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46화 (46/71)

제1장 황산

황산은 아름답다. 온갖 모양을 한 기암괴석과 바닷물보다 짙푸른 송림과 안개가 자욱한 황산은 가히 신선의 산이라고 하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황산은 시끄러웠다.

한 노인이 웃통을 벗어 젖힌 채 부채를 들고 무예를 수련하고 있었다. 부채에서 나오는 바람도 위력적이지만 내 지르는 기합은 황산을 뒤흔들 만큼 컸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비쩍 마른 상체를 드러내놓고 부채를 흔드는 노인은 족히 팔십이 넘어보였다.

“아그그가자자!”

기합도 괴상했다. 가늘면서도 무척 길었다.

쉬익!

쉭!

오른손에 쥐어진 부채가 뻗어나갔고 거센 바람이 불며 맞은편 바위를 박살냈다. 그것은 단순한 부채 바람이 아니라 가공할 폭풍이었고 그 앞에서는 거대한 소나무도 바위도 제 모습을 금방 잃어버렸다.

“아리아리도옹!”

노인은 또다시 요란한 기합을 흘리며 부채를 쭉 뻗었다.

두둥!

이번에는 바람이 없었다. 그 대신 부채속에서 또 한개의 부채가 뻗어나와 이십여장 밖에 있는 소나무를 찍었다.

빠악!

강한 충격이 가해졌는데도 소나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소나무가 쓰러졌는데 부러진 표면이 칼로 자른 듯 매끈했다.

스슥!

쓰러진 소나무 곁으로 다가가 매끄러운 표면을 어루만지는 노인의 얼굴에 제법 흡족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 자식 오기만 해봐라. 이렇게 모가지를 확 잘라버리겠다.”

그러면서 부채를 쥔 손으로 모가지 베는 시늉을 해보였다.

“와라 얼마든지.”

누군가를 향해 큰 소리를 지른 후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마든지 오라고 하지 않느냐? 난 네놈이 아까부터 그곳에 숨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느니라. 썩 나오거라.”

그러자 노인이 소리쳤던 방향으로부터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몸에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고 어슬렁거리며 나왔는데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흐흐흐! 숨어서 봤겠지만 난 네놈을 하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장부들끼리 긴말은 필요 없고 곧바로 시작하자꾸나.”

촥!

그러면서 부채를 힘있게 펼쳤다.

“와라. 한 방에 날려 보내주마.”

노인은 기마자세에서 오른손을 앞으로 겨누고 왼손을 허리에 얹었다.

“난 네놈 손에 앞서간 늙은이들과는 다르다. 너 따위 애송이쯤은 하나도 두렵지 않다.”

노인의 날카로운 기세와 달리 흑의사내는 피식 웃더니 소나무 숲 언덕배기에 있는 모옥으로 가며 말했다.

“물 한 잔 얻어 먹읍시다.”

온 힘을 다해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상대는 신경은 커녕 물 한 잔 얻어먹자는 말로 한껏 끌어 올린 노인을 꺾어버렸다. 하지만 노인은 다시 온 몸에 힘을 일으켰다. 자신을 방심토록 유도한 후 기습을 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건방진 놈, 빨리 먹고 오너라.”

노인은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모옥으로 물을 마시러 간 흑의사내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한참동안 공격자세를 취하고 있던 노인의 눈썹이 모아졌다.

오랫동안 기수식을 취했더니 다리가 아프고 떨려왔다. 그러나 자세를 풀 때를 노리기 위해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또다시 의심하며

이를 악물고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바로 잡았다.

그러나 흑의사내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비겁하게 꼼수를 쓰려는 것이냐? 당당하게 나와라.”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노인은 하는 수 없이 기수식을 풀었지만 주위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예리한 눈으로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모옥을 향해 걸어갔다.

멈칫!

어딘가 숨어서 공격을 준비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흑의 사내는 놀랍게도 자신의 모옥 마루에 걸터앉아 안개에 휩싸인 천도봉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루를 쉬지 않고 달려왔더니 몹시 출출 하구려. 아침 아직 안 했을텐데 한끼만 얻어먹읍시다.”

노인이 동천몽의 위 아래를 훑어보더니 눈빛이 변했다.

긴장이 풀려서 인지 자세히 보니 자신이 기다리던 사내와는 전혀 틀렸다. 살인자에게는 살인자 특유의 기세가 있는데 마루에 앉아 있는 동천몽에게는 놀랍게도 은은한 자비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노인은 오랜 강호 경험상 방심하지 않았다. 적은 상상을 초월한 모습으로 접근해 온다.

“내가 왜 네놈에게 아침을 제공해야 한단 말이냐? 잔머리 그만 굴리고 어서 날 죽이러 왔으면 공격 하거라.”

“누가 노인장을 죽이러 왔단 말이오?”

“흐흐! 내가 어린 아인 줄 아느냐? 다 알고 있느니라. 주접 그만 떨고 덤벼라.”

동천몽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왼손으로 배를 만지작 거렸다.

“농담 아니오. 정말로 배가 고파서 그러니 한끼만 부탁드리겠소. 반찬 같은 것은 신경쓸 필요 없소.”

“미친놈아 당연하지. 내가 왜 네놈의 반찬을 신경쓴단 말이냐?”

“노인장께서 뭘 단단히 착각하고 계시오. 난 노인장을 죽이러 온 남궁관이 아니라 대법왕이오.”

멈칫!

대법왕이라는 말에 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더니 고개를 쳐들고 큰 소리로 웃었다.

“우홧홧뢋! 이 자식 이제보니 정말 웃기는구나. 네까짓 놈이 대법왕이라고 그 말을 노부더러 믿으란 말이냐?”

“정말 듣자듣자 하니까 이 늙은이가.”

느닷없이 욕설이 터지며 일목이 허공에서 뚝 떨어졌다.

일목이 나타나자 노인은 화들짝 놀랐다. 허공에 숨어 있었는데도 전혀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노인의 표정이 변했다. 자신의 감각이라면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고 해도 금방 감지한다. 하지만 사내는 분명 자신의 모옥 지붕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바람일지라도 그런 거리면 잡힌다.

한 순간 노인의 머리속으로 한 문파의 비전절기가 떠올랐다. 그 문파의 비전이라면 자신의 감각을 충분히 속일 수 있었다.

“너 배교에서 왔구나.”

“당신이 아무리 연장자라지만 한 번만 더 대법왕님께 불손하게 대하면 가만 있지 않겠소?”

일목의 눈에서 차가운 살기가 뻗어나왔다.

노인이 흠칫 하며 다시 동천몽을 다시 살폈다. 선입견 때문인가. 아까와는 전혀 딴판으로 보였다.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완전한 부처를 떠올리게 했다.

‘대법왕은 몰라도 귀인이다’

“저…정말로?”

정말로 대법왕이냐고 물으면 속아 넘어간 것처럼 보일수 있기 때문에 뒷말은 고의로 생략했다.

동천몽이 여전히 아래 배를 만지며 말했다.

“밥부터 먹읍시다. 내 눈에는 오직 밥 밖에 보이지 않소이다.”

동천몽을 또 한번 쳐다보던 추풍살선 위청청은 이내 결심을 굳힌 듯 팔소매를 걷어 부쳤다.

“어쨌든 내 집에 온 손님이라면 밥 한끼 대접 못하겠느냐?”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 쌀을 씻고 솥에 밥을 앉혔다. 밥이 뜸 들 동안 위청청은 몇 가지 나물을 무쳤고 귀한 손님이 올때만 꺼내 놓는 궐채(蕨菜)나물도 내놨다.

밥상을 내놓자마자 순식간에 한 공기를 비우더니 동천몽이 그릇을 내밀었다. 위청청은 아무말도 않고 다시 부엌으로가 밥을 가득 담아 주었는데 또다시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고 또 그릇을 내밀었다.

위청청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집에 있는 공기는 일반 민가에서 사용하는 공기보다 세배는 크다. 그 이유는 먹는 음식 그릇은 자고로 커야 푸짐하고 복이 든다는 평소 지론 때문에 특별히 유명한 자기(磁器)집에서 맞춘 것들이다.

“고작 하루 굶었다면서 그렇게 배가 고프냐?”

노인이 눈을 흘겼다.

순간 일목이 밥먹던 숟가락을 상위로 집어 던졌다. 위청청이 놀라 쳐다보니 일목이 인상을 썼다.

“정말 이럴거요. 말투 고치라니까. 대법왕님이시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겠소.”

일목이 너무 노려보았으므로 위청청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알겠어. 말투 고치면 될 것 아니냐. 한데 말투 좀 고쳐주십시오 하면 될 일을 그렇게 밥숟가락을 던지면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지랄이냐. 나이도 어린놈이.”

“조심하시오.”

일목이 던진 밥숟가락을 주워 다시 밥을 퍼 먹기 시작했고 위청청은 세 번째 공기밥을 수북히 담아 주었다.

여전히 동천몽은 왕성하게 밥그릇을 비웠고 연신 궐채 나물이 입에 착착 달라붙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너…진짜 대법왕이시오?”

너 대법왕 맞냐고 말하려다 일목을 살피며 잽싸게 말투를 고쳤다.

“꺼억!”

동천몽이 세 번째 공기까지 싹싹 비우더니 만족스러운 듯 길게 트림을 했다. 위청청이 냉수까지 떠다 바치자 시원하게 마신 후 또다시 트림을 하고 나서 주위를 살폈다.

바늘만한 막대기를 툭 부러뜨려 날카로운 끝으로 이를 쑤셨다.

쩝쩝!

이빨 사이에 나물이 낀 듯 연신 쩝쩝 소리를 냈다.

“아니 나이가 몇인데 벌써부터 이빨에 이물질이 끼는 것이오. 쯧쯧! 이빨 좋은 건 오복중 하나라고 했거늘, 이 늙은이가 이빨 좀 볼 줄 아는데 어디 봅시다.”

“그게 정말이오. 그렇잖아도 이빨과 이빨 간격이 너무 넓어 음식을 먹을 때마다 곤욕이었는데…아!”

동천몽이 입을 쩌억 벌렸다.

밥상을 가운데 두고 위청청이 허리를 숙여 동천몽의 입안을 살폈고 그 와중에도 일목은 열심히 짭짭 거리며 밥을 먹었다.

“쯧쯧! 아이구야. 완전히 갔네. 이빨 안쪽에 검게 달라 붙은게 뭐지.”

젓가락으로 슥슥 긁어 보더니 놀란 눈으로 동천몽을 보았다.

“당신 대법왕 맞소?”

탁!

일목이 숟가락으로 상을 치며 노려보았다.

“이 늙은이가 정말.”

“대법왕이라면서 아편을 한 것이오. 이건 아편을 태울 때 묻어나오는 진이오.”

동천몽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고 일목 또한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편은 정신병자나 못된 부랑아들이나 하는 나쁜 것인데 동천몽의 이빨에 아편 진이 묻어 있다는 말에 입을 떠억 벌렸다.

“이 늙은이가 알기에 불가에서는 고기를 먹는 것보다 아편을 하는 것을 더 나쁜 행위로 본다던데?”

하지만 동천몽의 시선은 일목에게 멎어 있었다.

“허험! 일목아 일단 그런 눈으로 날 볼 것이 아니라.”

“해명해보십시오. 만약 어영부영 대답하시거나 제대로 해명을 못하시면 가만 있지 않겠사옵니다.”

“너 혹시 과거의 흔적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느냐? 주로 기녀들이 혼인을 할 때 과거에 기녀노릇을 했던 흔적을 지우려고 노력하는 것 말이다. 모든 인간들에게는 과거라는 것이 있다. 그 과거가 아름답고 건실하면 괜찮지만 조금은 부끄럽고 당당하지 못하면 함부로 꺼내놓고 싶지 않지. 그래서 자꾸 숨기려 하는 것 아니겠느냐.”

일목의 눈이 커졌다.

“하오시면 대법왕님께서도 과거가 있단 말입니까?”

“당연히 있지. 아름답지 못한 과거이기 때문에 꺼내고 싶지 않지만 너도 어느 정도 알고 있지 않느냐? 내가 포달랍궁에 오기 전에 소주에서 무엇하면서 놀았다고 했더냐?”

일목이 눈을 깜빡거렸다.

“소…소주의 개고기.”

“어험! 그 시절 호기심에서 몇 번 한 것이 전부이니라. 대법왕이 된 이후에는 너도 알다시피 일체 그런 것 모르고 살고 있느니라. 네가 그림자처럼 곁에 쭈욱 있었으니 알것 아니냐?”

그제서야 일목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위청청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무슨 말이시오? 소주의 개고기라뇨?”

“그런 것이 있으니 신경끄시고 어서 살펴주시오.”

“의원은 완전한 치료를 위해 환자의 모든 사생활과 식생활을 알아야 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본인이 원하면 듣지 않을 때도 있지요. 이것을 벗겨내면 떨어진 이가 붙소이다.”

“아편 찌꺼기를 때어내면 붙는단 말이오?”

“아편찌꺼기가 이빨 사이에 끼다보니 틈이 벌어진 것이오.”

“치료할 수 있겠소?”

“난 자신 없으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소. 일단 밥부터 먹고 합시다.”

위청청은 남은 밥을 후다닥 먹었다.

일목도 배가 부른 듯 마당가에 어슬렁거렸다.

“일목아.”

“예. 대법왕님.”

“출가한 승려에게 공짜는 없느니라. 얻어 먹었으니 설거지는 네가 해야할 것 아니냐?”

“알겠사옵니다. 소승에게 맞기시오. 노인장.”

일목이 밥상을 가로채 부엌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대법왕 맞소이까?”

노인이 다시 물었다.

동천몽이 웃으며 품에서 백상불을 꺼내 보여주었다.

“허억!”

위청청의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오오! 백상불이라니, 이 늙은이 죽기 전 소원이 대법왕님 존안을 한 번 뵙는 것이었는데 이런 꿈같은 일이.”

위청청이 토방에 곧바로 무릎을 꿇고 마루에 앉아 있는 동천몽에게 절을 올렸다.

워낙 동작이 빨라 말릴 틈도 없었다.

“소인 위청청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신 대법왕님께 예를 올리옵나이다.”

“왜 이러시오. 그만 일어나시오.”

동천몽이 위청청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위청청은 황공하고 감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였고 동천몽과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를 못했다.

“이러지 마시고 자 앉읍시다.”

상대는 강호육군 중 한 사람이었다. 현 무림에서 가장 배분이 높다고 할 수 있고 무공 또한 그 깊이를 측량할 길이 없을 만큼 극강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꿈은 아니군요. 오오! 이 늙은이 소원이 이뤄지다니 정녕 하늘이 무심치 않구려. 사실 젊어서 대법왕님을 뵙고자 몇 번 포달랍궁을 갔지만 하필 폐관 중이어서 발걸음을 돌려야 했지요.”

위청청은 어린아이처럼 좋아 어쩔줄 몰라했다.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방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온갖 먹을 것이란 먹을것을 죄다 꺼내 놓았다. 꺼내 놓은 것들이라는게 대부분 산열매 말린 것들이었고 맛도 척 썼다. 동천몽은 먹고 싶지 않았지만 성의를 무시 할 수가 없었고 몸에 좋다는 말에 억지로 서 너 개 삼켰다.

잠시 후 위청청은 정말로 동천몽의 이 치료에 들어갔다. 가느다란 줄로 이빨 사이와 안쪽에 낀 아편 찌꺼기를 갉아 냈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소름이 끼쳤지만 절간 음식이라는게 나물이 대부분이고 식사를 한 후 이빨 쑤시는 것이 일과가 되버린 동천몽에게는 희소식이었으므로 꾹 참고 있었다.

“됐사옵니다.”

위청청이 동경을 가져다 주었고 살폈는데 놀랍게도 아편 찌꺼기가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고 이빨 간격이 붙은 것 같았다.

“몇 일만 지나면 이가 완전히 붙을 것이옵니다.”

동경으로 이빨을 살피는 동천몽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위청청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온데 어인일로 이 늙은이가 사는 이런 산골까지 오셨는지요?”

가장 궁금했던 일이었지만 대법왕이라는 사실에 질문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최소한 불교를 숭배하는 사람에게 대법왕은 살아 있는 부처였다.

대법왕의 목소리만 들어도 환희였고 먼발치에서라도 그를 보면 행복했으며 만사가 형통해 질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절대 권위의 대상이며 존엄의 상징이기에 함부로 말을 붙인다는 것 또한 결례이기 때문이었다.

“별것 아니오. 사람 한놈 잡으러 왔소.”

“사람을 잡으러 오다뇨?”

“남궁관.”

“남궁관이라면 남궁천 맹주의 아들 아니옵니까?”

“노산도 죽었더구려. 놈에게.”

“정말입니까?”

위청청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 노산의 집에서 차 한 잔 하고 왔었다. 불과 몇 일 되지도 않았는데 가장 절친했던 벗이 숨을 거두었다는 말에 안색이 굳어졌다.

“남궁천의 기세가 욱일승천이오. 그의 기세를 잠시 누그러뜨려 놓을 필요가 있소. 이대로 가면 강호는 남궁세가의 손에 완전히 장악 될 것이오.”

“그러하옵니다. 그래서 우리 강호육군이 무통령을 반대했던 것인데 지금 철저히 앙갚음을 당하고 있지요.”

“그런데 노산과 싸웠던 장소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소.”

동천몽은 구덩이의 변화에 대해 말해주었다.

위청청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실 이 늙은이도 남궁세가의 검에 뭔가 흑막이 있다고 생각 하고 있었사옵니다.”

“흑막이라뇨?”

“남궁세가의 검은 이 늙은이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암향류는 물론 뛰어난 검법입니다. 빠르고 무겁지요. 하지만 그렇게 파괴적인 검법은 아닙니다. 검에서 아주 극사한 기세가 뿜어 나오는 것이 마도의 검법이 섞이지 않았나 싶사옵니다.”

“천마검법을 말하는 것이오?”

위청청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대법왕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옵니까? 이 늙은이도 남궁세가에서 어쩌면 천마검법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사옵니다.”

동천몽이 위청청을 보았다.

어떻게 정도 명문 중 한 곳에서 몰락한 마교의 검법을 갖고 있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마교는 일백 년 전 망했다고 들었소?”

“망했지요. 하지만 마교 교주의 시체를 발견했다는 말은 없었사옵니다.”

“설마 남궁천이 마교교주라도 된단 말이오?”

위청청이 웃었다.

“너무 희박한 가능성이지요.”

이런 저런 얘기를 계속 나누었지만 어떤 해답도 나오지 않았다. 단지 남궁세가의 검법이 천마검법이며 흐름이 흡사하다는 것에서는 두 사람 모두 일치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

황산삼해라고 하여 운해(雲海) 송해(松海) 석해(石海)는 말 그대로 천하절경이었는데 모용산은 지금 송해에 취해 있었다.

코 끝을 파고드는 솔향과 용의 비듬을 닮은 거송들의 껍질에서 대자연의 위엄이 물씬 풍겨나왔다. 연신 감탄과 기쁨을 주체 못하는 모용산을 쳐다보는 남궁관의 눈이 빛났다.

그녀의 목소리 표정 몸짓 하나하나에는 사내를 유혹하는 무서운 마력이 있었다. 함께 동행하는 동안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그녀의 몸을 탐했지만 욕망은 끝없이 솟아났다.

사실 남궁관은 그녀가 소녀표향대법을 익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소녀표향대법 또한 금지마공이며 사내들을 유혹하기 위한 표향문이라는 전설의 사문(邪門)의 절기이었다. 표향문은 소녀표향대법으로 무장하여 천하의 영웅호걸들은 치마폭에 가두었고 무림을 색향의 폭풍속으로 몰아넣었다. 결국 뜻있는 지사들의 협공에 몰락했지만 그녀들이 끼친 폐해는 컸다.

멈칫!

모용산의 눈이 빛났다. 자신을 쳐다보는 남궁관의 시선속에 강렬한 욕망이 솟구치고 있음을 간파한 것이었다.

스르르!

단지 앞섶을 가볍게 매만졌을 뿐인데 그녀의 겉옷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걸친 것이라고는 하체의 조그만 천 뿐이었으며 맨가슴이 출렁대었다.

이른 아침 소나무 바다에서 두 남녀의 뜨거운 신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주위 산새들도 뜨거운 열기에 감전 되었는지 모두가 숨을 죽이며 쳐다보았다. 쾌감에 들뜬 두 사람의 신음은 갈수록 커졌고 끝내는 비명으로 이어졌다.

거센 폭발이 있었고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끌어 안은채 떨어질 줄 몰랐다.

“괜찮겠어요?”

남궁관의 배위에 오른 모용산이 물었다.

남궁관이 올려다보며 말했다.

“뭐가 말이오?”

“강력한 적을 앞두고 이렇게 힘을 빼서 지장없겠냐구요.”

“걱정되오?”

“호호호! 농담이었어요.”

남궁관이 모용산의 입에 입술을 맞추고 가만 밀어냈다.

모용산이 앙탈했다.

“좀더 있고 싶어요.”

그러면서 그녀의 입술이 남궁관의 입술을 덮쳤다.

“웁!”

두 사람의 입술은 다시 뜨겁게 부딪혔다. 벌려진 남궁관의 입속으로 뜨겁게 달구어진 모용산의 혀가 거침없이 들어가 입안을 휘저었다. 그것은 남궁관의 입안 구석구석을 자극했고 그에게 다시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을 불러 일으켰다.

“아아!”

모용산이 고개를 쳐들며 입을 벌렸다. 하체에 묵직하고도 강력한 기운이 파고들었다. 두 남녀는 또다시 풀밭을 나뒹굴었고 거친 숨소리가 소나무 숲을 울렸다.

“아아아!”

모용산이 쾌감에 어깨를 떨었고 발가락이 부르르 떨며 휘어졌다. 한 참동안 경직 되었던 모용산의 발가락이 서서히 풀리고 두 사람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움과 기쁨이 넘쳐 흘렀다.

“그만 일어납시다.”

“세 호흡만.”

그녀는 남궁관의 목을 끌어안고 가만 있었다. 입가에는 의미모를 미소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어쨌든 남궁관은 이제 완전히 자신의 치마폭에 들어왔다.

“쪽!”

남궁관의 볼에 입을 맞추고 나서 그녀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두 사람이 의관을 갖추고 다시 산길을 올라갔다.

“하하하!”

“호호호!”

두 사람은 끝없이 웃으며 이따금 볼에 입을 맞추며 산새들이 시샘할 만큼 행복해 했다.

조그만 등성이를 넘어서자 저 만치 한 채의 모옥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자 지금까지 색욕으로 가득차 있던 남궁관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저곳인가요?”

“그렇소.”

“어서가요.”

모용산이 앞장서 걸었고 남궁관이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모옥 앞에 울타리 앞에 이르러 걸음을 세웠다. 남궁관은 본능적으로 집 주위를 살폈지만 어디에서도 의심할 만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강호육군이라는 명성이 있기 때문에 음모나 함정 따위는 파놓지 않았겠지만 사람 속은 모른다. 더구나 자신의 손에 하나 둘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올 줄 알고 어떤 대책을 세워 놓지 않았으리란 법도 없었다.

별 이상 없음을 간파한 두 사람은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뚝!

마당 안으로 들어선 남궁관의 눈이 한곳에 멎었다.

토방 위 댓돌에 두 개의 신발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두 개의 신발 모두 무척 낡았고 초라해 보였지만 방안에 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누구지?’

남궁관의 미간이 좁혀졌다.

강호육군은 고수들이다. 하지만 워낙 강했기 때문에 독선적이었고 그래서 인간관계가 그다지 원활하지 못했다.

자신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강호육군의 친구는 강호육군 뿐이었다.

“한 수만 물러 주십시오. 딱 한 수만.”

방안으로부터 노쇠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주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 시작할 때 뭐라고 하셨소. 일수불퇴라고 하지 않았소. 만약 약속을 어길 때는 이부견자라고 큰 소리 쳤소이다.”

“압니다. 이 늙은이 아비 두 사람이고 갭니다. 그러니 제발 한 수만 물러 주십시오.”

“어찌 한 수를 물림받기 위해 아버지를 과감히 개라고 표현한단 말이오? 내 아버지는 아니지만 조금 심한 것 아니오?”

“한 수 물려 받기 위해 잠시 아버지가 개 좀 되는게 무슨 흠이겠사옵니까? 저승에 계시는 이 늙은이의 아버지께서도 이해하실 것입니다.”

“정히 그렇다면 한 수 물러 드리지요.”

따악!

한수 물려주는 듯 소리가 들려왔고 노인이 말했다.

“이 늙은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과감히 물러주어 진실로 감사하옵나이다.”

“이젠 진짜로 물러 주지 않을 것이오.”

“알겠사옵니다. 이제야 말로 한 번만 더 물러 달라고 하면 이 늙은이는 사람이 아니라 붕어입니다.”

모용산이 남궁관을 쳐다보았다.

“바둑을 두나봐요?”

“흐흐흐! 죽음을 목전에 두고 바둑이라, 실컷 두라지. 생애 마지막 바둑이 될 테니까?”

남궁관이 야릇하게 웃었다.

“죽음이 방문했다는 것도 모르고 세월 좋게 바둑이라니 불쌍한 늙은이에요.”

남궁관은 조용히 집안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강호육군의 청렴성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누추하다 싶을 만큼 초라했다. 모두가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지어 끼니를 해결했다. 강호에서 그 정도의 위치면 충분히 편히 먹고 살수 있을텐데도 그들은 사서 고생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사고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융통성이라고는 없는 한심한 늙은이들일 뿐이었다.

“죄…죄송하옵니다. 진짜로 한 수만 더 물러 주시지요.”

“이거 너무 하잖소.”

“삼세 판이라고 이번이 마지막이옵니다.”

“조금 전 뭐라고 했소. 한 번만 더 물러 달라고 하면 붕어라고 했잖소.”

“그럼 앞으로 이 늙은이를 붕어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리고 새롭게 한수를 양보해 주심이.”

“허어! 참.”

“진짜 진짜 마지막이옵니다. 이번에 또 물러달라고 하면 그때는 정말로 난 사람이 아니라 토끼입니다.”

“까짓것 물러주는 김에 확실히 물러 드리지요. 자 거두었으니 어서 두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순간 모용산과 남궁관의 눈빛이 부딪혔다.

성은이 망극하다는 말은 신하들이 임금의 따뜻한 배려에 감은하며 사용하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설마 저 안에 황제가 와 있단 말인가. 두 사람은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아 이마를 찡그렸다.

한 사람은 위청청일 것이었다. 그렇다면 손님이 황제라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신발을 보건데 말되 되지 않는 일이고 황제가 할 일이 없어 이런 곳을 찾아온단 말인가. 더구나 근처에는 시위 무사 한명 보이지 않았다.

“죽을 때가 되면 미친다더니 그 짝인가요?”

남궁관은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딱!

바둑 소리가 유난히 컸다.

한 순간 방안으로부터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필시 조금 전 둔 수가 완전히 쐐기를 박은 것 같았다.

“뭐하는 거요? 어서 두시오.”

하지만 상대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남궁관 또한 바둑을 좋아 하기 때문에 그림이 그려졌다. 필시 살아 갈수 있는 묘수를 찾느라 부지런히 눈알을 굴릴 것이다. 그러나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판은 끝난 듯 했다.

“졌사옵니다. 패배를 인정 하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는지요?”

“묻구려.”

“이 늙은이가 알기에 삼삼은 반칙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합디까?”

“지난 수십 년간 수많은 사람과 내기 오목을 두었지만 거의가 삼삼은 반칙이라고 했사옵니다.”

“어떤 개…누가 그럽디까?”

“이 늙은이와 둔 사람들 모두가 그랬사옵니다. 그래서 삼삼이 되면 다른 곳에 두는 예의를 보였지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원의 오목이고 우리 서장에서는 그런 것 없소이다. 그래서 패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오.”

“아닙니다. 진 것은 진 것이니까 인정 하옵니다. 그러나 삼삼은 절대 반칙임을 말씀드립니다.”

“그 말은 죽어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다는 의미 아니오?”

“인정한다니까요?”

“그런데 눈빛이 왜 그러시오? 아주 억울함에 불타고 있지 않소?”

“이 늙은이의 눈빛은 원래 그러하오니 양해하십시오.”

“알겠소. 오랜만에 오목을 두었더니 머리가 깨지려 하는군.”

남궁관은 어이가 없었다.

바둑을 두는 줄 알았는데 결국 오목이었다.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고 좀 더 엄밀하게 따진다면 조롱을 당한 것이었다.

벌컹!

문이 열리고 동천몽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궁관을 발견하고 동천몽이 방안을 향해 말했다.

“손님이 와 있소이다.”

“손님, 어느 미친놈이 이런 산속까지 찾아왔지.”

위청청이 밖으로 나왔다. 남궁관과 모용산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리더니 물었다.

“뉘시오? 난 댁들을 모르오만, 잘못 찾아온 것 아니오?”

위청청이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영감님께서 추풍살선 위청청 대협이신가요?”

“그렇소만 낭자는 뉘시오?”

“호호호! 네놈을 죽이러온 저승사자니라.”

모용산이 깔깔거리고 웃었고 가슴 가리개를 하지 않은 젖가슴이 옷 밖으로 튀어 나올 듯 출렁거렸다.

위청청이 인상을 썼다.

“어린 계집이 버릇이 없구나. 감히 어른 앞에서 농담을 하다니 정체를 밝혀라.”

남궁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남궁관이라고 하오.”

위청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그 사람이로군? 우리 강호 육군을 찾아다니며 목을 벤다는 남궁천의 아들?”

“맞소.”

“그렇잖아도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잘됐군. 도대체 왜 우릴 죽이려고 하는가? 사람을 죽일 때는 그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모용산이 또 다시 상체를 뒤흔들며 웃었다.

“호호호! 당신 아주 바보군요. 정말 그 이유를 몰라서 묻나요?”

“네년에게 묻지 않았다. 감히 어디서 끼어드느냐?”

위청청의 욕설에 모용산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나 이내 다시 교소를 터뜨렸다.

“늙은이 귀여워.”

“이런 쳐죽일 년을 봤나? 뭐가 어째?”

남궁관이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강호육군이라는 대고수께서 한낱 여인의 말에 시시비비를 따지려고 하시오. 왜 죽이느냐고 물었소? 늙으면 조용히 후학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물러나 앉는게 대접받는 지름길인데 당신들은 그렇지 않고 끝까지 앞길을 막고 있소.”

“그 후학이라는 사람이 혹시 자네 부친을 말하는가?”

“부인 않겠소?”

“우핫핫핫!”

위청청이 앙천광소를 흘렸다. 어찌나 웃음소리가 컸던지 주위 나무들이 바람에 휩쓸린 듯 몸서리를 쳤다.

웃음을 멈춘 위청청이 뒤춤에 꽂아 두었던 부채를 뽑아들었다.

“죽이러 왔다는 얘기 아니냐? 그래 어디 한 번 죽여보아라.”

“훗훗!”

남궁관이 자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그때 한쪽에 유유자적 하고 서 있던 동천몽이 끼어 들었다.

“영감님, 강호에 그런 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말?”

“거 뭐냐? 저어 아주 별볼일 없는 사람을 잡는데 빛나는 큰 칼을 사용하는 걸 빗대어 하는 말이 있다던데…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오! 그 얘기를 말하는 구만. 닭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쓸 수가 있느냐는 말?”

동천몽이 눈을 빛냈다.

“맞습니다. 닭은 닭이 잡아야지 소가 잡으면 덩치도 안맞고 체면도 안서고 말이 안되지요. 불공평하지도 않고.”

남궁관이 동천몽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자꾸 신경이 쓰였다. 남궁관이 가장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무공 수위였다. 자신의 안목이면 현 강호에서 누구일지라도 무공의 깊이를 정확이 읽어낼 수가 있었는데 동천몽에게서 만큼은 도무지 느껴지는 감각이 없었다.

언뜻 보면 초탈한 인물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저 그런 인물 같기도 했다.

“더구나 소생에게 오목을 져서 기분도 별로 일텐데 대신 싸워 드리면 위로가 조금은 되겠지요”

“조금만 되겠습니까? 왕창 도지요.”

동천몽이 남궁관을 보며 말했다.

“들었나? 영감님께서 내게 양보를 혼쾌히 해주시는군. 자 나와 붙어보지.”

“호호호! 이 망아지 같은 놈아. 넌 본녀가 상대해 줄 테니 일로 오너라. 넌 나와 놀아보자꾸나.”

모용산이 가소롭다는 듯 깔깔거렸다.

동천몽이 모용산을 보며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흐흐! 옛날 같았으면 통째 삼키기에 무척 좋은 계집이로군.”

유감스럽다는 듯 동천몽이 입맛을 다시며 조용히 말했다.

“뒈지기 싫으면 거기 잠자코 있거라. 한번만 더 주둥이를 나불거리면 확 뭉개버리겠다.”

모용산의 눈이 벌러덩 뒤집혔다.

무림쌍미 중 한 명인 자신에게 이토록 노골적인 모욕을 준 사내는 여지껏 없었다. 모두가 어떻게 해서라도 잘 보이기 위해 갖은 아부와 선물공세를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명문가의 핏줄로 태어나 사람을 부려보았을 뿐 고용당해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막 말에는 무척 감정 적응이 되어 있지 않았다.

“이…이 찢어 죽일 놈이 감히.”

그녀의 눈 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붉은 입술 사이로 개거품을 물며 그대로 몸을 날려왔다.

“네놈 모가지를 난도질 해주마.”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검이 뽑혀 있었고 동천몽의 머리통을 향해 힘껏 내려쳤다.

콰아아!

떨어지는 검의 위세는 우왁스러울 만큼 힘이 넘쳤다.

그런데 동천몽은 전혀 피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왼손을 뻗어 내려치는 모용산의 검을 잡아갔다.

순간적으로 멈칫 하던 모용산은 코웃음을 쳤다.

“미친놈 네놈 손이.”

탁!

네놈 손이 금강석으로나 된 줄 아는 모양이구나라고 말하려다 그녀의 입이 닫혔다. 동천몽이 자신의 검을 번개처럼 낚아 거머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게 미친놈이라고 욕을 한 사람은 네년이 처음이다. 모두가 날 보면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했고 내가 인상이라도 쓰면 전전긍긍했는데.”

잌!

그녀가 힘껏 내공을 끌어 올려 검을 잡아당겼지만 집채 만한 바위에 깔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투툭!

동천몽이 왼 손목을 꺾자 검이 그대로 부러져 나갔다.

모용산의 눈이 커졌고 동천몽이 나직하지만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의 피는 내 손이 아니다. 네년을 죽일 손은 따로 있다는 얘기지. 다시 말하는데 까불지 말고 얌전히 있거라.”

손에 쥐어진 부러진 검날을 한쪽으로 휙 던져버리고 남궁관을 돌아보았다.

남궁관의 얼굴은 납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동천몽의 무위를 전자, 즉 초탈한 사람으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고인의 존성대명을.”

동천몽이 피식 웃었다.

“존성대명?”

동천몽이 이마를 찡그렸다. 귀에 아주 낯익은 단어였지만 정확히 이것이라고 떠오른 답이 없었다.

‘존성대명! 씨발 그게 뭐였더라.’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을 때 귓가로 일목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상대의 이름을 높여 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름이 뭐냐 그거 아냐?’

‘그렇죠.’

‘개자식 그럼 이름이 뭐냐고 그냥 가볍게 물을 일이지’

동천몽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나 같은 졸부에게.”

‘틀렸사옵니다. 졸부는 아주 멍청한데 돈이 많은 놈을 말하는 것이고 지금 대법왕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자신을 낮춘 졸장부를 말하려는 것 아닙니까?’

‘허험! 이제 그만 해라’

가볍게 경고를 주고 동천몽이 말했다.

“굳이 이름이랄 것도 없지만 악착같이 알고 싶다면 가르쳐 드리지. 상천감초라고 한다. 세속의 이름은 동천몽이고.”

“도…동천몽.”

모용산이 기겁할 듯 놀랐다.

“당신이 진짜 천상각의 실종된 막내 아들 동천몽이란 말이냐?”

동천몽이 조용히 웃었다.

“한때 네년의 시동생이던 때도 있었지. 지금도 눈에 선하군.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 날 쳐다보던 그 눈구멍 말이야. 날 벌레보듯 했고 우리 아버지까지 깔아 뭉개는 말을 너는 거침 없이 뱉었지.”

“진짜 동천몽이란 말이냐?”

출러엉!

그때 갑자기 허공에서 공기가 물결처럼 파장을 일으키더니 일목이 뚝 떨어져 내렸다. 느닷없이 외눈박이의 등장에 모용산이 깜짝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는데 일목의 눈에서 분노가 솟구치고 있었다. 사실 좀 더 일찍 나타나 모용산을 혼내주려고 했지만 동천몽이 자제하라고 해서 힘들게 견디고 있었지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야 이 잡년아. 한 번만 더 대법왕님께 불손한 언행을 보일시에는 주둥이를 쫙쫙 찢어버린다.”

일목의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피어났다.

동천몽에 이어 일목에게까지 욕을 먹자 모용산의 눈이 뒤집혔다.

“이런 병신새끼가 감히 본녀를 모욕해도 유분수지.”

가뜩이나 동천몽에게 당해 울분 터뜨릴 곳을 찾지 못했는데 모용산은 잘 걸렸다는 듯 반토막 뿐인 검을 들어 일목을 찔러갔다.

“그 눈마져 없애 완전히 맹인으로 만들어주마.”

그녀의 공세는 아주 표독했다. 더구나 부러진 검이 허공을 나르자 파공음이 섬칫하게 들렸다.

치이이!

번쩍!

일목의 옆구리에 달린 검이 뽑혔다.

화악!

그 순간 남궁관의 눈이 커졌다. 그것은 검이라기보다는 한 줄기 광채였다.

자신이 나서기에는 이미 늦었다.

한편 모용산은 자신의 검이 텅 빈 허공을 벴다는 것을 직감했다. 신속히 검을 거두어 뒤로 물러났지만 다행히 후퇴가 제때에 이뤄져 아무런 상처나 위험을 당하지는 않는 것에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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