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형제조우
무이산(武夷山)은 복건과 강서의 경계에 있었다. 무이산을 중심으로 북동에서 남서로 무이산맥이 형성되어 있는데 그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죽림(竹林)과 차이다.
뭐니 뭐니 해도 차중에 으뜸은 죽림 속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대나무잎이 햇빛을 적당히 차단시켜주고 특히 대나무 잎에 맺힌 이슬(天露)를 먹으며 성장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이산에서 나는 차를 철관음(鐵灌音)이라고도 한다.
쏴아아!
바람에 대나무들이 파도처럼 일제히 한 방향으로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죽림 속에 다섯 채의 전각이 세워져 있었다. 무이산의 또 하나 자랑거리인 문공서원이었다.
그런데 서원에 글을 읽거나 배우는 선비는 없고 검을 휴대한 흉흉한 차림의 무인들이 빈번히 들락거렸고 조용한 죽림 한 곳에 한 노인이 뒷짐을 지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잔뜩 이마를 찡그린 것이 뭔가 심각한 고민거리를 갖고 있는 듯 했다.
수시로 부하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다가와 몇 마디 보고를 하고 사라지기를 벌써 두 시진 째, 그러나 백의노인은 여전히 이마를 찡그린 채 돌아보지도 않았다.
밑으로부터 올라온 보고라는 것이 인상을 펼 수 없는 것들이었다. 부하들의 보고를 종합해보면 대륙의 함락은 이제 시간문제라는 것이었다. 마침내 악몽같은 흑도시대가 코 앞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으음!”
남궁천은 연신 신음을 흘리며 생각을 해봤지만 대책이 없었다.
흑도천하가 되면 구파일방과 사대세가부터 씨를 말릴 것이고 점차 군소문파로까지 피바람은 확대 될 것이다. 또한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정도 무림의 인물이라면 개미 한 마리 남기지 않고 모두 죽일 것이며 무공기서들 역시 모조리 불태우고 빼앗을 것이었다.
“주군.”
차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공선사가 찾아왔습니다.”
차우는 곧바로 보고 후 떠나갔다.
“그 늙은이가?”
대번에 남궁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번 전쟁이 이렇게 밀리는데 소림의 책임이 적지 않았다. 소림만 처음부터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 줬어도 이런 비참한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아미타불! 맹주 그간 별고 없으셨소이까?”
우공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남궁천은 쌀쌀맞은 표정으로 말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웬 일이오?”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목을 베어버리고 싶다.
“오면서 들었는데 전황이 최악이더구려. 얼마나 버틸 것 같소이까?”
“모르겠소.”
남궁천의 말투는 차가웠다.
우공선사가 조용히 말했다.
“방법이 있소이다.”
남궁천의 눈이 커졌다.
절대 함부로 입을 열지 않는 우공선사에게서 방법이 있다는 말이 자신 있게 나왔다는 것은 곧 승리로 직결된다고 봐도 무방했다.
남궁천이 침을 삼켰다. 조금 전 쌀쌀하던 태도는 물에 씻겨 사라진 듯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뭐요? 어떤 방법이오?”
“맹주께서 해야 할 일이오.”
“내가?”
“맹주께서 그를 찾아가시오. 동천몽 말이오?”
순간 남궁천의 표정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살기까지 뻗으며 말했다.
“지금 누굴 찾아가라고 했소?”
“천상각의 막내 아들 동천몽 말이오? 포달랍궁의 대법왕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과거의 잘못된 행동을 반성하면서 용서를 구하시오.”
번쩍!
남궁천의 옆구리에 매달린 검이 뽑혀 나와 우공선사의 목젖에 들이대어졌다.
“다시 한 번 말해 보시오?”
우공선사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무림맹이 살아 날 수 있는 길은 맹주가 그분을 찾아가 두 손이 닳도록 삭삭 비는 것이오. 맹주는 지난 날 너무 큰 죄를 동오룡과 천상각에 지었지 않소이까?”
“소림의 장문인이라고 봐줬더니 네 놈이 뒈지고 싶나 보구나.”
꾸욱!
검끝이 바르르 떨렸다.
검끝이 떨며 우공선사의 목주름을 건드렸고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우공선사는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보거라. 뭐라고 했느냐? 이 미친 땡초놈아.”
“대법왕을 찾아가 한번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울며 통곡 하라고 했소이다.”
푸욱!
검이 그대로 목을 찔렀다.
“뭐라고 했느냐? 다시 한 번 지껄여 보아라.”
우공선사는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정도무림을 살리고 싶거든 당장 그분을 찾아가 살려달라고 통곡하며 애걸하시오. 그 방법이 아니고서는 우리 무림맹은 영원히 지하세계로 쫓겨 갈 것이오.”
화아아!
그대로 검을 비틀었다. 그러자 목뼈 잘라지는 소리가 들리며 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목에 커다란 구멍이 만들어졌다.
핏물이 우공의 가슴을 타고 폭포수처럼 흘러내린다.
“네놈이 정녕 날 끝까지 모욕할 셈이냐?”
“아…아미타불! 한 순간 어리석은 판단이 천하대세를 그르쳤구나. 누구를 탓할 것인가? 우매한 우리 인간들이 불러들인 화이거…늘.”
검이 꽂혀 있어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숨이 끊어진 듯 목이 꺾였다.
“패죽일 땡초가 끝까지.”
와드득!
미친 듯이 검을 돌렸고 끝내 목이 잘려지며 몸통과 목이 따로 지면을 나뒹굴었다. 죽은 시신을 쏘아보는 남궁천의 관자놀이가 거칠게 씰룩거렸다.
“허걱!”
또다시 나타난 차우가 기겁했다.
차우는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혹시 다른 사람들의 눈에라도 띄면 큰일 나기 때문이었다. 정신적 지주이기 때문에 우공의 죽음을 사람들이 본다면 흔들릴 것이고 소문이 퍼져나가면 무조건 해롭다.
다행히 우공선사를 수행해온 명철은 죽림 밖에 있다.
“무슨 짓이냐?”
차우가 우공선사의 시신을 향해 오른 손을 뻗었다.
삼매진화를 일으켜 우공선사의 시신을 태워 없애려는 것이었다. 한 가닥 지푸라기 같은 힘이라도 필요한 지금 우공의 죽음이 알려지면 소림이 돌아설 것이다.
“내버려 둬라. 더 이상 소림 따위에 연연하지 않겠다.”
남궁천이 다시 한 번 시신을 노려보더니 차우를 향해 말했다.
“또 무슨 일이냐?”
“포달랍궁이 다가오고 있사옵니다.”
흠칫!
남궁천이 눈을 크게 떴다.
“포달랍궁의 정예들인 천룡구십구불과 백팔밀승이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사옵니다.”
“왜? 그들이 왜 이곳으로 온단 말이냐?”
“모르겠사옵니다.”
“그런 엄청난 무사들이 떼를 지어 서장을 빠져나오는데도 우린 여지껏 모르고 있었단 말이냐?”
차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남궁관이 죽기직전까지는 그다지 포달랍궁을 경계하지 않았다. 물론 목전의 목와북천이 워낙 드세게 나와 시선을 다른 곳에 돌릴 틈이 없었다는 것이 정확했다.
그런데 남궁관이 대법왕의 손에 죽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완전한 변수였는데 다시 한 번 남궁천이 죽은 우공선사를 쳐다보았다. 조금 전 대법왕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길 만이 무림맹이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라고 했다.
“정확한 위치는 어디이냐?”
“태화봉입니다.”
태화봉이면 강서 쪽에 있는 무이산의 한 봉우리였다.
아무리 절정의 고수들이라고 해도 산세가 워낙 험하여 넘자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렇다면!’
갑자기 남궁천의 눈이 야릇해졌다. 좋은 방법이 막 떠오른 것이었다.
“회의를 소집해라.”
“예!”
차우가 사라졌고 다시 한 번 우공선사의 시신을 쳐다보던 남궁천이 냉소를 터뜨리며 죽림에서 사라졌다.
일단의 인물들이 거대한 절봉 앞에 서 있었다. 모두 이백여 명 가량 되었는데 검은 가사를 걸친 승려들이었고 온 몸에서 패도적인 기세가 쏟아져 나왔다.
“태화봉이옵니다.”
덕배선사가 절봉을 가리키며 말했다.
“위험하긴 하지만 곧바로 넘는 것이 좋지 않겠는지요?”
“아니다. 힘들게 넘을 것 있느냐? 좌측으로 우회하는 것이 나을 것이니라.”
동천몽이 고개를 내젓자 덕배선사가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곳은 전쟁지역이고 목와북천의 구역이었다. 그래서 필시 그들의 제지를 받을 것이 뻔했다.
“대법왕이시여.”
덕배선사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곧바로 넘으면 위험하고 시간은 걸리긴 해도 목와북천과 만날 일은 거의 없다. 여러모로 좋았다.
하지만 동천몽의 뜻대로 좌측으로 우회하면 목와북천의 무사들과 조우하게 된다.
모두가 덕배선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선들이 다시 한 번 동천몽을 향했다.
동천몽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의 움직임을 본왕이 왜 남궁천에게 들어가도록 해주었는지 아느냐?”
사실 포달랍궁이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를 무림맹 귀에 흘러 들어가도록 해준 인물은 동천몽이었다.
“남궁천은 우리가 태화봉을 넘어 자신들의 본영에까지 도착하는데 이틀 정도를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피하거나 맞이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목와북천도 벅찬데 빼 낼 전력이 없다는 얘기지. 결국 남궁천은 우리의 움직임을 목와북천에 흘릴 것이다. 자신들이 점령한 땅을 우리가 가로지르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의 눈이 빛을 냈다.
동천몽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남궁천의 귀띔을 받은 목와북천은 자신들이 피 흘려 점령한 땅에 제 삼의 세력이 무단침입하여 이동한다는 것은 절대 묵과 할 수 없는 일이겠지. 그래서 우리 앞길을 막거나 공격을 하리라는 것이 남궁천의 생각일 것이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천몽의 말처럼 목와북천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바보같은 생각이다. 난 백쾌섬에게도 내 움직임을 가르쳐 줬다. 물론 표적은 자신들이 아니라 남궁천을 치기 위해 지나가는 길이라고.”
목와북천은 길을 터줘 오히려 빨리 지나가기를 기대할 것이다. 문제는 남궁천의 끝없는 자가당착이라는 것이다. 그는 목와북천이 우릴 막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이곳 무사들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킬 것이다.
한 올의 힘도 아쉬운 판국이다. 묵와북천이 날 제지 할 것이기 때문에 그 틈을 노려 다른쪽을 공격해 좀 더 우세하게 전황을 이끌어 보겠다는 잔머리를 굴릴 것이 뻔했다.
덕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오시면 우리가 가는 길은 지금 텅 비었다는 것 아닙니까?”
“비었을 것이다.”
동천몽은 자신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무인지경이었다. 누구도 앞을 막지 않았고 무림맹도 목와북천의 무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하며 움직이던 포달랍궁의 무사들은 내심 탄복을 금치 못했다.
자신들의 대법왕은 학문이 짧을 뿐 잔머리 하나 만큼은 천하제일이었다.
쏴아아!
멀리 녹색의 바다가 눈에 들어왔고 그 안으로 조그만 장원이 서 있었는데 문공서원이었다. 문공서원에는 여전히 무림맹 무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문공서원을 보던 동천몽이 조용히 명령을 내렸다.
“덕배.”
“하명하소서. 대법왕님이시여.”
“문공서원을 포위해라. 단 한명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완벽히 막아라.”
뒤를 다르던 이백여 명의 무사들이 일제히 기러기떼처럼 좌우로 나뉘어졌고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털썩!
동천몽은 문공서원이 내려다보이는 산비탈의 바위에 주저앉았다.
툭!
풀 잎사귀 한 개를 뜯어 양손 엄지손가락 사이에 끼었다. 입을 대고 훅 불자 삐이이 하며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려서 친구들과 뒷동산에 올라 풀잎으로 만든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동천몽이 풀잎을 만들어 부는 피리소리가 조용한 산속을 굽이치며 흘러갔다.
삐리리리!
한참 풀 피리에 취해 있을 때 일목이 날아왔다.
“포위를 마쳤다는 소식이옵니다.”
“그래 가자꾸나.”
동천몽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날렸고 뒤를 일목이 따랐다.
졸지에 외부와 차단된 문공서원내의 무림맹 무사들은 기겁했다. 몇 명의 무사가 포위망을 뚫기 위해 공격을 했지만 오히려 생명을 잃고 말았다.
“모두 몇 명이나 되느냐?”
동천몽의 질문에 덕배가 허릴 구부렸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옵니다. 대략 칠팔십여 명 될 것으로 추정하옵니다.”
이들은 전투 숫자라기보다는 남궁천의 호위무사들이라고 봐야했다.
동천몽이 문공서원의 진입로를 따라 죽림 안으로 들어섰다.
앞을 막는 사람도 없었고 길 좌우로 펼쳐진 죽립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예상대로 입구를 지나쳐 서원 앞마당에 이르자 무사들이 집단으로 웅성거리며 몰려 있었다. 모두들 예상못한 사태에 당황한 모습이었는데
문득 동천몽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뒤를 따르던 일목이 쳐다보았다. 웃음에 담긴 의미가 뭐냐는 질문이다.
“역시 늙은 여우로군. 남궁천은 없다.”
남궁천이 없다는 말에 일목의 눈이 커졌다.
일목의 시선이 무사들 사이를 헤집었다. 동천몽의 말처럼 남궁천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변장하고 있을수도 있지 않느냐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천하에 있는 어떤 변장술도 동천몽 정도되는 고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동천몽을 발견한 무사들이 검을 뽑아들고 매서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그들은 아직 동천몽의 신분을 알지 못하는 눈치였고 단지 일목의 행색에 흠칫했다.
‘덕배!’
동천몽이 전음을 날리자 덕배의 대답이 들려왔다.
동천몽은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모조리 죽여라. 한 명도 살려두지 마라.”
동천몽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포위하고 있던 포달랍궁의 무사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마당을 뒤덮은 포달랍궁의 무사들을 보며 앞마당의 무사들 얼굴에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촥!
포달랍궁 무사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잔뜩 겁에 질려 있던 무사들 또한 비명에 가까운 악을 쓰며 달려들었지만 실력의 차이가 너무 컸다.
천룡구십구불과 백팔밀승은 포달랍궁의 간판이었다. 그들의 일수 일수에는 일백 년 가까운 힘이 실려 있었다. 거센 태풍에 휘말린 낙엽처럼 무림맹 무사들은 비명을 양산하며 목숨을 잃어갔다.
한편 동천몽은 죽림 한 곳에 버려진 낯익은 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공선사였는데 입가에 미소가 맺혀 있었다.
동천몽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미소를 지으며 죽은 우공선사를 보면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딱 한 번 원행에 나선 적이 있었다. 천축을 다녀오던 길에 수행중인 승려의 주검을 발견했는데 몽둥이처럼 비쩍 마른 것이 굶주려 죽은 듯 했다. 그런데도 승려의 입가에는 한 줄기 평온한 미소가 떠 있었다. 결코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은 아주 행복한 미소였고 그때 동천몽의 머리속을 채우는 것 하나가 바로 죽음과 웃음이었다.
과연 어떤 사람들이기에 죽는 것처럼 두려운 것이란 없는데 웃음을 지을까. 자신은 죽음이 다가오면 벌벌 떨며 미치도록 두려워 할 것 같았다. 자신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공포에 빠져 있었다. 살려달라고 아우성쳤고 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썼으며 죽지 않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토록 무서운 죽음이 얼마 전부터 전혀 두렵지 않은 것이었다. 대법왕이 되면서부터 죽음에 관해 많은 생각을 했고 지금 당장 죽는다 해도 슬프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은 뭘까. 나름대로 틈나는 대로 생각했고 고민했으며 해답을 얻고자 노력했다.
아직 정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죽음이 그다지 두렵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건 확실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소멸되기 시작한 때는 대법왕에 오르면서부터였다. 아무튼 우공선사처럼 웃지는 않아도 두려워 떨지는 않을 자신 있었다.
무릇 생명이 있으면 언젠가는 소멸된다는 부처의 말이 아니어도 죽음은 남의 일이 아니고 먼 훗날의 일은 더욱 아니며 자신 곁에서 항상 틈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불가에서는 그런 것을 깨우침이라고도 했고 득도라고도 불렀다. 그렇다고 자신이 득도에 이르렀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와 천축을 다녀오면서 보았던 그 궁금증이 조금은 풀리고 있었다.
“무(無)에서 왔으니 다시 무(無)로 돌아가는 것.”
동천몽이 중얼거리며 손을 뻗었다.
강력한 극양의 기류가 쏟아지며 우공선사의 시신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뼈까지 완전히 삼매진화에 타버린 것이었다.
“끝났사옵니다.”
돌아서자 덕배가 다가와 있었다.
동천몽이 천천히 서원을 향해 걸어갔다.
온 마당에는 핏물과 시신이 가득했다. 놀랍게도 싸움은 반각이 채 소모되지 않았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일은 포달랍궁 무사들의 피해는 단 한명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강함을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절정의 인물들이었다.
“철수 시켜라.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대기 하도록.”
“대법왕님의 명을 받습니다. 나를 따르라.”
덕배가 앞장서 몸을 날려고 순식간에 죽림에서 포달랍궁 무사들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동천몽은 우두커니 서서 죽은 무림맹 무사들을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동천몽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 동천몽의 모습이 죽림에서 사라지자마자 까마귀들이 벌떼처럼 날아내려 시신들을 쪼기 시작했다.
마침내 무림맹이 항복을 선언했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광동과 복건까지 함락된 것이었다. 물론 곳곳에서 무림맹의 잔존세력들이 저항을 하고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완전한 흑도천하가 이루어 졌다. 천하의 주인이 바뀐 것이었다.
천하가 바뀌면서 가장 먼저 일어난 변화는 피바람이었다.
잃어버린 세월을 외치며 흑도의 보복은 조직적이고도 무차별하게 시작되었다. 먼저 무림맹에 충성했던 군소상가들이 피를 흘렸다. 그들이 장악하고 있던 상권과 시장을 완전히 풍비박산 났고 그 동안 무림맹 눈을 피해 은밀히 흑도에 눈도장을 찍으며 자금 지원을 했던 상가들이 그들의 시장을 차지했다.
상가를 시작으로 불기 시작한 피바람은 중원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오랫동안 무림맹이 지배해온 떼를 완전히 벗겨 내겠다는 것이 흑도 고위층의 뜻이었다. 밑바닥에서부터 완전히 뒤집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닦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목와북천의 뜻은 생각처럼 천하의 물갈이는 일사분란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무림맹의 지배했던 세월이 너무 길었고 단 시간에 모든 것을 바꾸려 하자 혼란이 일어난 것이었다. 무림맹과의 격렬한 싸움으로 아직 상처도 채 아물지 않은 가운데 아래 구석구석까지 명령이 전달 될 리가 없었다. 점차 천하는 엉망진창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고도 장안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봄을 재촉하는 비였는데 비 때문인지 저자거리는 한가했다. 얼마 전까지 장안의 저자거리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흥청거렸다. 인근에 사천당문이라는 명문과 청성파와 아미파 점창파까지 끼고 있었고 소속 문인들과 제자가 되고자 천하각처에서 찾아오는 사람들, 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상인들까지 어우러져 장안은 사철 인파로 북적였다.
그런데 지금 큰 비도 아닌 가느다란, 는개에 가까운 비인데도 저자거리는 조용했다. 흑도천하로 인해 당문과 아미 청성 점창이 문을 닫았고 자자거리의 상인들까지 타격이 미쳤다. 저자거리에도 무시 못할 이권이 형성되는데 대부분이 무림맹과 연줄이 닿은 사람들이 지위를 누렸다. 그런데 흑도천하가 되자 그들이 모두 쫓겨나고 새로운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러자 상인들까지 모두 자리를 떠나 거리는 휑했다.
“아이고 이놈들이 사람을 치네.”
조용한 저자거리 위로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터져나왔다.
“죽여라. 차라리 날 죽여 임마.”
마천루라고 씌인 주루 앞 길가로 한 거렁뱅이 사내가 쓰러져 악을 쓰고 있었다.
“사람 죽는다. 마천루 점소이 놈이 멀쩡한 손님을 팬다. 으아아아.”
거렁뱅이 사내는 어딜 맞았는지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터뜨렸다.
“쳐라. 더쳐 이 개놈아.”
거렁뱅이 사내가 벌떡 일어나 흉흉한 기세로 버티고 있는 점소이를 향해 돌진했다.
점소이 눈이 커졌다.
“이 쉬발놈이, 진짜 죽고 싶나보네. 그렇다면 죽어야지.”
맷돼지처럼 대가리를 앞세우고 돌진해오는 거렁뱅이 사내의 머리통을 옆에 놓인 장작개비를 들어 후려쳤다.
빠악!
“아이고, 내 머리 깨진다.”
거렁뱅이가 머리를 감싸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점소이가 장작개비를 들고 쓰러져 뒹구는 거렁뱅이를 향해 다가갔다.
“제발 죽어라. 어서 죽어다오.”
점소이가 마구 장작개비로 두들겼고 거렁뱅이는 죽는다고 소릴 질렀지만 지나가는 사람 누구도 나서 말리지 않았다.
“네놈이 무림맹 시대 때는 그런 방법으로 끼니를 해결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흑도시대에는 안 통한다. 빨리 돈 내놔. 없으면 장기라도 기증해라.”
점소이가 다시 장작개비를 쳐들어 올리자 탁 하며 누군가 팔목을 잡았다.
“이건 또 웬 피라야. 엇!”
자신의 팔을 뒤에서 잡은 사내를 돌아보던 점소이가 흠칫했다.
한 명의 흑의사내가 팔목을 잡고 있었는데 은근 슬쩍 빼보려고 힘을 주어봤지만 꼼짝을 하지 않았다. 점소이 또한 한 완력 하는데 도무지 묶인듯 꼼짝하지 않자 목소리를 낮췄다.
“보아하니 그냥 지나갈 수가 없어 나선 것 같은데 날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 하면 오산이오? 나쁜 놈은 저놈이오? 글쎄 밥을 쳐 먹고 돈이 없다고 드러 눕지 않소. 그래서 일어나라고 멱살을 잡았더니 맞았다고 저 난리이오.”
“얼마더냐?”
“손님이 주시려고요. 은자 닷푼입니다.”
흑의사내가 은자 닷푼을 꺼내 점소이에게 건네주었다.
닷푼을 받은 점소이가 다시 한 번 흑의사내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하며 들어가 사라졌다.
“나리 고맙사옵니다. 나리께서는 이놈의 주인이십니다. 도와주신 김에 은자 한냥 만 어떻게 안될까요?”
흑의사내가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거렁뱅이 사내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흑의사내가 자신을 내려보자 히죽 웃었다.
“너무 많나? 그럼 반냥만?”
흑의사내가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일어나시지요.”
흑의사내가 존대를 하자 거렁뱅이 사내가 멈칫 했다.
흑의사내가 버럭 소릴 질렀다.
“일어서란 말 안들리오?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오?”
거렁뱅이 사내가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매서운 눈빛으로 거렁뱅이 사내를 쏘아보던 흑의사내 기가 막히다는 듯 비 내리는 하늘을 올려 다 보았다. 얼굴 위로 빗줄기가 떨어지는 데도 흑의 사내는 한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뉘…뉘시오. 날 아시오?”
한참 얼굴에 비를 맞으며 서 있던 흑의사내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뚫어져라 쳐다보던 흑의사내가 주루 안으로 들어서자 거렁뱅이가 잽싸게 뒤를 따라 들어갔다.
겨우 쫓아낸 거렁뱅이가 다시 들어서자 점소이가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여기까지, 넌 안 돼.”
“들여 보내거라.”
앞서가던 흑의 사내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점소이가 안된다고 말하려 했지만 흑의사내의 목소리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슬며시 점소이가 앞을 비키자 거렁뱅이 사내가 쪼르르 달려가 흑의사내가 앉은 탁자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소인 밥 사주려고요. 그렇잖아도 먹긴 했지만 아직 양이 안찼는데 감사하옵니다. 이봐. 뭐하나? 여기 주문 받아야지.”
점소이가 쏟아보자 흑의사내가 말했다.
“시키는대로 주거라. 내가 계산하겠다.”
그제서야 점소이가 다가왔다.
그러자 거렁뱅이가 다리를 꼬더니 목에 힘을 주고 말했다.
“그럼 시켜볼까? 여기 용구탕 되나?”
흠칫!
점소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더듬거렸다.
“아…안되는데?”
“발제탕은?”
“그…그것도 안 돼.”
“그럼 발육호상육은 되겠지?”
점소이가 인상을 썼다.
거렁뱅이가 말한 요리들은 하나같이 최고급들이었다. 워낙 고가이기 때문에 일 년가도 한 그릇 팔릴까 말까하여 이 년 전부터 취급을 하지 않는다.
“그럼 뭐가되나?”
마음 같아서는 한대 쥐어 박고 싶었지만 흑의사내 눈치를 보며 꾹 눌러 참았다.
“서돈육과.”
“아 쥐새끼와 돼지 살코기 섞은 편육 말하는군. 그런 후진 것 말고는 없나?”
이쯤되면 부처님이라도 폭발해야 한다.
점소이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으므로 주먹을 쳐들었다.
“상놈의 새끼가.”
“만두 이인 분 주게.”
점소이가 고개를 돌렸다. 흑의사내가 조용히 다시 말했다.
“거지 주제에 아직 정신을 못차린 것 같네. 만두 이인 분 가져다주게.”
“알겠습니다.”
그러면서 거렁뱅이를 죽일 듯 노려보고 돌아갔다.
거렁뱅이가 흑의사내를 향해 따지듯 말했다.
“대협님, 이왕 보시를 하시려거든 화끈하게 고급으로 하실 일이지 만두가 뭡니까? 내가 지금 만두 따위를 먹게 생겼습니까?”
흑의사내가 혀를 찼다.
“쯧쯧! 찬밥 더운밥 가리는 걸 보니 아직 정신 차리려면 멀었군. 그나저나 그 많은 돈 다 어디다 버리고 그렇게 거지꼴이 되었소?”
흠칫!
거지가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뱀 눈처럼 좁혀 흑의 사내를 살폈다. 자신은 얼마 전까지 천하에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을 만큼 돈이 많았다. 그런데 사기를 당하고 완전히 알거지가 된 것이다. 그런데 흑의사내의 말투를 들어보니 자신의 과거를 훤히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나…날 아시오?”
“알지.”
안다는 말에 거렁뱅이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고 흑의사내를 다시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도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언뜻 닮은 사람은 있긴 했지만 전혀 그 사람일 가능성은 없었기 때문에 다시 물었다.
“날 어떻게 아시오? 난 대협님을 처음 봅니다만?”
“그래요? 난 당신을 잘 아오.”
자신을 잘 안다는 말에 기쁘면서도 한 편으로는 신경이 쓰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에게 단 한 번도 잘해준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을 아는 사람은 모두 적으로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친절을 베풀자 갑자기 의심이 생긴다. 백정들 말에 의하면 소를 잡을 때 물을 배불리 먹인다고 했다. 물론 무게가 많이 나가도록 하기 위한 수작인데 혹시 자신도 소처럼 배불리 먹여 놓고 죽이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 싹텄다.
선한 일을 한 기억이 없기 때문에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점소이가 가져온 만두가 갑자기 돌멩이로 보였다.
거렁뱅이가 만두에 일체 손을 대지 않자 흑의사내가 만두를 주워 한 입 덥썩 물었다.
시끄러울 만큼 소니라에 씹어 삼켰고 배가 고팠던지 삽시간에 절반을 비웠다. 워낙 흑의사내가 맛있게 만두를 먹자 거렁뱅이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머리속을 스치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먹고 죽은 귀신은 화색도 좋다.
거렁뱅이의 손이 뻗었다. 만두가 더 줄어들기 전에 하나라도 배에 많이 넣어야 했다. 오늘 이후 또 얼마만큼 굶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일이므로 기회가 왔을 때 가급적 채워 넣어야 했다.
우걱우걱!
양손으로 만두를 들고 먹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주머니에도 채워 넣고 싶지만 차마 그런 염치없는 짓 까지는 감행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했소? 아버지로부터 빼앗다 시피 탈취해간 그 많은 재산 말이오?”
뚝!
거렁뱅이가 씹던 동작을 멈췄다.
그러고보니 얼굴은 조금 틀렸지만 목소리는 같았는데 왜 그 생각을 이제서야 하는 것일까. 목소리는 그와 같았다. 자신이 가장 미워했고 몇 번이나 죽이려 했던 한 사내와 판에 박은 듯 같았다.
“혹시?”
“머리를 깎았을 뿐 생김새는 그대로인데 끝까지 날 알아보지 못하는 걸 보니 속된 표현으로 완전이 맛이 갔구려?”
“서…설마.”
“당신 입에서 이름 석자 나오기 기다리다 가슴 터지겠소. 그렇소. 당신이 너무 예뻐했던 동천몽이오.”
와그르!
양손에 들고 있던 만두를 떨어뜨렸고 입에 가득 씹고 있던 만두를 경악하며 내 뱉었다.
칵칵!
사래가 들려 한 참을 기침을 했다.
동천몽이 냉수잔을 내밀었다. 마시고 속을 진정시키라는 것이었다.
동천혁은 말없이 냉수를 마셨다.
냉수잔을 놓은 동천혁은 얼어 붙고 말았다. 지금 동천몽이 했던 말 중 그의 가슴을 후비는 말이 있었다. 자신을 가장 예뻐했다는 표현이었다.
자신은 결코 동천몽을 예뻐해 본 적이 없었다. 틈만 나면 죽이기 위해 머리를 짰고 자객까지 동원했으며 하도 죽지않자 언젠가는 제발 죽어줄 수 없겠느냐고 사정하기까지 했다. 물론 취중에 한 말이었지만 당시 놀라던 동천몽의 얼굴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그때 동천몽은 한참만에 충격에서 벗어난 듯 한마디 했는데 그 말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형이 날 죽이려고 하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면전에서 죽어달라고 하니까 기분이 조금 나쁜데.’
웃으며 말은 했지만 그 심정은 어땠을까.
퍽!
지체할 틈이 없었다. 무조건 살려달라고 삭삭 비는 길만이 유일한 방법이었으므로 동천혁은 무릎을 꿇었다.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나를 한번만 봐주십시오.”
머리를 숙이고 신령님께 빌 듯 동천혁의 양손바닥이 불이 나도록 마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혹시 성의없다고 할까봐 양손바닥에 힘을 주고 마구 비볐다. 손금이 사라져도 좋았고 힘이 들어 팔꿈치가 부러져도 좋았다. 부지런히 빌어 살아 날 수 만 있다면 그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참아 낼 수 있었다.
“아우님, 아니 존경하고 사랑하는 대법왕님 천혁이에요. 소생을 모르겠어요. 살려주십시오. 눈 딱 감고 한번만 자시를 베풀어 주십시오. 대법왕님은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일은 많이 하잖아요.”
“누가 대법왕은 죽이는 일 보다 살리는 일을 많이 한다 그럽디까?”
흠칫!
그 질문은 생각하기에 따라 죽이기를 더 잘한다는 말로도 충분히 해석되었다.
“아이고! 왜이러십니까 대법왕님.”
뻐어억!
비는 것으로도 부족한 듯 싶어 잽싸게 이마를 바닥에 찍었다. 너무 세차게 박았는지 피까지 흘러내렸지만 피야 다시 생겨나는 것이니 대수롭지 않았다.
“아우님 날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주시오.”
동천혁은 발악했다.
객점에서 한가로이 식사를 하던 사람들도 동천혁의 행동에 킥킥 거리며 웃었다.
“완전히 맛이 갔군.”
“그러게 말일세. 큿큿!”
툭!
동천혁의 눈앞으로 흰 천 한 장이 떨어졌다.
“이마의 피부터 닦으시오.”
“아닙니다. 대법왕님, 이놈은 뒈져야 하는 놈인데 무슨 피를 닦습니까? 거두어 주십시오.”
동천몽이 우울한 얼굴로 내려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시다. 잘난 형님의 뒤통수를 치고 그 많은 돈을 모두 빼앗아간 놈 얼굴이나 봅시다.”
벌떡!
동천혁이 용수철 마냥 일어났다.
“대법왕님께서 잃어버린 내 돈을 찾아주겠다고요? 감사합니다. 소인이 앞장을 서겠습니다.”
대법왕이라고 했다가 아우라고 불렀다가 호칭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만큼 동천혁의 감정이 안정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다만 길을 가는 동천혁의 어깨만큼은 쫙 펴져 있었다. 동천몽이 자신이 당한 것을 되갚아 주리라는 확신 때문에 상당히 의기양양해 있었다.
동천혁의 걸음은 의외로 빨리 멈췄다.
그건 곧 그가 이곳 장안에서 털렸다는 뜻이었고 그가 장안에서 뒹굴고 있는 것은 빼앗긴 돈에 대한 미련을 털지 못했기 때문인듯 했다.
“대법왕님, 저곳입니다. 저 호로새끼들이 내 돈을 강제로 빼앗아 갔습니다.”
한곳의 장원을 가리키며 욕을 뱉었다.
“무슨 장원이오?”
“대법왕님도 기억할 것입니다. 과거 한 때 본가와도 교역이 있었던 조음상가라고?”
동천몽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왜 기억을 못하겠는가. 조음상가는 장안제일의 상가이자 무가이기도 했다. 원래는 흑도의 문파였는데 무림맹 천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슬며시 상가로 옮겨갔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완전한 상가로 굳었지만 언젠가는 흑도천하가 도래할 것이라고 자신하면서 뒤로는 끝없이 무공을 발전시켜왔다. 결국 그들의 예언과 의지는 맞아 떨어진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말해보시오?”
“옛날 안면도 있고, 투자할 곳이 있다고 꼬득여 내가 넘어 갔지요.”
“한 번만 더 나에게 존칭을 쓰면 가만 두지 않겠소.”
동천몽이 눈을 부라리자 동천혁이 흠칫 했다. 하지만 동천몽은 자신으로서는 올려다 볼 수 없는 고귀한 신분으로 변했다. 더구나 옛날에 부렸던 행패까지 생각하자 도저히 형다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아니옵니다. 감히 소생이 어찌 대법왕님께.”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동천몽이 어느새 면전으로 다가왔고 눈에서 살기를 뿜었다.
“그 기세는 모두 어디 갔소? 날 죽이지 못해 안달하던 그 기세 말이오? 수 백 명의 수하들을 앞에 놓고 큰소리치던 그 광오하던 동천혁의 모습은 어디에 버렸느냔 말이오? 사내라면 끝까지 당당해야 하는것 아니오. 당당하게 말하시오. 어머니에게 계집년이라고 소리치던 그 기세로 말이오.”
부르르!
동천혁이 몸을 떨었다.
동천몽의 오른손이 떨리고 있었다. 폭발하는 살기를 안간힘을 다해 자제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 동천몽 앞에 어찌 오만방자해 질수가 있단 말인가. 쇠간을 지니지 않은 한 죽었다 깨도 동천몽의 말대로 할 수는 없었다.
“대…대법왕님 제발.”
동천몽의 관자놀이가 부들거렸다. 이를 악물며 솟구치는 살기를 참아내는 모습이었다. 한 동안 노려보던 동천몽이 조용히 돌아서며 뱉었다.
“아…아미타불!”
동천혁이 잽싸게 앞으로 나아갔다.
“서랏!”
두 사람이 다가오자 조음상가 정문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무사가 소리쳐 제지했다.
“아니 이게 누구야? 너 임마 동천혁이 아니냐?”
“또 왔어. 그 새끼 더럽게 끈질기네.”
챙!
좌측 무사가 검을 뽑아들었다.
“한 번 만 우리 눈에 띄면 그땐 모가지 자른다고 했지?
“내가 자를게.”
“알았어. 단번에 잘라버려.”
좌측 무사가 물러서고 우측 무사가 나섰다.
“흐흐! 네 이놈 자르기 좋게 목을 앞으로 뻗어라. 옛정을 생각해 신속히 처리하겠다.”
탁!
동천몽이 앞으로 나섰고 어느새 우측 무사의 검을 빼앗았다. 자신의 손에 있던 검이 한순간에 상대의 손으로 넘어가자 무사가 놀란 눈을 했다.
촥!
동천몽의 손에 쥐어진 검이 떨어졌다.
직도항룡.
비명도 없이 무사의 몸은 두 조각이 되어 쓰러졌다.
“장주 조갑지 나오라고 해라.”
“네!”
무사는 반항할 뜻이 전혀 없다는 듯 검까지 팽개치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건방진 놈들.”
등 뒤에 숨었던 동천혁이 앞으로 나와 죽은 시신을 보며 욕을 내 뱉었다. 그런 동천혁을 바라보는 동천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비켜라!”
그때 안으로부터 한 대의 화물마차가 나왔는데 마부가 소리쳤다. 동천혁이 비키지 않자 들고 있던 채찍이 날아왔다.
툭!
동천몽이 동천혁에게 뻗어가는 채찍을 향해 허공섭물을 펼쳤다. 그러자 채찍이 강력한 힘에 의해 방향을 틀어 동천몽의 손에 잡혔고 짧게 잡아당겼다.
마부는 미쳐 채찍을 놓지 못하고 그대로 날아왔고 동천몽이 오른손을 빠르게 원을 만들며 흔들자 채찍이 온 몸을 칭칭 동여맸다. 자신의 채찍에 온 몸이 묶인 마부가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저놈입니다.”
그때 놀라 안으로 달려갔던 무사가 십여 명의 무사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노인이 다가왔다. 얼굴이 붉은 것을 보아하니 상당한 내가 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죽은 무사를 힐끔 쳐다보더니 동천혁을 보며 웃었다.
“응원군을 데려 오셨구만 그래.”
“네 이놈 당장 내 돈을 내놔라.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아우님 저 늙은이가 바로 이곳 총관인 백염수라입니다. 아우님도 기억할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집에 올땐 백염수라가 아니라 백염수로 불렸잖습니까? 그런데 흑도세상으로 바뀌자 수라가 된 것이지요.”
백염수라가 동천몽을 쳐다보았다.
어디서 한 번쯤은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듯 움찔했다. 그리고 조금 전 동천혁이 아우님이라는 말을 떠올리고 눈을 모았다.
“아우님이라면 혹시 천몽.”
자신이 물어놓고 대답했다.
“아니야? 그놈에 대한 소문을 내가 듣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럴리가 없어.”
“뒈지려면 눈이 돈다는데 아우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걸 보니 네놈도 오늘로 인생 끝인 것 같구나. 아우님, 뭐해 어서 죽여버려.”
“백염수 네놈이 제 세상을 만나긴 만난 모양이구나. 아장거리던 날 향해 허리를 구부리며 깍듯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내 앞에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다니.”
“그러는 네놈이냐 말로 누구냐? 이놈 까불지 말고 유언이나 남겨라. 동천혁 네놈이 장사꾼 후예답게 어디서 동천몽 닮은 아이를 데려와 돈을 찾아보려는 모양인데 쯧쯧 불쌍한 놈. 우선 저놈부터 잡아라.”
세 명의 무사가 백염수의 명령을 받고 동천혁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그들의 앞은 일목에 의해 막혔다.
동천몽이 전음으로 명령을 내렸다. 일목의 을씨년스런 생김새에 세 사내가 본능적으로 움찔했다.
“헛! 눈이 한 개라니.”
“너는 누구냐?”
일목이 히죽 웃었다.
“하나를 세겠다. 그 안에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 있으면 하도록 해라. 하나.”
세자마자 일목의 검이 뽑혀 나왔다.
세 사람이 횡으로 서 있었는데 검이 수평으로 그어졌고 세 사람의 목이 단번에 베어졌다.
쿠쿠쿵!
몸뚱이가 쓰러지며 먼지를 일으켰다.
“다음은 누굴 죽일까요? 명령만 내려주시면 곧 바로 베겠나이다. 대법왕님.”
“대…대법왕.”
“설마 포달랍궁의 그 대법왕이란 말이냐?”
일목이 히죽 웃었다.
“요즘 가짜가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 분은 진짜이시다. 의심나면 실험해 보셔도 좋다.”
대법왕의 진위에 대한 실험은 아주 간단하다. 무공이 강한지 아닌지로 판별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확실하고 직접 부딪혀 보면 된다. 그러나 생사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아무도 의심의 시선은 던지고 있었지만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피식!
동천몽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확인하고 싶으면 빨리 시작하라는 재촉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고 동천몽이 백염수를 보았다.
“네가 확인해야 하지 않겠느냐?”
스으으!
그대로 백염수에게 다가섰다. 백염수가 본능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동천몽을 후려쳤다.
휙!
그러나 손을 채 반도 뻗지 못했고 어느새 동천몽은 백염수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휙!
백염수는 손목을 빠르게 반 바퀴 돌려 뽑아내려 했다. 그러나 동천몽의 손은 요지부동이었고 벼락같이 왼손을 들어 쳤지만 이 역시 잡혔다.
순식간에 양손이 동천몽에게 붙잡히자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늙은이답게 그의 경험은 풍부했다. 면전의 동천몽을 향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박치기를 시도한 것이었다. 양손이 잡혔으니 그 보다 더 확실한 공격은 없었다.
그런데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고 말았다. 자주는 아니지만 재수가 없으려면 아주 희귀한 경우에 봉착하여 낭패를 당하는데 백염수가 그러했다. 사실 이 상황에서 백염수의 수법은 아주 적절했고 그 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상대인 동천몽이 박치기 하나로 한 지역을 주름잡았다는 것이 그에게는 치명적인 불행이었다.
빠아악!
백염수의 머리가 공격하자 동천몽 또한 일두사를 날렸고 두 머리가 정통으로 부딪힌 것이다.
백염수가 멍한 얼굴을 했다. 워낙 강한 충격에 휩싸이다보니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은 것이다. 멀건 눈빛으로 동천몽을 보았는데 그제서야 조금씩 고통이 밀려오는 듯 표정이 우그러졌다.
“맙소사.”
“초…총관님 이마가 들어가버렸다.”
백염수의 툭 튀어나온 이마가 안으로 푹 꺼져 있었다.
휘청!
쓰러질 듯 비틀 거렸지만 동천몽이 양손을 잡고 있었으므로 넘어지지는 않았다.
잠시 고통에 이를 깨물던 백염수가 빠져나가기 위해 양손을 비틀었지만 묶인 것 같았다.
화악!
동천몽이 양손을 잡아당기자 앞으로 상체가 쏠려왔고 다시 머리를 들이 박았다.
빡!
“어큭!”
휘익!
세차게 잡아당겼고 강한 반동에 끌려왔다.
동천몽은 다시 머리로 박았다.
빠악!
“으컥!”
백염수의 얼굴은 피로 범벅이 되었다.
그때 부하들이 백염수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일목의 검이 가만 있지 않았다. 일목의 검에 부하들은 순식간에 베어졌고 백염수의 눈은 더욱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다.
공격을 당할 바엔 차라리 아픔을 참고 선공을 취하는 것 뿐이었다.
“개씨발!”
백염수가 악을 쓰며 대가리를 날렸고 동천몽은 미소를 지으며 더욱 세차게 박았다.
빠샤!
“흐흑!”
무진장 아팠고 백염수의 눈이 모아졌다.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동천몽이야 말로 박치기에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얼굴에 피범벅이 된 자신의 머리를 박는데 어떻게 한 방울도 묻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대부분 신체가 접촉되면 상대의 피가 묻는다. 그런데 동천몽은 말끔했다. 그것은 시사하는 바가 컸고 가장 확실한 것은 박치기에 관한 자신보다 월등하다는 것이었다.
퍽!
퍼퍼퍼!
동천몽은 끝없이 머리를 박았다. 피하고 싶은 맘이 절절했지만 양손을 꼭 잡고 있어서 옴짝달싹 할 수도 없었다.
더욱 환장한 노릇은 안으로부터 지원무사들이 속속 몰려 나왔지만 일목에 의해 썩은 집단처럼 베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동천몽이 포달랍궁의 대법왕이란 사실을 확실히 인정했지만 이미 늦었다. 사실 처음부터 알았더라도 강호의 정세와 욱일승천의 기세로 뻗어가는 조음상가의 기세를 봤을 때 쉽게 고분고분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어쨌든 자신의 운명은 남의 손에 의해 흘러가기 시작했다.
얼굴은 피범벅이 되었고 호흡이 거칠어지고 정신이 몽롱한 것이 죽음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마 이 세상에서 서서 죽은 사람은 자신이 처음일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몸은 늘어졌고 반항력까지 상실했지만 동천몽은 절대 쓰러지지 않도록 양손을 붙잡고 머리로 박아댔다.
빡--빠바박!
“백염수 이제 주제를 알겠느냐? 이유야 어쨌든 네놈은 과거 한때 우릴 주인으로 섬겼다. 어린 우리 앞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지.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다고 이렇게 확 안면을 몰수 하면 안된다. 제 분수를 모르면 장수에 곧바로 영향이 오느니라.”
빠악!
다시 한 번 받혔고 백염수의 고개를 푹 떨구어져 종처럼 흔들 거렸다.
“한번 주인은 영원한 주인이다.”
“그럼요…그럼요.”
동천혁이 맞장구를 쳤다.
오늘이 지나면 영원히 만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괴롭지만 동천혁의 기세를 살려주고 싶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자 끝없이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어줍잖은 기세를 세워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천몽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동천혁은 기뻐 날뛰었다.
“건방진놈들 진짜 까불고들 있어.”
검 한 자루만 쥐어주면 자신이 직접 벨 것 같았다.
동천몽이 손을 놓자 백염수의 몸이 힘없이 땅바닥으로 무너졌다. 이미 숨이 끊어진 듯 백염수는 꼼짝을 하지 않았고 고개를 쳐든 동천몽의 시선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시신 뿐이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텐데도 인적이 없다는 것은 모두 도망쳤다고 봐야 한다.
“갑시다!”
동천몽이 동천혁의 손을 나꿔잡고 그대로 몸을 날렸다.
자신의 몸이 붕 떠올라 화살처럼 날아가자 동천혁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어어억! 아이고.”
동천몽은 삽시간에 장원 깊숙히 들어갔다. 뭔가를 찾는 듯 이러지러 장원을 날아다니는 동천몽의 눈에 짐 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도망치는 식솔들의 모습이 보였다.
팟!
동천몽의 눈이 빛났고 독수리처럼 한 채의 전각 앞마당을 향해 꽂히듯 떨어졌다.
“으어어어!”
추락하듯 떨어지자 동천혁이 비명을 질러댔다.
전각 앞 마당에는 두 대의 마차가 세워져 있었는데 십여 명의 무사들이 부지런히 물건을 싣고 있었다. 동천몽이 나타나자 마차에 짐을 싣던 무사들이 경계의 빛을 띠었다.
동천몽이 피식 웃었다.
무사들 손에 들린 것은 자기와 그림 등 진귀한 보물들이었다. 마차를 세워놓고 귀한 물건들을 싣는 것을 고위 간부가 도망치려 하고 있음을 알아 차릴 수 있었다.
“뭣들 하느냐? 서둘러라. 지금쯤 들어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짐을 싣는 무사들을 독려하며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척도 되지 않을 듯 작은 키였는데 무척 뚱뚱했다. 너무 뚱뚱한 탓에 아장거리며 걸었는데 동천몽을 발견하더니 흠칫 했다.
“뉘…뉘시오?”
경계를 하며 물었다.
동천몽이 웃음을 지었다.
“내가 변하긴 변했나보군. 당신도 날 알아보지 못하는 걸 보면 말이야. 나 동천몽이니라.”
“도…동천몽.”
조갑지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목와북천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을 돕기 위해 달려오는 시간보다 정문의 동천몽이 들이닥치는 시간이 빠를 것 같아 우선 대충 짐 몇 가지 챙겨 피신하려는 것이었다.
“저놈이다. 베라.”
조갑지가 악을 썼다.
동천몽이 오른손을 뻗었다. 매서운 바람이 열 명의 사내들을 휩쓸어갔다. 거센 돌풍이 흙먼지를 허공으로 말려 올리듯 동천몽의 장력은 열 명의 사내들을 일제히 하늘로 띄웠다.
자신들의 의지와 달리 몸이 하늘로 솟구치자 모두가 당황성을 터뜨렸다.
“엇!”
“이리욧!”
내기를 끌어올려 자신들을 끌어 올리는 동천몽의 장력에 대항하려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고 몸은 끝없이 올라갔다. 한 순간 사내들의 얼굴에 공포가 떠올랐다.
오 육장 정도의 높이면 얼마든지 진기를 운용해 땅에 안전하게 착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높이가 되면 추락하는 속도와 위험을 가로막을 수가 없었는데 어느새 이십여 장 정도까지 솟구쳤다.
휘이이!
동천몽의 손에서 뿜어나온 장력은 기이했다.
마치 하늘에서 단단한 흡인력이 뻗어나오는 것처럼 십 명의 사내들을 계속 끌어 올리고 있었다. 끌려올라가는 사내들은 발버둥을 쳤지만 그들의 몸은 어느새 오십여 장까지 치솟아 까마득하게 보였다.
엄청난 높이에 사내들 얼굴에 공포가 떠올랐고 마침내 몸이 멈췄는데 사색들이 되어 더듬거렸다.
“으으으!”
“자…장주님께서 개미로 보이잖아.”
얼마나 높이 올라왔는지 지면의 사람들이 아주 조그맣게 보인다. 만약 여기서 떨어지면 말 그대로 추락이었다.
후다닥!
퍼드득!
조금 전과 달리 이번에는 밑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힘이 받치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들은 본능적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양 손을 새 날개처럼 뻗어 퍼득거렸다. 워낙 공포스러웠고 경황이 없었기 때문에 손에 쥐고 있던 검도 모두 떨어뜨리고 없었다.
보나마나 밑에서 받쳐 올리는 힘을 회수해 버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미친듯 두려웠다.
“으으으!”
“덜덜덜!”
급기야 사내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살려주십시오. 제발 떨어뜨리지 말아주십시오.”
“대법왕님이라고 들었습니다. 대법왕님은 사랑이 풍부하시다고 들었습니다.”
지면에서 그 광경을 쳐다보던 동천혁은 신이나 있었다.
킬킬 거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새끼들아 사랑을 아무한데나 베푸는지 아느냐? 네놈들에게 베풀 사랑은 없느니라.”
동천혁은 오른 손 주먹을 왼손 사이로 쑤셔 내미는 욕을 연거푸 해댔다.
“패죽일 놈들아 손만 퍼득거리면 새냐? 주둥이로 새소리까지 내보거라. 그러면 내가 대법왕님께 네놈들 목숨을 부탁해 볼 수도 있느니라.”
“꺄욱!”
“뻐꾹!”
“부엉!”
동천혁이 소리쳤다.
“부엉이 울음소리 낸 놈 누구야? 야 미친새끼야 낮에 무슨 부엉이가 우느냐?”
그러자 부엉이 울음 소리 낸 사내가 외쳤다.
“저…저희 고향에서는 낮에도 웁니다.”
“네놈 고향이 어딘데?”
“소생의 고향은 남쪽입니다.”
“똑바로 해 새끼들아.”
“까욱”
“뻐꾹!”
“짹짹!”
열 명의 사내들이 미친 듯이 소리쳐 새소리를 냈고 동천혁은 깔깔거리며 숨이 넘어갔다.
동천몽이 우울한 표정으로 동천혁을 보며 손을 거두었다.
“어…어머니.”
“개…개자식아.”
악담을 퍼부으며 사내들은 떨어졌다.
거센 먼지가 피어오르며 떨어진 사내들은 조용했다. 동천몽의 고개가 돌아갔다.
시선이 허공에 집중된 틈을 노려 몰래 도망치려 했던 조갑지는 일목에 의해 앞길을 차단당하고 있었다. 동천몽이 천천히 조갑지를 향해 다가갔다.
“이…이보시게. 아니 존경하는 대법왕님 소생의 말을 조금만 들어 주십시오.”
“빼앗긴 돈이 얼마라고 했소?”
동천혁이 큰 소리로 말했다.
“황금 백관.”
동천몽이 마차를 쳐다보았다.
마차 안에 아무리 귀한 것이 실렸다고 새도 황금백관어치는 되지 못할 것이다.
동천몽이 눈앞에 있는 전각을 쳐다보더니 주위를 한번 휘둘러보았다.
“마차에 실린 보화는 물론 장원까지 넘기면 그럭저럭 백관은 되겠군.”
“그…그건 안.”
안된다고 말하려다 집을 다물었다. 지금은 고분고분 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 든 것이다. 일단 위기만 벗어나면 된다. 목와북천의 무사들이 도착하면 상황은 바뀐다.
부욱!
동천몽이 손을 뻗어 앞가슴 의복을 찢었다.
툭!
의복이 찢어지고 한 통의 봉서가 나왔는데 장원문서였다. 집문서를 살피던 동천몽이 일목을 향해 말했다.
“가서 문방사우를 준비해오라.”
“무…문방사우?”
일목의 눈이 번쩍거렸다.
언뜻 강호인들의 별호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특히 준비 해오라는 말을 보면 별호와는 일단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게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눌러 참았다. 아무리 주종관계지만 무식이 폭로되는 건 싫다. 더구나 동천몽 또한 그다지 유식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한 번도 자신보다 학문 면에서 앞선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싫었다.
“알겠습니다.”
거칠게 돌아섰다. 돌아서는 자세만 봐서는 완전히 뜻을 이해 한 동작이었다.
앞마당을 벗어난 일목의 눈이 횃불처럼 이글거렸다.
다른건 몰라도 동천몽 보다 무식하긴 싫었다. 최소한 상식과 지식 면에서 만큼은 앞서고 싶었다. 그래야 아무리 상전이라고 해도 함부로 못한다는 것이 죽은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일목의 신형이 빠르게 움직였다.
사람을 찾아 움직이는 것인데 모두가 도망친 듯 개미새끼 한 마리 발견되지 않았다. 너무 늦어도 괴팍한 성질에 가만 있지 않을 것이므로 서둘러 찾아야 했다.
팟!
미친 듯 장원을 뒤지고 다니던 일목의 눈이 빛을 발했다.
한 사내가 눈에 띄었다. 보따리 두개를 짊어지고 도망치는 것이 직위도 별 볼일 없는 하급 식솔이었다.
탁!
“끄억!”
일목이, 그것도 하나 뿐인 눈을 번쩍거리며 앞을 막아서자 사내가 기절할 듯 놀라며 양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보따리를 떨어뜨렸다.
“허허헉! 누구세요?”
사내는 일단 보따리 앞을 막아섰다.
일목이 인상을 썼다. 그러자 더욱 험악했고 사내는 부르르 떨었다.
“명함이 뭐냐?”
멈칫!
사내가 눈을 굴렸다.
“이자식이 명함이 뭐냐니까?”
“그… 그게 뭔대요?”
“이름을 묻는 것 아냐? 아 이 자식 진짜 무식하네.”
“아 그렇습니까? 이 상황에서 이름은 왜?”
“됐다. 관두고 너 문방사우가 뭔지 알아?”
사내가 눈썹을 찌푸렸다.
“문방사우라면 그 문방사우 말입니까?”
“응 그래.”
“아니 문방사우도 모른단 말입니까?”
“개새끼야 몰라서 묻는게 아냐? 그냥 묻는거야? 네놈이 아는지 모르는지 알고 싶어서?”
“아무리 부목이지만 문방사우를 모르겠습니까?”
“자세히 설명을 해봐 새끼야.”
“문방사우라는 건 한 마디로 지필묵연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안다니까 이 새끼 계속 인상 쓰네. 가봐.”
무섭게 나타날 때와 다르게 선뜻 가라는 말에 사내가 머뭇거렸다.
일목이 버럭 소릴 질렀다.
“꺼져 새꺄. 빨리.”
“네.”
사내가 짐 보따리를 매고 바람처럼 도망쳤고 일목이 웃음을 지었다.
일목이 내민 종이와 붓과 벼루 먹을 건네며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동천몽이 인상을 썼다.
“뭐하느냐? 어서 먹을 갈거라.”
“아예!”
일목이 먹을 갈았고 동천몽이 조갑지에게 붓을 내밀었다.
조갑지가 붓을 쥐며 쳐다보았다.
동천몽이 먹이 가득한 벼루를 옆에 놓으며 말했다.
“내가 부르는 대로 써라. 나 조갑지는 오늘 오시부로 조음상가를 동천혁에게 진 부채의 댓가로 모두 넘긴다. 오시 이후부터 이곳의 주인은 동천혁이다. 넘기는 재산에는 내가 부리던 모든 식솔까지 포함된다.”
조갑지가 경악했다.
“뭐하느냐? 빨리 써라.”
“아…안됩니다. 절대 쓸수…헉!”
조갑지가 경악했다.
슬며시 쥔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에 쥔 붓이 먹물을 적셨고 동천몽이 활짝 편 종이에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안간힘을 다해 붓을 놓으려 해도 손가락이 벌려지지 않았고 남의 팔처럼 순식간에 종이 위에는 자신의 필치로 글씨가 쓰여졌다.
사사삭!
자신의 수결까지 완벽히 마치자 동천몽이 붓을 빼앗았고 바람에 글씨를 말리더니 접어 동천혁에게 넘겼다.
문서를 받아 든 동천혁의 입이 쩍 벌려졌다.
“안되오. 그건 내 뜻과 전혀 상관 없는.”
“너만 죽으면 저 문서는 완벽해진다.”
빠악!
동천몽의 주먹이 머리를 쳤고 조갑지의 신형이 천천히 넘어졌다.
동천혁은 문서를 보고 또 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런 동천혁을 무거운 시선으로 보던 동천몽이 입을 열었다.
“형.”
동천혁이 놀라 쳐다보았다.
“형이란 호칭이 오늘로 마지막이 될 것이오. 두 번 다시 내 입에서 형이란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서로 얼굴 보는 것도 마지막이오. 만약 다음에 또 만나게 되면 그때는 내 손에 죽을 것이오.”
흠칫!
동천혁이 기겁했다.
동천몽이 나직히 말했다.
“건강하시오.”
깊은 시선으로 다시 한 번 쳐다본 동천몽이 몸을 돌렸다. 일목이 뒤를 따랐고 동천몽은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멀어져 갔다. 동천몽이 사라지자 동천혁의 표정이 살벌해졌다.
“개자식, 어휴 그냥.”
동천혁이 이를 갈아 붙였다.
“네놈을 언젠가는 내 손으로 죽이고 말겠다.”
살기 담긴 목소리로 욕을 퍼붓고 동천혁은 문서를 품에 넣었다. 이제 문서를 갖고 관할 관부에 자신의 재산으로 등록만 하면 된다.
동천혁이 관부를 가기 위해 막 몸을 돌릴 때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엄청난 사람들이 날아내렸다.
동천혁의 눈이 커졌다.
비록 무림인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자신의 집을 출입한 무림인들을 보았다. 그래서 척 보면 그들의 능력을 대략 읽을 수 있었는데 눈앞에 나타난 사람들은 절정의 고수들이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일백여 명 가까운 숫자였다.
그들이 고수라는 것은 조갑지의 시신을 보고서도 함부로 경거망동 하거나 흥분하지 않았고 날아 내려서자마자 일제히 오와열을 맞추어 정렬했다는 것이었다.
뚜벅뚜벅!
수뇌로 보이는 사내가 다가왔다.
사십 중반쯤 되어 보였는데 관옥같은 용모였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고 있었는데 옆구리에 허름한 장검 한 자루를 꿰찼다. 병기는 제이의 생명이다. 그래서 너 나 할 것없이 무척 포장에 공을 들이는데 중년인의 검은 평범하다 못해 초라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절대 초라해 보이지 않는다.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혹시 동천혁 공자 아니시오?”
동천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을 알고 있어서 굳어진 것이 아니라 입가에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 상황이면 대부분 다짜고짜 검을 뽑아들거나 흉악한 기세로 겁을 준다.
‘다르다!’
자신이 지금까지 봐왔던 강호인들과는 차원이 다름을 느꼈다.
“뭣들 하느냐? 조 장주 시신을 수거해 양지바른 곳에 묻거라.”
“예 단주.”
두 명의 무사가 조갑지의 시신을 감싸 사라졌다.
동천혁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조갑지와 함께한 시간이 적지 않아 목와북천의 세력 편재에 대해 조금 알고 있었다. 그중 단주로 불리는 집단은 딱 한 곳 있었다.
“무…무혈단?”
흑의중년인이 웃었다.
“우리를 어떻게 아시오? 맞소이다. 우린 무혈단이오.”
동천혁은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너무 놀라 쉽게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고 조금 전까지 달콤한 미래가 갑자기 암흑천지로 바뀌는 것 같았다.
무혈단(無血團)은 백쾌섬의 친위대이다. 백쾌섬이 직접 골라 선발한 고수들로 살인을 해도 피를 보지 않는다 하여 무혈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피가 흘러나오지 않게 죽인다는 것은 그만큼 솜씨가 고절하다는 반증이다.
“동공자에게 한 가지 묻겠소이다.”
“예 뭐든지 물으십시오. 아는대로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동천혁이 넙죽 허리를 구부렸다.
무혈단주 용천명이 웃음을 짙게 지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적극 협조해주신다니 기쁩니다. 조금 전 동공자와 같이 있던 인물이 혹시 대법왕이란 자 아니었습니까?”
“맞습니다. 대법왕이란 자였습니다.”
“사적으로 동공자 아우 되시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난 아직까지 그 놈을 한 번도 내 동생으로 인정해 본 적이 없습니다.”
동천혁이 대번에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놈은 벼락을 맞아야 할 놈입니다. 조금전 나에게 온갖 지랄을 떨고 떠났습니다.”
“떠난지 오래되었습니까?”
“아직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부지런히 추적하면 한 시진 이내에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발 그놈을 잡아 죽여 주십시오.”
“고맙소이다. 과연 동공자는 우리의 친구입니다.”
“별말씀을, 어서 지체 할 시간 없소이다. 어서 쫓아 놈을 꼭 죽여 주십시오.”
“들었느냐? 모두 나를 따르라.”
“반드시 죽여주십시오. 기어코 죽여야 합니다. 그놈 얼굴도 보기 싫습니다.”
“염려 마시오.”
웃으며 대답을 하던 용천명이 멈칫 거렸다.
용천명이 주위를 살폈다. 그와 동시에 도열해 있던 부하들까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 주위를 휘둘러 보았다. 그러나 그들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들은 하나같이 돌덩이가 되어있었다.
‘이런!’
용천명의 낯빛이 굳다 못해 하얗게 변해지고 있었다.
상상을 초월한 기운이 압박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서운 힘을 발출하는 상대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자신들은 포위된 것이다. 그것도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에 의해 철저히 묶이고 만 것이었다.
“흐허허헉!”
문득 동천혁이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의 몸은 북풍한설에 떠는 문풍지 같았는데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 전 분명히 떠난 동천몽이 다가오고 있었다.
“대…대법왕님.”
동천혁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동천몽은 밝은 미소를 지었다.
“끄으응!”
동천혁은 신음을 흘렸는데 태어나 사람의 웃음이 이토록 소름끼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온 몸이 뜨거워 졌고 호흡이 빨라지며 다리가 너무 떨려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다.
“왜 그렇게 떠십니까?”
“아…아닙니다. 그냥.”
동천몽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용천명을 돌아보았다.
“네가 용천명이냐?”
직설적으로 물어왔다.
더구나 한참 나이 어린 동천몽이 거침없이 하대를 한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한번쯤 인상이라도 썼을텐데 이상하게 불쾌한 감정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을 한다.
“그렇소. 대법왕.”
자신의 어투가 불만스러워 이마를 찡그렸다.
적에게, 그것도 나이가 한 참 어린 젊은 사람에게 깍듯한 예의라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입만 열면 자신도 모르게 공손한 어투였다.
‘믿을 수 없다!’
동천몽의 기세에 자신의 본능이 제압당하고 만 것이다. 본능은 의지를 앞지르고 장악한다. 그래서 의지와는 상관없이 공손해 진 것이다.
천하에서 백쾌섬 말고는 누구에게도 구부려 보거나 존칭을 사용해 본적이 없었다.
용천명이 숨을 들이켰다.
아무리 가슴을 펴고 당당해지려고 해도 자신이 대호 앞에 선 토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맙소사!”
“으음!”
수하들이 신음을 흘렸다.
고개를 돌린 용천명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자신들을 압박한 상대의 정체가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일단의 승려들이 자신들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묻지 않아도 포달랍궁이 자랑하는 천룡구십구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특히 그들 선두에 있는 맨발의 승려에게 용천명의 시선이 꽂혔다.
승려이지만 어떤 승부사보다 강한 기세가 풍겨 나왔다. 특히 맨발차림은 이쪽을 주눅들게 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만큼 도전적이고 공격적이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대법왕이시여.”
피가 고파 죽겠으니 어서 피를 흘리게 해달라는 간청이었다. 승려의 입에서 나온 말 때문인지 소름이 끼쳤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시간은 넉넉하다.”
덕배선사가 한쪽으로 물러났다.
동천몽이 용천명을 향해 물었다.
“바쁘겠구나?”
용천명은 동천몽의 질문의 뜻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백쾌섬에 대한 질문이었다. 흑도천하를 이루었으니 찾아오는 사람들 접대하랴 남은 무림맹 인물들 궤멸하랴 정신없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보고 싶군. 참 멋진 친구였어. 본왕이 아는 인물 중 유일하게 멋을 아는 친구였어. 식도락도 알고.”
그것은 틀림없는 칭찬이었다.
“아쉬움이라면 술 한 잔 대접하지 못했다는 건데, 당분간은 내 생각 할 틈이 없겠지.”
백쾌섬을 생각 하는 듯 하늘을 쳐다보았는데 입가에 미소를 띄고 있었다.
용천명이 침을 삼켰다.
가장 궁금한 것을 물어볼 때였다.
“어…어떻게 우리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까?”
동천몽이 고개를 내려 용천명을 보았다. 여전히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짙었다.
“어떻게라니? 딱 보면 답이 나오는것 아닌가?”
당연히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이었다.
조갑지의 도움은 가장 가까운 목와북천 분타로 갔다. 그럼 당연히 분타 무사들이 출발할 것이라는 것이 누구든 생각 할 수 있는 정답이었다. 그런데 동천몽의 말은 분타가 아닌 자신들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
여전히 의혹 가득한 표정을 풀지 않자 동천몽이 다시 말했다.
“그대 같았어도 알 것이다.”
입장을 바꾸어 자신일지라도 목와북천의 최고급 무사들이 온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다시 생각에 잠긴 용천명이 눈을 번쩍 떴다.
동천몽의 말뜻이 헤아려진 것이었다.
“아아!”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했다.
조갑지는 대법왕이란 자가 왔다고 전서구를 보냈다. 그건 분타 무사들 능력으로는 절대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분타주 입장에서는 곧바로 상부에 서신을 띄울 것이다. 그것도 가장 빠른 수단을 이용해서.
문제는 상부, 즉 백쾌섬과 목와북천 고위간부들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었다.
“하면?”
용천명이 눈을 빛냈다.
동천몽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본 왕은 백쾌섬과 측근들이 여기서 멀지 않은 검문산 제하궁에 묵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하궁은 흑도십문 중 가장 세력이 크다. 목와북천은 아직 세력은 있지만 본거지가 가까운 곳에 없었다. 그래서 제하궁을 임시 흑도 총단으로 삼은 것이다.
동천몽이 장안으로 온 것 또한 백쾌섬을 찾아서였다. 그러다 우연히 거지가 되어 있는 동천혁을 만났다.
아무튼 장안 분타로 날아간 전서구는 곧바로 제하궁으로 갔고 부랴부랴 백쾌섬은 이들을 보냈다.
“필시 백쾌섬은 자신이 친히 출동하겠다고 했을 것이다. 흑도천하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곳곳에서 저항세력이 등장하고 안심할 단계가 아니지. 그래서 수하들이 막았을 것이다. 만약 백쾌섬이 날 잡기 위해 출동했다가 무슨 변고라도 당하면 애써 정복한 천하가 급속히 흔들릴테니까.”
마치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동천몽의 말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비록 자신은 출동하지 않지만 필시 정예를 보낼 것이라는 걸 난 읽었다. 그래서 천룡구십구불을 대기 시켜놓고 너희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완벽한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이곳에 출동한 무혈단은 말 그대로 정예였다. 비록 무림맹을 와해시켰다고는 해도 묵와북천 또한 상처가 컸다. 그래서 정예는 아껴야 할 처지였지만 상대가 가장 큰 장애인 동천몽이었기에 과감히 칼을 뽑아 든 것이다.
“죽은 그대들 시신을 보고 백쾌섬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구나.”
그때 동천몽을 향해 또 한 명의 승려가 다가왔다.
키가 팔척에 가까운 승려였는데 비쩍 말라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휘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다가오는 승려를 바라보는 용천명은 또 다시 마른 침을 삼켰다. 자신도 벅찬 느낌이 들 만큼 강한 기세가 뿜어나왔다.
“준비를 마쳤습니다.”
동천몽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느니라. 대기하도록.”
승려가 허리를 구부리고 다시 돌아갔다. 천룡구십구불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백팔밀승이라고 들어보았나?”
“으헉!”
“저런!”
용천명 보다 수하들이 더욱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백팔밀승은 천룡구십구불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혹자는 백팔밀승의 능력은 더 뛰어나다고도 말한다.
“저들은 포위망을 벗어난 그대의 부하들을 도륙할 것이다.”
용천명이 기겁했다.
이중의 포위망을 쳤다는 것은 단 한명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동천몽이 나직이 말했다.
“시작해라.”
동천몽이 명령을 내리고 뒤로 물러났다. 동천몽이 빠지고 천룡구십구불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강력한 살상력을 지닌 무승들이지만 평소에는 부드러움과 자비로 넘쳐난다. 그런데 지금의 천룡구십구불은 염라사자를 방불케 했다. 분위기라면 무혈단 또한 뒤지지 않았는데 천룡구십구불에 비하면 현저히 떨어졌다. 냉혹하고도 매서운 분위기를 풍긴다는 것은 그 만큼 감정이나 지닌 능력이 절대의 경지에 올랐다는 반증이기 때문에 무혈단 무사들 안색은 더욱 굳어졌다. 자신들보다 높으면 높았지 낮지 않아 보였다.
콱!
용천명의 주먹이 쥐어졌다.
진정한 전사라면 절대의 위험을 헤쳐 나올 줄 알아야 한다. 불가능을 딛고 일어 설 때 능력은 한 단계 발전하고 세상을 보는 눈은 성장한다.
“흑도의 자존심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구차한 말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다.
무사에게 명예와 자존심은 절대적 가치이다. 진정한 무사는 살기 위해 싸우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알리기 위해 싸운다. 또한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만족을 위해 싸운다.
씨익!
히죽!
다가오는 천룡구십구불을 보며 무혈단 무사들이 웃었다. 그것은 비아냥도 아니었고 상대를 기죽이기 위한 전략도 아니었다. 패배가 눈앞에 보였기 때문에 웃었다.
패배 하지 않기 위해 자신은 모든 투쟁력을 끌어 내야하고 그렇게 싸우는 싸움은 짜릿하며 어떤 쾌감에 앞선다는 것이 지난날의 경험이었다.
“크흐흐!”
“으하하!”
웃음소리는 갈수록 커졌고 용천명의 신형이 날아갔다.
그는 싸울 때 항상 앞장 선다. 수뇌는 뭐든지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 용천명의 생각이었다. 수뇌가 위험에 맞서고 어려움에 앞서 뛰어들 때 그 집단은 강하고 수하는 용맹스러워진다.
쉬이이!
파파파!
용천명이 움직이자 수하들 또한 검을 뽑아들고 달려들었다.
콰아아!
용천명의 검이 덕배선사를 후려쳤다.
덕배선사 또한 기다렸다는 듯 오른손을 뻗었다.
쾅!
두 사람이 휘청 하며 한걸음씩 물러났다.
“밀종대수인.”
용천명이 신음을 흘렸다.
무림에는 입으로만 전해지는 몇 가지 전설적인 무예가 있다. 그중 하나가 지금 덕배선사가 펼친 밀종대수인이다.
알려진 무공이면 그에 대한 대비책이 나오지만 전설로만 전해질 뿐 아직 활발하게 횡행하지 않은 무공이어서 대비책이란 없다. 싸우는 당사자가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맞서는 것 말고는 없었다.
휙!
검 끝에서 파란 기가 뿜어졌다.
출렁이는 일반기와 달리 단단한 강기이다.
꽈앙!
다시 손과 검이 부딪혔다.
둘 모두 외형적으로는 누가 우세하다고 말 할 수 없었다.
파파팡!
두 사람의 옷자락이 찢어질 듯 펄럭거렸는데 천룡구십구불과 무혈단 무사들이 쏟아난 기파가 바람이 되어 후려치고 있었다. 주위로는 이미 비명이 시작되었다.
무혈단은 포위망을 뚫으려 노력했고 천룡구십구불은 매섭게 망(網)을 단단히 만들었다.
슉!
짧게 찔러 들어왔다.
빠른 공격은 검이든 주먹이든 피할 수가 없다. 물론 전혀 피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의 공격보다 이쪽의 보법이 압도적이거나 눈이 빠르며 움직여 피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절정고수들 사이에서 주고 받는 쾌공이란 범인으로서는 상상 할 수 없는 속도이기 때문에 보법으로 피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유일한 방법은 맞닥뜨리는 것이다.
딱!
명치를 찔러 들어오는 검을 덕배선사가 왼쪽으로 쳐냈다.
치잇!
힘에 왼쪽 밀려가던 검이 재차 파고들었다. 밀린 거리는 두 치 정도였는데 덕배선사의 처낸 힘은 이갑자의 공력이었다. 그런데도 고작 두치 밖에 밀리지 앉았다는 것은 용천명의 내력 또한 그에 못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는데 덕배선사가 더욱 놀란 것은 바뀐 초식이었다.
검이 밀리는 순간 찔러왔던 식(式)을 다른 것으로 바꾼 것이다. 몸속의 내력은 손이나 병기가 펼치는 초식에 따라 형태가 바뀐다. 어떤 초식이 운용되느냐에 따라 모양과 크기가 수시로 급변하는 것이다. 물론 초식을 뒷받침 하는 내력을 빠르게 변형시킬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은 없다. 그래서 고수와 하수의 내력 변화의 빠르기는 큰 차이가 난다.
<6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