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50화 (50/71)

제5장 모정

소월당 뒤뜰에서 바람소리가 흘러나왔다. 쥐어 짜이는 듯 바람소리는 비명에 가까웠는데 자정경이 검법을 연마하고 있었다. 그녀의 검이 허공을 벨 때마다 공기가 자지러졌다. 검법이 예리할수록 파공음은 인간의 비명에 가까워진다는 것이 강호의 정설이고 보면 그만큼 자정경의 무위가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걸치고 있는 흑의는 이미 땀에 흥건히 젖었고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눈에서는 야무지다 못해 표독하기 까지 한 한기가 사방으로 폭사되며 차가운 검광과 더불어 뒤뜰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슈슈슉!

지면은 그녀의 두 발에 의해 반들반들 윤기가 흘렀고 근처 나뭇가지들은 검기에 의해 모조리 잘려나가 있었다.

“얍!”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그녀가 기합을 터뜨리며 검을 휘둘렀다.

파파파파파!

정확히 다섯 번의 섬광이 폭발하며 불어오던 바람이 멈추었다. 멈췄다기 보다는 바람이 잘려지면서 잠시 움직임이 끊어진 것이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바람은 분명이 다섯 토막이 되었고 다시 합해져 주위 나뭇가지들을 흔들었다.

슈우욱!

갑자기 자정경의 검이 오른쪽 숲을 향해 뻗어갔다.

뻗어가는 검은 조금 전까지 보였던 수련검이 아니라 살기를 담고 있었는데 한 개의 바위가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허…허걱!”

바위가 갈라지고 뒤에서 놀람에 가득찬 신음이 터져나왔다.

“사…사부님.”

바위 뒤에 놀란 눈을 하고 있는 사람은 동천몽이었다.

자정경이 눈으로 스며드는 땀방울을 왼손으로 훔치며 눈을 크게 떴다.

“어…언제 오셨어요.”

“이…이것 좀 치우고 말하자.”

자정경의 검은 동천몽의 목젖에 대어져 있었다.

그녀가 검을 치우자 동천몽이 목을 쓰다듬으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어휴, 십년 감수했구나. 아미타불!”

“사부님!”

자정경이 검을 집어 던지고 와락 동천몽의 목을 끌어 안고 매달렸다.

“오셨으면 오셨다고 말씀을 하셔야지 숨어서 제자 무예수련 모습을 훔쳐보면 어떡해요. 난 적인줄 알고 하마터면 살수를 펼칠 뻔 했잖아요.”

“너…너의 무공이 워낙 황홀해 그만 넋이 빠졌지 뭐냐? 아이구 무겁다. 그만 내려오거라.”

자정경이 목을 끌어안은 채 동천몽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정말로 제자가 무겁단 말에요?”

자정경의 눈빛이 심상치 않자 동천몽이 잽싸게 말을 바꿨다.

“그…그게 아니라 옛날부터 사부는 반가우면 무겁다고 하느니라.”

“그럼 그렇죠. 그동안 몸무게가 이관이 빠졌는데요.”

“이…이관.”

“보실래요.”

끌어안고 있던 목을 풀고 내려오더니 윗도리를 확 걷어 올려 쏙 들어간 배와 날씬해진 허리를 보여주었다.

“보세요. 배가 완전히 등에 붙었잖아요. 사부님께서 두껍다고 놀렸던 팔뚝두요.”

소매를 걷어 올려 팔뚝까지 보여 주었다.

“과…과연 그렇구나.”

하지만 동천몽의 얼굴에는 기뻐하는 표정이 전혀 없었다.

사실 그가 숨어서 엿본 것은 땀에 젖은 자정경의 요염한 모습을 보면 혹시라도 반응이 있을 까 해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반응이 없었고 너무 실망한 나머지 넋을 놓아버렸는데 그 바람에 자정경의 감각에 노출된 것이었다.

자정경의 환하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 또한 동천몽의 표정에서 여전히 치료가 되지 않았음을 발견한 것이었다.

와락!

또다시 자정경이 목을 끌어안고 원숭이처럼 매달렸고 동천몽이 깜짝 놀랐다.

자정경이 입술이 닿을 만한 거리까지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는데 뜨거운 입김이 느껴졌다.

“두고봐요. 반드시 사부님의 병을 제가 고치고 말거에요.”

동천몽이 눈을 크게 떴다.

유일한 처방은 화중동거라는 사실을 말해주었기 때문에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정경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회복을 위해 여자로서 할 수 있는 온갖 방법을 다 사용하겠다는 놀라운 선언이었다. 여인인 자정경이 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보나마나 반라의 몸은 물론이려니와 필요하다면 알몸을 이용한 유혹이다.

“호호호! 사부님 눈 또 토끼되셨다.”

눈을 크게 뜬 동천몽을 보며 우스워죽겠다는 듯 깔깔거렸는데 가슴을 의도적으로 세차게 흔들며 앞가슴을 비볐다.

“허험!”

그때 뒤뜰로부터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으므로 자정경이 매달린 채 고개를 홱 돌렸다. 뒤뜰에 한 명의 중년부인이 고개를 돌리고 서 있었는데 자정경이 동천몽에게서 내려와 쪼르르 달려갔다.

“어머님 오셨어요.”

자정경이 달려가 아주 자연스럽게 능씨의 손을 잡았다.

“사부님 오셨어요. 그래서 잠시 얘기 좀 나누고 있었던 거에요.”

자정경의 태도는 완전히 며느리였다. 그것도 고부간에 무척 사이가 좋은 그런 모습이었다.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에 어머니의 마음을 사로잡은 게 분명했다.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제자가 그렇게도 좋은가 보군요. 이 어미보다 제자를 먼저 찾는 걸 보니 말입니다.”

비록 모자지간이지만 대법왕이다. 그래서 능씨는 함부로 말을 놓지 않았다.

동천몽은 싫다고 했지만 능씨가 완강히 반대했다. 더구나 독실한 불자인 어머니는 사석에서는 몰라도 대법왕에 대한 예의를 한시도 게을리 하지 않고 대접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능씨가 앞서가는 동천몽을 보며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동천몽이 걸음을 떼려다 고개를 돌린다. 능씨의 표정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몇 번 입술까지 들썩였지만 능씨는 차마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실 말씀 있으시옵니까?”

“아…아닙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그만 들어가세요.”

“어머니.”

돌아서는 능씨를 불러 세웠다.

동천몽이 깊숙한 눈빛으로 말했다.

“하십시오. 무슨 말씀입니까?”

“별것 아닙니다.”

“어머니.”

다시 돌아서는 능씨를 이번에는 자정경이 잡아 끌었다.

“아무리 대법왕님이라고는 하지만 사적으로는 어머님 아들이에요. 뭘 망설이세요. 하실 말씀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하세요.”

“아니다.”

“그냥은 못가요. 말씀하세요.”

자정경이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능씨가 깊숙한 눈으로 보더니 돌아섰다.

잠시 동천몽을 가만 바라보던 능씨가 조용히 한숨을 내 쉬며 입을 열었다.

“천비 얘기 들었느냐?”

멈칫!

동천몽의 눈이 기광을 발했다.

능씨가 말했다.

“천비가, 위험에 빠졌다는 구나.”

동천몽이 싸늘해진 눈빛으로 물었다.

“자세히 말씀해보십시오?”

“아침 일찍 가석구가 왔다 갔느니라.”

“가부총관 말이옵니까? 그자가 왜 어머니를 찾아왔단 말입니까? 어떻게?”

동천비 눈에서 살기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덕배 있느냐?”

“찾으셨사옵니까?”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나더니 맨발의 덕배선사가 나타나 합장했다.

동천몽이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더냐? 어떻게 경계를 하고 있기에 적이 드나들 수가 있단 말이더냐?”

“덕배선사님께서는 막았어요. 이 어미가 들여 보내라고 부탁했어요. 덕배선사는 잘못이 없으니 꾸중을 하려거든 어미에게 하세요.”

동천몽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덕배선사를 보더니 툭 쏘듯 말했다.

“가보시오.”

덕배선사가 합장을 하고 사라졌다. 가석구는 동천비의 측근이자 여추량의 오른팔이었다. 여추량처럼 교활하거나 음흉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천상각의 부총관으로 아버지의 움직임을 동천비에게 보고하던 배신자이자 밀정꾼이다.

“천비가 당했다는군요.”

동천비는 백쾌섬과 손을 잡고 있는데 당했다면 뻔했다. 뒤통수를 맞았다는 뜻이었다.

“아직 생사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아주 위험한 지경에 빠져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어머니더러 날 시켜 도와달라고 하던가요?”

“아니다. 그 이전부터 가석구는 나에게 가끔씩 동천비에 대한 소식을 전했어요.”

“가 부총관이 왜요?”

“가석구에게 이 어미가 부탁했습니다. 왜냐 하면 동천비는 내 아들이자 천상각의 미래를 이끌어갈 장남이기 때문입니다.”

동천몽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정경 또한 당황한 얼굴로 능씨를 돌아보았다.

“섭섭하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왕 이렇게 말이 나왔으니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어미의 소원입니다. 천비를 살려주십시오.”

“난 그자를 죽이려고 마음 먹고 있습니다.”

“말 조심 하세요. 형에게 그자라뇨?”

“그자가 행했던 지난날의 과오를 몰라서 그렇습니까?”

“압니다. 누구보다도 당한 이 어미가 그걸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그 아이는 내 자식입니다. 자식의 흠 하나 감싸지 못한대서야 그게 어디 어미입니까?”

“흠이 아닙니다. 그건 배덕이자 폭력이었고 어머님을 창녀라고 까지 한 쓰레기입니다. 소자까지 죽이려 했단 말입니다.”

“아무튼 한번만 도와주십시오. 그것이 드리고 싶을 말입니다. 물론 싫으시다면 하는 수 없구요.”

능씨가 몸을 돌려 걸어갔다.

“어머니 잠시만요.”

자정경이 잽싸게 뒤를 쫓아 달려갔다.

능씨와 자정경이 사라졌지만 동천몽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얼굴이 돌덩이처럼 굳어졌고 금방이라도 폭발 할 것 같은 험악한 기세를 풍겼다.

바람에 연꽃 향기가 날아왔다. 동천몽은 정자에 서서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벌과 나비가 연꽃 위를 날아다녔고 이따금 수면에 앉은 곤충을 잡아 먹기 위해 물고기가 솟구쳐 오르기도 했다.

동천몽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능씨의 부탁이 상당한 충격으로 작용한 듯 싶었다.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자정경이 다가왔는데 그녀의 얼굴 역시도 굳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동천몽을 살피던 자정경이 입을 열어 말했다.

“사부님 한 말씀 드려도 되겠어요?”

동천몽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사부님께서 동천화 누님을 수라옥에 가뒀다는 사실에 무척 실망하셨어요.”

“자세히 말해보거라.”

“어떻게 친 누이를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할 뇌옥에 가둘 수가 있느냐는 거죠?”

“정녕 어머니께서 그렇게 말씀 하셨단 말이냐?”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제자 또한 사부님의 행동을 이해하고 잘했다고 생각 하는 사람이에요. 동천화 누이는 용서받을 가치가 없는 분이죠. 그런데 동천비 형님은 동천와 누이와 다른 것 같아요? 최소한 어머니에게는요.”

“……”

“아까 말씀 하셨다시피 동천비 형님은 천상각의 장자 아닌가요? 그것이 어머니 마음을 흔드는 것 같아요. 왜 어머니께서도 옛날 일을 잊겠어요. 아마 사부님 보다 더 원한에 맺혔을 거에요. 그러나 어머니는 자식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계시더군요. 그러니까 도와달라는 그런 말씀을 하시는거죠?”

“그만 돌아가거라.”

“사부님 제 말 좀.”

“듣기 싫다. 혼나기 싫으면 넌 조용히 있거라. 이건 네가 나설 일이 아니니라.”

자정경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동천몽의 화난 모습은 오늘 처음 보았다. 항상 자신에게는 웃고 기쁜 표정만 지었는데 지금은 싸늘하다 못해 살벌했다.

자정경은 아뭇소리 못하고 물러섰다.

휘이이!

바람에 연못 물결이 출렁거렸고 연꽃들이 흔들렸다. 진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으며 철 이른 낙엽들이 정자 안으로 떨어졌다.

눈앞으로 지난날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자신을 죽이고 어머니를 쫓아내기 위해 세 남매가 벌인 온갖 추잡한 사건과 음모들이 적나라하다. 추호도 용서할 수 없고 용서 하고 싶지도 않는 악행을 어머니 능씨는 조용히 삭히려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철부지의 망동으로 이해하고 관계를 복원하려 하고 있었다.

동천비의 세력은 일거에 급습을 받아 완전히 궤멸되었다. 중원오랑으로 불리던 세력중 한 곳이었던 낭도채의 채추 제갈팽 또한 목와북천의 장로 중 두 사람인 냉심자와 무정살도의 칼에 쓰러졌고 측근들 모두 추살되었다.

백쾌섬의 계획은 철저했고 단숨에 이뤄졌다. 반란과 거사란 단 순간에 몰아쳐야 한다는 평소 그의 지론대로 한 치의 오차 없이 실현된 것이었다. 아무리 강한 집단일지라도 예상을 하지 못한 돌발적인 기습공격에는 무기력해 질 수 밖에 없고 더구나 작정하고 목와북천 최고의 고수들을 동원하였으므로 승리는 예정된 일이었다. 동천비의 수하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살기 위해 각자 어둠속으로 쫓겨 사라졌다.

가석구는 연거푸 빈속에 죽엽청을 털어 넣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그의 술은 멈출지를 몰랐고 새벽같이 문을 열자마자 들어서서 오시가 다되도록 술을 마시는 가석구를 점소이는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옆구리에 검을 차고 있는 것을 보아 무림인이 분명했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이쪽이 피해를 입는다는 것이 지난 시절의 경험이었고 또한 아침부터 술을 푸는 인물들 대부분이 끝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술값을 떼먹거나 행패로 마무리된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불안했다.

술값을 받지 않아도 좋았다. 차라리 조용히 일어나 가줬으면 하는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가석구는 좀체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벌써 열일곱 병째 술을 시키고 있었다.

채앵!

갑자기 가석구가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가석구는 상인이었다. 호신술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검을 차고 있었는데 그가 뽑아들자 점소이와 주인의 가슴이 철렁했다.

‘저…저 시벌놈이 끝내.’

둘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당시 주루에는 세 명의 손님이 각자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보나마나 그들에게 시비를 걸려는 것이 분명했다.

‘제발!’

제발 그냥 뽑은 검을 다시 검집에 넣고 나가주기를 기도하고 빌었다. 하지만 가석구는 그들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행동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야 이 자식들아.”

가석구가 검을 뽑아들고 소리를 꽥 질렀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이 공포에 젖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가석구는 취기로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니…니들이 인생을 알아?”

그러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흑의대한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대협님 우린 무식해서 모릅니다. 그러니 자제하시고.”

“니들이 인생을 아느냐고?”

가석구가 비틀거리며 소릴 꽥 지르자 대한이 다시 대답했다.

“모…모릅니다. 죄송합니다.”

가석구가 검을 쳐들고 다시 외쳐 말했다.

“인생을 아냐니까? 아는 놈 손들어.”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모두가 불안한 얼굴로 가석구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인생이란 더러운 거야? 족같은 거라구. 니들이 정말 인생을 알아 어엉?”

“모…모릅니다. 우리 같은 천한 것들이 어찌 인생을 알겠나이까?”

어떻게 해서라도 가석구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게 위해 흑의대한은 노력했다.

“모…모조리 잘라 버리겠어.”

가석구가 검을 휘두르다 몸의 중심을 잃고 그대로 엎어졌다.

퍽!

그 바람에 탁자 귀퉁이에 코가 부딪혔고 쌍코피가 흘렀다.

“으잉! 어…어느 놈이 날 쳤어. 죽여버릴거야.”

일어나다 다시 쓰러졌고 몸을 일으켜 세우지 못하고 바둥거리는 가석구를 바라보는 점소이 눈이 이채를 발했다.

점소이가 살며시 다가오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손님 괜찮으시옵니까?”

“뭐가 괜찮아 임마. 네 눈에는 이게 괜찮아 보이느냐?”

그러면서 왼주먹을 휘둘렀지만 점소이가 피했고 탁자 다리에 주먹이 부딪혔는데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으으으!”

“손님 그만 일어서십시오.”

점소이가 부축하는 척 하며 가석구를 슬쩍 걷어 찼다. 하지만 가석구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고 다른 곳으로 눈을 부라렸다.

“웨…웬 놈이 날 차느냐? 뒈질래?”

점소이는 또다시 부축하는 척 하며 슬쩍 건드려보았고 여전히 가석구로부터 반응이 시원찮게 나오자 자신감을 얻었다.

“이 새끼 이제보니 순 엉터리잖아. 일어나 새꺄.”

점소이가 가석구 멱살을 잡아 일으켰는데 가석구는 계속 헛주먹질만 해댔다.

“어휴 이걸 그냥? 난 무림의 대협인줄 알고 쫄았는데 완전히 허당이잖아. 똑바로 서.”

“웬 놈이냐?”

가석구가 주먹을 휘둘렀지만 점소이는 가볍게 피했다.

점소이가 멱살을 잡고 이마로 가석구 면상을 들이 박았다.

퍽!

“아이고!”

가석구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쥐며 고통스러워했고 점소이가 연거푸 두 번을 더 박았다.

가석구 얼굴에 피가 흥건했고 점소이가 멱살을 잡고 노려보며 말했다.

“일단 술 값부터 내놔. 빨리.”

“어…없습니다.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고통으로 인해 어느 정도 정신이 든 듯 가석구가 애원했다.

“시간을 주시면 꼭 갚겠습니다. 대협.”

“내가 무슨 대협이야 개자식아. 난 점소이야. 빨리 안내놔.”

다시얼굴을 이마로 박을 때 일목이 허공에서 뚝 떨어졌다.

“으헉!”

눈이 하나 뿐인 일목이 뚝 떨어져 내리자 점소이가 기겁했고 용기 백배하여 지켜보던 주인까지 경악했다.

“누…누구세요?”

점소이가 겁먹은 얼굴로 일목을 보며 물었다.

“얼마냐?”

“네엣?”

“이 놈이 쳐먹은 술 값이 얼마냐고?”

일목이 인상을 쓰자 점소이가 잽싸게 대답했다.

“으…은자 두 냥 하고 닷푼입니다.”

휙!

일목이 뭔가를 던지자 점소이가 잽싸게 받았다. 손바닥에는 은자 한냥이 들어 있었다.

왜 이것만 주느냐고 물으려다 점소이가 입을 다물었다. 용기가 나지 않은 것이었다.

“나머지는 내 앞으로 달아놔.”

탁!

가볍게 가석구 마혈을 제압한 일목이 어깨에 둘러 메고 밖으로 사라졌다.

점소이가 잠시 일목이 사라진 곳을 쳐다본 후 손바닥의 은자를 보며 투덜거렸다.

“이상한 새끼네.”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일목이 사라진 쪽을 쳐다보았다가 손바닥에 들린 은자 한냥을 번갈아 보았다.

수차례 차가운 물에 얼굴을 담궜다 꺼냈지만 가석구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더 이상 안되겠는지 일목은 가석구를 거꾸로 매달았다. 그리고 나무 막대기를 가석구 입속에 집어넣었다. 토하게 만드려는 것이었다. 토하게 하는 것이야 말로 취기를 가장 빨리 가시게 했다.

으웩!

가석구는 입을 벌리고 토하기 시작했는데 술과 안주가 아직 소화되지 않은 상태로 쏟아져 나왔고 악취가 주위를 뒤덮었다.

“나쁜 놈, 많이도 쳐 막셨군.”

일목이 코를 막고 투덜거렸다.

한참을 토하던 가석구가 조용해졌다. 더 이상 토하지 않은 것을 보아 뱃속이 완전히 비워진 것이 분명했다.

일목이 매달린 가석구를 끌고 가 차가운 계곡물에 다시 던져 넣었다. 차가운 계곡물 속에 던져진 가석구가 정신이 번쩍 드는지 바둥거렸다.

어푸! 어푸!

허우적 거리는 가석구를 일목이 뭍으로 꺼내놓았고 그제서야 정신이 든 가석구가 고개를 좌우로 두리번 거렸다.

그러다 무엇을 발견했는지 가석구의 안색이 흑빛으로 변하더니 그 자리에 잽싸게 무릎을 꿇었다.

“마…막내공자님 아니시옵니까?”

계곡 옆으로 있는 조그만 바위에 동천몽이 걸터 앉아 있었다.

“다 죽었는데 너만 살았더구나?”

가석구가 고개를 쳐박고 더듬거렸다.

“소인도 괴롭습니다. 내 손으로 목숨을 끊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죽어보려고 술을 그렇게 마셨다는 얘기더냐?”

“……”

“가 석구.”

“마…말씀하소서.”

“네놈에게 두 눈이 있더냐?”

느닷없이 눈을 묻자 가석구가 멈칫 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동천몽이 조용히 말했다.

“눈을 떴으면 보았을 것 아니냐? 두 형님과 누이가 어머니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봤느냐? 보지 못했느냐?”

“봐…봤사옵니다.”

“느낌을 말해보아라. 네놈이 나였다면 어떤 마음을 먹었겠느냐?”

“그건?”

“말해보라고 했느니라.”

“해…해도 너무 했사옵니다.”

“그게 전부이더냐? 해도 너무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결코 취할 수 없는 행동을 그들은 어머니에게 했느니라. 그런데 네놈이 혓 바닥을 어떻게 놀렸기에 어머니가 그러신단 말이냐?”

동천몽의 눈이 빛을 뿌렸다.

금방이라도 살수를 펼칠 것 같은 동천몽의 흉흉한 기세에 가석구가 움츠려들며 말했다.

“소…솔직히 말하겠나이다. 대공자님께서는 막내공자님의 형님 되시오며 천상각의 미래 주인이옵니다. 어쨌든 미래 주인이 남의 손에 희생된다는 것은 전 있을 수 없다고 생각 했사옵니다. 그것은 한 사의 죽음이라기보다는 한 가문의 패배라고 생각 하옵니다. 천상각의 명예를 생각 한다면 죽더라도 남의 손에 최후를 마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 하옵니다.”

동천몽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래서 가모님을 찾아가 말씀을 드렸사옵니다. 가모님이 아니면 누구도 막내공자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 했기에.”

“네놈이 장사꾼 노릇을 오래 하더니 궤변만 잔뜩 늘었구나. 잘못에 대한 징계에는 어떤 명예 따위도 따를 수 없느니라. 명예가 따르면 죽음에도 차별이 있고 그것은 결코 올바른 징계가 아니니라. 징계를 받아도 자칫 훌륭한 사람으로 각인될 위험이 있다는 건 네놈이 모르는구나.”

“하…하오나.”

“한마디로 잘못은 저질렀지만 죽이되 품위 있는 죽음을 내리란 얘기인데 그럼 형님이 아니고 가솔 중 누군가 잘못했다면 품위고 명예고 모두 필요 없이 개죽이듯 패 죽이라는 말 아니냐?”

가석구의 표정이 굳어졌다.

동천몽의 추궁에 반박할 여력이 없었다. 동천몽의 말은 빈틈이 없었고 사리에 맞았다.

벌에 의한 죽음에는 명예란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도 거대한,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어떤 명분과 실리를 실어주게 되면 그 징계는 가치가 없어지고 오히려 망자의 후손들과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우를 범하게 된다.

잘못된 징계 때문에 과거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 오늘 날 위인화 되는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죄인은 그냥 죄인으로만 평가하고 징계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보니 넌 아주 위험한 놈이구나. 그래서 부모에게 짐승같은 행동을 한 자를 단지 천상각의 미래라는 이유 하나로 명예스럽게 포장하자는 것이구나. 그리고 좀 더 나아가 반드시 살려야 한다는 억지로구나.”

“소…소인의 뜻은.”

“쳐 죽일 놈 같으니 한마디로 돈이 있고 힘이 있는 자는 잘못을 저질러도 그럴싸한 명분을 얹어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얘긴데.”

빠아악!

동천몽의 주먹이 전광석화와 같이 가석구의 면상에 틀어박혔다.

“크악!”

가석구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가석구.”

“마…말씀하소서.”

가석구가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구부렸는데 피가 뚝뚝 떨어졌다.

동천몽이 살벌한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놈이 바로 너다. 형의 손에 식솔들이 죽을 때 넌 한번이라도 아버지를 찾아가 형의 죄상을 폭로하고 막아 달라고 애원해 보았느냐?”

“주…죽여주소서.”

“옛정을 생각해서 목숨만은 살려주마.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한 번만 더 내 시선에 뜨이면 그땐 살아남지 못할 것이니라.”

가석구가 깊은 눈빛으로 동천몽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깊숙하게 허리를 구부리고 천천히 돌아섰다.

숲 너머로 가석구가 사라졌고 동천몽이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말도 안되는 억지지만 섬기던 주인을 살려보려는 충심이려니 그래도 네놈이 가장 뼈대가 있구나.”

“그러하옵니다. 저놈이 사내이옵니다.”

일목이 맞장구를 치자 동천몽이 노려보았다.

동천몽의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일목이 당당하게 말을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의 주인을 위해서라면 어떤 궤변이라도 서슴치 않아야 진정한 충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사옵니까?”

동천몽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추적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동천비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백쾌섬은 추적 인원을 좀 더 보강했다. 지금까지는 육검산 단독으로 추적을 했지만 흑도 십문중 혈악(血嶽)과 사부(死府) 두 곳을 더 증파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혈악과 사부를 이동은 철저히 비밀을 유지했는데 어떻게 그들의 이동을 알았는지 무림맹이 대대적인 공세를 가해온 것이었다. 그것도 혈악과 사부가 전선을 형성하고 있던 노렸다. 그 결과 호남과 귀주가 무림맹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한 마디로 천하 정벌을 목전에 두고 상당한 타격을 입은 것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싸움은 기세이다. 한번 꺾이면 회복하기란 쉽지 않는 것이 전쟁인데 욱일승천의 기세로 밀어붙이던 흑도의 기세가 완전히 이번 후퇴를 계기로 한 풀 꺾이고 말았다.

백쾌섬은 빼앗긴 성을 되찾기 위해 파상공세를 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그렇다고 동천비를 잡기 위해 빼돌렸던 혈악과 사부를 다시 전선으로 투입한다고 해도 다시 예전의 기세를 회복하리란 보장은 없다. 그러다 동천비도 놓치고 무림맹에도 밀리는 형국이 된다면 최악이다.

“단순하지 않다.”

백쾌섬이 분노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림맹이 혈악과 사부가 장악하고 있던 귀주성을 공략한 것을 우연의 일치로 보기는 어려웠다.

두 곳의 움직임은 극비였다. 그런데 적은 움직임을 훤히 들여다보고 공격한 것 같았다.

“혈악과 사부의 움직임은 중요한 기밀이었사옵니다. 우리쪽에서도 대종사와 속하 말고는 누구도 모르지요. 그런 극비가 새어나갔을 리 만무 합니다.”

삼천목이 백쾌섬의 의심을 일축했다.

그러나 백쾌섬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럼 무림맹에서 우리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단 말이옵니까? 그건 절대 말이 되지 않사옵니다.”

“무림맹이 아니다.”

“무슨?”

“동천비의 오른팔인 여추량의 실종과 그의 여동생 동천화의 실종에 이어 남궁관의 죽음에서 난 한 가지 공통점을 느꼈다. 여추량과 동천화는 하나의 움직임을 갖고 있었다. 다시 말 해 여추량은 동천화를 추적 중에 있었다는 얘기지. 그건 두 사람이 한 노선에 있었다는 뜻이고 두 사람의 실종은 곧 한 사람의 짓이라는 애기가 된다. 또한 남궁관의 죽음 또한 그가 아니면 누구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일이다.”

“그라면?”

“동천몽.”

“그는 죽었습니다.”

“시체를 찾지 못했지 않느냐?”

삼천목을 보냈고 자신이 다시 한 번 사건현장까지 다녀왔다. 그러나 동천몽의 시신은 없었다.

“하면 혈악과 사부의 전선에서의 철수 사실을 무림맹에 알려준 사람이 동천몽이란 말씀이옵니까? 그가 무슨 수로 대종사와 저 밖에 모르는 비밀 사항을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삼천목은 단호히 부인했다.

백쾌섬이 차가운 한광을 발하며 말했다.

“넌 아직도 그를 모르느냐? 난 누구보다 더 그를 곁에서 지켜보았다. 그는 학문은 얕으나 회전하는 두뇌는 천하제일이다.”

“좋습니다. 대종사님 말씀처럼 동천몽이 귀띔을 해주었다고 하지요. 그럼 목적이 있을 것 아니온지요?”

“있다.”

“….”

“동천비를 살리기 위해서다. 혈악과 사부까지 투입하면서 그의 신변이 위험해지자 무림맹을 이용해 동천비 추적에 투입된 두 세력을 불러 들이게 만들려는 계산이지.”

“둘은 형제지만 원수 지간임을 기억하소서.”

“어머니가 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흠칫!

삼천목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동천몽을 찾아 달라는 동오룡의 청부를 받으면서 난 능씨라는 사람을 곁에서 보았다. 그녀는 진정한 어머니였다. 어지간한 여인이라면 그만큼 모욕과 치욕을 당했다면 미움을 품을 만도 하건만 능씨는 아니었다. 여전히 동천몽을 포함한 다섯 남매를 자신의 자식으로 생각하며 그들을 이해하고 감싸려고 했다.”

“결국 능씨가 동천몽을 움직여 동천비를 돕도록 압력을 넣었다는 것이군요.”

“확신한다.”

삼천목의 눈이 가늘어졌다.

전혀 가능성 없는 얘긴 아니었지만 동천몽의 성격을 볼 때 아무리 어머니 부탁이라고 해도 들어줄리 만무했다.

바로 그때였다. 한 명의 무사가 바람같이 달려 들어오더니 빠르게 입을 열었다.

“동천비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사옵니다. 지금 의심산에 있다 하옵니다.”

“의심산이라면 이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 아니냐?”

“하지만 그 곳은 무림맹 관할이옵니다.”

“신경쓸 것 없다. 무림맹 관할이라고 해서 동천비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무림맹과도 대립각을 세우고 있으니 그들 눈까지 피하는 이중고에 시달릴 터이니 더욱 잡을 수 있는 기회이다.”

“존명!”

부하가 빠르게 돌아나갔다.

혼자 남은 백쾌섬이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 상황에서 살아났단 말인가?’

믿어지지가 않았다. 자신이 두 번 검을 휘둘렀고 삼천목이 한번 휘둘렀다. 가장 확실한 죽음이 내려졌는데 살아났다는 사실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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