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역천의 겁
부처의 미소가 오늘따라 더욱 환하다. 의심사 주지 구옹선사의 독경 속에 능씨는 부처를 향해 끝없는 절을 올렸다.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한 사람의 이름이 끝없이 되뇌여졌다. 흘러나오는 이름은 놀랍게도 동천비였고 능씨는 부처께 살려달라고 매달리고 있었다.
“지혜를 완성하고 참된 말을 이룩하신 부처님 자비를 베푸옵소서. 그 아이에게 깨달음을 주시어 자신을 알고 반성하도록 해주시옵소서.”
능씨와 간절한 기도와 더불어 구옹선사의 독경이 더욱 대웅전을 메아리쳤다.
“크아악!”
그때 두 사람의 간절한 염원을 깨뜨리는 비명소리가 울렸다.
뚝!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동작이 멈췄고 비명은 연거푸 들려왔다.
“윽! 아아악!”
느닷없는 비명에 구옹선사가 일어나 대웅전 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비명은 계속해서 들려왔고 점점 가까워졌다.
“바…방장스님.”
네 명의 승려가 구옹선사를 부르며 도망쳐 오고 있었는데 피가 범벅이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더냐? 어헉!”
구옹선사가 소스라쳤다.
먹구름 한 개가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이었지만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흐느적거렸다. 구옹선사가 공포에 젖은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아…아수라 현신이로고…아미타불!”
콰아아!
먹구름에서 두 개의 손이 뻗어 나오더니 도망쳐 온 네 명의 승려를 후려 쳤다.
퍽!
뻐어어억!
비명도 없었다. 먹구름에서 뻗어 나온 손이 네 승려를 한 번씩 후려쳤는데 산산조각으로 찢어지고 말았다.
“아…아미타불! 지옥의 아수라가 어찌 인세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추울렁!
불심 깊은 구옹선사를 바라보던 먹구름이 크게 출렁거리더니 스으으 하며 손이 뻗어나왔다.
탁!
구몽선사 멱살을 거머쥐었다.
“캑…캐캑!”
구몽선사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르며 기침을 했는데 뿌드득 소리가 들리며 목뼈가 부서졌다.
바르르!
구옹선사의 몸이 몇 번 떨더니 축 늘어졌다.
퍼억!
먹구름이 손을 풀자 구옹선사가 땅바닥에 쓰러졌다.
멈칫!
갑자기 먹구름이 충격을 받은 듯 움찔했다. 대웅전에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능씨를 발견한 것이었다.
“누…누구더냐? 감히 인간이라면 모습을 드러내거라.”
능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쳐 말했다.
“크카카카!”
먹구름이 괴소를 흘리더니 조금씩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허헉! 넌 천비 아니냐?”
먹구름은 동천비였다. 그런데 제대로 사람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흐느적거렸다.
묵곤혈참기가 깨지면 한줌 연기가 되어 사라지는데 지금 동천비는 오할 정도 흩어지고 있었다. 능씨를 발견하고 잠시 기력을 모아 사람의 형태를 갖추었을 뿐이었다.
“크크크! 이게 누구신가. 잘난 계집년 아닌가.”
“어…어떻게 네가 이렇게 변했단 말이냐?”
동천비가 다가왔다.
두 눈에서는 먹물같은 기운이 쏟아져 나왔는데 능씨가 흠칫 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땀에 젖어 백의가 몸에 달라 붙은 그녀의 모습은 무척 관능적이었다.
“크흐흐!”
“아…안 돼.”
능씨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알아차리고 앞 가슴을 가렸다.
화악!
동천비의 손이 뻗어 나갔고 능씨는 힘없이 끌려갔다.
“놔…놔라 천비야. 이건 나쁜 짓이다. 어서.”
쫘악!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천비의 양손이 그녀의 옷을 찢어 버렸다.
순식간에 능씨는 알몸으로 변했고 동천비의 두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묵광은 더욱 진해졌다.
“흐흐흐!”
“제발! 무…물러서거라.”
와락!
동천비는 능씨를 끌어안고 바닥으로 넘어졌다.
미친듯 반항하는 능씨를 주먹으로 잠재운 동천비의 몸이 그녀를 덥쳤다.
일단의 무사들이 의심사 경내로 날아 내렸다. 모두 열다섯 명이었는데 하나같이 야수와 같은 눈빛을 지닌 날렵한 사내들의 시선이 죽어 나뒹굴고 있는 시신들을 보며 침음을 흘렸다.
“맙소사!”
단한구의 시신도 온전한 건 없었다.
“마령운(魔靈雲)이로군!”
이여송이 시신을 보며 중얼거렸다.
마령운이 뭐냐는 듯 다른 부하들이 쳐다보자 이여송이 조용히 대답했다.
“묵곤혈참기가 깨지면 사람이지만 연체지신(煙體之身)이 된다.”
“별 볼일 없어진다는 얘기군요.”
“그렇지만 워낙 사악한 마공이기 때문에 일류고수의 능력정도는 된다. 지금 놈의 몸은 묵곤혈참기가 거의 흩어지기 직전인 연체지신이다. 서둘러 잡자.”
“산주님, 다시 강해질 수는 없는 것입니까?”
“있다.”
있다라는 말에 부하들이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음정지회(陰精之回)라고 했다. 음기를 취하면 다시 회복될 뿐 아니라 완전한 마신지체를 이룬다.”
“흐흐! 이곳은 절간인데 그럴일은 전혀 없으니 잠시 즐기며 놈을 사냥해도 되겠군요.”
“물론이다. 하지만 밤이 길면 꿈도 길다고 했느니라. 서둘러 해치우고 떠나자.”
이여송의 부하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혼자 남은 이여송은 건물과 마당 여기저기 찢겨져 죽은 승려들의 시신을 훑으며 천천히 경내를 설펴나가기 시작했다.
멈칫!
한참 경내를 살피며 나아가던 이여송의 발걸음이 멈췄다. 대웅전 앞마당에 다섯 구의 시신이 있었는데 그중 구옹선사의 시신에 멈췄다. 비록 시신이지만 범상치 않은 신분의 승려였음을 느낀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이여송의 귓가로 조용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왔나?”
이여송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쳐들었다.
대웅전을 내려오는 일곱 개의 계단 네 번째에 동천비가 우뚝 서 있었다.
파르르!
이여송의 눈빛이 떨림을 보였다.
시신의 상태에서도 드러났고 자신의 추측도 지금 눈앞에 보인 동천비의 모습과는 너무 틀렸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연체지신이 되어 있어야 정상인 것이다. 그런데 완전한 모습을 갖췄다는 것은 몸이 회복되었다는 것이며 이여송이 놀란 것은 전혀 동천비에게서 어떤 기세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마신지체를 이루었을 때 보이는 현상이었다.
“어떻게 내가 이렇게 돌변할 수 있느냐는 건가?”
자신의 궁금증을 정확히 짚어내며 동천비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적의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그야말로 하나의 자연이었다. 단순히 움직이는 생명체 일 뿐 무인으로서 풍겨나오는 본능적인 경계심이나 어떤 예기는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저기다!”
멀리서 동천비를 발견한 이여송의 부하가 소리쳤고 순식간에 열 네 명의 부하들이 일제히 날아왔다.
하나 그들 또한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상반된 동천비의 모습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이여송을 쳐다보았는데 귓가로 전음이 들렸다.
‘심상치 않다. 내 신호를 받아 일거에 공격해라.’
이여송이 동천비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부상이 심각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좋아 보이십니다?”
“하늘이 아직은 나의 무너지는 것을 원하는 것 같지 않소. 그래 어떻게 죽고 싶나? 원 하는 대로 죽여주겠소.”
옛 정리를 생각해 고통 없이 편한 죽음을 주겠다는 의미였다. 실로 상상 못할 놀라운 여유였고 이여송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하며 전음을 내렸다.
‘쳐라!’
부하들이 일제히 덮쳐들었다.
“크후후후!”
동천비가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쐐애애!
매섭게 공격해들어가는 부하들을 향해 동천비가 오른손을 뻗었다.
휘이이!
동천비 오른손에서 부드러운 바람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 바람에 부딪힌 부하들의 검기가 씻은 듯 흩어져버렸고 일제히 손에 쥐어진 검이 퉁겨 날아가버렸다.
휘리링!
티티틱!
수하들이 순간적으로 당황할 때 동천비의 오른손이 다시 뻗어 나왔다. 수하들이 깜짝 놀라며 맨손으로 마주쳐갔는데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크억!”
“악!”
수하들의 손목이 모조리 부러져 나가버렸다. 왼손으로 공격을 한 수하는 왼 손목, 오른 손 잡이는 오른손목이 부러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수하들을 향해 동천비의 오른손이 다시 펄럭거리며 바람을 쏟아냈다.
그전까지는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움직일 때마다 먹물같은 기세가 뻣쳐 나왔는데 지금은 평범한 장력이었다.
수하들은 각자 부러지지 않은 손을 뻗어 일제히 합공을 펼쳤다.
뻐어억!
거대한 바위를 때리는 느낌을 받았고 온 몸에 강한 충격이 전해지더니 급기야 열네 명의 몸이 폭발하고야 말았다.
빠지직!
콰라라락!
걸레조각처럼 찢겨져 흔적없이 사라져버린 수하들을 보며 이여송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가 없을 만큼 커졌다.
“당신이 놀랄 때도 있나? 내 무공이 강해지긴 강해진 모양이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강해진 이유를 알고 싶나본데 그냥 죽으시오. 모르고 죽는게 조금은 더 편할테니까.”
동천비가 다시 손을 뻗었다.
소리도 없고 색깔도 없었다. 그러나 한 가닥 가공할 기운이 몰려 오고 있었으므로 이여송은 혼신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따악!
쇠막대기에 검을 내려치는 기분이 들었다.
손목이 시큰 거리며 팔꿈치가 저려왔고 검을 놓치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슉!
동천비의 왼손이 뻗어왔다.
다시 정면으로 받아 내기에는 무리였다. 팔목과 팔꿈치 상태를 보아 다시 한 번 부딪혔다가는 부숴지고 말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여송은 다급한 대로 왼손을 뻗어 장력을 뿜었다.
평생을 검 한 자루에 의지한 삶을 살아온 이여송에게 장력은 낯설었다. 그러나 이미 무의 이치를 깨우친 절정의 고수답게 그의 장력은 검과 비교해 전혀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빡!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이여송은 자신의 왼손이 완전히 무기력해졌음을 발견했다. 순간적으로 부숴졌기 때문에 통증은 나중에 밀려들었는데 팔목은 물론이고 팔꿈치와 어깨뼈까지 완전히 으스러져 버렸다.
질근!
신음은 고검이란 명예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명예는 중요하지. 대장부라면 더욱.”
스윽!
동천비가 다시 오른손을 뻗었다.
이여송은 있는 힘을 다해 오른손의 검을 휘둘렀지만 거대한 벽을 만난 느낌이 들었다. 검이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앞으로 전진을 해야 상대를 베거나 찌를 수 있는데 반쯤 쳐 올려진 상태에서 동천비의 장력에 막힌 것이었다.
‘아아!’
절망의 탄식을 뱉었고 밀려나온 검이 자신의 머리를 거꾸로 베고 있었다.
싸각!
자신의 검에 자신의 머리가 정확히 반으로 잘려나갔다.
툭!
검이 먼저 떨어졌고 뒤이어 이여송의 몸이 뒤로 벌렁 나자 빠졌다.
불어오는 바람에 비릿한 피냄새가 진득하게 실려 있었다. 잠시 죽은 시신들을 바라본 동천비가 몸을 돌려 대웅전 안으로 들어갔다.
멈칫!
들어선 동천비의 눈이 커졌다.
알몸의 능씨가 입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툭!
발로 능씨의 몸을 걷어차자 천장을 보며 벌렁 누웠는데 혀를 깨물었다.
“흐흐! 꼴에 그래도 계집이라는 건가?”
괴소를 흘리던 동천비의 눈이 순간적인 욕망에 사로잡혔다. 오십에 들어선 여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미끈한 몸매와 피부에 본능이 치솟는 듯 했다.
하지만 이내 차가운 냉소를 흘렸다.
“계집은 지천이지. 아무튼 네년 덕에 복을 얻었으니 고맙구나. 네년을 잊지 않겠다.”
다시 한 번 능씨를 바라본 동천비가 몸을 날려 대웅전을 벗어났다. 대웅전을 벗어난 동천비의 눈은 지독한 살기로 타오르고 있었다.
무림맹과 목와북천의 싸움은 더욱 치열해졌다. 목와북천은 더 이상 물러 날 수 없다는 각오를 새기며 배수의 진을 쳤고 무림맹은 한 번 얻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필사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양측의 싸움이 격렬해지면서 소월당 또한 포달랍궁 간부들의 출입으로 부산해졌다.
자정경이 검을 거두며 길게 숨을 몰아 쉬었다. 하루 종일 쉬지 않고 검은 수련했고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자신의 검기에 의해 잘려지고 조각난 주위 바위와 나무들을 훑어보는 그녀의 얼굴에 흡족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제 어느 정도 자신의 검에 자신감이 생겼다. 사흘 전 일목은 자신의 검을 보며 일류고수의 수준을 넘어섰다고 평가했다. 동천몽을 유혹하는 사악한 계집이라면서 평소 자신을 호의적으로 보지 않던 일목의 입에서 그런 평가가 내려졌다면 훨씬 높아졌다고 봐야했다.
철컥!
검을 검집에 꽂아 넣고 천천히 산길을 내려오던 자정경의 걸음이 멈추었다. 십여장 전면으로 무미선사가 바쁜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선사님!”
자정경이 부르는 소리에 무미선사의 걸음이 멈춰졌다.
“아미타불!”
무미선사가 다가오는 자정경을 보며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사부님을 뵙고 돌아가시는 길인가 봐요?”
“그러하옵니다.”
“사부님 어때 보여요? 기분 좋아 보여요?”
무미선사가 모호한 얼굴을 했다.
뭐라고 대답하기가 그렇다는 뜻이었다.
동천몽은 요 몇 일 말이 없었다. 소월당에 있을 때는 일어나자마자 능씨를 찾아 아침인사를 했다. 그런데 몇 일 동안 아예 그녀를 찾지 않을 뿐 아니라 하루 종일 능씨의 거처 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피하는 눈치였다.
“그만 가보세요.”
“그럼 소승은 이만.”
무미선사가 합장을 하고 사라졌다.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던 자정경이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 몸을 씻고 의복을 갈아입은 자정경이 동천몽을 찾아갔다.
평소와 달리 전혀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동천몽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스윽!
슬며시 다가가 등 뒤에서 동천몽의 목을 끌어안았다.
동천몽이 흠칫 했다. 막 목욕을 끝낸 자정경에게서는 사내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향긋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사부님 제자 배고파요.”
“배…배고프면 밥을 먹으면 될 것 아니냐?”
“여…여기서는 싫어요.”
“무슨 말이냐? 설마 밖에 나가서 사달란 얘기냐?”
“네에, 노배계 사주세요.”
동천몽이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더욱 힘차게 목을 끌어 안으며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배고프다니까요? 제자 굶어 죽으면 좋겠어요?”
무서운 유혹이었다. 뜨거운 입김이 귓가를 간지럽혔고 풍겨나는 향기는 가슴을 진동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아랫도리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사…사부니임.”
자정경의 손이 동천몽의 목을 매만지며 앞가슴으로 내려왔다.
“어험! 그래 가자꾸나. 사주면 될 것 아니냐?”
“감사해요. 사부님.”
동천몽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자정경이 어느새 앞으로 다가와 목을 끌어안고 뺨에 입을 맞췄다. 이제 그런 행위에 익숙해진 듯 동천몽은 눈을 한번 흘리고 말았다.
오늘따라 자정경의 술이 급했다. 순식간에 죽엽청 두 근을 혼자 비웠고 세 근째 시키려는 것을 동천몽이 막았다. 그녀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고 이미 취기로 혀는 반쯤 꼬부라져 있었다.
“하…한 잔만 더 할께요.”
동천몽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취했다. 더는 안된다.”
동천몽은 단호했다.
자정경이 술을 마시는 줄 아무도 모른다. 특히 아무리 절대의 힘을 행세하는 대법왕이지만 제자에게 술을 사주는 줄 알면 간부들도 그냥 보고는 못넘어 갈 것이었다. 가뜩이나 자정경에 대해 못마땅해 하는 간부들이 아닌가. 좋은 꼬투리가 될 것이다.
“그만 마시면 될 것 아냐. 치사해.”
자정경이 인상을 썼다.
그런 자정경을 보며 동천몽은 한숨을 내 쉬었다.
“사부님.”
“말하거라.”
“난 다 알아요. 목와북천의 혈악과 사부의 이동을 무림맹에 귀띔해준 분이 누군지?”
동천몽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정경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천하는 다 속여도 이 제자는 속이지 못해요. 사부님이죠? 사부님이 쫓기고 있는 형님을 도와주기 위해 무림맹에 그 사실을 흘린 거죠?”
“누…누가 그러더냐?”
“호호호! 사부님 얼굴 좀 봐. 빨개졌어.”
“정경아.”
“사부님이 불쌍해요. 어머니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어 쳐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형님에게 구원의 손을 뻗어야 하는 그 가슴 아픈 운명이 말에요.”
“난 그런적 없다.”
“나 같았으면 어머니가 아무리 울고 불고 매달려도 절대 모른체 해버렸을텐데 알고보면 우리 사부님처럼 착하고 마음 약한 분도 없으세요.”
“됐다. 그만 가자꾸나. 사람들이 쳐다보지 않느냐?”
“누가 봐요. 보면 또 어때요?”
자정경이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누구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놀라운 표정을 지었는데 하나같이 얼굴에 탐욕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자정경이 몰라서 그렇지 지금 그녀의 얼굴은 술기운으로 붉게 달아 올라 있었다. 무림쌍미 중 한 명의 달아오른 얼굴은 주루의 사내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이것들이!”
차고 있던 검을 반쯤 뽑아서야 마지못한 듯 사람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제 서 야 자정경의 얼굴에 만족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자신의 검에 대한 위력이 느껴지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까불고들 있어.”
그러면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그대로 얼굴을 탁자에 쳐박고 엎드렸다. 곧바로 코를 골며 떨어진 자정경을 깊숙한 눈으로 쳐다보던 동천몽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일목!”
스르르!
외눈박이 사내가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자 손님들이 기겁했다. 비록 검을 차고는 있었지만 자정경의 미모에 호시탐탐 기회를 누리던 사내들은 그제서야 동천몽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한 듯 일제히 고개를 돌렸고 일부는 슬금슬금 주루를 빠져나갔다.
“어떻게 된일이냐? 내가 누구도 알게 해서는 안된다고 했지 않느냐?”
일목을 시켜 목와북천의 움직임을 살피도록 했다. 어차피 육검산 만으로는 동천비를 사로 잡을 수 없다는 것이 동천몽의 생각이었고 결국 전선의 조직을 후방으로 빼 돌릴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예상대로 백쾌섬은 혈악과 사부를 은밀히 빼돌려 동천비를 추적했고 동천몽은 그 사실을 무림맹에 흘렸다. 그러자 무림맹에서는 혈악과 사부가 빠져나간 전선을 집중공략하여 마침내 반격의 실마리를 찾은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소승을 의심하는 것입니까? 으와. 섭섭하옵니다. 소승을 어떻게 보시고, 비록 눈이 하나 뿐이지만 한 번 한 약속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키옵니다.”
“넌 아니란 말이냐?”
“하나뿐인 눈을 걸고 맹세하옵니다. 속하는 완벽한 합죽이 되었사옵니다.”
동천몽이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러자 일목이 펄쩍 뛰었다.
“자꾸 이러시면 소승의 결백함을 증명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게냐?”
“대법왕님께서 믿지 않으시니 하는 수 없지요. 스스로 목숨을 끊어 소승의 짓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드리겠다는 말씀이옵니다.”
“됐다. 볼일 보거라.”
일목이 불쾌하다는 듯 동천몽을 노려보고 사라졌다.
동천몽이 곯아떨어진 자정경을 보았다.
아주 영리한 자정경이었다. 워낙 눈치도 빠르고 두뇌회전이 탁월하기 때문에 정세 변화에 자신이 개입했다는 것을 파악하기란 그녀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모든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다.
능씨는 자신도 동천비를 도와주지 않으면 모자지간의 인연을 끊을 듯 말했다. 세상에서 유일한 핏줄이며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의 청을 거절하기란 너무 힘들었고 괴로웠다. 누구에게 함부로 털어 놓고 얘기할 수 도 없었기에 혼자 불면의 밤을 새우며 고민했다. 그리고 끝내 소위 말하는 눈물을 머금고 도움을 주었다.
예전 같았으면 술로 밤을 지샜을 텐데 갈수록 술이 싫어진다. 또한 스스로 분한 마음이 불경 몇 줄 외우면 가라 앉는다. 그래서 요즘은 자신이 어쩌면 진정으로 대법왕의 환생자일지 모른다는 의심에서 벗어나 믿어가고 있었다. 어머니의 청이 아닐 지라도 차마 동천비에게 칼을 뽑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꽈당!
바로 그때였다. 주루 문이 통째 떨어져 나가더니 바람처럼 덕배선사가 뛰어 들어왔다.
주위를 휘둘러보다 동천몽을 발견하고 바람처럼 다가왔다.
멈칫!
동천몽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덕배선사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왜 그러느냐?”
덕배선사는 말을 하지 않았다. 거친 숨을 속으로 삼키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얼마나 황급히 달려왔는지를 알 수 있었고 동천몽은 더욱 불길한 생각으로 빠져 들었다.
“말해보거라. 궁에 무슨 일이 생긴게냐?”
“아…아미타불! 아니옵니다.”
“그럼?”
여전히 덕배선사는 말을 잇지 못했다.
퍼억!
덕배선사가 느닷없이 무릎을 꿇었다. 어찌나 세차게 꿇었던지 주루가 울렸고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동천몽의 인상을 찌푸렸다.
덕배선사는 천룡구십구불의 수장으로 포달랍궁의 핵심 인물 중에서도 핵심이었다. 그가 요즘 하는 일은 천지광옥의 경계와 능씨의 신변 보호였다.
“소…소승을 죽여주소서.”
동천몽의 이마가 더욱 찌푸려졌다.
평소 감정 표현이 없는 덕배선사임을 볼 때 놀라운 행동의 연속이었다.
“말해라.”
동천몽의 목소리에 짜증이 베었다.
퍽!
이번에는 이마를 바닥에 찍었고 곧바로 피가 흘렀다.
동천몽의 눈이 더욱 커졌다. 생각보다 더욱 엄청난 사태가 생겼음을 느꼈다.
“어…어머님께서.”
“어머니?”
동천몽이 벼락같이 덕배선사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뭐냐?”
덕배선사가 고개를 떨구었다.
“어머님께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동천몽이 눈을 치켜떴다.
“뭐라고 했느냐?”
“어머님께서 돌아가셨사옵니다.”
동천몽이 조용히 멱살을 놓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떨구고 있는 덕배선사를 한참 바라보더니 탁자에 올려진 냉수를 들이켰다.
“계속 말하라.”
“의심사에서 불공을 드리던 중 인근 산적들의 습격을 받아 숨을 거둔 것 같사옵니다.”
덕배선사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거짓말을 하려니 자신도 모르게 떨린 것이었다.
사실 능씨의 의심사 불공 출타는 새벽녘에 있었다. 소월당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 모두 다섯 번 출타를 했는데 모두 오시를 전후해서였다.
그래서 누구도 그녀를 지키지 않았고 소월당 안에서는 보호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동천비 문제로 거의 불공을 위한 출타이외에는 두문불출 하였기 때문에 모두가 거처에 있는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고 부랴부랴 의심사로 날아갔는데 그만 시신을 발견하였고 모든 정황을 파악했다.
황급히 비상회의가 소집되었고 천장금왕이 엄하게 명령했다.
동천비는 자신들이 잡기로 하고 동천몽에게는 철저히 비밀로 하기로 한 것이다. 만에 하나 모든 사실을 알게 될 경우 동천비 하나의 죽음으로 끝내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무림맹까지 싸잡아 몰살을 시키고도 남는다는 게 회의의 결과였다.
시신들이 바꿔치기 되고 있었다. 의심사 승려들의 시신을 보면 흉수가 어떤 무공을 사용했는지 금방 파악이 될 것이고 산적들 짓이 아니라는 것이 쉽게 드러날 것이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가장 가까운 전선으로 고수들을 보내 무림맹과 목와북천의 싸움으로 희생된 주검 열일곱 구를 옮겨왔다.
능씨의 주검 또한 깨끗하게 단장되어 겁탈의 흔적과 자결의 증거를 지웠다.
천장금왕의 지휘아래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바꾸고 나자 시간은 자시를 향해 치닫고 있었고 아랫사람들로부터 동천몽이 덕배선사와 자정경을 데리고 오고 있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천장금왕은 핏물을 닦아낸 대웅전에 있었는데 세존을 향해 합장하며 소원했다.
‘부디 소승들의 행위를 불쌍히 여기시어 대법왕께서 속아 넘어 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천장금왕은 쉴 사이 없이 소원하고 빌었다.
“대법왕님께서 도착하셨사옵니다.”
천검은왕이 다가와 말했다.
모두의 얼굴에 긴장이 팽팽했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동천몽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소…”
동천몽이 부리나케 마당으로 내려와 허리를 구부리는 천장금왕을 비키라는 듯 밀치며 대웅전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동천몽의 몸에서 차가운 한기가 뿜어나왔다.
멈칫!
동천몽이 대웅전 입구에 섰다.
흰 천에 덮어진 한 구의 주검이 눈에 들어왔다. 불공을 드리다 죽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잠시 흰 천을 바라보던 동천몽이 안으로 들어섰다. 느릿하게 다가가 쭈그리고 앉았지만 쉽게 손을 뻗어 천을 걷어보지 못했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무척 두려운 모양이었다.
그걸 뒤에서 본 천장금왕이 다시 눈을 감았다.
만약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분노를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염려가 더욱 커졌고 기필코 숨겨야 한다는 각오를 더욱 다졌다. 알려지면 상상을 할 수 없는 피보라가 천하를 덮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쭈그리고 앉아 잠시 흰 천을 바라보던 동천몽이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스르르!
흰 천이 걷히고 아름다운 능씨의 얼굴이 드러났다. 혀를 깨물어 자살을 하면서 입이 벌려져 있었지만 천장금왕이 턱 밑 세 곳의 혈도를 찍은 후 강제로 턱을 맞추어 입이 닫히도록 했다. 얼마나 세차게 혀를 깨물었던지 능씨의 혀는 잘려나가고 없었다.
동천몽은 천천히 천을 걷어 배꼽 부위에서 멈췄다. 당대제일의 부호와 혼인을 한 여인이었지만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행색이었다. 그 흔한 목걸이 귀고리 하나 없고 손가락에 반지 하나 끼어 있지 않았다. 얼굴에도 화장 한 점 묻지 않았고 걸치고 있는 흰 무명만이 죽은 시신을 곱게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쳐다보던 동천몽이 손을 뻗어 모친의 뺨을 어루만졌다. 금방이라도 간지럽다고 손을 탁 칠것 같다.
스으으!
왼쪽 뺨을 만지고 오른쪽 뺨을 쓰다듬어도 능씨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훗훗! 간지럽지 않소? 왜 아무 말씀도 없으십니까?”
지켜보던 천장금왕이 흠칫 했다.
뒤에 도열해 있던 덕배선사와 자정경은 물론 나머지 사대법왕과 무미선사도 깜짝 놀랐다. 동천몽의 목소리에서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목소리에 감정이 없다는 것은 너무 큰 충격에 슬픔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슬픔을 깨우치면 슬픈 자의 음성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늙었구려. 아무 곳에서나 등을 붙이고 주무시다니.”
자정경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자 천장금왕이 소매를 붙잡았다.
자정경이 왜 그러느냐고 따지듯 쳐다보자 천장금왕의 전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냥 지켜만 보거라’
자정경이 전음으로 물었다.
‘사부님이 이상하잖아요?’
‘내버려 두거라.’
다시 한 번 완곡하게 말했다.
‘피해가려고 해도 피해지지 않는 것이 있고 피하고 싶을 때 미련없이 피해지는 것이 있느니라. 그러나 부모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 슬픔은 더욱 비켜가지 않는다. 거기다 충격이 크면 그 아픔 또한 절대 빗겨갈 수 없는 것이 인생 아니겠느냐? 모든 것은 때가 되고 시간이 지나야 해결될 일이니 내버려 두거라.’
자정경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나왔다.
“일어나지 않을 생각이오? 지금 소자에게 시위하는 것입니까? 그 잘난 큰 아들 도와주지 않는다고 행패 부리는 것이냔 말이옵니다.”
동천몽이 급기야 능씨의 손목을 잡았다.
“일어나십시오. 이런다고 소자 마음이 바뀔 것 같사옵니까? 소용없는 일입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지요.”
동천몽이 손목을 잡고 일으켜 세우려 했다.
휙!
보다못해 자정경이 다시 뛰쳐나가려고 했고 천장금왕의 손이 단호히 앞을 막아섰다.
‘경거망동 하지 말라고 했느니라.’
차가운 전음이었기에 자정경이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천장금왕의 시선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구경할 수 없었던 무서운 눈빛이었다. 마치 두 눈이 뒤통수로 빠져나가는 듯한 충격이 전해졌는데 자정경은 자신이 느끼는 슬픔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다. 눈앞의 천장금왕을 비롯한 제자들이야말로 진짜 슬퍼하고 있었다.
“정말 일어나지 않으시면 소자 화냅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세요.”
누가 보면 실성한 사람 같았다.
죽은 시신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양 팔목을 붙잡고 앉히려 했다. 하지만 이미 빳빳해진 시신은 앉혀지지 않았고 동천몽은 애를 쓰며 앉히려 했다.
“아미타불!”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여기저기서 신음에 가까운 불호가 흘러나왔다.
“좋습니다. 어머니께서 자꾸 고집을 피우시니 소자 또한 달리 방법이 없군요. 금왕.”
“하명하소서. 대법왕님.”
“어머니를 모시거라. 당장 모시고 간다.”
동천몽이 얼어났는데 잔뜩 화난 얼굴이었다.
“고집을 피울 걸 피워야지. 무엇 하느냐? 당장 어머니를 소월당으로 강제로 모시거라.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형님 일은 안됩니다. 제가 세존의 말씀을 온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알려야 하는 대법왕이지만 그 자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어서 어머니를 업거라.”
천장금왕이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동천몽이 인상을 썼다.
“금왕 내 말이 안들리느냐?”
“진정 하시지요. 어머님께서는 운명 하셨사옵니다.”
“미친놈, 멀쩡히 살아 있는 분을 돌아가셨다고? 너야 말로 늙더니 이제 사람을 보는 눈까지 무뎌졌구나.”
모든 제자들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동천몽을 쳐다보았다.
“네놈과 장난 할 시간 없느니라. 어머니를 모시고 날 따르라. 남자나 여자나 늙으면 고집만 남는다더니.”
쿵쾅 소리가 나도록 발소리를 내며 대웅전을 벗어났다.
모두가 난감한 표정으로 얼굴만을 쳐다볼 때 동천몽이 대웅전 마당에서 버럭 소릴 질렀다.
“금왕, 뭐하는거냐? 다 늙은 여자 한명 끌고 오지 못하느냐?”
“사부님!”
도저히 못 견디고 자정경이 뛰어나갔다.
“사부님 왜 이러세요? 어머님은 돌아가셨어요.”
“네 이놈. 감히 사람의 목숨을 갖고 농담을 하려느냐? 버르장머리 없는 놈.”
“정말이예요. 사부님이야 말로 지금 무엇하는 거에요. 정신 차려요. 어머니는 돌아가셨어요. 산적들에게요.”
멈칫!
동천몽의 눈이 빛났다.
강렬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동천몽을 향해 자정경이 입을 열었다.
“진정하세요. 제발 사부님은 대법왕님이잖아요. 슬픔은 알지만 이러시면 안됩니다.”
“어…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느냐?”
탁!
앞을 막고 있는 자정경을 사정없이 손으로 치더니 대웅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뚝!
동천몽이 걸음을 세웠고 바닥의 능씨를 한참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맞아. 돌아가셨다고 했지. 덕배.”
“부르셨나이까?”
덕배가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뒤에 시립했다.
“산적에게 당했다고?”
“아…아미타불! 그러하옵니다.”
덕배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동천몽이 눈을 빛냈다.
“산적에게 죽었다고 했는데 왜 몸에 상처 하나가 없느냐?”
번쩍!
천장금왕의 고개가 번쩍 들어 올려졌다. 급히 짜 맞추다보니 미쳐 몸에 상처를 내지 못했다.
‘이…이런!’
천장금왕이 당황하여 어쩔줄 몰라 할 때 동천몽이 말했다.
“설마 산적들이 독으로 살해 했을 리는 없고.”
이 곳 저곳 옷고름까지 뒤척이며 상처를 찾았지만 어디에서도 상처는 나타나지 않았다.
쫘악!
갑자기 동천몽이 능씨의 옷을 찢었다.
화악!
지켜보던 사람들이 소스라졌고 드러난 앞가슴 어디에도 상처가 없다.
멈칫!
동천몽의 시선이 꽉 물린 입술에 멎었다.
죽은 사람 특유의 자연스런 입 물림이 아니었다.
탁!
동천몽이 능씨의 턱 아래 대근혈을 쳤다.
쩌억!
그러자 섬칫한 소리와 더불어 턱이 벌려지며 입이 드러났다.
파앗!
동천몽의 눈빛이 섬광을 발했다. 능씨의 혀가 반토막임을 발견한 것이다.
홱!
동천몽이 천장금왕을 돌아보더니 그대로 장력을 날렸다.
빠악!
“컥!”
천장금왕이 일장을 맞고 대웅전 마당으로 날아가버렸다.
동천몽이 벼락 같이 날아가 땅에 떨어져 내리는 천장금왕의 멱살을 거머쥐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산적에게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왜 혀가 없느냐? 설마 산적에게 겁탈을 당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단 말이냐?”
천장금왕의 입술이 물렸다.
거짓말은 한 번 덮기 위해 더 많은 거짓말을 필요로 한다. 더구나 이왕 시작한 거짓말이었으므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예…그러하옵니다.”
동천몽이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더니 주먹으로 천장금왕의 턱을 돌렸다.
빡!
느닷없는 주먹질에 천장금왕의 입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네놈이 이제 아예 본왕을 갖고 놀려고 하는구나. 네 이놈 이리 오너라.”
천장금왕을 끌고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더니 능씨 주검 앞에 쳐박듯 무릎을 꿇렸다. 그리고 자신의 손가락으로 명치를 가리켰다.
“이건 뭐냐?”
능씨의 입을 다물게 했고 의심사 승려들의 시신을 바꿔치기 했지만 차마 몸까지 살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능씨의 명치에 미세한 검은 반점이 십여개 찍혀 있었다.
그것은 극악한 마공이나 사공을 익힌 자가 겁탈을 하면 나타나는 흔적으로 마혼인구(魔魂印球)였다.
“무공이 높으니 잘 알 것이다. 더구나 불가의 무공의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마도의 무공에 관해서는 해박하니 더 잘 알겠지?”
천장금왕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속으로 아미타불을 수십 번 외웠고 어찌해야 할지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말해라. 저게 뭐냐? 마혼인구 맞느냐?”
천장금왕이 침묵을 지켰고 동천몽이 버럭 소릴 질렀다.
“늙은이 뒈지고 싶으냐?”
금방이라도 살수를 쓸듯 동천몽의 눈에서 불꽃이 이글거렸다.
“자세히 말해라.”
당황해 하면서도 천장금왕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자 동천몽이 거침없이 오른손을 쳐들어 올렸다.
“대…대법왕이시여.”
천검은왕이 나섰다.
“소…소승이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겠나이다.”
“사제.”
천장금왕이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듯 가로막았다.
“사형이 죽습니다. 그런 간악한자 때문에 형께서 생 죽음을 당하시렵니까? 대법왕님 흉수는 동천비 이옵니다.”
동천몽이 인상을 찌푸렸다.
천검은왕이 다시 말했다.
“어머님을 겁탈하고 죽인 자는 동천비이옵니다.”
“지…지금 어머니를 겁탈하고 죽인 자가 동천비라고 했느냐?”
“뭣들 하느냐? 그자를 데려오너라.”
천권동왕이 기다렸다는 듯한 명의 흑의무사를 데려왔다. 그런데 흑의무사의 앞 가슴에 사(死)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자는 혹도십문 중 한 곳인 사부의 무사입니다.”
천검은왕이 말을 요약하면 대략 이러했다.
능씨를 찾아 의심사로 달려든 포달랍궁 무사들은 눈앞에 벌어진 처참한 사태에 아연실색했고 곧바로 흉수 추적에 나섰다. 그리고 동천비를 추적해온 사부의 무사를 만났는데 그는 숨어서 모든 것을 직접 보았다고 했다.
“푸핫핫핫!”
동천몽이 고개를 쳐들고 광소를 흘렸다.
우르르르!
거친 광소에 대웅전이 흔들거렸고 천장에 매달린 연등과 황금빛 세존상이 굴러 떨어졌다. 순식간에 대웅전은 폭격을 맞은 듯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지만 동천몽의 광소를 끝나지 않았다.
“형님이! 형님이!”
한동안 미친 듯이 웃던 동천몽이 웃음을 그쳤다.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자식이 부모를 겁탈했단 말이냐? 우핫핫핫!”
“대…대법왕이시여 형님은 묵곤혈참기의 마기에 지배당해 제 정신이 아니었…컥!”
천장금왕의 말이 중간에서 끊겼다.
동천몽이 그대로 얼굴에 주먹을 쑤셔 박은 것이다.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쳐 죽일 늙은이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빠바박!
천장금왕의 입이 순식간에 걸레조각이 되고 말았다.
“천장?”
“마…마슴하소서. 대버방이시영.”
“우선 너부터 죽어야겠다.”
동천몽이 인정사정없이 천장금왕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빡!
빠바박!
“그만 하소서. 사형은 죄가 없…아이고.”
천검은왕이 나섰다가 그 역시 턱에 주먹을 맞고 나가떨어졌다.
콱콱콱!
쓰러진 천장금왕을 짓밟았고 천검은왕에 이어 천지철왕까지 나섰다가 역시 주먹을 맞고 나가 떨어졌다.
보다못해 자정경이 나섰다.
“그만해요. 사부님 이건 아니잖아요.”
뚝!
주먹을 날리려다 자정경임을 발견하고 멈췄다.
자정경이 큰 소리로 말했다.
“제정신이에요. 사부님 마음 모르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죄없는 법왕님들을 때려요. 차라리 날 때려요.”
“때리라고 하면 내가 못 때릴 줄 알았더냐? 건방진.”
정말로 동천몽의 주먹이 뻗었고 덕배선사가 잽싸게 자정경을 밀치고 자신이 맞았다.
퍽!
덕배선사가 밀치는 바람에 밀려난 자정경의 눈이 커졌다. 덕배선사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직접 맞았을 것이다.
“사…사부님.”
놀란 눈으로 더듬거렸다.
‘이럴수가.’
아무리 충격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제자에게, 그것도 여자에게 주먹을 휘두른단 말인가.
자정경이 겁먹은 얼굴로 바라보자 동천몽이 움찔했다. 그리고 주위를 휘둘러보더니 천장금왕을 비롯해 코피를 흘리고 있는 천지철왕과 천검은왕의 모습을 본 후 정신이 든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