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47화 (47/71)

제2장 늑대의 죽음

고개를 쳐들자 일목의 검은 어느새 검 집으로 들어가 있었다.

다시 검을 세워 공격을 하려고 들 때 뭔가 이상한 느낌이 감지되었다. 뭐랄까 몸이 가볍다고나 할까. 고개를 갸웃 거리는데 너무 쉽게 옆으로 기우뚱해진다. 머리가 가벼워 진 것이다.

팟!

그 순간 느껴지는 것이 있어 얼른 왼손으로 머리를 만졌다. 그런데 있어야 할 머리가 없었다. 깜짝 놀라 땅바닥을 쳐다보자 자신의 머리카락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화악!

모용산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일목이 으스스한 음성으로 말했다.

“한 번 만 더 대법왕님께 망녕 된 행동을 하면 그때는 한쪽 가슴을 없애버리겠다. 명심해라 이년.”

그리고 팟 하는 소리와 더불어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배교 사람이구나.’

남궁관은 일목이 보여준 기예가 신법이 아니라 환술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동천몽이 머리가 잘린 모용산을 웃음 가득한 얼굴로 바라본 후 고개를 돌렸다.

“눈치를 챘겠지만 너를 기다렸다.”

“무슨 뜻이냐?”

“무슨 뜻이라니? 당연히 널 죽이려고 기다린거지.”

남궁관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것은 동천몽과 아무런 은원이 없는데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카악!

동천몽이 바닥에 침을 뱉더니 정색하고 말했다.

“네 아버지가 무림맹을 앞세워 본가에서 뜯어간 돈이 얼마인줄 아느냐? 물론 그것이 널 죽이려고 기다린 목적은 아니다. 내가 기다린 진정한 목적은 천하패권을 위해 반대자들을 척살하는 너의 발길을 묶기 위해서이다. 강호육군은 절대 너에게 죽을 일을 하지 않았다. 단지 너희 아버지가 천하를 거머쥐는데 방해가 될 뿐이겠지.”

“훗훗! 그래서 내 목을 베어 아버지의 뜻을 꺾겠다는 것이로군.”

“물론 아들이 죽어도 부친의 의지는 쉽게 꺾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너의 목숨으로 너희 아버지에게 기회를 주려한다. 만약 네가 죽었는데도 고집을 피운다면 그땐 너희 아버지 목에 직접 내가 검을 겨눌 것이다.”

“크하하하!”

남궁관이 고개를 쳐들고 웃었다. 분노를 발산하기 위한 웃음인지 아니면 동천몽의 광오한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서인지 한참을 웃던 남궁관이 조용히 말했다.

“대법왕이라고? 포달랍궁의 대법왕의 무예는 신의 반열에 있다던데 어디 뜬소문인지 사실인지 한번 보지.”

남궁관이 날카롭게 쏘아보며 자세를 취했다.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이고 두 무릎을 구부렸다. 기회가 보이면 곧바로 달려들 전형적인 공격태세이다.

동천몽은 양손을 서서히 끌어 올렸다. 강호육군을 제거한 검이라면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었다. 특히 천마검법이라면 더욱 신중을 기해야 했다.

화아아!

남궁관의 검이 찔러왔다. 어떤 변도 담지 않은 단순한 공격이었지만 빠르다.

딱!

지옥금이 가득 주입된 왼손이 남궁관의 검기를 쳐냈다.

남궁관의 검이 방향을 틀어 엉뚱한 곳에 흔적을 남겼다. 하나 남궁관은 전혀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고 오히려 웃음을 지었다. 아마 일초는 동천몽의 힘을 재보기 위한 공격인 듯 했다.

그리고 자신감이 생긴 듯 했다.

콰아아!

자신감을 얻은 탓인지 남궁관의 검은 처음과는 백팔십도 달랐다. 한줄기 빛이 쏘아오는 순간 동천몽의 눈이 가늘어졌다. 탄검인 것이다. 검 끝에 내기를 실어 찌르는 것이 아니라 지력처럼 검기를 튕겨낸다.

동천몽의 좌장이 뻗었는데 지옥금이었다.

퍼억!

검기와 장이 뻗어갔다.

씨익!

남궁관의 입가에 웃음이 베어나왔다. 완전히 자신감을 찾은 얼굴이었다.

촥!

검강이었다. 남궁관은 곧바로 승부를 걸려는 것 같았는데 동천몽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뒤에 위청청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을 이긴다고 해도 체력이 소모될 테고 그런 몸으로 강호육군 중 한 사람을 상대하기란 쉽지 않다고 판단을 내렸을 것이었다.

스으으!

동천몽의 오른손이 뻗었는데 완전한 불덩이었다. 이글거리는 화염도 없고 열기도 없이 단지 시뻘겋기만 했다. 정말로 뜨거운 불길은 화염이 없고 이글거리지 않는다. 다만 빨간 색으로 달아 올라 있기만 할 뿐이었다.

콰앙!

검과 장이 충돌했고 두 사람이 동시에 한 걸음씩 물러났다.

이번에는 남궁관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자신의 검강을 어렵지 않게 받아 낸 것에 놀란 것이다. 사실 앞선 두 번의 공격에서 느낀 동천몽의 힘은 검강을 받아 낼 정도까지 되지는 않았다.

쉭!

검끝이 뱀의 혀바닥처럼 두 가닥으로 나눠졌다. 그 만큼 검 끝에 엄청난 힘이 실려 검신이 감당할 수 없어 떨리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뭐든지 부딪히면 뚫고 벨 것 간은 기세였다.

동천몽이 오른손이 다시 뻗어갔고 두개로 나눠진 틈을 정면으로 가격했다.

뻑!

강한 충격에 남궁관의 검이 밑으로 휘청 밀려났고 그 틈을 노리고 동천몽의 좌장이 앞 가슴을 쾌속하게 찍어갔다.

슝!

전광석화와 같은 공격이었다. 힘에 밀려 밑으로 휘청 밀린 검을 들어 막기란 너무 시간이 촉박했으므로 남궁관은 왼손을 뻗었다.

콰앙!

둘 모두 다시 상체를 휘청거리며 세 두 걸음씩 물러났다.

“훗훗! 끝내주마.”

남궁관은 완전하게 여유를 찾고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모든 사람은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절기로 생사의 대결을 벌인다. 동천몽은 지금 장을 들었고 그것은 그의 주력이 장법이라는 얘기였다. 문제는 그 장(掌)이 자신이 뻗은 좌장과 동수를 이뤘으니 싸움의 결과가 어느 정도 눈에 보였다. 자신의 주력은 검이다.

지이잉!

남궁관의 검이 변했다. 검에서 붉은 혈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 나기 시작했다.

“처…천마검법!”

위청청이 경악의 외침을 터뜨렸다.

치치직!

검에서 뿜어나 온 천마의 검기는 주위 나무와 심지어 돌까지 순식간에 태워버렸다.

“크크크! 간닷 이놈.”

쿠우우!

그것은 검이라기보다는 거대한 핏빛 안개였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핏빛 안개를 향해 동천몽은 망설임 없이 오른손을 뻗었다. 동천몽의 손이 파랗게 변했다.

진정으로 뜨거운 불길은 파랗게 보인다.

빠아앙!

엄청난 굉음이 울렸고 우직끈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옥이 산산조각이 되어 폭풍에 날아가버렸고 위청청과 모용산 역시 멀찌기 몸을 피했다.

콰콰콰!

충격에 잠시 주춤하던 남궁관의 검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완전히 동천몽을 검기 안에 가둬 버린 것이었다.

“우핫핫핫!”

살기가 넘치는 포악한 광소와 더불어 동천몽의 몸은 금방이라도 난도질 당할듯 위태로웠다.

쓰으으!

동천몽의 오른손이 원을 그렸다.

그러자 에워싸고 있던 천마검기가 잘려나가며 허물어졌고 동천몽은 조용히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남궁관의 눈이 커졌다. 잡았다고 여겼는데 너무도 쉽게 천마검법이 만든 포위망을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특히 그가 놀란 것은 천마검법이 동천몽의 손짓에 잘려졌다는 것이었다.

하나 그것은 전혀 이상할 것도 없었다. 불가무학, 그것도 포달랍궁의 무예는 사도나 마도의 무공과는 천적을 이루고 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남궁관은 당연이 놀랄 수밖에 없고 다시 동천몽을 향해 최후의 일검을 날렸다.

쐐애액!

붉은 혈기를 가득 담은 검이 날아오고 있다.

“영감님, 그 부채 좀 빌려 주시겠소?”

“그러게나.”

위청청이 빠르게 부채를 던져 주었고 탁 낚아 잡은 동천몽이 자신을 향해 파고드는 남궁관의 검을 향해 부채를 대각선으로 그었다.

콰아아!

대낮인데도 엄청난 광채가 주위를 압도했다. 찔러 오던 남궁관 또한 강렬한 눈부심에 이마를 찡그렸다.

일섬단극, 만마생사혈중 가장 빠른 초식이 펼쳐진 것이다.

푸욱!

분명히 늦게 펼쳐졌는데 부채는 어느새 남궁관의 오른쪽 가슴을 뚫고 있었다. 반 호흡 정도의 시차를 두고 남궁관의 검은 동천몽의 어깨를 스쳤다.

“컥!”

남궁관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걸음을 세웠는데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천마검법이 깨진 것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자부했는데 동천몽의 힘이 갑자기 두 배는 상승한 현상이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얼굴이었다. 왜냐하면 조금 전 펼친 것은 비록 부채였지만 분명히 검강이었다. 동천몽의 주력은 장이고 또한 내공이 강(?)을 펼치기에는 부족했다. 그런데 서슴없이 그것도 완벽하게 완성된 강이 가슴을 찔렀다.

주르륵!

가슴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갑자기 힘이 배가 된 건 어떻게?”

“어찌된 일이냐고 묻는 건가?”

동천몽이 별것 아니라는 듯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일목.”

다시 허공에서 일목이 떨어져 내렸다.

“부르셨나이까 대법왕님.”

“내가 누구냐? 나를 한마디로 함축해서 표현해보거라. 지난 세월 오랫동안 겪었을테니 어려운 질문은 아닐 것이다.”

“물론이옵니다. 전혀 어려운 질문 아니옵니다. 대법왕님을 한 마디로 표현 한다면 잔대가리의 왕이라고 할 수 있지요.”

홱!

동천몽이 인상을 쓰며 돌아보자 일목이 잽싸게 말을 바꿨다.

“자…잔머리의 왕이지요.”

“들었나? 하나도 이상 할 것 없다. 네가 한 만큼 나도 할 뿐이지. 네가 십이라는 힘을 쓰면 나도 십만 쓸 뿐이고 백을 쓰면 나도 백을 쓸 뿐이다.”

“……”

“왜 그러는지 아나? 내 지론은 싸움은 쉽고 편하게 하자는 생각이지. 자 그럼 어떻게 하면 쉽고 편하게 할수 있는가를 설명해주지. 그것 또한 아주 간단하다. 상대에게 맞춰 대응하면 상대는 내 수준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착각하고 기고만장한다. 지금 너처럼.”

남궁관의 안색이 굳었다.

완벽하게 속은 것이다. 아니 작전에 휘말린 것이었다. 무공은 강하면 이길 확률이 분명 높지만 싸움을 하다보면 정 반대의 결과가 나오는 것이 무인들의 격투였다.

동천몽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자신의 힘에 보조만 맞춘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완전히 자신감을 갖고, 좀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방심해 있을 때 모든 것을 쏟아 내버린 것이었다.

화악!

남궁관이 날아왔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눈에 띄게 차이가 나는 검이었다.

“기어코 추한 꼴 보겠다는 거군.”

딱!

부채가 검을 쳤다. 치는 부채는 이미 검강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에 남궁관의 검이 힘없이 옆으로 밀렸다.

푸우욱!

동천몽의 부채가 이번에는 복부를 찔렀다.

또다시 배가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남궁관은 포기 하지 않고 재차 검을 휘둘렀다.

“끝까지 해보겠다는 거냐?”

탁!

남궁관의 검을 왼손으로 잡아 사정없이 잡아 당겼다. 그러자 남궁관이 그대로 끌려왔다.

“병신, 이럴 땐 끌려 오는것이 아니라 검을 놓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이렇게 터지기 때문에.”

빠악!

오른손 부채가 면전으로 끌려온 동천몽의 대갈통을 내려쳤다.

대가리에 피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고 남궁관은 검을 여전히 쥐고 있었다. 검을 놓는 다는 것은 곧 패배이자 어떤 변명으로도 통하지 않는 무인에게 가장 큰 수치라고 생각 한 것이다.

“일목 너 같으면 이 상황에서 어찌하겠느냐?”

“일단 검이고 뭐고 팽개치고 멀찌기 물러나지요.”

“나도 그런다. 그런데 이놈은 아주 골통이구나. 검도 힘이 있을 때 쥐고 있어야 뽀대가 나지 완전히 맛이 갔는데도 쥐고 있다는 것은 병신 짓거리라는 것을 모르는구나.”

빠악!

오른발이 남궁관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그제 서 야 남궁관이 검을 놓고 양손으로 아래를 감싸쥐었다.

곰처럼 잔뜩 사타구니를 감싸고 부르르 떨던 남궁관이 끝내 옆으로 넘어졌다.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천마검법을 어떻게 정도의 명문인 남궁가에서 사용하지?”

남궁관이 더듬거렸다.

“죽여라.”

“죽일 테니 걱정 말고 묻는 말에 대답해라.”

남궁관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피식!

동천몽이 가소롭다는 듯 메마른 웃음을 짓더니 있는 힘을 다해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아이구야. 끄거거거!”

“혹시 대법왕이라고 해서 내가 편히 죽일것이라고 생각했다면 포기해라. 대법왕이라고 다 자비심이 넘치는 것만은 아니거든. 본궁 대법왕 중 한 분은 사람을 죽일 때 한 번도 그냥 죽이지 않았느니라. 온갖 고문과 고통을 주며 괴로워하는 상대를 보며 희희낙락했다고 전해오지. 난 그 정도는 못 되어도 편하게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빠악!

또다시 사타구니를 찼다.

남궁관은 비명을 지를 뿐 대답이 없었고 동천몽은 굴러가는 그를 따라가며 걷어찼다.

빡!

빡---빠아악!

남궁관은 끝내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완전히 사색이 되었고 정신이 나간듯 했다.

“주…증조부님께서 마교 교주의 제자이셨…다.”

남궁관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백 년 전 무림맹에 쫓기던 마교교주는 남궁세가의 전전 가주였던 남궁용과 조우했다. 평소라면 모를까 이미 사경을 헤매고 있는 마교교주에게 남궁용은 벅찬 상대였다.

마교교주는 한 가지 제의를 했다. 자신을 살려주면 마교교주의 무공을 전수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보는 사람도 없고 남궁용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가짜 마교교주의 시신을 만들어놓고 진짜 마교교주는 남궁세가로 데려와 그에게 무공을 전수받기 시작했다. 그 후 남궁세가의 가주들은 마교교주의 무공을 수련하기 시작했지만 너무 심오하고 복잡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마침내 천마검법을 완전히 소화한 것이었다.

“어엇!”

그때 일목이 놀란 소리를 했다.

“그 계집이 사라졌사옵니다.”

모두가 남궁관에게 집중되어 있는 틈을 이용해 모용산이 도망을 쳐버렸다.

“당장 잡아 오겠사옵니다.”

“아니다 그럴 필요 없다. 그 계집을 죽일 손은 따로 있다고 했지 않느냐? 여기서 죽는게 나을텐데.”

동천몽이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천비 성격에 잡히면 그냥은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곱게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버린 셈이었다.

부르르르!

남궁관이 심한 경련을 했다. 가슴과 복부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데다 사타구니가 깨져 죽음이 몰려들고 있었다.

“나…나의 천마검법은 겨우 오성이…다. 아…아버지를 만나면 넌 결코 살아…나…지 못할…것.”

툭!

웅크린 체 남궁관은 숨을 거두었다.

“일목!”

“시신을 잘 싸서 마차에 실어 남궁세가로 보내주어라.”

“존명!”

일목이 남궁천의 시신을 거적에 대충 말아 옆구리에 끼더니 산을 내려갔다.

동천몽이 위청청을 돌아보았다.

“어떻습니까? 기분도 전환할 겸 오목 한 수 더하는게?”

“좋습니다. 이번엔 그냥 두는 것 보다는 내기를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동천몽이 눈을 크게 떴다.

“내기? 그거 좋지요. 그런데 뭘 내기로 걸겠습니까?”

“이긴 사람은 무조건 진사람 소원을 들어주는 것 어떻겠습니까?”

동천몽이 눈을 크게 떴다.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내기는 많이 봤지만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건 처음 겪은 경우였다.

동천몽은 생각할수록 복잡했으므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다시 바둑판을 놓고 앉아 오목을 두었고 또다시 위청청이 패했다.

그런데 패한 위청청이 아까와는 달리 무척 즐거워했다.

“그럼 지금부터 소원을 말하겠습니다.”

“뭐요?”

위청청이 동천몽을 빤히 쳐다보았다.

“소원 말하라니까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거요?”

“이 늙은이를 포달랍궁의 제자로 받아 줄 수 없겠사옵니까?”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위청청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포달랍궁의 제자가 되어 얼마 남지 않은 삶, 대법왕님을 받들어 모시고 살고 싶습니다.”

“이…이보시오.”

“안된다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절간이 자유화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젊은 사람을 제자로 받는 것이지 어떻게 죽음이 목전에까지 닥친 늙은 사람을 받는 단 말이오?”

위청청의 눈이 커졌다.

“그래서 너무 늙어 안된다는 말씀이옵니까?”

위청정의 표정이 비장해졌다.

동천몽이 이마를 찡그렸다.

“늙었다고 안된다는 법은 없지만 관례상 젊은 사람을 제자로 받는데.”

“어쨌든 늙어서 안된다는 것 아닙니까?”

“솔직히 말해 늙어도 너무 늙었소. 올해 춘추가 어찌 되시오.”

“정확히 백 일곱입니다.”

동천몽이 인상을 썼다.

“백 일곱 먹은 제자를 받아 들여 누가 맘놓고 심부름을 시키겠소? 생각해보시오. 위대협 같으면 자신보다 나이 많은 제자에게 맘 놓고 심부름 시키겠소?”

“예. 이 늙은이 같으면 나이고 뭐고 인정사정 없이 시킵니다. 강호 원로랍시고 걸핏하면 이놈 저놈 찾아와 무림의 정세에 대해 상의를 하려듭니다. 원로 대우 받으면서 그들의 사정과 얘기를 들어주지 않을 수도 없고, 한데 문제는 그들이 나와 상의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위청청의 미가에 주름이 생겼다.

“강호 평화와 흑도와의 공존에 관한 건설적인 애기면 괜찮은데 하나같이 자신들이 하는 일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지요. 거절하면 섭섭하다고 앙심을 품고 허락하자니 그들의 일이 떳떳하지 않고, 그래서 이 늙은이에게는 친구보다는 적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 불문에 귀의하겠다는 얘기오?”

“꼭 그런 복잡한 강호사를 피하려는 목적 하나만을 갖고 불가에 몸을 던지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늙은이 죽을 때 다 되었지요. 죽기 전에 사람다운 일좀 해보려고 하지요”

“사람다운 일?”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 말입니다. 포달랍궁에 가면 공부만 하는 학승도 있고 무예만 익히는 무승도 있지만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그들의 삶을 돕는 속승도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뚝!

일목이 물건 떨어지듯 일목이 나타났다.

“다녀왔사옵니다. 마차 한대 구해 보냈습니다.”

“그래 수고 했느니라.”

“오면서 들었는데 한 마디 해도 되겠사옵니까?”

“해라.”

일목이 침을 삼키며 말했다.

“위청청 선배님께서 본궁의 제자가 되고 싶어한다고 들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사옵니다.”

화악!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요즘 일목이 틈틈히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그만 서책을 품속에 넣고 다니며 짬 날 때마다 읽은 것을 두어 번 보았다.

“단도직업적?”

“단도직업적이 아니라 단도직입…아이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천몽이 그대로 사타구니를 걷어찼고 일목이 양손으로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네놈의 간덩이가 부었구나. 요즘 칭찬을 해줬더니 이제 어른들 얘기하는데 불쑥 끼어들다니.”

“송구하옵니다. 소승이 죽을 죄를 졌사옵니다. 그럼 이만.”

팟!

연기처럼 흩어지며 일목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동천몽이 위청청을 바라보았다.

“영감님 의지가 정 그러하시다면 받아들이겠소. 하지만 연장자라고 대우 받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시오?”

위청청이 펄쩍 뛰었다.

“절대 그런 생각 하지 않습니다. 마구 아랫사람 부리듯 일도 시키고 심부름도 보내십시오. 그리고 정식으로 계를 받지 않았지만 제자임을 구두로 맹세했으니 앞으로 이 늙은이에게도 말씀을 놓으십시오. 어찌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신 대법왕님께서 제자에게 존칭을 사용한단 말이옵니까?”

동천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느니라. 계를 받으면 정식으로 법명을 내리겠지만 우선은 청청이라고 부르자꾸나.”

“청청이라? 정말 마음에 드옵니다.”

위청청이 합장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지금은 이렇게 예를 올리지만 나중에는 정식으로 대법왕님께 몸과 마음을 바쳐 큰절로 제자되었음을 신고하겠사옵니다.”

“진정한 예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니라. 넌 이미 본궁의 제자가 되었고 예를 갖추었느니라.”

위청청의 눈이 커졌다.

지금까지 짓궂은 모습만 보았다. 그런데 지금 자신을 쳐다보는 동천몽의 얼굴에서 금빛 광채가 쏟아졌다. 감동에서 오는 착시 현상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동천몽의 얼굴은 웅장하고 근엄한 빛을 뿌렸다.

바로 그때 둘 모두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인기척을 느낀 것이었다. 잠시 후 산아래로부터 한 개의 붉은 인영이 바람처럼 날아왔다.

흠칫!

위청청의 눈이 커졌다. 날아오는 사람의 신법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빨랐기 때문이었다.

처억!

가벼운 먼지를 일으키자 붉은 인영은 마당한가운데 날아내렸다. 나타난 사람은 눈썹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무미선사였다. 무미선사를 본 위청청의 눈이 찌푸려졌다.

눈이 하나뿐인 일목에다가 눈썹이 없는 무미가 나타나자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고 그래서 참다보니 인상을 쓰게 된 것이었다.

“어쩐 일이냐?”

무미선사가 허리를 구부리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목와북천이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사옵니다. 이미 사천과 운남 섬서까지 점령당했고 파죽지세로 장강을 넘어 밀려오고 있사옵니다.”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양쪽의 충돌이 곧 있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빨랐다.

팟!

갑자기 동천몽의 눈이 빛을 발했다.

지금 흑도와 무림맹은 잠시 휴전 중이었다. 양쪽모두 내부사정 때문이었는데 흑도는 자금이 부족했고 무림맹은 지휘통제가 일원화 되지 않은 탓이었다.

“먼저 칼을 뽑은 곳이 흑도라고 했느냐?”

“그러하옵니다.”

동천몽이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동천몽이 짓는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어 세 사람은 몹시 궁금해 했다.

“형님이 무림맹의 포위망을 뚫고 나왔군.”

“아니옵니다. 그것은 불가능 하옵니다. 대법왕님의 사가는 상관량에 의해 완벽히 포위되어 있사옵니다. 개미 한 마리도 빠져 나올 수 없지요.”

“흑도는 군수물자 부족으로 잠시 공세의 고삐를 늦추었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면 군수물자가 보충이 되었다고 봐야겠지. 흑도무림에 군수물자를 지원할 만큼 많은 자금을 갖고 있는 사람이 누구겠느냐?”

무미선사가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하…하지만 대법왕님의 형님께서는 갇혀 있사옵니다.”

“몰래 빠져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님께서 형님에게 선조때부터 내려온 최후의 재산을 모조리 넘긴 것이 분명하다. 그 자금이 아니면 흑도는 절대 무림맹을 공격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

무미선사의 눈이 커졌다.

동천몽의 말을 듣고 보니 맞는 것 같았다. 자신도 군수물자 부족에 시달리는 흑도가 공격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의아했었다.

“아마 무림맹에서 누군가 아버지와 통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그의 힘을 빌어 형님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동천몽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핏줄이자 장자이다. 결국 부친은 동천비의 손을 들어주었고 그에게 천상각의 미래를 맡긴 것이다. 부친과 동천비는 이제 완전히 한 배를 탄 것이었다.

부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 할 것 같았다.

부친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동천비 말고는 없었다. 자신에게도 기대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당장 가시적인 사건 해결을 보여주지 않고 아직 때가 아니라는 말에 서운했을 것이며, 조급한 부친은 무척 실망했을 것이고 자신들이 과거 미워했던 감정이 남아 고의로 모른체 하고 있다고 오해를 했음이다. 그래서 자신을 버리고 동천비에게 죽이되든 밥이 되든 주사위를 던진 것이다.

“훗훗!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가장 대단한 분은 아버님이로군. 그렇잖아도 풍부한 장비 등을 앞세운 목와북천에 밀리는 무림맹으로서는 미칠 노릇이구나.”

위청청과 무미선사가 눈을 깜박 거렸다. 동천몽의 말뜻을 알아 듣지 못한 얼굴이었다.

동천몽이 웃으며 설명 해주었다.

“무림맹에서는 형님이 포위망을 벗어난지를 모르고 있다. 아니 일부러 아버지께서 철저히 숨기고 있다. 형님이 같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을 것인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형님이 도망친 사실을 숨겨 안전을 지켜주려는 것도 있을테고 시간을 벌어 형님이 안전하게 추적망을 충분히 벗어나도록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과 아울러 집안 어딘가에 쌓여 있을 보화를 모조리 옮겨 갈 시간적 여유를 주기 위해서지. 하나 가장 큰 이유는 다른데 있을 것이다.”

“무엇입니까?”

“형님이 있는 것처럼 하여 본가를 에워싸고 있는 천상각 무사들을 붙잡아 두려는 것이지. 본가를 둘러싸고 있는 무림맹 무사들은 최정예들이다. 어쩌면 그들까지 전선에 투입되었다면 아무리 풍부한 장비로 무장한 목와북천일지라도 손쉽게 밀어 붙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아버님이 그들을 붙잡아 주고 있기에 목와북천은 승승장구할 수 있지.”

“결국 목와북천의 가장 큰 힘은 어쩌면 아버님이란 말씀아니옵니까?”

“아버지 또한 형님과 한 배를 타기로 마음먹었으니 목와북천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쨌든 대단한 계략이구나.”

장사꾼의 머리는 역시 비상했다.

무림맹은 지금 동천비가 포위망을 빠져나갔을 뿐 아니라 막대한 자금을 이용해 앞선 장비로 무림맹을 몰아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었다.

무림맹이 계속 밀릴 것이다. 하지만 계속 밀리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된다.

흑도의 공세는 가공했다. 연일 엄청난 물자와 병력들 동원해 폭풍처럼 밀고 내려왔다. 그들은 무림맹이 쳐놓은 함정과 진법은 귀씨화가에서 매입한 화탄으로 무력화 시켰고 만잠여의를 흑의 속에 입어 어지간한 병기에 찔려도 끄덕 하지 않았다. 거기다 감여철가로부터 사들인 면강오금로 만들어진 병기는 더욱 위력을 실어주었다.

전한 말기 천봉(天鳳) 사년에 신시(新市) 사람 왕광(王匡) 왕봉(王鳳)은 민중에게 추대되어 거수(渠帥)가 되어 궁민(窮民)들을 데리고 녹림산으로 들어가 도적단이 되었다. 후세에 도적단을 녹림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여기서 유래되는데 과거 왕광과 왕봉이 거느린 녹림단의 주거지였던 녹당(綠堂)에 일단의 사람들이 모였다.

녹당은 거의 허물어지고 잡초가 무성했는데 왕보의 거처였던 천방(天房)만이 겨우 남아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천장에 거미줄과 박쥐들이 가득 달라붙은 가운데 그 아래에서 이십여 명의 인물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바로 무림맹의 맹주인 남궁천을 비롯해 구파일방과 사대세가 및 몇몇 명문가의 수뇌들이었다.

무림맹이 흑도에 의해 불타 사라진 이후 무림맹의 기세는 급전직하했다. 특히 무사들의 사기에 미치는 영향은 컸다. 그래서 지휘부가 뒤에 설것이 아니라 전선의 선두에서 직접 적과 맞아 싸우는 것만이 떨어진 무사들의 사기를 올릴 수 있다는 남궁천의 판단에 의해 각파 장문인들이 모두 이렇게 나온 것이다.

하지만 한번 밀리자 반전의 기회는 좀체 오지 않았고 파괴적인 무기로 무장한 흑도무사들에게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밀렸고 차이는 현저하게 벌어졌다.

남궁천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흑도의 위력적인 장비도 밀리는 한 원인이지만 결정적인 패퇴의 이유는 수뇌들의 소극적인 부대 지휘라고 꼬집었다. 무통령에 의해 어쩔수 없이 진두지휘를 하고 있지만 일부 자신에게 불만을 갖고 있는 무림맹 소속의 수뇌들이 적극적으로 적과 맞부딪히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조금만 위태롭다 싶으면 철수를 감행했고 혹시나 제자들에게 피해가 생길까봐 그들의 신변 안위 치중한 나머지 전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직접 이렇게 예정에 없던 회의를 전선 인근에서 개최한 것이다.

“다시 말하겠소. 이유 없이 후퇴를 하거나 피해가 적은 문파는 용서하지 않겠소이다. 본보기 차원에서라도 그 수뇌의 목을 내가 직접 베겠소이다.”

모든 사람들이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맹주.”

“말하시오. 용두신개.”

개방방주 용두신개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너무 참수 규정이 애매하오이다.”

“뭐가 애매하다는 것이오.”

“맹주의 말은 피해가 적은 문파는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뜻 아니오?”

남궁천이 멈칫 했다.

용두신개의 지적은 날카로웠고 빈틈이 없었다.

“포위가 되어서도 적은 피해를 입을 수가 있고 유리한 조건에서도 많은 피해를 당할 수 있는 것이 전쟁이오. 그런데 단지 피해의 규모 하나만을 놓고서 책임을 구분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전략이고 지휘책이오. 몇 일 전 생사곡 싸움에서 본방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목와북천의 금령단을 몰살시켰소. 그에 반해 곤륜은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지만 천대에 밀렸소. 그럼 곤륜 장문인의 목은 베어져야 하는 것이오?”

“맞소이다.”

“맹주가 내 세원 원칙에는 약간의 무리가 따르오이다.”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던졌다.

콰앙!

남궁천이 탁자를 주먹으로 쳤다.

“난 이 전쟁의 모든 실권을 쥐고 있는 무림맹주이오. 내 전략과 생각은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오.”

남궁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시 말하겠소. 후퇴와 공격이 적절치 않았다고 판단되면 그 문파가 누구든 수장의 목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오. 내 말은 절대 변하지 않소. 그만 들 각자 문파가 주둔한 곳으로 가보시오.”

서슬퍼런 남궁천의 기세에 아무도 대꾸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파의 장문인들이 돌덩이처럼 차갑게 굳은 얼굴로 실내를 빠져 나올 때 한 사내가 복도를 달려오고 있었다. 무사의 얼굴은 분칠을 한 듯 순 백색이었다.

쿵쾅쿵쾅!

가뜩이나 오래되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천방의 건물이 무사의 체중 실린 발자국소리에 흔들거렸다.

“가만, 저자는 남궁세가의 총관 백면염라(白面閻羅) 시벌(柴罰) 아니오?”

“맞소이다. 얼굴이 하얀 것이 틀림없는 백면염라외다.”

복도를 빠져나가던 사람들의 발길이 일제히 멎었다. 모두가 고개를 돌려 시벌이 들어간 회의장을 쳐다보았다.

“뭣이? 그게 정말이냐?”

안으로부터 남궁천의 커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두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섰다.

잠시 침묵이 찾아왔고 남궁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궁천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좀체 표정변화를 보이지 않는 남궁천이다. 회의에 참석했던 수장들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느꼈다.

“우공선사는 어디 계시오?”

남궁천이 눈을 두리번 거렸다.

맨 끝에 서 있던 우공선사가 앞으로 다가왔다.

“부르셨소이까 맹주.”

“급히 사가에를 좀 다녀와야겠으니 장문인께서 모든 작전을 진두 지휘하시오.”

“아미타불! 맹주 사가에 무슨 일이 생겼기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궁천은 중인들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남궁천이 사라지고 모두들 의혹의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혹시 짚이거나 아는 것 있느냐고 서로에게 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속 시원한 대답을 해준 사람은 없었다.

“태산이 무너져도 기침 한 번 하지 않을 사람인데 하얗게 굳어진 것을 보면 큰일이 생긴 것 만큼은 틀림없소.”

“그러니까 그 큰 일이 뭐냐는 것이오?”

“낸들 아오. 어서 갑시다. 자칫하다간 모가지 잘리게 생겼으니.”

장문인들이 복도를 빠져나갔다.

“어리석기 그지 없는 인간들, 찬성 할 것을 해야지 무통령을 내려 뭘 어쩌겠다는 거야.”

개방의 방주 용두신개가 서둘러 떠나는 각파의 장문인들을 보며 투덜거렸다.

“무통령을 잘못 내리면 가혹한 독선과 아집, 피바람이 불어 닥친다는 것을 몰라서 그랬단 말인가. 쯧쯧!”

용두신개도 떠났다.

이제 녹당에는 소림장문인 우공선사와 시자승 명철 두 사람만 남았다.

바람에 잡초들이 흐느적거리며 서로의 몸을 비볐다. 우공선사는 꼼짝도 않고 서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입으로는 연신 아미타불을 외우고 있었다.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무공선사를 보며 명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만 가시지요.”

우공선사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석상처럼 눈을 감고 있던 우공선사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소림의 제자들이 집결해 있는 양양(亮陽)을 향해 걸었다. 신법을 전력으로 펼쳐 달려도 두 세시진 걸릴 거리인데 천천히 걸어가자 명철이 염려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서두르셔야 하옵니다.”

“명철아.”

우공선사가 나직히 불렀다.

명철이 뒤를 따르며 대답했다.

“네 방장스님.”

“네가 보기에는 어떠냐?”

“네에?”

명철의 눈이 커졌다.

우공선사가 걸으며 말했다.

“네가 보기에 앞으로 강호는 어떻게 변할것 같으냐? 너도 느낀 것이 있을 것 아니냐?”

“무지한 제자가 어찌 알겠사옵니까?”

“아니다. 괜찮으니 그냥 해보거라.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라.”

명철의 눈이 빛났다.

그렇잖아도 나름대로 생각해본 것이 있었다.

“하오면 감히 한마디 하겠사옵니다.”

“그래.”

“제자가 보기에 앞으로 강호는 전무후무한 피의 강물로 덮힐 것 같사옵니다.”

뚝!

앞서가던 우공선사의 걸음이 멈췄다.

그러자 명철이 당황하여 황급히 말했다.

“제자가 말하는 피의 강물이란 진짜로 피가 장강의 물처럼 흐른다는 것이 아니라 조금 많이 흘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공선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계속 말해 보거라.”

“언젠가 장경각에서 무림천록이란은 고서를 본적이 있사옵니다. 그런데 한 사람에게 너무 과도한 힘이 집중되면 그 힘은 절대 올바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말이었습니다.”

“좋은 말이구나.”

“지금 강호가 그렇지 않사온지요?”

“헛헛헛!”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우공선사가 몸을 날렸다. 그 뒤를 따라 명철 또한 몸을 날려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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