목에게 가봐야 할 것 아니냐?”

두 사람은 곧바로 먹던 밥을 그만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른 아침의 저자거리는 한산했다. 와상루를 나온 두 사람은 이십여 장 아래에 있는 초망루 문을 밀고 들어섰다.

“헛!”

“으훕!”

주루를 들어선 두 사람이 기겁했다.

점소이와 주인 및 장사꾼으로 보이는 손님 두 명의 시선이 일목의 탁자에 멎어 있었다.

와구와구!

탁자 위에 음식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부지런히 먹고 있었는데 문제는 일목이 먹고 있는 음식 모두가 육류라는 것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죽엽청까지 항아리로 가져다 놓고 퍼 마시고 있었다.

주인과 점소이가 일목을 쳐다보는 것은 음식 값을 받지 못 할까봐 였다. 행색도 초라한데다 눈도 하나 뿐인 일목에게서 금화 스무 냥 어치의 음식 값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이…일목아.”

동천몽이 다가가 더듬거렸다.

평소 같으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구부렸을 일목이 힐끔 쳐다보더니 항아리에 담긴 바가지로 죽엽청을 떠 마셨다.

커어!

트림까지 했는데 얼굴이 붉으스레했다. 이미 상당한 양을 마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술을 먹으면 어찌하느냐?”

주위 사람들을 의식해 조용히 말했다. 가사는 아니었지만 머리를 깎았고 앞 가슴으로 염주를 걸었다. 누가 봐도 승려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행색이었는데도 거리낌 없이 술을 마신다.

“마시면 안되는 것이옵니까?”

띠용!

동천몽이 눈을 부릅떴다.

노골적인 시비조였다.

“곡차로 생각하면 한두 잔 해도 괜찮다고 소승에게 말씀하신분이 대법왕님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사…사형 무슨 말버릇이에요. 사부님에게 너무 하잖아요.”

자정경이 표정을 굳혔다. 어지간하면 참으려고 했지만 일목의 방자함에 불끈 한 것이다.

“도대체 사부님에게 무슨 감정이 있죠? 왜 아침부터 이렇게 무례한 행동을 서슴치 않느냔 말에요.”

“몰라서 묻느냐?”

일목의 눈이 이글거렸다.

“몰라요? 말해보세요?”

자정경이 강하게 치고 들어갔다.

그러자 지켜보던 동천몽이 흠칫하며 말리려 손을 들었다가 내려 놓았다. 자정경의 성격은 불같다. 한번 폭발하면 하늘이 두 조각 놔도 소용없었다. 차라리 이때를 이용해 슬며시 자신은 빠진 대신 자정경을 이용해 일목을 혼내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자정경의 말솜씨는 당한 재간이 없다.

“왜 쳐다만 보죠? 말씀해보라구요? 사부님이 잘못한 것 있으면 어서 지적하라니까요?”

자정경이 강하게 다그쳤다.

일목이 몇 번 입술을 꾸물거리더니 바가지로 술을 퍼서 마셨다.

쾅!

이어 바가지를 던지듯 놓더니 오른손으로 탁자를 치며 말했다.

“좋다. 이렇게 나오니 나 또한 참을 수 없구나. 사제.”

“말해요.”

“어제밤 무슨 일이 있었느냐? 난 너와 대법왕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고 있다.”

동천몽이 깜짝 놀라며 주위를 살폈다.

예상대로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미 동천몽의 신분이 대법왕이라는 것이 밝혀져 더욱 관심은 집중되고 있었다.

“그게 뭔데요?”

“몰라서 묻느냐?”

“모르니까 묻죠? 말해봐요? 나도 무척 궁금하군요.”

“정말 몰라서 그러느냐?”

“모른다니까요?

자정경이 버럭 소릴 질렀다.

두 눈에 핏기를 담아 다부지게 말했다.

“말해봐요. 답답하게 그러지 말고 말하란 말예요. 만약 말하지 못하면 가만 있지 않겠어요. 사부님께서도 참지 않으실거죠?”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는 동천몽을 향해 느닷없이 물었다. 동천몽은 얼떨결에 그럴것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목의 표정이 변했다.

한 순간 자신의 짐작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이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먹을 만큼 먹은 나이다. 더구나 눈치에 관한 천하제일이라고 자부 했다. 자신의 짐작은 티끌만큼도 어긋나지 않았다.

일목이 이를 깨물었다.

기호지세이다. 여기서 그만 멈출 수는 없었다. 죽든 살든 밀어붙혀야 한다. 여기서 이기면 상당시간 편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고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좋다. 그럼 말하지. 어제 밤 사제와 대법왕님께선 한 방을.”

“잠깐.”

자정경이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내버려 뒀다가는 무슨 말까지 쏟아 나올지 몰랐다. 일목은 확신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밀어붙이고 있음이 분명했다.

한번 뱉어지면 순식간에 소문이 퍼진다. 일목은 주위 사람들더러 들으라는 듯 느리고 큰 소리로 말했고 자정경은 그들이 낼 소문이 신경쓰였기 때문에 막았다.

일목이 웃었는데 자정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완패였다. 일목의 노련한 수에 자신이 끌려간 것이었다.

한 가닥 기대를 걸었던 동천몽 또한 자정경이 물러나자 길게 한숨을 쉰었다. 그리고 앞으로 상당기간 동안 일목에게 끌려다닐 생각을 하자 조금 전 먹은 아침이 넘어오려 했다.

“인정하느냐?”

일목은 쐐기를 박고 있었다.

자정경 또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하나 대답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대답까지 하면 빼도 박도 못한다.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자정경이 대답을 기피하자 일목의 눈이 가늘어졌다.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느낀 것이다.

“얼마인가요?”

자정경이 계산을 위해 나섰다.

작은 액수라면 동천몽이 계산할 수 있지만 덩치가 큰 것은 자정경의 손을 빌려야 한다. 흑수당의 미래 주인이어서인지 돈 씀씀이가 일반 사람들과 달랐다.

“모두 금화 스물 한냥 닷푼입니다.”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 끼 식사치고는 상상을 초월한 액수이다. 더구나 놀란 것은 그 비싼 음식을 거의 남겼다는 것이었다.

자정경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품에서 전표를 꺼내 주었다.

거스름돈을 받아 챙긴 자정경이 앞장을 섰고 동천몽이 뒤를 이었으며 일목이 이를 쑤시며 맨 뒤를 따랐다.

주루를 나오자 동천몽이 앞장을 섰다.

“어디로 가죠?”

자정경이 물었다.

동천몽이 조용히 말했다.

“궁으로 가자꾸나. 강을 이용해 사천까지 간 다음 육로를 이용한다.”

동천몽이 포구를 향해 몸을 날렸고 자정경이 따랐다. 일목은 쩝쩝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는데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흐!’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던가. 동천몽을 쥐락펴락 하게 되었다는 현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너무 흥분되고 기분이 좋아 감정통제가 잘 되지 않는다. 일목은 혼자서 입가에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주위 사람들이 드물었으므로 마침내 웃음을 밖으로 꺼냈다.

“크흐흐흐!”

웃어도 웃어도 즐겁다.

아무리 대법왕이라고 해도 자정경과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한바탕 폭풍우가 불어 닥칠 것이다. 칼자루를 확실히 잡았다는 확신을 하며 몸을 날렸다.

오강의 포구에 도달한 일목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사천으로 향하는 배가 조금 전 막 출항했다는 얘기를 들은 때문이었다. 가까운 거리를 이동하는 배는 많지만 장거리를 이동하는 배는 하루에 아침 저녁 두 번 뿐이다. 너무 좋아 잠시 웃으며 지체한 것이 배를 놓친 것이었다.

이제 꼼짝 없이 저녁 배를 타야 했다.

‘가만!’

인상을 쓰며 배가 떠난 부두를 쳐다보고 있던 일목의 눈이 가늘어졌다.

동천몽 정도 되면 배 하나쯤 얼마든지 출항을 늦출 수 있었다. 자신에게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 된 사람이 오지 않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 라도 출항을 저지시켰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분노가 물밀 듯 밀어 닥쳤다.

‘고의다!’

철저히 고의라고 밖에 판단되지 않았다. 자신을 일부러 떨어뜨린 것이 틀림없었다.

뿌드득!

동천몽보다 자정경이 더 미웠다.

어쩌면 그녀가 부추겼는지도 몰랐다. 동천몽은 자신에게 약점이 잡힌 상태라 출발을 저지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꽁한 마음에 사람들과 더불어 정시에 출발해야 한다고 승객들은 선동하고 이끌었는지 모른다.

‘계집년!’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게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함부로 한 것은 아니었다. 자정경이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은 너무 빼어난 용모를 갖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상하게 잘생긴 계집들을 보면 그냥 싫었고 미웠다.

결정적인 것은 그녀가 모용산과 더불어 무림에서 가장 잘생긴 여자 중 한 명이라는 것이었다. 잘생긴 여자는 얼굴 값을 했다. 유난히 잘난 척하고 콧대가 높았고 자신처럼 신체 일부분에 열등감을 갖고 있는 사내들은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물론 자정경은 그렇지 않았지만 그냥 싫었다.

‘가만두지 않겠다!’

일목이 강을 따라 몸을 날렸다. 구불구불하여 뱃길보다 더 많은 거리를 이동해야 했지만 하는 수 없었다. 힘은 들지만 느린 배이므로 한 두시진후면 충분히 따라 잡을 자신있었다.

쉬이이!

동천몽과 자정경의 얼굴이 겹쳐 떠오른다.

순간 화가 미친 듯이 치솟는다.

놀라운 속도였다. 한번 땅을 벅 찰 때마다 일목의 몸은 십여장씩 날아갔다. 삽시간에 오강의 포구가 사라졌고 강은 본격적으로 길을 만들고 있었다.

거슬러 올라갈수록 인적도 드물어졌고 어느덧 길이 끊어졌다. 오로지 강줄기를 따라 몸을 날려야 했는데 길이 없었기 때문에 몹시 힘들었다. 가파른 산비탈을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일이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힘들때마다 자신이 쥐고 있는 확실한 칼자루를 되새기며 이를 갈았다.

슈욱!

허공높이 치솟았던 일목의 신형이 갑자기 떨어져 내렸다.

앞길을 누군가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분노한데다 급한 길인데 앞을 막고 서자 일목은 대노했다.

“뭐하는 놈이냐? 뒈지기 싫으면 썩 꺼져라.”

사내는 복면을 했는데 흰 백의로 온 몸을 칭칭 감고 있었다. 복면 안에서 뿜어나온 눈빛이 범상치 않았다. 하지만 일목은 콧방귀를 뀌었다.

“네 이놈 뭐하는 놈이냐고 묻지 않느냐? 지금 본 승을 우롱하는거냐? 용건이 없으면 이만 가겠다.”

말하지 않은 상대를 노려본 일목이 날아가려 하자 앞을 막으며 음산한 웃음을 지었다.

“흐흐흐! 다른 한 개가 다친 흔적이 없는 걸 보니 태어 날 때부터 하나만을 갖고 있었다는 건데 정말 웃기는구나. 두 개 중 한 개가 다쳐 사용이 불가능한 인간은 봤지만 남들 다 갖고 있는 두개의 눈깔을 하나만 갖고 태어난 놈은 처음 본다.”

“누…눈깔.”

일목의 표정이 대번에 차가워졌다. 남들 앞에서는 떳떳한 척 했지만 하나 뿐인 눈은 항상 그를 괴롭혔다. 백의 복면인 말처럼 두 개 중 한 개가 다쳐 독목이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뿐인 눈은 그를 지독한 열등감 속에 몰아넣은 것이었다. 아닌 척, 괜찮은 척 했지만 눈 얘기만 나오면 신경이 곤두섰다. 그런데 처음 보는 백의복면인 입에서 다짜고짜 감정을 긁는 눈 얘기가 나오자 일목은 완전히 돌아버렸다.

“끄으으! 너….널 살려두면 내가 일목이 아니라 쌍목이다.”

일목이 곧바로 달려들었다.

잔뜩 흥분한 일목의 오른손이 갈고리가 되어 백의복면인 멱살을 잡아갔다.

마간찰립의 식이다. 완맥을 잡거나 멱살을 잡는데 가장 적절한 수법으로 배교 전통의 초식이었다. 멱살을 잡아 일단 분이 가라 앉을 만큼 두들겨 팬 다음 모가지를 돌려버릴 생각이었다.

싹!

잡혔다고 기뻐하려는 순간 손이 허전했다.

간발의 차이로 놓친 것이다.

“이 새끼 봐라.”

일목이 기분 나쁘다는 듯 더욱 빠르게 오른손을 뻗었다.

슈욱!

전력을 다했지만 또다시 간발의 차이로 잡지를 못했다. 연거푸 이초가 헛방으로 끝나자 일목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해졌다. 보는 사람은 없지만 큰소리 쳐놓고 낭패를 당하자 화는 더욱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오냐 이 씨발놈.”

이번에는 양손을 뻗었다. 오른손을 먼저 뻗었다가 놓치자 왼손이 벼락같이 후려쳤다. 잡는 것을 포기하고 강한 공격으로 돌변한 것이다.

슥!

그러자 백의복면인 또한 오른손을 마주 뻗어왔다.

딱!

“컥!”

일목이 짧은 신음을 터뜨렸다. 하마터면 왼손목이 부러질 뻔했을 정도로 강한 충격이었다.

그제서야 일목의 눈이 커졌고 백의복면인을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눈이 한개 뿐이면 답답하지 않느냐?”

그러면서 백의복맨인이 자신의 한쪽 눈을 감고 한 개의 눈만으로 일목을 보았다.

“맙소사, 무척 답답하잖아.”

“이런 씨부랄새끼가.”

감정을 자제하려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콰아아!

산악이라고 날려 버릴 것 같은 우장이 뻗어갔다.

백의복면인은 가슴을 향해 날아오는 우장을 피해 상체를 좌측으로 눕혔다.

그 순간 일목의 좌장이 벼락같이 뻗어갔다. 피할까 아니면 맞설까 계산했다가 피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피하자마자 왼손을 뻗었으므로 복면인은 하는수 없이 맞서왔다. 조금 전 정면충돌로 자신의 아래가 아니라는 건 여겼지만 결코 강하다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있게 부딪혔다.

뻐억!

“커컥!”

일목이 눈을 부릅뜨고 뒤로 물러날 때 백의복면인이 화살처럼 날아왔다. 비틀거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동작이었다.

슈악!

일목은 비틀거리면서도 백의복면인의 우장을 받았다.

꽝!

중심을 잃으면 전력을 쏟을 수 없다. 힘이 받쳐주는 하체가 단단히 고정을 해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허헉!”

일목의 입을 쩌억 벌리며 비명을 질렀고 백의 복면인의 양손이 벼락처럼 치고들어왔다.

슈--슈욱!

권의 대가들이 뻗어내는 연타와 흡사한 연장(連掌)이었다. 중심이 잃은 상태에서 피하기란 맞받은 것보다 훨씬 어렵고 위험하다. 만약 신법에 일가를 이루지 못한 사람이 시도했다간 더 큰 피해를 입는다. 선택이란 없었다.

꽝꽝!

“크헉!”

마침내 일목이 입에서 피를 토했다.

현기증이 일어났고 속이 완전히 뒤집혔다.

백의복면인의 공격은 멈춤이 없었다. 특히 공격과 공격 사이에 조금의 시간차이나 어색한 연결동작은 없었다. 물이 흐르듯 너무도 매끄러워 한 개의 초식이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퍽!

퍼어엉!

복부와 턱에 강한 타격을 입었다.

처음부터 검을 뽑아 들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백의 복면인 또한 검을 뽑을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듯 더욱 빠르고 힘차게 몰아쳤다.

콰르르르!

장의 폭풍이었다. 눈앞으로 손바닥이 쉴 사이 없이 어른거리며 온 몸을 두들겨 팼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역부족이었고 순식간에 칠팔 개의 장력을 얻어 맞았다.

“컥!”

“헉! 끄으으!”

숨 쉴 틈도 없는 무자비한 공격 앞에 일목은 처참하게 뭉그러졌다. 그리고 처음으로 공포심을 느꼈다.

일목의 무공은 강했다. 사대법왕과 일대 일로 맞서면 천장금왕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적수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다 동천몽의 도움으로 인해 내공까지 전이 받아 서장은 물론 중원에서도 자신을 위기로 몰아 넣을 사람은 없다고 자신했다.

동천비라면 모를까 누구도 두렵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주특기인 검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이건 숫제 말이 되지 않았다.

뻑!

뻐버버벅!

급기야 일목은 엉덩방아를 찧었고 눈 앞으로 백의복면인의 오른발이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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