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52화 (52/71)

제7장 지옥의 추적

능씨의 장례식이 벌어졌다. 포달랍궁의 예법에 따라 풍장이 치러졌는데 의심산 깊은 계곡 바위에 능씨의 시신이 놓였다. 장례가 끝나고 닷새가 지났지만 동천몽은 문 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식사 때를 제외하고는 거처에서 두문불출했다.

그나마 자정경의 기합소리가 절간 같은 소월당의 침묵을 깨고 있었다.

쉭!

그녀의 검은 더욱 매서워졌다.

사실 그녀가 검을 쥔 것은 나름대로 계산 때문이었다. 식사때도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큰 소리로 말하지도 않았다. 소월당의 분위기는 공동묘지를 방불케 했다.

비록 출가인들이라고 하지만 무예집단이었다. 그것도 천하제일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집단이지만 기세와 사기에 흥망이 달려 있다는 것이 자정경의 생각이었다. 더구나 엄청난 적들을 앞에 두고 있는 포달랍궁의 입장으로서 자칫 극도의 침체에 빠질 수가 있었다. 그래서 분위기 일신 차원에서 검을 뽑아들었고 일부러 기합도 더 크게 질렀다.

“아잣!”

“끼요욧!”

자정경의 기합소리가 소월당을 뒤흔들었고 동천몽에게 맞아 입이 부어오른 천장금왕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불호를 되 뇌였다.

“아…아미타불!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그렇지.”

약을 들고 들어온 만동승의를 보며 천장금왕이 투덜거렸다.

“못마땅하신 보군요?”

“자네는 마땅하고 좋은가?”

천장금왕이 버럭 소릴 질렀다. 그런데 만동승의가 고개를 돌리고 픽 웃음을 흘렸다. 아직 입술이 부어 발음이 부정확했는데 그것 때문에 웃음을 지은 것이었다.

“그래도 좋지 않습니까?”

“좋다니? 뭐가?”

“모두가 대법왕님의 눈치만 헤아리며 침묵인데 자 사제라도 저렇게 떠들고 소리치니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마음을 헤아려 일부러 저런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더니.”

“자 사제의 기합소리가 그렇게 못마땅하십니까? 하긴 사형께서는 처음부터 자 사제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으셨지요?”

천장금왕의 눈이 커졌다.

“자…자네 무슨 말을 그렇게 아는가? 누가 들으면 정말인줄 알겠네.”

“아니란 말입니까? 대법왕님 곁에 너무 미인이 있어서 아주 불안하다고 지금도 염려하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여자가 있기에 염려 했을 뿐이지 자 사제를 미워하는 건 아닐세. 말조심하게.”

천장금왕이 정색하여 말하자 만동승의가 또다시 웃었다.

“명심하게. 난 자 사제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대법왕님 곁에 있는 여자를 경계하는 걸세.”

“넌 미워한다는 말을 무척 복잡하게 하는구나.”

말을 하던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입구에 동천몽이 우뚝 서 있었다. 두 사람은 황급히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대법왕이시여.”

동천몽이 천장금왕을 쳐다보았다.

“많이 아프겠구나. 미안하구나.”

천장금왕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옵니다. 소승은 아무렇지도 않사옵니다.”

“승의.”

“하명 하소서.”

“오심불단을 주거라.”

“네엣?”

만동승의의 눈이 커졌다.

오심불단은 소림의 대환단과 같은 포달랍궁의 보물이자 대대로 대법왕만 복용할 수 있는 희세의 영약이었다.

“아니옵니다. 소승은 건강하옵니다. 몇 일만 지나면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옵니다.”

천장금왕이 강력히 반대를 했다.

동천몽이 정색하여 말했다.

“부은 얼굴은 가라 앉는다 치자. 빠진 이는 어떻게 되느냐? 새로 나느냐?”

“그…그건 아니지만, 살만큼 살았사옵니다. 그 따위 이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사옵니다. 오심불단을 거두소서.”

“늙을수록 음식이 보약이다. 이가 없으면 당장 음식 섭취에 큰 장애가 있을 것 아니냐? 이왕 빠진 이 하는 수 없고 오심불단으로 이 값을 대신하고자 한다. 승의 뭐하느냐? 당장 가져다 주거라.”

“알겠사옵니다.”

만동승의가 밖으로 나갔고 천장금왕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동천몽이 천장금왕의 부은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 쉬었다.

두 사람은 적당히 고개를 돌리며 앉아 있었다.

반각쯤 흘러 만동승의가 옥함 한 개를 들고 들어섰다. 뚜껑을 열자 달콤한 향기가 순식간에 방안을 채웠고 율목(栗木)의 열매 만 한 크기의 물건 한 개를 꺼냈다.

감싸고 있는 검은 초를 깨뜨리자 자색 알약이 나왔다.

보통 사람이 복용해도 불로장생하며 무인에게는 삼십년의 내공을 가져다 준다는 오심불단이다. 말로만 들었을 뿐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구경을 못해본 천장금왕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이 귀한 것을?”

“약은 조용히 먹여야 효과가 있느니라.”

그럴리는 절대 없었다. 자꾸 사양하는 천장금왕의 입을 막기 위한 조치인 것이다.

“어서 받아 복용하거라.”

만동승의가 내민 약을 받아 들지 않자 재촉했다.

천장금왕이 연신 아미타불을 중얼 거리더니 약을 삼켰다.

천장금왕이 약효를 돕기 위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탁!

그 순간 동천몽의 오른손이 명문혈에 닿았다.

움찔!

운기조식하던 천장금왕이 놀라며 몸을 떨었다.

“아뭇소리 말고 내 진기를 받아 들여라.”

전이대법이었다.

자신의 내공으로 약효를 충분히 촉발시킬 수 있지만 외부에서 도와주면 내공이 더욱 증진한다. 삼십년 내공이 정설이지만 전이대법으로 누군가 내공을 얹어 주면 훨씬 더 강한 힘이 성장하는 오심불단이었다.

거절 할 수도 없고 이미 늦었다.

하는 수 없이 천장금왕은 동천몽의 내기까지 받아 들였다. 이왕지사 하늘같은 대법왕이 주입해준 진기이니 한 웅큼도 소모되거나 버려져서는 안된다.

스윽!

동천몽이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왔다.

천장금왕은 무아지경으로 빠져 들었고 한 순간 전신으로 무형의 강기가 형성되었다.

‘호신강기!’

지켜보던 만동승의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운기조식 중에 호신강기가 생성되면 평소에도 나타난다고 봐야했다. 호신강기를 지닐 정도가 되면 천하에 그다지 적수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슈우우!

온 몸을 싸고 있던 투명한 호신강기가 일제히 코속으로 사라지고 눈을 번쩍 뜬 천장금왕은 곧바로 동천몽 앞에 무릎을 꿇었다.

쿵!

“대…대법왕님의 은혜가 하늘같사옵니다.”

“속으로 병주고 약주냐고 투덜대지나 말거라.”

“소…소승이 감히.”

천장금왕이 눈을 화등잔만하게 떴다.

동천몽이 가벼운 미소를 지었고 놀랍게도 부어있던 얼굴이 가라앉아 버렸다.

“영약은 영약이군.”

동천몽 또한 놀람성을 터뜨렸다.

“금왕에게 할 말이 있어 왔으니 편히 앉거라.”

천장금왕이 결가부좌했고 동천몽이 자리에서 일어난 만동승의를 앉혔다.

“승의도 앉거라.”

“소승이.”

“승의도 앞으로 바빠질테니 관련 있다.”

만동승의 또한 맞은편에 조용히 앉았다.

동천몽이 천장금왕을 향해 말했다.

“그대를 비롯한 사대법왕이 동천비를 추적해야겠다.”

천룡구십구불을 동원해도 되었지만 동천비의 무공은 이미 마신지체에 올랐다. 부딪혀 봤자 이쪽의 희생만 생길 뿐 효과는 없을 것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천장금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을 받습니다.”

“당장 가라.”

“그러하겠사옵니다.”

천장금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큰 절을 올렸다.

동천몽은 아무렇지 않게 절을 받았다.

천장금왕이 갑자기 큰 절을 올리는 것은 한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동천비는 마신지체의 몸이다. 자칫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으므로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돌아와야 한다.”

“물론이옵니다.”

서로가 자신 있게 말하고 대답했지만 마음은 달랐다. 마신지체는 평범한 몸이 아니었다. 금강불괴에 가까워진 몸으로 동천몽을 빼놓고는 적수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꼭 성불 하소서.”

“듣기 싫다. 내년 금왕의 생신은 내 손으로 차려주겠다. 흔적만 찾으면 된다.”

동천비의 행방만 알면 곧바로 돌아오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마신지체라면 이쪽에서 행방을 알 때 상대 또한 알게 된다. 그것은 조용히 돌아 올수 없다는 얘기다.

천장금왕이 나가고 동천몽이 밖을 향해 말했다.

“밖에 누구 있느냐? 가서 무미를 불러 오거라.”

“알겠사옵니다. 대법왕님.”

동천몽이 만동승의를 보며 말했다.

“약은 넉넉 하느냐?”

흠칫!

만동승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약이 넉넉하느냐는 동천몽의 질문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앞으로 엄청난 전쟁이 일어날텐데 우리쪽 부상자들을 치료할 충분한 약을 준비하라는 말이었다.

“준비는 항상 되어 있사옵니다.”

동천몽이 고개를 끄덕였고 문밖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소승 무미옵니다.”

“들어오너라.”

눈썹 없는 무미선사가 들어섰다.

“지금 전황은 어떠하느냐?”

무림맹과 목와북천의 싸움을 묻는 것이었다.

무미선사가 말했다.

“호남성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는데 어느쪽도 우세를 지키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무미선사는 그간 들어온 정보를 모조리 보고했다.

동천몽은 아무말 않고 무미선사의 얘기를 끝까지 듣더니 나직히 말했다.

“당장 상관량의 행방부터 파악해라.”

“상관량을 비롯하여 무림맹 고위간부 이십여 명은 항상 우리측에서 종일 감시하고 있사옵니다.”

그것은 상관량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동천몽의 눈이 가늘어졌다. 실낱처럼 가늘어진 동천몽의 눈에서 차가운 냉기가 뿜어나왔는데 그것은 피냄새를 그리워하는 야수의 살기였다.

“일목!”

툭!

항상 그렇듯 일목이 툭 떨어져 내렸다.

그걸 본 무미선사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십장이내에 은신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도무지 파악 할 수가 없었다. 몇 번 정확한 위치를 파악해보려 했지만 아지랑이처럼 수시로 변하여 실패했다. 지금도 좌측에 있다고 여겼는데 반대인 우측에서 떨어져 내렸다.

“하명하소서. 대법왕님.”

“일단 상관세가부터 찾아가야겠으니 준비하거라.”

“알겠사옵니다.”

일목이 사라지고 동천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는 동천몽을 바라보는 만동승의와 무미선사의 입에서 조용히 한숨이 새어나왔다.

뜨거운 국물일수록 김이 없다. 지금 동천몽이 그러했다. 무척 침착하고 평소와 다름없는 자연스런 행동이었는데 그것이 너무 섬뜩한 것이었다.

천상각을 향해 뻗어 있는 도로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없었다. 하루에 수백 수천대가 먼지를 휘날리며 드나들던 도로에 차가운 바람만 몰아치고 있었다.

정문을 넘어가는 쇠 문턱에 벌건 녹이 슬었다.

잠시 녹이 슨 쇠 문턱을 내려다보던 동천몽이 안으로 들어섰다.

천천히 동천몽은 집안으로 들어섰다.

어느새 인적이 끊인 마당에는 잡초가 자라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투툭!

동천몽은 쭈그리고 앉아 막 돋아나는 잡초 서너 뿌리를 뽑았다.

문득 동천몽은 자신의 삶이 잡초가 아닌 가 생각해보았다.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았지만 오래 살아온 그 누구보다도 호된 홍역을 치루고 있었다. 태어나 세상을 보기 시작해서부터 오늘날까지 살기 위한 몸부림은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상관세가를 가는 길에 잠시 본가에 들렸다.

집안 곳곳 발길 닿는대로 동천몽은 걸음을 옮겼다.

주인이 떠나고 무림맹에서조차 철수하고 난 천상각은 거의 폐허가 되어 있었다. 천하제일상가인 탓에 뭔가 있을까하고 떠돌이 낭인들과 도적무리들이 수십 번을 훑은 듯 이것저것 마구 파헤쳐지고 뜯겨져 나가 있었다.

“패죽일 자식들.”

일목이 현판을 물론 기왓장까지 뜯어간 행태에 욕설을 퍼부었다.

홱!

인상을 쓴 일목이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힐끔!

동천몽을 쳐다보며 어찌할 것인지 물었다. 동천몽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가만 기다려보라는 의미였으므로 일목은 기다렸다.

“흐흐흐!”

웃음소리만으로 천하제일고수를 따진다면 지금 들려온 웃음소리야 말로 사람을 겁주기에 충분하다고 동천몽은 생각했다.

다섯 명의 흑의인들이 천천히 걸어왔다.

일각 전부터 그들은 숨어서 동천몽과 일목을 살폈다. 일목의 외눈이 약간 꺼림칙하긴 했지만 숫적으로 자신들이 우세하여 그다지 두려워 할 것이 없다는 판단이 서자 나온 것이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자세가 우왁스럽다.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양팔을 좌우로 격렬하게 휘젓는다. 동천몽은 한 눈에 좀 도둑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좀 도둑들은 상대를 기선 제압할 목적으로 걸음걸이에 무척 신경을 쓰는데 이들이 그러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입술에 검은 사마귀를 가진 사내가 목소리까지 한껏 깔아 말했다.

“으크크크! 아우들은 누구신가? 이 엉아는 백세수라고 하네.”

두 사람을 별 볼일 없다고 판단한 듯 자신감이 넘친다. 또한 이름을 크게 밝혔다는 것은 이 근처에서 활동한다는 의미다. 곧 백세수라는 이름이 근처 도둑들에게는 제법 알려졌다는 의미인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밝혔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백세수 얼굴이 찡그러졌다.

그러더니 다시 한 번 두 사람을 자세히 살폈다. 차림새는 영락없는 별 볼일인데 자신을 몰라 본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만 아까부터 자꾸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는데 역시 일목의 하나 뿐인 눈이었다.

거리가 가까워 왔으므로 일목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멈칫!

멀리서는 두 눈 중 하나를 잃어 외눈인줄 알았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눈이 한 가운데 떡 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 태어날 때부터 한 개였던 듯 싶었다.

예로부터 눈이 하나이거나 세 개, 또는 손가락이 여섯 개이거나 네 개를 갖고 태어나면 재앙의 인물이라고 죽은 부친은 말했다. 그런 사람을 보면 무조건 피해라고 했었는데 아까부터 가슴 한곳이 자꾸 꺼림칙해졌다.

“크크크크!”

하나 보통 사람도 아니고 무공도 아는 소주 좀도둑계의 일인자 백세수였다. 자신의 위치를 떠올리자 잠시 차오르던 두려움이 가라 앉는다.

“어이 동생.”

우선 일목에게 말을 걸었다. 왠지 그가 우두머리 같고 생긴 것도 눈이 하나뿐인 점 등 조금은 험상궂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저 말입니까?”

일목이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백세수가 버럭 인상을 썼다.

“그럼 너지 쟤야. 이름이 뭐야? 거듭 말하지만 난 백세수야.”

“난 사실 중입니다. 근처 동화사에 있습니다.”

동화사는 없다. 그냥 꾸며댄 말이다.

“중? 목탁 두드리는 중? 그럼 법호가 뭐야?”

중이라는 말에 더욱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중치고 악한 놈 없기 때문이었다. 중이라는 말에 하나 뿐인 눈 때문에 무척 선입견이 좋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일거에 해소되었다.

“일목이라고?”

“중놈이 왜 검을 차고 다녀?”

일목의 옆구리에 걸린 검을 보며 물었다.

일목이 쑥쓰런 미소를 지었다.

“아시면서? 허당일지라도 일 단 메고 다니면 약간은 통하잖아요.”

“크크크! 그건 그래.”

“일단 분위기는 좀 살지.”

백세수 수하들이 낄낄 거리며 웃었다.

그러면서 자신들 검을 쓰다듬었다.

“중이라니까 솔직히 말하지. 우리 조용히 끝내자.”

“뭘 말입니까?”

동천몽은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넙죽 넙죽 백세수의 기를 살려가며 그와 보조를 맞추는 일목의 행동이 너무 우스웠다.

“뭐긴 뭐겠어? 가진 것 다 내놓고 서둘러 중생 교화를 위해 떠나야지.”

“아 네, 난 또! 그런데 가진 것이라고는 이 검밖에 없는데 원하시면 드리지요.”

망설임 없이 검집 채 풀어 던져 주려들자 백세수가 버럭 소릴 질렀다.

“저 새끼 진짜 이상한 새끼네. 우리에게 그건 필요하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건 이거야? 쇠.”

그러면서 왼손 검지와 엄지를 둥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일목이 여전히 못 알아듣는 듯 물었다.

“쇠…쇠라면?”

“쇠도 몰라. 새끼 산속에서 살았다고 해도 너무 하네. 은자 말이야. 은자가 없으면 금화도 좋아.”

“이것 말고는 없다니까요?”

“너 뒤져서 쇳조각 하나라도 나오면 죽는다.”

“네. 그러세요.”

벡세수가 더욱 인상을 썼다.

“저 새끼 진짠가 본데? 아이 씨발 한발 늦었더니만 집구석에도 비었고 사람까지 비었냐?”

집구석이 비었다는 것은 조금 늦게 온 탓에 천상각에 돈 될만한 것은 다른 도둑들이 모두 훔쳐 갔다는 얘기고 사람 비었다는 말은 일목을 빗댄 말이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중이어서.”

그때 부하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더니 물었다.

“한 가지 물어도 되겠느냐? 얼마 전 니네들 주지스님이 관부 검문에 걸린 일 있지?”

“아뇨? 그런 일 없는데요?”

“왜 없어? 너네 주지가 절에 들어가려는데 관무 무사들이 마차 검문을 했잖아. 뻔히 주지 스님이라는 것을 말고서도 말이야. 그래갖고 너희들이 아주 기분 나쁘다고 황실에 항의하고 그랬잖아.”

일목의 눈이 번득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된 것이었다.

“아 난 또 무슨 말씀인가 했습니다. 그때 그 일 말씀 하시는군요.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변화가 없습니다. 황제께서 정식으로 사과하고 종교에 대한 편견과 편향을 관부 무림에 없애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것이지요.”

“산속에 산다고 아주 물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대차게 나오던데. 아무튼 잘해보거라. 먹고 사느라 도와주지는 못하지만 너희들 말에 일리가 있음을 본인은 알고 있다.”

백세수가 부하를 노려보았다.

“새꺄. 공무와 관계되지 않은 질문은 나중 따로 만나서 해. 그리고 적과 그렇게 친근한 대화를 나누면 어떡해.”

부하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너도 없느냐?”

백세수가 동천몽을 가리켰다.

동천몽이 웃음을 짓더니 물었다.

“백세수라고 했습니까?”

“그…그래? 왜 나 알어?”

“혹시 소주 개고기라고 아십니까?”

흠칫!

백세수 뿐만 아니라 모두가 긴장의 표정을 지었다.

벡세수가 더듬거렸다.

“어…어떻게 개고기 형님을 아시는지요?”

“내가 소주 개고기 동천몽입니다.”

바로 그때였다. 좌측 전각 귀퉁이에서 일단의 사내들이 튀어나오며 소리쳤다.

“내가 뭐랬어. 언젠가는 돌아 오실거라고 했잖아.”

“형님.”

놀라며 일행이 돌아보았고 필광을 비롯한 형천파 사내들이 달음질쳐 왔다.

“오오! 진정 형님이시란 말이옵니까?”

“정녕 하늘이 무심치 않구나. 지난 사흘 동안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약사사를 찾아가 새벽 예불을 올렸더니 이렇게 소원이 이뤄져버리다니.”

필광을 비롯한 사내들이 동천몽 앞에서 감격을 주체 못했다.

사실 동천몽은 이미 필광과 부하들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물론 일목도 알아차렸는데 단지 동천몽이 모른체 하라고 했기 때문에 외면한 것이었다.

“피…필광형님.”

백세수가 다가와 필광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동생 세수입니다.”

필광이 눈을 부라렸다.

“너 감각 많이 무뎌졌더구나. 감히 형님에게 돈을 빼앗으려 하다니 모가지가 그렇게 많으냐?”

“소…송구하옵니다. 이 동생이 나이가 먹다보니 감각이 무뎌진 건 사실이옵니다. 용서하십시오.”

“오늘 형님을 만난 기념으로 못본 것으로 해주겠다. 빨리 형님께 사죄올려라.”

백세수가 동천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죽여주십시오. 당장 모가지를 쳐도 기뻐하겠나이다.”

동천몽이 씨익 웃었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내들인지 모른다.

거칠고 저자거리를 무대로 좀도둑질을 하며 살아가지만 막상 큰 범죄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포기하는 백성들일 뿐이었다. 흑도와 백도라는 자신들이 만든 어처구니없는 기준이 양심과 정의의 전부인양 외치고 사는 무림인들에 비하면 이들은 순수함이 지나친 것이 흠일 뿐이었다.

아무리 돌아갈 것을 종용했지만 필광을 비롯한 형천파 사내들과 백세수와 부하들은 버텼다. 죽어도 동천몽과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다는 것이고 절대 헤어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일목이 몇 번을 하나 뿐인 눈을 요상하게 만들어 위협했지만 소용없었다.

동천몽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모두 소월당으로 보냈다. 평생 중으로 살아야 한다고 협박을 했지만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말에 그들은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일행이 떠난 천상각에 또다시 정적이 찾아 들었고 동천몽은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이 천상각 정문을 나설 때 갑자기 덕배선사가 나타났는데 웬 낯선 사내 한명을 대동하고 있었다.

“가개묵이라고 아시옵니까?”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왜 모르겠는가? 상관량은 사주호룡거라는 마차를 타고 자주 집을 찾아왔다. 당시 상관량이 타고 온 마차를 끌던 마부가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가개묵이라고 했다.

한 자루 칼을 품고 마치 늑대처럼 웅크린 채 말을 모는 그에게서 은연중 멋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런데 지금 그 남자가 사색이 되어 자신 앞에 서 있었다.

덕배선사는 가개묵이 생포된 경위를 말해주었다.

“상관량 답구나. 대번에 남궁관을 죽인 인물이 나라는 것을 알아차리다니.”

“이자의 말을 들어보니 천지광옥과 용마산가를 단숨에 거머쥔 배일목이라는 인물 또한 대법왕님인줄 짐작하는 것 같습니다.”

동천몽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증은 이미 굳혔을거야.”

동천몽이 가개묵을 보며 말했다.

“날 기억하느냐?”

“그렇소.”

“하긴 기억 못할 리가 없지. 우리집 문턱이 닳을 정도로 드나들었으니.”

촥!

동천몽의 오른손이 벼락처럼 번뜩였고 가개묵의 눈이 튀어나올 듯 불거졌다.

“으…으!”

몇 번 신음을 흘렸다.

대번에 입에서 피가 흘렀고 동천몽의 오른손이 다시 뺨을 후려쳤다.

쫙!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다시 강한 충격에 가개묵은 눈을 크게 떴다.

쫙--쫘좌작!

동천몽이 오른손과 왼손으로 가개묵의 뺨을 무지막지하게 때렸다.

가개묵의 뺨이 찢어져 너덜거렸고 입과 코에서 마구 피가 흘러내렸다.

왜 때리느냐고 묻지도 못했다. 입을 열 시간을 주지 않고 좌우손이 번개처럼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끝내 피투성이가 되어 가개묵은 쓰러졌다.

“어엇!”

일목이 쓰러진 가개묵을 살피다 놀라 쳐다보았다.

“주…죽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동천몽의 행동에 일목과 덕배선사가 굳은 표정을 지었다.

“죽일 자들은 죽여야 한다는 것을 요 몇 일 사이게 깨우쳤느니라. 이자 또한 살려둬봤자 사람 안될 인간이니라.”

동천몽이 천천히 걸어갔고 한 동안 덕배선사와 일목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뿐 쉽게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몇 일 전까지 자신들이 봤던 동천몽의 모습이 아니었다.

상관세가를 내려다보는 세 개의 눈이 있었다. 사람은 두 명인데 눈은 세 개였다.

벌써 반 시진 동안 동천몽의 상관세가 살피기는 계속 되었다. 일목은 아까부터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 쉬고 있었는데 동천몽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냥 정문으로 치고 들어가 닥치는대로 베면 될 터인데 동천몽은 무척 몸을 사리는 것이었다.

자신이 알기에 동천몽은 천하제일고수였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 정면 공격을 하지 못하고 동서남북을 돌면서 살피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목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어 따지려고 들 때 동천몽이 말했다.

“일목아 넌 너의 단점이 뭐라고 생각 하느냐?”

느닷없는 질문에 일목이 눈알을 굴렸다.

“너 혹시 진법에 대해 아느냐?”

흠칫!

일목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모든 방면에 자신있었지만 진법에 관한 문외한이었다. 배교에는 진법이 없었고 만경에게서 몇 번 배울 기회가 있었지만 너무 어려웠다. 무공은 이상하게 잘 터득되는데 진법에 관한 설명은 도통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오면 여지껏 진법이 설치되었나 안되었나를 조사하기 위해?”

“오냐.”

동천몽이 어깨에 힘을 주었다.

일목에게 으스대는 노골적인 행동이었다.

“살핀 결과 어떻사옵니까? 설치되어 있습니까?”

“물론이다. 그것도 아주 큰 것이 설치되었구나. 혈사명사기진이라고 들어보았느냐?”

당연히 일목은 침묵했다.

진법의 이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나같이 어려운 글자로 만들어져 있어 이래 저래 아주 불쾌한 학문이 진학이었다.

“고금 오대절진중 하나이니라. 저 안에 갇히면 신일지라도 빠져나오지 못한다.”

“허억!”

일목이 신음에 가까운 숨을 내 쉬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자신은 동천몽의 배포 약함을 얼마나 조롱하고 흉봤던가.

“아마 천하에서 저 절진을 파해할 사람은 나 말고는 없을 것이니라.”

일목의 눈이 더욱 커졌다.

천하에서 동천몽 말고는 아무도 파해 법을 모른다고 했는데 목소리가 무겁게 깔려 있었다. 그것은 가공할 무게였고 자랑이었다. 하나 일목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진법이야 말로 머리가 뛰어나지 않으면 절대 파해 하거나 알아 낼 수 없다는 것인데 어떻게 동천몽이 이토록 해박한지가 궁금해졌다.

무공 초식을 외우지 못해 몸으로 터득한 동천몽 아니던가.

천포지각에서 진법의 위력을 절감한 동천몽은 포달랍궁으로 돌아와 천장금왕으로부터 진법에 관해 배웠다. 물론 해박할 정도로 배운 것은 아니고 천하오대진법과 포달랍궁에 대대로 내려오는 진법 몇 가지를 배운 것이다.

물론 그가 머리가 뛰어나 응용력이 뛰어났다면 단번에 상관세가를 둘러싸고 혈사명사기진이 설치되었다는 것을 알아봤을 것이다. 하지만 워낙 머리가 아둔하여 무려 반시진을 넘게 살피다가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하…하오면 어떻게 파해 하는지요?”

“불이다. 지금부터 동서남북으로 불을 피 울 수 있도록 나무단을 쌓거라.”

일목은 시키는대로 주위 나무들을 검으로 잘랐다.

일목은 상관세가를 가운데 두고 동서남북 네 곳에 거대한 나무단을 쌓았다. 나무 단 한 개의 크기는 거대한 전각 한 채 정도 되었다.

“넌 동북방향의 나무단에 불을 붙이거라. 난 서남단에 피울테니. 단 주의할 것은 동시에 피워야 한다는 것이니라. 알겠느냐?”

“예 대법왕님.”

일목이 곧바로 동북방향으로 사라졌고 동천몽은 서남단의 나무단 근처로 다가갔다.

동천몽은 전음을 날렸다.

동천몽과 일목의 거리를 족히 십리이상 떨어져 있었지만 전음은 명쾌히 전달되었다. 전음의 거리는 철저히 내공이 좌우하는데 일목의 눈은 커졌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십리밖에 있는 사람에게 전음을 날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불을 지펴라.”

동천몽의 전음이 들려왔다.

일목은 곧바로 전신의 진력을 극한으로 끌어 올려 삼매진화를 펼쳤다. 손바닥에서 푸른 불꽃이 일어나더니 나무를 향해 쏘아갔다.

치지직!

불꽃이 피어나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일목은 곧바로 북단의 나무단을 향해 몸을 날렸고 곧바로 불을 붙였다.

상관세가는 조용했다. 무림맹의 일원이기 때문에 목와북천과의 전쟁에 상당한 무사들을 보낸 탓이기도 했지만 실상은 한 사람에게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적전의 침묵이었었다.

한 달 전 상관량은 장원에 필살의 진법을 설치했다. 그것은 오직 한 사람을 겨냥한 함정이었는데 장원이 조용하고 사람들의 움직임이 없다시피 해야 적이 방심하고 정면으로 쳐들어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적이 걸려들기만을 기다리며 모두가 처소에서 두문불출 하고 있었고 최소한의 병력만 경계근무에 동원되고 있었다.

“불이다?”

고용한 상관세가 위로 외침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각자들 처소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던 무사들이 뛰쳐나왔다. 과연 상관세가 동서남북으로 거대한 화염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불길이 거세지며 주위 지형이 변하고 있었다.

구우우!

그그긍!

천재지변이 일어난 듯 산의 지형이 바뀌고 나무와 바위들도 크기와 위치를 달리했다. 지금까지의 모습은 진법이 만들어낸 허상이었고 지금 불길에 타오르며 새로 나타난 지형이 원래 상관세가의 주위 풍경이었다.

상관세가의 부가주이자 상관량의 아들인 상관황의 얼굴이 굳어졌다. 동서남북 네 곳에 불이 피워졌고 진법이 깨지고 있다는 것은 적이 자신들의 속사정을 훤히 꿰고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들의 속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진법이 펼쳐진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더구나 펼쳐진 혈사명사기진법은 한 인물을 상대하기 위해 세워진 진법인데 침입자가 누구란 말인가.

일단 정문을 통과하지 않고 진법을 깨뜨린 것을 보면 적임은 분명했지만 누군지 감이 오지 않았다.

“누굴까요?”

총관 복호청이 물었다.

상관황이 눈을 깜박거렸다.

떠오른 인물은 없다. 부친은 동천몽을 비롯한 포달랍궁의 습격을 막기 위해 진법을 펼쳤는데 그는 죽었다 깨어나도 혈사명사기진이 펼쳐져 있음을 모를 것이라고 했다.

잠시 후 정찰을 나갔던 두환전이 다가왔다.

“누구더냐?”

“모르겠사옵니다. 샅샅이 뒤졌지만 진법을 깨뜨린 자의 정체를 알 수가 없사옵니다.”

그때 부가주님 하며 한 흑의노인이 다가왔다.

외곽 경계를 담당하고 있는 섬광대 대주 유졸승이었다.

“정문에 부가주님을 뵙기를 청하는 자가 있사옵니다.”

“날?”

“신분을 물었지만 부가주님께서 나오시면 알게 될 것이라면서?”

상관황이 복호청을 쳐다보았다.

응해야 할 건지 말아야 할 건지 묻는 것이었다.

상관량은 복호청에게 당부했다. 일체 외부로부터 어떤 침략의 징후나 방문자가 있어도 호응하지 말라고 했다. 누군가 찾아온다면 적일 가능성이 클 뿐 아니라 진법을 깨지 못하자 손님으로 위장해 들어오려는 음모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하지만 진법이 깨진 마당에 적이라면 굳이 정문을 통해 들어올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복호청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문에는 위사들과 섬광대 무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상관황이 나타나자 모두 길을 비키며 예의를 차렸다.

상관황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두 사람이 서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초면이었다. 유졸승 말에 의하면 만나보면 알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누군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척!

다시 살폈다. 하지만 초면이었고 왼쪽에 선 눈 하나뿐인 사내의 느낌이 조금 음산했다.

자고로 어둡고 음산하면 나쁜 무리로 봐도 무리가 없다는 것이 지난 경험이었으므로 잔뜩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본 부가주를 만나자고 하셨소?”

오른쪽 사내가 히죽 웃었다.

질문에 대답이 없이 웃자 울컥 치밀어 올랐다. 감히 천하무림의 중심인 상관세가의 부가주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이 자가.”

어딜 가나 성격 급한 자는 있기 마련이다.

섬광대 대주 유졸승이 벼락같이 달려나가며 일장을 날렸다. 좀 더 알아보고 조치를 취해도 늦지 않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유졸승은 상대의 앞가슴을 가격해 가고 있었다.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정체를 애매하게 묻어 버리는 인물 치고 정의 인물은 없다.

탁!

오른쪽 사내가 유졸승의 손목을 나꿔잡으려 했다.

가볍게 제자리에서 손만 뻗었는데 일장을 피하며 손목을 나꿔채는 동작은 가히 번개를 무색케 할 만큼 빠르고 유연했다. 방어와 이어지는 공격이 부드러웠고 지켜보는 사람들 모두가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한가락씩 하기 때문에 오른쪽 사내의 동작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알기 때문이었다.

“어딜!”

가소롭다는 듯 유졸승이 오른손을 거두었다.

그런데 사내의 오른손은 진드기처럼 따라 붙었다. 유졸승이 뒤로 더욱 물러나면서 손을 빼냈지만 사내의 손은 더욱 빨랐다. 특히 팔꿈치에서부터 뱀이 대나무를 타고 오르듯 손목을 향해 미끄러져 오는 손을 도저히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콱!

완맥이 낚이면 거의가 힘을 잃는다.

손목에 혈도가 조여지며 진기가 흩어지기 때문이었다. 유졸승 또한 왼손으로 반격을 가하려고 했지만 손목이 조여지면서 진기가 끌어올려지지 않았고 맨손으로 때렸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사내는 왼손이 진기가 실리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듯 가슴을 때리는데도 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딱!

예상대로 오히려 자신의 손바닥만 얼얼했다.

우두득!

사내가 손목을 비틀자 뼈가 부러졌다.

“아이고!”

사내의 손이 벼락처럼 팔꿈치로 옮겨오더니 또다시 안쪽으로 한 바퀴 돌았다.

빠지직!

이번에는 팔꿈치가 부서졌고 고통에 어깨를 돌리며 상체를 숙였는데 어느새 어깨까지 본체와 이탈했다.

팔목과 팔꿈치 어깨가 단번에 부서진 것이다.

“이…이놈이.”

진기도 담기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왼 주먹으로 사내를 때렸다.

탁!

그러나 왼손 또한 잡혔고 동일한 방법으로 부러졌다.

양필이 순식간에 무력화 되어 버리자 당사자는 물론이고 지켜보던 사람들까지 경악했다.

“차앗!”

두 명의 무사가 검을 뽑아 들고 찔러갔다.

땅을 차고 올라가는 동작과 검을 뽑아드는 동작이 한 사람처럼 이루어진 멋진 합격(合擊)이었다.

하지만 멋지다는 생각이 상관황의 머리에서 채 끝나기도 전에 두 무사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큭!”

“악!”

놀랍게도 두 무사는 자신들의 검에 목이 찔려 숨을 거두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자살로 보일 만큼 검 끝이 목을 관통해 있었다.

섬광대 무사 세 명이 다시 뛰쳐나갔다.

그러자 그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손으로만 공격하던 사내가 떠올랐다.

서 있을 줄 알고 검 끝을 낮췄던 세 무사의 검끝이 황급히 공중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신속한 방향전환으로 느껴졌을지 모르지만 오른쪽 사내의 눈에는 세월로 비칠 만큼 검끝을 돌리는데 걸리는 시간은 길었다.

빡!

빠바박!

검 끝이 공중으로 틀어지기도 전에 사내의 발끝이 세 사내의 면상을 찍어 버렸고 처절한 비명을 흘리며 뒷걸음을 쳤다. 이쪽에서 도움을 주기 위해 다섯 명의 무사가 날아갔지만 세 무사는 다시 목젖에 일각을 맞고 즉사한 것이다.

콰아앙!

또 다시 달려오던 다섯 무사를 향해 쌍장이 뿜어졌고 다섯 사내의 입에서 같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툭!

투투툭!

즉사였다. 도무지 이초를 버티지 못하는 상황에 상관황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급기야 지켜보고 있던 섬광대 무사들 전원이 달려들었다.

퍽!

퍼퍼퍼!

한방이었다. 그의 주먹이 가는 곳에서는 예외없는 비명이 터졌고 스물일곱 명의 무사들이 일제히 땅바닥에 시신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망연지살.

상관황은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했고 그나만 경험이 풍부한 복호청이 사태 수습에 나섰다.

“뉘…뉘시오? 어찌하여 본가를 불쑥 찾아와 이런 살생을 저지르시오?”

“네가 복호청이냐? 상관량의 오른팔?”

아들뻘 밖에 되지 않은 오른쪽 사내가 하대를 했다. 그런데 어찌된 노릇인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직까지 새파란 젊은이에게 하대를 당해 기분이 나쁘지 않은적이 없었는데 눈 앞의 인물에게는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놀라운 기도다!’

말투 하나로 상대를 짓누르는 위엄은 아무나 가질수 없다.

그것도 억지로 짜 맞추고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은연중 풍기는 강력한 위엄이었다.

“오른팔인지는 모르지만 상관량 어른께서 본인의 주인이시오?”

“그놈 말 한 번 어렵게 하는군. 그냥 그렇다고 대답하면 될것을, 일목.”

“네 대법왕님.”

“대…대법왕.”

일제히 사람들이 놀랐다.

그제 서 야 그들은 상대가 누군지 알아 차렸다. 상관량은 분명히 동천몽의 정체를 포달랍궁의 대법왕이라고 했다.

“저 놈은 네가 해치워라.”

“정말입니까. 캄사함다.”

동천몽 혼자서 모두 죽이는줄 알고 섭섭했다. 피를 묻혀 본지도 오래되었고 가급적 주인은 뒤에 나서야 모양새가 좋다. 일단 아랫사람을 시켜 분위기를 띄운 뒤 주인이 나서서 멋지게 솜씨를 보여야 되는데 동천몽이 잔챙이들까지 손을 보자 은근히 다급해졌었다.

“크카카카! 네 이놈, 난 대법왕님과 성질이 달라서 그냥 패죽이지 않겠다.”

일목의 모습이 번쩍 거렸다.

그런데 연기처럼 길에 몸이 늘어나자 복호청이 경악했다.

“화…환술!”

말로만 들었지 환술에는 문외한이었다. 사람의 몸이 가늘어졌다가 두꺼워지고 흐릿해졌다가 진해지며 물처럼 갈라졌다가 다시 붙기도 한다고 했다.

콱!

다급히 장력을 쳐냈다.

정면으로 늘어진 일목의 몸을 가격했고 복호청은 쾌재를 불렀다. 십이성 극성의 장력이니 최소한 사망이라고 확신했다.

추울렁!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물결이 일어나 듯 잠시 파장을 일으켰을 뿐 비명은 흘러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일목의 분노를 더욱 자극한 결과를 불렀다.

“조용히 반성하는 차원에서 얌전히 있으면 목숨만 취하려고 했는데 네놈이 반항을 했으니 그냥 죽이지 않겠다.”

콰아아!

한줄기 광채가 터져나왔는데 검이었다.

헉!

복호청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장력을 쳐내어 날아오는 검을 막으려는 계산이 어긋났는데 너무 빨랐다. 태어나 이토록 빠른 쾌검은 본적이 없었다.

싹뚝!

오른손이 잘려 나갔고 아픔을 느끼기도 전에 왼손이 잘려 나갔다. 졸지에 양팔을 모두 잃은 복호청은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을 만큼 충격을 받았다.

뚝뚝!

잘린 어깨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복호청은 눈 만 깜빡거렸다.

“초…총관.”

상관황이 더듬거리며 불렀다.

복호청은 반쯤 넋이 빠진 얼굴로 상관황을 보았다.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렸을 뿐 그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지…지혈부터 하시오.”

완전히 혼이 빠져버린 복호청의 귀에 상관황의 말이 들려올 리 만무했다.

촥!

반항을 엄두도 내지 못했고 이번에는 왼쪽 다리가 잘렸다.

쿵!

무게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지만 복호청의 얼굴에 고통스런 표정은 없었다. 여전히 그의 뇌리 속으로는 너무도 신기막측한 일목의 무예 말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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