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동천몽이 침대에서 일어나 일목과 같이 실내를 빠져나갔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광산 입구로 걸어갔다. 남궁가 무사들은 천룡구십구불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힘으로 밀고 들어올까 계산도 했겠지만 천룡구십구불의 무위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쉽사리 강경하게 나서지 않고 있었다.
동천몽과 일목이 나가자 천룡구십구불이 허리를 숙였다. 혹시라도 불호를 중얼거릴지 몰라 단단히 교육 시켰다.
예상대로 맨 선두에 자추가 있었고 뒤로 태우노와 부하들이 흉흉한 기세로 서 있었다.
“남궁세가에서 오셨다고?”
자추가 나섰다.
“그렇소.”
동천몽과 일목을 살피는데 무척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동천몽은 자추의 무공이 일목의 아래가 아님을 간파했다.
“거두절미 하고 본론만 말하겠소. 천지광옥은 본가의 소유이오?”
“보여주어라.”
동천몽의 지시에 일목이 품에서 서책을 꺼내 자추에게 건네주었다. 서책을 받아 살피던 자추의 눈이 커졌다. 서책에는 남궁세가의 남궁천이 배일목이란 사람에게 천지광옥을 매매했다는 기록이 쓰여 있었고 더욱 놀라운 것은 수결이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보아왔던 남궁천의 수결은 북두칠성안에 하늘 천자를 그려 넣었는데 분명 주인의 것이었다.
자추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안색을 변화시키며 동천몽을 쳐다보았다.
탁!
자추의 손에서 일목이 서책을 가로챘다.
동천몽이 말했다.
“당신이 남궁가주의 대리인인가?”
“대…대리인은 아니오만.”
“그럼 돌아가시오. 우린 본인이거나 아니면 그가 보낸 법적 대리인과 얘기 할 것이다. 한 번 매매를 했으면 그것으로 끝낼 일이지 강호의 문파라고 자꾸 이런 식으로 이상한 행동을 하면 가만있지 않겠소?”
자추의 눈이 빛을 뿌렸다.
“이상한 행동이라고 하셨소?”
“팔아 돈까지 챙겨놓고 지금 하는 행동은 아닌 것처럼 하지 않고 있지 않소이까?”
“그 말은 우리가 사기를 치려든단 말인가?”
“그건 아니겠지만, 자꾸 이런식으로 나오면 의심을 할 수밖에.”
꿈틀!
자추의 눈썹이 서릿발처럼 일어났다.
“감히 본가를 모욕할 셈인가?”
“지금 충분히 의심을 받을 행동을 하고 있지 않소이까?”
동천몽이 조용히 말했다. 이런 일에 언성을 높일수록 의심을 산다. 차분하게, 그리고 조용히 말을 하는 자가 진짜이다.
부친의 거래를 보면 중요한 건일수록 목소리를 낮췄고 흥분을 자제했다. 그것은 상대를 압박하고 기세를 꺾는 상당한 효과를 가져온다.
“아무튼 본가의 주인께서는 결코 매매한 적이 없다고 했소.”
“그럼 우리가 사기를 친다는 것이군. 이보거라.”
“예 대…주군.”
습관처럼 대법왕이라고 하려다 일목이 잽싸게 말을 고쳤다.
동천몽이 인상을 가볍게 쓰며 말했다.
“하는 수 없구나. 당장 섬서성 도독에게 이 억울한 사정을 고하고 판결을 받도록 하자. 그 방법 말고는 저들이 물러나지 않을 것 같구나.”
자추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건 우리도 바라던 바외다. 당장 섬서성 목도독을 불러와 그의 판결을 받읍시다.”
곧바로 이쪽에서는 일목이 움직였고 저쪽에서는 태우노가 움직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몸을 날려 월군산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촤아아!
처음에는 가볍게 날리던 두 사람이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마치 서로 경쟁하듯 몸을 날렸다. 무인 특유의 호승심이 발동했고 신법경쟁으로 발전된 것이었다.
쉬이이!
슈우욱!
조금씩 빨라지더니 급기야 두 사람은 한 마리 새처럼 허공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목이 앞서기 시작했다. 태우노의 안색이 변했고 있는 힘을 다 쥐어짰지만 일목을 추월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남궁세가의 체면이 있기 때문에 질수는 없었다. 하지만 갈수록 벌어지고 있었으므로 태우노가 소리쳤다.
“이렇게 만난것도 인연인데 얘기도 나누며 천천히 가는것이 어떻겠소?”
일목 또한 이런 일에 힘쓰고 싶지 않았으므로 혼쾌히 동조하며 땅으로 내려섰다. 일목의 숨이 고르자 태우노 또한 치밀어 오르는 숨을 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구려? 우리 가주님께서 얼마나 아끼는 광산인데 저걸 팔다니.”
일목이 하나뿐인 눈을 부라렸다.
“그럼 우리 대…주군께서 거짓말을 하고 있단 말이오?”
“그…그건 아니고, 아무튼 약간은 이상하오이다.”
“난 하나도 이상하지 않소.”
“어쨌든 이 지역 도독이 나서면 정확한 이유와 사실이 밝혀지겠지요.”
두 사람은 다시 천천히 신법을 펼쳐 사라져갔다.
신시쯤 일단의 행렬이 천지광옥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십여 명의 무사들과 한대의 마차가 다가왔는데 거대한 깃발에 월군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섬서성 도독 목사룡이 마침내 온 것이었다.
그때까지 목이 빠져라 목사룡을 기다리던 일행들은 우르르 마차 주위로 몰려들었다.
갑옷에 화려한 금검을 찬 두 명의 무장이 마차 문을 좌우에서 열어주자 목사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목사룡이 나타나자 예의상 동천몽과 자추가 허리를 구부려 맞이했다.
목사룡이 위엄있는 시선으로 주위를 한 번 휘둘러보더니 두 사람을 주시했다.
“총방.”
일반 무림세가로 말하면 총관에 해당하는 월군산장의 총방이 조그만 보따리를 가져왔다.
촤락!
보따리를 풀자 안으로부터 다섯권 되는 서책이 나타났다.
총방이 서책을 양손에 받쳐 들고 목사룡 앞으로 내 밀었다. 목사룡이 두 패거리를 지어 선 일행을 보며 말했다.
“이것은 지난 이백년간 천지광옥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에 관한 서책이다.”
동천몽과 남궁천의 매매 서책만 가져오면 신뢰성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그 이전의 주인들에 관한 것 까지 가져온 듯 했다.
슥!
맨 위에 있는 서책을 들어 펼쳤다.
“이 백 년 전 주인은 임 현승이란 자였다. 그가 정확이 이십오 년을 운영하다.”
두 번째 서책을 들어 펼쳤다.
“양광필이란 사람에게 넘겼구나. 당시 금화로 천만냥이었다. 세 번째 주인은 가석규라는 사람이었고 그는 일 년 밖에 운영하지 못하고 동아군에게 넘겼다.”
동천몽의 눈이 빛을 뿌렸다. 동아군은 자신의 증조부이다.
천상각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상인으로 인정받는 천재적인 상술의 대가였다.
목사룡이 네 번째 서책을 들었다.
“동아군 다음은 동오룡이고 그 다음이 남궁천이다. 강호인인 그대들도 알겠지만 남궁천은 현 무림맹주이자 남궁세가의 가주이다.”
그때 자추의 눈이 경련을 일으켰다.
남궁천이 주인이라면 더 이상 서책이 없어야 정상인데 마지막으로 한 권이 총방의 손 위에 더 올려 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위험 속에서도 뛰지 않던 심장이 갑자기 두근거렸다.
“마지막 다섯 번째 주인은 배일목이로구나. 그대가 배일목인가?”
동천몽을 향해 물었다.
동천몽이 자신이 태어난 성의 도독으로 부터 받았던 호패를 보여 주었다. 물론 이것 또한 사복서생이 만든 가짜다. 하지만 전문가다 분별하지 못하는데 목사룡이 구별할리는 절대 없었다.
그때 한 명의 무사가 날아 내렸다.
자추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서며 말했다.
“가져왔느냐?”
“예, 여기 있습니다.”
무림맹을 출발하면서 남궁세가에 따로 연락을 취해 천지광옥의 소유권에 관한 문서를 가져오라고 지시해 놓았는데 지금 도착한 것이었다.
“이걸 보십시오. 본가의 가주님께서 보관하고 계시는 문서에는 분명 주인이 가주 존함으로 되어 있소이다.”
그러면서 무사가 가져온 서책을 목사룡에게 건네주었다.
목사룡이 서책을 받아 살폈다.
멈칫!
남궁세가에서 온 문서에는 천지광옥의 주인이 남궁천으로 되어 있었다.
“보시다시피 이곳의 주인은 본가의 가주님으로써.”
“조용히 하라.”
목사룡이 자추의 말을 막았다.
“개인이 재산의 매입하면 세군데 같은 문서가 보관된다. 그 지역 도독이 머무는 관청과 매입자와 매도자에게 한 부씩 나눠지지. 그런데 남궁세가의 문서에만 주인이 남궁천일 뿐 나머지 두 곳의 문서에는 배일목이다. 이건 누가 뭐래도 배일목이 주인이라는 뜻임을 부인 할 수가 없다.”
“말도 안되는 소리.”
“닥쳐라.”
자추가 소리치자 목사룡이 노려보았다.
“감히 본 도독의 판결을 그대가 모욕할 셈인가. 자기 것은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으나 본 도독이 머무는 월군산장에 있는 것 까지는 위조가 불가능하다. 다시 판결을 내리겠노라. 천지광옥의 주인은 배일목이니라.”
“개 같은 판결.”
“감히 어느 놈이 그 따위 망발을 지껄이느냐?”
갑옷을 입은 무장 한 명이 남궁세가 무사들을 보며 살기를 피워냈다.
남궁세가의 무사들 또한 물러서지 않았고 살기를 피워 올렸다.
관부와 강호는 서로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재산권은 관부에서 중재하고 개입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도독께 청이 있소이다.”
동천몽이 소리쳐 말했다.
목사룡이 말했다.
“말하라. 배일목.”
“아시다시피 남궁세가는 강호에서 가장 큰 세력이옵니다. 비록 소인이 광산을 매입했지만 그들이 언제 침입하여 빼앗가 갈지 알 수 없사옵니다. 뿐만 아니라 어쩌면 저와 식솔들까지 죽여 입막음 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목사룡의 표정이 굳어졌고 동천몽은 더욱 힘주어 말했다.
“부탁하오니 도독께서 부하들을 보내주시어 소인의 재산을 상당기간 동안 지켜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우린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강호인들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요.”
관부와 강호가 서로 불가침을 묵계하고 있지만 엄청난 재산이 걸린 일인 만큼 어쩌면 남궁세가에서 무력을 동원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 청하는 부탁이었다.
“피장군.”
금검을 차고 갑옷을 입은 무사가 나서서 포권했다.
“명령 하소서. 도독님.”
“그대가 이곳에 부하들과 남는다. 백성의 재산권은 나라에서 지켜줌이 당연한 것 아니던가?”
“존명.”
목사룡이 자추를 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다시 반복한다. 천지광옥의 주인은 배일목이다. 이 말은 나의 말이 아니라 황제폐하의 뜻이다.”
황제까지 들먹이며 쐐기를 박고 돌아섰다.
사라지는 목사룡을 바라보는 자추의 표정이 얼음덩이가 되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 단칼에 목을 베어버리고 싶지만 그럴수는 없었다.
아무리 남궁세가의 힘이 크다고 해도 관부를 상대로 피를 요구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당할 수는 없었고 자추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뭔가 있다. 저놈이 무슨 술수를 부렸다’
빙긋 웃고 있는 동천몽을 보며 자추가 살기를 피워냈다. 관부의 눈을 속일만큼 완벽한 위조라면 방법이 없었다. 가짜가 진짜를 뺨치는 일은 허다하다. 그런데 그런 일이 하필 자신들에게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궁천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무슨 일인지 가닥이 잡히지 않는다. 멀쩡한 자신의 재산이 하루아침에 배일목이란 자의 수중으로 넘어가다니 기가 막혔다. 더구나 보통사람도 아니고 천하무림맹의 맹주이자 지존인 자신이 두 눈 뻔히 뜨고 엄청난 재산을 강탈당하다니 어이가 없기도 했다.
“그래서 그냥 왔단 말이냐?”
문 앞에 서 자추를 보며 남궁천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자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무지 방법이 없었사옵니다. 뭐라고 반박을 하고 싶어도 워낙 완벽했기 때문에.”
“푸하하하!”
남궁천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며 우습기까지 했다. 자신이 누군가. 천하무림의 맹주이자 자타가 인정하는 천하제일고수 아닌가.
팟!
돌연 남궁천의 눈이 빛을 뿌렸다.
“너 혹시 사복서생이란 놈을 아느냐?”
“….”
“위조에 관한 천하제일인자이니라. 어떤 재산이나 물건도 그가 마음만 먹으면 감쪽같이 주인을 바꿔버린다. 물론 관부의 어떤 조사도 그의 위조술을 파악하지 못하지.”
“그럼 그자들이 사복서생과 손을 잡고.”
“하지만 내가 알기에 그자는 불귀도에 유배되어 있다.”
불귀도는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지옥의 섬이었다.
“탈옥을 했을 수도 있지 않겠는지요?”
“당장 알아 보거라. 놈이 아니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일어 날 수가 없다. 어서 당장.”
“알겠사옵니다.”
자추가 다시 문밖으로 사라졌다.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던 남궁천이 중얼거렸다.
‘배일목!’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는 인물이다.
“핫핫핫핫!”
또다시 남궁천은 큰 소리로 웃음을 흘렸다. 무림맹의 맹주인 자신의 재산을 손 하나 대지 않고 챙기려는 인물이 있다니 백번을 곱씹어 봐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 또한 천지광옥을 피땀 흘려 번 돈으로 매입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인가 상대 또한 손에 흙 하나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자신의 재산을 가져간 것이다.
무림맹의 맹주인 자신의 재산에 과감히 흑심을 품었다는 것은 단순히 화만 낼 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동천비와 목와북천만 장애물로 여겼는데 이렇게 되면 제 삼의 인물이 등장 한 것이었다.
자추는 닷새 만에 돌아왔다. 그런데 기대하던 것과는 달리 실망스런 소식을 가져왔다. 사복서생이 탈옥하다 바다에 빠져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었다.
“틀림 없느냐?”
“그곳에 있는 다른 죄수들도 그렇게 증언하고 있었사옵니다.”
남궁천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졌다.
이렇게 되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적은 자신의 재산까지 강탈했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아는바가 없다.
“배일목이란 자에 대해 알아보거라. 자세히.”
“명을 받습니다.”
자추가 다시 부리나케 달려나갔다.
힘으로는 누구도 두렵지 않다. 그런데 적은 힘이 아닌 머리로 나오고 있었다. 힘은 절대 머리를 당해 내지 못한 다는 것이 강호의 역사였다. 잠시 굳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남궁천이 밖으로 사라졌다.
소림의 백팔나한과 무당삼십육검 화산의 이십사검사(二十四劍士)등 구파일방의 정예가 천상각을 에워싼 지 오늘로 열흘 째였다. 포위망을 구축하기만 할 뿐 일체 공격은 하지 않았고 대신 천상각으로 들어가는 모든 인적과 마차 운행을 정지시켰다.
구파일방의 정예를 이끌고 있는 사람은 상관량이었다.
본영은 천상각이 내려다 보이는 산정에 있었다. 상관량은 오늘도 본영의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열흘째 공격을 하지 않고 허구 한 날 허송세월만 보내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백팔나한의 수장인 금수선사가 물었다.
“식량을 고갈시켜 스스로 항복하기를 기다리시는 것이옵니까?”
상관량이 찻잔을 내리며 금수선사를 마주 보았다. 그러더니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틀렸소.”
“하면 왜?”
“천상각 안 어딘가에는 지금까지 드러난 것보다 더 많은 재산이 숨겨져 있소. 오로지 동오룡만 알고 있을 뿐이오. 우리가 목와북천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자금들이오. 그런데 우리가 들여보낸 세작들에 의하면 동오룡이 동천비에게 팔까지 잘리면서도 그 위치를 가르쳐 주지 않고 있다하오.”
금수선사의 눈이 빛났다.
“그러니까 지금 함락 시켜봤자 아무런 득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바로 그것이오. 동천비를 없애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딘가에 감춰져 있을 황금이 더 중요하오.”
목와북천에서 내노라하는 고수들이 안에 있지만 구파일방과 사대세가의 최정예로 밀고 들어가면 하루를 넘기지 않고 천상각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는 고양이에게 덤빈다. 동오룡의 입에서 기대한 답을 얻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 상관량의 계산이었다.
자신들이 강제적으로 진압하고 입을 여는 것보다는 아들인 동천비의 성화를 견디지 못하고 동오룡이 입을 열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했다.
동천비에게 쉽게는 말해주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말할 것이다. 그때 공격하여 고스란히 모든 것을 얻어내면 된다는 것이 상관량이 공격을 하지 않고 기다리는 이유였다.
촤르르!
갑자기 본영의 천막이 걷히며 남궁천이 들어섰다.
“매…맹주님.”
두 사람은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고도 없이 이곳엔 어인 일이시옵니까?”
상관량은 남궁천의 얼굴을 살폈다.
오랫동안 곁에서 봐왔기 때문에 조그만 변화도 알아차린다. 상관량의 눈이 좁혀졌다. 남궁천의 안색이 평소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총관 우리의 적은 누구요?”
남궁천이 뜬금없는 물음에 상관량이 가만 쳐다보았다. 남궁천이 정말로 적이 누군지를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었다. 그 말속에 숨겨진 속뜻을 알아차려야 한다.
“눈앞의 적 말고 등 뒤에라도 모르는 적이 있다는 말씀이옵니까?”
남궁천의 눈이 빛났다.
역시 군사 겸 총관다운 안목이고 두뇌회전이었다. 금세 자신의 말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남궁천은 천지광옥 애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상관량의 두 눈이 화등잔 만해졌다.
“배일목?”
“들은바 있소?”
자신이 아는 한 강호에 배씨로 유명한 사람은 없었다. 한 때 감숙성일 때에서 악명을 떨쳤던 배만득이 있었지만 그는 죽었다. 그 자 말고 강호에서 배씨로 유명한 고수나 집단은 없었다.
“아무튼 반드시 성공해야 하오.”
남궁천이 성공해야 한다는 것은 천상각 안에 있는 막대한 황금을 수중에 넣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남궁천이 돌아가고 반시진 정도 있다가 청천벽력같은 보고가 들어왔다. 자신에게 보고를 가져온 사람은 다름아닌 사가 상관세가의 총관 복호청이었다.
상관세가는 사대명문가에는 들어가지 못해도 명문가로 분류되며 무림맹의 총관으로 가주가 재직하다보니 상당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무림맹 총관중 상관세가 출신이 절반을 넘을 만큼 문(文)과 병략(兵略)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곳이 상관세가이다.
천상각으로부터 흘러나온 자금으로 자신 역시도 은밀히 재산을 불렸고 그 대표적인 것이 용마산가(龍馬山家)였다. 용마산가는 강호에서 가장 규모가 마가(馬家)로 그곳에서는 용마라고 부르는 가장 빠르고 건강한 오추마를 키운다.
오추마 한 마리의 보통 황금 천냥을 호가 할 뿐만 아니라 돈이 있다고 아무에게나 팔지 않는다. 오추마를 타고 다닐 만한 인품과 명망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팔지 않는다. 그래서 용마산가의 오추마 한 마리를 소유하는 것을 커다란 명예로 생각하고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돈보따리를 싸들고 용마산가를 찾아가지만 소원을 이루고 나온 사람은 드물었다.
일부는 너무 용마산가의 오추마를 갖고 싶어 기존에 갖고 있는 사람에게 두 배 세 배의 웃돈을 얹어주며 얻고자 했고 그로인해 오추마 가격은 나날이 뛰어 이제는 가장 확실한 재산 증식 수단으로 발전해 있었다.
삼년 전 용마산가를 매입할 때 황금 일백만관을 주었는데 얼마 전 누군가 황금 삼백만관을 줄테니 팔라는 제의가 있었다. 삼년 사이 세배가 뛴 것이었다. 하지만 일언지하에 팔 마음이 없다고 거절했고 날이 가면 갈수록 오추마 값이 오르면서 덩달아 자신의 재산 또한 봇물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사천의 도독까지 참여하여 진위를 감정했지만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으로 판결을 내렸사옵니다.”
“상대는?”
“배일목이란 자입니다.”
“헉!”
“왜 그러시옵니까?”
상관량이 숨을 삼켰다.
아까 다녀갔단 남궁천도 배일목이란 자에게 당했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의 마장 또한 동일인물에게 넘어갔다니 입을 쩌억 벌리고 다물지를 못했다.
“아는 놈이옵니까?”
“선사.”
금수선사가 합장하며 대답했다.
“아미타불! 말씀하십시오.”
“잠시 다녀올 곳이 있으니 개미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으시오.”
“심려 말고 다녀오소서.”
상관량이 곧바로 복호청을 대동하고 본영을 떠났다.
비록 중요한 시기였지만 피 같은 재산이 한 순간에 날아가다니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무척 불편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듯한 손으로 세수를 하는데도 깔끔했다. 처음에는 불편함보다 분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장 믿었고 어느 자식 보다 더 관심과 애정을 쏟아 키웠던 장자에게 팔을 잘렸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고통스러웠다. 모두가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누가 물으면 아들에게 잘렸다고 하지 않았다. 무능한 자신이 너무 답답해 스스로 잘라버렸다고 했다. 식솔들 중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을 하고 다녔다.
시녀가 건네준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자리에 앉아 잠시 후 밥상이 들어왔다.
동오룡은 젓가락을 들어 첫술을 떴다.
푹!
입을 벌리고 젓가락에 뜨인 밥을 입안에 넣으려던 동오룡의 두 눈이 이채를 발했다
젓가락으로 밥을 떠낸 자리에 조그만 종이가 말려 있었다.
동오룡은 종이를 뽑아 펼쳤다. 잠시 종이에 적인 내용을 읽던 동오룡이 그대로 입안에 넣고 씹어 삼켰다. 증거를 완전히 없애기 위함이었다.
동오룡은 젓가락을 놓고 조용히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자 문 밖에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화들짝 놀라며 얼른 방안을 들여다 보았다. 밥을 다 먹은 줄 알고 쳐다보았지만 딱 한 숟가락 뜬 자국밖에 나있지 않았다.
동오룡은 방을 나왔다. 마당에서 만난 목와북천의 무사들이 고개를 꾸벅했다. 한 번도 흑도와 백도의 차이를 두지 않았다. 흑도든 백도든 무림인은 모두 도둑놈이라고 여겨왔었다. 그런데 조금씩 차이를 느꼈다. 지금까지 의식 속에는 흑도무림은 아주 나쁜 사람들이라고 들어왔는데 직접 겪어본 그들도 똑같은 사람이었다.
무엇으로 흑과 백을 규정짓는지 헷갈릴 만큼 차이가 없었고 오히려 겉으로는 정인군자인척 하면서 뒤로는 온갖 욕심과 부패로 찌든 무림맹 인물들 보다 솔직했고 예의가 밝았다.
포위가 되어 있었는데도 그들의 얼굴은 밝았다. 큰소리로 인사를 했고 자기들끼리 모여 무예를 수련했으며 가급적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척!
동오룡은 곤전 앞에 도착했다.
아침 일찍인 탓인지 조용했다.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한 참동안 조용한 곤전을 쳐다보았다.
동천비는 하루가 다르게 난폭해졌다. 그가 익힌 마공 탓이라고 했다. 아침나절 잠깐 평상시의 모습을 보였다가 이후로는 거의 미치광이처럼 자신을 닦달하고 위협했다. 완전히 예전의 동천비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동천비는 장남이었다. 어느 가문이든 집안의 미래는 장자에게 매여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너 나 할것 없이 장자에게 많은 관심과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것이었다. 자신도 동천비에게 모든 것을 걸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특히 마공을 익히면서 완전히 변해버렸고 자신의 팔을 자르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다.
하지만 자신의 눈에 동천비는 자식이었다. 마공만 아니라면 절대 팔을 자를 아이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허험!”
두어번 기침을 했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였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한 번 더 기침을 해도 소식이 없었으므로 곤전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동천비는 자리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었는데 방 한곳에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자고 있는 얼굴은 어렸을 때 자신에게 매를 맞아가며 상술을 배웠던 장자 동천비였다. 비록 세월이 흘렀고 장성했지만 자신의 눈에는 여전히 철딱서니 없는 아이일 뿐이었다.
마공을 배워 얼굴의 피부가 검게 탈색되었고 눈을 뜨며 흰자위가 사라져 섬칫했지만 핏줄임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처음 몇 날은 아비의 팔을 자르는 짐승 같은 행위에 분노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본인의 의지라기보다는 마공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하면서 어느정도 감정이 가라앉았다.
이제는 기호지세이다. 죽든 살든 끝장을 봐야 할 때이고 아들 또한 스스로를 마공이라는 독한 함정 속으로 자신을 내던졌다. 어차피 마공을 익혀 정상인으로 돌아오긴 불가능하다. 그럴바에는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만이 그나마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식은 희생시키더라도 가문은 건져야 했다. 무림인은 최악의 경우 함께 죽는 길을 택하지만 장사꾼은 아니었다. 한쪽은 포기하더라도 다른 한쪽은 반드시 거머쥔다.
“비아.”
조용히 불렀다. 무공가지 익힌 아이가 얼마나 술을 마셨으면 옆에서 부르는데도 모른다.
“천비야. 아직도 자는 게냐?”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가볍게 한숨이 나왔다. 덮수룩한 수염과 마른 입술에서 나름대로 적지 않은 고뇌에 쌓여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천비야. 일어나 보거라. 어서 시간이 없구나.”
멈칫!
동천비의 눈썹이 파장을 일으키더니 눈을 떴다.
흠칫!
동오룡의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언제봐도 소름끼치는 눈동자였다.
부친임을 발견한 동천비가 벌떡 일어났다.
“아버님께서 이곳엔 어인일이시옵니까?”
지금은 제정신일 때였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는 이때를 노려 했다.
동천비는 목이 마른지 물병의 냉수를 들이켰다.
커어!
트림까지 하며 잠시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천비야.”
부친이 나직이 부르자 동천비의 눈이 빛났다.
“이걸 받아라.”
부친이 조그만 봉서 한 개를 주었다.
“이게 뭡니까?”
“내가 그토록 얻고자 하던 본가의 마지막 보루이니라.”
“아…아버님 이걸 어찌 소자에게.”
이럴 때 보면 자신의 아들이고 지극이 정상적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면 다시 난폭해질 것이다.
“어서 이곳을 떠나라. 다행이 지난 몇일 동안 아비가 한 사람을 내 편으로 끌어 들여놓았느니라. 그 분 또한 남궁천의 행태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어서 쉽게 마음이 맞았다. 지금 상관량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구나. 북쪽 담장과 오솔길에 있던 경계무사들을 모두 철수 시켜놨다니 그곳을 이용해 가거라.”
동천비의 눈이 커졌다.
“장사꾼이든 무림인이든 우두머리만 살면 언젠가 다시 기회는 온다. 이왕지사 이렇게 되었으니 끝장을 내거라. 애비 또한 널 전폭적으로 도울 것이다.”
“아…아버님.”
동천비의 시선이 헐렁한 부친의 왼쪽 소매를 쳐다보았다. 순간적으로 두 눈에 아픔이 스친다. 동천비가 말없이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마를 잔뜩 찡그리고 있는 것이 아픔을 견디지 못하는 듯 했다.
“뭐하느냐? 어서 떠나거라. 시간이 없다.”
“아버님도 같이 가지시요.”
“아니다. 아비는 여기 있어야 한다. 아비가 움직이면 안되느니라.”
동천비가 빤히 쳐다보았다. 동오룡의 말뜻을 얼른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동오룡이 손짓했다.
“난 염려말고 어서 가거라. 어서.”
동천비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제 얻을 것을 얻었고 특히 부친으로부터 격려까지 받은 마당이므로 더욱 홀가분해졌고 투쟁심이 솟구쳤다.
“건강하십시오.”
“힘내거라. 난 네가 그렇게 무력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동천비가 부친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몸을 돌렸다.
곧바로 창문을 뛰어 넘어 북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동오룡은 한참동안 방안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제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내 주었다. 이제 손에 쥔 것이라고는 장원 한 채가 전부이다.
동오룡의 눈이 가늘어졌다.
바야흐로 동씨집안과 무림맹의 싸움이 궤도에 오른 것이다. 수백년간 온갖 명목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을 뜯기면서도 단 한마디 항변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됐으니 자신도 철저히 동천비를 도와 무림맹에 맞서야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사실 자신도 빠져 나갈수가 있었고 포위된 목와북천의 무사들도 마음먹으면 충분히 확보된 통로를 이용해 나갈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 협조해준 쪽이 피해를 입게 된다. 자신이 살자고 도와준 상대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된다.
또 하나 자신이 떠나지 않은 것은 적을 붙잡고 있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안에 갇혀 있어야 무림맹의 정예세력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계속 지킬 것이다. 자신으로 인해 무림맹의 정예가 붙잡히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때를 이용해 동천비가 활발하게 움직이도록 하려는 계산이었다.
초원은 끝이 없었다. 푸른 융단을 깔아 놓은 듯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계곡과 봉우리를 덮었고 그 사이로 수백 마리의 오추마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건장한 체구에 근육질의 날렵한 몸은 금방이라도 땅을 박차고 폭풍 같은 질주를 할 듯한 기세다.
상관량이 용마산가에 들어섰을 때는 천상각을 떠난지 사흘만이었다.
절강성에서 사천까지 사흘 만에 주파했는데 역시 오추마 덕이었다. 용마산가의 입구에 들어서자 일단의 무사들이 앞을 막아섰다.
“멈추시오.”
헐렁한 흑의를 걸친 두 명의 중년인이었다. 병기도 휴대하지 않았고 이색적이라면 승려처럼 머리를 밀었다는 것이었다.
상관량은 말에서 내리지 않고 날카롭게 소리쳤다.
“너흰 누구냐? 난 이곳의 주인인 상관량이니라. 무림맹의 총관이기도 하다.”
“이곳 주인이라뇨? 뭘 잘못 알고 오신 것 아니오. 이곳은 우리 주인이 주인이오.”
“닥쳐라. 네놈들의 정체가 뭐냐?”
“더 이상 떠들고 싶지 않으니 돌아가시오. 다시 말 하지만 우리 허락없이 산장 안으로 한 발자국만 들어서면 용서치 않겠소.”
훌쩍!
상관량이 말에서 내렸다. 두 눈에 살기를 담고 두 중년인에게 다가갔다.
“비켜라.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이거야 원, 도둑놈이 주인더러 비키라고 하다니.”
“뭐라. 도둑놈.”
상관량의 쌍장이 그대로 도둑놈이라고 지칭한 왼쪽 승려를 향해 뻗어갔다. 분노의 일장이어서 강력한 힘이 실렸는데 중년인 또한 피하지 않고 맞장을 떴다.
콰아앙!
강력한 폭음이 터지며 두 사람이 동시에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화악!
상관량의 눈이 커졌다.
“죽여 버리겠다.”
상관량은 전력을 끌어올려 달려들었다.
쐐애애!
공기를 찢으며 날아가는 쌍장을 보며 중년인 역시 처음과 다르지 않게 양손을 뻗어내었다. 두 사람의 장력이 중간에서 부딪혔고 커다란 굉음과 먼지가 자욱히 피어올랐다.
먼지 속에 선 두 사람의 모습은 누가 우위를 점했다고 구분할 수 없었다.
상관세가의 가주이다. 그런데 문을 지키는 경비무사가 자신과 동수라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강호에 어느 문파가의 경비무사가 자신과 동수를 이룰 만 큼 강하단 말인가.
“왜 이렇게 시끄럽느냐?”
그때 안쪽 초소의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한 인물이 걸어나왔다. 상관량이 흠칫 놀랐다. 눈이 하나 뿐인 사내였는데 전신에서 풍겨나오는 기세가 살벌했다.
“자꾸 주인이라면서 들어오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신과 싸웠던 왼쪽 중년인이 말했다.
독목의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미친놈 아니냐? 제정신이라면 그런 되지도 않을 말을 지껄이겠느냐? 저 사람이냐? 넌 누구냐? 이곳 주인은 내가 모시는 분이다.”
일목이 버럭 소릴 질렀다.
“한 번만 그따위 헛소릴 지껄이면 주둥이를 찢어 버리겠다. 여긴 우리 주인이 주인이니 썩 꺼져라.”
“그자의 이름이 뭐요?”
화악!
일목의 하나 뿐인 눈이 접시만큼 커졌다.
“지금 우리 주군더러 그자라고 했느냐?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가.”
일목이 검자루에 손을 댈 때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상관량 뒤로 오십여 명의 무사들이 날아 내렸다. 자신은 곧바로 이곳으로 달려오고 복호청이 상관세가의 무사들을 데리고 뒤따라 온 것이었다.
복호청과 부하들이 모이자 상관량의 위축된 기세가 살아났다.
“쳐라!”
힘으로 밀고 들어가기로 했다.
와아아!
상관세가의 무사들이 세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멈추거라.”
돌연 안으로부터 커다란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공격해 들어가려던 상관세가의 무사들이 일제히 내려섰다. 안쪽으로부터 두 사람이 걸어나오고 있었고 뒤로 갑옷을 걸친 이십 여명의 무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오른쪽은 육십가량의 금포를 걸친 노인이었고 왼쪽은 동천몽이었다.
오른쪽의 금포노인을 바라보던 상관량의 눈이 커졌다.
‘사천성의 도독 임제군 당천랑.’
동천몽이 말했다.
“소생의 말이 맞지 않습니까? 강호인들의 품성이 이러하옵니다. 뭣이든 힘으로 빼앗으려고 하지요 도독님.”
당천랑의 얼굴이 싸늘히 굳어졌다.
“귀하께서 무림맹의 총관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소이다. 누구보다도 도덕적이고 양심적이기 때문에 그런 직위에 계시리라 믿소. 그런데 이 무슨 행패이오.”
당천랑이 눈을 부라렸다.
상관량은 당황했다.
“도…도독 뭔가 큰 오해를.”
“아무리 강호와 관부가 서로의 권역을 인정해주고 있지만 재산권을 보호하는 것은 양보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관부의 문제이오. 무림맹의 체면을 생각해서 못 본 일로 할 테니 돌아들 가시오.”
당천랑의 말은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일반 백성들의 재산권 문제 만큼은 관부에서 보호하고 지켜준다.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다.
“난 팔지 않았소이다.”
상관량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었다. 그러자 당천랑이 옆에 있는 부관으로부터 서책을 넘겨받아 가져왔다.
팔랑!
서책 한 장을 넘기며 말했다.
“잘 보시오. 상관 총관 수결이 맞소?”
상관량의 눈이 부릅떠졌다.
거기에는 자신이 용마산가를 배일목이란 사람에게 매매했다는 수결이 있었다. 완벽한 자신의 수결이었다. 도장과 달리 수결을 더 인정해준다.
“대답하시오. 왜 침묵하시오?”
“내…내 수결이 맞긴 하지만.”
“본인이 하지 않았다는 얘기군? 다른 사람이 시늉을 내어 위조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오?”
“바로 그거요.”
“간단히 그 한 마디에 이 엄청난 재산이 상관총관의 것이 되리라고 생각 하시오.”
탁!
서책을 덮은 당천랑이 냉정히 말했다.
“당장 돌아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 사실을 황실에 올려 정식으로 문제를 삼겠소.”
상관량의 안색이 푸르락 불그락 해졌다. 그것은 분노이기에 앞서 너무 기가 막혀 말을 하지 못한 답답함이었다. 그동안 온갖 고생하며 모아온 재산이었다. 한 번에 많은 액수를 빼돌리면 금방 드러난다. 그래서 수년 동안 소리 없이 조금씩 모으고 빼돌려 마침내 얻은 마장이었다.
“이건 말이 안되오.”
“그래서 끝까지 행패를 부리겠다는 것이오?”
“내 말을 들어보시오.”
“부관.”
“말씀하소서.”
“당장 전서구를 보내라. 여기에 상황을 자세히 적고 시급히 지원군을 요청하라.”
“추웅.”
부관이 돌아설 때 상관량이 동천몽을 깊숙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동천몽의 입가에 야릇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한참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는 동천몽을 쳐다보던 상관량의 머릿속으로 어디서 본 듯 했다.
‘어디서?’
기억은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무척 낯이 익었다.
한편 상관량의 그런 눈빛을 보며 동천몽이 피식 웃었다.
‘본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영원한 봉 동오룡을 많이 닮았겠지’
상관량이 동천몽을 향해 말했다.
“오늘은 돌아가겠소. 곧 머잖아 진실은 밝혀 질것이오.”
동천몽이 대답했다.
“좋은 말씀이오. 나 또한 제발 그러길 바랄 뿐이오.”
다시 한 번 동천몽을 노려보던 상관량이 명령했다.
“돌아간다!”
복호청이 외쳤다.
“아니 그럼 두 눈 퍼렇게 뜨고 이 많은 재산을 빼앗겨야 한단 말입니까?”
상관량은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렸다.
상관세가의 무사들이 투덜거리며 마지못해 돌아섰다. 걸어가는 상관량의 두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이글거렸다.
마치 한바탕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머리로 세상을 살아왔을 만큼 뛰어난 지모와 계교를 자랑하던 자신이었다. 그런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마치 안개 속에 빠진 것 같았다.
털썩!
너무 어이가 없고 분통이 터졌으므로 길가 땅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상관량이 주저앉자 뒤를 따르던 무사들 또한 숙연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이건 꿈이었다.
“허허허!”
상관량이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지었다.
“허허허허허!”
상관량의 웃음은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땅바닥을 쳐다보며 한참 넋나간 사람처럼 웃던 상관량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배일목!’
복호청이 험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분명한 사기입니다. 모든 문서를 위조한 것입니다. 우리도 똑 같이 하면 되잖사옵니까?”
상관량이 어금니를 물었다 풀었다 하며 말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느니라. 아무리 완벽한 위조일지라도 헛점은 있기 마련이니라. 다른 건 다 위조해도 수결만큼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정설이지.”
“속하가 알기에 과거 한때 황실을 발칵 뒤집어 놓은 칙령위조 사건을 주도한 사복서생은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만들었다더군요.”
“그 놈은 천년에 한명 나올까 말까하는 대단한자이지. 하지만 그놈은 불귀도로 잡혀가 죽었다.”
이대로 가다간 꼼짝 없이 두 눈뜨고 뺏길 판이다.
“복호청.”
“대령했사옵니다.”
복호청이 잽싸게 다가와 부복했다.
“지금부터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 배일목이란 자를 알아보거라. 본가의 모든 힘을 배일목에 집중하라.”
“알겠사옵니다.”
“어쩌면 본명이 아닐지도 모른다. 철저히 추적하여 내게 보고하라.”
상관량이 일어섯 용마산가 쪽을 노려보았다. 눈 앞으로 자신을 향해 비웃던 동천몽의 얼굴이 떠올랐다. 상관량의 어금니를 깨물었다. 감히 자신을 건드린 것이 얼마나 무지한 일인지 절절히 깨닫게 해주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