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용사(勇士)
용천명이 신음을 흘렸다.
무림에는 입으로만 전해지는 몇가지 전설적인 무예가 있다. 그중 하나가 지금 덕배선사가 펼친 밀종대수인이다.
알려진 무공이면 그에 대한 대비책이 나오지만 전설로만 전해질 뿐 아직 활발하게 횡행하지 않은 무공이어서 대비책이란 그다지 없었다. 싸우는 당사자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맞서는 것 말고는 뾰쪽한 수가 없는 것이다.
휙!
검 끝에서 파란 기가 뿜어나온다.
출렁이는 일반기와 달리 단단한 강기이다.
꽈앙!
다시 손과 검이 부딪혔다.
둘 모두 외형적으로는 누가 우세하다고 말 할 수 없었다.
파파팡!
두 사람의 옷자락이 찢어질 듯 펄럭거렸는데 천룡구십구불과 무혈단 무사들이 쏟아낸 기파가 바람이 되어 두 사람의 옷자락을 후려치고 있었다.
이미 비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무혈단은 포위망을 뚫으려 노력했고 천룡구십구불은 매섭게 망(網)을 단단히 만들었다.
슉!
짧게 찔러 들어왔다.
빠른 공격은 검이든 주먹이든 피할 수가 없다. 물론 전혀 피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의 공격보다 이쪽의 보법이 압도적이거나 눈이 빠르며 움직여 피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절정고수들 사이에서 주고 받는 쾌공이란 범인으로서는 상상 할 수 없는 속도이기 때문에 보법으로 피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유일한 방법은 맞닥뜨리는 것이었다.
딱!
명치를 찔러 들어오는 검을 덕배선사가 왼쪽으로 쳐냈다.
치잇!
힘에 왼쪽 밀려가던 검이 재차 파고들었다. 밀린 거리는 두 치 정도였는데 덕배선사의 처낸 힘은 이갑자의 공력이었다. 그런데도 고작 두 치 밖에 밀리지 앉았다는 것은 용천명의 내력 또한 그에 못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었고 덕배선사가 더욱 놀란 것은 바뀐 초식이었다.
검이 밀리는 순간 찔러왔던 식(式)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몸속의 내력은 손이나 병기가 펼치는 초식에 따라 형태가 바뀐다. 어떤 초식이 운용되느냐에 따라 모양과 크기가 수시로 급변하는 데 몸 안의 내력을 빠르게 변형시킬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은 없다.
그래서 고수와 하수의 내력 변화의 빠르기는 큰 차이가 난다.
일반적인 고수였다면 덕배선사의 왼쪽 쳐내기에 의해 검은 몸을 비켜 뒤쪽 텅 빈 허공을 찔렀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될 경우 상대는 표적을 놓치고 허공을 찔렀기 때문에 몸의 중심이 흐트러졌을 것이고 중심이 흐트러져 신속히 신체를 통제 하지 못하는 상대는 치명적인 위험을 맞는다.
그런데 용천명은 그 모든 절차를 넘어서버렸다. 실패의 순간 다른 초식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실패든 성공이든 펼친 초식을 마치고 다음 초식을 시전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반쯤 정도 밖에 펼쳐지지 않은 초식에서 곧바로 다른 초식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몸의 내력이 그만큼 빠르게 변화에 따라주었다는 의미이다.
곧바로 달리는 마차가 급히 회전하면 넘어진다. 공격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다른 초식으로의 변화를 주면 기의 흐름이 따라주지 못해 부상이 나거나 아니면 역류까지도 일어난다.
용천명의 검은 틀어진 왼쪽의 방향에서 반 뼘 정도 검 끝이 올라왔다. 명치를 노렸다가 왼쪽으로 밀려나자 반 뼘 올려 어깨를 파고들었다.
휙!
이번에는 덕배선사가 손으로 쳐내지 않고 왼쪽어깨를 틀었다. 쳐내는 것보다 더 빠른 방어동작이었다.
쉭!
검이 어깨를 아슬아슬하게 스쳤고 덕배선사의 오른손이 찔러가는 검신의 중간 부분을 강하게 때렸다.
꽝!
검 끝을 때리는 것과 검신 중간부위를 때리는 것에 상대가 느끼는 충격의 강도는 다르다. 검 끝은 끝만 틀어지기 때문에 손아귀에 전달되는 충격이 그다지 크지 않지만 중간부위는 손아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부분이다. 손을 통해 빠져나오는 힘이 아직은 살아 있기 때문에
신체를 때리는 것 과 같은 효과를 본다.
“훕!”
검 끝은 휘어지는 습성이 있어서 충격도 완화시켜주지만 중간은 그렇지 못했다.
핑글!
검의 손잡이가 손아귀를 반쯤 벗어나고 있었다. 다행히 힘이 강했기 때문에 재차 추스르며 잡았지만 고수들의 싸움에서 그 짧은 틈은 큰 위험으로 돌아왔다.
파아아!
지금까지 덕배선사는 우장만을 썼다.
그러다보니 용천명의 본능은 오른손에 쏠려 있었는데 느닷없이 왼손이 뻗어 나오자 흠칫 했다. 상대가 너무 강하다보니 사실 다른데 신경쓸 여력이 없기도 했지만 왼손으로 돌변하자 당황했다. 검으로 막아야 하지만 손아귀를 벗어나려는 검을 추스르고 있었기 때문에 막긴 하되 전력이 담기지 못할 수밖에.
뻐어억!
덕배선사의 좌장은 또다시 검의 중간을 때렸다.
겨우 추슬러 잡은 손잡이가 튕겨나갔다. 온힘을 다해 엄지 손가락으로 눌러 떨어지려는 검을 붙잡았다.
그러나 덕배선사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번에는 오른손이다.
왼손공격에서 또다시 왼손공격을 펼치는 방법보다는 좌우 손을 번갈아 뻗는 것이 연결과정이 군더더기가 없고 빠르다.
콱!
이번에는 오른손이 다시 검신을 쳤고 끝내 검은 허공으로 날아가버렸다.
투툭!
고수라면 검을 떨어뜨렸다고 해서 크게 싸움의 양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완전한 고수라면 또 달라진다. 용천명과 덕배선사의 무위는 천하에서 손가락 꼽힐 만큼 고강했다. 바늘 끝 만 한 차이와 변화도 생사를 결정하는 고수들이었다.
스윽!
반쯤 뻗어낸 덕배선사가 오른손을 거두어 뒷짐을 졌다.
그러자 용천명의 눈이 커졌다. 덕배선사의 행동은 공격을 하지 않을테니 검을 주워들라는 뜻이었다.
용천명은 검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다시 벼락 같이 찔러 들어갔다. 얼굴에 전혀 고마움이나 미안함 따위는 없다. 처음 그대로 다시 냉정한 표정이다.
덕배는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부끄럽거나 창피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백쾌섬을 제외하고 아직까지 자신의 검을 손아귀에서 떨어뜨린 사람은 덕배가 처음이었다.
슈육!
승패는 이미 떠났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검을 떨어뜨렸음은 패배다. 적수공권으로 붙는다고 해도 최소 백초 승부는 간다. 그러나 검이 주특기인 검사가 검을 떨어뜨렸다는 것은 패배이다.
결정난 패배인데도 검을 주워 덤비는 것은 밀종대수인이란 무공 때문이었다. 귀가 아프도록 들었고, 아무리 소문의 특성이 불어나는 것이라지만 천하제일인(天下第一印)임은 분명했다. 고수라면 이기는 것도 목적이지만 파천의 기예와 겨뤄보는 행운 또한 무척 중요시 여긴다.
따딱!
연거푸 검은 손에 막혔다.
볼품 없는 검이지만 평생을 같이한 애검이다. 이름난 보검도 아니고 속에 은밀한 기관장치가 되어 있는 검은 더욱 아니다. 완전한 고수가 되면 병기는 그저 병기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보검이라면 적지 않은 득을 보지만 아무튼 평생 이 청강검 하나로 수많은 고수를 쓰러뜨렸다.
그런데 오늘 어쩌면 자신이 쓰러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불안하거나 억울한 기분은 전혀 들지 않는다. 고수라면 생사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따--따다닥!
오십여 초가 지났는데도 덕배선사의 손에서는 핏방울 한 개 흘러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강한 수공일지라도 병기에 십여 차례 이상 부딪히면 최소한 붉게 달아올라 사용을 자제한다. 그런데 용천명이라는 무혈단 수장인 자신의 이갑자 힘이 실린 검에 오십 번 이상을 부딪혔는데도 손은 처음 그대로였다. 오히려 자신의 검이 균열을 보이고 있었다.
비명은 끝없이 들린다. 수 십 년을 동고동락해온 부하들의 마지막 목소리가 너무도 슬프게 들린다.
뚝!
용천명이 검을 멈추었다.
덕배가 쳐다보았는데 왜 멈추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용천명의 시선이 검을 쳐다보았다. 검은 금방이라도 조각이 날 듯 곳곳에 균열이 일어나 있었다. 평생을 같이 해온 검이 균열되어 쪼개지는 비참한 몰골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졌소.”
용천명은 패배를 시인했다.
덕배는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그도 최선을 다했고 자신도 최선을 다했다. 용천명은 자신이 덕배에 비해 반수 정도 떨어진다고 생각 했다. 하수들에게 반수는 작은 차이지만 고수에게 반수는 하늘과 땅이었다.
크아아!
컥! 어억!
천룡구십구불의 포위망이 뚫렸다. 그런데 포위망 뚫림은 그다지 무혈단 무사들에게 반가운 일이 되지 못했다. 천룡구십구불의 포위망을 벗어났지만 이미 체력은 바닥이었다.
정상의 몸이라고 해도 쉽지 않을 백팔밀승들인데 도무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것은 학살이었고 일방적인 도륙이었다. 이십여 명 가까이 뚫었는데 순식간에 모조리 도륙이 되어버렸다.
유일한 생존자는 용천명과 동천완이었다.
동천완은 그 처절한 생사의 대결 속에서도 온전했다. 누구도 그를 공격하거나 위협하지 않았다.
용천명이 누굴 찾는지 두리번 거렸다.
뚝!
그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포위망을 벗어난 전각 대청마루에 동천몽이 앉아 있었다.
용천명이 천천히 동천몽을 향해 걸어갔다. 그 순간 천룡구십구불중 두 명의 승려가 그를 막으려 했다. 덕배선사가 손짓으로 막지 말라고 한다.
가까이 다가간 용천명이 열두 개 계단 위에 앉아 있는 동천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소생은 용천명이라고 하옵니다.”
느닷없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용천명의 의도는 무엇일까. 주위 사람들의 한 결 같은 의문이었다. 그러나 동천몽은 용천명의 의도를 읽은 듯 잔잔한 미소를 짓는다.
그것은 아주 간단했다. 자신의 명예와 무혈단의 지위를 인정하여 깨끗한 죽음을 맞게 해주어 고맙다는 인사였다. 사실 백쾌섬은 동천몽의 원수이다. 자신을 죽인 철천지 원수이기 때문에 백쾌섬의 측근 호위대인 무혈단은 곧 분신이다. 일반 사람들이라면 죽이는 건 기본이고 단순히 죽이는 것만으로는 분이 안 풀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동천몽은 복수라기보다는 천룡구십구불을 내세워 서로의 명예와 자존심을 건 건강한 일전을 벌이도록 배려했다. 어떤 함정이나 음모도 개입시키지 않은 것이다. 백팔밀승을 배치해 단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만을 보였을 뿐이었다.
죽음에도 종류가 있다.
가장 비참한 죽음은 시신까지 훼손당하는 것이다. 신체가 절단되는 죽음 또한 무인에게는 치욕이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품위 있는 죽음은 이쪽의 체면을 세워주는 죽음이다. 그것은 시신이 훼손되고 신체가 절단되는 죽음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가장 융숭한 대접인 것이다. 그래서 무인들은 이기는 것도 중요시 여기지만 어떤 죽음을 당하느냐에 관심을 갖는다.
“소생의 무례함을 이해하소서.”
대법왕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그런 그에게 검을 겨누었으니 죽어 마땅하다.
“용천명이라고 했더냐? 실로 멋진 놈이구나. 너를 기억하겠다. 오래 오래.”
“가…감사하옵니다.”
용천명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대법왕의 기억 속에 자신이 각인된다는 사실은 놀라운 감동이자 흥분이 아닐 수 없었다.
“건강하소서. 소생은 이만 물러갈까하옵니다.”
물러가겠다는 것은 그만 목숨을 끊겠다는 의미였다.
“궁금하지 않느냐?”
뜬금없는 질문이었는데 용천명은 알아차린 사람처럼 대답했다.
“조금은?”
한번쯤 백쾌섬의 안부에 대해 물을 만도 했다. 워낙 원한이 깊기 때문에 그가 지금 무엇하는지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자신의 주리를 틀면 상당한 정보가 흘러나온다.
호위대 대장이니 백쾌섬의 일상과 목와북천의 모든 것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천몽은 일제 그런 행위를 벌이지 않았다.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너희 주군은 내 원수이다. 난 반드시 그를 죽일 것이다.”
용천명은 묵묵히 듣고 있다.
“너도 알겠지만 너의 입이 열리면 좋은 정보가 마구 쏟아져 나올것이다.”
“왜 묻지 않으시옵니까?”
“너 때문이다.”
흠칫!
용천명이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마음에 드는구나. 너야 말로 요즘 보기드문 진정한 무사이고 주인을 섬길 줄 아는 충신이다.”
그 말은 곧 자신의 명예를 존중해주기 위해서라는 의미였다.
용천몽이 눈빛이 흔들렸다.
천하에서 자신을 거느릴 인물은 백쾌섬 뿐이라고 호언했고 자신했다. 그런데 여기 또 한 사람이 있다.
팍!
용천명이 천령개를 내리쳤다.
천천히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용천명의 입가에 환한 웃음이 흘렀다.
털썩!
쓰러진 용천명을 바라보던 동천몽이 말했다.
“용사다. 잘 묻어주거라.”
천룡구십구불의 승려 세 명이 잽싸게 시신을 치웠다.
“대…대법왕님.”
그때 장원을 뒤흔드는 커다란 외침 소리가 들리더니 동천완이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어찌나 세차게 꿇었던지 땅이 흔들거렸다.
“소인을 살려주십시오. 소인을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용천명을 환한 모습으로 쳐다보던 동천몽의 낯빛이 굳어졌다.
동천완은 쉬임 없이 살려달라고 애걸했고 동천몽 뿐만 아니라 주위 천룡구십구불의 표정도 싸늘해 있었다.
“대법왕님 자비를 크게 베푸소서.”
동천몽이 조용히 계단을 내려왔다.
잠시 엎드려 흐느끼는 동천완을 내려다보던 동천몽이 몸을 돌렸다.
와락!
동천완이 벼락같이 발목을 끌어안았다.
“어딜 가십니까? 소인을 외면치 말아주소서.”
화악!
동천몽이 붙잡힌 다리를 거칠게 걷어찼다. 그러자 동천완이 힘없이 나뒹굴었다.
동천몽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개새끼.”
지켜보던 천룡구십구불의 눈이 커졌다. 동천몽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자 모두가 놀란 표정들이었다.
“나 같으면 쪽팔려서라도 그냥 죽겠다. 그렇게도 살고 싶으냐?”
동천완의 얼굴이 굳어졌고 동천몽이 차가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과거는 덮자. 조금 전 일만 갖고 말하자. 너 내 앞에서 온갖 개 지랄 다 떨었지. 그리고 내가 떠나자 뭐라고 뒤에서 구시렁 댔느냐? 난 정말로 네놈을 살려주고 싶었다. 단 이후 더 이상 보지 않으려 했지. 그런데 네놈은 등 뒤에 대고 날 조롱했다. 너란 놈의 그릇이 고작 그것 밖에 되지 않았더냐.”
동천완은 굳은 얼굴로 눈만 꿈벅거렸다.
동천몽이 씹어 뱉듯 말했다.
“죽어라. 그것만이 더 나은 세상이 되는데 일조하는 일이다. 너 같은 놈은 살아 있어봤자 끝없이 약한 자를 괴롭히고 못살게 할 쓰레기이다. 뭣들 하느냐? 저놈의 목을 베어라.”
화악!
동천완의 몸이 개구리처럼 뛰었다. 걸어가는 동천몽의 발을 향해 비수처럼 꽂히며 다시 끌어안았다.
“살려줘, 천몽아 날 죽이지 마.”
동천완은 발목을 으스러져라 끌어 안으며 외쳤다.
“나는 살고 싶어. 개새끼라고 해도 좋아. 그냥 살고싶어. 사는게 아주 좋아.”
내려다보는 동천몽의 얼굴빛이 수차례 바뀌었다.
“어머니에게 잘못했어. 어머니는 우릴 너무 사랑했는데 우린 그러지 못했어. 난 나쁜 아들이야.”
파앗!
어머니라는 말이 나오자 동천몽의 눈에서 살기가 돋았다.
잠시 잊고 있었던 악몽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어머니가 널 사랑했다고?”
“그래, 어머닌 나뿐만 아니라 형님과 모두를 사랑했어. 친 자식보다 더 아꼈어.”
“사실이냐?”
“정말이야? 너도 알잖아.”
“말 잘했다. 네놈이 말했듯 어머니는 모두를 사랑했다. 나 보다 너희 형제를 더 사랑했지. 그런데 네놈의 형, 그 잘난 동천비가 그 어머니를 겁탈했다.”
“으헉!”
동천완이 경악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동천몽이 살기를 쏟으며 말했다.
“죽어라.”
그러면서 걸어갔고 동천완은 얼어 붙은 듯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동천몽은 눈앞에서 사라졌고 동천완은 석상이 된 듯 꼼짝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한쪽이 일목이 있다.
“저…정말이냐? 형님이 어머니를?”
“씨벌놈이 너 지금 나한테 말 놨냐? 이 시퍼런 개새끼를 봤나. 니놈 형제들은 어떻게 위 아래를 모르냐? 너 몇 살이야?”
일목의 험상 궂은 얼굴에 동천완이 더듬거렸다.
“서…서른 하나인데요.”
“난 씨발놈아 내일 모레면 쉰이야. 지천명, 알아?”
“죄송합니다. 제가 몸이 아파서.”
“잘들어. 넌 죽는다. 내 손에, 마지막으로 할말 있으면 털어봐?”
동천완이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전 천몽은 날 살려주려고 했다고 말했는데 사실입니까?”
“함께 자랐으면서도 그렇게 모르느냐? 너희들은 아니었겠지만 대법왕님은 너희를 형제로 생각하고 인정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용서에 초점을 맞췄지. 그런데 네놈의 그 잘난 형님이란 새끼가 모든 것을 망쳐 버렸다. 물론 마공으로 인해 제정신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이기 때문에 참작을 해야 한다는 얘기냐?”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은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다는 것 아닐까요? 솔직히 말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사람이 저지를 죄를 온전한 사람이 지은 것과 동일하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멈칫!
일목의 눈이 깜빡거렸다.
동천완이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지른 죄는 절대 용서 할 수 없지만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정신이 완전히 돌아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참작은 해야 한다고 봅니다. 관부에서도 맛이 간 자들이 지은 죄는 어느정도 형량 결정을 할 때 감안하잖습니까?”
“그러니까 한 마디로 네놈 말은 헷가닥 갔으니 조금은 봐줘야 한다는 것이냐?”
“봐주고 안 봐주고는 그쪽에 메여있지만 제 생각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씨발 놈이 곧 죽어도 지놈 형님이라고 편드네.”
“편드는게 아니라.”
“개자식아 그게 편이 아니면 떡이냐? 아미타불! 이런 아주 나쁜놈이 있나. 나 같으면 맛이 갔든 안 갔든 형님을 대신해 동생인 제가 진심으로 용서를 빕니다.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을 덜고자 제 목숨을 끊겠습니다. 하고서 엄숙히 천령개를 내려치겠다. 이 간악한 무리야.”
“죽는 건 두렵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사건의 원인과 배경은 정확히 설명해야 할 것 아닙니까? 내 형님이 잘했다고 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닥쳐.”
일목이 동천완을 걷어찼다.
“아이고!”
동천완이 나가 떨어졌는데 입가에 피를 흘렸다.
일목이 흉흉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쨌든 네놈 형제들은 나쁘다. 특히 네놈은 진짜 나쁘다. 세상이 좀 더 평화롭고 즐거워지기 위해서는 너 같은 놈은 죽어야 한다.”
화악!
검을 뽑아들었다.
검이 뽑히자 동천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사…살려주면 안될까요? 당신이 모시는 대법왕이 내 동생인데.”
“난 대법왕님의 명을 따를 뿐이다. 저승에 가서는 마음 고쳐먹고 살거라.”
휘익!
그대로 검을 내려쳤다.
동천완이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
뚝!
검은 머리 바로 위에서 멈췄는데 동천완은 눈을 감고 미친 듯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몸서리치며 겁에 질린 동천완을 보며 일목의 눈이 흔들거렸다.
“이걸 베어 말아.”
홱!
동천완이 고개를 쳐들더니 머리 위에 있는 검을 발견하고 다시 소릴 질렀다.
“끄아아아!”
일목이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뒤쪽에 서 있는 덕배선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신이 죽이시오.”
검을 검집에 꽂고 두 걸음쯤 지났을 때 덕배선사가 호통을 쳤다.
“거기 서라.”
일목이 몸을 돌렸다.
덕배선사가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감히 노납에게 명령을 내린 것이냐? 난 조금 전 네놈 입으로 나이가 아직 쉰이 안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일목의 눈이 커졌다.
덕배선사의 말은 한 마디로 나이도 어린놈이 감히 존장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네놈이 대법왕님을 모신다고 너무 안하무인이구나. 그리고 듣자하니 정식으로 제자가 되었다던데 그럼 엄격히 따져 네놈은 사제가 아니냐?”
파파팡!
덕배의 장포가 부풀어졌다.
금방이라도 달려 들 듯 살벌하다.
일목이 이마를 좁혔다.
“소…소승이 언제 노려봤다고 그러시옵니까? 원래 눈이 하나 뿐이다보니 왕왕 그런 오해를 받는데 억울합니다. 그냥 쳐다보면 노려보는 것처럼 됩니다.”
“어디서 그런 궤변을.”
“궤변 아니라니까요. 사형, 선사님께서도 눈이 하나만 되어보십시오. 그냥 노려보게 됩니다. 아 정말.”
답답하다는 듯 일목이 한숨을 내 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붙고 싶었다. 그러나 지난 세월 곁에서 지켜본 덕배의 무공은 예사롭지 않았다. 밀종대수인이라는 가공할 장법도 경계심을 일으켰지만 뭐니 뭐니해도 가장 신경쓰이는 대목은 역시 맨발이었다.
맨발은 이상하게 가슴을 짓눌렀다. 낡은 승포를 바람에 휘날리며 맨발로 다가오는 덕배선사를 보면 괜히 주눅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한 주먹에 자신의 머리를 깨버릴 것 같은 살벌한 기세에 자신도 모르게 위축이 된다.
속으로 욕을 뱉으며 별것 아니라고 최면을 걸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또다시 덕배선사를 보자 자꾸 뒤로 물러서고 싶어졌다.
‘니기미!’
속으로 투덜대며 숨을 몰아 쉬었지만 소용없었다. 투쟁력이 급속도로 사라졌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소승은 사형, 선사님을 한 번도 경원시 한 적 없습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 맹세 합니다.”
“그럼 조금 전 말을 다시 해보거라.”
일목이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먼저 이건 절대 명령이 아닙니다. 도와달라는 요청에 가깝습니다. 저 놈을 사형 선사님께서 죽여주실수 있겠습니까? 바쁘시지 않으면 그렇게 해주십시오.”
일목의 인상이 티나지 않게 구겨졌다.
이건 완전한 아부였다. 자신이 아부를 하다니 스스로가 용납이 되지 않는다.
덕배선사가 그제서야 표정이 변했다.
“알았다.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넌 가봐라. 그리고 사형이면 사형이지 사형 선사가 뭐냐?”
“그럼 소승은 이만 물러갈까 하옵니다. 사….사형.”
일목이 가볍게 합장을 하고 돌아섰다.
돌아서자마자 일목의 인상을 완전히 우그러졌다.
‘어휴, 그냥.’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솟았다.
콱!
일목의 주먹이 쥐어졌다.
이건 항렬과 상관없었다. 대 배교의 마지막 후예로서의 자존심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반드시 덕배선사와 겨루어보리라 마음먹었다. 반드시 보기좋게 무릎을 꿇리고 말겠다고 전의를 다졌다.
“부불주.”
천룡구십구불의 부불주가 다가왔다.
“네가 하거라.”
부불주가 멈칫했다기 합장했다.
“명을 받사옵니다.”
덕배가 자리를 떴다. 한참을 동천완을 쳐다보던 부불주가 고개를 내 저었다.
“광석.”
그러자 팔십 가량의 노승 한명이 다가왔다.
천룡구십구불 중 서열 삼위이자 나이가 세 번째로 많다.
부불주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처리하라.”
광석선사 또한 움찔하더니 합장했고 부불주가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어 네 번째 나이많은 사제를 불렀다.
“상춘!”
“부르셨사옵니까? 사형.”
칠십 후반가량의 키작은 승려가 나왔다. 유난히 머리가 희었는데 짧은 탓에 금방 찬서리가 내린 듯 보였다.
“네가 베어라. 난 바쁘다.”
상춘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형.”
광석이 사라지자 상춘 또한 사제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태석!”
작달막한 체격에 어깨가 쫙 벌어진 태석선사가 나타났다. 태석선사가 나타나자 상춘선사가 말했다.
“할 수 있겠는가?”
죽일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었다. 태석선사가 동천완을 쳐다보았다.
“난 사제만 믿네.”
상춘선사가 벼락 같이 사라졌고 태석선사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가 동천완의 목 베기를 두려워 했다. 두려워 하기보다는 곤란해 했다. 대법왕의 명령이 있었지만 사사로이는 혈육이 아닌가. 나중 대법왕의 성격을 볼 때 필시 수틀리면 한 번쯤 입 밖으로 꺼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럴리는 없지만 술이나 한잔하고 누가 우리 형님 죽였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면 골치 아프다. 그렇지 않아도 평생 자신의 형님을 죽인 놈이라고 인사에 불이익을 주지 말란 법도 없다. 그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하나같이 아랫사람에게 핑계를 대고 도망치듯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갑자기 술 생각이 난다.
태석선사는 열일곱에 출가했다. 다른 사제들에 비하면 늦은 출가였는데 하도 술을 좋아하자 부모님이 강제로 포달랍궁에 집어 넣어 버린 것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세속에 있을 때 앉은자리에서 죽엽청 열두 근을 마셔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목적이 있어서 술을 마시는 건 아니었다. 그냥 술이 좋았고 마시면 즐거웠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면 아무리 나쁜 사람도 착해보이고 삶의 고된 번뇌에서 잠시 해방이 된다. 열일곱 어린나이에 인생의 고달픔을 얼마나 겪었느냐고 반문 할지 모르지만 그건 뭘 모르는 소리다. 뜻은 큰데 현실 여건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그 또한 고통인데 태석선사가 바로 그러했다.
그런데 출가한 지금 또다시 골치 아픈 일이 앞에 기다리고 있다.
“승석!”
석자 항렬의 사제이다.
“부르셨습니까?”
승석선사의 눈이 좌불안석이다. 보나마나 태석선사가 자신을 부르는 속사정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태석선사는 자신에게 동천완의 죽음을 맡기고 서둘러 사라진다.
“윤석!
승선선사가 사제를 불렀다.
천룡구십구불은 그렇게 계속 아랫사람에게 떠밀기를 반복했다.
강물은 푸르게 흐르고 있었다. 뭇 영웅들의 꿈과 야망과 사랑을 키워내고 그들의 비극까지도 품에 안아준 장강 위로 한 척의 고깃배가 떠 있었다.
강은 푸르고 웅장했지만 고깃배는 너무도 초라하여 금방이라도 물결에 뒤집어 질 듯 흔들거렸다. 그런 위태로운 고깃배 위에 한 명의 낚시꾼이 앉아 있었다.
삿갓을 깊숙이 눌러쓰고 있어 용모는 알아 볼 수 없었다. 단지 뒤집어 질 듯 비틀거리는 배위에 앉아서도 요지부동인 것을 보면 파도쯤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찌는 파도에 의해 마구 뒤집어 지고 잠겼다는 반복해 고기 물었는지 물지 않았는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삿갓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쏘옥!
전혀 틀렸다. 물결에 휩쓸려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던 찌가 핑 소리를 내며 잠겨 사라졌다. 물결에 휩싸일 때에는 부드럽고 두리둥실하던 움직임이었는데 수중으로 꺼지듯 자취를 감췄다는 것은 고기가 물었다는 뜻이었다.
화악!
삿갓 사내가 빠르게 낚시대를 잡아당겼다.
피핑!
낚시대가 대번에 휘어지며 끝으로부터 강한 힘이 전달되어 왔다. 직감적으로 대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확실한 증거였다.
투투툭!
낚시대는 활처럼 휘어져 끝이 물속에 잠겼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거대한 물기둥이 솟구쳐 오르더니 삿갓사내를 덮쳤다.
촤아아!
한개 이던 물기둥이 허공에서 네 개로 돌변했다.
그리고 삿갓사내의 머리와 목과 가슴과 아랫배를 파고들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완벽한 암습이었고 하나의 물기둥이 네 개로 나눠지는 상황은 더욱 삿갓사내를 당황시켰다.
삿갓 사내가 낚시대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낚시대가 강하게 휘어지며 물속에 드리워진 낚시줄이 당겨졌다.
휘리릭!
당겨진 낚시 줄 끝에 은빛이 번쩍이는 바늘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갈고리였다. 도살장에서 황소를 걸어 놓는 거대한 쇠갈고리가 네 사람의 공세를 찍어갔다.
콰콰쾅!
갈고리에 부딪힌 네 사람의 공격이 깨졌다.
그러나 암습자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줄 알고 있었다는 듯 침착하게 허공에 뜬 상태에서 다시 쌍장을 쏟아내었다.
콰아아!
휘이이!
그것은 어마어마했다.
낚시대를 잡아 당겨 다시 네 사람의 공세를 차단하려던 삿갓사내가 멈칫 했다. 마치 강한 철벽에 걸린 듯 갈고리가 장세를 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상보다 암습자들의 무공이 강하다.
삿갓사내는 낚시대를 포기했다. 그리고 곧바로 쌍장을 뻗었는데 먹물같은 기세가 상하로 빠르게 움직였다.
파파파---팍!
둔탁한 소리가 나며 네 명의 암습자가 뒤로 튕겨나갔다. 삿갓 사내의 장력에 밀린 것이다.
두두둥!
삿갓이 강하게 꿈틀 거렸다.
장력에 밀려난 네 사내가 배를 포위 한 채 물 위에 우뚝 섰기 때문이었다.
초상비였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물위에 떠 있으니 수상비라고 해야 옳았다.
하지만 초상비와는 격이 달랐다. 초상비는 말 그대로 풀잎 위를 스치듯 날거나 서는 것을 말하는데 상대들은 물위에 서 있었다. 초상비를 굳이 단계 별로 논한다면 풀 위를 나는 것이 초보단계이고 풀 위에 멈춰 서는 것이 가장 고도의 경지이다. 그러나 물 위에 서 있는 것은 더 어렵다.
일명 부운등공이라고 오해를 할 수도 있지만 그 또한 아니었다.
부운등공은 잠시 잠깐 허공에 떠있는 것이 전부인데 상대는 계속 서 있었다. 물결을 따라 흔들거리며.
“훗훗! 대단하군.”
삿갓 사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물 위에서 우뚝 설 수 있는 신법이라니, 천하에서 그 정도의 무위를 선보일 수 있는 고수를 배출할 수 있는 곳이라면 딱 한 곳 뿐이지. 포달랍궁.”
네 명의 승려는 사대법왕이었고 눈앞의 사내는 동천비였다.
그들은 동천몽의 명령을 받고 동천비를 추적했다. 그러나 동천몽은 절대 행방을 알게 되어도 공격하지 말라고 했다. 움직임만 지켜보고 자신에게 연락을 취하라고 했다. 그런데 네 사람은 동천몽이 당한 사건의 중대성과 동천비의 엄청난 파렴치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직접 나섰다.
“사대법왕이오.”
천장금왕이 흔들거리며 말했다.
동천비가 고개를 쳐들고 웃었다.
“후핫핫핫!”
단순한 웃음 소리였다. 그런데 동천비가 웃음을 짓자 파도가 더욱 거칠어졌다. 웃음에 실려진 강한 내력이 파도를 더욱 강하게 일으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