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43화 (43/71)

제7장 사복서생

그는 뇌옥 무사들의 추적을 받고 조그만 동굴로 숨어들었는데 그곳에서 혈오박석을 발견했다. 혈오박석은 옥보다 비싼 것으로 강호에서는 거의 생산되지 않는 귀한 보석이었다. 이후 이곳 죄수들은 혈옥박석을 캐는데 하루 열다섯 시간씩 동원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캐낸 혈오박석이 모두 황실 고위 인물들의 재산으로 귀속 된다는 것이었다.

혈호박석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하루에 세끼씩 식사가 제공되었고 정상적인 뇌옥과 다를 바 없었다. 단지 한 번 들어오면 절대 살아 나가지 못한다는 사실 만이 다른 뇌옥과 다를 뿐이었다. 그런데 혈오박석이 발견되면서 강제노동이 생겼고 어차피 죽기 전에는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안 죄수들은 일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뇌옥의 무사들이 일을 하지 않자 음식을 줄여버렸다.

굶주림은 그 어떤 것보다 무서운 공포였다. 하는 수 없이 죄수들은 먹기 위해 뼈가 빠지도록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일은 고되고 배정된 식사는 한정되어 있다 보니 죄수들은 급기야 시체를 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사실을 도주도 알고 있느냐?”

“모를 리가 있습니까?”

동천몽이 눈을 감았다. 죄를 지었으므로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킴으로 죄값을 지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들의 배를 부르기 위해 먹는 것을 무기삼아 강제로 노동을 시킨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거대한 동굴은 대낮처럼 밝았다. 땅속에 묻힌 혈호박석이 내 뿜는 광채 때문이었는데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었다. 작업은 캐는 사람들과 운반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져 진행되었다. 곡괭이를 이용해 혈호박석을 캐내면 절벽으로 운반했고 거기서 사흘에 한번 씩 오는 배에 실었다.

“이 새끼들 동작 봐라. 빨리 빨리 못하겠나?”

뇌옥의 무사들이 조그만 동작이 굼떠도 채찍을 휘둘렀다. 그럴때마다 죄수들은 비명을 흘리려 살려달라고 삭삭 빌었고 가냘픈 몸이 부러질 만큼 곡괭이질을 해야했다.

“오늘은 의무적으로 오십 명을 굶기라는 도주님의 명령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오십 명을 뽑아 굶긴다는 말에 죄수들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러더니 손놀림이 바빠졌다. 오십명에 포함되면 하루종일 굶어야 한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퍽퍽!

퍼퍼퍼!

죄수들은 정신없이 일에 매달렸다. 그러나 워낙 마른 데다 체력이 약해 금세 여기저기서 쓰러지는 사람이 속출했고 그때마다 무사의 채찍은 인정사정없었다.

“사…살려주십시오. 일어나겠습니다.”

“용서를.”

채찍에 맞아 피가 범벅이 된 채 곡괭이를 쳐들어 올렸다.

하지만 몇 번 내려찍지도 못하고 다시 쓰러졌고 그러면 또다시 채찍이 떨어졌다.

“일목 저놈을 잡아 오너라.”

동천몽의 눈이 살모사처럼 번뜩였다. 일목이 쓰러진 죄수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자에게 다가갔다.

“어이.”

뚝!

채찍을 쳐들었던 무사가 돌아보았다. 일목을 보며 인상을 썼다.

“밝은 내 귀가 잘못들었을 리는 없고 지금 나에게 어이라고 했느냐?”

“이름을 모르니까 어이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부르겠느냐? 그렇다고 여보라고 부를 수도 없고.”

무사가 돌아섰다.

손등에 힘줄이 불거진 것이 채찍을 감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흐흐! 네놈이 불귀도에 오더니 완전히 감을 잃었구나. 맛좀 봐라.”

채찍을 휘둘렀다.

쉬이익!

날카로운 파공음을 흘리며 날아오는 채찍을 일목의 한손으로 가볍게 나꿔쥐었다.

“어라! 이 새끼가.”

확 잡아 당겼지만 꼼짝도 않는다. 무사의 눈이 커졌고 다시 한번 잡아 당겼는데 오히려 자신이 맥없이 끌려갔다.

“가자!”

일목이 오른 팔목을 쥐더니 동천몽에게 끌고 갔다. 무사는 끌려가지 않기 위해 온 힘을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무사의 눈이 커졌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어느새 동천몽이 앞에 끌려와 있었다.

“네…네놈들은…억!”

“네놈?”

일목의 주먹이 무사의 입을 부쉈다.

콰아!

무사도 지지 않고 주먹을 뻗었지만 일목에 의해 다시 손목이 붙잡혔고 부드득 하는 소리가 들리며 손목이 부러졌다.

“으아악!”

“조용히 해라. 계속 시끄럽게 하면 왼손도 부러뜨린다.”

“뚝!”

무사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얼굴은 고통으로 우그러졌고 눈에는 공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미 무서운 고수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이름을 말해보겠느냐?”

무사가 더듬거렸다.

“서…성상소입니다.”

“너 혹 역지사지라는 말을 아느냐?”

부왁!

일목의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혹시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살을 꼬집었지만 꿈이 아니었다.

‘여…역지사지.’

물론 본인도 그 뜻은 모른다. 단지 네 글자로 된 것을 보면 소위 말하는 사자성어 같았다. 사자성어는 무척 공부를 많이 한 선비들만이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일목에게 동천몽의 단호한 구사는 경악을 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모르나보군. 잘 듣거라. 한 마디로 입장바꿔 생각해보라는 뜻이니라.”

동천몽이 잔뜩 목에 힘을 주고 말했다.

“네가 죄수이고 지금 맞은 사람이 간수여서 널 채찍으로 때렸다고 생각해 보거라. 너의 기분이 좋겠느냐? 나쁘겠느냐?”

무사가 대답 하지 않자 일목이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무사가 입을 열어 대답했다.

“나…나쁘지요.”

“항상 남의 입장을 먼저 헤아리는 삶인 인간다운 삶이니라. 그런데 넌 일제 상대 입장을 헤아리지 않는 사람이구나.”

무사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헷갈렸다. 물론 진짜로 동천몽이 하는 말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이곳의 감옥이다. 감옥은 죄수들이 있는 곳이고 인간답게 대우해줘서는 통제가 안된다. 그런데 세월 좋은 소리를 하고 있으니 기도 막히면서 어이가 없었다.

“너의 눈빛을 보니 무척 어이가 없나보구나.”

“아…아니옵니다. 원래 내 눈빛이 조금.”

“불귀도의 간수들은 모두 몇이냐?”

“모두 서른세 명이옵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이곳으로 모두 불러 모을수 있느냐?”

“휘파람을 짧게 세 번 불면 됩니다. 그것은 비상사태가 발생했다는 신호이지요.”

“당장 불러 모아라.”

무사의 입가에 짦은 환희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어떻게 무공을 잃지 않고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나름대로 한 가락씩 하는 동료들이다. 서른 세 명이 힘을 모으면 천하제일고수도 쉽게 이기지 못할 능력들이었기 때문에 쾌재를 부르며 휘파람을 불었다.

삑!

삐이---삑!

내공이 실린 휘파람은 강렬하게 퍼져 나갔고 메아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동굴 입구에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무슨 일인가?”

“갑자기 무슨 비상이야. 또 탈옥한 놈이 생긴 건가?”

도주 견미광까지 허겁지겁 나타났다.

“상소 너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동료 한명이 다가오며 성상소 얼굴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윤기가 쫙 흘렀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허옇게 떴지?”

견미광이 물었다.

“무슨 일로 비상을 걸었느냐? 자초지종을 말해보거라.”

성상소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동료들이 몰려들자 생기를 되찾고 웃음을 지었다.

“여기 두 놈은 무공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속하가 당했습니다.”

그러면서 부러진 오른쪽 팔목을 보여주었다.

그제 서 야 모든 시선이 동천몽과 일목에게 고정되었다.

“저…정말이냐?”

일목이 히죽 웃었다.

“이 자식이 감히 도주님 질문에 웃어.”

무사 한명이 검을 뽑아 일목을 직도항룡의 식으로 내려쳤다.

하지만 어느새 일목은 그 자리를 비켜나 무사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꽉직!

“흑!”

무사가 그대로 주저앉아 거품을 물더니 기절했다.

견미광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무리 방심을 했기로서니 단 일격에 자신의 수하를 해치운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분명히 무공을 폐했을 텐데 잃지 않다니 고인이구려?”

동천몽이 바위에 걸터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견미광이라고 했던가? 너의 권위를 훼손하고 싶지 않다. 물론 이곳의 질서도 깨뜨리고 싶은 마음은 더욱 없고, 하지만 한 가지만 약속을 해라.”

견미광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들어봅시다.”

“죄수들에게 노동을 시키지 마라. 정당한 노동도 아니고 황실의 윗사람들 사리사욕을 위해 동원되는 것 아니더냐? 모두 죄를 짓고 들어온 사람들이므로 편애할 마음은 없지만 그렇다고 짐승 취급을 받으며 강제 노동을 시킬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우헤헤헤! 저 새끼 진짜 웃기네. 뭐, 누구도 강제노동을 시킬 권한은 없다고! 저 새끼 꼭 부처님 같은데.”

일목이 말했다.

“대법왕님이시다.”

“미친놈들.”

한 명의 무사가 검을 휘두르며 다시 달려들었다.

그러자 동천몽이 찔러 오는 검을 맨손으로 잡았다.

“거…검을 맨 손으로.”

검을 잡힌 무사는 빼내기 위해 비틀고 당기며 안간힘을 썼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악! 뜨거.”

무사가 비명을 지르며 손에서 검을 놓았다. 순식간에 검이 불덩이처럼 달아 오르더니 녹아 물처럼 흘러내렸다. 가공할 신기에 모두가 경악했고 견미광도 마른침을 삼켰다.

생각보다 더 강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강하긴 하지만 자신들이 밀린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쳐라!”

무사들이 달려들었다.

일목이 동천몽 앞을 가로막더니 냉갈을 터뜨렸다.

“네놈들이야 말로 이런 곳에서 살다보니 감각이 무뎌졌구나. 오냐 모조리 모가지를 돌려주마.”

일목이 쓰러져 있는 무사의 검을 허공섭물의 방법으로 낚아 잡더니 달려드는 무사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콰아아!

일목의 무에는 강하다. 포달랍궁의 사대법왕 수준에다 얼마 전 만천의옹으로부터 천년설삼을 제공받아 두 배는 강해졌다. 이제 그의 상대가 될만한 적수는 현 강호에서 손가락에 꼽는다고 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크악!”

“억!”

두 명의 사내가 허리가 양단되어 죽었다.

나머지 동료들이 충격으로 머뭇거리는 사이 일목의 검은 더욱 살기를 뿌렸다.

촤아아!

카캉!

억---어어억!

네 무사의 목이 베어지고 목에서 폭발하는 피가 동굴 천장까지 치솟는다.

동천몽이 견미광을 향해 다가갔다. 이미 견미광의 얼굴은 푸르죽죽해 있었다. 충격과 자신감 저하에서 오는 현상이었는데 동천몽이 다가오자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챙!

검을 뽑아들었다.

슉!

직선으로 찔러 들어오자 동천몽이 좌측으로 반보 이동했고 검은 비켜갔다. 하지만 실패를 인지한 견미광의 검은 수평으로 돌변했다. 종에서 횡으로 급변하는 초식은 검에 상당한 조예가 없이는 불가능한 어려운 동작이었다.

스윽!

그러나 동천몽의 몸은 어느새 뒤로 한걸음 물러났고 견미광의 검은 복부를 스치듯 지나갔다.

확!

검이 지나가는 틈을 노려 동천몽의 오른발이 견미광의 사타구니에 박혔다.

사실 사타구니만큼 가장 확실한 급소도 없다. 천하 없는 장사도 제대로 한방 맞으면 주저앉는 곳이 사타구니이고 다른 급소와 달리 아프기까지 하다. 또한 통증이 쉽게 가시지 않고 부어오르는 특징을 갖고 있어서 한번 맞았다면 죽지 않는 다 해도 최소한 열흘 이상은 걷는데 가공할 장애를 느끼는 곳이 사타구니다.

“끅!”

너무 고통스러우면 비명도 짧다. 견미광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쭈그렸다.

툭!

손에 들린 검은 땅바닥에 떨어졌고 양손으로 사타구니를 감쌌는데 이마에 주름이 생기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숨을 멈춘다.

부글!

입술 사이로 흰 거품이 밀려나왔다. 사타구니를 정통으로 맞았을 때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였다. 고통이 심 할수록 거품 또한 많이 나는데 순식간에 견미광의 입 주위로는 흰 거품이 수북했다.

퍽!

사타구니를 감싼 채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주륵!

뺨을 타고 눈물이 흘린다. 이때 나는 눈물은 아무 때나 흘리는 눈물고가 다르다. 아무 때나 흘리는 눈물은 양이 많지만 이때 흘리는 눈물은 너무 미치도록 아프기 때문에 아주 작게 흐른다. 많아야 한 방울인데 견미광은 더 이상 흘리지 않았다.

크악!

아이고!

비명은 계속 들려왔고 죄수들 또한 어느새 몰려들어 싸움 구경에 열을 올렸다. 비록 무공은 폐지됐지만 과거 한 솜씨 했던 죄수들은 일목의 검을 보며 안색이 굳었다.

‘강호 어디에 내놔도 상대가 드물 무서운 인물이다!’

한편 견미광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여전히 펴지지 않았는데 완전히 굴복한 눈빛이었다.

척!

동천몽이 일장 앞 바위에 걸터 앉았다.

“도주!”

“마…말씀하소서.”

조금 전과는 완전 판이한 태도요 목소리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동천몽의 비위를 거스리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이 역력했다.

“여기서 생산되는 혈호박석전부가 황실과 형부 고위 관리들에게 들어 간다는 게 사실이오?”

“네.”

“당신도 적지 않은 떡고물이 떨어지겠군?”

“부인 않겠습니다.”

“황실 감찰반에서 이 사실을 안다면 어찌되겠소?”

번쩍!

견미광의 눈이 커졌다.

만약 이 엄청난 부조리가 알려지면 자신은 물론 가족들까지 참수를 당할 것이다. 유난히 관리들의 부조리에 엄한 현 황실이었다.

퍽!

급기야 이마를 바닥에 찍었다.

“사…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도주.”

“마…말씀 듣사옵니다.”

“혹시 이번에 주령왕이 주동되었던 황실의 반역 사건에 대해 들었소?”

“물론입니다. 주령왕 전하와 측근들 모두가 일망타진되었다고 들었사옵니다.”

“그 중심에 내가 있었다면 믿겠소?”

“으헉!”

고개를 번쩍 치켜든 견미광의 눈에 놀라움이 들어찼다.

“하…하오시면 대법왕?”

동천몽이 백상불을 꺼내 보았다.

퍽!

견미광이 다시 이마를 바닥에 찍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돌에 잘못 찍어 피가 흘렀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않고 고개를 쳐박고 있었다.

“죄는 미워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따위의 말은 하지 않겠소. 다만 최소한의 대우들은 해주시오. 특히 밟은 굶기지 마시오. 배고픈 것처럼 서러운 것 없소.”

“명심, 또 명심 하겠나이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마…말씀만 하십시오. 무조건 들어드리겠사옵니다.”

“그렇게 말하니 고맙소.”

그때 일목이 다가오며 말했다.

“끝까지 반항하는 일곱 명만 죽였고 나머지는 제압했사옵니다.”

동천몽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했다.

“여기 사복서생이라고 있소?”

“있습니다.”

“그 사람을 데리고 나가야겠소. 이의 있소?”

견미광의 눈이 빛을 발했다.

이미 인생 쓴맛 단맛 다 본 오십이다. 동천몽의 말은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덮어줄테니 거래를 하자는 의미였다. 사람 한명 내보내고 안 내보내고는 자신 마음이다. 이거야 말로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는 거래 아닌가.

“전혀 없습니다. 제발 데려가 주십시오.”

“시원시원하게 협조해주니 감사하오. 일목 가서 사복서생을 데려오너라.”

일목이 죄수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사복서생이 어떤 놈이냐? 앞으로 나오도록.”

죄수들이 좌우로 나눠지고 한 명의 죄수가 나타났다. 대략 서른 중반쯤 되어 보였는데 무척 준수하게 생겼다.

“내가 사복서생이오만.”

“따라 오너라.”

일목이 사복서생을 데리고 동천몽 앞으로 데려갔다.

동천몽이 사복서생을 살폈다.

“이름이 뭐냐?”

“그건 곤란합니다. 우린 본명으로 활동하지 않거든요.”

동천몽이 피식 웃었다. 본명을 말하지 않는 다는 것은 언젠가 이곳을 나갈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곳을 벗어나리라고 보느냐?”

“사람 사는 세상, 미래를 어찌 알겠소.”

동천몽이 웃음을 지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모두가 이곳에 들어오면 삶을 포기하는데 그는 인생이란 예측 불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대단한 배짱이고 여유가 아닐 수 없었다.

“잠깐!”

동천몽이 사복서생을 데리고 돌아서려는데 누군가 달려왔다.

이왕식이 허겁지겁 뛰어왔다.

“넌 간왕 아니냐?”

일목이 비아냥 거리듯 말했다.

“선배님 나도 데려가 주십시오.”

일목이 피식 웃었다.

“너 자꾸 날 더러 선배님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나 너보다 나이 작아. 눈이 하나 뿐인 탓에 조금 늙어 보이나 본데 의외로 젊다. 그런데 어떻게 네가 아저씨 선배님이 될 수 있겠느냐? 그러지마라.”

“아무튼 선배님, 이 후배를 데려가 주십시오. 데려가 주시기만 하면 소인이 지금까지 터득하고 배운 간술을 모두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가…간술?”

이왕식이 웃었다.

“여자 후리는 기술요. 그것도 아무나 하는게 아닙니다. 규칙적이고 체계적인 기술이 있습니다. 무공으로 말하면 초식 같은 것이지요.”

빠악!

일목의 발길이 이왕식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넌 여기서 살거라.”

이왕식이 사타구니를 감싸쥐고 세 사람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데려가 주세요. 난 여기가 싫어요.”

십여장 걷던 동천몽이 뭔가 생각 난 듯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간왕은 희색했고 견미광은 공포에 빠졌다. 그때 견미광의 귓가로 동천몽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혹시라도 형부에서 사복서생에 대한 문의가 오면 탈옥하다 바다로

뛰어 들어 숨졌다고 회신하거라.’

‘예!’

세 사람은 동굴 밖으로 자취를 감췄다.

세 사람이 사라지자 동굴에 긴장감이 흘렀다. 죄수들은 서둘러 각자의 위치에서 노동을 재개했다.

견미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사타구니가 부어 올라 다리를 벌리고 엉거주춤 섰다. 슬며시 아랫도리를 열고 내려다보던 견미광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랫도리가 호박 만큼 부어 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힘을 더 주었다면 깨졌을 것이고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자신의 목숨쯤은 얼마든지 빼앗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데도 살려줬다는 생각에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악착같이 살아났다는 감동을 자제하고 죄수들을 향해 외쳤다.

“일 그만하고 모두 뇌옥으로 돌아간다.”

순간 죄수들이 멍 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뭘 봐, 우리말도 못알아 듣느냐? 뇌옥으로 철수하라고…윽!”

소리를 꽥 지르다 보니 힘이 들어갔고 사타구니로부터 통증이 올라왔다.

섬서성 도독 목사룡이 거처하는 월군산장(月君山莊)의 담을 넘는 사람들이 있었다. 십여장 간격으로 망루가 서 있고 그 사이로 비밀 초소가 있었지만 세 사람의 침입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난 사흘에 걸쳐 월군산장의 경비상태를 철저히 살폈기 때문에 거침이 없었다. 빛은 없었지만 그래도 나무 그늘과 담벼락이 만드는 그늘을 이용해 세 사람은 월군산장 깊숙이 들어갔다.

처처척!

세 사람의 발걸음이 약속이나 한 듯 멈췄다. 그들 눈앞으로 한 채의 전각이 세워져 있었고 어둠속이지만 편액의 글씨는 그들에게 훤히 보였다.

‘사성각(事省閣)’

사성각은 섬서성 사람들의 토지와 가옥 등 소유재산에 관한 서류들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었다. 보관된 서류의 중요성으로 인해 다른 곳보다 경비상태는 엄했다.

쉬쉬쉭!

동천몽의 오른손이 뻗어나갔다.

지옥지가 펼쳐졌는데 사성각 앞에 서 있던 다섯 명의 무사들의 마혈과 수혈이 동시에 제압되었다. 마혈이 제압되었으니 움직일 수 없고 수혈이 찍혔으므로 깊은 잠에 빠졌다. 다섯 명의 무사들은 꼿꼿하게 서서 잠이 들었는데 순찰자가 지나가다보면 근무에 충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딸칵!

부수면 안 된다. 절대 흔적을 남겨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사복서생이 준비한 열쇠로 문을 열었다. 대장간에 가서 괴상하게 생긴 열쇠를 주문하여 만들었는데 본인의 말을 빌리면 어지간한 자물쇠는 모두 열린다고 했다.

문을 닫고 세 사람의 신속히 들어갔다.

안에는 거대한 서고가 있었고 각 칸마다 산더미 같은 서류가 쌓여 있었다. 실내는 먹물처럼 어둡다. 그렇다고 불을 켜면 창밖으로 빛이 흘러나가 침입 사실이 노출된다.

사복서생은 동천몽과 일목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자신의 육안으로는 서고에 쓰여진 글씨를 읽을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은 빠르게 살피며 지나갔다.

반다경까지 빠르게 서고를 훑으며 지나가던 동천몽의 걸음이 멈췄다.

‘섬서성(陝西省), 토지부(土地部)’

동천몽은 서고를 천천히 훑어나갔다. 한참을 꽂혀 있는 서책들을 살피던 동천몽이 눈을 빛냈다.

스윽!

동천몽은 뽑아든 서책의 표지를 주시했다.

‘천지광옥(天地鑛玉)’

팔랑!

서책을 넘기자 천지광옥의 크기와 주인의 이름이 적혀있고 두개의 도장이 박혀 있었다. 하나는 천지광옥 주인의 도장이고 다른 하나는 보증한다는 관가의 도장이다.

슥!

사복서생이 품에서 서책을 꺼냈는데 놀랍게도 두 개가 똑같았다. 종이 질은 물론이고 글씨와 도장까지 단 한군데도 틀린 곳이 없었다.

척!

사복서생이 자신의 품에서 꺼낸 서책을 그 자리에 꽂아 넣었고 동천몽의 손에 쥐어진 서책은 한 줌 재로 사라졌다.

동천몽의 얼굴에 야릇한 웃음이 떠올랐다.

월군장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봉우리에 세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월군장원은 조용했고 아무도 세 사람의 침입 사살일 알지 못했다.

“남궁천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요? 아마 자리에 누울지도 모르겠사옵니다.”

동천몽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사복서생을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이 조금은 굳어 있었다.

“일이 완벽히 성공리에 끝났는데 안색이 밝지 않군?”

“솔직히 이런 기분 처음이옵니다.”

“너무 크다는 건가?”

“조그만 집 한 칸 전답 몇 뙈기는 위조를 해봤지만 이렇게 큰 덩치는 처음이어서”

“ 더구나 상대가 남궁세가라 더욱 마음에 걸린다는 것이군. 염려마라. 너의 신변에는 아무런 변고나 위험이 없을 것이다. 넌 죽은 사람으로 처리되었다.”

“에옛?”

사복서생이 놀라 쳐다보았다.

동천몽은 자신이 견미광에게 사복서생이 탈옥하다 바다에 빠져 죽은 것으로 하라고 했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그제서야 사복서생이 한숨을 내 쉬더니 히죽 웃었다.

“난 또.”

사복서생은 당대제일의 위조전문가였다. 진짜 보다 더 진짜처럼 만들기 때문에 누구도 그의 위조를 알아내지 못했다. 그의 위조로 인해 엄청난 사건이 끊이지 않자 황실에서는 금위영반 무사들까지 동원하여 무려 삼년을 추적한 끝에 겨우 붙잡아 불귀도로 보낸 것이다.

“넌 죽은 사람이다. 그러니 앞으로 무슨 짓을 해도 너의 짓이라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사옵니다.”

“말해보거라.”

“하고 많은 광산 중에 왜 하필 남궁세가의 소유입니까? 남궁세가는 현 강호에서 가장 강맹하고 남궁천은 무림맹주이기도 합니다.”

“원래는 우리 아버지 것이었다.”

“무슨?”

사복서생의 눈이 빛을 뿌렸다.

일목이 말을 해 주었다. 천지광옥은 원래 천상각 소유였는데 천상각으로부터 뜯어간 돈을 모아 남궁천이 구입했다. 천상각에서는 무림맹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천지광옥을 팔아 자금을 대어야 했고.

“한마디로 대법왕님 집안에서 받은 돈으로 대법왕님의 재산을 구입한 것 아닙니까?”

동천몽은 가만 웃었고 사복서생이 일목을 쳐다보았다.

“잘 숨으셔야겠습니다. 보나마나 남궁천이 혈안이 되어 찾으려 할테니까 말입니다.”

천지광옥의 명의를 일목 앞으로 해놨다. 남궁천은 일목이 누군지 부하들을 동원해 찾으려 발버둥 칠 것이다.

“일단 천지광옥으로 가서 남궁천의 부하들을 쫒아내야지. 서류는 준비 됐느냐?”

“품에 잘 넣어 두었습니다.”

동천몽이 사복서생을 보며 말했다.

“가거라. 어디든 가고 싶은데로 가서 살거라. 하지만 두 번 다시 위조나 사기로 백성들 가슴을 아프게 해서는 안된다. 가난해도 깨끗하게 살거라.”

“솔직히 자신은 없지만 정직하게 살기 위해 노력은 해보겠사옵니다. 대법왕님.”

사복서생이 웃음을 지었다.

광산에서 뿜어나오는 열기로 인해 안개가 자주낀다. 특히 아침 기온이 떨어질 때면 안개는 더욱 짙게 끼었다. 천지광옥의 옥주 태우노는 잠자리에서 늦게 일어났다.

어제밤 광산 간부들과 오랜만에 회식을 한 것이었다. 지난 달 옥 생산량이 목표치를 초과했기 때문에 인근 기루의 기녀들까지 불러다 밤새 술을 마시며 오랜만에 취했다.

“자기 일어났어.”

여인의 손이 침대에 걸터 앉은 태우노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손톱 끝에 붉은 색이 칠해졌고 손가락이 게처럼 길다.

여인은 다름 아닌 어제 밤 데려온 목하루의 주인 송월이었다. 요즘 엄청난 불경기인데 너무나 큰 매상을 올려 주었다고 스스로 하룻밤 수청 들기를 자청했다. 기녀나리오는 늙은 서른둘 이지만 몸매나 미모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고 특히 잠자리에서의 기교는 압권이었다.

태우노는 어제 밤 다섯 번이나 숨이 넘어갈 뻔했다. 노련한 장인처럼 자신을 울렸다 웃겼다 마음대로 조종했고 그녀 또한 철저히 즐겼다.

밤새 녹초가 되도록 시달렸는데도 아랫도리가 다시 기지개를 켠다. 그걸 눈치 챈 듯 송월의 손이 자연스럽게 아랫도리를 쓰다듬었다. 태우노의 아랫도리는 다시 분노를 터뜨렸고 체력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본능에 의해 송월을 덮쳤다.

두 사람이 알몸으로 변해 서로를 힘차게 유린해 갈 때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이른 아침에 자신을 찾아올 부하들은 없었다. 천지광옥에는 관리무사 오십 명과 작업인부 일천 명이 있다. 오십 명이 일천명을 다스리는데 자신의 거처를 찾아 올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는 관리무사는 부옥주와 남궁세가의 총관 말고는 없었다. 물론 인부들은 근처에 얼씬도 할 수가 없다.

“누가와요?”

밑에 깔린 송월이 태우노를 가볍게 밀어냈다.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보고자라면 밖에서 애기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송월이 다시 태우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런데 밖에서 보고 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갑자기 문이 거칠게 열렸다.

급작스런 일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끌어안은 채 입구를 돌아보았다.

“악!”

송월이 기겁하며 태오노를 밀어내고 이불로 몸을 감쌌다.

한 명의 흑의사내가 우뚝 서 있었다. 흑의사내는 이불로 겨우 가슴만 가리고 있는 송월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흑의사내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흑의사내의 얼굴이 우울하게 가라 앉았다.

태우노는 당당했다. 사내들끼리였으므로 굳이 옷을 걸칠 필요도 없었기에 알몸으로 침대에서 내려섰다. 여인과 그 짓 한 것이 천벌 받을 일은 아니었다.

“뭐냐?”

휙!

흑의 사내가 품에서 서책 한 개를 꺼내 던졌다.

탁!

본능적으로 오른손을 뻗어 서책을 받아 든 태우노가 표지를 살폈다. 깔끔하게 단장된 얇은 서책인데 광서(鑛書)라고 쓰여있었다. 이게 무엇이냐는 듯 쳐다보자 흑의사내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말 그대로 광산 문서라는 뜻이다.”

“광산문서?”

“주인이 바뀌었다는 거지.”

멈칫!

태우노의 눈이 커졌다.

“무슨 소리냐? 광산의 주인이 바뀌다니.”

“보면 알 것 아니냐?”

태우노가 흑의사내를 한 번 쳐다보더니 서책을 넘겼다. 내용을 살피던 태우노의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어…어찌.”

“당장 짐 챙겨 비우도록.”

다시 한 번 서책을 살피던 태우노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좀 자세히 말해보아라. 여기 천지광옥의 주인이 언제 바뀌었단 말이냐? 난 가주님으로부터 단 한 마디 언급도 듣지 못했다.”

“아무튼 비켜라. 이제 오늘부터 천지광옥의 주인은 나다. 반시진의 시간을 줄 테니 부하들을 모두 데리고 꺼져라. 만약 그 안에도 나가지 않으면 사유재산 침입 죄로 관부에 고발하겠다.”

거짓말 하는 것 같아보이지는 않는다. 아니 그런 엄청난 일을 거짓말 할 리가 없다.

태우노는 다시 보았다.

전 주인 남궁천 이름이 정확히 쓰여 있고 눈에 익은 수결이 있다. 그 아래로 배일목이란 이름과 수결이 또 있다. 결국 눈앞의 흑의사내 이름이 배일목이란 뜻이었다.

동천몽 자신의 이름으로 하면 남궁천이 눈치를 챌 것 같기에 일목의 법명에 배교 후예이기 때문에 배자를 붙여 배일목으로 했다. 서류상천지광옥의 주인은 일목인 것이다.

꽈당!

문이 거칠게 열리고 수하 한명이 뛰어들어왔다.

“오…옥주님 들었습니까? 광산이 어제 자시부로 배일목이라는 사람에게 넘어갔다 하옵니다. 지금 배일목측 사람들이 와서 우리더러 모조리 나가라고 몰아내고 있사옵니다. 어떻게 할까요?”

“옥주님.”

“빨리 나와 보십시오.”

검을 찬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연이어 들이닥쳤다.

태우노는 의복을 걸치고 부리나케 밖으로 나갔고 동천몽은 여전히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는 송월을 보았다.

“뭘 봐요. 응큼하게, 빨리 눈 돌리지 못해요.”

여인의 알몸을 보는데 여전히 아래로 부터는 반응이 없었다. 동천몽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이미 밖은 속의로 갈아 입은 천룡구십구불이 들어와 남궁세가의 무사들을 몰아 내고 있었다. 그들이 항의 할 때마다 일목이 앞장서서 매매서류를 보여주었다.

“우리도 나가야 합니까?”

인부들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일목이 큰 소리로 내공을 실어 말했다.

“너희들은 아니다. 새로운 주인은 죽어도 여러분과 함께죽고 살아도 함께 사시는 분이다. 다른 주인들처럼 인력정리라는 미명하에 모가지를 자르거나 불규칙하게 일을 하도록 만드는 일은 없을테니 안심하라.”

“정말입니까?”

“믿어도 됩니까? 나중 뒤통수치는 것 아니지요?”

일목이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거짓말을 하면 내 아버지가 개다.”

“믿습니다.”

“관세음보살!”

인부들이 환호를 지으며 박수를 쳤고 일목은 각자 일터로 돌아가 계속 작업을 하라고 지시했다.

“난 도저히 믿을 수가 없으니 잠시 기다려 주시오. 본가에 전서구를 보내 확인을 해야겠소.”

동천몽에게 다가와 태우노가 말했다.

“전서구를 보내든 연락을 하든 자유다. 하지만 내 땅 밖에 나가서 하도록.”

홧김에 검을 뽑고 싶었지만 만약 정말로 주인이라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뿐만 아니라 그가 데리고 온 무사들의 면면이 범상치 않았다. 태우노는 하는 수 없이 일단 수하들과 함께 광옥 밖으로 쫓겨나야 했다.

‘꿈은 아닌데!’

허벅지를 꼬집었는데 아프다.

동천몽이 더욱 눈을 부라렸다.

“관부를 끌어들여 모두 치도곤을 내기 전에 내 눈앞에서 없어져라.”

태우노가 기가 막힌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이…이보시오. 정말로 당신 소유이오?”

“학인해보면 알 것 아닌가?”

가주 남궁천이 매매를 했다면 연락이 있었을 것이고 자신과 한마디 상의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도 그런 얘긴 들어본 적도 없고 눈치도 없었다. 더구나 황금알을 낳는 중원최고의 광산을 팔리는 더욱 없었다.

도저히 있을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었지만 동천몽이 하도 정색을 하였으므로 태우노는 안방으로 들어가 벽을 밀었다. 그러자 기관장치에 의해 벽이 열리고 그 안에 또 하나의 비밀스런 방이 있었는데 만년한철로 된 금고가 있었다.

천지광옥이 남궁세가의 소유라는 것을 증명해줄 서류는 모두 세 군데에 보관되어 있었다.

하나는 눈앞의 금고에 있고 다른 한부는 남궁세가에 있으며 마지막 한 부는 섬서성 도독이 거주하는 월군산장에 있었다.

“거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투덜거리며 쭈그리고 앉아 금고를 열기 시작했다.

드르륵!

등근 손잡이를 좌로 돌렸다 우로 돌렸다 하더니 덜컹 소리를 내며 금고가 열렸다. 금고 안에는 상당한 금화와 한부의 서책이 있었는데 바로 남궁세가 소유임을 증명하는 문서였다.

파라락!

서책을 넘기던 태우노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이런.”

소유자 남궁천이란 이름이 쓰여 있어야 할 곳에 배일목이라고 쓰여 있었다.

퍼퍽!

혹시 자신이 밤새 송월과 극심한 정사로 인해 체력에 문제가 생겼고 그로 인해 잘못 읽고 있는가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봤지만 여전히 소유자 이름은 배일목이었다.

아무리 서책을 앞뒤로 살피고 뒤집고 거꾸로 돌려봐도 소유자는 배일목이다.

“모두 제압했습니다.”

덕배선사가 들어와 보고했다.

동천몽이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수고했다.”

태우노가 일어섰다.

동천몽을 쳐다보았는데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은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나 끝내 입 밖으로 뱉어 내지 않고 등을 돌려 방을 나갔다.

천목산에 차 익어가는 냄새가 풍겼다. 봄과 가을에 따는데 가을 차는 봄 차와 달리 억세고 쓰다. 하지만 깊은 맛이 있어 애호가들에게는 무척 인기를 받는다.

남궁천 또한 나른한 오후 햇살을 받으며 가을 차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차를 즐기기도 하지만 오늘 마시는 차는 더욱 달다. 가을차가 달고 맛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워낙 모든 일이 뜻대로 흘러가고 있으니 쓰디 쓴 차 맛도 기분에 따라 달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입구에는 그의 시종인 곱추노인 차우가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눈이 희멀겋고 비쩍 말라 힘이라고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 일신의 지신 절기는 측량되지 않을 만큼 깊다.

“자추!”

“네 주인님.”

“내년 봄이면 남궁시대가 되지 않겠느냐?”

“지금 추세로 본다면 굳이 봄까지 갈 것 같지도 않사옵니다.”

“너무 서둘러도 좋지 않다. 서두르다 보면 흘리게 되고 그것이 불씨가 되지.”

남궁천이 천천히 일어나 창밖을 쳐다보았다.

천목산 끝에 걸린 석양이 오늘따라 붉다. 저녁노을이 붉으면 내일의 날씨는 쾌청하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미래가 쾌청하다는 것을 암시 하는 것 같았기에 남궁천의 입가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무통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무림맹의 모든 권한의 자신에게 쥐어져 있다. 소림도 무당도 모두 자기 명령을 듣고 장문인들 또한 자신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다.

이제 천하의 절반은 확실히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무통령으로 정도무림을 장악 했으니 절반이다. 이제 남은 것은 한 가지였다. 천상각 어딘가에 묻혀 있는 막대한 보화를 거머쥐는 것이다. 그것으로

묵와북천을 밟으면 나머지 반까지 손에 들어온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앞선 데다 군수자금까지 풍부하다면 그 전쟁의 끝은 뻔할 수 밖에 없었다.

“맹주님 섬서성에서 보내온 전서구이옵니다.”

전서구를 담당하는 조구각의 각주가 손가락 굵기의 얇은 죽통을 가져왔다.

스윽!

죽통을 받아든 남궁천이 안에 말려져 있는 서찰을 꺼내 펼쳐들었는데 무척 경쾌하다. 섬서성은 자신의 알짜배기 광산이 있다. 요즘 떼돈을 벌고 있기 때문에 광산만 떠올리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서찰을 펼 쳐 읽던 남궁천의 눈이 커졌다.

와직

한손에 쥐고 있던 죽통이 먼지로 화해 사라졌다.

“주인님 무슨 일이옵니까?”

자추가 다급히 물었다.

팔랑!

손에서 쪽지가 떨어졌고 자추가 허공섭물의 방법으로 잡아당겨 읽었다.

“이…이런 터무니없는.”

자추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된 일이옵니까? 정녕 주인님께서.”

“닥쳐라.”

남궁천이 매섭게 노려보았다. 자추가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고 남궁천이 이를 지그시 물더니 말했다.

“네가 가보거라.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해 보거라.”

“존명.”

자추가 곧바로 방안에서 사라졌다.

자추가 놓고 간 쪽지를 다시 살핀 남궁천이 중얼거렸다. 누군가 천지광옥을 통째로 빼앗다니 간덩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 남궁천은 그만 웃고 말았다.

천룡구십구불이 요소요소를 지켰고 덕배선사와 일목이 수시로 순찰을 돌았다. 누구도 동천몽의 명령없이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으며 옥을 거래하는 중상들의 발길은 여전했다. 오히려 남궁세가의 소유일 때보다 옥 일관당 은자 한 닢을 더 계산해 주었으므로 더욱 좋아했고 더 많은 상인들이 마차를 끌고 천지광옥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서류상으로는 완벽했다. 귀신일지라도 가짜라는 것은 알아보지 못한다. 물론 위조 되었다는 심증은 품겠지만 증거가 없는 이상 자신에게 유리했다.

“대법왕님!”

밖으로부터 일목의 음성이 들려왔다.

태우노가 쓰던 침대에 벌렁 누워 있던 동천몽이 말했다.

“들어 오너라.”

일목이 들어와 침대에 활개를 펴고 누워 있는 동천몽을 향해 말했다.

“남궁세가에서 사람이 왔다고 하옵니다.”

동천몽이 웃었다.

이미 올 줄 알고 있었고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이었다.

동천몽이 누워 물었다.

“누구라더냐?”

“곱추라는데?”

“자추란 늙은이가 온 모양이군.”

이미 남궁세가의 인력 편재에 관해서는 훤히 꿰뚫고 있었다. 물론 사불각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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