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56화 (56/71)

제2장 사대법왕

천장법왕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절정 고수라면 웃음으로 나무를 흔들리게 하고 사람에게 내상을 입힐 수는 있다. 그러나 거대한 장강을 움직여 파도를 더욱 세차게 만들 정도라면 상상을 초월한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스윽!

동천비가 삿갓을 벗었다.

햇빛에 드러난 외모는 소문대로 준수하기 이를 데 없고 눈에서 쏟아지는 검은 기운은 그가 이미 극성의 마공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반증 하고 있었다.

휙!

동천비가 삿갓을 집어 던졌다.

삿갓은 바람에 날려 장강의 물 위로 떨어져 출렁대었다.

“오라. 사대법왕, 그대들의 시신을 녀석에게 보내 내 강함을 알리겠다.”

천장금왕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예상보다 더욱 강하네. 목숨을 걸어야 겠네’

나머지 사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 따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너무 자연스런 행동에 천장금왕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미 삶과 죽음에 초월하지 않고서는 보여줄 수 없는 사제들의 넉넉한 행동들이었다.

쏴아!

천장금왕이 앞장 섰다.

쿠와아!

오른손이 부드럽게 뻗어나갔다. 손은 부드럽게 뻗어나갔지만 그 손에서 뻗어나온 장력은 부드럽지 않았다.

흠칫!

동천비의 눈이 좁혀졌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과 겨루어봤다. 더구나 자신은 의심사 사건으로 인해 이미 마신의 경지에 올라 있다. 다시 말해 천하에 자신이 두려워 할 인물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천장금왕의 장력에 숨이 막혔다.

‘이…이건!’

장력은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다. 단지 장력이 뻗어내고 있는 기세만으로도 천장금왕의 능력이 가늠되었다.

푸아아!

콰아아!

연달아 세 명의 법왕이 달려들었다.

전후좌우 네 방향에서 태산이 밀려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온 몸이 쪼그라들다 폭발할 것 같은 압력이 밀려왔다. 팔성의 내력이면 충분하리라 했는데 동천비는 십성으로 올렸다. 그러자 조금 숨통이 트였지만 생각보다 여유롭지는 않았다.

콰아아아!

동천몽이 그 자리에서 회전했다.

팽이처럼 돌며 네 곳에서 몰려드는 장력을 연달아 쳐낸 것이다.

꽝--꽈꽈꽝!

파아아아!

거대한 굉음과 충돌에서 발생한 반탄강기에 낚시배를 중심으로 거대한 파도가 만들어졌다. 그것은 산이었고 세상을 삼킬 듯 커졌는데 슈우우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천장금왕이 양측 사이에 만들어진 파도를 뚫고 들어갔다.

뒤이어 나머지 세 사람 또한 파도의 산을 뚫고 들어갔다.

거대한 파도의 산을 뚫고 들어온 네 사람을 발견한 동천비가 또다시 충격적인 표정을 지었다.

반탄강기로 생겨난 파도는 위험했다. 쏠렸다면 시신도 찾기 어려울 만큼 강하고 거칠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뚫고 들어온 것이었다.

슈욱!

천장금왕의 손이 대각선으로 그어졌다.

마치 쇠몽둥이가 후려치는 압력이었고 나머지 세 사람은 각자의 무공을 토해 놓았다.

동천비의 얼굴이 진중해졌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가는 마신지체의 몸이지만 당할 수도 있다는 위기를 느낀 것이었다.

쿠와와!

동천몽의 신형이 떠올랐다. 그러자 네 사람의 공격 또한 따라 치솟는다.

파파파팍!

묵곤혈참기의 내력이 양발로 들어갔고 거센 발길질이 함께 따라 치솟는 네 개의 장력을 후려찼다. 같은 무공이라면 발은 주먹에 비해 두 배의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 강호의 정설이었다. 그러나 손과 차이점이라면 순발력과 임기응변에 뒤진다.

동천비의 발길질에 네 사람의 장력은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그러자 동천몽의 몸이 거꾸로 쳐박히며 쌍장을 날렸다.

쿠우우우!

가공할 장강이었다. 적지 않게 장강을 보았지만 동천비에게서 뿜어나오는 무시무시한 위력은 처음이었으므로 네 사람의 눈이 더욱 커졌다.

‘아미타불!’

천장금왕은 자신도 모르게 불호를 중얼거렸다.

미소가 사라졌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쏴아아!

파라라!

네 사람 또한 강(?)으로 맞섰다.

콰아앙!

동천몽의 공격에 비해 네 사람의 공격은 서두른 감이 있었다. 각법에 이은 장공은 장공에 이은 장공 때 보다 반 호흡 빠를 수밖에 없고 이쪽의 방어 또한 그로 인해 신속해져야 한다. 그러다보니 완전히 내력을 실지 못했다. 하지만 충분히 상대를 깨뜨릴 수 있는 위력인데 상대가 마신지체여서 인지 동천몽의 장강에 부딪히자 산산히 부숴진다.

파아아아!

“욱!”

“음!”

두 가닥 신음이 흘러나왔다.

바늘 끝 만 한 차이지만 워낙 상대가 높다보니 우열이 드러난 것이었다.

싸움이란 한번 타격을 입으면 회복이 쉽지 않다. 상대가 기다려주면 모를까 그럴리는 없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타격을 입으면 그만큼 내력이 떨어진다.

출렁!

천권동왕과 천지철왕의 발이 물에 잠겼다.

사실 지면이라면 내력은 온전히 싸우는데 쏟겠지만 물 위기 때문에 내력은 신법과 공격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지니고 있는 내력의 전부를 쏟아내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충돌로 그 차이가 드러났다.

류--리리릭!

동천비가 먼저 움직였다.

당연히 이쪽이 흔들리자 먼저 나선 것이었다.

손가락 네 개가 펴졌는데 허공에 네 개의 사강(絲?)이 생겼다. 네 번을 뿜어내지 않고 한 개의 장강을 네 개로 분리시킨 고도의 수법이다.

장력은 나누면 약해지지만 강은 다르다.

강을 이루었다고 해서 모두 나누는 건 아니다. 강에도 위력의 차이가 있고 극강에 올라야 분강이 되는 것이다. 동천비의 손짓에 네 개의 강이 네 사람을 파고든다.

예리한 창날 네 개가 파고드는 것 같았다.

네 사람은 지체하지 않았다. 사실 사대법왕은 아직 분강의 경지에 올라 있지 않았다.

쾅!

콰콰콰!

네 번을 쳐내는 것과 달리 분강은 한 번에 방어와 공격이 가능하기 때문에 체력소모에서도 유리하다. 동천비가 분강을 시전한 것은 싸움을 장기전으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퍽!

콰아아!

다섯 사람은 본격적으로 어우러졌다.

물 위에서 싸우는 그들의 모습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다. 엄청난 물결이 하늘을 메웠는데 마치 장강이 거꾸로 엎어진 듯 엄청났다. 멀리서 강가에 사는 어부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천장금왕의 입술이 물렸다. 동천비는 이미 자신이 사대법왕 중 우두머리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 했다. 사실 겉으로는 각자 독단적으로 공격 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천장금왕이 중심이 되어 포달랍궁의 절기중 하나인 사망율포진을 펼치고 있었다. 모든 진이 그러하듯 사망율포진 또한 상대의 공격을 흡수하는 탄력적인 기세를 갖고 있어 동천비의 무공은 원래 갖고 있는 것보다 훨씬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동천비는 그 이유가 진법 때문이고 천장금왕이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갈고리 모양으로 날아오는 동천비의 오른손을 힘껏 후려쳤다.

빡!

피해야 했지만 자신이 몸을 빼내면 진법이 흔들린다. 그래서 위험을 각오하고 후려친 것이다.

“흑!”

예상대로 숨이 턱 막혔고 목구멍을 밀고 오는 뜨거운 기운은 필시 피다. 진의 주축 되는 주진축(主陣築)인 자신이 휘청거리자 순간적으로 벽이 흔들렸다. 사망율포진이 만든 강한 벽에 의해 동천비의 공격이 도달할 때는 발출 될 때보다 삼할 이상 깎여 있었다. 그런데 진이 흔들리자 동천비는 더욱 확신을 한 듯 천장금왕을 노리며 거센 공격을 퍼부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달려 올 수는 없다. 물론 달려와 손을 보태주면 천장금왕은 훨씬 간편하겠지만 진이 깨진다. 진이 깨지면 넷 모두 위험에 빠질 만큼 동천비의 마공은 완벽했다.

따악!

두 사람의 손바닥이 부딪혔다.

악문 이빨을 비집고 신음이 나왔다. 손목이 팔꿈치 안으로 밀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신속히 왼손을 뻗었는데 팔꿈치 까지 노랗게 물들었다. 포달랍궁의 으뜸인 금광불기이다. 역사상 금광불기를 가장 완전하게 익힌 사람은 죽은 만경선사다. 그 만큼은 되지 않아도 버금간다고 자부하는데 믿을 수 없게도 묵곤혈참기에는 맥을 추지 못했다. 원래는 아껴두었다가 기회가 생기면 필살의 수로 사용하려고 했다. 그런데 동천비의 능력이 상상을 초월하자 부랴부랴 펼쳐들었는데도 그다지 효능은 보이지 않았다.

원래 불가의 정공은 마공에 강한 위력을 보인다. 일테면 천적의 현상과 비슷한데 마신지체에게는 그마저 통하지 않은 것이다.

빠바박!

동천비의 오른손은 파상적으로 천장금왕에게 쏟아졌고 왼손은 나머지 세 사람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벅차다.’

천장금왕은 강함을 인정했다. 자신의 힘으로는 육십초까지가 한계라고 생각했다.

“크우욱!”

그냥 나오는 신음 감추지 않기로 했다.

“흐흐! 대단하구나. 십이성의 묵곤혈참기 아래서 오십팔초를 버티다니.”

동천비가 감탄했다. 사실 현재 동천비의 무공이라면 천하에 그 적수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리 진법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고 하지만 오십팔초를 버텼다는 것은 천장금왕의 무공이 그만큼 가공하다는 뜻이었다.

‘이 자를 막을 자는 천하에 대법왕님 말고는 없겠구나.’

동천비의 무공은 천하제일에 가까웠다.

동천비의 오른손이 연거푸 세 번을 쳐냈다. 일장과 마지막 삼장까지 걸린 속도가 번개였다. 누가보면 일초의 장법을 펼친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파아아!

천장금왕 역시 물러서지 않고 정면으로 받았다.

꽈가가강!

두 사람의 장력이 충돌하면서 엄청난 굉음이 울렸고 산더미같은 파도가 생성이 되면서 시야에 서로가 사라졌다. 천장금왕은 뒤로 튕겨나갔고 그 바람에 진법은 깨졌다. 진기를 채 끌어 올리지 못해 무릎까지 강물 속으로 빠져 있는데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엄청난 크기의 파도가 좌우로 쩌억 갈라지더니 그 속에서 동천비가 쏘아나왔다.

한 마리 거대한 호경(虎鯨)이 덮쳐오는 듯 했다.

무릎까지 물속에 잠겼다. 그것은 천장금왕의 신속한 움직임을 붙잡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천하에 그 누구도 무릎까지 물에 잠긴 상태에서 뜻대로 원할한 움직임을 가질 수는 없다.

몸을 뽑아 올릴 틈이 없었으므로 그 상태에서 쌍장을 뿌렸다.

콰앙!

“크웍!”

피를 토했고 강물이 벌겋게 물들었다. 뒤로 밀려난 천장금왕은 허리까지 잠겼다.

나머지 세 사람이 필사의 각오를 다지며 동천비를 덮쳤지만 그의 왼손이 뻗어낸 묵곤혈참기에 튕겨나간다.

“흐흐흐! 멋있다. 이건 내 진심이다.”

동천비의 오른손이 대각선으로 뻗어 내렸다. 자신의 위에 떠 있고 천장금왕은 물속에 반쯤 잠겨 있기 때문이었다.

뭐든지 위에서 내려가는 것이 쉽다. 반대로 밑에서 위로 올리는 건 내리는 것 보다는 어렵다.

퍼어어!

천장금왕의 모습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사…사형.”

“금왕님.”

세 사람이 다급히 외쳤다.

“포달랍궁의 문훈이 살아도 같이 죽어도 같이라고?”

콰아아!

쌍장을 좌우로 쳐냈다. 진은 깨졌고 장시간 결투로 인해 지쳤다. 그러나 동천비는 전혀 지치지 않은 듯 처음과 전혀 다름이 없는 위력의 묵곤혈참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괴…괴물이다.’

‘아…아미타불!’

절망이 느껴진다.

파파팍!

물위로 튕겨 밀려가는 천장금왕을 향해 동천비의 오른손이 매정하게 찍어 내려갔다.

팍!

빡!

찍고 받았는데 천장금왕의 모습 또한 물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출렁거리는 파도 위에 세 사람이 흔들거리며 서 있었다. 천권동왕과 천지철왕의 옷은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흐흐흐! 놈은 지금 어디 있느냐?”

동천몽의 행방을 묻는 것이었다.

천지철왕이 웃었다.

“아미타불! 대법왕님은 구름 같은 분이시오. 천리 밖에 계서도 이곳을 보고 계시오.”

“크크큿! 지놈이 찾아올 일이지 아랫것들을 시키다니.”

“대법왕님께서는 우리더러 싸우라 하지 않았소. 단지 행방만 잘 지켜보라고 했지요. 그대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서 말이오. 그러나 우린 나섰소. 그 이유를 알고 싶지 않소?”

동천비가 이마를 찡그렸다.

천지철왕이 말했다.

“그분은 지나칠 만큼 다정다감한 분이오. 겉은 한 없이 거칠고 투박하며 차가워 보이지만 속에는 불덩이를 끌어 안고 계시지. 그대를 만나면 간단히 죽일 것이 뻔하오. 우린 그래서 나섰소. 대법왕님 손으로는 절대 그대를 찢어죽이지 못할 것 같았기에.”

자신을 찢어 죽이기 위해 싸운다는 말에 동천비가 눈살을 더욱 찌푸렸다.

“난 너희들과 아무런 은원이 없다. 있다면 그놈 뿐.”

“아미타불! 세존께서는 악을 외면하는 것 또한 씻지 못 할 죄업이라고 했소. 모친을 겁탈한 그대의 죄는 천 번을 죽어도 부족하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었더라도.”

“그래서 날 찢어죽이겠다는 것인가? 좋아. 어디 찢어 죽여 보도록.”

동천비가 날아왔다.

쏴악!

바람이 불어왔다. 두 사람은 좌우로 갈라서며 합공을 취했다.

파아아!

동천비가 뒤로 후퇴를 했다가 두 사람의 장력이 교차하는 지점에 대고 우장을 뻗었다.

뻐엉!

세 사람의 장력이 동시에 부딪혔고 두 사람은 힘에 밀렸다. 그때를 노리고 동천비의 좌장이 뻗어갔다. 단순한 장법인데도 두 사람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채 몸의 감각과 내력을 완전히 추스르기 전에 또다시 검은 장강이 밀려들었다.

쾅쾅!

강이 아우성을 쳤다.

두 사람의 옷은 젖었고 허리까지 빠졌지만 동천비 흑의에는 물방울 하나 묻지 않았다.

하늘과 땅 차이다. 포달랍궁의 사대법왕이 절망을 느낄 정도로 동천비의 마공은 이미 초월해 있었다.

“가라!”

오싹한 살성이었다.

마공이 극에 이르면 목소리 자체만으로도 살인을 한다고 했는데 온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빡!

뻐억!

두 사람의 장력을 깨뜨리며 동천몽의 묵장이 가슴을 때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통은 의외로 작았다. 대신 가슴 속이 무척 차가웠다. 얼음덩이를 막 씹어 삼킨 듯 얼얼했는데 두 사람의 눈이 부릅떠졌다.

온 몸이 조금씩 마비가 되고 있었다.

마공은 음기가 강하다. 동천비의 마공이 워낙 극성에 이르렀기 때문에 얼어 버리는 것이었다.

마비는 사지부터 시작해 심장쪽으로 몰려왔다. 몸이 마비가 되면서 서서히 강물 속으로 잠겨 들었고 두 사람은 나란히 목만 내놓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죽음이 두렵거나 공포를 느껴 굳은 것이 아니었다. 워낙 동천비가 강했기에 미래가 염려된 탓이었다.

‘송구하옵니다. 대법왕님, 소승들은 이만 가옵니다’

스르르!

두 사람의 목이 물에 잠겼다.

동천비가 주위를 한번 휘둘러보더니 웩 하는 소리와 더불어 피를 토해내었다. 스스로 마신지체가 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네 사람과 격투를 벌이며 중상을 입은 것이다. 마신지체가 별 볼일 없는 것이 아니라 사대법왕의 무공이 그만큼 강했다는 반증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과연 동천몽이라면 사대법왕과 겨루어 어떤 결과를 낳을까 였다.

선뜻 어떤 계산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결코 자신과 같은 이런 결과는 아닐 것이다. 자신은 마신지체인 반면 그는 단순한 불가의 승려일 뿐이었다.

촤아악!

물결이 흔들리면서 발목이 빠졌다. 기력이 급속이 끓고 있다는 뜻으로 빨리 뭍으로 나아가 운기조식을 취해야 했다. 동천비의 신형이 물위를 떠나 한 개의 점이 되어 사라졌다.

갑자기 사라졌다. 모든 정보망을 동원해 천하를 이잡듯 뒤지고 있지만 백쾌섬의 행방은 눈에 띄지 않았다. 심지어 검문산 제하궁에 사불각 승려가 목숨을 걸고 위장 잠입해 백쾌섬을 찾았지만 흔적은 없었다.

‘어디로 갔을까?’

동천몽의 이마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백쾌섬은 천하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각 성마다 목와북천의 분타를 세워 통치하도록 했으며 정도무림을 말살하는 보복전을 금지시켰다. 죽어야 할 수뇌들이 대부분 죽었기 때문에 쓸데 없는 살상이라는 것이었다. 하나 그가 서둘러 복수극을 가로막은 것은 민심이반이었다.

아무리 강한 집단도 민심을 얻지 못하면 오래가지 못한다.

사실 이번 싸움에서 목와북천이 강해 승리했다기 보다는 어딜 가든 호의적으로 자신들을 맞이해준 군소문파와 떠돌이 무사들, 그리고 일반 백성들의 힘이었다. 무림맹의 오만과 독선에 신물이 난 그들로서는 목와북천이야말로 유일한 대안 세력이었다.

“뭔가 못다 한 일을 이루기 위해 잠적한 것 아닐까요?”

자정경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자세히 말해보거라.”

“그동안 천하 패업을 위해 잠시 뒤로 미루고 있던 일 말예요. 예를 들자면 흑도대종사만이 익히는 가공할 무예가 있는데 사부님과 도망친 남궁천을 의식해 그것을 수련하러 떠났는지도 모르잖아요.”

동천몽이 눈을 좁혀 떴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한 시름 놓자 이제 일신을 단련하기 위해 잠적했을 수도 있었다. 사실 지금 백쾌섬의 무예가지고서는 남궁천은 물론 동천몽과의 정면승부는 힘들었다. 아무리 본인이 제 실력을 감추고 있었다고 해도 지난 시절 그와 같이 적지 않은 생활을 했던 동천몽으로서는 그를 적수로 여기고 있지 않았다. 일반 고수들에게는 강한 상대이겠지만 자신은 항상 그를 눈 아래로 두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백쾌섬은 절대 사부님의 적수가 못 되요. 물론 본인이 더 잘 알겠지만.”

동천몽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정경의 생각처럼 부족한 무공을 수련하기 위해 숨어 들었을 가능성 높았기 때문이었다.

“남궁천의 행방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더냐?”

화악!

자정경이 눈을 크게 떴다.

부릅든 자정경을 보며 동천몽이 놀라 물었다.

“왜 그러느냐? 뭔가 잘못되었느냐?”

“아…아니옵니다. 별것 아니니 신경쓰지 마옵소서. 그에 대한 정보 또한 아직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그러면서 자정경은 고개를 갸웃했다.

요즘 동천몽이 책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곧바로 오리무중이라는 말을 들이밀자 놀란 것이다. 사실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동천몽의 학문은 처참하리만큼 약했고 보잘 것 없었다. 대법왕이고 많은 중생들을 면담하고 어루만지려면 아는 것이 많아야 한다면서 몇 번 책 읽을 것을 종용했지만 책만 펼쳐들면 잠이 온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은 세상에서 책이 가장 싫다고 노골적으로 선언까지 해버렸다.

그런데 웬일인지 요즘 서재에 묻혀 있는 시간이 길었다.

몰래 슬쩍 엿봤는데 진짜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오리무중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반드시 찾아야 한다.”

남궁천은 불씨였다.

그것도 엄청난 불씨였다. 한 번 일어나면 누구도 막지 못할 만큼 강한 뿌리를 갖고 있었다.

동천몽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자정경이 물었다.

“어디 가시려구요?”

“어험, 책을 보려 한다. 책을 보기에는 아주 좋은 날씨로구나.”

근엄하게 몸을 돌리는 동천몽을 보며 자정경이 입을 삐쭉거렸다.

“제자 심심해요.”

“그럼 너도 책을 보거라. 책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아주 기뻐지느니라.”

“저와 놀아요.”

자정경이 어느새 앞을 막아섰다.

반짝이는 눈빛으로 동천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다 나았어요?”

동천몽이 무엇을 말하느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사부님 병 말이에요. 그것 다 나았느냔 말씀이에요.”

동천몽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예전과 달리 그다지 두렵다거나 걱정 되지는 않았다. 기능이 상실 되어서 그러는지 여자를 봐도 예전처럼 못된 상상을 하거나 어떤 욕망이 생기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점차 운명에 순응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 이제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네엣?”

“모든 것은 부처님의 뜻 아니겠느냐? 차라리 잘됐는지도 모른다. 만약 기능이 상실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난리가 나도 한바탕 크게 났을 것이니라.”

자신의 왕성한 욕망과 성격 등에 비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정경 만큼은 절대 가만 두지 않았을 것이 뻔했다.

“사부님 신경을 쓰지 않다뇨? 어떻게 사내로서 가장 중요한 능력을 잃었는데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요? 그건 아니죠? 절제하고 사용하지 않는 것과 기능이 버려져 사용 못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어요.”

자정경이 침을 튀기며 말했다.

“돈이 있어도 쓰지 않는 것과 없어서 못쓰는 것과 차이가 있듯이 말예요. 자칫 사고를 칠 것을 염려해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은 아주 비겁하고 잘못된 거에요. 기능을 갖추어야 백성들. 특히 젊은 제자들의 욕망을 이해하고 잘 다스려 줄 것 아닌가요?”

“그렇기 하지만.”

“살려야 해요. 겪어보지 않고 하는 말은 신뢰성과 진실이 결여되어 있을 위험이 다분해요. 동병상련이라고, 서로 같은 처지가 되어봐야 서로의 기분을 잘 이해한단 말에요.”

“그래서 사부의 기능을 기어코 살리겠다는 말이냐? 난 이대로가 좋은데.”

“안된다니까요?”

자정경이 버럭 소릴 질렀다.

핏대까지 올리며 쳐다보다 동천몽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살려야 해요? 욕망이 일어날 경우 주체 못할 것이 두려워 상실된 기능을 방치하겠다는 것은 아주 나빠요.”

“하…하지만.”

“아무튼 반드시 살리도록 해요.”

“아 글쎄 쓸데가 없다니까 그러느냐?”

“왜 쓸데 없어.”

자정경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왜 쓸데가 없느냐. 바로 면전에 있는 날 상대로 쓰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려다 얼른 입을 다문 것이다.

자신은 이미 동천몽을 사랑하고 있었다. 물론 눈치가 빠른 동천몽이니 그 마음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루어 질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더 상실된 기능을 내버려 두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 안될 일이었다. 지난 세월 오로지 동천몽 한 남자만 바라보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첫눈에 반했었다. 그래서 앞뒤 가리지 않았고 대법왕이 혼인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남녀간의 사랑은 하늘도 막지 못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는 자정경이다. 정히 안되면 아무도 몰래 사랑할 각오까지 했다.

즉 비밀 첩 생활도 마다하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물론 동천몽만 좋다면.

자신은 그렇게 생각 하고 있는데 동천몽이 기능 회복에 열정을 보이지 않자 화가 났고 안달이 난 것이었다.

자추동은 문짝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에 잠을 깼다. 무공을 전혀 모르는 아니지만 누가 다가오고 하는 미미한 기척까지 알아차릴 정도는 아니었다.

“누…누구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자추동이 잔뜩 경계한 눈으로 입수를 노려보았다. 어둠속에 누군가가 문설주에 기대어 서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콩닥거렸고 두려움이 일었으므로 주위를 살폈지만 마땅한 방어책이 될 만한 물건은 보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두 주먹을 비장하게 말 아 쥐고 맞설 태세로 물었다.

“어떻게 경계가 삼엄한 이곳을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번지수를 잘못 짚었소. 내가 외치기만 하면 엄청난 고수들이 떼거리로 몰려올 것이오.”

휘청!

비틀거리며 검은 인영이 다가왔다.

“가…가까이 오면 소리친다.”

그러나 흑의인영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말을 콧등으로 흘리는 듯 다가왔고 한 순간 자추동의 눈이 커졌다. 어깨까지 드리워진 긴 흑발과 불룩 솟아난 앞가슴은 틀림없는 딸이다.

“아…아버지.”

자정경이 한 소리 부르더니 그대로 침대 위로 엎어졌다.

“저…정경아.”

자추동이 놀라며 부축을 했다.

자정경의 입에서는 지독한 술냄새가 풍겼다.

“도…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냐? 무슨 술을 이렇게 떡이 되도록 먹었느냐?”

“아버지.”

자정경이 부친의 품을 더욱 파고들었다.

기억에 없는 행동을 하자 자추동의 눈이 떨렸다. 본능적으로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음을 직감 했다.

“개자식.”

자추동의 눈이 커졌다.

자신을 향한 욕이 틀림없었다. 여기서 개자식이 될 사람은 자신 뿐이다.

“저…정경아 아무리 술을 먹었다고 아버지에게 그 무슨 말 버릇이란 말이냐?”

“호로새끼.”

자추동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리고 급기야 인상이 와락 우그러졌다. 아무리 술을 먹었다고 해도 용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네 이놈, 감히 아비에게 호로새끼라고 했더냐? 이것이 오냐오냐 해줬더니 아예 갔구나.”

“사…사부님 나쁜 놈.”

“으헉!”

자정경의 입에서 동천몽을 향해 욕설이 거침없이 터져나왔다.

“벼엉신, 환관새끼 웁!”

자추동이 잽싸게 자정경의 입을 막아 버렸다.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봐 두려웠다.

입을 막자 자정경이 세차게 뿌리쳤다.

“놔두세요. 그 자식은 벼락을 맞아야 해요.”

자추동은 막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먹고 들어와 동천몽을 욕할 정도면 둘 사이에 심각한 뭔가가 있었음을 뜻했기 때문이었다.

“대…대법왕님께 무슨 서운한 점이 있느냐? 아비에게만 말해보거라.”

“뭐…뭐라구요? 그 자식이 대법왕이라구요. 홋홋홋! 우리 아버지 정말 웃긴다. 걘 대법왕이 아니라 양아치에요.”

“그만.”

다시 입을 막았다.

타악!

사정없이 손을 때리며 치웠다.

일류고수의 경지를 넘어선 딸의 손힘을 피하기란 불가능했다.

자정경은 망설임 없이 욕을 퍼부었다. 차마 듣고 있기가 민망할 정도로 원색적이고 노골적이었다.

“잡놈, 나쁜 놈, 치사한 새끼.”

둘 사이에 뭔가 단단한 충돌이 있었음이 분명하여 물었지만 술이 취해 자기 말만 했다.

“정경아 제발 정신 차리고 말 좀 해보거라. 왜 그러느냐? 대법왕님과 서운한 일이 있었다면 말을 하거라. 말을 해야 이 아비가 돕던지 할 것 아니냐?”

“그 새끼 대법왕 아니라니까요? 양아치에요. 그것도 쌩 양아치.”

흠칫!

자추동이 소스라치며 놀랐다.

자정경이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아버지.”

“오냐? 그래 말해 보거라.”

자정경이 콧물을 닦으며 말했다.

“나 사부님 좋아해요.”

“알고 있다.”

“그냥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혼인할 생각까지 갖고 있었단 말이에요.”

“호…혼인.”

좋아하는 줄은 알았다. 자신 또한 혼인을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딸의 입으로 듣자 충격이다.

“남녀가 좋아하면 당연히 혼인을 생각하는 거잖아요.”

“그래, 네 말이 맞다. 계속해 보거라.”

“혼인을 하면 뭐가 가장 중요한 가요?”

“그야 당연히 이세이지.”

“그런데 사부님께서는 아버지께서도 알다시피 사내 기능이 죽어버렸잖아요.”

“맞아. 그래.”

“아이를 낳지 못하기 때문에 소녀는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사부님의 기능 회복을 위해 노력했어요.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갖는 것은 여인으로써 당연한 소망 아닌가요?”

“물론이지. 아이를 턱 낳아야 더 행복해 지느니라.”

“그런데 사부님께서 기능 회복을 않겠다고 하지 뭐예요.”

“기능 회복을 않겠다면?”

“혼인을 않겠다는 말씀 아니겠어요? 혼인을 않겠다는 건 곧 날 차버렸다는 뜻이구요.”

화악!

자추동의 눈이 커졌다.

“저…정말로 채였단 말이냐?”

“채였으니까 이렇게 열 받는 거죠.”

자추동의 얼굴이 까맣게 변했다.

흥분하면 이상하게 얼굴이 검게 변한다. 동천몽의 입장과 그가 처한 위치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뻑적지근한 혼인을 꿈도 꾸지 않았고 단지 자정경을 챙겨주고 사랑해주면 하는 마음은 갖고 있었다. 그것이 설혹 눈에 띄는 혼인이든 비밀스러운 혼인생활이든 말이다.

자세히 조사해보지 않았지만 포달랍궁 역대 대법왕 중 혼인을 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도 들었다. 정식으로는 아니지만 부부의 인연을 맺었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음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채였다는 말을 듣자 피가 거꾸로 솟는다.

“이럴수가. 어찌 내 딸을 대법왕께서.”

동천몽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았지만 자신 또한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소월담 생활비 전액을 자신이 대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돈 없으면 움직임도 좁아진다면서 정보를 캐기 위해 나가는 사불각 승려들에게 적지 않은 은자를 쥐어 주었다. 능씨가 잠든 비취옥관도 자신이 직접 주문했다. 가격만 해도 어지간한 장원 한 채 값이었다. 한마디로 할 만큼 했는데 자정경을 찼다는 말에 자추동은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런 씨벌놈이.”

침대를 내려왔다.

다 참아도 자식 우습게 보는 건 못 참는다.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자식이다. 마누라를 잃고 혼자서 지금까지 키워왔다. 홀아비 자식이란 말 듣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얼마나 혹독하게 키웠던가. 회초리를 들고 자신도 울고 자정경도 울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정경을 우습게 보는 놈은 절대 가만 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실컷 갖고 놀다 이젠 별 볼일 없다 이거지. 이게 완전히 날 물로 봤다는 얘긴데.”

콱!

방 한쪽 구석에 놓인 칼을 들었다. 초저녁에 잠이 오지 않아 능금을 깎아 먹는데 사용한 칼이었다.

“너와 나 오늘 죽자.”

칼을 쥐고 뛰쳐나가자 침대에 쓰러져 있던 자정경이 몸을 날려 바짓 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아버지 어디가요?”

“어딜 가긴, 몰라서 묻느냐? 오늘 그 자식 죽고 나도 죽겠다. 이것 놔라.”

“안 돼요. 그러지 마세요.”

“놔라.”

자추동이 발을 뿌리치며 나아갔다.

한번 화가 났다 하면 앞뒤 안가리는 자추동이었다. 자정경은 몇 번 쫒아갈까 하다 내버려 두었다. 자신의 힘으로 안되는 일이라면 아버지를 빌어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만큼 동천몽은 이제 지울 수 없는 자신의 남자가 되고 말았다.

어둠속에서 푸른 두개의 불길이 나타났다. 야수라면 미끄러지듯 움직여야 하고 땅에 붙다시피 키가 작아야 했는데 두 개의 불길은 땅에서 제법 높았다.

“유난히 시퍼렇군?”

“살벌한 것이 혹 동호(童虎) 아닐까?”

이따금 호랑이 새끼들이 침입한다. 이제 막 사냥 맛을 알기 시작한 호랑이 새끼들은 겁이 없다.

“엇!”

동천몽의 거처를 지키던 두 명의 승려가 기겁했다. 다가오는 불빛은 사람이 뿜어낸 눈빛이었다.

“아미타불! 당주님 아니십니까?”

자추동을 보며 두 승려는 아는체 했다.

자추동은 시퍼런 눈빛을 폭사하며 말했다.

“그 자, 대법왕 있지요?”

그 자식 있느냐고 말하려다 잽싸게 말을 바꾸었다. 괜히 시비조로 나갔다가 눈치를 채고 못 들어가게 하면 만사 끝장이었다. 솟구쳐 오르는 분노를 억제하고 점잖게 말을 뱉으려니 속에서 뜨거움이 치민다.

“물론 주무시옵니다만 이 야심한 시간에 어쩐 일로?

“긴히 뵙고 드릴 얘기가 있소이다. 그러니 양해하시오.”

온갖 번뇌와 고통을 끌어안은 백성들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말씀듣기를 청한다. 대법왕은 만백성의 어버이기 때문에 그들이 어느 때 언제 찾아와도 결코 피하거나 거절해서는 안된다. 성자이자 살아있는 부처이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고충을 들어줘야 하기 때문이었다.

“들어가십시오.”

일반 백성도 아니고 포달랍궁의 가장 강력한 시주집단인 흑수당의 당주이다. 한밤중에 찾아온 것이 약간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막대한 자금을 고려하면 절대 막아서도 안되고, 특히 딸인 자정경과 동천몽의 관계를 생각하면 신속히 통과를 시켜야 했다.

자추동은 돌아서자마자 가래침을 뱉았다.

자추동의 기세에서 뭔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지만 두 승려는 그다지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다. 자신들이 개입하거나 관여 할 만큼 위치가 낮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스르륵!

복도를 걸어 문 앞에 이르자 처장으로부터 한 사람이 떨어져 내렸다.

어둠속에서 유난히 번쩍이는 일목 눈빛이다.

“당주님 어디 가십니까?”

일목의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듯 자추동의 전신을 훑었다.

자추동은 가급적 감정을 자제하고 말했다.

“대법왕님께 긴히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말이오. 기별해 주겠소?”

“아무리 당주님이라지만 지금 제정신이오? 지금 몇 시 인줄이나 아느냔 말이오. 자시가 넘은지 오래오.”

“누가 그걸 모르오. 얼마나 급했으면 이 시간에 대법왕님을 찾아왔겠소. 서둘러 기별 좀 넣어 주시오.”

“돌아가시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대법왕님께서는 주무실 때 누가 깨우는 것을 제일 싫어하오. 자칫하다간 맞아 가는 수가 있단 말이오?”

“내가 왔다고 하면 이해하실 것이오.”

“웃기는 소리 하지 마시오. 흥분했다하면 조부 뻘 되는 사대법왕들도 두들겨 패는 대법왕님이거늘 당주님 정도는 우습지요. 나 맞고 싶지 않으니 내일 아침에 오시오.”

그러면서 일목이 슥 하는 바람 소리를 내며 사라져버렸다.

“잠깐.”

크게 소리쳤지만 일목으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잠시 화난 얼굴로 천장을 노려보던 자추동이 그대로 들어가 문고리를 잡아갔다.

탁!

어느새 일목이 나타나 자추동의 손을 낚아 잡았다. 실로 섬칫할 만큼 무섭고도 놀라운 솜씨였다. 많은 무림인들의 솜씨를 보았지만 일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죽고 싶소.”

일목은 살인의 자격을 갖고 있다.

십이법신회의에서 내려진 명령으로 동천몽을 호위하면서 허락 없는 침입자가 있을 때는 일단 죽이고 뒤에 보고할 수 있었다. 이름 하여 선 조치 후 보고이다.

“돌아가시오.”

마지막 경고라는 듯 조금 전 목소리와는 천지차이였다.

식은땀이 흘렀다. 이정사정 없는 자이다. 안면이 있다고 봐주고 모른다고 행동에 들어갈 위인이 아니다. 오로지 동천몽의 신변에 위해가 되거나 방해가 된다 싶으면 가차 없는 인물이다.

자추동은 속에 터질 듯 끓었지만 조용히 물어나기로 했다. 일목에게 반항해봤자 철저히 자신만 손해이다.

방으로 돌아오자 자정경은 골아 떨어져 있었다. 한참동안 자신의 침대에 활개를 펴고 누워 자는 자정경을 내려다보았다. 엊그제까지 갓난 아이였던 딸이 벌써 장성하여 남자를 알고 그로 인해 속상해 한다.

스윽!

자정경의 손을 쥐었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미모로 숱한 사내들의 표적이 되었다. 내 노라 하는 서장의 명가 후예들이 청혼을 했지만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이 거절 한 것이 아니라 자정경 스스로가 탐탁치않게 여겼다.

그러던 자정경이 좋아하는 남자를 만났다. 얼마나 좋았으면 스스로 제자 되기를 자청했고 그 남자의 곁에서 수발을 마다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그 남자로부터 청혼을 거절당했으니 그 심정이 오죽할까.

‘하필 장가도 들 수 없는 사내를 좋아 했단 말이냐!’

동천몽에 대한 분노는 끝내 자추동의 입에서 탄식으로 바뀌어 흘러나왔다.

잠자리에 일어나자마자 자추동이 찾아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찾아왔는지 알고 있다는 듯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일목과는 반대로 느긋하게 가사를 걸치더니 불러들였다.

“편히 주무셨나이까?”

자추동은 크게 허리를 숙였고 동천몽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앉으시오.”

동천몽이 자리를 권했고 자추동이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았다.

동천몽이 의자에 앉아 목을 좌우로 돌렸다. 잠자리가 불편했던 듯 싶었다.

“그래 무슨 일로 이렇게 날 찾아왔소? 일목에게 듣자하니 어제 밤에도 찾아왔다가 돌아갔다더구려?”

퍼억!

주저함이 없었다.

자추동은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고 동천몽이 깜짝 놀라며 화들짝 일어섰다.

“다…당주.”

“대법왕이시여 소인을 살려 주십시오.”

“무슨 말이오? 내가 당주를 죽이기라도 한 단 말이오?”

딸 가진 부모가 죄인이었다.

딸이 저토록 좋아 못사는데 어찌하란 말인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서라도 매달려야 했다.

“저…정경이가?”

“정경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소?”

자추동의 눈자위가 떨렸다.

모르는 듯 시치미를 덴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자신도 남자지만 어찌 이렇게 능청을 떨 수 있단 말인가.

“대법왕님과 혼인을 하지 못하면 죽겠다고 합니다.”

“크헉!”

동천몽 또한 경악한 표정으로 두 걸음이나 물러섰다.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것이 상당한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부디 소인을 여식을 불쌍히 여기시어.”

“정경이 어딨소? 어제 안보이던데 말이오?”

“어지간해서는 속상해 하지 않은 아인데 어제는 견딜 수 없었는지 술을 했더군요. 아직 잠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당주, 혹시 결자해지라는 말을 들어보았소.”

“어큭!”

자추동이 사래가 들린 듯 재채기를 해댔다.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져 동천몽을 보았는데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소…소인의 귀에 결자해지라고 들렸사온데?”

“그렇소? 결자해지라고 했소? 뭐가 잘못되었소이까?”

“아…아니옵니다. 소인이 알기에 결자해지라 함은 매듭을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뜻으로.”

“그렇소이다. 일을 저지른 사람이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오. 부모된 입장에서 정경이의 아픔을 염려하고 적극 나서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런 일은 당사자가 알아서 하는 게 가장 좋소이다. 무슨 말인지 알았으니 너무 염려마시오.”

그러면서 등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갔다.

“어디 가시옵니까?”

“해결하려면 정경이를 만나야 할 것 아니오?”

“지금 정경이를 만나러 간단 말입니까?”

“너무 염려 마시오. 폭력으로 위협하거나 협박을 하여 내게서 멀어지게 하고 싶은 맘은 추호도 없으니까?”

탁!

문이 닫히고 사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