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반전과 반격
동천몽은 다시 한 번 길게 한숨을 내쉬고 몸을 날렸다.
대호가 숨어 있을 숲을 향해 날아간 것이다.
동천몽이 날아가자 잠시 쏘아보던 자정경이 뒤를 따랐다. 예전처럼 나란히 따르지 않고 십여 장의 거리를 두고 갔다.
동천몽은 장강을 따라 내려가더니 반각쯤 지나 관도로 접어들었고 일각이 조금 안되어 오강으로 접어들었다.
대호가 숨어 있을 곳으로 우거진 산속을 생각했던 자정경은 눈살을 찌푸렸다. 부상을 입고 강한 적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숲속으로 숨어야 할 대호가 이렇게 사람 많은 곳으로 숨을리는 절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유가 궁금했지만 묻고 싶지는 않았다. 사제지연을 끊을 것은 아니지만 동천몽에게 말을 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자신의 궁금증을 읽기라도 한 듯 동천몽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자정경이 가까이 다가오자 입을 열었다.
“대호는 호랑이지만 동천비는 사람이다. 호랑이라면 당연히 숲이 좋겠지. 그러나 사람은 이렇게 인파가 많은 곳이 숨기에 가장 좋은 법이니라.”
“……”
자정경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누가 물어 봤어요 라는 비아냥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런데 고개를 돌린 자정경의 눈은 무척 커져 있었는데 속으로는 무척 놀라고 있음을 의미했다.
‘귀신이다. 귀신.’
사람이 사람 속으로 뛰어들면 티가 나지 않는다. 더구나 변장술까지 능하다면 더욱 찾기란 쉽지 않다. 동천몽의 놀라운 지혜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누가 사부님을 멍청하다고 했지.’
강력하게 피어나는 의문이었다.
학문이 부족할 뿐 본능적인 생각과 두뇌회전은 천하제일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하지 않았다.
동천몽이 용천주루라고 간판이 걸린 삼층 건물로 들어갔다.
자정경 또한 뒤를 따라 들어갔지만 같이 앉지 않았다. 동천몽은 창가에 앉았고 자정경은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사람들 시선이 일제히 동천몽에게 쏠렸다. 처음에는 약간 어리둥절했지만 동천몽은 이내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진 것은 자신이 걸치고 있는 금려상불의 때문이었다. 금려상불의가 화려해서가 아니라 앞가슴에 새겨진 코끼리를 보며 모두가 그의 신분을 알아차린 것이다.
“대범왕이시다.”
“어찌 이런 천하고 누추한 곳으로 대범왕님께서 왕림을 하셨단 말인가.”
사람들이 소근대더니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큰 소리로 말하며 허리를 숙였다.
“생로병사를 주관하시고 인세의 덕과 화를 결정하시는 대범왕님을 뵈오나이다.”
“뵈오나이다.”
일제히 무릎을 꿇고 절을 하자 주문을 받기 위해 동천몽의 탁자 곁에 다가와 있던 점원 또한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동천몽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범왕!’
자신이 잘못 들었나 하고 귀를 기울였지만 사람들은 분명히 대범왕이라고 불렀다.
아무튼 동천몽은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예를 취했으므로 미소를 띄며 말했다.
“그만들 일어나 즐겁게 식사들 하라.”
“대범왕님의 은혜에 감사드리옵나이다.”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각자 자리로 돌아가 술과 음식을 계속 먹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동천몽에게서 떠나지 않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존경을 듬뿍 담고 있었다.
“뭐…뭘드…드릴까요?”
대범왕이라는 것을 알고난 점소이가 무척 공손해졌다.
동천몽이 웃으며 말했다.
“제갈채(諸葛寀)를 주너라. 그리고 저기 구석에 앉은 여인에게는 청돈비압을 주거라. 물론 계산은 본 왕이 할 것이니라.”
점소이가 힐끔 구석진 곳에 앉은 자정경을 보았는데 흠칫 했다. 그러더니 한 순간 점소이의 눈빛이 요사하게 변했다. 동천몽을 살피고 다시 자정경을 보더니 뭔가 감이 왔다는 듯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세야. 말세!’
돌아서는 점소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점소이 생활 이십오년이다. 이젠 딱 보면 안다. 필시 대범왕이라는 것 때문에 주위 눈을 의식하여 따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점소이가 자신의 새끼 손가락을 힐끔 보았다.
‘이것이라는 건데’
이 땅의 모든 종교가 이미 오염될 만큼 오염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눈 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자 놀라우면서도 한 가지 생각이 퍼득 스쳤다.
‘왔다. 때가 마침내.’
점소이 얼굴에 묘한 웃음을 떠올랐고 동천몽과 자정경을 다시 한 번 훑어 본 뒤에 천천히 주방을 향해 걸어갔다.
“제갈채 청돈비압, 특으로요.”
동천몽은 특으로 시키지 않았는데도 점소이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점소이는 음식이 나오는 주방 입구에 떡 양팔을 기대며 돌아서서 동천몽과 자정경을 부지런히 살폈는데 입가에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흐흐흐!’
연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의 탐욕을 더욱 얼굴 가득 들어찬다.
“제갈채 청돈비압 특입니다.”
주방으로부터 음식이 나왔고 점소이는 먼저 동천몽에게 제갈채를 내려 놓고 청돈비압을 들고 자정경에게 다가갔다.
“뭐죠?”
자정경이 눈을 치켜떴다.
누가봐도 놀란 시선이었는데 점소이가 씨익 웃었다.
‘이년아 다 알아.’
물론 속으로 중얼거린 후 목소리를 낮췄다.
“대범왕님께서 보내셨습니다.”
“대법왕이 왜 내게 음식을 보내요?”
점소이가 또 다시 웃었다.
‘이년아 다 안다니까’
하지만 밖으로는 다르게 속삭였다.
“대범왕님께서 베푸는 자비 아니겠습니까? 워낙 마음이 넓고 중생들을 사랑하는 분이시잖아요.”
자정경이 음식을 보더니 한 마디를 빼놓지 않았다.
“나 돈 없어요.”
“염려 마십시오. 계산 또한 대범왕님께서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흥! 주는 것이니 먹지 뭐.”
우드득!
자정경은 닭다리를 찢어 입안에 넣고 씹었다.
“이봐요. 죽엽청 한 근주세요.”
돌아선 점소이가 더욱 능물스럽게 웃었다.
“알겠사옵니다. 낭자.”
그러면서 동천몽 옆을 지나면서 힐끔 내려다보았다. 동천몽은 근엄한 얼굴로 제갈채를 먹고 있었다.
‘지는 중이라고 야채 먹고 애인은 고기를 준단 말이지. 으음.’
점소이가 자정경에게 죽엽청을 가져다주고 동천몽 자리에 섰다.
동천몽이 음식을 먹다 고개를 쳐들었다.
“왜? 본 왕에게 할 말 있나?”
“있지요.”
점소이가 주위를 살피며 고개를 더욱 숙였다.
“저 뒤에 있는 여자는 대범왕님과 어떤 관계입니까?”
동천몽이 뒤를 돌아 술을 마시고 있는 자정경을 돌아보며 말했다.
“난 또 누구라고? 본왕의 제자이니라. 그런데 그건 왜 묻느냐?”
점소이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존경하는 대범왕님, 소인의 점소이 생활 오늘로 이십오 년입니다. 흔히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지요. 점소이 생활도 어느덧 강산이 두 번 반 변할 만큼 오래되었습니다.”
동천몽의 입가에 얇은 미소가 걸렸다. 점소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눈치를 챈 표정이었다.
점소이는 더욱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대범왕님 같은 분 자주 봅니다. 관부의 거물급에서부터 내노라하는 분들의 특징을 대범왕님도 그대로 지니고 계시군요?”
“특징이라는건 뭔가? 그렇고 그런 사이면서 주위 눈을 의식해 남인양 따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 것을 말하느냐? 지금 나처럼 말이다?
“이상하게 대범왕님과는 말이 통할 것 같군요. 이곳에는 지금 대범왕님을 존경하는 분들이 많이 와 있군요. 만약 저분들께서 대범왕님이 여자를 끼고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아마 날 가만 두지 않겠지.”
“잘 아시는군요.”
동천몽도 목소리를 낮췄다.
“원하는 게 뭐더냐?”
“별것 아닙니다. 백냥만 주십시오. 그럼 입을 다물어 드리겠습니다.”
“은화?”
“에이, 금화죠.”
동천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일단 배는 채우고 자세한 얘길 하자꾸나.”
“좋습니다. 천천히 드십시오. 필요한 것 있으면 마음 놓고 시키십시오.”
점소이를 보며 동천몽이 웃었다.
음식을 비운 동천몽이 트림을 하며 입구로 다가가 계산을 치뤘다.
점소이가 곁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자세한 애길 하자면서요? 따라 오시죠.”
점소이가 밖으로 나가더니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동천몽이 따라 들어오자 목소리를 높였다.
“조용히 주십시요.”
동천몽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까주터 날 자꾸 대범왕이라고 하는데 무슨 알이냐? 대범왕은 또 누구냐?”
점소이가 눈을 치켜떴다.
“아니 대범왕이면서도 대범왕을 모른단 말입니까? 대범종 종정스님 말입니다. 당신이 바로 그 대범종의 종정이신 대범왕님 아냐.”
그제 서야 동천몽은 점소이가 말끝마다 대범왕이라고 했던 말뜻을 알아차렸다.
대범종은 안휘성 일대에 퍼져 있는 불가의 한 종파이다. 포달랍궁처럼 코끼리를 신성시하며 법의와 불경 또한 비슷하고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혼인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포달랍궁과는 달리 그들은 무예를 배우지 않는다.
“이름이 뭐냐?”
“이름은 알아서 뭐해. 국표상, 어서 내놔. 까벌리기 전에.”
점소이가 노골적으로 나왔다.
힐끔!
국표상의 고개가 좌측으로 돌아갔다. 나오자마자 점소이와 골목입구로 들어가자 자정경이 궁금한 듯 보고 서 있었다.
점소이가 히죽 웃었다.
“기다리지 말고 이리 오쇼. 다 알고 있으니까.”
“표상아.”
“왜?”
“너 올해 나이가 몇이냐?”
“아이씨 나인 또 왜? 마흔 일곱이야.”
“나이가 많은 것을 생각해 한대만 때리겠다.”
빠악!
동천몽이 머리를 쥐어박았다.
국표상의 눈이 커졌다. 가볍게 때린 것 같았는데 엄청 아팠기 때문이었다.
“뭐야. 이 자식이 대범왕이라고 존경했더니.”
대번에 흉흉한 기세를 뿜었다. 주루의 점소이로 닳고 닳은 기세를 어김없이 드러낸다.
“난 대범왕이 아니라 멀리 포달랍궁의 대법왕이니라.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그러니 썩 꺼져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이미 독이 오른 국표상의 귀에 동천몽의 말이 들어올 리 없었다.
확!
그대로 멱살을 잡아쥐더니 으르렁 거렸다.
“안되겠소. 주루로 갑시다. 당신의 가면을 낱낱이 벗겨 드리지.”
“이 새끼가 말로 했더니 도저히 못 알아 듣는구만.”
빠악!
그대로 낭심을 동천몽이 걷어찼다.
“꺽!”
국표상이 곧바로 눈을 뒤집었다. 양손을 감싸고 엉거주춤 섰는데 안색이 여러번 변했다.
“뭘봐, 이 멍청한 자식아. 봐주려고 했더니 이 새끼가.”
다시 낭심을 걷어찼고 국표상은 그대로 주저 앉았다.
“난 대법왕이다. 네까짓 놈 정도는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포달랍궁의.”
콰앙!
골목 바닥에 움푹 속아 난 바위를 향해 일장을 날렸다.
산산조각이 되는 바위를 보고 국표상이 꺼륵 소리를 내며 기절해 버렸다.
동천몽이 피식 웃으며 지나가다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기절한 국표상의 혈도 세 군데를 쳤다
끄르륵!
입으로 음식물을 토하며 국표상이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동천몽이 미소를 지으며 내려다보고 있다.
국표상이 화들짝 무릎을 꿇었다.
“주…죽여주십시오. 소인이 큰 실수를 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국표상은 두 손을 삭삭 빌었다.
동천몽이 일어나라는 듯 손가락을 까닥 거렸고 몸을 일으켜 세우고서도 국표상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포달랍궁의 대법왕은 이곳의 대범왕과는 차원이 다르다. 하나 국표상을 굴복하게 만든 것은 동천몽이 대법왕이라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솔직히 그 말도 믿지 않았고 오로지 그를 두렵게 만든 것은 바위를 가루로 만든 무공이었다. 오랫동안 수많은 강호 고수들을 보아왔지만 화강암을 단번에 박살내는 사람은 드물었다.
“한 가지 묻고 싶구나.”
“얼마든지 물어 주십시오.”
“점소이 생활을 이십오 년 했다고 했더냐?”
“이십오 년은 만이고 한 달만 더 지나면 이십육 년입니다. 한 눈 팔지 않고 오직 한 구멍만 팠기 때문에 이제 손님 얼굴만 봐도 외상인지 아닌지 알아냅니다.”
“이 지역에서는 터줏대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구나.”
“물론입니다. 오강주점단 단장이기도 합니다.”
“오강주점단?”
“오강주루점소이연합단의 줄임말입니다.”
“호오!”
“오강주점단은 현재 백팔십 명이며 최소한 점소이 생활 삼년 이상 된 사람만 가입할 수 있습니다.”
동천몽의 눈이 영활하게 빛났다.
“가까이.”
손가락을 까닥이자 주춤 거리며 다가왔는데 양손을 낭심쪽으로 내렸다. 또다시 맞을까봐 방어를 했다.
동천몽의 입술을 움직였다. 전음을 보내는 것이었는데 갑자기 귓속으로 조그만 말소리가 들리자 점소이가 소스라쳤다. 말로만 듣던 전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는데 완전히 흥분된 표정이었다.
부지런히 동천비의 뒤를 추적해도 모자랄 판인데 이틀째 용천주루 삼층에 방을 얻어 놓고 두문불출하자 자정경은 안달이 났다. 당장 쫓아가 묻고 싶었지만 자존심상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대신 동천몽 더러 들으라는 듯 부지런히 방을 들락거렸다. 자정경은 동천몽을 따라 옆방을 얻었다. 물론 눈길이 마주쳐도 일체 모른 체 했다.
“으음!”
동천몽은 침대에 길게 누워 있었는데 흑의로 갈아 입은 차림이었다. 겉으로는 누가 봐도 세상에서 가장 팔자 좋은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천몽의 머리속은 누구보다도 복잡하고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동천몽이 인적이 드문 산을 찾아들지 않고 오강으로 들어온 것은 동천비가 사람속으로 스며들었을 가능성 때문이었다. 복잡한 인파속이야 말로 도망자나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 가장 숨기 좋은 곳이다. 물론 역으로 산을 찾아 들어갔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능성은 떨어졌지만 어쨌든 숲은 천룡구십구불이 뒤지고 있다.
문제는 오강으로 스며들었다면 어디에 숨어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강호의 모든 정보는 뒷골목에서 시작된다. 또한 중요한 일일수록 뒷골목의 은밀한 곳에서 싹트기 때문에 정사 흑백 양도를 막론하고 도박장을 비롯해 유곽과 기루 한두 곳쯤 비밀분타로 거느리고 있지 않은 곳이 없다.
동천몽은 한때 중원오랑의 수장이었다. 비록 몰락했지만 씨까지 말린 것은 아니었다. 일부 고수들과 측근은 살아 있는 것이다.
중원오랑 정도면 한 두 곳 아니라 여러곳에 비밀분타를 갖고 있을 것이고 장강을 중심으로 수로와 육로가 천하로 뻗어나가는 오강이라면 필시 존재 하리란 것이 동천몽의 확신이었다.
오강에서 영업중인 기루를 비롯한 유흥주점은 대략 삼백여 곳이다. 삼백여 곳을 혼자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사람을 동원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동천비가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그의 적수가 될만한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국표상이 단장으로 있는 오강주점단이었다. 그의 한마디면 오강내 점소이들이 빠르게 움직일 것이고 금방 어떤 단서가 포착될 것이었다.
꿈틀!
누워 있던 동천몽의 눈썹이 움직였고 문이 거칠게 열렸다.
벌컹!
동천몽이 고개를 돌려보자 자정경이 표독스런 모습으로 입구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독살스런 욕을 내 뱉을 듯 험상궂다.
“왜 그러느냐?”
동천몽이 허리를 세우며 물었다.
자정경이 예상대로 거칠게 쏘아부쳤다.
“언제까지 제자를 모른체 할셈이죠?”
“무슨 말이냐? 난 모른체 한 적 없구나. 오히려 네가 모른체 했지 않느냐?”
자정경이 눈을 크게 떴다.
“마…말도 안 돼, 제자가 언제 모른체 했다고 그러세요?”
“넌 저녁을 먹을 때도 사부더러 같이 가자는 말 한 마디 없었지 않느냐? 너 혼자 달랑 내려가 먹고 왔고 복도에서 마주쳐도 고개를 돌렸지 않느냐?”
자정경이 실룩거렸다.
동천몽의 말은 틀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동천몽이 아는체 해주기를 기대했는데 반응이 없자 이후 자신이 먼저 고개를 돌렸고 모른체 했다.
“흐---흐흑!”
자정경이 눈물을 흘렸다.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더욱 소리 높여 울자 동천몽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흑…호흐흥!”
자정경의 흐느낌은 더욱 커졌고 급기야 동천몽이 다가갔다.
“왜 갑자기 우느냐? 누가 보면 이상하게 생각 하겠구나.”
“으와아앙!”
봇물터지듯 소릴 지르며 동천몽의 품으로 안겼다. 마음 같아서는 밀어내고 싶었지만 하도 서글프게 울어 동천몽은 엉거주춤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자정경의 울음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동천몽의 앞가슴 의복이 푹 젖도록 울었고 가만 내버려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았으므로 동천몽은 가볍게 끌어안으며 토닥였다.
“그만 울거라. 이 사부가 잘못했구나.”
“으어어엉!”
대성통곡으로 바뀌었다.
동천몽은 길게 한숨을 내 쉬며 등을 토닥거렸는데 자정경의 속셈을 알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마음 같아서는 자정경을 미치도록 끌어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이미 혼인이 불가한 대법왕의 신분이다. 이것은 자신의 뜻이 아닌 세존의 배려이며 운명이었다. 한 순간의 감정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은 이미 초월자가 되어 있었다.
자정경은 울면서 더욱 동천몽을 끌어 안았고 물컹한 젖가슴이 자극적으로 앞 가슴을 비볐다.
‘아미타불!’
동천몽은 속으로 연신 불호를 중얼거렸다.
결코 그녀를 탓해서는 안되었다. 그녀를 제자로 받아 들인 순간부터 이미 오늘의 비극을 예정했어야 했다. 그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자신의 운명과 신분을 깊이 통찰하며 인과를 계산해보았어야 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당시는 자신의 불심이 깊지 못했다. 그때까지는 세상적인 인연과 감정에 더 충실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기능회복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자신의 우유부단한 행동이 자신을 사랑하도록 자정경을 더욱 부추겼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자정경의 사랑을 탓해서는 안된다. 그녀는 자신의 그런 매끄럽지 못한 행동에 더욱 용기와 자신을 갖고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와서 갑자기 모든 인연을 냉정하게 돌려놓으려 하니 그녀가 받아야 할 고통과 충격은 적지 않을 것이었다.
동천몽이 착잡한 마음으로 자정경을 토닥거리고 있을 때 밖으로부터 음성이 들려왔다.
“존경하옵는 대법왕님 계시옵니까? 소인 국표상이옵니다.”
동천몽이 슬며시 밀어내자 자정경이 떨어졌다.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고 들어선 국표상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이십 오년 점소이 생활 중 여자가 울고 있는 광경을 숱하게 보았다. 경험에 의하면 여자가 우는 경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랑하는 남자의 품에 하룻밤을 보냈다는 행복에 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우는 것이다. 대개가 부인이 있는 남자가 유혹한 처녀와 하룻밤을 자고 났을 때 보이는데 이 또한 두 가지 부류가 있다. 지금처럼 흐느끼며 말없이 우는 여자가 있는 반면 고래고래 악을 쓰며 행패를 부리는 여자가 있다.
‘후자 첫 번째 이유다!’
국표상은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대법왕은 혼인 할 수 없다. 물론 포달랍궁의 법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관례를 보면 그러했다. 그런데 막상 뜨거운 정을 통하고 나자 마음이 서글퍼지는 것이다. 알고 사귀었지만 막상 정을 주고 나니 혼인할 수 없다는 것에 서러운 것이다.
“그래 뭣좀 알아봤느냐?”
국표상이 정신을 차리며 말을 이었다.
“대법왕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인 줄은 알 수 없지만 의심스러운 사람과 기루가 발견되었사옵니다.”
“그래 말해보거라.”
자정경까지 눈을 빛내며 돌아보았다.
“와상루라고 있사옵니다. 오강에서 손가락에 꼽을 만큼 오래된 기루인데 사흘 전부터 부쩍 손님들이 많아졌다는 그곳 점소이인 철용한의 귀띔입니다.”
명문의 비밀 분타일수록 점소이까지 속인다. 오로지 주인과 몇몇 간부들만이 교류할 뿐이다. 더구나 사흘 전이면 싸움이 크게 벌어진 날이다.
동천몽은 지체 없이 국표상을 따라 나섰다.
멈칫!
동천몽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자정경이 경장차림으로 검까지 옆구리에 꿰차고 문밖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서럽게 울던 그녀의 모습은 오간데 없었다.
“뭘 보고 있느냐? 당장 와상루로 가자.”
“예 낭자.”
국표상이 앞장을 섰고 그 뒤를 자정경이 따랐다.
동천몽이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자정경은 혀를 낼름 거렸다. 동천몽은 가볍게 웃었다. 혀를 낼름 거렸다는 것은 그녀의 감정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되었다는 반증이었다. 동천몽은 속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어지간한 여자 같으면 단 순간에 이렇게 그토록 커다란 충격과 서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한 남자가 혼인을 거절하는데 쉽게 감정을 회복시키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자정경은 가벼운 웃음으로 모든 것이 정상임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동천몽은 알 수 있었다. 웃고 있는 자정경이 가슴속은 찢어지고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음을.
사부 앞에서 웃음을 지어 자신을 좀 더 편안하게 해주려는 배려였다.
“정경아.”
조용히 부르자 그녀가 돌아보았다.
동천몽이 옆구리에 검을 보며 말했다.
“그렇게 티를 내면 되겠느냐?”
자정경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한껏 멋을 내는데 치중한 나머지 검을 휴대함으로 무림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한 꼴이 된 것이었다.
“죄송해요. 사부님.”
자정경이 앞서가는 국표상에게 검을 건넸다.
갑자기 검을 건네자 국표상이 놀란 표정을 지었고 자정경이 나직히 말했다.
“네가 갖고 있거라.”
국표상이 울상을 지었다.
“시…싫은데요. 자칫 하다간 소인의 목숨이.”
경험많은 점소이답게 국표상은 상황을 읽었다. 괜히 검을 갖고 있다가 만약 와상루가 동천몽이 찾는 곳이라면 오해로 인해 자신이 공격을 받아 당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아는 곳에 잠시 맡기거라.”
국표상이 길가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점소이를 불렀다.
“어이, 우철이.”
우철이란 점소이가 고개를 돌리더니 국표상을 발견하고 빠르게 달려와 넙죽 절을 했다.
“대백관 점소이 우철이가 삼가 단장님을 뵈옵니다.”
국표상이 검을 내밀자 우철이 흠칫 놀랐다.
“잘 보관하도록.”
“다…단장님께서 검을 잡으셨단 말입니까?”
“잘 지켜.”
국표상이 앞으로 지나갔고 우철이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해가 떨어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도 와상루를 찾는 사내들의 모습이 빈번했다. 반 시진가까이 골목 어귀에 몸을 숨긴 채 와상루를 살피던 동천몽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천몽이 끄덕이자 기다렸다는 듯 국표상이 물었다.
“어떻습니까? 의심스럽지요?”
“고생했다. 넌 그만 가보거라.”
그러면서 품에서 은자 한 닢을 건네주었다.
국표상이 거절했다.
“아닙니다. 거두어 주십시오.”
“괜찮다. 가진게 많으면 한 줌 쥐어 주겠다만 보다시피 출가인이 어디 돈이 있느냐?”
“압니다. 대법왕님께서 주신 것이니 기쁘게 받겠사옵니다.”
국표상이 은자 한 닢을 받아 들고 골목 너머로 사라졌다.
“수상해요. 출입하는 자들 모두가 무공이 높군요.”
자정경이 눈을 빛냈다.
이미 일류를 넘어 절정에 이른 고수의 안목답게 그녀는 출입자가 단순한 손님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한 눈치였다.
동천몽이 예리한 눈으로 기루를 살폈는데 이마를 찡그리고 있었다. 그걸 본 자정경이 물었다.
“왜 요?”
동천몽이 자정경을 빤히 쳐다보았다. 빤히 쳐다보았을 뿐 아니라 긴 머리와 불룩 솟은 젖가슴을 보자 자정경이 당황하며 옷깃을 여몄다. 빨개진 자정경의 얼굴을 보며 동천몽이 말했다.
“당장 옷을 갈아 입거라. 남장을 하라는 얘기니라.”
자정경이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남장은 왜?”
자정경의 두 눈에 이채를 띄었다. 남장을 요구하는 동천몽의 계산을 읽은 것이다.
기루에 여인이 들어서면 결코 바르게 보아주지 않을 것이다.
자정경은 알았다는 듯 모습을 감췄다. 잠시 후 반각쯤 지나 다시 나타난 그녀는 완전히 사내의 모습이었는데 흠이라면 지나칠 만큼 얼굴이 너무 잘생겼다는 것이었다.
동천몽은 속으로 탄식을 했다.
여인일 때도 그랬지만 남장을 하자 빼어난 미모가 더욱 돋보였고 갑자기 가슴까지 울렁거렸다.
“뭘 봐요.”
오히려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한 시진 전까지만 해도 방으로 찾아와 울던 여인이다. 그녀 또한 이제는 확실히 어느 정도 마음을 다잡은 듯 해 보였다.
“예쁘구나.”
“듣기 싫어요.”
자정경이 뾰로통해 말했다.
동천몽은 또다시 한숨을 몰래 쉬었다. 천하제일미중 한 명인 그녀의 반응치고는 차갑다. 그것은 이제 동천몽의 가슴에서 자신의 흔적을 조금씩 걷어내겠다는 뜻이다. 한 번에는 자신도 자신 없지만 조금씩 걷어내면서 연인으로서 멀어지겠다는 선전포고인 셈이다.
두 사람은 와상루를 향해 걸어갔고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점소이 한 명이 다가왔다. 객점의 점소이와 달리 차림새가 화려했다. 기루의 특성을 살린 행색인 것이다.
“두 분이십니까? 단골 낭자는 있사옵니까?”
“처음일세. 자네가 잘 알아서 보내주게.”
“염려 마십시오. 우선 이쪽으로.”
점소이가 두 사람을 데리고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았다. 그 순간 동천몽은 계단 뒤쪽으로 조그만 복도가 있었는데 싸늘한 냉기가 풍겨옴을 알아차렸다. 자정경 또한 기세를 읽은 듯 무거운 침음성을 흘렸다.
점소이는 두 사람을 이층 끝 방으로 데려갔다.
방은 화려했고 넓었다. 가운데 하나의 창이 있었고 열어 젖히자 기녀들이 들어와 악기를 다루고 춤을 추는 곳이었다.
두 사람은 앉혀 놓고 점소이가 사라졌다. 점소이가 사라지자마자 동천몽이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자정경도 같이 일어섰다. 따라가겠다는 의사표시였는데 동천몽이 제지 시켰다.
“넌 여기 있거라. 혹시 점소이가 찾거든 뒷간에 같다고 말 하거라.”
모든 정황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적극적으로 움직였다가 전혀 다른 집단일 경우면 골치만 아프다. 상대 또한 비밀이 누 설 될 것을 우려해 그냥 보내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쓸 데 없는 싸움만 벌이게 된다.
자정경이 입을 삐쭉거리며 못마땅해 했지만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방을 빠져나온 동천몽은 복도를 이용하지 않고 창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이용하다 점소이와 마주치면 성가시다. 창밖으로 나간 동천몽은 서서히 몸을 띄워 일층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창을 통해 들어서자 계단 뒤쪽 복도였고 동천몽은 안쪽을 쳐다보았다.
쭈욱 뻗은 복도와 그 끝 어두컴컴한 곳에 한 개의 문이 있는데 굳게 닫혀 있었다.
스으으!
일체의 기척도 없고 공기의 파장도 일어나지 않은 신법이었다. 유령이 잠시 이동하는 것 같은 완벽한 몸놀림이었고 문 앞에 이른 동천몽이 내력을 끌어 올렸다. 안에 몇 명이 있는지 기척으로 알아차릴 요량이었다.
한 참 귀를 기울이고 있던 동천몽의 눈이 차가워졌다.
‘다섯 명이로군!’
말은 세 명이 주고 받았지만 온기는 두 명의 것이 더 느껴졌다.
동천몽이 문 안으로 막 들어가려는 순간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개의 흑영이 날아나왔다.
뻐어억
빠르게 들어가려던 동천몽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사내는 안에서 동천몽의 기척을 발견하고 침입자임을 발견하여 달려나왔다. 그에 반해 동천몽은 신속히 들어가기 위해 몸을 움직였기에 피할 수가 없었는데 사실은 이 모든 것이 나름대로의 안배에 의한 작용이었다.
어차피 들어가면 싸워야 한다. 어떤 형태가 되든지 적수가 될 수는 없었지만 한명을 불러내 부딪혀 죽이므로 기선을 제압하고 아울러 그들에게 자신의 신위를 보여주어 쓸 데 없는 잡담이나 절차를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기척을 내 한명을 불러냈고 때를 맞춰 거칠게 들어가 부딪힌 것이다.
빠아악!
두 사람의 몸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면으로 부딪혔다.
나오던 흑영이 비명을 지르며 튕기듯 방안으로 다시 날아가더니 맞은편 벽에 사정없이 부딪혔다.
퍽!
둔탁한 소리와 더불어 바닥으로 나뒹굴었는데 흑영은 꿈틀거릴 뿐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충돌하는 순간 전신의 내장이 자리를 이탈했을 뿐 아니라 뼈마디가 어긋난 것이다.
꿈틀! 꿈틀!
일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동료를 보는 나머지 네 사내의 얼굴이 납덩이가 되었다. 단순히 부딪혔을 뿐인데 중상을 입은 것이다. 모두가 동천몽을 보며 눈알을 굴렸다. 동천몽 또한 어디쯤엔가 상처를 입어야 정상이었기 때문에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이 아프도록 눈알을 굴리며 뒤졌지만 멀쩡했다.
꿀꺽!
여기저기서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동천몽이 엄청난 고수임을 깨달은 것이었다.
“뉘…뉘시오?”
자신들 보다 강하다는 것을 인정한 말투였다. 낮았다면 곧바로 욕설을 뱉었거나 검을 뽑아 들었을 것이다.
“동천비 어딨나?”
곧바로 치고 들어가는 질문이다.
알고 왔다는 추궁도 되었다.
예상대로 네 사내가 당황하는 빛을 띄었고 동천몽이 다그쳤다.
“동천비, 너희는 필요 없다.”
모른다고 하거나 엉뚱한 소릴 지껄이면 곧바로 살수를 펼칠 기세였다. 그렇지만 자신들의 상관인 동천비의 행방을 말해 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불충이고 배신이었다.
“무슨…컥!”
좌측 사내가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에서 피를 뿜었다. 목젖에 엄지 손가락 세 개를 들어갈 만한 구멍이 생겼는데 어떤 수법을 썼는지 보지 못했다.
사내는 무슨 말을 하느냐고 시치미 떼려다 죽었다. 그런데 말을 다 듣지 않고 죽였다는 것은 조금만 기대에 어긋난 말을 해도 바로 살수를 펼치겠다는 독한 의지였다.
“동천비?”
재차 다그쳤다.
“동천비가 누.”
데구르르!
두 번째 사내는 목이 잘렸다.
방 가운데로 굴러가는 목을 보며 두 사내의 안색이 흑빛으로 변했다.
“동천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왔다. 말해라.”
두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동천비가 누군지 모른다고 시치미떼려던 동료가 죽었으므로 차라리 입을 다문게 낫다고 판단 한 것이었다.
그런데 동천몽의 손은 가만 있지 않았다. 우측 사내의 명치에 오른손이 박혔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너무 빨라 동천몽의 공격이 왔다 갔다는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그것도 동료의 비명이 아니었다면 전혀 알지 못했을 만큼 눈부셨다.
쿵!
조금 전까지 옆에 서 있던 동료가 죽었다. 이제 산 사람은 자신과 바닥에 있으나마나 한 동료뿐이었다.
“물어야 하느냐?”
흠칫!
사내가 경련을 일으켰다.
말하기도 귀찮으니 고개로 의사표시를 하라는 뜻이었다. 사내가 침을 삼켰다. 사십년을 애써 길러온 생명이 자신의 한 순간의 판단에 달려 있었다.
모른다고 고개를 저으면 죽을 것이고 안다고 끄덕이면 살 것이다. 그토록 목숨에 애착이 없다고 자부하고 큰 소리쳤는데 이상했다. 막상 죽음이 코앞에 닥쳐오자 미치도록 살고 싶었다. 대륙을 떠돌며 돈 되는 일은 마다하지 않았고 죽음과 늘 가까이 있었던 삶이었기에 더욱 죽음 앞에서 당당할 자신 있다고 여겼는데 도무지 이 무슨 두려움이란 말인가.
슈욱!
필살의 기예였다.
태어나 이토록 혼신의 힘을 다해 단 일초에 모든 것을 걸어보긴 처음이었다. 말 그대로 몸속의 모든 기력을 이끌어내어 힘차게 공격을 퍼부었다.
동천몽의 무공이 뛰어 난 것은 사실이었지만 거리도 가깝고, 더구나 동료들이 썩은 집단처럼 쓰러진 마당에 자신이 반격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역으로 짚어 펼친 공격이기에 약간의 자신감도 쌓였다.
따악!
검끝이 딱딱한 물체에 닿았다.
순간적으로 이게 아니다 싶었다. 사람의 몸에 닿으면 약간은 푹씬하다.
“헉!”
눈을 똑바로 뜬 사내는 기겁했다. 자신의 검 끝이 동천몽의 손바닥에 막혀 있었다. 딱딱한 느낌은 손바닥이 전해주는 것이었다. 다시 힘을 써봤지만 푹신 하기는 커녕 무쇠에 닿은 듯 했다.
‘어떻게!’
이해 못하는 눈초리를 만들 때 동천몽의 오른손이 뱀처럼 반 바퀴 돌더니 검끝을 거머쥐었다.
쉬익!
사내는 그대로 검을 밀었다.
악차같이 미는 힘에 검날은 동천몽의 겨드랑이 사이로 빠져 나갔지만 손은 어느새 손잡이 근처에 도달해 있었다.
“크헉!”
너무 뜨거운 나머지 사내는 잽싸게 검을 놓아버렸다.
동천몽의 손에서 극양의 장력이 검을 달궈버린 것이다.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는 완전한 패배였다.
“한번만 번복하지. 원래는 곧바로 죽이려 했는데 너무 성급한 느낌도 들고 말이야. 동천비는 어디있느냐?”
사내의 표정이 짧은 순간 여러 차례 변했다.
그러더니 입을 열어 말했다.
“떠났습니다.”
“한발 늦었다는 얘기냐?”
“아실 것 아닙니까?”
흠칫!
동천몽이 눈을 빛냈다. 사내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컸는데 그중 가장 확실한 것은 대법왕의 능력정도면 마신지체가 된 동천몽의 사악한 기운이 이 안에 있는지 없는지 알 것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동천몽은 신속히 전신의 공력을 끌어 올렸다.
이들을 격려하느라 미처 동천비의 몸에서 뻗어나오는 마기를 감지하지 못한 것이다.
사실 마기가 강하면 쉽게 노출되지만 마신지체가 되면 거의 사라진다. 강이 극에 이르면 부드러워지고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였는데 극한으로 내공을 끌어 올리자 아지랑이 같은 미약한 기운이 잡힌다.
파아!
동천몽이 그대로 밖을 향해 뛰쳐나갔다.
마기가 희미하지만 아직 공기 중에 있다는 것은 동천비가 이곳을 떠난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슈아아!
뒤늦게 자정경 또한 동천몽을 따라나섰지만 집밖으로 나올 땐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동안 오랫동안 동천몽과 같이 다녔지만 이토록 빠른 신법은 처음이었다. 자정경은 그저 아연한 표정으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기는 미약하게나마 허공을 흐르고 있었다. 배가 지나가면 물 위로 자국이 남듯 마기는 한쪽으로 계속 가고 있었는데 오강을 벗어나고 있었다.
‘저기다.’
동천몽이 외쳤다.
한 개의 검은 인영이 일위도강의 수법으로 강을 건너고 있었다. 단지 일반적인 일위도강과는 달리 손에 한 웅큼의 갈대잎을 쥐고 있다가 한 걸음씩 뗄 떼마다 수면에 뿌려 그 위를 징검다리처럼 밟고 가고 있었다.
제대로 된 일위도강은 수면위에 갈대잎 한 개를 띄우고 내기를 이용해 배처럼 미끄러지는 것이다. 그런데 한 줌 쥐고 한 개씩 뿌리며 걷는 다는 것은 시전자의 무공이 일위도강을 펼치기에 조금 부족하거나 부상을 입었다고 봐야했다.
파아아!
일위도강도 필요 없었다.
동천몽은 단 숨에 강을 가로질러갔고 흑영 옆으로 다가섰다.
화악!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흑영은 동천비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의 몸에서는 계속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일위도강을 펼치며 도주하던 흑의사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강을 거의 건넜을 쯤에 만날 것이라고 했는데.”
흑의사내는 동천비가 시키는데로 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을 하고 있었다.
동천몽의 눈알이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속은 것은 분명한데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겼는지 정리해보는 것이었다. 동천비가 눈앞에 있다는 생각에 조급히 서둘렀고 그러다보니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고 있었다.
팟!
‘전이대법!’
동천비가 마기를 사내에게 적당량 주입했다. 그리고 사내를 도주시켜 자신이 도주하는 것처럼 동천몽을 유인해 버린 것이다.
휙!
동천몽은 다시 돌아섰다. 멀리 사라지는 동천몽을 보며 죽었다 생각하고 있던 사내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옥에서 살아난 것이다. 하나 한 순간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자신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동천몽이 되돌아갔는지 놀라웠다. 동천몽이 자신을 죽이지 않고 돌아갔다는 것은 동천비와 자신과, 그리고 방에서 싸웠던 마지막 생존자 사이에 일어난 일을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와상루로 뛰어든 동천몽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중상을 입은 자정경이었다. 자정경은 안색이 파랗게 변해 있었는데 똑바로 서 있지 못하고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정경아!”
자정경이 고통스러운 듯 더듬거렸다.
“속았어요. 동천비였어요.”
자정경은 동천몽이 사라지고 난 이후 상황을 설명했다.
동천몽을 놓친 자정경은 다시 주루로 돌아왔다. 동천비를 잡으면 결국 데리고 주루로 돌아올 것을 믿고 느긋하게 기다린 것이었다. 그런데 도망친 것으로 알고 있던 동천비가 나타난 것이다. 놀랍게도 동천비는 지하실에 숨어 방안의 상황을 훤히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감각으로 모든 상황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리고 사내에게 전음으로 도망친 것으로 말하도록 명령을 하였고 동천몽은 너무 성급하게 서두르다 그만 속아 넘어가고 만 것이다.
동천비는 생각보다 부상이 깊었다. 혼자서는 걷기조차 힘들어 했는데 놀랍게도 자정경을 생포하려고 했다. 자정경을 생포하여 인질로 잡고 동천몽의 추적을 벗어나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자정경은 전력을 다해 맞섰다. 다행히 그동안 놀지 않고 부지런히 무공을 수련한 덕에 동천비와 사내의 합공을 받아냈지만 중상을 입고 말았다.
“금방 돌아오겠다!”
동천몽이 몸을 일으켰다.
부상인데다 자정경와 싸움까지 했으므로 몸 상태는 더욱 나빠졌을 것이다. 아무리 멀리 갔다고 해도 십리는 벗어나지 못했으리란 것을 확신하고 몸을 날리려던 동천몽이 그만 땅으로 다시 내려섰다.
그리고 자정경을 돌아보았는데 그녀가 벌벌 떨고 있었다.
마기에 전신이 지배당하고 있었다.
마신지체가 된 사람에게는 한 가지 무서운 기세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정(魔精)이라 하여 독기처럼 상대를 중독 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뿜어낸 마정을 흡입하거나 마정에 부상을 입으면 전신이 차가운 마기에 점령당해 죽는다.
덜덜덜!
자정경의 입술이 떨렸고 그녀의 얼굴은 조금씩 파란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가만 내버려두면 한 시진을 넘기지 못하고 전신이 파랗게 물들어 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