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욕망지종(慾望之終)
의원은 맥을 짚고 눈을 까 뒤집어 보기도 했다. 모용산의 안색을 유심히 살피고 손톱의 변색 상태를 날카롭게 보았다. 의원 뒤로는 비천야차와 모용파를 비롯한 모용세가의 간부들이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모용산의 신체 변화를 꼼꼼하게 살피던 의원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맥을 짚었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오랫동안 맥을 살피던 의원이 모용산의 팔을 놓았다.
“좋지 않는가? 뭘 그렇게 자세히 살피는가?”
모용파가 물었다.
의원이 돌아서서 자신을 쳐다보는 모용파를 보더니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의원이 눈을 감자 방안에는 숨막히는 긴장이 흘렀다.
“왜 아무말 없이 눈만 감고 있는가?”
모용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의원이 조용이 눈을 뜨더니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의원은 가방을 챙겨들고 모용세가 사람들을 밀치며 나가버렸다.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던 모용파가 잽싸게 의원 뒤를 쫓아 나가며 외쳐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무슨 의원이 모르겠다는 말 한마디 던져놓고 도망치듯 가는가?”
의원이 돌아서서 말했다.
“그대로입니다. 왜 아가씨께서 넋이 나가버렸는지 원인을 모르겠습니다. 원인을 모르니 처방은 더욱 불가능하지요. 그럼.”
또다시 의원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뭐라고 합니까?”
비천야차를 필두로 간부들이 다가왔다.
모용파가 긴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입을 열었다.
“모르겠다는구만.”
비천야차가 복도 끝을 보며 인상을 썼다.
“패죽일 돌팔이, 무려 이각을 이 잡듯 뒤지며 조사하더니 내놓은 답이라는게 모르겠다고? 아는 늙은이만 아니면 그냥 한 주먹에 대갈통을.”
모용파가 다시 방안으로 들어섰다.
모용산은 깊은 잠속에 빠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의복도 여기저기 찢겨있고 얼굴에 가벼운 찰과상이 있다.
사내에게 강제로 능욕을 당한 여인의 행색이었기에 모용파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대부분 그런 여자들은 거의 실성하다시피 정신이 이상해지지 않던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강호의 일류고수가 능욕을 당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더 강한 사내를 만나면 꼼짝없이 당할수 밖에 없지만 일류고수쯤 되면 최소한 도망을 쳐서라도 위기는 피한다.
‘으음!’
모용산이 이마를 찡그리더니 신음을 흘렸다.
“산아야.”
“아가씨.”
기다렸다는 듯 모용산을 불렀다.
“아아! 아으으으!”
모용산이 이마를 찡그리며 더욱 괴로워했고 모용파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전형적인 능욕 후유증이다. 강제로 몸을 더럽히면 잠결에도 헛소리를 하고 신음을 흘리는데 지금 모용산이 그런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부르르!
모용파의 주먹이 불끈 쥐어지면 온 몸을 떨었다. 여인에게 정조를 생명과 같다. 남궁관과 혼사가 거의 성사단계에 있는데 만약 능욕당한 사실이 알려지면 파혼은 불문가지이다. 남궁세가는 현 무림의 실세이자 머잖아 천하를 경영할 놓칠 수 없는 가문이었다. 비록 지금은 고전을 하고 있지만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아그그! 아아흐흐!”
모용산이 이마를 찡그리며 더욱 헛소리를 하자 지켜보던 모용파의 속은 더욱 검게 타들어갔고 비천야차와 나머지 간부들도 대략의 상황을 짐작한 듯 침통하기 이를데 없는 표정들이었다.
‘감히 어느 놈이.’
‘으드득!’
여기저기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나왔다.
벌떡!
갑자기 모용산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산아.”
“아가씨 정신이 드십니까?”
모용산이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살펴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아…아버지.”
“오오! 그래 이제 정신이 드나보구나. 날 알아보겠느냐?”
“여긴 어디죠?”
“어디긴 어디냐? 집이니라.”
모용산이 다시 한 번 주위를 휘둘러 보았고 모용파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누구냐? 어느 놈이냐? 당장 말해라. 이 아비가 그놈을 패대기를 쳐 죽이고 말겠다.”
“무슨 말씀이세요. 누굴 패대기쳐 죽인다구요?”
“괜찮다. 사실대로 말해라. 어떤 자식에게 당했느냐? 죽어도 용서 할 수 없다.”
“무…물 좀.”
“네 아가씨.”
비천야차가 벼락 같이 탁자 위에 올려진 냉수를 잔에 따라 가져왔다.
모용산은 목이 말랐던 듯 단숨에 냉수를 마시며 소리나게 트림을 하더니 침대를 내려왔다.
모용산이 눈치를 보며 다시 물었다.
“사…산아야. 널 능욕한 놈이 누구냐? 말하거라.”
“그래요. 아가씨 이 늙은이가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요. 이름이 뭔가요?”
“소신들이 그놈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리겠나이다.”
모용산이 부친을 비롯한 일행을 보더니 안색이 굳어졌다. 정신이 들면서 황산의 악몽이 떠오른 것이다.
“큰일 났어요.”
“그래 큰일은 큰일이지. 말해라. 그놈을.”
“남궁공자가 죽었어요.”
“……”
“……”
“왜 그런 눈으로 보죠? 정말로 내가 보는 앞에서 죽었단 말이에요.”
“저…정말로 남궁공자가 죽었단 말이냐?”
“아직 소식을 못 들으셨나 보군요. 죽었어요. 그것도 그 사람 동생에게.”
“그 사람은 누구고 동생은 또 누구냐?”
“천상각 동공자 말에요. 동천비 대공자 동생이 나타났어요. 어찌나 무공이 강하고 무서운지 기절할 뻔했어요. 그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남궁공자 같은 고수가 그에게 쩔쩔맸어요. 내가 보기에 그것도 많이 봐주는 것 같더군요.”
모용파가 눈을 빛냈다.
“그 놈에게 능욕을 당했단 말이냐?”
모용산이 버럭 소릴 질렀다.
“아까부터 아버지는 자꾸 능욕 얘기를 꺼내고 그러세요. 내가 무슨 능욕을 당했다고 그래요. 내가 놀란 것 그놈 때문이라니까요. 동천몽.”
“실종됐다는 천상각의 막내아들.”
“소문이 사실이었어요. 대법왕이란 신분으로 나타났는데 무공이 이미 입신의 경지에 올랐더군요. 소녀가 보기에 천하에서 그의 적수가 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한데 내가 가장 놀란 것은.”
“뭐냐?”
모용산이 말을 중단하자 모두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날 죽일 수 있었는데도 살려 주었다는 거에요. 한데 그가 했던 마지막 말이 가장 꺼림칙해요. 날 죽일 사람은 따로 있다는 거죠.”
“무슨 말이냐? 누가 널 죽인단 말이냐?”
“그러니까 미칠 노릇이죠. 아무리 생각해도 감히 날 죽일 사람이 없는데.”
팟!
돌연 비천야차의 눈이 커졌다.
“아가씨 혹시.”
“생각 나는 사람 있나요? 말해봐요.”
“그자가 말한 따로 아가씨를 죽일 사람이라면 동천비를 두고 한 말 아닐까요?”
화악!
모용산의 눈이 커졌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생각해보니 자신과 생사의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 뿐이었다. 그를 배신하고 무림맹과 손을 잡음으로 뼈아픈 패배와 치욕을 안겨주었다.
평소 동천비의 성품을 보아 절대 자신을 가만 두지 않을 것이었다. 더구나 지금 목와북천이 파상공세를 퍼붓고 있는데 그 선두에 동천비가 있다.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배신을 했으니 배신당한 자기 형님의 손에 죽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놓아준 것이 틀림없었다.
동천비를 생각하자 온 몸이 으스스 떨려왔다. 소문에 듣자하니 묵곤혈참기가 십이성에 올라 조금씩 인성이 마비되며 마공 특유의 사악함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했다.
방안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그렇잖아도 지금 목와북천의 공격이 지척에까지 이르러 가솔들을 데리고 일단 안전한 지역으로 옮길 것인지 말 것인지를 의논하고 있었다. 만약 꾸물거리다 포위가 되거나 점령이라도 되면 동천비는 가장 먼저 모용세가를 칠 것이다.
동오룡보다 더 차갑다는 그이니 아마 잿더미로 만들고 말 것이다.
“서두릅시다.”
모용파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서둘러 떠나는 것이다. 멀리 광동쪽으로 피해 있다가 어느정도 전선이 안정되면 돌아오면 되는 것이었다. 지금은 무림맹이 밀리고 있지만 워낙 저력이 있는 만큼 곧 반격을 개시해 잃은 성들을 되찾을 것이었다.
곧바로 피난 준비가 시작되었다.
중요한 문서들과 지하 석실에 보관된 금화와 진귀한 물건들을 마차 두 대에 실었다. 너무 대규모로 움직이면 쉽게 눈에 뜨일 수 있었으므로 오십 명씩 열개조로 나누어 출발하기로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자 해가 떨어졌다.
모용파는 내일 아침 일찍 떠나기로 했지만 모용산은 한 시가 급하다고 당장 움직이자고 했다. 그러나 하룻밤 정도 더 묵는데 별일이 있겠냐고 했다. 수백 년 이어온 장원을 잠시 비우고 떠난다는 게 쉽지 않으니 떠나기 전 간부들을 모아 조촐한 술좌석을 갖자는 부친의 제의에 모용산은 뜻을 굽혔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 밤이 되고 말았다.
술좌석이 무르익고 다들 얼굴에 취기가 올라 있을 때 갑자기 밖으로부터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크아악!”
“아악!”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릴 때 출입문이 떨어져나가며 피투성이가 된 무사가 뛰어들었다.
“적이옵니다. 목와북천의 육검산이 옵니다.”
“유…육검산?”
모두가 경악했다. 육검산은 검귀들로 불리는 집단이었다. 태어나 오로지 검과 더불어 평생을 동고동락해온 목와북천의 자랑이기도 하며 수장이자 산주인 이여송은 그야말로 적수가 없었다. 오죽했으면 고검이라는 별호를 갖고 있겠는가.
“크가각!”
“웩!”
“물러나지 마랏!”
비명소리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밀리고 있다는 부인 할 수 없는 의미였고 일제히 술을 마시던 간부들이 각자 애병을 챙겨 밖으로 날아갔다.
모용파와 모용산 비천야차 모두 밖으로 몸을 날려갔다.
어둠속에서 수많은 무사들이 서로 엉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양쪽 모두 흑의를 걸치고 있어 정확한 구분이 쉽지 않았지만 모용파의 표정은 의외로 어둡지 않았다.
비록 전체적인 형세는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밀리고 있지만 일방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다는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육검산에 대한 소문은 너무 과대 포장되어 있는 것이 분명했고 일부 모용세가의 무사들 중에는 그들과 팽팽히 맞설 뿐만 아니라 몰아 붙이는 경우도 있었다.
적지 않은 충격을 받고 뛰쳐 나왔는데 전황은 예상보다 불리하지 않았으므로 모용파는 곧바로 뛰어들었다.
두 명의 모용세가 무사의 목을 자른 흑의인을 향해 일검을 떨쳤다.
카캉!
흑의인이 모용파의 검을 맞받아 쳤고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커억!”
흑의사내가 뒤로 밀리며 눈을 부릅떴다.
언제봐도 상대가 당황하고 놀라는 모습은 보기가 좋았다. 모용파는 히죽 웃으며 검을 곧추세웠다.
“흐흐! 감히 본가를 공격하다니”
힘주어 뱉은 후 달려들었다.
쉭!
깊숙하게 찔러가는 모용파의 검을 사내가 쳐냈다. 그러나 찔러가는 힘에 비해 쳐내는 힘이 약했으므로 모용파의 검은 방향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내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크악!”
모용파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손맛이고 피 냄새였다.
“올 때는 몰라도 갈 때는 걸어서 가지 못하리라.”
자신감에 찬 모용파는 더욱 육검산 무사들 속으로 뛰어 들어 검을 휘저었다.
콰아아아!
위기에 몰려 고전 하던 무사들이 모용파가 뛰어들자 용기백배되어 더욱 힘을 냈고 싸움은 조금씩 팽팽한 분위기로 흘렀다.
모용산 또한 육검산 무사들 속으로 뛰어들어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컥!
커어억!
그녀의 검이 번뜩일 때마다 육검산 무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소문보다 직접 부딪혀본 육검산 무사들의 무공이 약했으므로 그녀는 용기백배했다.
“건방진 놈들!”
차가운 외침을 흘리며 그녀의 검이 파상적으로 뻗어나갔다.
그때 공격해가던 그녀의 귓가로 단발마의 비명들이 소낙비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큭!”
“꺽!”
“꺅”
비명을 보면 대략의 상황을 읽어 낼 수가 있었다. 지금 들려오는 비명은 일방적으로 몰살당할 때 흘리는 단발마였다. 단발마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적과 맞설 때 흘러나온다.
비명만으로 피아를 구별할 수는 없었지만 조금씩 비명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두 명의 육검산 무사들의 목을 벤 모용산이 비명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악!
멀리 한 명의 백의인영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의 손짓이 한 번씩 번득일 때마다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무더기로 날아가고 있었다.
‘도대체!’
무시무시한 무공이었다.
강약을 떠나 일수에 대여섯 명씩 날려버리기는 아무나 보일수 있는 기예가 아니었다.
퍼퍼퍽!
그의 손이 연거푸 달려드는 모용세가 무사들을 후려치며 날아왔다.
척!
모용산의 앞에 내린 백의 사내의 옷에는 피가 범벅이 되어 있었다. 자신의 피라기보다는 그의 손에 죽은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흘린 피일 것이었다.
그런데 백의 사내를 본 모용산이 경악했다.
그녀의 두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도…동공자!”
그녀 앞에 나타난 사람은 동천비였다. 동천비의 몸에서는 그냥 서 있기만 하는데도 상대를 질식시킬 강한 마기가 뿜어나왔다.
파르르!
모용산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동천비가 그녀를 보며 괴소를 흘렸다.
“큿큿! 여전하군.”
모용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 마디 말을 뱉어봤자 핑계이고 자신만 초라해질 뿐이었다. 이왕지사 이렇게 만났으므로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죽이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우리 사이에 더 이상 말은 구차하겠죠.”
스으으!
모용산이 동천비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러나 동천비는 아랑곳 하지 않고 모용산을 쳐다보았다.
“남궁관과 어울려 다닌다더니 더욱 요염해졌군.”
그것은 남궁관과 얼마나 살을 섞었으면 강한 색기가 풍기느냐는 비아냥이었다.
어깨에 이러 이번에는 모용산의 눈이 흔들렸다.
완벽한 한 개의 마기덩어리였고 어디에도 틈새는 보이지 않았다.
‘음!’
그녀는 터져 나오는 신음을 눌렀다.
거대한 금강석 덩이 같아서 검을 휘두를 용기가 꺾이고 있었다.
하지만 방법은 없다.
촥!
그녀가 검을 뻗어갔다.
모든 힘을 쏟아낸 필살의 검초였다. 동천비의 눈에서 검은 흑기가 뿜어 나왔고 오른손을 뻗었다.
빡!
검과 장이 부딪혔는데 모용산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채 중심을 잡기도 전에 동천비가 벼락처럼 좌장을 때렸다.
모용산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검은 물론이고 손목까지 뒤로 꺾이려했다. 검을 놓지 않으면 팔목이 꺾인다.
“악!”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눈에 절망이 떠올랐다. 손에 쥐고 있던 검은 어느새 어둠속으로 날아가버렸다.
히죽!
동천비가 웃더니 다가왔다.
모용산은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났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느새 머리채를 잡히고 말았다.
탁!
손목도 아닌 머리채를 잡혔는데 온 몸이 힘이라는 힘은 하나도 없었다. 반격을 하기 위해 진기를 보았는데도 모아지지 않는다.
‘아아!’
모용산은 절망의 표정을 짓는다.
“내게 할 말 없느냐?”
“없어요. 더 이상 날 부끄럽게 하지 말고 죽이세요.”
“흐흐흐!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네 년을 간단히 죽일 것 같으냐?”
그때 뒤에서 두 명의 모용세가 무사가 달려들었지만 동천비의 가벼운 손짓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즉사했다.
가히 공포스러울 솜씨였다.
쫘악!
동천비의 왼손이 위에서 밑으로 내려 그어졌고 모용산의 옷자락이 길게 찢어졌다. 두 개의 젖무덤이 출렁거리며 얼굴을 내밀었고 속옷을 입지 않은 그녀의 차림새에 멈칫하더니 괴소를 흘렸다.
“흣흣! 남궁관이 원하면 언제든지 눕기 위해 준비를 해 갖고 다녔다는 얘기구나.”
그녀는 알몸을 가릴 생각이나 부끄러워하는 따위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오로지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 볼 뿐이었다.
“커억!”
또다시 한 사내가 덮쳤다가 동천비의 손에 모가지가 통째로 떨어져 나갔다.
콱!
동천비가 왼손으로 그녀의 젖가슴 한 개를 거세게 움켜쥐었다.
“아악!”
모용산이 고통에 비명을 질렀고 동천비는 더욱 세차게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풍만한 젖가슴이 비집고 나왔는데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아아아!”
퍼억!
급기야 그녀의 젖가슴이 동천비의 손아귀에 의해 터졌다. 엄청난 피가 사방으로 뿜어졌고 모용산은 고통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동천비가 히죽 웃더니 주위를 휘둘러 보았다.
등뒤 칠팔 장 떨어진 곳에서 모용세가 무사들을 몰아 세우고 있는 세 명의 육검산 무사들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거기 다섯 명.”
동천비의 부름에 다섯 사내가 돌아보았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검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부르셨사옵니까? 각주님.”
목와북천에서 동천비에 대한 호칭은 천상각의 각주이다.
다섯 사내가 알몸의 모용산을 보며 놀랐고 터져버린 젖가슴을 보고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동천비가 피묻은 손으로 모용산의 턱을 밀어 숙여진 얼굴을 들리게 했다.
“난 너에게 최선을 다했다. 아니지. 내 아버지가 네년 아비에게 온갖 열정을 다 쏟았다. 하도 무림인들에게 시달린 아버지는 너희 부녀의 도움을 받아 조금이라도 덜 시달려 볼 생각으로 네년 아비가 달라는 돈은 거절하지 않고 모두 주었다.”
모용산의 가슴에서는 피가 계속 흘러내렸다.
“나 또한 네년에게 온갖 정성을 다 쏟았지. 아마 나처럼 계집에게 많은 선물을 안긴 사내놈은 천하에 없을 것이다. 본가의 약점을 알고 너희 부녀는 온갖 명목으로 돈을 뜯어갔지. 그래도 우린 단 한마디도 불평을 하지 않았고 최선을 다해 대접했다. 그런데 돌아 온 것이 배신이더냐.”
동천비가 좌측으로 도열하듯 서 있는 다섯 사내에게 모용산의 무공을 폐지한 후 던지듯 밀었다.
“받아라.”
모용산은 넘어질 듯 밀려가며 가장 앞선 사내의 품에 안겼다.
“흐흐흐! 가져라. 죽이든 살리든 너희들 맘대로 해라.”
순간 다섯 사내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고 금세 입가에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비록 한쪽 가슴이 터져나간 흉측한 모습이었지만 절색의 미모에 몸매는 가히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더구나 무림쌍미 중 한 여인인 다음에야.
“가…감사하옵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사옵니다. 각주님.”
나머지 네 명의 거한이 벌떼처럼 알몸의 모용산에게 달려들었다.
“잠꽈안.”
가장 먼저 모용산을 끌어 안게 된 사내가 한손을 들어 달려드는 동료들을 제지시켰다.
“옛말에 이르기를 장유유서라고 했느니라.”
“장유…서?”
“유서라면?”
사내가 인상을 썼다.
“쉽게 말하면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는 지켜야 할 규범이 있다는 얘기지.”
모두가 놀란 눈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여기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누구냐? 검찰 너 몇이냐?”
검찰이라는 사내가 멈칫거리며 대답했다.
“스물 일곱요?”
“청수 넌?”
“서른둘.”
“만수 넌?”
“서른.”
“정원이는 서른 셋이지?”
“네!”
“시중이 넌 내가 알기로 서른 여섯이고?”
“호적이 잘못되었다니까요. 원래 나이는 서른 다섯입니다.”
“난 마흔이라는 건 너희 모두가 알고 있겠지?”
“그…그래서 네가 가장 먼저 그 여인과 부부의 연을 맺겠다고?”
“금방 끝낼테니까 나이 순서대로 기다리거라. 아이야. 조용한 곳으로 가자꾸나.”
사내가 모용산을 끌고 눈앞에 있는 전각으로 들어갔다.
모묭세가 무사 셋이 앞을 가로막자 사내가 버럭 소릴 질렀다.
“뭣들 해 이 새끼들아. 빨리 이것들 치워야 내가 빨리 끝낼 것 아냐?”
“마…맞다.”
네 명 사내들이 바람처럼 달려들어 모용세가의 무사들을 난도질 해버렸다.
탁!
전각문이 닫혔고 나머지 사내들은 전각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돌연 전각 안으로부터 모용산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까악! 악! 아아악!”
갑자기 터져나온 비명에 모든 사내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으악! 끄으칵!”
“이…이 자식 설마 그거 아냐?”
“그거라니?”
“그것? 여자를 사랑해주지 않고 몽둥이나 채찍 같은 것으로 마구 때리며 흥분하는 놈들 있잖아.”
“서…설마 형님이?”
안방에서는 모용산의 비명이 끊임없이 흘러나왔고 사내들은 침을 삼키며 연신 조바심을 냈다.
동천비는 잠시 비명이 흘러나오는 전각을 쳐다보더니 몸을 날렸다. 그가 날아 내린 곳은 육검산 무사들을 베고 있는 모용파 앞이었다.
동천비를 발견한 모용파의 눈이 커졌다.
“큿큿! 안녕하시오. 한때 빙장 어른.”
모용파의 눈이 커졌다.
묵곤혈참기를 터득했다는 얘기는 들었다. 그러나 직접 보는 동천비의 몸은 무시무시했다.
“내가 알기로 아버지에게 무척 많은 군자금을 가져간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아이들이 모두 비실비실 하구려?”
모용파가 흠칫 했다.
동천비의 말처럼 동오룡으로부터 온갖 명목으로 상당한 돈을 끌어왔다. 하지만 그중 일부는 재산증식에 사용했는데 돈이 반드시 돈을 낳는다.
여기저기 토지도 매입하고 북경의 요지에 과거 한 시대 명성을 날렸던 고관들의 장원도 구입했는데 명문의 조건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강력한 재력이었다.
비록 천상각으로부터 후원을 받지만 사람일이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양가 모두 철저한 계산에 의해 맺어진 정혼이기 때문에 깨질수도 있었다. 그래서 부지런히 챙겨 놓은 것이었다.
“아악!”
유난히 귀를 자극하는 여인의 비명이 들려왔다. 모용파의 안색이 급변했다. 비명의 주인이 누군지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지금쯤 다섯 놈의 사내들로부터 극락을 왔다 갔다 할거요.”
“네…네 이놈 아무리 그래도 한 때 네놈의 여인이었거늘.”
“내 여인, 크캇캇캇!”
고개를 쳐들고 광소를 흘리던 동천비가 이글거리는 검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한대의 빙장이었음을 감안하여 편히 죽여주지.”
휘익!
동천비가 손바닥을 뻗어왔다.
강력한 흑장인데 강한 압력과 무게가 느껴졌다.
“자…장강.”
소스라치며 마주 검을 날렸지만 검은 부러졌고 남은 장강이 그대로 가슴을 찍었다.
“후욱!”
돌덩이에 한 대 맞은 듯 했다. 욱씬거리는 것이 갈비뼈도 일부 부러졌음이 분명했다.
동천비가 다시 날아왔고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모용파는 있는 힘을 다해 맞섰지만 묵곤혈참기라는 마공에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꽈아앙!
“크악!”
모용파가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고 팟 하는 소리와 더불어 동천비가 뒤를 따라 날아가더니 연거푸 이장을 더 쏟아 넣었다. 폭발하듯 모용파의 몸이 산산조각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파아아!
땅에 내려선 동천비의 눈이 더욱 마기를 뿜어냈고 모용세가의 무사들 속으로 뛰어들며 닥치는대로 살수를 펼쳤다. 그동안 쌓이고 쌓인 무림인들에 대한 원한과 모용산의 배신이 더해지면서 동천비의 손은 더욱 냉혹해졌다.
사방은 어둠에 묻혔고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수많은 시신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으며 생명체라고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 처절한 죽음의 대지로 모용세가는 변해있었다.
이따금 들려오는 비명은 확인사살을 당하는 소리였다. 동천비는 수많은 주검들을 보며 괴소를 흘렸다.
“크흐흐흐!”
동천비의 백의는 혈의로 변해 있었고 양 손에서는 모용세가 무사들의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둥둥둥!
근처 어딘가 절이 있는 듯 자시를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흡족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던 동천비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조금 전까지 주위를 소란스럽게 다니며 확인사살을 하던 육검산 무사들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모용세가 무사들의 시체말고는 움직이는 사람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었으므로 동천비가 입을 열어 부르려 할 때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전방에 어둠을 뚫고 일단의 무사들이 다가왔다. 맨 선두에 한명의 백의 중년인이 한 자루 검을 어린아이 품듯 끌어안고 다가왔는데 육검산의 산주 고검 이여송이다.
고검 이여송.
너무 강해 홀로 외롭다하여 고검(孤劍)으로 불린다. 드러난 목와북천의 인물 중 서열 십 위권 이내의 인물일 만큼 강한 검객이었다.
그런데 그의 백의는 너무도 깨끗했다. 그것은 모용세가와의 싸움에 전혀 끼어들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뿐만 아니라 그 뒤를 따라오는 부하들 또한 옷차림이 깨끗하고 검 또한 모조리 검 집에 들어가 있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조금 전 자신과 같이 모용세가를 공격했던 육검산 무사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첫째는 하나같이 날이 잘 세워진 검 같은 인물들이라는 것이었다. 자신과 같이 모용세가를 습격한 인물들도 강하긴 했지만 지금 나타난 인물들과 비교하면 느낌이 다르다.
“이 산주?”
뭔가 이상하지만 꼬집어 말 할 수가 없었으므로 그냥 이여송을 불렀다.
이여송이 주위 시신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 하셨습니다. 각주.”
무슨 말이냐는 듯 쳐다보았다. 당신도 조금 전에 나와 같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느냐는 시선이었다.
“위치로.”
대답대신 뒤에 도열한 무사들을 향해 나직이 명령했다. 흑의무사들이 일제히 동천비를 에워쌌다.
멈칫!
동천비 눈살이 찌푸려졌다.
“궁금하실게 많을 것입니다. 간략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조금 전 각주와 함께 모용세가를 기습한 무사들은 우리 육검산이 아닙니다. 흑도 십문 중 서열 팔위인 태백동 무사들이죠. 물론 그곳의 이여송 또한 가짜입니다. 태백동의 동주인 형정근입니다.”
동천비의 인상이 더욱 찌푸려졌다.
여전히 앞뒤를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마공은 마공이군요. 마공을 익혀 마성에 빠지면 머리까지 멍청해진다던데 치밀하고 그토록 철두철미하시던 각주님께서도 아직도 앞뒤를 분간 못하는 걸 보니.”
동천비는 여전히 눈을 깜빡거렸다. 뭔가를 이해 해보려고 했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본능적으로 무슨 일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만 짐작 될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입이 아프지만 어린 아이에게 설명하듯 말해 주어야 겠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종사께서 각주님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흠칫!
동천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 마디로 더 이상 각주님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이미 얻어 낼 만큼 모든 것을 얻어냈으므로 조용히 떠나 보내라시더군요. 그래서 태백동무사들을 육검산으로 위장해 각주님과 같이 모용세가 공격에 내보냈습니다. 일부러 흑도십문 중 약한 태백동을 변장 시킨 것은 각주님의 체력을 더 소모시킬 목적에서였습니다. 그들이 약해야 각주님의 수고가 더 많아 질것 아닙니까?”
동천비가 그제서야 앞 뒤 계산이 되는 듯 표정이 환해졌다.
“어쩐지.”
“이제 돌아가는 판이 떠오르시는 모양이군요.”
“나와 출동했던 것들은 가짜였고 이제 진짜인 그대들이 내 앞에 나타났다는 것이군. 날 죽이기 위해.”
“원래 그런 곳이 무림입니다. 섭섭하겠지만 장사꾼이 뛰어들 곳은 못됩니다. 한마디로 더러운 곳이지요.”
“크흐흐흐!”
동천비가 웃음을 지었다.
문득 포위를 하고 있던 육검산 무사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다지 크지도 않은 웃음인데 기혈이 울렁거리기 시작 한 것이었다.
‘과연!’
‘역시 묵곤혈참기다.’
웃음을 그친 동천비가 포위하고 있는 육검산 검수들을 돌아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몇 명인가?”
“육검산은 정확히 저를 포함해 백 명입니다. 숫자가 줄어들면 뛰어난 검수를 선발하여 충원하지요.”
“강해보이는군.”
이여송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포권의 예를 취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동천비 각주님.”
그리고 포위망 뒤로 몸을 뺐다. 이어 싸늘한 명령을 내렸다.
“쳐라!”
챙!
채애애챙!
아흔 아홉 명의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천천히 돌기 시작할 뿐 그들은 공격하지 않았고 점점 속도가 빨라졌다.
파파파팍!
속도가 빨라지면서 그들이 일으킨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났다.
그들의 움직임을 쫓던 동천비의 눈이 빨라졌다.
촤아아!
속도가 붙었고 급기야 아흔 아홉 명은 사라지고 까만 띠가 만들어졌다. 어둠보다 더 시커먼 검은 띠가 동천비를 에워싸은 체 무서운 속도로 돌아갔으며 그들이 일으킨 바람으로 일어난 먼지가 동천비의 시선을 방해했다.
동천비의 상태는 지금 묵곤혈참기에 의해 이성이 거의 사라졌고 오로지 감정과 본능으로만 행동하고 있었다.
움찔!
동천비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엄중한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었다. 적이 보이지 않는 다. 적이 보여야 표적을 삼고 공격을 할 텐데 까만 띠만 보일 뿐 누구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었다. 그들의 몸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반탄지기가 뿜어져 나왔다. 중요 한 것은 한곳에서만 뿜어나오면 뒤로 물러설 수가 있지만 전후좌우에서 몰아치기 때문에 엄청난 압력이 되어 가슴이 터질 것 만 같았다.
쉬이이이!
이제는 두껍던 검은 띠가 가늘어졌다. 그만큼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는 것이고 그에 따라 뿜어나오는 기세도 더욱 강해졌다. 더 이상 가만있다가는 온 몸이 압력에 폭발할 것 같았으므로 동천비는 움직였다.
“크와아아!”
괴수가 질러내는 것 같은 흉포한 외침과 더불어 전면 검은 띠를 향해 쌍장을 날렸다.
콰아아아!
강력한 묵곤혈참기가 뻗어갔다.
뻐어억!
거대한 바위에 부딪히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욱 하며 동천비가 신음을 흘렸는데 두 눈이 부릅떠져 있었다. 엄청난 충격이 온 몸으로 전해진 것이었다.
“한 놈도 살려두지 않고 찢어주마.”
동천비가 기합을 지르며 다시 달려들었다.
콰콰콱!
연거푸 다섯 개의 묵곤혈참기가 검은 띠를 때렸지만 쏟아 낸 힘만큼 동천비는 반탄강기에 휩쓸렸다.
“쿠욱!”
동천비가 입에서 피를 토했다. 동천비의 눈이 더욱 검게 변했고 입에서 음산한 괴소가 소름끼치게 흘러나왔다.
“카카카캇!”
동천비의 온 몸이 먹물로 변해갔다. 눈만이 아니라 얼굴과 양손을 비롯해 의복 밖으로 나온 신체는 완전히 흑색이었다.
밖에서 지켜보던 이여송의 눈이 커졌다.
‘무…묵곤혈참강!’
묵곤혈참기보다 한 단계 위인 묵곤혈참강은 온 몸으로 공격을 하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스으으!
뒤이어 검은 기운이 동천비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스르르르!
완전히 검은 연기에 휩싸인 동천비는 시커먼 공 같았다. 단단히 뭉친 동천비가 괴성을 지르며 날아갔다.
“주…죽어라.”
슈와아아!
검은 덩어리가 날아가 검은 띠와 부딪혔다.
빠---아악!
출렁!
완전한 원을 그리며 돌던 검은 띠가 물결처럼 파장을 보이더니 찌그러졌고 동천비의 몸이 강하게 퉁겨나왔다. 그러나 동천비는 다시 찌그러진 곳을 향해 부딪혀 갔다.
콰악!
터어엉!
동천비는 더 빠르게 퉁겨 나왔다. 그에 반해 부딪힌 곳은 더욱 각이 질 만큼 찌그러졌다.
슈우우!
동천비는 연속적으로 그곳을 향해 또다시 날아갔고 거센 폭발음이 생기며 비명이 터져나왔다.
“크아악!”
하나의 원이 되어 돌아가던 검은 띠가 깨진 것이다.
이여송의 눈이 커졌다.
‘흑방평살진이 깨지다니.’
흑방평살진은 거대한 벽을 형성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한 사람이지만 거대한 벽을 만들면 아흔 아홉 사람의 힘이 원을 만드는 것이다. 거기다 아흔 아홉 명이 쏟아내는 강한 기세로 상대를 압사시키거나 내상을 일으킨 다음 공격을 가해 죽인다.
그런데 동천비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은 것이다.
쉬익!
츠츠츳!
진이 깨지면서 사내들이 본격적으로 덥쳐 들었다.
동천비 또한 검은 기운이 많이 사라지고 몸이 드러났는데 상당한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파파팍!
퍼어엉!
양측에서 치고 받는 난타전이 벌어졌다. 동천비의 몸에 스치거나 부딪힌 육검산 무사들의 몸은 찢어지거나 박살이 났다. 먹물같은 기운은 완전히 사라졌고 동천비의 온 몸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콰앙!
퍼퍼퍽!
비명과 신음이 끊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주위로 육검산 무사들의 시신이 나뒹굴었고 동천비 또한 부상을 입고 비틀 거렸다.
강한자는 말이 없다. 육검산 무사들은 단 한 마디 말도 내 뱉지 않고 오로지 공격에 충실했고 동천비 역시 죽이는데 모든 신경을 쏟고 있었다.
양측이 뱉어내는 것이라고는 신음과 비명 뿐이었다.
아흔 아홉 명이 잠깐 사이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동천비의 몸이 한번씩 부딪힐 때마다 두세 명씩 찢어졌다.
크악!
아아악!
이여송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실로 무시무시한 마공이었다. 아흔 아홉 명이 모두 공격을 하면 자신은 물론 대종사인 백쾌섬도 당해내지 못한다. 그런데 동천비는 지금 절반을 넘어 칠할 가까이를 살상하고 있었는데도 여전히 왕성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헉!
꺼어억!
수하들의 육편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형체가 제대로 갖춰진 시신은 단 한 구도 없었다. 살아 있는 숫자는 채 이십 명이 되지 않았지만 결코 두려워 하거나 소극적으로 공격에 나서는 무사들은 단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고수는 처음과 끝이 같아야 한다. 처음 싸울 때의 기세가 죽을 때까지 유지되어야 고수인데 육검산 무사들이 그러했다.
“으후훅!”
동천비가 휘청 거리더니 입에서 피를 분수처럼 쏟아냈다.
콱!
이여송이 검 손잡이를 거머쥐었다.
자신이 나설 차례인 것이다. 지금이야 말로 자신이 나서서 강한 타격을 가하면 동천비는 완전히 치명타를 입을 것이다. 처음에 나서지 않고 이제 나서는 것 또한 계획이고 작전이었다. 괜히 처음부터 나섰다가 자신이 부상이라도 입거나 동천비에게 제대로 흠집을 남기지 못하면 부하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승패는 바로 결정지어진다.
그래서 수뇌는 적절한 기회와 틈을 잘 노려 공격에 뛰어 들어야 한다. 무턱 대고 앞 장 선다고 뛰어난 수장이 아닌 것이다. 앞장을 서야 할 때가 있고 뒤로 빠졌다가 어느 시점에 나서서 전세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할 때도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였다.
콰아아!
이여송이 날아갔다.
멈칫!
동천비의 눈이 좁혀졌다. 전혀 다른 기세가 느껴졌고 지금까지와는 구별되는 무게가 엄습해왔다.
동천비는 피하지 않았다.
슈우우우!
동천비의 몸과 이여송의 검이 그대로 충돌했다.
꽈직!
언뜻 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두 사람이 붙었는데 떨어지지 않았다. 충돌하면 떨어져야 정상이다. 한데도 붙어 있다는 것은 둘 모두 공교롭게 한 푼의 힘을 아꼈다가 충돌 순간 쏟아 넣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아껴놓은 힘이 폭발하며 잠시 서로의 기세가 엉키기 때문이었다.
쩌어억!
두 사람이 떨어지는데 바위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쿠쿠쿵!
이여송이 뒷걸음을 치는데 금방이라도 주저 앉을 것 같았고 두 눈은 경악으로 부릅떠져 있었다. 단 일초에 중상을 입은 것이다. 금방이라도 목구멍을 밀고 피가 넘어 올 듯 했는데 동천비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여송은 오랜 경험에서 그가 거의 사경을 해매고 있다고 판단했다.
“끝을 내라. 놈은 완전히 공진 상태이다.”
이십 명이 채 안되는 부하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슈악!
쐐애애액!
부하들의 검이 동천비의 몸을 난도질 했다. 한데 놀랍게도 검이 박히지 않고 퉁겨나왔고 일부는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 즉사를 면치 못했다.
묵곤혈참기가 십이성에 이르면 검이 박히지 않는다. 물론 안으로 타격은 받지만.
“크으윽!”
동천비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 거렸고 남은 무사들은 혼신의 힘을 쏟아 공격했다.
푸욱!
파팍!
“크아아!”
동천비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주춤 거리며 뒷걸음을 치던 동천비가 그대로 몸을 날려 도주를 감행했다.
“잡아랏!”
지금 죽이지 못하면 거대한 재앙이 되어 돌아 올 것이었다.
특히 마공은 정공과 달리 생사의 고비를 넘기면 엄청난 상승을 하여 더욱 강해지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름하여 극사마신(極死魔神)으로 불리는데 그렇게 되면 거의 무적이라 해도 좋았다. 강해진 만큼 더욱 살성이 되어 천하를 피로 물들이기 때문에 놓치면 더욱 큰 화를 부를 건 불문가지.
이여송을 필두로 부하들이 뒤를 따랐다. 양측 모두 필사적이었는데 쫓기는 동천비보다 추적하는 이여송과 부하들 얼굴에 더 절박한 표정이 떠올랐다.
‘놓치면 끝장이다!’
이여송은 혼신을 다해 신법을 전개했지만 거리는 생각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쉬이익!
순식간에 양측은 어둠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