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강호육군
상관량도 떠나고 도독도 떠났다. 물론 도독에게는 상당한 선물을 안겨주었다. 도독은 선물에 고무된 듯 언제든지 문제가 생기면 연락을 취해라고 했다. 만사를 젖혀두고 가장 먼저 달려오겠다는 약속을 했다.
동천몽은 용마산가의 후원을 천천히 거닐고 있었다. 죄를 짓고 불귀도까지 들어갔다 나온 보람이 있었다.
“축하드리옵니다.”
느닷없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일목이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고 서 있었다.
“어차피 두 놈 모두 대법왕님의 사가에서 나온 돈으로 구입했잖사옵니까? 이래서 부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나 봅니다.”
흠칫!
동천몽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놀라운 진리의 말이 일목의 입에서 너무도 가볍게 흘러나왔다.
“결코 악은 정을 이길 수 없사옵니다. 그게 바로 삶의 이치이고 세상의 흐름 아니겠사옵니까?”
동천몽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금세 표정을 고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화를 내면 속 좁아 보일 뿐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지식이 얕음을 고백하는 꼴이 된다. 이럴 땐 오히려 알아들은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핫핫핫! 아주 좋은 말이구나. 그렇지. 악은 죽어도 정을 이길 수 없느니라. 역사이래로 악이 정을 이긴 적은 없었느니라.”
일목이 멈칫 했다.
‘여…역사!’
처음 듣는 말이었다.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며 그 뜻을 헤아려 봤지만 얼른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멍 한 표정을 지어서는 안된다.
“그…그렇사옵니다. 훌륭하신 말씀이옵니다.”
“일목아.”
“에 대법왕님.”
“너의 말처럼 악은 정을 못 이긴다. 하지만 무조건 이기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악에게 밟히지 않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얘기니라.”
“그렇지요.”
“악에게 밟히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그거야 정신 바짝 차리고.”
“바로 그것이다. 가장 정확한 답을 말했구나. 앞으로 정신 바짝 차리고 천지광옥과 이곳을 지켜야 한다. 남궁천과 상관량은 강호제일세인 인물들 아니냐.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니라.”
“그럴 것이옵니다. 악착같이 빼앗겠지요. 아마 지금쯤 배일목이 누군지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천룡구십구불을 천지광옥으로 보내고 궁에 전서구를 보내 백팔밀승을 불러 이곳을 보호하도록 해라.”
백팔밀승(百八密僧)은 천룡구십구불과 달리 오로지 포달랍궁 지하 연무전에서 무예수련만 하는 무승들이다. 그들의 주 임무는 포달랍궁의 진산절기를 연구하고 단점을 보완하며 장점을 확대하는 무공의 학승들인 것이다. 백팔밀승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포달랍궁에 내려오는 쉰두 가지의 절예중 약 삼십까지 이상을 터득해야 한다. 그것도 극성으로 연마를 해야하는데 그 이유는 깊이 깨닫지 못하면 무공의 흐름과 장단점을 읽어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들은 다른 문파의 무공에도 해박하다. 다른 문파의 무공과 포달랍궁 무공을 비교 평가하는 공부도 함께 하기 때문이었다.
농부는 쉬지 않고 땅을 팠다. 사방 이십 여장의 밭은 농부가 가진 유일한 재산이었다. 그래서 일 년 농사를 짜임새 있게 짓는다. 봄에는 마령서(馬鈴薯)를 심고 여름에는 대두(大豆)를 심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을에는 나복(蘿蔔)을 심어 겨우내 반찬으로 쓴다.
지금 농부가 땅을 파는 것은 나복을 심기 위해서이다. 나복은 반찬으로도 쓰이지만 한약재 효능도 갖고 있어 여러모로 쓰임새가 많았다.
퍼퍽!
농부의 괭이질은 규칙적이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고 땅을 파고드는 괭이의 깊이도 일정했다. 일반적으로 농부들이 땅을 파면 시간이 흐를수록 체력이 떨어지고 깊이가 불규칙해지고 동작도 갈수록 느려진다.
하지만 농부의 괭이질은 기계와 같았다. 깊이도 반자였고 한 번 숨을 내 쉴 때마다 괭이는 어김없이 떨어졌다.
퍽!
퍼어억!
땅을 울리는 굉음도 일률적이다. 땅을 파고드는 괭이의 깊이가 일정하다는 반증인데 더욱 놀라운 것은 오랫동안 일을 하는데도 땀방울 하나 구경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농부가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가장 확실해 말해주고 있었다.
뚝!
규칙적으로 괭이질을 하던 농부가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소맥으로 만든 모자에 가려진 얼굴이 드러났다.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했고 검버섯이 곳곳에 피어있었다. 하지만 두 눈만은 늙은 노인이라고 하기엔 믿을 수가 없을 만큼 초롱초롱했다.
노인의 고개가 향한 밭 끝으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에 펄럭이는 머리카락을 보아 일남일녀임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땅을 판 뒤에 나복을 심는다는 거죠?”
“나복을 심는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리오. 씨가 자라나 나복이 되는 것이오?”
“어멋 그래요. 난 처음부터 잎사귀 달린 나복을 심는 줄 알았거든요.”
일남일녀는 자신이 나복을 심기 위해 땅을 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남녀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노인의 인상은 찌푸려졌다. 특히 그의 두 눈은 오른쪽의 백의청년에게 멎었다.
‘좋다!’
자신도 모르게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구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사람에게 이렇게 반해보기는 처음이었다. 걸음을 보면 상대의 수준을 읽을 수 있었다. 백의청년은 그야말로 작은 태산이라 할만 했는데 두 다리만 움직일 뿐 상체는 그대로 이동해 오고 있었다. 과연 중원에 누가 있어 저토록 멋진 젊은이를 길러냈을까 잠시 생각하고 있을 때 두 남녀는 면전으로 다가왔다.
흠칫!
왼쪽의 여자를 보던 노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음! 사내의 혼을 녹일 요부로다!’
노인의 시선을 의식했음인가 여인이 허리를 가볍게 틀었다. 정색하여 쳐다보는 노인의 시선에 부끄러움을 느껴 몸을 뒤튼 것 같았는데 터질 듯 솟아나온 앞가슴이 출렁거렸다.
“으음!”
노인은 침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백의청년의 그릇을 대번에 읽어 내고 말았다. 기상은 하늘을 뒤엎을 만 했지만 요부와 동행을 하는 것을 보면 결코 정(正)에 집착하는 인물은 아닐 것이었다.
척!
백의청년이 포권의 예를 취했다.
“소생 남궁관이 운절도 노선배님께 인사 올립니다.”
노인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아무리 살펴도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가부(家夫)께서 무림맹주 되십니다.”
“남궁천.”
“그러하옵니다. 아버님께서 노선배님에 문안을 드리고 오라 말씀하셨사옵니다.”
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운절도(雲切刀) 노산(魯山), 구름을 자른다는 도객이다. 잘라도 자를 수 없는 것이 구름이지만 그의 칼은 다르다. 안개를 자르고 구름을 꺾고 빛을 토막낸다. 무림맹의 태상장로인 강호육군(江湖六君)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자네인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무엇을 알고자 던진 질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남궁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옵니다.”
어제 저녁 지기이자 강호육군 중 한 사람인 추풍살선(秋風殺扇) 위청청이 불쑥 찾아왔다. 두 사람은 올해 아흔 동갑으로 강호육군 중에서 유난히 절친했고 바둑을 좋아해 자주 수를 겨루었다.
한 참 바둑을 두던 중 위청청이 불쑥 입을 열었다. 강호육군 중 한 명인 장제(掌帝) 염우(廉宇)와 광신(光身) 독고칠(獨孤七)이 죽었다고 했다.
강호육군은 천하제일고수는 아니다. 그러나 천하제일고수에 가장 가까이 있다고 천하가 인정하고 본인들 또한 자부했다. 또한 무림맹의 태상장로들이다.
무공실력으로나 강호에서의 지위를 놓고 볼 때 감히 누구도 그들을 건드릴 수 없고 살해 할 수는 더욱 없었다.
흉수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알 수 없다고 했다. 다만 한 가지 심중에 잡히는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놀랍게도 집안에 있다고 했다. 위청청이 말하는 집안이란 무림맹을 지칭했다. 무림맹 인물이 태상장로들을 죽이고 다닌다고 했다.
그것은 충격적이었다. 물증은 없지만 위청청은 생각없이 아무 말이나 뱉어내는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다. 바둑을 끝내고 간단히 차 한 잔 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오늘 자신을 찾아온 방문객을 보면서 불현 듯 어제 왔다간 위청청의 말이 떠오른 것이다.
팟!
노산의 가늘게 좁혀진 눈이 이번에는 커졌다.
그러고 보니 한 달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당시 무림맹의 상황은 목와북천과 동천비의 대항으로 어수선했고, 그래서 무통령 얘기가 본격적으로 거론되었다.
맹주를 비롯해 상당수 장로들이 무통령을 내려야 한다고 했지만 강호육군은 강력하게 막았다. 무통령은 함부로 내려져서 안된다. 워낙 절대권력이기 때문에 한 번 내려지면 그 폐해는 상당할 것이 뻔했다. 물론 목와북천과 동천비를 제거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자칫 악용될 소지가 너무 컸다.
지금까지 무통령이 딱 한 번 내려졌는데도 엄청난 폐해를 낳았다. 무림맹주가 막대한 권한을 갖고 흑도무림의 소탕에도 힘을 썼지만 또한 자신의 반대세력을 제거하는데 무통령의 권위를 이용한 것이었다. 강호는 엄청난 피바람에 휘말렸다.
자신과 위청청 염우와 독고칠이 가장 반대를 했었다. 그런데 염우와 독고칠이 죽었고 이제 자신에게 남궁천의 칼이 겨눠진 것이었다.
노산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맹주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더니 그럴만 하군. 올해 몇 살인가?”
“서른 하나입니다.”
“좋은 나이로군. 아버지의 빛보다 훨씬 밝고 강렬하니 남궁세가의 미래가 훤히 보이는군. 헛헛헛!”
노산이 환한 웃음을 짓더니 괭이에 묻은 흙을 털었다.
남궁관이 물었다.
“칼은?”
“아무렴 어떤가? 우리 나이가 되면 손에 잡힌 것이 애병이 된다네.”
“하지만 그래도 영감 주특기가 칼이잖아요? 늙으면 노망이 든다더니 진짜 노망이 들었나봐. 공자님 같은 고수에게 어떻게 그 따위 괭이로 맞서겠다는 거지. 정말 웃겨.”
노산이 모용산을 보며 물었다.
“아이야 너는 누구냐?”
“아이라뇨? 내 나이가 몇인데”
기분 나쁘다는 듯 쏘아보자 노산이 껄껄 웃었다.
모용산이 쏘듯 말했다.
“모용산이라고 해요.”
“모용파와는 어떤 관계이냐?”
“아버님 되세요.”
“헛헛! 옛말이 하나도 틀린게 없구나.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더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씀이죠?”
“모용파가 장로가 되었다기에 고개를 갸웃 거렸는데 너 같은 자식이 있었다면 충분히 그럴수 있겠구나.”
모용산이 눈을 깜박 거렸다.
칭찬인지 조롱인지 얼른 감이 잡히지 않는다.
노산이 남궁관을 보며 말했다.
“영웅의 몰락을 보면 곁에 항상 계집이 있네. 명심하게나.”
“뭐…뭐라구요? 저 늙은이가.”
“시작하세.”
노산이 괭이를 움켜쥐었다.
허름한 마의에 소맥의 짚으로 만든 빛바랜 모자와 떨어진 가죽신은 무척 평화롭다. 들고 있는 괭이 또한 오랫동안 노산과 같이 농사를 일군 듯 반쯤 닳아 있었다.
남궁관의 아미가 가볍게 찌푸려졌다.
밭 한 가운데 서 있는 허수아비처럼 서 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공격할 틈이 보이지 않는다.
가장 먼저 광신을 죽였고 두 번째로 장제를 죽였다. 광신은 경신술의 일인자라 할 수 있고 장제는 장법의 왕이었다. 사실 강호육군이지만 무예의 벽은 조금씩 있는데 자신의 손에 죽은 두 사람이 가장 낮았다.
‘다르다!’
두 사람과는 달랐다. 그것도 미세한 차이가 아니라 현격했다. 남궁관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이정 도까지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마주보고 서 있었는데 모용산이 슬며시 옆으로 빠졌다. 고수들끼리 싸움에 잘못 휩쓸리면 날 벼락 맞기 십상이었다.
두 사람은 그냥 보고 서 있었고 바람은 그들의 옷자락을 펄럭 거렸다. 생사의 대결인데도 누구도 살기를 담지 않았고 고요한 시선이 서로를 부드럽게 살필 뿐이었다.
슥!
푹!
그때 두 사람의 발목이 점차 땅속에 묻히기 시작했다. 전신으로 끌어올린 내공이 지면을 파헤치며 잠기는 것이다. 이런 상태로 대치만 하고 있다면 어쩌면 두 사람은 허리까지 땅에 파묻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른 두 사람을 죽일 때도 곁에 있었지만 이렇게 오래 끌지는 않았다. 모용산은 노산의 무위가 앞서 죽은 사람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나며 남궁관이 무척 긴장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문득 모용산의 눈이 좌우로 굴러졌다.
그녀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뭔가 음모를 꾸밀 때 나타나는 특유의 버릇이었다.
“호호호!”
느닷없이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남궁관의 몸이 떠올랐고 검이 뽑혔다
싸악!
까캉!
노산은 그 자리에서 괭이를 들어 막았다. 그런데 강력한 힘이 실린 검을 막게 되자 두 다리가 땅속으로 말뚝처럼 더 깊이 박혔다. 내공의 기파에 의해 빠져드는 몸 상태와 어떤 힘에 눌려 묻히는 것은 다르다.
끌어올린 내공의 기파에 의해 두 다리가 묻히면 뽑혀 나올 때 그다지 방해나 지장을 받지 않지만 강제적 힘에 의해 파묻히면 강력한 방해를 받는다.
사실 모용산의 느닷없는 웃음은 팽팽한 대치 속에 있던 두 사람의 기세를 흔들었고 특히 노산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바람에 기가 흔들렸고 그 틈을 노리고 남궁관이 기습을 가한 것이다.
남궁관은 이미 앞서 모용산의 그런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았다.
고수들끼리의 싸움에서 조그만 주위 변화는 어느 한쪽에는 치명적으로 작용하는데 지금 노산이 그러했다. 남궁관은 빠져나올 틈을 주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카카카칵!
괭이와 검이 충돌하며 사방으로 불꽃이 휘날렸고 노산의 몸은 어느덧 낭심 근처까지 땅속으로 묻혔다. 피할 수 없고 오로지 말뚝처럼 박힌 상태에서 남궁관의 공격을 막아야 했으므로 무척 위태로웠다.
그에 반해 남궁관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쏟아내었다.
콰아앙!
툭!
급기야 괭이 자루고 부러져 나가고 말았다.
이대로 가다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최선을 다해 방어에 나섰지만 남궁관의 검을 막아내기에는 너무 괭이 자루가 짧았다.
푸우우!
이판사판, 위험을 각오해야 했다. 노산의 몸이 무 뽑히듯 땅속에서 뽑혀 나왔다. 그 순간 남궁관의 검이 또다시 떨어졌다. 괭이가 부러져 나간 관계로 병기에서도 불리한데다 몸을 뽑아 올리느라 내공의 일부를 신법 펼치는데 썼다.
퍼어억!
“컥!”
예상대로 엄청난 충격이 전신을 강타했다. 마치 벼락을 한 대 맞는 것 같았다.
울컥!
핏덩이를 토해냈다. 강한 충격으로 인해 전신의 뼈 일부까지 탈골이 된 것 같다. 그만큼 남궁관의 힘은 거셌다.
슈우욱!
남궁관의 검이 수평으로 뻗어오는 것이 검강이었다.
비록 짧은 괭이자루였지만 노산 역시 도강을 펼쳤다. 검강과 도강의 충돌은 주위를 거센 폭풍 속으로 몰아넣었다.
쿠콰쾅!
흙먼지가 주위를 덮어버렸다.
서로의 힘이 비슷할 때 병기가 짧으면 손해를 입는다. 어떤 물체를 통해 충격이 전달 될 때 길수록 손끝에 닿을 때는 약해지기 때문이었다. 노산은 나무로 된 괭이자루를 칼로 사용한데다 부러졌기 때문에 충격이 그대로 괭이자루가 흡수하지 못하고 손으로 전달되었고 그것은 고스란히 내기를 뒤흔들었다.
“후우욱!”
팽팽한 무위일 때 한번 밀리면 걷잡을 수가 없다. 회복하기 위해서는 상대보다 최소한 한 배 반 정도의 힘이 필요한데 여러 가지로 불리한 입장에서 회복하기란 불가능했다.
따악!
노산은 찔러 들어오는 남궁관의 검을 때렸다. 보통 상황이라면 강하게 맞은 상대의 검이 옆으로 비켜나야 하는데 적지 않은 내상을 입었기 때문에 때린 쪽의 괭이자루가 더 튕겨나왔다. 물론 남궁관의 검도 충격에 옆으로 밀리긴 했고 쉬익 하며 노산의 괭이자루가 그대로 동천몽의 하복부를 찔러 들어갔다.
직선으로 찔러야 하는데 튕겨 나갔다가 찔렀으므로 도로(刀路)가 약간 반원을 만들었다. 그에 반해 남궁관의 검은 옆으로 조금 비켜나긴 했지만 힘이 있었으므로 곧바로 찔러 들어왔다.
쉭!
슉!
서로가 찔렀다.
그런데 힘과 병기에서 유리한 남궁관의 검이 먼저 찔렀다. 간발의 차이지만 먼저 찌른 쪽과 나중에 찌른 쪽이 입는 충격과 피해는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먼저 찔린 쪽은 일단 움찔하면서 힘이 축소되고 뒤이어 파고드는 고통과 충격으로 찔러가던 힘이 또다시 감소된다.
푹!
노산의 괭이자루가 남궁관의 어깨를 찔렀다.
물론 왼쪽 어깨를 파고들긴 했지만 고작 피만 보는 경미한 상처인 반면 노산의 왼쪽 어깨는 완전히 관통되었다.
휘청!
노산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밭은 평평하지 않았다. 나복을 심기 위해 파놓아 표면이 물컹거리며 푹푹 빠진다. 그래서 노산이 중심을 잡는데 밭은 더욱 악재로 작용했다.
콰아!
남궁관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내색은 않지만 상당한 내상을 입고 있었다. 몰아 칠 때 끝장을 봐야 한다.
남궁관의 검은 빨랐다. 노산은 채 진기도 완전히 끌어 올리지 못하고 남궁관의 검을 본능적으로 후려쳤다.
퍽!
“커억!”
지금까지의 비명이 신음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주위를 울릴만큼 처절했다.
콰콰콰!
남궁관의 검이 더욱 광란했다. 쏟아지는 검강을 보며 노산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여유가 넘치던 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고 있는 힘껏 남궁관의 검을 맞받아쳤다.
콰콱!
퍼더덕!
그대로 뒤 걸음을 치다 밭에 주저 앉았고 쐐액 하는 소리가 들리며 천년거암 같은 무거운 기운이 떨어졌다. 손을 들어 올릴 힘도 없었지만 최선을 다해 완전히 쪼개지고 젓가락 길이 밖에 남지 않은 괭이자리를 들어올렸다.
싹!
내공이 실려야 잘리지 않는데 힘이 없다보니 두부처럼 잘려나갔고 그대로 앞가슴을 뜨거운 기운이 훑고 지나갔다. 주저 앉은 채 앞가슴을 내려다 보았는데 옷이 잘려나갔으며 벌어진 옷자락 사이로 핏물이 보인다.
남궁관의 검이 그제서야 멈췄다. 완전한 승리를 자신하는 듯 거친 숨을 헐떡이면서도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학…하학!
노산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입가에는 밝은 웃음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헛헛! 예상은 했었느니라. 무통령이 내려지는 순간 가장 먼저 남궁천이 우리의 목을 치리라고.”
강호육군은 남궁천에게 눈엣가시였다.
이미 자신의 야망과 속셈을 그들은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강호육군은 사사건건 관여하고 제지를 했다.
다행히 남궁천이 포섭해 놓은 사람들이 워낙 많아 끝내 무통령은 내려졌다. 천하는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버린 것이다.
강호의 역사를 보면 흑도의 시대보다는 백도의 천하가 오래 지속되었다. 하지만 삶의 궁핍함과 피바람은 놀랍게도 백도가 지배하던 시절이 더 심했었다.
부정과 부패가 훨씬 심했고 군소문파들의 삶은 더욱 팍팍했다. 하지만 흑도의 시대 때에는 우려했던 것과 달리 평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일부 몇몇 흑도방파와 인물들이 개인적인 복수로 질서를 어지럽히긴 했지만 극히 미미했다.
남궁천에게는 가혹한 피의 기가 뭉쳐 있었다.
그래서 강호육군은 더욱 막았던 것이었다.
남궁관이 가까이 다가왔다.
“편히 가십시오.”
남궁관이 검을 쳐들었다.
바로 그 순간 모용산이 외쳐 말했다.
“공자님 잠깐만요.”
남궁관의 동작이 멎었고 모용산이 다가오더니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녀가 베면 안되겠어요? 언제 소녀가 이런 거목의 목을 베어 보겠어요.”
남궁관이 검을 내렸다.
“그렇게 하시오. 뭐 어려울 것 있겠소.”
“호호호! 고마워요 공자님.”
모용산이 깔깔 거리며 다가와 자신의 옆구리에 달린 검을 뽑아 들었다.
“늙은이 왜 웃느냐?”
노산이 웃고 있자 모용산이 인상을 썼다.
노산이 조용히 말했다.
“조심하거라. 너의 관상을 보니 편히 죽지는 못할 것 같구나.”
모용산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싹 가셨다.
“늙은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게냐? 뭐가 어째?”
“깨끗하게 죽지는 못할 관상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엄청난 고통을 당하며 죽을 것이라는 얘기다.”
모용산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이런 패죽일 늙은이가.”
그녀가 검을 뽑아 노산의 목을 그대로 내려쳤다.
팍!
하지만 노산의 목은 잘라지지 않았고 피만 흘러내렸다. 그러는 가운데 여전히 노산은 웃고 있었다.
“기분 나빠.”
다시 모용산이 검을 휘둘렀다.
파파파팍!
한 번에 잘려지지 않자 미친 듯이 휘둘렀고 끝내 노산의 목은 톱에 잘린 듯 베어졌다.
그래도 분이 덜 풀린 듯 모용산은 노산의 시체를 난도질 했다. 보다 못한 남궁관이 말렸다.
“기분은 알지만 됐소. 그만 하시오.”
“찢어 죽일 늙은이.”
모용산이 씩씩 거리며 죽은 노산을 노려보았다.
“재수없어.”
모용산의 백의는 노산의 몸에서 튄 피로 범벅이 되었고 얼굴까지 핏물이 묻어 있었다. 피를 뒤집어 쓰고 씩씩 거리는 모용산을 쳐다보던 남궁관의 눈빛이 변했다.
갑자기 거친 욕망이 솟구친 것이었다.
이상하게 핏속에서 여인을 보면 욕망이 솟구쳤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그랬었다. 집안의 여 무사들이 수련도중 피를 흘리며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온갖 위협과 협박을 쏟아 기어코 욕심을 차리고 말았다.
와락!
남궁관이 모용산을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모용산이 남궁관의 눈 속에 타오르는 욕망을 읽고 미소를 지었다.
“홋홋! 갈수록 이상한 취미예요.”
“훨씬 자극적이고 좋지 않소.”
“하긴 깨끗한 침대 위에서는 별 감흥이 없긴 해요.”
모용산은 남궁관이 옷을 벗기기 쉽도록 도와주었고 두 사람은 알몸이 되어 노산의 시체 옆에서 뱀처럼 뒤엉켰다.
천상각 본영으로 돌아온 상관량은 휘하 제장들로부터 그동안에 있었던 보고를 듣고 있었다. 특별한 변동 소식은 없었다. 동천비는 사라지고 없었지만 아직 모르고 있었다.
상관량의 귀에는 수하들의 보고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수하 한명이 자기 차례가 되어 보고하러 들어왔다가 독한 죽엽청을 물 마시듯 하는 모습을 보고 슬며시 자리를 비켰다.
가개묵의 눈살이 모아졌다.
오랫동안 상관량을 모셨기 때문에 갔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번쩍!
술을 마시던 상관량의 눈이 커졌다. 불현 듯 뇌리 속으로 한 인물이 떠오른 것이었다.
‘놈이다!’
상관량이 고개를 돌렸다.
“개묵!”
“말씀 하소서.”
“요즘 포달랍궁의 움직임은 어떠냐?”
“여전히 강력한 진으로 외부와 단절되어 있사옵니다.”
상관량의 눈이 빛을 뿌렸다.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다시 살펴보거라. 어쩌면 중원에 들어와 있는지도 모른다.”
“네엣?”
“그놈이다. 이 모든 사건의 주범은 바로 동천몽이란 동오룡의 막내 아들 그놈이다.”
“그놈은 부친은 물론 형제들과 원수지간 아니옵니까?”
“그렇긴 하지만 핏줄은 그 무엇에 우선한다. 원수는 원수일지라도 일단 가문은 살려놓고 보자는 계산으로 은밀히 모든 작전을 펼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있사옵니다. 주인이 동천몽이어야 하는데 배일목으로 된 것은 뭘까요?”
“명의만 남에게 잠시 빌려왔겠지. 우리의 눈을 피하기 위해.”
상관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포달랍궁으로 가라. 그들의 움직임을 자세히 조사해라. 아무리 은밀히 움직여도 사람의 눈은 피할 수 없다. 포달랍궁 인근 주민들이거나 누군가에게는 목격 되었을 것이다. 어서 알아 보거라. 놈은 틀림없이 중원으로 들어와 우리의 일에 깊이 관여 하고 있다.”
가개묵이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상관량은 확신하듯 중얼거렸다.
‘놈이다. 내 눈은 속이지 못한다.’
이쪽에 너무 신경쓰느라 동천몽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가 아니면 이런 엄청난 일을 서슴 없이 꾸밀 사람은 없다.
예전부터 동천몽이야 말로 어쩌면 가장 큰 변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포달랍궁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워낙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위협거리였다.
오죽하면 자신 들 조차도 제자들 숫자를 정확히 모른다고 했겠는가. 홍산과 대설산 동굴에서 평생을 무예수련만 하다 죽는 사람은 물론 등선한 사람도 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밖으로부터 경비무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총관님 동오룡 각주님께서 뵙기를 청합니다.”
상관량의 눈이 커졌다.
천상각을 포위한 이후 동오룡의 방문을 두 번 받았다. 처음 동오룡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는 무척 당황했다. 적장이 불쑥 나타났으므로 무슨 의미인지 얼른 파악이 되지 않았다. 동오룡은 찾아와 이런 저런 얘길 하고 차까지 얻어 마시고 돌아갔다. 별다른 말도 없었던 것이었다.
나중에서야 상관량은 동오룡의 계산을 읽었다. 이쪽에서 절대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공격을 해봤자 인명피해만 날뿐 자신들의 궁극적인 목적, 즉 비고(秘庫)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읽고 있었다. 고문 따위 쯤 은 얼마든지 견뎌낼 자신이 있지 않고서는 보일 수 없는 노련한 장사꾼다운 배포였다.
그래서 상관량은 공격을 하여 일단 동천비를 사로잡은 다음 위협을 해볼까도 생각 했다. 자식의 고통을 외면할 부모는 없다는 것이 상관량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중도에서 포기했다. 자신이 보는 동오룡도 이제 갈 때까지 갔고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어차피 동천비는 마공을 익힌 무림맹의 공적이므로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도 아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을 아들을 위협해봤자 꼼짝도 않을 것이다.
실로 만만찮은 두뇌회전이었고 요즘 들어 은근히 두려움까지 일고 있었는데 또다시 그가 찾아왔다.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왔을까 생각 하고 있는데 웃음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휘장을 걷고 들어선 것이다.
“핫핫핫! 오늘은 아주 한가해 보이는구려.”
동오룡은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처럼 큰소리로 웃었다. 마치 자기 집에 온 사람처럼 거리낌 없이 주위를 휘둘러보더니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아 입을 연다.
“손님이 왔는데 차 한 잔도 없소이까?”
적을 포위해 놓고 끌려 다녀 보기는 처음이었다. 분명히 열쇠는 이쪽에서 쥐고 있지만 자물쇠를 열 수 없는 이상한 열쇠이다.
“차 가져오너라.”
밖으로부터 대답이 들려왔다.
“앉으시오.”
오히려 손님이 주인에게 앉으라고 권한다.
“언제까지 내 집을 에워 쌓고 있을 셈이오? 이렇게 시간을 끌 바에는 장사라도 할 수 있도록 문은 열어주어야 할 것 아니오?”
다리까지 포개며 입을 여는 동오룡의 얼굴에 사정하는 빛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왜 대답이 없으시오. 내 말이 틀렸소.”
상관량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칼자루는 자신이 잡고 있는데 칼날을 쥔 사람이 더욱 큰소리다. 이건 완전히 배째라는 식이 아닌가.
“그럼 허락으로 알고 내일부터 문을 개방 하겠소이다.”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고 혼자 결정한다.
“불가하오.”
“이유가 뭐요?”
“이유는 없소.”
“그게 말이라고 하시오. 허어 이거야 원.”
“굳이 이유라면 각주에게 있소. 각주가 쥐고 있는 그 비고를 가르쳐 주시오. 그럼 우린 얼마든지 문을 열수 있도록 해주겠소이다.”
“푸핫핫핫!”
느닷없이 동오룡이 광소를 터뜨렸다. 상관량이 동오룡의 웃음 소리에 인상을 썼다. 감히 적진 심장부에 들어와 엄청난 웃음이라니 화가 나기도 했고 어이가 없다.
“이보시오 상관 총관,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 하시오. 당신들 다 줘버리면 난 뭘로 장사를 하란 말이오. 당장 물건을 구입하려면 은자가 있어야 하는데 비고에 감춰진 것은 최소한의 생존 자금이오. 물론 그동안 쌓아 놓은 신용이 있기 때문에 외상으로 어느 정도 되겠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오. 다 빼앗고 나서 문을 열어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오. 우린 결국 굶어 죽으란 말 밖에 더 되오이까? 한두 살 먹은 어린 아이도 아니고 말이오. 그렇게 생각이 짧아서야 원.”
화악!
상관량의 눈이 커졌다.
주저가 없었고 거칠게 없었다. 자신을 훈계하고 가르치듯 동오룡은 비아냥거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들은 아주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구려. 세상은 같이 사는 거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란 얘기오. 때로는 손해도 보면서 말이오. 힘을 가졌다고 오로지 빼앗으려 들고 있단 말이오. 하지만 힘은 언젠가 더 큰 힘에 반드시 당하게 되어 있음을 명심하시오.”
카악!
상관량이 바닥에 가래침을 뱉고 돌아섰다.
화악!
상관량의 양손이 앞가슴까지 올라갔다. 금방이라도 장력으로 격살할 듯 전신이 살기로 충만했고 두 눈에서는 냉기가 쏟아졌다. 하지만 끝내 장력을 발출하지는 않았다.
상관량은 양손을 앞가슴에 멈춘 채 한동안 동오룡이 나간 입구를 노려보았다.
“끄음!”
한 참 만에 거친 신음을 흘리며 양손을 내렸다.
털썩!
의자에 주저 앉은 상관량의 시선은 여전히 입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자신이 칼자루를 잡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동오룡이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 있는 것인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뒤 죽 박 죽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분명히 자신이 우월한 위치에 있다. 자신에게 목숨이 저당잡힌 동오룡이 다가와 큰소리를 치고 한바탕 태풍처럼 자존심을 긁고 사라지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씩씩 거리며 분노를 자제하는 것 뿐이었다.
뿌드득!
동오룡이 사라진 입구를 노려보며 이만 박박 갈 뿐이었다.
천상각 뒷산 오향봉 골짜기에 일단의 마차가 나타났다. 그들은 거대한 바위 두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 곳에 이르러 이끼가 유난히 푸르게 낀 부위를 눌렀다.
그그긍!
그러자 집 채 만 한 바위 두개가 좌우로 갈라지며 입구가 드러났는데 놀랍게도 마차를 끌고 들어 살 수 있을 만큼 잘 닦여진 지하 통로가 나타났다.
마차들은 조심스럽게 지하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통로는 조그만 경사를 이루며 한참을 지하로 내려갔고 어느 정도의 깊이에 이르자 굴은 평지가 되었다. 그리고 거대한 문이 앞을 막고 있었는데 선두에 선 사내는 거침없이 기관장치를 작동했다.
또다시 석문이 열리고 엄청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오오!”
“과…과연!”
마차를 몰고 들어간 사내들의 눈이 부릅떠지며 탄성이 터져나왔다. 천하의 모든 금은보화를 쌓아 놓은 듯 지하광장에는 상상을 초월한 보석들이 쌓여 있었다.
“왜 이제야 천상각을 천하제일재가(天下第一財家)라고 하는지 알겠구나.”
사내들은 한동안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잠시 후 앞장서서 기관장치를 해체했던 사내가 말했다.
“서둘러 실고 떠나세. 지체했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네.”
무사들은 마차에 금은보화를 실고 옮기기 시작했다.
오향봉 골짜기로 수십 대의 마차가 들락거렸다. 하지만 천상각을 감시하고 있는 무림맹에서는 전혀 아무런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마차들은 무려 열흘간이나 들락거리며 천상각 지하에 숨겨진 보화들을 완전히 옮기는데 성공했다.
그곳은 천연의 요새라 할 만 했다. 사방은 거대한 수직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 쳐져 있었고 입구는 호리병처럼 생긴 좁은 길 하나였다. 어떤 고수도 수백 장 높이의 절벽을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외부로부터의 침입은 정문을 제외하고는 절대 가능할 수가 없었다.
목와북천의 총단 지하광장에 쌓인 수많은 보석을 보며 백쾌섬과 삼천목 동천비가 나란히 서 있었다. 셋 모두 흡족한 얼굴이었고, 그중 백쾌섬과 삼천목은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적지 않은 양이 숨겨져 있다는 정보를 들었지만 이렇게 많은 양일 줄은 몰랐다. 새삼 천상각의 막대한 부에 충격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 장사꾼은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다는데 이것 말고 어딘가 또 다른 엄청난 재산이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은근히 가슴이 섬칫해지기까지 했다.
“이것이면 흑도의 모든 형제들을 완전히 무장시킬 수 있을 것이오.”
힘의 균형이 팽팽한 전쟁에서 군수물자가 끼치는 승패란 거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군수물자는 오로지 돈으로만 해결이 가능했다. 명검 명도 일수록 고가이고 쉽게 베어지거나 뚫리지 않은 의복일수록 비싸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명병을 얻고자 노력하고 진귀한 피륙, 천잠사로 만들어진 의복 따위를 선호하는 것이었다.
“부르셨사옵니까? 군사님.”
사십 후반 쯤 되어보이는 중년인이 나타났다. 벌겋게 녹슨 철검 한 자루를 매었을 뿐 특별한 기세나 품위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허름하다고 하여 결코 천하게 보이지는 더욱 않는다.
혈섬(血閃) 이산(伊山)이었다. 서도(西刀) 공손기(公孫期)와 더불어 흑도쌍하(黑道雙河)로 불리는 정상의 고수이다.
“지금 당장 감여철가(堪輿鐵家)를 다녀오너라. 십팔반병기를 양껏 제작하라 이르라. 당연이 제작하는데 들어갈 쇠는 면강오금이 되어야겠제.”
“며…면금오강.”
이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면금오강은 강하면서도 질길뿐 만 아니라 예리하여 만년한철도 두부처럼 잘라버린다. 강호에서 한 이름 하는 사람치고 면금오강으로 제작된 병기를 지니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단지 많은 사람이 지닐 수 없는 것은 워낙 고가이기 때문이었다.
“착수금으로 비취환옥을 두 대의 마차에 나눠 싣고 가거라.”
“존명.”
“서도 있는가?”
한무리 검은 연기가 빨려 들어오더니 사람 형상으로 변했다. 시커먼 묵의를 걸쳤고 앞 가슴에 한 자루 칼을 품고 있었다. 칼에 관한 흑도무림의 하늘로 불리는 도왕이었다.
“부르셨사옵니까. 군사님.”
“자네는 만씨잠가를 다녀와야겠네. 당장 마차 세대에 금화 이백관을 실고 가게. 가서 만잠여의를 천벌 주문하게.”
“처…천벌!”
서도가 놀란 눈을 했다.
만잠여의(萬蠶如衣), 오잠(蜈蠶), 즉 지네를 닮은 누에가 있는데 그들이 뱉어낸 실로 만든 옷이 만잠여의이다. 천잠보의 만큼의 위력은 아니지만 가볍고 어지간한 병기로는 흠집도 내지 못한다.
“넉넉잡고 석 달이면 충분히 만들 걸세. 속히 다녀오게.”
“예 군사어른.”
서도가 사라졌다.
삼천목이 백쾌섬을 향해 말했다.
“속하는 귀씨화가를 다녀오겠나이다.”
귀씨화가(句氏火家)는 강호제일의 불문(火門)이었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여러 가지 화탄은 대량살상무기로 거래되며 팔백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고비 때마다 강호정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집단이었다.
흑과 백 어느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능력을 돈으로 거래할 뿐이었다.
“그렇게 하거라.”
삼천목이 가볍게 포권을 하고 사라졌다.
지하실에 남아 있는 사람은 백쾌섬과 동천비 뿐이었다.
“이제 싸움은 해보나 마나요. 무조건 우리가 이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이다.”
동천비가 웃었는데 으스스한 표정이었다.
“크크! 난 다른 놈은 필요 없소. 딱 두 놈만 내 손으로 없앨 것이오.”
“그게 누구요?”
동천비의 검은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나왔다.
“그야 물론 남궁천과 상관량이오. 그 두 놈만큼은 반드시 내 손으로 찢어 죽일 것이오.”
백쾌섬이 흠칫했다. 동천비의 몸에서 풍겨나온 살기가 너무 짙고 가공했다.
“대종사에게 할 얘기가 있소.”
“듣겠소이다.”
“지금 본가에는 무림맹의 핵심들이 포진해 있소. 그들은 내 아버지가 저 보화들을 내놓기 전에는 절대 포위망을 풀지 않을 것이오. 그렇다고 공격을 하여 강제로 입을 열게 한다면 그건 더욱 어리석은 짓이지.”
“그렇지요.”
“어떻소? 무림맹을 이 기회에 없애 버립시다.”
백쾌섬의 눈이 빛을 뿌렸다. 동천비의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이 되었다. 지금 무림맹의 이목과 힘은 대부분 천상각에 몰려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충분히 해볼만한 공격이었다.
물론 무림맹이 무너진다고 해서 백도무림이 완전히 타격을 입거나 치명상을 입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기에는 영향을 끼친다. 목와북천의 위세와 힘을 느끼게 해줌으로 백도인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적당히 심어줄 수 있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심리의 우위에 선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했다. 그것은 곧 사기로 직결이 되기 때문이었다.
“좋은 생각이오. 나와 동각주가 앞장을 섭시다.”
백쾌섬은 이제 동천비를 동각주로 호칭했다.
백쾌섬은 곧바로 일천 명의 부하들을 백 명씩 열개조로 나누어 천목산을 향해 이동시켰다. 사천성 일대에 무림맹의 무사들과 대치하고 있는 부하들을 보내면 좀 더 빠른 시간에 천목산에 도착할 수 있지만 자칫 움직임이 누설되면 방어선이 무너지고 애써 점령한 사천성 일부를 비롯해 점령한 성들을 잃게 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쾌섬은 혹시 라도 사람들의 눈에 뜨일 것을 염려해 낮에는 깊은 산속에 은신했다가 밤에만 이동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동천비는 백쾌섬과 나란히 움직였다. 처음에는 천천히 신법을 펼쳤지만 어느 한 순간 두 사람의 움직임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빨라졌다. 신법의 무공의 강약을 재는 잣대는 아니지만 강한 자가 빠르다는 것을 놓고 볼 때 적지 않은 조건은 되었다. 그러다보니 두 사람은 누구의 신법이 더 빠른지 자신들도 모르게 경쟁이 붙은 것이었다.
휘이이!
파아아!
형체를 알 아 볼 수가 없을 만큼 두 사람의 속도는 빨랐다. 순식간에 십여 개의 산봉우리를 넘어섰고 오십 리를 주파했다. 하지만 누구도 앞서가나 뒤떨어지지 않았고 갈수록 승부욕에 더욱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정작 놀라고 있는 사람은 백쾌섬이었다.
‘진정 무섭구나!’
백쾌섬은 마공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었다.
갓 태어나면서부터 흑도대종사에게 거두어져 벌모세수를 했고 온갖 기화영초를 복용하며 내공을 다졌다. 또한 실전의 달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고수들로부터 흑도의 가공할 살기를 사사 받으며 성장한 자신이었다.
그런데 동천비는 불과 일 년 만에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그것인 아무리 속성의 특징을 갖고 있는 마공이고 급기야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간다고 하지만 충격적인 일이었다.
무려 이백 리를 달렸지만 누구도 앞서지 못했다. 하나 백쾌섬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여러 가지 성장 여건이나 환경을 보았을 때 자신이 패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물론 그것은 철저히 신법에 국한 된 문제였다.
두 사람이 무림맹에 도착했을 때는 목와북천을 떠난 지 닷새만이었다. 수하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무림맹은 평온 속에 묻혀 있었다.
동천비는 군휘정에 올랐다. 군휘정에서 내려다보며 동천비는 불현듯 얼마 전 생각이 떠올랐다.
함정인지도 모르고 공격을 했다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다. 상관량의 계책에 완전히 놀아난 것이었다. 한데 더욱 그의 자존심을 긁었던 것은 그날 이곳에서 부친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부친은 상관량과 나란히 앉아 자신의 수하들이 죽어가고 자신이 불맞은 멧돼지 마냥 도망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살기 위해 도망치는 뒷모습 처럼 추해보이는 것은 없다. 그래서 자존심 강한 무장들은 자결을 할 지언정 도망을 치지 않는 것이었다. 그날을 떠올리자 동천몽의 전신으로 살기가 피어올랐다.
동천비가 이를 갈고 있을 때 사내들이 나타났다. 앞서 출발한 목와북천의 무사들이었다.
백쾌섬은 사방위중 북쪽을 제외하고 동서남을 완전히 포위하라고 했다.
동천비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포위를 하면 네 방위 모두를 차단하지 않고 한 곳은 비워 두는 것이오?”
백쾌섬이 웃었다.
“퇴로가 없으면 이판사판으로 달려들지요. 개거품 물고 달려들면 아무리 쥐새끼라고 해도 고양이가 상처를 입소이다. 퇴로를 열어주고 사냥을 하는게 정석 아니오이까?”
동천비의 검은 눈이 출렁거렸다.
왜 흑도대종사인지 백쾌섬의 그릇이 느껴졌다.
“오늘 밤 자시에 무림맹을 강호에서 지운다. 이상.”
사내들이 일제히 예를 취하고 물러났다.
두 사람은 군휘정에 앉아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얘기가 거듭될수록 백쾌섬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동천비가 사고가 보통 사람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었다.
마공에 깊이 물들면서 인간이 갖는 지극히 보편적인 사고가 무너지고 있었다. 보편적인 사고가 무너지면 그때부터는 피아를 구별않고 오로지 살인만을 즐긴다.
한순간 백쾌섬의 입술이 슬며시 물렸다. 어느 시점이 되면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천목산의 밤은 아름다웠다. 어둠을 뚫고 이름모를 야조가 구슬피 울었고 서늘한 바람이 군휘정을 한 바퀴 휭하니 돌고 계곡으로 줄달음 쳤다.
어둠속에서 두개의 눈동자가 무림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중 한쌍의 눈은 어둠보다 더욱 짙어 괴기롭기까지 했다.
힐끔!
백쾌섬이 하늘의 별자리를 살폈다. 자시가 되려면 반다경쯤 더 있어야 했다. 기다리는 시간은 길다. 반다경이란 짧은 시간이지만 기다려야 하는 이쪽의 심정은 긴장을 지울 수 없고 본인들도 모르게 서두르게 된다. 서두르면 좋지 않았으므로 백쾌섬은 다시 한 번 내공을 끌어 모아 전음으로 잠복한 부하들에게 침착할 것을 지시했다.
힐끔!
동천비를 쳐다보았는데 그의 두 눈은 여전히 먹물이었다. 요기롭기까지한 그의 눈동자를 보며 백쾌섬은 더욱 결심을 굳혔다.
북두칠성을 다시 한 번 살피던 백쾌섬의 눈이 빛을 뿌렸다.
‘자시다!’
백쾌섬이 내공을 실어 길 다란 새 울음소리를 냈다. 그것은 야조의 울음소리였다. 짧게 세 번 길게 두 번이 밤하늘을 울렸다. 그러자 어둠속에서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들은 무림맹의 담장을 거침없이 넘어갔다.
“크악!”
첫 비명이 울렸고 동천비와 백쾌섬이 무림맹을 향해 한 마리 새처럼 날아갔다.
기습을 받은 무림맹 무사들은 당황했다. 누구도 목와북천에서 공격을 해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화르륵!
시뻘걸 불길이 화산각이란 전각을 태웠다. 화산각은 구파일방 중 무림맹에 파견된 화산파 사람들이 기거하는 전각이었다.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어둠은 사라지고 대낮처럼 훤해졌다. 불길 사이로 무림맹 무사들이 집단처럼 쓰러졌고 목와북천의 무사들은 야수처럼 날 뛰었다.
“컥!”
“악! 우웩!”
동천비의 오른손이 좌우로 휘둘러지며 달려들던 무림맹 무사 두 명의 가슴에 주먹을 받았다.
동천비는 무림맹 안쪽으로 깊이 들어갔다. 이따금 덮쳐오는 무사들이 있었지만 검게 변한 쇠보다 더 강한 그의 주먹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즉사했다.
무엇을 찾는지 동천비는 전각의 현판만 살피고 그냥 지나쳤다.
쉬익!
밑에서부터 한 개의 검이 찔러 올라왔다.
툭!
망설임 없이 왼발이 검을 걷어찼고 그와 동시에 왼발이 기습한 무사의 얼굴을 찍었다.
“으아악!”
무사는 허공을 날아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팟!
동천비의 눈이 빛났고 땅으로 내려섰다.
만기전이라고 씌인 현판이 들어왔다. 만기전은 상관량의 거처이다.
동천비는 천천히 만기전 계단을 올라 문을 열었다. 문은 힘없이 열렸고 좌측으로 꺾이는 짧은 복도가 있었고 끝에 노란 주렴이 드리워진 방이 있다.
방은 텅 비어 있었고 사면벽으로 설치된 서가에 책들이 꽂혀 있었다. 생각보다 단촐한 방이었다.
동천비는 천천히 방을 휘둘러보았다.
탁자 위에 올려진 찻잔과 곁에 놓인 백자로 된 다항(茶缸)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다항에는 용정이 반쯤 채워져 있었다. 상관량 또한 자신만큼이나 용정을 좋아 한다고 들었다. 손가락으로 용정 가루를 집어 입안에 넣고 씹던 동천비가 퉤 하며 뱉었다.
스윽!
동천몽이 좌측 벽을 향해 오른손 검지를 뻗었다. 그리고 허공에 대고 글씨를 썼는데 놀랍게도 벽에 세치 깊이로 글씨가 쓰이기 시작했다.
내력을 이용한 가공할 금강지였다.
‘천상래귀(天商來歸)’
자신이 벽에 써 놓은 글씨를 깊숙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동천비가 천천히 문을 나섰다.
무림맹은 화광이 충천했고 기합과 비명, 허공을 날아가는 검과 시체들로 지옥을 이루고 있었다. 동천비는 피와 비명으로 범벅이 된 지옥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손이 한 번씩 번득일 때마다 대여섯 명씩 무더기로 숨을 거두었다.
같은 시각 천지광옥은 짙은 정적 속에 묻혀 있었다.
입구의 경비무사와 높이 솟은 망루의 무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잠들어 있었다.
사사삭!
어둠을 이용해 오십 여 명의 무사들이 천지광옥을 향해 접근해갔다. 높은 철책을 가볍게 넘어선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고 그들은 경비무사들이 거처하는 장방형의 커다란 이층 전각을 향해 접근해갔다.
어둠속에서도 번쩍거리는 불빛이 늑대를 방불케 했는데 오십여 명의 무사들은 전각을 완벽히 포위했다.
그들은 말을 하지 않았고 오로지 눈빛으로 신호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한 순간 일제히 몸을 날려 전각의 창문을 통해 뛰어들었다.
와창장!
와직! 퍽!
오십여 명은 삽시간에 전각 안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안으로부터 흘러 나와야 할 비명이 없었다.
콰아앙!
그런데 그들이 들어서고 반 호흡도 되기 전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육중한 전각의 용마루가 산산조각이 되어 날아갔고 아름드리 기둥과 돌로 쌓은 벽이 어둠을 찢고 비상했다. 그 속에서 처절한 비명이 콩 볶듯 흘러나왔다.
“크아악!”
“윽!”
“소…속았다!”
거센 폭발에 육편이 찢어지고 사람의 몸뚱이가 조각되어 날아갔다.
콰르르르!
폭발로 인해 허공 높이 날아간 전각의 잔해들과 시신들이 땅으로 떨어졌고 조금 전까지 전각이 있었던 곳은 폭풍이 휩쓸고 간 듯 폐허로 변해 있었다.
파파팟!
돌연 전각 주위로 일제히 화톳불이 밝혀졌다. 미리 준비 내놓은 듯 주위는 순식간에 밝아졌다.
화톳불 주위로 수십 명의 흑영들이 어른거렸다. 여전히 맨발 차림으로 장내를 쓸어본 덕배선사의 입에서 차가운 명령이 떨어졌다.
“생존자를 찾아 확실히 목숨을 끊어라.”
“예!”
천룡구십구불이 잔해 속을 더듬기 시작했다.
덕배선사는 굳은 얼굴로 잔해를 더듬는 천룡구십구불을 쳐다보며 중얼 거렸다.
천하의 남궁천이 곱게 물러나지 않으리란 건 누구라도 예상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밤 공격을 해오리란 걸 정확이 맞춘 동천몽의 혜안은 무엇으로 설명 되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대법왕은 보통 사람에게는 없는 능력을 지닌다. 그리고 자주 기적을 행하고 병자를 치료하고 슬픈 사람을 행복으로 인도하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다고 했다.
동천몽의 놀라운 능력을 벌써 몇 번째 목격하게 된 건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컥!”
“우욱!”
죽은 척 하고 잔해 더미 속에 숨어있던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죽어가는 비명이 들려왔다.
덕배선사는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깨달았다.
‘대법왕님은 전지전능하시다’
덕배는 마음속으로 아미타불을 연신 중얼거렸다.
인기척에 장끼 한 마리가 부리나케 도망을 쳤다. 그런데 그만 숨어 있던 혈응이 장끼를 발견하고 덮쳤다. 허공에 깃털이 눈송이처럼 흩어지며 갈고리 같은 혈응의 발톱에 장끼는 맥 없이 낚여 끌려갔다.
동천몽과 일목은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문득 동천몽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무릇 생명을 가진 것은 동물이든 식물이든 곤충이든 양육강식이라는 것이었다.
다만 인간이 저들과 다른 점은 이성과 양심이라는 것을 지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동물이지만 인간은 특별히 구별되어야 하고 달라야 하는 것이다.
“저깁니다.”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서자 한 채의 모옥이 세워져 있었다. 마른 대나무 가지를 꺾어 세운 울타리와 울타리 너머 마당을 가로지른 줄에 낡은 흑의 두벌이 널려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모옥 앞에서 안의 동정을 살폈다. 집안은 비어 있는 듯 조용했고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감지 한 것이었다.
“일을 나간 듯 하옵니다.”
집 좌측 벽에 농기구가 걸려 있었다.
두 사람은 집 뒤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올라갔다. 깊은 산속은 조용했고 이름 모를 산새들이 지저귀며 인기척에 잔뜩 두 눈을 뜨고 경계를 했다.
한 참 길을 따라 올라가던 동천몽의 발걸음이 멈췄다. 좌측 평평한 지역으로 밭이 개간되어 있었는데 수많은 까마귀와 야생짐승들이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시쳅니다.”
일목이 단숨에 날아갔고 까마귀와 짐승들이 사방으로 도망쳤다. 가까이 다가간 동천몽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시체는 이미 구더기가 끓고 있었는데 짐승들에게 뜯겨 처참했다.
주위를 살피던 동천몽이 깨끗하게 잘려진 괭이자루를 발견했다. 한눈에 보아도 예리한 검에 잘렸음을 알 수 있었다.
“검에 당했사옵니다.”
일목이 코를 막으며 말했다. 얼마나 깊은 검흔이었으면 드러난 뼈에까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단순한 검식으로 저렇게 깊은 상처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동천몽은 검의 임자가 검강의 경지에 오른 초절정 고수 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한발 늦은 것 같사옵니다.”
보름 전 무미선사로부터 한 가지 급보가 들어왔었다. 강호 육군이 정체불명의 인물에게 살해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미선사가 꺼내놓은 여러 정보를 분석한 결과 남궁천의 짓으로 판단했었다. 우선 내부에 반대자부터 숙청하기 시작한 것이고 그 첫 번째 표적이 강호육군이었다. 강호육군은 무림맹의 태상장로들로써 일찍부터 남궁천의 야망을 눈치 채고 그의 행동과 계획을 최선을 다해 가로막았지만 끝내 무통령만은 제지하지 못했다. 남궁천은 무통령의 첫 희생자로 그들을 택한 것이었다.
동천몽은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밭을 갈다 싸운 것 같았는데 거대한 화산 구덩이처럼 변한 밭을 보며 당시 싸움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짐작할 수가 있었다. 패인 구덩이를 살피던 동천몽의 눈살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고수가 되면 보통 사람의 눈과 다르다. 미세한 흔적도 놓치지 않고 발견하는데 구덩이가 뭔가 특이했다.
일반적으로 양쪽의 공격이 강하게 부딪히면 거대한 기파가 폭풍을 만들어내고 기로 인해 구덩이가 생긴다. 그렇게 생긴 구덩이는 자연이 만들어 낸 것처럼 매끄럽다. 그런데 지금 노산의 밭에 만들어진 구덩이는 계단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표면이 매끄럽지 못하고 움푹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일목 또한 톱니처럼 생긴 구덩이 표면을 보며 하나 뿐인 눈을 깜빡거렸다.
“마검입니다.”
일목이 자신있게 말했다.
그러면서 배교의 전 전대 교주였던, 즉 자신의 사조에 대해 말했다. 자신의 사조는 배교사상 가장 자질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래서 배교 대대로 내려오는 서른 여섯 가지의 환술을 가장 완벽하게 익힌 인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명의 백의 중년인과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백의 중년인의 검이 이상했다. 일반적인 검은 선과 원을 만드는데 그의 검은 거칠며 울퉁불퉁 했다. 마치 검이라기보다는 검에 이빨이 달린 듯 하여 순식간에 배교의 환술과 신공을 찢어버렸다. 사흘동안 대설산을 헤매던 끝에 일목의 사부는 죽은 사조의 시신을 발견했는데 온 몸이 찢어져 있었고 싸운 현장 또한 지금 눈앞의 모습처럼 울퉁불퉁 했다고 했으며 파랗게 물이 들어 있었다.
“무엇이라고 하더냐? 백의중년인의 검 말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사부께서 말씀하시길 천마검법 같다고 했사옵니다.”
동천몽이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검법은 전설의 집단 마교를 대표하는 검법이다. 소림의 달마삼검과 더불어 검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는데 워낙 거칠고 잔혹하여 늑대의 이빨(狼齒)라고도 부른다.
사실 동천몽도 천마검법을 의심했다. 포달랍궁에 내려오는 포랍불서를 보면 천하에서 위맹한 무공에 대한 보고서가 있었다. 거기에 보면 천마검법의 특징이 나와 있고 처음 구덩이의 울퉁불퉁한 표면과 파랗게 물드는 상처 주위를 보면서 떠올렸었다.
“나도 그런 것 같구나.”
동천몽은 좀 더 자세히 표면을 살폈다.
남궁관의 천마검법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표면이 완만했고 파랗기도 조금 덜 진했다. 완성이 되면 표면이 서릿발처럼 날카롭게 만들어지며 시퍼렇다. 하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남궁세가에서 마교의 천마검법을 갖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마교는 사라졌다. 일백년 전 무림맹과 석 달에 걸친 대 전쟁으로 완전히 몰살 한 것이었다.
구덩이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동천몽이 물었다.
“장제에 이어 광신과 운절도 까지 죽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추풍살선과 귀수(鬼手)와 탈백십이비(奪魄十二匕)로군.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이 어디냐?”
일목이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펼쳤다.
종이에는 중원의 지도가 그려져 있고 여섯 개의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
“여기가 그러니까…에 또 추풍살선이 살고 있는 곳이 가장 가깝습니다. 거리로 따지면 약 이백 리 정도 되옵니다.”
퍼억!
동천몽이 오른손을 뻗자 뼈만 남은 시신이 구덩이 속으로 들어갔고 강한 흙바람이 일면서 순식간에 노산의 시체를 묻어버렸다.
“그곳으로 가자!”
두 사람은 곧바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곧바로 까마귀와 짐승들이 다가왔지만 이미 시신은 사라진 뒤였다. 여기저기 떨어진 핏자국과 살점을 주워 먹느라 아귀다툼을 벌였다.
<5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