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57화 (57/71)

제3장 살아난 기능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술냄새가 코를 찔렀다. 침대를 바라보던 동천몽이 흠칫했다. 자정경은 아직까지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는데 속옷 바람이었다. 눈부신 속살을 훤히 드러내놓고 잠에 빠진 자정경의 모습은 무서운 유혹이었다.

‘아미타불!’

동천몽은 불호를 외우며 발심을 눌렀다.

사실 동천몽의 몸은 이미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사흘 전 갑자기 잠결에 아랫도리에 통증이 느껴져 눈을 뜨고 살폈는데 놀랍게도 통나무처럼 곧추서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현상에 너무 감격한 나머지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며 살폈고 수십 번을 만지고 쓰다듬으며 하마터면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뿐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토록 살아나길 간절히 소망했고 그래서 살아났으면 펄쩍펄쩍 뛰어야 정상이었다. 살아나기만 하면 아무리 누가 뭐라고 해도 당장 유곽으로 달려가 밤새 계집을 품고 나뒹굴어봐야겠다고 마음까지 먹었는데 예상치 못한 우울한 감정에 스스로도 뜻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우울한 감정의 원인을 찾아냈다.

그것은 깨달음이었고 자신도 모르게 이미 대법왕으로서 모든 사고가 깊이 물들어 있음이었다.

팽팽하게 솟아 오르던 아랫도리가 마음을 가다듬자 어느새 수그러들었다.

동천몽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정경이 걷어찬 이불을 덮어주며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자정경은 반시진 쯤 지나 눈을 떴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길게 하품을 하며 일어나더니 옷을 갈아입기 위한 듯 홀라당 속옷을 벗었다. 동천몽은 차마 볼 수가 없어 헛기침을 했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내 동천몽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서는 가릴 생각도 않고 돌아섰다.

“사…사부님.”

그러더니 그대로 달려와 목을 끌어안았다.

“아미타불! 이게 무슨 짓이냐 어서 놓거라.”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목을 끌어안고 매달린 자정경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천몽은 당황했다.

“정경아 왜?”

“우느냐구요? 가슴이 아파서 우는 거예요? 사부님과 혼인을 못하게 될까봐 울고 있어요. 제자의 소원은 사부님과 혼인하는 것인데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오는군요.”

화악!

말을 하던 자정경의 눈이 커졌다.

그러더니 눈물이 흘린 채 고개를 숙여 동천몽의 아랫도리를 쳐다보았다.

“사…사부님 이게.”

아랫도리에 감촉이 느껴진 것이다. 그래서 내려다 보았는데 동천몽의 상징이 곧추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덮칠 듯 가사자락을 추켜 올리고 서 있는데 언뜻 독사와 같았다.

“이게 꿈은 아니죠? 틀림없는 현실이죠. 진짜 아미타불이네요. 사부님.”

그러면서 더욱 끌어 세차게 안았다.

“언제부터였어요? 지금은 아니었죠? 여태 숨기고 있었죠?”

매달린 자정경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동천몽은 더 이상 이 상태로 있다가는 자신의 의지가 무너질 수 있음을 깨닫고 자정경을 밀어냈다.

“그만.”

“싫어요. 이대로 있어요.”

자정경은 악착같이 매달려 있으려고 했고 동천몽은 기어코 떼어내려 했다. 두 사람의 실랑이는 치열하게 지속되었고 끝내 자정경이 물러났다.

그러나 자정경은 도발적으로 알몸을 보이며 섰다.

“옷부터 입거라.”

“네 사부님.”

자정경이 순순히 따랐다.

남자의 기능이 회복되었으니 오늘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자신 있다는 표정이었다.

자정경이 환한 얼굴로 말했다.

“축하해요. 정말 기뻐요. 그런데 아침부터 이 제자는 왜 찾아오셨어요?”

동천몽이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의 기능 회복을 확인해서인지 자정경의 얼굴 표정은 햇살처럼 밝았다. 그런 자정경에게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말을 하려니 갑자기 말문이 박힌다.

자정경은 한참 들떠 있었다. 앞으로 자신의 기능회복을 확인 한 이상 틈만 나면 매달리고 유혹할 것이다. 워낙 영리한 여자이니 어쩌면 꾀에 넘어갈지도 모른다.

차마 혼인은 포기해라. 이 사부의 신분은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하고 말을 하려다 결국 삼키고 말았다. 언젠가는 해야 할 말이지만 오늘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내 정신 좀 봐. 모처럼 사부님께서 오셨는데 아직 아침 드시지 않았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 제자가 맛있게 해서 올리겠어요.”

밀릴 틈도 없이 옷소매를 걷어 부치고 밖으로 나갔다.

동천몽은 다시 한 번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무슨 일이세요??”

그때 밖으로부터 자정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법왕님께서 계시옵니까?”

무미선사의 목소리였다.

문이 열리고 예상대로 무미선사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표정이 돌덩이가 되어 있었다. 직감적으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간파한 동천몽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왜 그러느냐?”

무미선사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쳐들고 느릿하게 아주 통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버…법왕님들의 행방이 밝혀졌사옵니다.”

동천몽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사대법왕의 행적을 추적하라고 일렀고 사불각은 총력을 쏟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보름에 한 번꼴로 연락이 왔었는데 한 달째 감감 무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모두 시신으로 발견되었사옵니다.”

동천몽의 눈썹이 더욱 찌푸려졌다.

두 눈을 지그시 감았는데 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소식이 단절되면서 불길한 생각을 떠올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사대법왕은 강하지만 그들이 쫒는 동천비는 더 강했다. 그래서 어쩌면 최악의 사태에 빠졌는지 모른 다는 생각을 했지만 사실로 밝혀지자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세수 백에 가까운 노승들이면서도 자신이 명령을 내리면 설혹 부당할 지라도 하늘처럼 떠받들었다. 인상을 쓰고 금방이라도 한 대 갈길 듯 노려봐도 전혀 화를 낸다거나 불손한 언행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야 말로 살라 있는 부처였고 스승들이었다.

아침을 준비하러 나갔던 자정경 또한 무미선사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듯 문밖에 서 있다가 보고를 듣고 들어섰다. 그리고 그녀는 동천몽의 눈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가느다란 여인의 것과 달리 사내의 눈물은 굵었다. 그리고 부하의 죽음을 애절하게 생각하는 눈물은 붉었다. 동천몽은 소리죽여 한참을 흐느꼈고 자정경도 따라 눈물을 흘렀다. 동천몽 대신 자신의 무공지도를 가장 많이 해주었던 사대법왕들이었다. 어쩌면 진짜 사부들인 것이다.

사대법왕의 시신은 안휘성 오강에서 발견되었다. 오강은 화현에서 북동쪽으로 사십 리 떨어진 곳에 있다. 오강은 저 유명한 항우와 우미인묘가 있는 곳으로 더욱 유명한데 아침 일찍 고기를 잡으러 나가던 어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워낙 시신들이 자주 떠내려 오기 때문에 그저 그런 인물들 쯤으로 여기고 무시하던 어부의 발길을 잡았던 것은 그들의 행색이었다. 그것은 중원의 승려들이 아닌 서장 포달랍궁의 법의였다. 더구나 그들의 품에서 사대법왕임을 알리는 신분패가 나타나자 어부는 곧바로 포달랍궁의 중원 말사에 연락을 했다.

오강에 사는 포달랍궁의 불자들이 갈대숲 인근을 가득 메웠다. 대법왕인 친히 온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온 것이다. 대법왕의 얼굴을 한 번 보다는 것은 더 없는 소원이자 평생 두 번 다시 없는 영광이었다.

오강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왔고 포달랍궁의 승려들이 밀려드는 사람들을 정리하며 진땀을 빼고 있었다.

“오신다!”

몰려든 인파속에서 누군가 외쳤고 모든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멀리 강둑을 따라 한대의 마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거대한 황금 깃발이 바람에 펄럭 거렸고 대설산의 눈보다 더 흰 백색의 마차였다. 마차가 가까워지고 전면에 거대한 코끼리 문양이 드러나자 사람들이 일제히 외쳤다.

“배…백상거다.”

“오오! 진짜 대법왕님께서 납시다니.”

사람들은 감동과 흥분으로 더욱 끓어 올랐고 백상거는 천천히 접근해 왔다.

백상거의 마부석에는 일목이 앉았고 뒤로는 덕배선사를 비롯한 천룡구십구불이 엄숙이 따르고 있었다.

“맙소사, 마부 좀 보게. 세상에 눈이 하나 뿐 일세 그랴.”

누군가 일목을 보며 놀라 말했다.

“눈이 하나면 어떻고 둘이면 어떤가? 얼마나 불심이 깊으면 대법왕님을 모시겠는가? 눈을 두개 가진 우리가 부끄럽네.”

“자넨 뭘 모르는군. 백상거 마부는 불심으로 정해지지 않네.”

“그럼 무엇으로 정해지는가?”

“나도 모르지. 그러나 절대 불심으로 정해지지 않는 것만은 확실하네.”

이윽고 백상거가 멈췄고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일목이 뒤로 돌아가 문을 열었다.

삐이익!

백상거 뒷문이 열리고 황금빛 가사를 걸친 동천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운집한 사람들이 일제히 불호를 외우며 땅에 무릎을 꿇었다.

“아--미--타--불!”

장중한 목소리가 장강너머로 퍼져 나갔고 동천몽이 군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비록 비극의 현장을 찾아왔지만 자신을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몰려든 사람들을 못본체 할 수는 없었다.

“세존의 자비가 함께 하길.”

“오오!”

“대법왕님이시여 만수무강 하소서.”

군웅들이 흥분하여 외쳤고 일부는 끓어오르는 감격을 주체 못하고 통곡을 했다.

“자비가 그대들 가정에 가득하길 바라노라.”

“대법왕님 또한 행복하소서.”

사람들이 더욱 가까이 다가들려고 했고 승려들이 악착같이 가로막았다.

동천몽은 천천히 시신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시신은 이미 수거하며 붉은 장포 위에 뉘여 놓았다.

척!

동천몽이 시신을 뉘여 놓은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잠시 무거운 얼굴로 시신을 내려다보던 동천몽이 쭈그리고 앉아 붉은 천을 걷었다.

스르르!

네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크게 다친 곳도 없어 보였고 얼굴도 평온해 보였다. 고수들의 싸워 죽은 시신의 전형이었다. 고수들과 싸우면 시신에 훼손은 그다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부는 완전히 잿더미로 변하거나 처참하게 뭉개진다.

동천몽이 손을 뻗어 천장법왕의 얼굴을 만졌다.

무척 차가웠다. 강물에 오랫동안 잠겨 있어 더욱 차가워진 것이다. 부패가 적었는데 냉기 때문이 아니다. 워낙 내력들이 심후하기 때문이었다. 내공이 고절하면 숨이 끊어진 이후에도 스스로 발기하여 썩는 것 을 둔화 시킨다.

동천몽이 손목과 곳곳을 매만졌다. 몸속 상태를 알아보기 위한 동작이었다. 무공이 어느 경지를 넘어서면 몸속의 상태를 자신의 기를 발출하여 알아 낼 수가 있었는데 동천몽이 지금 그러했다.

“음!”

동천몽의 굳어진 표정을 보며 덕배선사 또한 굳어졌다.

동천몽이 굳어질 정도라면 몸속 상태가 예상보다 처참하다는 뜻이며 그건 곧 동천비의 마공이 더욱 높아졌다는 뜻이었다.

한참 사대법왕의 몸을 만지며 살피던 동천몽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의심산 산자락에 고이 묻거라.”

산자락에 묻으라는 뜻은 포달랍궁의 풍습대로 풍장을 지내라는 뜻이었다.

주위를 지키고 있던 승려들이 신속히 세 사람의 시신을 법의에 감싸 준비한 마차에 실고 떠났다.

군웅들은 여전히 떠나지 않았고 어떻게 해서라도 동천몽을 가까이서 보고자 다가왔고 승려들은 막았다.

쿠쿠쿵!

한척의 커다란 배가 띄워졌다. 아니 처음부터 둑 한쪽에 메어져 있었는데 동천몽이 나타나자 닻이 풀린 것이다.

동천몽이 배 위를 향해 몸을 날렸다.

부우우!

황금빛 가사를 걸치고 배를 향해 날아가는 동천몽의 모습은 세존의 재림을 보는 것 같았고 군웅들이 거대한 외침을 터뜨렸다.

“아미타불!”

“무공이 천하제일이라시더니 과연.”

동천몽의 뒤를 천룡구십구불이 올랐고 자정경과 일목이 뒤를 따랐다.

“출발하라.”

덕배선사의 명령에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촤아아!

배는 거센 바람을 맞으며 강을 거슬러 올라갔고 멀어져 가는 동천몽을 향해 사람들이 연신 아미타불을 외치며 합장을 했다.

조금 전까지 거칠게 몰아치던 파도가 바람이 잦아들자 조용해졌다. 강은 유유히 흘렀고 햇살은 따갑게 내려 쬐었다. 동천몽이 탄 배는 침묵 속에 강을 거슬러 올라갈 뿐이었다.

선수에서 잔잔한 장강을 바라보며 서 있던 동천몽이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자정경이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동천몽에게 뭔가 말을 붙이고 싶었지만 하도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므로 연신 돌아서기만 했다. 그런데 용기를 낸 듯 입을 열었다.

“사부님 이제 마음이 조금 평안해 지셨는지요?”

동천몽이 강을 보며 말했다.

“네가 보기엔 어떠냐?”

“제자가 보기엔 큰 분노를 갖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헛헛! 그렇게 보였더냐? 사실이다. 난 지금 엄청나게 분노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한 가지 의문에 시달리고 있었느니라.”

“그게 뭔가요?”

“인간에게 악이란 어디까지인지를 잠시 생각하고 있었느니라. 정녕 악은 인간 스스로 걷어내지 못하는 무서운 존재인가를 묻고 답하고 있었지.”

자정경이 눈을 크게 떴다.

“그래서 답을 얻었나요?”

“얻었다.”

자정경의 눈이 더욱 커졌다.

“악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을 깨우쳤단 말이죠?”

동천몽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말인가요? 말씀 해주세요?”

어느새 덕배선사까지 다가와 듣고 있었다.

동천몽이 말했다.

“어렵지 않느니라. 악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악인을 모두 죽이면 되느니라.”

“으헉!”

덕배선사가 소스라쳤다.

동천몽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악은 용서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 모조리 찾아 제거하는 것만이 악을 줄이고 선을 쌓는 일이니라. 알겠느냐?”

자정경의 표정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동천몽의 말에서 가혹한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보고 느낀 동천몽은 무척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강호의 사건에 휘말리면서 사람들은 동천몽을 갈수록 잔인하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동천비를 비롯한 형제들과 백쾌섬 남궁천과 상관량등이었다. 동천몽은 더 이상 자비를 외면할 생각을 굳힌 것 같았다.

“덕배.”

“하명 하소서.”

“그를 죽였느냐?”

“그라면?”

동천몽이 돌아보았다.

“그 미친놈 말이다. 동천완?”

덕배선사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손으로 죽여라고 했지만 아랫 사람에게 떠넘겼다. 그리고 확인결과 끝내 누구도 동천완을 죽였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덕배선사는 설마 동천몽이 확인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당황했다.

“그…그것이.”

“데려와라. 사흘 이내로 내 앞에 끌고 오너라.”

동천몽은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예!”

덕배선사가 돌아섰다.

신속히 부하 다섯을 불어 동천몽의 명령을 하달했고 세 명의 승려가 초상비를 펼치며 장강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파도가 밀려왔다.

물론 큰 파도는 아니었고 조그만 물살에 가까웠다. 그러나 물을 조금만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물살은 멀리서 밀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시 말 해 전방 어딘가에 거대한 물결이 생겼고 파장이 밀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파앗!

그런데 물결을 보던 동천몽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멈춰라!”

동천몽이 손을 들어 배를 세울 것을 지시했고 배는 금방 전진을 멈췄다.

“나무 토막 한 개를 가져오도록.”

덕배선사가 신속히 나무토막 한 개를 가져왔다.

휙!

동천몽이 나무토막을 물위에 던졌다. 물위로 떨어진 나무토막은 물살에 흔들거리며 떴다.

부웅!

동천몽의 몸이 솟구쳤다. 깃털처럼 천천히 나무 토막 위로 날아 내렸고 지켜보던 덕배선사를 비롯한 사람들의 눈이 빛났다. 무공이 어느 경지를 넘어서면 물위에 뜬 나무토막 위에쯤은 누구든지 날아 내릴 수 있다. 문제는 나무토막의 상태였다. 무거운 사람의 체중이 올라가 있는데도 잠기거나 하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나무토막의 움직임에 맞춰 동천몽의 몸이 흔들린 다는 것이었다.

꽃잎에 앉은 나비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모든 중심을 나무토막에 맞췄다는 것이었고 나무토막에는 어떤 무게도 전혀 실리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

“……”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처음보는 기예에 그저 충격을 받은 얼굴만 짓고 있었다.

“천천히 따라 오도록.”

배가 앞서면 물결이 사라질 것을 염려하여 뒤 따라 오도록 조치를 한 것이었다.

동천몽은 흔들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무토막은 밀려오는 물살에 뒤로 나가려 했지만 동천몽은 조금씩 발에 힘을 주어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촤아아!

배는 나무토막과 십여 장의 거리를 두고 따랐다.

물결은 조금씩 두꺼워졌다. 누구라도 물결이 밀려오고 있음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파장이 최초 생긴 중심지점에 가까워 오고 있다는 것을 반증했고 한 시진쯤 더 나아가던 동천몽이 멈춰섰다.

파르르르!

한 지점에서 물살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수면아래로부터 기포가 생기며 계속 파장이 생성되고 있었다. 그때 다른 나무 조각을 타고 다가온 덕배선사와 일목 자정경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현상이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내분파기(內分波氣)라는 것이니라.”

세 사람 모두 뜻을 알지 못하겠다는 듯 쳐다보았고 동천몽의 설명은 계속 되었다.

“물 위에서 강한 고수들이 싸우면 내력의 충돌로 엄청난 파도가 생기느니라. 이때 내력의 일부가 물속을 뚫고 들어가게 된다. 물속으로 들어간 내기는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물 밖으로 뿜어 나오지.”

“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봐왔던 물결은 그렇게 뿜어나온 내기가 만들어 낸 것이란 말이옵니까?”

동천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자정경이 물었다.

“도대체 얼마나 강한 내력의 고수들이 싸워야 충돌에 튕겨나온 기가 물속으로 잠긴단 말인가요?”

일반적으로 내기가 충돌하면 강한 폭풍이 발생하며 대부분 얼마 지나지 않아 공기 중으로 소멸되고 만다. 더구나 물이라는 벽을 뚫고 잠긴 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세 사람은 한 가지 사실만을 확실히 깨우쳤다. 물속으로 내력이 파고 들 만큼 사대법왕의 내력이 강했다는 뜻이었는데 덕배선사의 표정이 다소 굳어졌다.

사대법왕은 자신과 동문들이다. 연륜 또한 엇비슷했다. 특히 한 번도 그들을 자신의 위에 두지 않았는데 여러 징후가 최소한 위는 못되어도 하수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밀종대수인을 완성한 이후 말을 하지 않았지만 대법왕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자신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고 자부했는데 오늘 동천몽의 설명을 듣고보니 약간의 오만이 있었음을 느꼈다.

그리고 또 하나 가슴을 짓누르는 것은 동천비의 능력이었다. 그토록 강한 사대법왕을 죽인 그의 능력이 도무지 계산이 되지 않았다.

동천몽이 사방을 두리번 거렸다. 곳곳에서 온천물처럼 수중에서 하얀 거품이 올라왔다. 그건 이곳에서 사대법왕과 동천비가 격돌을 벌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덕배, 당장 천룡구십구불을 동원해 인근을 수색하라.”

“존명!”

덕배선사가 멀리 떠 있는 배를 향해 날아갔고 일목 또한 사라졌다. 동천몽 곁에는 자정경만 떠 있었는데 조금씩 나무토막이 물속으로 잠겨 들고 있었다. 무릎까지 올라온 가죽 장화를 신은 까닭에 괜찮았지만 치맛자락이 물에 젖고 있었다.

내력으로 몸을 띄우는 부운등공도 한계에 온 것이다. 그대로 두면 물에 빠지거나 아니면 배로 날아가야 한다. 하지만 자정경은 이를 악물며 떠나지 않았고 몸은 느리게 빠져들고 있었다. 동천몽은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위만 연신 살피고 있었다.

“사…사부님.”

동천몽이 돌아보았다.

장화 끄트머리까지 물에 잠겼다. 조금만 지나면 장화 속으로 물이 찰 판이었다.

동천몽이 이마를 찌푸렸다.

“빨리 배로 돌아가지 않고 뭐하느냐?”

“싫어요.”

“싫다니? 그런 날 더러 어찌하란 말이냐?”

“씨이!”

휙!

동천몽의 말도 듣지 않고 그대로 나무토막에서 몸을 날려 동천몽 곁으로 날아내렸다.

갑자기 한 사람의 무게가 더해지자 나무토막이 잠겨 들었다. 그러나 곧바로 동천몽이 내력을 운기하여 나무토막을 띄우며 자정경을 노려보았다.

“네 이놈 뭐하는 짓이냐?”

자정경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제자가 빠져 죽어도 좋겠어요. 다른 사부님들은 그런 상황이면 서둘러 내게로 오너라 하고 말씀하신다는데?”

“누가?”

“다른 사부님들요.”

“그러니까 다른 사부님들 누구?”

자정경이 매섭게 소리쳤다.

“아무튼요.”

두 사람이 나무토막에 서 있기 위해서는 몸을 바짝 붙여야 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서로 얼굴이 맞닿을 만큼 바짝 붙어 서 있었는데 자정경의 머리에서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더구나 자정경은 나무토막이 좁다는 핑계로 가슴을 더욱 파고들려고 했고 그러다보니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자정경의 속셈을 읽은 동천몽이 한숨을 쉬었다.

가만있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른다. 동천몽은 그대로 몸을 뽑아 올려 좌측 강변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동천몽이 떠나자 자정경은 대번에 물에 빠졌고 소리쳤다.

“사…사부님, 어딜가는 거예요?”

촥!

잽싸게 몸을 뽑아 올려 동천몽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나 이미 내력소모가 컸고 삼십여 장을 날지 못하고 물 위에서 비틀거렸다. 더 이상 초상비를 펼칠 내력이 되지 않았다.

첨벙!

어푸!

“사아아…부님.”

아무리 무공이 높아도 내력이 소모되면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자정경은 완전히 물속에 빠졌고 목만 내놓고 양손을 허우적거리며 외쳤다.

“어푸! 사부니님, 사부님.”

그러나 동천몽은 돌아보지도 않고 강변 갈대숲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쏙!

급기야 자정경의 머리가 물속으로 잠겼다가 다시 솟구쳤다.

“어푸으왁!”

물을 마시면서 계속 허우적거렸는데 금방이라도 빠져 숨질 것 같았다.

“제…제자 수영 못해요. 살려주세요.”

쏙!

또다시 그녀가 물속에 잠겼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오래 시간이 걸렸고 물 위로 고개를 내민 그녀의 안색이 파랗게 변해가고 있었다.

“으…으엑!, 어버버버.”

그때였다. 그녀의 몸이 자석에 끌리듯 위로 뽑혀 올라갔다. 허공으로 올라간 그녀의 몸에서 물이 마구 쏟아졌다.

촤아!

그녀는 그렇게 어디론가 끌려갔는데 방향이 동천몽이 사라진 곳이었다.

완전히 물에 흠뻑 젖어 끌려가는 자정경의 눈은 다시 공포에 빠졌다. 아무도 보이는 사람은 없는데 자신의 몸이 끌려가자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허공섭물이라는 것이 있어서 가벼운 물건 정도는 누구든지 끌어당기거나 날릴 수 있고 무공이 신의 경지에 이르면 사람정도, 그러나 십여 장 가량 움직일 수 있지만 이렇게 간단히 끌고 갈수 있다는 건 듣도 보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팟!

그녀의 눈이 커졌다.

장강 어딘가에 가면 지나가는 배를 끌어당기는 괴이한 곳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름하여 오강와흡지대(烏江渦吸地帶).

반년 전에도 일백 명을 싣고 가던 거대한 범선이 갑자기 오강 상류에서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다. 아무리 봐도 그곳이 분명했고 사람을 이렇게 가볍게 끌고 갈 정도면 오강와흡지대였다. 마침내 자신 또한 끌려 들어가 죽는다고 생각 할 때 눈 앞으로 갈대숲이 나타났다. 오강와흡지대는 강 중앙이라고 했는데 자신은 강가로 끌여온 것이다. 그제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했고 두리번거릴 때 저 만치 한척의 낡은 배가 있고 그 위에 동천몽이 뭔가를 살피고 있었다.

꽈당!

그런데 자신의 몸이 사정없이 배위로 내동댕이쳐졌다.

“아악!”

패대기 치 듯 바닥에 나동그라졌으므로 무척 아팠다.

벌떡!

그녀는 몸을 일으켜 주위를 다시 한번 휘돌아보았다. 아무리 봐도 사람이라고는 동천몽 뿐이었다.

자정경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결국 자신을 가공할 흡인력으로 끌어 온 사람은 동천몽이라는 뜻인데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은 어디에서도 자신을 끌어당긴 자세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사람 한명을 끌어 당길 정도면, 더구나 그토록 먼 거리를 이동시킬 정도면 제대로 자세를 잡고 온갖 인상을 쓰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녀의 눈은 커졌다.

아무런 자세나 동작을 취하지 않고서 백여 장이 넘는 거리를 끌어낸 동천몽의 능력이란 혀를 내두르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놀라운 일이었다.

“사…”

사부님 감사해요 하며 말을 하려는데 동천몽이 손을 들었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으므로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동천몽은 배를 살피고 있었는데 전형적인 낚시배였다. 그런데 배 안에 낚시대와 도구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얼마 전까지 낚시꾼이 배를 띄웠다는 의미였다.

‘피!’

그녀의 시선이 배 한쪽에 말라 있는 피에 멎었다.

“무슨 피죠? 물고기의 몸에서 나온 것이겠죠?”

동천몽이 쭈그리고 앉아 피를 살폈다. 한참을 살피던 동천몽이 한쪽에 있는 낚시대를 주워 들었다.

스윽!

낚시대는 오죽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오죽은 일반대보다 훨씬 질기면서 탄력이 좋고 불에도 강하다. 그래서 낚시광들은 오죽으로 된 낚시대를 선호한다. 특히 강호인들 중 낚시대를 애병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동정어은이었다. 그는 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다는 소문이 돌만큼 능숙했다.

멈칫!

낚시줄을 따라 가던 동천몽의 눈이 빛났다.

거기에는 낚시 바늘 대신 손가락 굵기의 커다란 무쇠로 만들어진 갈고리가 달려 있다.

“무슨 낚시 바늘이 저래요. 무슨 용이라도 잡으려 했나?”

탁!

동천몽이 갈고리를 살피더니 중얼거렸다.

“애초부터 사대법왕을 잡기 위해 준비를 철저히 했군.”

자정경이 놀라며 물었다.

“자세히 말씀 좀 해주세요. 무슨 말이죠?”

동천몽이 쏘아보았다. 말 시키지 말라는 의미였으므로 자정경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동천비는 사대법왕이 자신을 쫓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것은 바로 낚시바늘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무공이 강한 고수가 용 아니라 용보다 더 큰 괴물을 잡는다고 해도 갈고리 바늘 따위는 사용하지 않는다. 어차피 물고기를 잡는데는 바늘이지만 끌어 올리는데는 철저한 내공이기 때문이다.

동천비는 사대법왕이 가장 취약점을 갖고 있는 환경을 생각하다 물을 선택했다. 다시 말해 사대법왕을 사로잡기 위해 나름대로 치밀한 준비를 했고 사대법왕은 대처를 못했다는 차이가 승패를 갈랐다. 강하기도 했지만 준비에서 앞선 것이었다.

사대법왕을 물리친 동천비는 큰 부상을 입었는데 그 증거는 바로 뱃전에 묻은 피였다. 그는 한 달음에 장강을 건너지 못할 만큼 중상을 입고 힘들게 배로 올라와 피를 토하며 일차적으로 이곳에서 몸을 다스렸다.

파팟!

동천몽의 눈이 더욱 타올랐다.

뭔가 확신을 잡은 듯 했다. 그때 덕배선사가 날아와 배 위로 내렸다.

“이걸 보소서.”

덕배선사의 손에 옷가지 몇 개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사대법왕이 걸치고 있던 가사였고 또 하나는 속의였는데 길게 한 자 가까이 될 만큼의 크기였다.

슥!

동천몽이 흑의 조각을 주워들었다.

“앞가슴 옷자락이로군.”

이리저리 살피던 동천몽이 덕배선사에게 말했다.

“근처 오십 리 이내를 철저히 수색해라. 단 수상한 인물을 발견하면 절대 시비를 붙지 말고 본왕에게 연락을 해라.”

“명을 받사옵니다.”

덕배선사가 다시 날아가 사라졌고 동천몽이 갈대 밭 너머 둑으로 내려섰다. 자정경이 뒤를 따라 내렸다.

자정경이 동천몽을 쳐다보았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또다시 면박을 당할까봐 자제하고 있었다. 물에 빠져 걸치고 있던 흑의가 몸에 착 달라붙어 자정경은 더욱 요염했다.

동천몽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동천비는 아주 깊은 중상을 입었다.”

자정경이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까지 한 번도 동천비라는 평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동천비라고 가차없이 말하고 있었다. 그건 곧 이미 동천비 처리에 관해 나름대로 어떤 결정을 내렸다는 뜻이었고 죽음도 그냥 내릴 것 같지 않는 가혹한 비극을 예상할 수 있었다.

“워낙 상처가 깊어 사흘이 지났지만 아직 몸은 정상으로 회복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십 리 이내에 있다는 것이 내 판단이니라.”

동천몽이 다시 갈대 숲 사이로 보이는 낚시배를 쳐다보았다. 자신이라면 어떤 길을 택해 안전한 곳으로 도피했을까를 생각해 보려는 것이었다.

상처를 입은 대호는 나약한 토끼나 여우보다 더 철두철미하게 천적을 피하려는 본능을 갖고 있다. 강하기 때문에 더욱더 적에게 짓밟힐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움직임이 조심스럽고 경계가 철저하다.

일단 물 밖으로 나왔을 것이고 가장 먼저 가고 싶은 곳은 사람 눈에 띄지 않은 곳일 것이다. 대호가 숨길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은 숲이 우거진 곳이다. 숲이란 대호의 몸을 가려주는 가장 훌륭한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화다닥!

들려오는 소리에 동천몽이 고개를 돌렸는데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정경이 젖은 옷을 벗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주위에 다른 사람은 없었지만 그녀의 행동은 거리낌이 없었다. 속옷만 남기고 완전히 옷을 벗은 그녀가 볕에 젖은 흑의를 펼쳐 놓았다.

“무엇 하는 짓이냐?”

“보면 몰라요. 옷 말리고 있잖아요. 젖은 옷을 걸치고 있으니 춥잖아요.”

사실 젖은 옷을 걸치고 있으면 한 여름이라도 한기를 느낄 때가 있다. 한겨울에도 젖은 옷을 입고 있는 것보다는 벗는 것이 잠시 체온을 느리게 떨어뜨리는 효과를 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조금만 참으면 될 것을, 그것도 툭 트인 강가에서 물이 오를대로 오른 여인이 옷을 벗고 있는 모습을 보기 좋지 않았다. 물론 다른 사람들 눈에는 미치도록 좋은 그림이겠지만.

“입거라.”

“춥다니까요? 벗고 있는 제자의 모습이 싫으시면 가사자락을 벗어 주세요.”

동천몽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걸치고 있는 황금가사는 단순한 승복이 아니었다. 대법왕임을 알리는 신분으로 금려상불의(金麗象佛衣)였다. 찢어지지도 않을 뿐 아니라 수화가 불침하고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냉기가 뚫지 못하고 여름에는 화기가 뚫지 못한다. 단순히 걸치고 있는 옷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제자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덥썩 벗어 줄 의복이 못된다.

그녀가 어깨를 떨었다. 탐스런 가슴이 물결처럼 일렁거렸고 넘어가는 석양을 정면으로 받은 하반신이 붉게 타올랐다. 집안이 아닌 밖에서 드러난 그녀의 몸은 짐승적인 욕구를 불러 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뜨거운 유혹이었다.

동천몽이 벗어놓은 그녀의 의복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그러자 강한 열기가 뻗어가더니 의복에서 수증기가 피어 올랐고 순식간에 빳빳하게 말랐다.

“입거라.”

휙!

옷을 던져 주었다.

옷을 받아 든 자정경의 눈이 커졌다. 젖은 옷이 바싹바싹 말라 있었다. 분명 삼매진화와 비슷한 극양의 장력으로 옷을 말렸을 것이었다.

“흥!”

콧웃음을 치며 자정경이 의복을 걸쳐 입었다.

“너 돌아가있거라.”

오른 팔을 끼워 넣던 자정경이 동작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돌아가라뇨?”

“귀궁하는 제자들과 같이 서장으로 돌아가라는 얘기니라.”

지금 포달랍궁의 무사들은 일부만을 제외하고 전부 서장으로 환궁 중에 있었다. 어차피 전쟁은 장기전이 될 것이었고 그래서 중원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제…제자더러 돌아가라구요?”

“당장 가거라. 부지런히 가면 따라 잡을 수 있을 것이니라.”

자정경의 얼굴이 표독해졌다.

“사부님이 되면 제자의 사생활까지 간섭하는 건가요?”

멈칫!

동천몽이 놀란 눈을 했다.

자정경이 다부지게 말했다.

“무예를 가르치고 안 가르치고는 사부님 마음이겠지만 집에 가고 안 가고는 제자의 마음이에요. 그러니 가라마라 명령하지 마세요. 갈 때 되면 제자가 알아서 갈 거에요.”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도발적이고 무엄하리만치 냉정한 말투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자정경이 팔을 끼우고 옷차림을 대충 차린 후 말했다.

“죄송하지만 사부님 곁에 있을 거예요. 물론 이 제자가 꼴보기 싫다면 사제의 연을 끊으셔도 되요. 그렇게 되도 소녀는 떠나지 않을 거에요. 왜냐하면 내 맘이니까요.”

동천몽이 더욱 눈을 크게 뜨고 보다가 이내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했는데 자정경은 이제 막 나가고 있었다. 완전히 기분이 상해 사부의 말 따위는 더 이상 먹혀들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 자신 맘대로 하겠다는 것인데 필시 아주 괴롭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