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48화 (48/71)

제3장 사(死), 귀거래

한대의 마차가 있었다. 말은 비쩍 마른, 언뜻 노새처럼 작고 볼품이 없었지만 틀림없는 말이었다. 마차는 검은 휘장으로 덮어씌워져 있었는데 주위로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굳건한 기세로 지키고 있었다. 무사들 선두에는 남궁천의 오랜 시위이자 가로인 자추가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팟!

자추의 눈이 빛났다.

저 멀리 두 개의 인영이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는데 오른쪽 인영에 멈췄다. 평생을 모시고 온 남궁천이었다.

휙!

삽시간에 마차 앞에 내려선 남궁천을 향해 자추가 허리를 숙였다.

남궁천의 시선은 마차에 멎었다.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마차를 쳐다보던 남궁천이 천천히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걸으면서도 남궁천의 시선은 마차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척!

마차 가까이에 도착한 남궁천이 심호흡을 했다.

휘장을 걷기 위해 뻗는 손에 힘이 없었고 손끝이 미세한 떨림을 보였다.

불과 한자 거리 정도 밖에 안되는데 손을 뻗어가는 시간은 무척 오래 걸렸다.

마차 휘장에 손이 닿은 남궁천이 천천히 걷었다.

마차바닥은 마굿간처럼 짚이 깔렸고 그 곳에 한 구의 시신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시신을 보는 남궁천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한손으로 휘장을 걷고 시신을 쳐다보았는데 석상이 된 것 같았다.

쫘아악!

남궁천이 마차 휘장을 잡아당기자 힘없이 찢어졌다.

남궁천이 마차 위로 올라가 쭈그리고 앉았다. 한동안 말없이 남궁관의 시신을 내려다보던 그의 오른손이 뺨에 닿았다.

스르르!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나 아버님하며 부를 것 같았다.

“처…천아!”

아들의 뺨을 쓰다듬으며 남궁천이 나직히 불렀다.

남궁관은 죽음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유일한 아들이고 남궁세가의 미래이자 꿈인 것이었다. 그런 남궁관이 죽었으므로 남궁세가는 대가 끊긴 것이다. 아무리 명문일지라도 대가 끊기면 가세는 흔들린다.

이번에는 남궁관의 손을 쥐었다.

얼음을 만지는 것처럼 차갑다. 남궁천은 남궁관의 손을 쥐고서 놓을 줄 몰랐다. 한동안 말없이 남궁관의 손을 잡고 망연자실해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남궁천이 쥐고 있던 남궁관의 손을 놓고 마차에서 내려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자추가 입을 열었다.

“그냥 마차만 왔사옵니다.”

“그게 말이 되느냐? 저 말이 어떻게 본가를 알고 찾아왔단 말이냐?”

자추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고 보니 너무 황망하여 그 생각을 못했다. 말이 남궁세가를 알아서 올리는 절대 없었다.

“최소한 본가 근처까지는 누군가 몰고 왔을 것이다. 그 놈을 잡아라.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즉시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장원을 떠났다. 뻗은 길이란 길은 모조리 봉쇄했고 의심가는 사람들은 모두 붙잡아 들였다. 또한 말이 워낙 비쩍 말라 특이했으므로 누군가 기억하고 있는 목격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저자거리를 탐문하고 다녔지만 의외로 목격자는 단 한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 본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남궁세가가 지역 주민들에게 인심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자추는 생각했다. 명문가일수록 지역 주민들과 절친하다. 자주 교류도 하고 그 지역에 행사가 있을 때는 적지 않은 돈을 쾌척한다.

하지만 남궁세가는 철저히 외면했고 오히려 지역 사람들을 괴롭히며 못살게 굴었다.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그만큼 사문을 등에 업고 지역 주민들에게 행패를 부린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무사들의 질문에도 지역주민들이 냉담하고 전혀 협조하지 않을 수 밖에.

사흘을 추적하고 증거를 찾기 위해 조사했지만 헛수고였다.

남궁천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감히 무림맹주인 자신의 아들을 죽여 시신으로 보내는 인물이 있다는 것에 더욱 분기탱천했고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다는 것에 더욱 발작직전이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전선으로부터 계속 좋지 않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호북이 거의 목와북천에 점령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언제까지 마차를 끌고 온 마부를 찾는데 매달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남궁천은 자추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전선으로 나아갔다.

가뜩이나 감정이 격앙된 남궁천은 총공격을 명했다.

하지만 한번 꺾인 힘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고 엄청난 사상자를 내면서 무림맹은 연일 패퇴했다.

이런식으로 가다간 호북은 물론 호남 귀주까지 흑도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 뻔했다.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때 남궁천의 귀로 한 가지 소식이 들어왔다.

사시(沙市)를 방어하던 곤륜파가 적의 공세를 막지 못하고 후퇴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시가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보고였다. 사시는 호북 서쪽의 최후 보루다. 그곳이 무너지면 적은 곧바로 호남성으로 진입한다.

가뜩이나 흥분한 남궁천에게 그 소식은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꼴이 되었고 단번에 곤륜장문인 무극자의 목을 베어 버렸다. 무극자는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 다만 남궁천의 검 날 아래 쓰러지면서도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만 지었다고 했다.

이유야 어쨌든 무극자의 죽음은 곤륜제자들을 자극했다.

아무리 무림맹주이고 무통령이 떨어져 모두가 남궁천의 명령을 따라야 하지만 자파 장문인을 죽였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림맹 용대의 대주이자 곤륜의 열두 장로 중 한 사람인 청송자가 배덕의 검을 뽑아들었다. 비밀리에 장로들과 회합을 갖고 이른 새벽 목와북천으로 투항해 버린 것이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호북의 서쪽이 뚫렸고 호남성으로 목와북천의 무사들은 진입했다.

청송자의 배신 소식은 다른 문파에도 거센 파장을 일으켰다. 가뜩이나 남궁천의 독선에 불만을 갖고 있던 다른 문파들이 들썩거리며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전쟁 중에 분란은 자멸의 길이다.

그런데 곤륜에 이어 화산파와 아미파가 한 밤중에 목와북천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그들이 지키고 있던 지역은 피 한 방 울 흘리지 않고 목와북천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꽈앙!

무림맹의 본영은 어느새 동정호 황학루 근처로 옮겨졌고 남궁천의 주먹이 연신 탁자를 내려쳤다. 목와북천으로 투항해버린 세 문파를 향해 막말까지 해가며 비난했고 저주를 퍼부었다.

‘아미타불!’

우공선사가 속으로 불호를 외웠다.

그리고 암울한 미래를 떠올렸다. 남궁천은 지금 완전히 이성을 잃고 있었다. 물론 이성을 잃은 첫째 이유는 아들의 죽음이었다. 그로 인해 상황 판단이 무뎌졌고 오로지 강공책만을 구사하고 있었다. 상황에 따라 공격과 방어, 대치를 적절하게 구사해야 하는데 아들의 죽음에 이성을 상실한 그는 오로지 공격 또 공격이었다.

남궁관을 죽인 사람은 누구일까. 그가 어떤 목적으로 남궁관을 죽였는지 직접 물어보지 않았으므로 알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남궁천과 무림맹을 확실히 뒤흔드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남궁관의 죽음으로 일거에 무림맹을 목와북천이란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냥감 신세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목와북천의 솜씨라고 할 수는 없었다. 목와북천에서 남궁관을 죽일 수 있는 인물은 흔하지 않았다. 암살이란 한두 사람, 또는 많아야 다섯 명을 넘지 않는 소수로 조용히 벌여야 한다. 대규모로 움직이면 반드시 눈에 띄게 되어있었다.

아무튼 결과가 눈앞에 보였다. 이런 상황이라면 백만대군이 투입되어도 승산은 전무했다. 애꿎은 수많은 생명만 들판에 버릴 뿐이었다. 이 전쟁을 멈추지 않으면 무림사 최악의 피를 흘리게 될 것이고 정도무림은 향후 백년 이내에는 일어설 수 없는 손실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소. 만약 또다시 물러선다면 우린 완전히 몰살할 것이오. 당문주.”

당문의 문주 당대군이 고개를 들었다.

“예 맹주.”

“당문이 좀 더 수고를 해줘야겠소.”

사실 당문이 아니었다면 무림맹은 훨씬 더 아래로 후퇴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문의 독술이 목와북천의 진격을 둔화시켰다. 그들도 독 앞에서는 무척 조심스러워 했다. 그러므로 당문이 좀더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독전을 펼쳐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알겠사옵니다. 맹주.”

“정신들 차려야 하오. 생사가 달려 있소.”

남궁천의 목소리가 떨어지는 동정호의 석양속으로 메아리쳐 갔다.

“이제야 말로 배수의 진이오. 목숨을 버린다는 생각으로 맞서야 할 것이오.”

회의가 끝났다. 엄밀히 말해 회의라기보다는 남궁천의 악다구니만 듣는 시간이었다. 모두가 본영을 빠져나가 각 문파가 있는 곳으로 사라져 갔다.

“맹주!”

누군가 말려야 했다. 이 상태로 싸웠다가는 백전백패가 뻔했다.

우공선사가 부르자 남궁천이 홱 돌아보았는데 두 눈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흠칫!

우공선사가 깜짝 놀랐다.

자신을 쳐다보는 남궁천 붉은 눈은 흥분으로 상기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틀림 없는 마기였다. 불문의 인물이기 때문에 사마외도의 무공을 익히면 발생하는 여러 징후에 밝았다.

“왜 그러시오 선사? 내게 할 말 있소?”

우공선사가 조용히 말했다.

“아미타불! 그렇소이다. 맹주에게 한 마디 해야겠소이다.”

“해보시오.”

“맹주와 노납 단 두 사람만 있소. 그러니 마음에 있는 말을 털어 놓아 봅시다.”

“마음에 있는 말?”

“그렇소이다. 맹주는 이런식으로 싸우면 과연 우리에게 승리가 있을 것이라고 믿소?”

“선사,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전쟁은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오? 패배하고 수하들이 죽을수록 냉철해야 하는 법이오. 그런데 지금 맹주는 자제분을 잃은 것까지 더해져 감정의 혼란이 극에 달해 있소.”

“선사.”

남궁천의 눈이 빛났고 그 안에서 또다시 붉은 혈기가 나타났다.

“감히 나에게 훈계하는 것이오?”

“냉정해질 것을 권유하고 있소이다. 이런 식의 싸움은 어쩌면 무림맹 사상 최악의 결과를 불러 올수도 있소이다. 흑도무림에게 천하의 지배권을 넘겨 줄 수도 있다는 말이오.”

부르르!

남궁천이 분노로 몸을 떨었다.

금방이라도 살수를 펼칠 듯 입술을 깨물었는데 마지막 이성이 그를 붙잡고 있는 듯 했다.

“가시오. 못 들었던 것으로 하리다. 하나 한 번 만 더 나에게 그따위 어설픈 훈계를 할 땐 아무리 소림 장문이라고 해도 절대 묵과하지 않을 것이오.”

우공선사가 깊숙한 시선으로 남궁천을 바라보았다.

‘흥분할 때마다 나타나는 마기는 뭐란 말인가.’

남궁세가는 수백 년 명문으로 내려왔다. 한 자루의 검으로 대강남북을 호령하던 그들에게 마기란 결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런데 남궁천의 눈에서 이따금 비치는 붉은 혈기는 틀림없는 마기였다.

우공선사는 밖으로 나왔다. 멀리 동정호 위로 석양이 떨어지고 있었다.

동정호의 낙조야 말로 천하으뜸이라고 했지만 우공선사에게는 어떤 감흥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단지 명철만 넋을 놓고 동정호 위로 떨어지는 낙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미타불! 과연 황홀하도다.”

수면으로 길게 늘어진 붉은 물결은 마치 호수가 피로 변한 것 같았다.

우공선사는 천천히 돌아섰다. 우공선사가 떠나는데도 명철은 여전히 낙조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고 한참 뒤에서야 우공선사의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며 몸을 돌려 달려갔다.

“명철아!”

오늘따라 장문인의 목소리가 힘이 없었다.

“네 나이가 올해 몇이더냐?”

“나이는 갑자기 왜 물으십니까?”

“오래 살고 싶으냐? 빨리 죽고 싶으냐?”

명철이 눈을 부릅떴다.

말 같지도 않은 우공선사의 질문에 놀란 것이었다.

“그것을 지금 질문이라고 하십니까요. 당연히 오래 살고 싶지요. 어떤 사람들은 짧고 굵게 사는게 인생관이라고 하지만 이 제자는 오뉴월 엿가락처럼 늘어져서라도 길게 살고 싶사옵니다.”

“헛헛헛! 세상은 오래 살면 살수록 고통스러운 법이니라.”

“그래도 전 오래 살고 싶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도 있잖사옵니까?”

“그러느냐? 그래 오래오래 살거라.”

칭찬인지 악담인지 헷갈렸다.

명철이 진의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쑥 빼고 우공선사의 얼굴을 살폈다.

흠칫!

우공선사의 얼굴은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아직까지 괴로워하는 표정은 적지 않게 보아왔지만 오늘처럼 굳어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바…방장스님.”

“아미타불! 지금 추세로 본다면 무림맹이 궤멸되는 것은 시간 문제니라.”

“네엣! 그게 정말이옵니까?”

“하늘이 정녕 정도무림을 버린단 말인가?”

우공선사가 깊은 탄식을 하며 몸을 날려갔다.

사라지는 우공을 바라보는 명철의 얼굴이 우울해졌다.

그들은 모두 열일곱 명이었다. 몸에 착 달라붙은 흑의에 옆구리에는 검이 매달려 있었다. 무성한 숲을 지나가는데도 풀잎 스치는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고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모든 것은 선두 사내의 손짓에 따라 움직였다.

선두 사내는 강팍한 인상이었다. 왼쪽 옆구리에 녹이 붉게 슨 검집이 매달려 있었는데 가죽으로 둘둘 말린 손잡이만 번들거렸다.

두개의 봉우리를 넘어 섰는데 앞서가던 사내의 오른손이 불현 듯 올라갔다.

그러자 뒤를 따르던 열여섯 명의 무사들이 멈췄다.

그들은 각자 바위를 은폐물 삼아 맞은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계곡은 제법 평평하고 넓었는데 거대한 천막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선두 사내의 눈은 부지런히 평평한 곳에 쳐진 천막을 살폈다. 계곡아래 설치된 천막은 모두 열 개였다.

팟!

천막을 살피던 선두 사내의 눈이 기광을 발했다.

열개의 천막은 둥그렇게 포진하고 설치되어 있었는데 중심이랄 수 있는 곳의 천막에 한 마리 전갈 문양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전갈을 가문의 문장으로 사용하는 곳은 천하에 오직 독술의 가문 당문 뿐이었다.

슥!

앞으로 이동하라는 듯 선두 사내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일행은 한 마리 뱀처럼 숲과 나무 사이를 빠져나가 계곡으로 내려갔다.

쓱!

다시 선두 사내의 오른손이 올라갔고 일제히 멈췄다.

계곡 주위로 경비무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선두 사내의 시선이 닿고 있는 곳은 당문의 경비무사들이 아니라 계곡 한쪽에서 모여 있는 이십여 명의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양손을 부지런히 찌르고 돌리고 잡아 당기는 행동을 하고 있었는데 무예를 연마하는 것 같았지만 기합소리가 없었고 병장기 또한 쥐고 있지 않았다.

흑의 사내들 또한 그들의 동작에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난생처음 보는 괴상한 동작이었다.

그러나 선두 사내는 그들이 취하고 있는 동작이 무엇인지 아는 눈치였다.

당문의 인물들이 취하고 있는 기이한 자세들은 당문비전 십팔독전술이었다. 십팔독전술은 적과 대치중에 자연스럽게 독술을 펼치는 열여덟 가지의 방법인 것이었다.

독술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펼치면 되는 줄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같은 독으로 적을 공격을 해도 얼마만큼 상대의 눈과 감각을 속이느냐에 따라 효과는 달라지는데 십팔독전술이 바로 적을 속이기 위해 탄생된 당문의 고유 절기였다.

가볍게 뺨을 만지는 듯 하면서 독을 펼치고, 입을 가리고 큰 소리로 웃으며 용독을 하고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어 올리며 용독을 하는 열여덟 가지의 동작인 것이었다.

스으으!

선두 사내가 두 명의 경비무사를 향해 접근했다.

두 발이 풀잎 위로 떠가는 초상비의 경공이었으므로 경비무사들이 어떤 소리를 듣는 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두 무사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서로 마주보며 깔깔 거리고 있었다.

촥!

바람소리가 일어났고 두 경비무사의 목이 뎅강 잘려 나갔다. 몸과 분리되었지만 두 경비무사의 눈은 부릅떠져 있었다.

목을 잃은 두개의 몸뚱이가 엎어졌고 뒤를 따르던 흑의무사들이 당문의 영역권으로 들어섰다.

‘절대 비명을 내거나 소란을 피워서는 안된다.’

선두 사내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단 일격에 숨통을 끊어라.’

사내들이 낮은 자세로 십팔독전술을 연마하고 있는 당문 무사들을 향해 접근해갔다. 워낙 은밀하고 소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등 뒤로 죽음이 밀려오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쏴아아아!

동시에 열일곱 명의 흑의무사들이 날아올랐고 십팔독전술을 연마하고 있던 당문 무사들이 그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목이 몸에서 분리되고 있었다.

한 개의 목이 떨어지는 소리는 작지만 이십여 개의 목이 동시에 떨어지면 그 소리는 굉음에 가깝다. 흑의무사들은 목이 떨어지며 내는 소리까지도 막기 위해 일제히 허공섭물의 방법으로 목을 받아 슬며시 바닥에 놓았고 몸뚱이들도 가볍게 안아 뉘었다.

화악!

화다닥!

흑의사내들은 일제히 독문 무사들의 복장으로 갈아 입었다. 사전에 치밀하게 연습이 된 듯 옷을 갈아 있는데는 불과 다섯 호흡을 넘지 않았다. 단순한 흑의나 백의라면 미리 변복이 가능하지만 전갈문양이 수놓아진 흑의를 제작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유일한 방법은 직접 기습하여 변장하는 것 밖에 없었다.

변복을 마친 사내들은 일제히 시신에 뭔가를 뿌렸다. 검은 가루였는데 시골산이었다. 순식간에 당문 무사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수련장에는 열일곱 명의 가짜 당문 무사들이 십팔독전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서너 번 연습하는 시늉을 내던 일행은 조용히 줄을 맞추어 천막들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지나가는 당문 무사들이 많았지만 누구도 그들이 가짜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고 일행 또한 대담하게 어깨를 펴고 당당히 걸어갔다. 선두사내의 시선은 중앙에 있는 천막이었다.

“자네들 수련이 벌써 끝났나.”

“하긴 그게 그건데 쉬어가면서 해야지 다음은 우리 조 차례인가.”

계곡이고 공간이 비좁다 보니 조별로 십팔독전술을 수련하고 있는 것이었다.

좌측 천막에서 이십여 명의 사내들이 십팔독전술을 수련하기 위해 나가고 있었다. 선두사내는 그제서야 한 개의 천막에 한 개 조가 묵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누구도 일행을 의심하지 않았다. 소규모 문파라면 모든 제자들이 서로의 얼굴을 알고 있겠지만 규모가 큰 명문에서는 같은 문파에 소속되어 있다고 해도 얼굴을 모르는 것이 태반이었다. 오직 신분을 증명하는 패로 적과 우군을 판단 할 뿐이었다.

두개의 천막을 지나자 전갈 문양을 한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예상대로 경비가 삼엄했다. 십여 명의 무사들이 천막을 빙둘러 쌓고 있었다.

같은 무리인데도 유독 경계가 삼엄하다는 것은 가장 높은 사람이 묵고 있음을 의미하는 모습이었다.

“몇 조인가?”

“삼조일세.”

“삼조면 술시쯤 출동한다던데 오늘도 고생들이 많겠구만.”

천막을 둘러싼 경비명의 두목인듯한 오십 가량의 사내가 웃음을 지었다.

‘처랴!’

선두 사내의 명령이 떨어졌고 그의 검이 뽑혀 나왔다. 지금 자신에게 출시에 출동한다고 말했던 경비무사의 우두머리였다. 우두머리가 기겁하며 놀랐다.

“뭐야. 이 새끼들이.”

촥!

목을 노렸는데 어께를 베었다. 확실히 당대군을 지키는 호위무사의 두목다웠다. 하지만 그를 노린 선두사내는 혈섬 이산이라는 흑도의 전설적인 검객이었다.

휘청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이산의 검이 벼락같이 떨어졌는데 이번에는 정확히 목을 잘랐다.

컥!

으악!

호위무사들의 무공은 틀렸다. 완벽하다고 할 만큼 제대로 된 기습이었는데도 강력하게 저항했다.

열일곱 명 모두 목와북천에서 추리고 추려 보낸 최고들이었지만 당대군의 호위무사들 또한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이십여 초가 흐르면서 호위무사들 모두 제압 되었고 그 와중에 몇몇의 이쪽 희생자도 생겼다.

하나 소란 틈에 당문의 무사들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막아랏!”

이산이 짧게 명령을 내리고 자신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한명의 인물이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 마리 대호를 보는 듯한 당당한 체격에 힘찬 눈빛이었다.

밖으로부터는 병기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이 들려왔다.

척!

이산이 당대군에게 포권의 예를 취했다.

“이산이라 하옵니다.”

당대군의 눈이 커졌다.

“혈섬.”

“소생을 알고 계시는 군요. 그럼 편히 가십시오.”

번쩍!

이산의 검이 허공을 날아갔다.

비록 독이 전문 분야이지만 무공 또한 평범치 않는 당대군이었다.

뻥!

하는 소리가 들리며 당대군의 우장이 이산의 검을 때렸다. 하지만 당대군의 장력은 쪼개졌고 이산의 검 또한 표적을 비켜 그가 앉아 있던 의자를 조각냈다.

취리릿!

이상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제차 검을 휘둘렀다. 고수는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는다. 냉정을 잃지 않아야 제 실력이 정확히 분출 되는 것이었다.

백전의 경험으로 무장된 이산의 검은 오초를 넘기지 않고 당대군의 오른팔을 잘랐다.

“문주님을 구해야 한다.”

“더욱 밀어붙여라!”

밖에서는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이산의 부하들은 악착같이 막았다.

파파팍!

좁은 천막 안에서 두 사람의 격투는 치열했다.

이산의 검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빨랐다. 그것은 당대군으로 하여금 용독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대군 또한 이산의 전광석화와 같은 공격에 좀체 독술을 필칠 기회를 잡지 못했다. 독술을 펼치기 위해서는 일단 손이 품속의 독을 꺼내기 위해 들어가야 하는데 쉽지 않았다.

파팍!

검과 장력이 부딪혔는데 당대군이 뒤로 밀렸다.

슈욱!

이산의 검이 밀린 거리만큼 파고들었다.

딱!

다급히 왼손을 들어 막았지만 이산의 검에 실린 힘을 백년의 공력이었다. 팍 소리가 나며 당대군의 왼손이 잘려졌고 비명을 지르며 휘청거릴 때 이산의 검이 다시 섬광을 발했다.

콰아!

빛나는 검광이 당대군의 몸을 수직으로 가르고 사라졌다.

당대군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고 조금씩 피가 흘러나왔는데 정확히 두 조각이 되어 쓰러졌다.

와르르!

그때 당문의 제자들이 물밀듯 밀려들어왔고 이산의 검은 인정사정 없었다.

파파팍!

컥!

크아악!

일검에 다섯 명이 쓰러졌지만 밀려들어오는 숫자가 너무 많았다.

파아아!

이산은 천막를 찢고 뒤로 빠져나갔고 당문의 무사들이 뒤를 따라 붙었다.

채채챙!

콰아앙!

양측은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고 이산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독에 걸린 것이었다. 천막 안에서는 걸리지 않았지만 수하들과 부딪히며 그들이 펼친 독술에 빠져든 것이었다.

오늘의 거사를 위해 지난 보름동안 숱한 연습을 반복했다. 독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들이 독을 펼치기 전에 일을 마무리하는 훈련이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고생한 보람이 있어 당대군을 죽였다. 그 대신 부하들을 거의 잃고 자신 또한 독에 걸려 든 것이었다. 이산의 표정은 밝았다. 전쟁에서 목적을 달성한 것 보다 더 위대하고 완전한 기쁨은 없기 때문이었다.

어딘지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내기로 퍼지는 독을 저지하고 있지만 조금씩 심장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거기다 온 몸에는 수많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풀썩!

더 이상 걷지를 못하고 이산은 주저 앉았다.

일어나야 한다. 누구든 검을 쥔 무사가 되면서부터 죽음을 도외시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래서 항시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염두하며 살아왔다.

이산은 기어코 옆의 나무기둥을 붙잡고 일어섰다.

혈섬 이산하면 흑도에서 뿐만 아니라 무림맹에서 조차도 그 권위를 인정해주었다. 결코 아무에게도 자신의 죽음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산답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생을 마무리 하고 싶었다.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나무와 바위들이 두 겹 세 겹으로 보였고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털썩!

다시 주저앉아 소나무 기둥에 몸을 기대었다.

학…하학!

이산의 입에서 거품이 흘러나왔다. 독이 심장에 까지 침투했을 때 드러나는 현상이었다.

‘대종사!’

눈 앞으로 백쾌섬의 얼굴이 떠오른다.

흑도사상 최고의 기재로 불리웠고, 그래서 반드시 흑도의 시대를 열어 젖힐 것이라고 누구도 의심이 않고 있는 그가 갑자기 보고 싶어진다.

‘이 몸 먼저 가오니 부디 흑도의 천하를 이루소서.’

임무는 완수했으므로 후회는 없었다.

얼굴이 검게 변해졌고 몇 번 눈을 깜빡거렸다.

‘대…대종…사!’

이산의 몸이 조용히 옆으로 쓰러졌다.

한 시대를 종횡무진했던 검객은 그렇게 이름 없는 산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당대군의 죽음은 그나마 무림맹을 지탱하고 있던 커다란 축이 무너진 것과 같았다. 그의 죽음은 순식간에 천하에 퍼졌고 흑도무림에서는 더욱 자신감을 갖고 공격을 했다.

무림맹은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계속 후퇴를 했다.

급기야 남궁천은 천상각을 지키고 있던 상관량에게 사람을 보냈다. 천상각을 에워싸고 있는 무사들을 전선으로 투입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관량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상관뿐만이 아니라 남궁천의 핵심 참모들도 가로막고 나섰다.

그들을 이동시키면 전세를 역전은 시키지 못해도 당분간은 팽팽한 대치를 이루겠지만 천상각이라는 거대상가의 막강한 자금을 포기하는 것이고 군수물자가 턱없이 부족한 작금의 무림맹으로써는 패배를 더욱 재촉하는 꼴이 된다는 것이었다.

참모들과 일부의 반대가 워낙 심했으므로 남궁천은 자신의 결정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상관량의 안색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뭔지 모르지만 느낌이 계속 좋지 않았다. 사람에게는 육감이라는 것이 있는데 아무래도 돌아가는 전황이 비정상적이었다.

목와북천의 공세가 너무 일방적이고 거셌다.

아무리 준비가 잘되었다고 해도 한 달이 넘게 되면 그때부터는 군수물자가 승패를 가른다. 자신의 예상이라면 이미 목와북천은 군수물자가 바닥이 나서 무림맹에게 밀려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서는 전혀 그런 낌새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벌떡!

갑자기 상관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러시옵니까?”

금수선사가 물었다.

“갈 때가 있소. 아니 함께 갑시다.”

상관량은 천상각의 정문을 지키는 목와북천 무사들에게 동오룡을 만나러 왔다고 했다.

목와북천의 무사들은 순순히 비켜주었다. 무림맹이 공격하면 자신들은 단 몇 시진도 버티지 못하고 궤멸될 것이다. 공격을 하지 않고 그나마 아직까지 기다려준 것이 고마울 뿐이었다. 물론 무림맹이 무리한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은 동오룡을 붙잡아봤자 그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동천비를 잡아 협박을 해도 통하지 않을 위인이기 때문에 쓸데 없이 공격을 하여 동오룡의 비위를 더 거슬려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섰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포위한 채 시간을 끌어 동오룡이 심정의 변화를 일으키길 기대하고 있었다.

“어쩐 일이오?”

동오룡은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상관량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집 밖은 지금 난리가 났는데 포위된 주제에 한가하게 붓글씨로 유유자적하는 동오룡이 쳐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그러나 겉으로 내색을 할 수가 없었으므로 조용히 말했다.

“필치가 힘차구려.”

“요즘 마음을 식히기 위해 몇 일 계속 잡고 있는데 그렇게 보이다니 다행이오.”

사사삭!

‘삭풍비노기(朔風悲老驥) 추상동지금(秋霜動?禽)’

흠칫!

흰 한지에 동오룡이 써내려간 글씨를 본 상관량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떠시오? 볼만하오?”

상관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동오룡이 쓴 글씨를 해석하면 이렇다.

‘매서운 북풍은 노쇠한 천리마를 비장하게 하고 차디찬 가을 서리는 맹금을 높이 날게 한다.’

한마디로 무림맹이 목을 옭죄면 죌수록 자신의 저항은 더욱 강력해 질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사사삭!

또다시 동오룡은 글씨를 써 내려갔는데 상관량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영위유하옥(寧爲有瑕玉) 부작무하석(不作無瑕石)’

그 뜻은 이렇다.

‘차라리 티가 있는 옥이 될지언정 티가 없는 돌이 되지는 않겠다.’

죽더라도 굽히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탁!

붓을 놓은 동오룡이 자신이 써 놓은 글씨가 마음에 드는 듯 미소를 띄며 보았다.

그리고 힐끔 굳어 있는 상관량을 보더니 밖을 향해 말했다.

“손님이 오셨는데 차를 내와야 할 것 아니냐?”

꾸중이 담긴 목소리였다.

상관량이 말했다.

“아니오. 차 생각은 없고 한 가지 묻고 싶어서 왔소이다.”

“그래도 차는 한잔 해야지요.”

“동천비 어딨소?”

흠칫!

여유를 부리던 동오룡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넉넉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상관량의 날카로운 눈은 속일수가 없었다.

“동천비를 만나러 왔소. 아니 그가 바쁘다면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소.”

“물론 어려울 일 아니지요. 여봐라 천비를 오라 이르라.”

“네 가주님.”

밖에서 부하의 대답이 들려왔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동천비는 나타나지 않았고 동오룡이 버럭 소릴 질렀다.

“왜 여태 소식이 없느냐? 그 놈을 빨리 데려 오라고 하지 않느냐?”

“지…지금 찾고 있나이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동천비는 오지 않았다.

상관량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더니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헛헛! 언제 내보냈소?”

동오룡이 멈칫 했다.

상관량의 얼굴에 다 알고 있으니 말하라는 가벼운 표정이 나타났다.

그러자 동오룡 또한 웃었다.

“오래 되었소.”

“결국 우리 쪽에 당신과 손이 닿은 인물이 있다는 건데?”

“물론이오. 그쪽의 도움없이 어찌 나가겠소.”

상관량이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을 나왔다.

밖으로 나온 상관량은 곧바로 진격 명령을 내렸다. 명령이 떨어지고 채 두 시진이 되지 않아 천상각은 무림맹 무사들에 의해 짓밟혔다. 목와북천의 고수들은 완전히 도륙당했고 동오룡은 생포되었다.

“놈을 끌고 전선으로 간다.”

결국 동오룡의 꾀에 속아 그에게 붙잡혀 있는 꼴이 되었다. 만약 자신들이 전선으로 투입되었다면 이곳의 무사들이 워낙 정예이기 때문에 전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또한 천상각 지하 모처에 숨겨진 막대한 양의 보화는 지금 목와북천이 승승장구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상관량은 어떻게 동오룡을 사용할까 연구에 몰입했다.

비천야차의 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은 태사의에 앉아 있는 모용파에 고정되어 있었다. 모용파는 뭔가 깊은 고뇌에 잠긴 듯 이마를 찡그리고 있었다.

“……”

“……”

두 사람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천야차는 강한 시선으로 모용파를 보았고 모용파는 여전히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음! 철수라.”

모용파가 혼잣말로 말했다.

비천야차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본가에서 전선까지는 백리가 채 남지 않았사옵니다. 본가 제자들이 보내온 보고에 의하면 영천 방어선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라면서 서둘러 대비책을 세우라고 합니다.”

모용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난을 가자는 얘긴데.”

“우리 뿐 만 아닙니다. 그동안 수많은 문파들이 목와북천의 공격을 피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고 있습니다. 특히 흑도인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하게 대했던 정도문파는 풀뿌리 한 포기 남기지 않고 도륙하고 있다 하옵니다.”

남궁천에게 잘 보이기 위해 누구보다도 흑도무사들에게는 악명 높게 굴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흑도무사라면 그 자리에서 참수하거나 팔 하나를 베어 버렸다.

모용세가야 말로 흑도에게 짓밟히면 개미새끼 한 마리 남지 못할 것이 뻔했다.

꽈당!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아…아가씨.”

들어선 사람은 모용산이었는데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사…산아야.”

두 사람이 동시에 몸을 날려 모용산을 부축했다. 그녀의 얼굴은 헬쓱했고 온 몸의 의복은 찢겨져 있었다.

“아가씨 왜 이러십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비천야차가 아무리 흔들고 소리쳐도 모용산의 눈동자는 희멀겋게 변화가 없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의원을 불러라.”

모용파가 밖을 향해 소리쳤고 두 사람은 모용산을 부르며 흔들고 난리 법석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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