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천뇌(天腦) 몰(沒)
땅에 누운 체 내려다보는 일목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는 샛별처럼 일목의 눈이 반짝거렸다.
“이놈아, 뭐라고 한 마디 해보거라. 아무 말도 않고 반항도 않으니 내 기분이 이상하지 않느냐?”
하지만 복호청은 눈만 깜빡거렸다.
“큿큿! 죽으면서 너처럼 순종적인 놈은 처음이다.”
일목이 느릿하게 다시 검을 쳐들어 올렸다.
복호청의 두 눈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쥐어 짜면 금방이라도 푸른물이 주르륵 흘러내릴 것처럼 푸르다. 항상 봐온 하늘인데 오늘 따라 너무 푸르고 맑았다. 어느 문인은 하늘을 보면 괜히 눈물이 나온다고 했는데 그 기분을 알 것 같았다. 갑자기 가슴이 찡해오더니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가주님!’
복호청은 조용히 독백했다.
‘여기까지인 듯 싶소. 당신도 나도 모두 말이오.’
상관량의 꿈은 천하 패권이었다. 상관세가가 구파일방과 사대세가를 지배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치밀한 그의 두뇌는 그를 무림맹 총관의 자리까지 올리고야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무림맹주의 자리였다.
그런데 지금 날벼락을 맞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대는 너무 강하다. 너무 강한 상대에게는 대책이 없다. 너무 뛰어나면 어떤 기교와 변칙도 통하지 않는데 지금 상관세가가 맞이한 눈앞의 적이 그러했다.
‘하늘은 가주님과 나의 운명을 여기에 멈춰 세운듯 하오. 더 이상은 나아갈 수가 없소이다.’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동천몽을 쳐다보았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와서 인가 동천몽의 모습이 너무 크고 넓어 보였다.
‘태산!’
틀림없는 태산이었다.
툭!
복호청의 목이 돌아갔다.
“총관, 복총관.”
상관황이 다급히 불렀다. 그러나 죽은 복호청은 대답이 없었고 동천몽이 다가섰다.
주춤 상관황이 뒤로 물러났고 언제 나타났는지 좌우에 버티고 섰던 상관세가의 두 호법이 동천몽을 공격했다.
빠!
빠아악!
동천몽의 좌우 주먹이 무자비하게 후려쳤다.
두 노인이 뻗어낸 장력은 파편이 되어 으스러졌고 동천몽의 주먹이 면상에 틀어박혔다.
“컥! 아그극!”
빠---바박!
동천몽의 주먹이 다시 면상을 찍었고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동천몽은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빠바바박!
마치 연습을 하 듯 두 노인의 얼굴을 때렸는데 머리통까지 완전히 부숴져 쓰러졌다.
또다른 무사들이 상관황을 막아섰고 이번에는 일목의 검에 모조리 베어졌다.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숫적 우세란 말도 두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일목의 검은 춤을 추었고 순식간에 상관세가 정문은 시산혈해가 되고 말았다.
“건방진놈들!”
무려 일백여명 가까운 무사들을 도륙한 일목이 콧방귀를 끼었다.
동천몽이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 어디 있느냐?”
슈욱!
상관황이 기습적으로 주먹을 뻗었다.
상관세가가 자랑하는 천보흑권이었다.
꽉!
동천몽 역시 지체 없이 주먹을 뻗었고 상관황의 입에 벌어졌다.
“아흐흑!”
손목이 부러졌고 손가락 다섯 개가 모두 제자리를 벗어났다.
스으!
동천몽이 다가오자 좌측으로 몸을 움직여 피했지만 잡히는 멱살을 피하지는 못했다.
와락!
멱살은 잡혔지만 상관황은 가만 있지 않고 왼손을 칼처럼 만들어 명치를 쑤셨다.
따악!
“컥!”
명치를 쑤셨는데 상관황의 손이 또다시 부서졌다. 철벽을 찌르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디 계시느냐고 묻지 않느냐?”
“흐흐! 네가 네놈에게 말 해줄 것.”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동천몽의 주먹이 입안에 틀어 박혔다.
그냥 박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주먹을 넣어 한 바퀴 돌렸다.
우드드드!
단단한 주먹이 회전을 하자 이빨이 부서지며 모래알처럼 입안을 가득 채웠다.
“아버지 계시는 곳을 가르쳐 주겠느냐?”
“밍쳥냥(미쳤냐). 창랑리(차라리) 낭죽영랑(날 죽여라)!”
콱!
동천몽이 상관황의 머리채를 잡더니 그대로 당겼다.
찌이익!
가죽이 찢겨 나는 소리가 들리며 머리가죽이 찢어지고 벗겨지며 피가 얼굴을 덮었다.
“으끄끄끄!”
상관황의 얼굴에 공포가 드리워졌다. 쉽게 죽이지 않을 기세였다. 그나마 온갖 고통을 다 맛보게 한 뒤에 죽이면 괜찮은데 사람을 병신 만들어 놓고 살려주면 그것보다 더욱 공포는 없었다.
“자 이제 말해 주겠느냐?”
“앙벙징능(아버지는) 앙롱성웡엥(악록서원).”
“한마디만 할테니 듣기 싫어도 듣도록 해라. 제대로 된 자식이라면 부모의 잘못을 지적하고 가로막아야 한다. 자식이라고 하여 부모가 하는 일을 지켜보고 그 길을 따르는 것은 부모보다 더 나쁘다. 다시 태어나면 그 때는 미치도록 선한 일에 한 목숨 바치거라.”
팍!
상관황의 머리통이 수박 깨지듯 쪼개졌다.
머리가 으스러졌는데도 몸통은 한 동안 팔딱거리며 살아 있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하고 통나무처럼 옆으로 쓰러졌다.
스윽!
손에 묻은 피를 상관황의 옷에 닦아낸 동천몽이 저 멀리 몰려 있는 상관세가의 무사들을 돌아보았다. 동천몽의 시선이 자신들을 향하자 일제히 움찔했다.
월등한 숫자지만 감히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했고 그들의 얼굴에는 살고 싶은 본능이 꿈틀 거렸다.
“일목, 모조리 죽여라.”
“네에?”
일목의 눈이 커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동천몽의 행동이었다. 지금 정문에 죽은 자만도 일백이 넘는데 저 많은 사람을 또 죽이라고 하자 살인을 싫어하지 않은 자신이지만 놀라고 만 것이었다.
“진정한 자비란 용서가 아니라 없애는 것이다. 강호에서는 특히,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이미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악으로 단단히 물들어 인간으로서의 가치는 완전히 상실된 자들이다.”
일목이 돌아서자 일제히 도주하기 시작했다.
“살자.”
“어머니.”
일제히 악을 쓰며 도망쳤고 일목이 이를 물었다. 결정은 신중하게, 그러나 결정을 내리면 미련없이 움직이라고 만경이 말했다. 일목의 신형이 바람처럼 날아갔다.
찻잔을 들어 올리는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술을 좋아하긴 하지만 아직 수전증이 걸릴 나이는 아니었다. 갑자기 닷새 전부터 잔을 들어 올리거나 젓가락을 들면 손이 떨렸다. 처음에는 괜찮아지려니 했는데 갈수록 더 심해진다.
“거참!”
이상하기 그지 없는 현상이었기에 상관량은 떨리는 찻잔 든 손을 보며 혀를 찼다.
쩝쩝!
차를 한 모금 마신 상관량이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토록 달고 맛있던 차가 오늘따라 쓰다. 손 떨림에 이어 입맛의 변화에 상관량은 늙었다는 것을 잠시 깨달으며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개묵은 아직도 연락이 없느냐?”
밖을 향해 말했다. 문밖에서 대답이 왔다.
“예 총관님.”
서장을 몇 번을 다녀올 시간이 지났다.
“위찬술도 아직 연락이 없느냐?”
“예 총관님.”
위찬술은 상관량의 지시를 받고 사가에 심부름을 갔다.
어찌된 일인지 요즘은 심부름을 보낸 부하들이 출발은 있으나 돌아오지를 않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정말로 차가 쓰다. 이런 맛을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상관량은 찻잔을 내려 놓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악록서원은 강서의 백록동서원과 하남의 회양서원 숭산의 숭양서원과 더불어 천하사대 서원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지금 천하사대 서원중 한 곳인 백록동서원은 병기를 휴대한 무림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백록동서원은 무람맹의 좌우 본영 중 좌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상관량이 대장군 역할을 맡고 있었다.
목와북천과 무림맹은 벌써 오랫동안 호남성을 두고 밀고 당기는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양쪽 모두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각오로 배수의 진을 친 피의 대결이었다.
상관량은 천천히 서원 서쪽에 있는 월담(月潭)을 산책했다. 월담은 달모양의 연못으로 수백 년 묶은 사류가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어 한결 그 정취를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물 위까지 올라온 월담의 물고기들이 인기척에 소스라치며 물속으로 숨어 들었다.
짐승은 위기를 본능으로 감지한다. 사람 또한, 특히 상관량은 누구보다도 위험에 대한 징후를 빨리 감지했다. 지금 자신의 주위로 엄청난 위험이 몰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 위험만 물리치면 더 이상 늙어 죽을 때까지 위험은 없다는 것이 상관량의 확신이었다.
문제는 이 위기를 해쳐나 갈 비책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홱!
인기척에 고개를 쳐들었다.
한명의 흑의사내가 맞은 편에서 자신처럼 산책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전시다. 저토록 한가히 연못가 주위를 산책할 여유가 없고 제대로 된 무사라면 지금 검을 뽑아들고 흑도무리를 무찌르러 전선으로 나가야 했다.
멈칫!
흑의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흑의사내는 자신을 보고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웃는 낯에 침 뱉으랴. 상관량은 얼떨결에 마주 웃음을 지어 주었다.
월담의 폭은 십여 장 정도 되었기 때문에 얼굴을 충분히 알 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전혀 기억이 없는 낯선 인물이었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얼굴인 것을 보면 좌영의 수장급 인물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수장급도 아닌 인물이 수장인 자신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쟁 중에 유유자적하는 상대를 가만 내버려둘 수는 더욱 없었다.
“뉘시오?”
흠칫!
자신이 말을 해놓고 깜짝 놀랐다. 휘하 좌장들에게는 항상 명령이었다. 전시에는 명령만이 존재 할 뿐 인간적인 면은 차후였다. 그래서 말투가 무척 중요한데 자신도 모르게 공대를 해버린 것이었다.
“내 이름을 묻는 것이오. 동천몽이라고 하오.”
“도…동천몽이라고?”
“왜 나를 아시오?”
상관량의 눈이 빛을 발했다.
동명이인일수도 있지 않는가. 자신의 기억 속에 동천몽이란 이름은 그다지 선명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 몇 번 본 것이 전부였고 장성해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화악!
상관량의 눈이 부릅떠졌다.
동천몽이 물 위를 걸어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옛날 달마대사가 갈대 잎 하나로 장강을 건넜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지만 물위에 아무것도 띄워 놓지도 않고 그냥 걸어왔다. 물론 물결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동천몽은 조용히 다가와 옆에 섰다.
“고민이 많아 보이는구려?”
상관량은 고개를 돌려 동천몽을 살피는데 주력했다. 잔뜩 진기를 끌어 올려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는데 지금 무척 혼란스러웠다.
이름만을 놓고 볼 때 그 동천몽이라는 확신을 못했지만 연못 위를 걸어오는 가공할 신법에서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를 더욱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죽이지 않으면 죽는 적이 친구처럼 곁으로 다가와 섰는데 공격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벼락같은 공격으로 상대를 죽여야 하는데 살심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었다.
“말해보시오. 내가 도움이 되면 도와드리겠소?”
목소리에 적의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진짜로 털어 놓으면 들어줄 것 같았다.
상관량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그것은 완벽한 위축이었다. 제아무리 강한 늑대도 대호 앞에서는 그저 늑대일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자신이 지금 그러했다. 아무리 용기와 힘을 내려고 해도 자꾸 호흡이 가빠지며 주눅이 들어가고 있었다.
“기억하오.”
“……”
“당신이 마차를 끌고 나타나면 아무리 바쁘고 중요한 회의 중일지라도 우리 아버님은 맨발로 뛰어나가 마중을 했소. 그때마다 당신은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짓더군.”
상관량의 얼굴이 굳어졌다.
동천몽은 계속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정성을 쏟아 당신을 영접했소. 철마다 따로 선물을 보냈고 명절이 찾아오면 역시 따로 당신에게 줄 은자를 마차에 실려 보냈지. 당시 난 술값이 없어 호시탐탐 아버지 주머니를 노리고 있었는데 얼마나 돈을 마차 가득 싣고 가는 상관 총관이 부럽던지.”
동천몽이 미소를 짓더니 돌아보았다.
“그 기분 아시오? 천하제일부호의 아들이 돈이 없어 쩔쩔 매는 그 심정 말이오? 당신한테는 물쓰듯하면서 아들에게는 은자 반푼도 주지 않는 아버지가 얼마나 밉던지 한마디 욕이라도 해주고 싶더군.”
“대법왕님 어르신을 모셔왔나이다.”
상관량이 빠르게 돌아섰다.
일목이 동오룡을 데리고 서 있었다.
상관량의 몸이 파르르 떨었다. 동오룡은 마지막으로 아껴놓은 반전 패감이었다. 동오룡만 잡고 있으면 동천비는 몰라도 동천몽은 자신있었다. 동천비는 이미 인성을 잃어 부친의 위험을 고려하지 않을 것이나 동천몽은 대법왕이었다. 설혹 부친이 밉다고 해도 대법왕이라는 신분으로 인한 주위 시선 때문에라도 동오룡을 데리고 협박하면 먹히리라 자신했는데 그만 써보지도 못하고 뺏기고 말았다.
“좌영에 있는 적은 모조리 죽였습니다.”
“으헉!”
상관량은 하마터면 연못으로 빠질 뻔 했다.
일목의 입에서 나온 지금의 말은 실로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자신의 귀에는 단 한마디 비명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데 백록동서원에 있는 무사들 모두가 죽었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휙!
상관량은 몸을 날려 앞 마당으로 갔다. 일목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수많은 시체들이 쓰러져 있었는데 아직까지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 조금 전에 죽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비명과 피냄새를 맡지 못했다는 것은 일목이 사람을 죽이면서 강한 강기만으로 소음을 차단했다는 뜻이었다.
“왜 당신의 귀에 비명이 들리는 것을 막았는지 아시오? 이유는 아주 간단하오. 당신을 좀더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죽이려 그랬소.”
흠칫!
상관량이 한 걸음 물러섰다. 그만큼 자신에 대한 분노가 크다는 반증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철저히, 그리고 반드시 끊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일초를 양보해주겠소.”
상관량의 검미가 찌푸려졌다.
일반적으로 양보는 삼초가 정석이다. 물론 완강하게 정해진 규칙은 아니지만 수백 년을 그렇게 흘러왔다. 그런데 동천몽의 입에서는 일초를 양보해주겠다는 말이 나온다.
‘일초!’
상관량은 조용히 중얼거려보았다.
일초라는 말이 오늘처럼 섬뜩하고 무자비하게 들려본 적은 없었다. 양보라기 보다는 언뜻 고문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상관량은 마다하지 않았다. 어떤 의미로 삼초가 아닌 일초를 양보해준다고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유리한 기회는 철저히 물고 늘어져야 했다.
스으으!
천보흑권의 기수식을 취했다. 강호에는 지략과 지모의 가문으로 많이 소문나 있었다. 그래서 상관세가의 가무(家武)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약자든 강자든 많이 숨겨져 있다는 것은 유리할 일이었다.
콰아아!
상관량의 주먹이 뻗어왔다.
다른 가문의 주먹처럼 강하지는 않지만 빠르다. 천보흑권 중 가장 빠른 단포권섬의 식이었다.
“으음!”
상관량의 눈이 커졌다.
야심차게 뻗은 주먹이 허공을 치고 있었다. 좀 전까지 앞에 서 있던 동천몽은 좌측으로 일보 이동해 있었다. 눈을 뜨고서도 보지 못했는데 마치 순간이동을 한 것 같았다.
슈슉!
일초만 양보한다고 했지만 생사가 걸린 일에 굳이 약속에 연연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쏟아낸 기세이므로 그대로 밀어부치기로 하고 연속 오초를 쏟아냈다.
스르르!
안개처럼 동천몽의 신형이 움직였다.
자신의 주먹은 항상 늦었다. 다가가면 피했고 격중시켰다고 속으로 환호하면 허탕이었다.
공격은 어느새 십초로 접어들고 있었는데도 옷자락도 건들지 못했다. 상관량의 안색이 흑빛으로 접어들더니 점차 바위처럼 굳어졌다. 무려 십초 동 안 전력을 다했는데도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는 것은 자신은 동천몽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상관량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공격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헛손질만은 더욱 할 수 없었다.
상관량의 눈이 기이해졌다.
영리한 그답게 유일한 해결책을 생각해 낸 것이다.
콰콰콰!
폭풍같은 주먹이었다.
한대만 맞아도 중상을 면치 못할 것 같은 주먹 세례에 동천몽의 신법이 조금 빨라졌다.
쉬익!
상관량의 신형이 뒤로 빠져나갔다. 공격하는 척 동천몽을 몰아세워 놓고 도망을 친 것이다. 상관량이 생각해낸 것은 되지도 않을 싸움에 힘을 소모하느니 그 힘을 도망치는데 사용하는 것이 그나마 승산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더욱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동천몽은 자신을 추적할 생각이 없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뛰어오르려는데 꼼짝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땅을 박차고 날아 오르려 해도 쇠사슬에 묶이기라도 한 듯 날아 오르지를 않는다.
“크헉!”
상관량이 소스라쳤다.
동천몽의 오른손이 자신을 향해 뻗어져 있었는데 강력한 흡인력인 쏟아지고 있었다. 동천몽은 지금 자신을 허공섭물의 방법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끌어당기고 있었다.
상관량은 꿈이 아닌가 의심했다.
사람을, 그것도 일류고수를 상대로 허공섭물을 펼쳤다는 얘기는 전설로도 듣지 못했다.
퍼억!
날아오르지 못하도록 위로부터 쏟아지는 힘이 어찌나 세던지 상관량은 도망만 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신이 가장 강력한 천하제일고수라고 여기는 남궁천도 자신을 허공섭물의 방법으로 무릎을 꿇리지는 못할 것이다.
척!
동천몽 면전으로 다가와 섰다.
“시발놈!”
빠악!
오른발이 면상에 작렬했다.
단번에 코뼈가 박살나며 피가 범벅이 되었다. 바둥거리는 상관량을 향해 다시 동천몽의 발길질이 가해졌다.
빠아악!
“크어어!”
상관량의 얼굴은 단 두 번의 발길질에 완전히 무너졌다.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용마산가를 빼앗은 건 나다.”
상관량은 코가 깨져 숨을 쉴 수가 없어 입을 벌렸다. 그런데 그 입으로 장화 앞 부리가 박혔다.
발끝이 목구멍까지 밀려들어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이 넘어갈 것 같았으므로 양손으로 동천몽의 발을 빼내려고 했다. 그런데 양쪽 어깨가 따끔 거리더니 팔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가지가 꺾이듯 양팔이 잘려나간 것이다.
“허꺼어어!”
숨을 쉴 수가 없었고 눈만 커졌다.
“네놈이야 말로 진짜 흑도이고 가장 악질이며 쓰레기이다. 인정하느냐?”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입속에 장화가 박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악질 좀 되는 것이 대수 인가. 쓰레기 좀 되면 또 어떤가. 살수만 있다면 악질도 되고 쓰레기도 되고 뭐든지 될 수 있었다.
동천몽이 발을 빼냈다.
“크웨에엑!”
상관량이 크게 숨을 쉬었는데 음식물까지 토해내었다.
상관량은 헐떡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살고 싶었으므로 울부짖었다.
“사…살려주시오. 뭐든지 시키는대로 하리다. 살려만 주시면 당장 중원을 떠나겠소이다.”
동천몽이 피식 웃었다.
상관량은 더욱 애절하게 매달렸다.
“대법왕님, 소인을 불쌍히 여기시어 자비를 베푸소서. 소인은 지난날의 인생을 반성하고 뉘우치며 진심으로 피해를 끼친 동각주님과 많은 무림인들에게 사죄드립니다.”
“일목, 이자가 진짜 상관량 맞느냐? 아버지 잘 보십시오. 이놈이 그 상관량 맞습니까?”
한쪽에 서 있는 동오룡을 돌아보며 물었다.
동오룡이 아무말 없이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불과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상관량은 독야청청했다. 영원히 쓰러지지 않을 것 같았고 끝없이 푸르게 가지를 뻗으며 중원을 호령할 것 같았다.
퍼억!
피범벅이 된 이마를 찧으며 흐느꼈다.
“흑흑! 살려주십시오. 대법왕님. 소인을 살려 주십시오.”
동천몽의 표정이 굳어졌다.
살려달라고 끝없이 절을 하고 이마를 땅에 박는 상관량에게서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그 것은 마치 살려주기만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늘 당한 수모를 갚겠다는 증오같았다.
‘실로 무서운 자다!’
동천몽은 상관량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고 있었다.
절대 살려줘서는 안된다. 후일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절대 선인이 될 수 없었고 개과천선과는 거리가 먼 품성이었다.
동천몽의 오른발이 이마를 땅에 대고 있는 상관량의 백회혈을 정확히 찍었다.
뻑!
“컥!”
짧은 비명을 흘리며 날아간 상관량이 바닥에 떨어졌는데 조용했다. 백회혈이라는 사혈을 격중당해 즉사 한 것이었다. 죽은 상관량의 시신을 바라보는 동천몽은 조용히 신음을 흘렸다. 시체인데도 가공할 요기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죽었지만 본능적으로 증오를 내 뱉고 있다는 뜻이었다.
잠시 죽은 상관량을 쳐다보던 동천몽은 천천히 부친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부친이 걸음을 옮겼다. 동천몽은 부친의 뒤를 본의 아니게 따라가게 되었고 두 사람은 연못가로 향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일목도 분위기를 눈치 챈 듯 사라지고 없었다.
“물어 볼 것이 있느니라. 넌 누구냐?”
동오룡이 고개를 돌렸다.
느닷없는 질문이다.
“난 네가 누군지 아직 모르겠구나.”
동천몽이 가만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런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집안이 이토록 풍비박산이 나도록 방관했느냐는 항의 같군요?”
동오룡이 매섭게 소리쳐 말했다.
“맞다. 이 아비에게 복수를 하려고 그랬던 것이냐? 형들과 널 차별한 아비가 미워 망하도록 내버려 둔 것이냐? 그래서 이제 망했으니 속이 시원하느냐?”
툭!
조금 전 사라졌던 일목이 허공에서 떨어졌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두 사람 모두 멈칫 했고 일목이 말했다.
“대법왕님게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한마디만 하겠사옵니다. 동오룡 각주님, 말씀 가려 해주십시오. 옆에 계신 분은 아드님이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의 주인이고 어버이신 대법왕님이시옵니다. 세속의 도를 누구보다도 아는 소인이기에 넘어가지만 만약 이 자리에 사대법왕이 있었다면 이미 큰 사단이 나도 났을 것입니다. 그럼.”
일목이 사라졌다.
그러자 동오룡이 웃었다.
“헛헛헛! 착착 죽이 맞는구나. 네놈이 아무리 대법왕일지라도 내게는 자식일 뿐이다. 명심해라. 내 입에서 고운 말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면 애시당초 포기해라.”
동천몽 역시 가볍게 웃음을 짓는다.
“혼자 생각하고 결정하는 버릇은 여전하시군요. 놈의 생각이고 시각일 뿐입니다. 소자는 한 번도 아버님에게 대법왕으로서 지위를 인정해달라고 하소연 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 없으니 오해 마십시오. 아무튼 하던 말씀은 계속 하지요. 핏줄이 죄를 짓고 아주 나쁜 행동으로 많은 사람에게 상처와 슬픔을 주는데도 핏줄이란 이유 때문에 옹호하고 감싸줘야 하는 것입니까?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대답해 주십시오. 내 아버지이고 내 형님이면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악착같이 편들어 줘야 하고 추켜줘야 합니까? 소자가 믿는 부처는 절대 그러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부모 형제일지라도 잘못을 저질렀으면 깨우치도록 돕고 인도하라고 했습니다. 아버님이 저지른 죄와 아들이 지은 죄를 인정하지 않고,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소자가 원하는 그때 그때에 손을 뻗어 도와주지 않는 것이 아주 섭섭한 모양이군요?”
“그렇다. 난 아주 섭섭하고 화가 난다. 힘이 있다면 널 죽였을지도 모른다.”
“솔직한 말씀이군요. 하지만 소자는 아버님을 돕기 위해 대법왕이 된 것이 아닙니다. 어쨌든 소자 에게 주었던 주루의 몫은 가져가겠습니다. 물론 본궁으로 귀속시켜 빈민 구제에 쓸 것입니다.”
“너에 게 준것이니 어떻게 쓰든 누가 뭐라고 하겠느냐? 다만 이 아비가 하고 싶은 말은.”
동천몽이 말을 가로챘다.
“모든 화는 아버지와 형님이 자초한 것입니다. 저에게 책임전가 하지 마십시오. 아버님은 공존을 모르십니다.”
“공존?”
“네 공존 공영입니다. 아버님께서 약자를 짓누르고 그들에게 천상각이란 막강한 힘을 이용해 부를 축적했듯 강호인들 또한 무력이라는 것으로 아버님을 압박한 것입니다. 누구도 먹이사슬의 권좌에 영원히 앉아 있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아버님은 영원히 잡아 먹는 위치에 있을 줄 알고 가혹한 횡포를 부렸죠. 약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 때만이 끝없는 이익을 창출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약자가 즐겁게 살 때 더 큰 이익이 돌아온다는 큰 생각은 못했습니다. 강호인들이 아버님 가슴에 못을 박은 것 처럼 아버님 또한 힘없는 군소상가와 상인들의 가슴에 말뚝을 부지기수고 박지 않았습니까? 소위 말하는 피장 파장인게지요.”
“그래서 집안 망한 것이 잘됐다는 일이냐?”
“자초한 화라는 얘깁니다.”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이냐? 난 수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
“아니지요.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아버님을 먹여 살린거죠. 집안이 완전히 무너지면 그나마 아버님께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과 지나간 과오를 깨달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날 무림맹 무사들이 본가를 점령해도 내버려 두었는데 어리석은 기대였군요. 아무튼 아버님이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큰 아들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설마 형을 죽인 것은 아니겠지?”
동오룡의 눈이 타올랐다.
만약 죽였다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경고가 들어 있었다.
그런 부친의 모습을 보며 동천몽이 잔잔한 웃음을 지었다. 동천몽이 웃으며 얼른 소식을 말하지 않자 동오룡이 버럭 소릴 질렀다.
“천비는 어딨느냐?”
“일목, 내 입으로는 더 이상 말하기 싫다. 네가 얘기 하라.”
툭!
일목이 다시 떨어져 내렸고 동오룡이 돌아섰다.
“내 아들은 어딨소?”
“각주님의 장자께서는 어머니를 겁탈하여 죽이고 사라졌사옵니다.”
“……”
동오룡이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는 듯 머뭇거렸다.
일목이 다시 말했다.
“지어미를 겁탈하고 사라졌단 말이오. 각주님께서는 사람을 낳은 것이 아니라 짐승을 낳았더군요. 그 짐승의 이름은 동천비입니다.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부인께서는 혀를 깨물어 자결하셨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직접 조사하여 알아 보십시오. 그럼 소인은 이만.”
일목이 사라졌다.
동오룡은 믿기지 않은 듯 한동안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소자더러 형님을 도와주지 않으면 모자의 인연을 끊겠다고까지 협박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목와북천의 위험에서 벗어 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소자가 돕지 않았다면 아마 붙잡혀 지금쯤 시신이 되었을 것입니다.”
동천몽이 걸음을 옮겼다.
넋이 빠진 모습으로 서 있던 동오룡이 소릴 질렀다.
“서라. 기다리거라.”
한 달음에 달려와 동천몽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다시 말해보거라.”
“그 더러운 일을 소자의 입에 다시 담으란 말입니까?”
“정말이냐?”
“훗훗! 믿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동천몽이 조용히 옆을 스쳐 걸어갔다.
동오룡은 여전히 눈만 깜빡거리며 서 있었다.
“일목, 당장 목와북천에 귀띔해주어라. 무림맹 좌본영이 완전히 무력화 되었다고.”
“존명!”
일목이 사라지는 듯 했다.
동천몽은 천천히 백록동서원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파죽지세라고 했다. 팽팽하던 싸움이 무림맹쪽으로 기울더니 순식간에 밀리기 시작했다. 한번 균형이 무너진 싸움은 일방적으로 흘렀고 불과 보름 사이에 무림맹은 호남성은 물론이고 광동과 북건만을 남기고 천하의 모든 땅을 목와북천에게 내주고 말았다.
마침내 철옹성 같던 무림맹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소림을 포함한 구파일방과 사대문파는 일제히 본거지를 버리고 광동으로 몰려 들었다. 불과 몇 일 사이에 광동성은 발디딜 틈 없이 목와북천의 치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피난 온 정파 무림인들로 가득 찼다.
“아미타불!”
소림의 우공선사가 연거푸 탄식에 가까운 불호를 외웠다.
소림은 나부산에 있는 대불사에 임시거처를 마련했다. 거처를 만련했다기 보다는 대불사로부터 제공을 받은 것이었다. 과거 현 대불사의 방장 용천선사는 달마의 진경을 구하러 소림을 찾았다. 소림은 대가람으로 천하 각처에서 달마의 진경을 얻고자 수많은 승려들이 몰려든다. 그래서 어지간한 사찰의 방장은 제대로 대접을 기대하기가 무리인데 당시 용천선사는 융숭한 우대를 받았고 그 일을 잊지 않고 이번에 소림을 받아 들인 것이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지 끝없는 피난생활, 특히 정세를 회복할 가능성이 없었기에 우공선사의 이마는 갈수록 찌푸려졌다. 자칫 소림의 역사가 끊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공선사는 대불사 회형각 앞마당에 있는 용석(龍石)의 머리에 앉아 연신 탄식을 내 뱉었다.
“아미타불!”
우공의 이마는 잔뜩 찌푸려졌다. 목와북천의 복건과 광동의 함락도 지금 추세를 보면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무림맹은 나태해졌다. 특히 강력한 경쟁자인 흑도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무림맹은 썩기 시작했다. 적이 없으면 반드시 안으로부터 썩는다. 그 결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었다.
목와북천은 가만 있지 않을 것이었다. 그동안 당한 서러움과 분풀이를 톡톡히 할 것이다. 이미 곳곳에서 보복성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소림의 제자들 모두가 이곳으로 피신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신분을 감추고 천하를 떠돌기 시작했고 목와북천에 알려진 인물들만 이곳으로 옮겨왔다. 엄밀히 따지면 제 한 목숨 살고자 도망쳐 온 것이었다.
“방장스님.”
명철이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우공선사가 쳐다보자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대불사 신세를 지실 생각 입니까?”
“벌써 답답한 게로구나?”
“솔직히 그렇사옵니다. 눈치도 보이고, 남의 집에 얹혀 사는 사람들의 기분을 이제야 알겠사옵니다.”
“그래서 옛말에 초가삼간 오막살이도 내 집이 가장 편하다고 했느니라.”
그때 우공선사의 고개가 돌아갔다.
회형각을 올라오는 산길에 한 사내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절간에 검은 속의 차림의 사내가 나타난 것도 이채로웠지만 지금은 살벌한 전쟁 중이었다. 아래서 출입자를 엄밀히 경계하고 있는 것이었다. 목와북천에서 자객을 보내 무림맹 간부들의 목을 노린다는 정보가 입수되었기 때문이었다.
흠칫!
우공선사가 다시 놀랬다.
흑의사내 주위로 보이지 않은 기세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것은 누군가 숨어서 흑의사내를 시위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같은 절정고수의 감각에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것을 보면 암중인물의 무공은 자신의 아래가 아니라고 생각 했다.
스윽!
자신도 모르게 일어섰다.
그제 서 야 명철 또한 눈이 커졌다. 우공선사가 자리에서 일어날 정도면 다가오는 흑의사내가 범상치 않다는 의미였다.
저벅저벅!
동천몽이 주위를 휘둘러 보더니 우공선사를 향해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우공선사 또한 조용히 합장으로 맞이했다.
“포달랍궁 대법왕 상천감초라 하오.”
“대…대법왕.”
명철이 기겁했다.
우공선사 또한 눈을 부릅뜨더니 동천몽을 다시 한 번 살폈다.
“혹시 천상각의 막내 공자이신?”
동천몽이 가볍게 웃었다.
“동천몽이오.”
“허어! 대법왕께서 그냥 오신 길은 아니실 것이고, 노납을 만나기 위해 이렇게 어려운 발걸음을 하시었습니까?”
“본왕이 나름대로 알아보았는데 백팔나한을 이끌고 계시던 금수선사께서 아버님을 적지 않게 도와주셨더군요.”
“별것 아닙니다. 한때 동오룡각주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은 것을 조금 돌려 드린 것 뿐이지요.”
금수선사가 상관량의 공석을 이용해 부친께 귀띔하여 동천비를 빼돌리도록 한 것이었다. 물론 동천비를 살려주어 모친께서 그런 치욕을 당했다고 생각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었다. 부친을 도와준 고마움은 고마움대로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이 도리이다.
“그럼.”
동천몽이 몸을 돌렸다.
순간 우공선사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차가워졌고 명철 또한 경악의 얼굴을 하였다.
동천몽이 곧바로 돌아섰다는 것은 그 말 말고는 일체 현 강호정세에 관해서, 무림맹의 위기에 대해서는 일체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다. 좀 더 엄밀히 해석한다면 무림맹에 관해 아주 감정이 좋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동천몽이 사라졌다.
우공선사는 한동안 얼어 붙은 듯 서 있었는데 가슴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목와북천도 벅찬데 그보다 더욱 강한 적을 두었다는 본능적인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아마 몰래 잠입해온 것 같사옵니다.”
우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문을 받고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문을 통해 들어왔다면 이미 연락이 왔을 것이다. 대법왕의 무공이면 아무리 소림의 승려들이 엄한 경계를 서고 있다고 해도 간단히 뚫을 수 있을 것이었다. 문득 맹주를 비롯한 상관량 등 일부 간부들이 천상각을 갖은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 협박하고 은자를 갈취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그냥 돌아갔다는 것은 은원을 확실히 하겠다는 것이겠지요?”
명철이 물었다.
우공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은(恩)을 확실히 정리 한 뒤 본격적으로 원(怨) 갚음에 나서겠다는 방문이 틀림 없었다.
우공선사는 다시 불호를 중얼거렸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포달랍궁까지 무림맹의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바로그때 조금전 동천몽의 입에 오르내렸던 금수선사가 나타났다.
“방장스님, 상관량 총관의 시신이 목와북천의 수중에 있다 하옵니다.”
“목와북천이 손을 썼단 말이냐?”
“시신만 확보했지 자신들이 벌인 일은 아니라고 인정했다하옵니다.”
“대법왕이로군.”
우공선사가 신음을 흘렸다.
그냥 방문 한 것이 아니다. 금수선사의 보고와 때를 맞추어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이쪽에 심어주겠다는 나름대로 치밀한 방문이 분명했다.
정도의 명숙 중 일부는 동오룡의 막내아들을 주목하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누구도 천상각의 막내아들을 주목한 사람은 없었다. 동천비를 비롯한 전부인에게서 난 자식들의 존재가 워낙 컸기에 아무도 동천몽에 관심 갖은 사람은 없었다.
우공은 정도 명숙들의 말을 따라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토록 염려 할 정도의 그릇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눈이 철저히 틀렸음을 오늘 깨달았다.
‘길은 없다!’
우공선사가 무림맹의 미래를 장담했다. 무림맹은 죽음은 있어도 생존의 길은 없었다. 우려를 하면서도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무림맹이 무너지는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정말로 궤멸될 수도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동천몽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수 있다는 것이 우공선사가 내린 결론이었다.
갑작스럽게 무림맹이 이렇게 몰리기 시작한 것도 어쩌면 동천몽의 짓인지 몰랐다.
단지 백쾌섬과 다른 점이 있다면 대화가 통할수도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어차피 천상각의 역사가 무림맹과 궤를 같이 한 이상 어떤 기회를 잡아 매달리던지 사정을 하면 최악의 결과를 방지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요는 누가 그의 마음을 돌리느냐였다. 단단하게 얼어 붙어 있는 마음을 어떤 식으로 녹이느냐였다.
‘그것뿐이다!’
그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그 방법 말고는 길은 없었다.
“맹주는 지금 어디 계시느냐?”
느닷없이 남궁천의 행방을 묻자 명철이 더듬거렸다.
“제자가 알기에 맹주님께서는 지금 무이산에 계시는 줄 아옵니다.”
“가자, 길을 채비해라.”
명철이 눈을 크게 떴다.
“맹주님을 왜?”
명철의 눈이 커졌다.
무림맹주와 우공선사는 한 배를 탔지만 무척 서먹서먹했다. 우공선사는 애초부터 남궁천에게 무통령이 내려지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았던 사람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우공이 소림의 장문인이 아니었다면 남궁천의 성격을 보아 이미 죽였을 것이다. 워낙 천하무림으로부터 신망이 두텁고 소림이라는 강호제일방파의 수장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살려둔 것이라고 대부분의 명숙들은 판단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